ᅠ탄생 100주년, 風雲兒 金鍾泌 추억

ᅠ그는 800년의 사나이였다!

그가 박정희와 함께 이끈 5·16 군사혁명에서 다친 사람은 있었지만 죽은 사람은 없었다. 천지개벽의 조국 근대화 과정도 최악의 조건에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단기간에 최대의 업적을 남겼다. 이는 교양인 박정희·김종필 콤비의 따뜻한 마음을 반영한다. 사특한 마음을 갖지 않고 교사적 품성으로 당당하게 국민들을 설득하고 교육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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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JP. 사진=조선DB

 

 

ᅠ김종필이 숨겼던 이야기


ᅠ올해는 92세로 타계한 김종필(金鍾泌)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JP만큼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진 인물을 나는 만난 적이 없다. 40년에 걸친 그의 정치는 늘 권력 핵심부에서 이뤄졌고, 6·25, 5·16, 10·26 같은 현대사의 결정적 장면과 엮이고, 여러 세계 지도자들과 폭넓게 교류함으로써 그의 깊고 넓은 견문(見聞)은 언제나 대화를 끌어갔다. 사적(私的) 모임에서 김영삼은 화제가 빈약했고 김대중은 너무 계산적인 데 반해 김종필의 화제는 풍성했다. 그와 저녁 약속이 잡혀 있으면 그날이 기다려졌다. 충청남도 사람 특유의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가는 극적인 체험, 그리고 그림·음악·문학·스포츠·역사를 넘나드는 교양에서 우러나는 인간의 향기. 일본 정치인들도 한국에 와서 김종필을 만나고 가선 자랑거리로 삼았다.

 

ᅠ자주 만나다 보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듣는 경우도 있었다. 5·16 혁명을 꾸밀 때 찾아갔던 역술인 백운학 씨가 자신의 얼굴을 슬쩍 보더니 “당신 혁명을 꾸미고 있구먼, 그냥 밀어붙여요. 성공합니다”라고 했다는 줄거리인데 나중에 보니 이 대목에서 숨기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ᅠ그가 만년(晩年)에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증언록에 비화가 나온다. 1979년 10월27일 새벽 청와대에서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간밤의 사건을 설명 듣고 <불현듯 18년간 마음 깊이 간직하면서 누구한테도 꺼내지 못한 한마디가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1961년 5·16혁명 뒤 서울 다동 한 음식점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모시고 백운학(白雲鶴)을 만났을 때 이야기였다. 백운학은 박 의장에게 “각하, (정권이) 20년은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라고 했다. 박 의장은 빙그레 웃었다. 백운학은 식사를 마치고 마루 끝에 앉아 신발끈을 매던 김종필에게 슬그머니 다가와 이랬다는 것이다.

 

“차마 본인한테 직접 말씀드릴 수 없었는데…, 각하께서 마지막은 퍽 험하게 돌아가실 명운(命運)입니다.”

 

<'험하게'라는 게 총에 맞는다는 뜻이었다. 백운학의 말이 맞아서는 안 되겠기에 내가 얘기하지 못했고, 안 맞으면 싱거운 사람이 되겠기에 얘기하지 못했던 예언이었다. 그 예언은 18년 뒤 참혹한 현실로 찾아왔다.>

 


ᅠ박정희-김종필 血盟 관계


ᅠ나는 박정희가 최후를 맞은 자리의 생존자 세 사람(김계원, 심수봉, 신재순)을 다 만나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박정희가 가슴 관통상을 입고도 “난 괜찮아”라고 할 때의 상황은? 김계원과 신재순은 일치된 설명을 했다.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피하게”라는 뜻이었다고 했다. 박정희 세대가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이 “난 괜찮아”였다. 난 괜찮으니 너는 밥 많이 먹고 학교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취직하라는 당부였다. 신재순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분은 체념한 듯 해탈한 듯했습니다.”

ᅠ운명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영어의 fate(운명)는 라틴어에서 유래하는데 ‘신(神)에 의하여 이미 선언되어 피할 수 없는 것’이란 뜻이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같은 박정희의 운명이 예정된 것이었다면 그의 동업자 김종필의 운명도 그가 미리 써 둔 묘비명처럼 정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思無邪’를 人生의 道理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다>는 묘비명 첫 문장은 생각이 바름으로 사악함이 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뜻이다. JP에게 비판적인 이들도 그가 거짓말이나 모함을 일삼았다는 험담은 하지 않는다. 권력의 세계에서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같은 절대 권력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 또한 그의 운명이 아닐까? 

 

ᅠ김종필은 흔히 ‘대통령 말고는 다 해본 사람’ ‘대통령은 못 되었지만 대통령보다 더 큰 일을 한 사람’으로 불린다. 시간이 흘러 역사적 평가의 잣대를 들이댈 때는 지금보다 훨씬 큰 인물로 자리매김 될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넘어 민족사적 관점에서 평가할 인물이기에. 

 

*위대한 콤비: 박정희(朴正熙)+김종필 콤비는 삼국통일의 주역 김춘추(金春秋. 태종무열왕)+김유신(金庾信)에 비견되는 역사적 업적을 남겼다. 김유신의 여동생(문희)은 김춘추와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난 딸은 김유신의 부인(智炤)이 되었다. 박정희의 큰형 딸이 김종필의 부인이었다. 김종필은 이런 관계를 혈맹(血盟)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동시에 김종필에게 활동의 한계이기도 했다. 그는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박정희의 견제를 많이 받았지만 결국은 순응, 이집트의 나기브를 몰아낸 나세르의 역할을 포기하였다. 조국 근대화라는 대업(大業)의 성공은 두 사람의 특수한 인간관계가 만든 안정적 리더십이 있어 가능하였다. 신라왕족 김춘추와 가야왕족 김유신의 혈연적 결합이 삼국통일이란 대업을 가능하게 한 권력의 안전판이었듯이. 한국사에서 왕이 못된 사람이 왕 이상의 대우를 받은 경우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된 김유신이 유일하다. 김종필은 김유신과 같은 김해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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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월11일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가 CPX 중앙통제단의 브리핑을 받고 있다. 사진=조선DB

 

 

ᅠ800년 만의 첫 군인정권


*800년의 사나이: 김종필이 기획하고 박정희가 지휘한 5·16 쿠데타는, 고려 의종 때 정중부가 주도한 무신란 이후 791년 만에 처음으로 군인이 정권을 잡은 사건이다. 그 뒤 30년간 세 군인 대통령이 국정을 이끌어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 선진국의 문턱을 넘었다. 박정희· 김종필은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근대화 혁명가이자 진정한 계급혁명가이기도 하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주자학적 신분질서를 상공농사(商工農士)로 바꿔 놓는 일에 상당 부분 성공했기 때문이다. 조선조에서 멸시당하던 군인, 이병철·정주영 같은 기업인, 상인, 과학기술자들이 새 역사 창조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군인은 유능하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군인은 무식하다’는 속설을 뒤집었다. 인문적 교양과 군사적 조직력을 결합시켜 20세기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 운영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두 사람은 평생 독서인이고 大문장가였다. 김종필은 자신의 서재를 내게 보여주면서 “내가 잠들 때는 손에 늘 책이 있다”고 했다. 이 두 사람을 배출한 국군은 건국의 초석, 호국의 간성, 근대화의 기관차, 민주화의 울타리 역할을 하였다. 우리 국군은, 이슬람 세계에서 최초의 근대화를 이룬 케말 파샤의 튀르키예 군, 세계의 동네북인 유대인을 용맹무쌍한 국민으로 개조한 이스라엘 군과 함께 높게 평가될 것이다.

 

*교사의 품성: 김종필도 박정희처럼 사범학교를 다니고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다. 교사적 품성의 핵심은 약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즉 인간애(人間愛)이다. 두 사람은 국민들을 그렇게 대하면서 가르쳤다. 

 

*18년간 발포 명령 제로: 두 사람이 권력을 쥐었던 18년간 폭동에 가까운 격렬 시위가 이어졌지만 한 번도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총 맞아 죽은 시위대는 한 명도 없었다는 이야기이다(부마사태 때도 사망자는 없었다). 정치적 암살도 없었다. 김형욱 살해는 김재규 지시, 김대중 납치는 이후락 지시였다. 이는 휴머니즘과 함께 유능함을 증명한다. 설득력이 약한 무능한 독재자가 총을 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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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모처럼 맞은 망중한(忙中閑). 

해변 휴양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상의를 벗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오른쪽)이 왼팔을 들어올려 뭔가를 설명하자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환한 미소로 듣고 있다. 사진=조선DB


 

“5·16은 내 작품”


*열등감 제로: 김종필은 다재다능(多才多能)하여 누구를 만나든 어디를 가든 늘 중심에 있었고, 당당했다. 중국과 일본의 지도자들을 감동시킨 동양적 지성, 로버트 케네디의 오만을 꺾은 오기 등 국제무대에서도 그러했다. 검도, 노래, 악기 다루기, 그림 그리기, 구수한 입담. 그는 이승만(李承晩)처럼, 가난한 나라에서 났지만 열등감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자신만만하되 오만하지 않았다.     

 

*민주적 정치인으로 변신한 혁명가: 그는 박정희 서거 이후엔 선거와 타협을 중시하는 민주적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내각제 하의 총리에 적합한 덕목을 보여주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주도하였던 1988~1989년의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가장 민주적 정치행태를 보였다. JP는 김영삼, 김대중의 약속 파기로 내각제 개헌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시심(詩心)의 이야기꾼: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장면들을 가장 많이 체험한 김종필은 그런 기억을 문학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최고의 스토리텔러였다. 나는 한국 현대사를 ‘가장 위대한 이야기(The Greatest Story Ever Told)’라고 이야기하는데 AI로 영화를 만든다면 해설자로는 김종필을 추천하고 싶다.

 

*5·16의 지적(知的) 소유권자: 그는 800년의 문민(文民) 주도 역사를 뒤엎은 5·16에 대하여 ‘나의 작품’이란 자부심을 풍겼다. 군사혁명을 발상하고 기획하고 성공 뒤에 권력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한 그의 역할은 독보적이었다. 물론 박정희가 혁명군을 지휘하고 김종필을 작전참모로 부린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김종필이 최초 설계자이고 명곡의 작곡가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집권 초기, 박정희가 도전을 받거나 권력의지가 흔들릴 때 김종필은 정보부와 육사 8기생 인맥을 동원,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혁명노선’에서 그가 이탈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역할을 했다. 

 

 

30대 초반의 불꽃


*권력의지의 문제: 흔히 김종필은 김영삼ᄋ김대중보다 권력의지가 약해 대권을 잡지 못했다고 말한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동시대의 어떤 혁명가보다 방법은 온건했다. 그의 권력의지는 1961년부터 2년간 집중적으로 발휘되었다. 혁명가에서 정치가로 변신하는 순간, 그는 민주제도와 박정희라는 제약조건에 묶이게 되었다. 박정희는 김종필을 견제하면서 특히 군부와의 교류를 금지시켰다. 박정희 서거 후 권력의 진공상태가 조성되어 군대의 역할이 결정적이 될 때 김종필은 대권의지를 관철시킬 수단이 없었다. 충청도 지역기반으론 경상도의 김영삼, 전라도의 김대중을 이길 수도 없었다. 그의 소신인 내각제 자체가 대권의지를 허용하지 않는 제도이기도 했다. 그의 권력의지는 30대이던 5·16 후 2년간 상당 부분이 연소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DJP 연합: 김종필이 좌익 출신 김대중과 손잡아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고 그리하여 노무현ᄋ문재인ᄋ이재명 좌파정권의 문을 연 점은 말년의 실수로 기록될 것이다. 김대중으로부터 받아냈던 내각제 개헌을 너무 쉽게 포기한 점도 비판 받아 마땅하다. 김대중은 1997년 대선을 몇 달 앞두고 김종필을, 집으로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김종필은 이 자리에서 내각제 개헌 약속과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의 언약을 받아냈다. 김대중은 임기 중 개헌의 불가능함을 김종필에게 납득시켰고, 박정희 기념관은 당연히 있어야 할 광화문 일대가 아니라 상암동으로 밀어 보이지 않게 했다. 

 

 

ᅠ국무총리로 취직?


1997년 김대중-김종필의 좌우(左右)합작이 이뤄진 데는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부정에 대한 두 사람의 공통된 거부감이 있었다. 둘은 국립박물관으로 쓰이던 옛 중앙청(일제 때는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에 비판적이었다. 1993년 가을 나는 런던 체류를 끝내고 귀국한 김대중을 서교호텔에서 여섯 시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는 중앙청 철거를 일종의 역사파괴라고 비판했지만 기사로 공개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김종필 당시 민자당 대표도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중앙청의 상징성을 지적하면서 반대했는데 김영삼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1995년 초 집권당(민자당)의 최형우 등 강경파가 김종필을 개혁대상으로 지목하는 데 반발, 탈당한 김종필이 자민련을 창당하는 데는 김영삼의 난폭한 역사관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었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된 후 좌파적 역사관으로 한국 현대사를 부정하는 말을 많이 했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30여 만 표 차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98년 김종필은 김대중 대통령 밑에서 국무총리로 취직했다. 그 직후 그를 만났는데 23년 만에 처음으로 총리로 복귀하여 기분이 고양되어 있었다. 상당기간 정권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그가 그 자리를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김종필은 내각제 개헌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김대중의 설득에 너무 쉽게 넘어갔다. 당내 반발로 자민련은 분열하고 총선 참패로 원내 교섭단체 구성도 불가능해져 그의 몰락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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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총리가 1972년 7월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에 답변하는 모습. 사진=연힙뉴스

 

 

ᅠ한국인의 이름을 지킨 사람


ᅠ그럼에도 나는 이 시기의 김종필 총리에게 국가가 고마워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김 총리의 강력한 제동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쓰고 있는 주민증에서 부모가 지어준 한자 본명(本名)이 사라져 국민 모두가 발음부호화 되고 천애고아(天涯孤兒) 신세가 될 뻔했었다. 당시 행정자치부는 주민증을 플라스틱으로 바꾸면서 이름을 한글로만 표기하기로 했다. 이름에 담긴 뜻을 없애버리는, 일종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이었다. 이름은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명사인데 뜻을 없애고 부호화하는 反문명적 정책은 관료적 타성으로 추진되었는데 이를 김 총리가 국무회의에서 막은 것이다. 공무원들이 한자를 병기(倂記)하면 개발중인 전산 프로그램을 바꿔야 하고 돈도 더 든다고 했지만 김 총리는 버럭 화를 내면서 이를 무시하고 고치게 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뒷받침도 있었다. 한글전용으로 한국어 단어의 약 70%가 암호나 소리로 변하여 문해력과 사고력에 심각한 위기가 왔지만 그래도 주민증에 한자 본명이 있음으로 이 흐름을 되돌릴 교두보는 하나 확보한 셈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것은 한글전용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한자와 한글을 혼용하라고 한 것인데 게으른 사람들이 한글창제의 뜻을 배신했다. 한글과 한자 혼용(混用) 시대의 대문장가인 김종필의 역사적 공헌을 알아줄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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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무소속 박태준 의원이 1997년 10월 28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오찬회동을 갖기에 앞서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조선DB

 


'나그네 설움' 열창


ᅠ나는 월간조선 시절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을 수십 번 인터뷰했다. 인터뷰가 짧으면 2시간, 길면 여섯 시간이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다가 보면 자연히 인간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이 700페이지나 되는 잡지의 장점이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좋아했고, 대학교 다닐 때는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반대했던 내가 처음으로 그를 만난 것은 1989년 가을이었다. 신민주공화당 총재이던 그는, MBC의 10·26 사건 10주년 좌담에 나간 내가 박정희 변호를 속 시원하게 잘했다고 회식 자리에 초청한 것이었다. 한식집이었는데 박정희 정부 시절의 요인들이 많이 모였다. 김 총재는 당시 3당 합당을 앞두고 김영삼 총재와 골프 회동을 갖는 등 언론의 집중취재를 받고 있어 활기에 차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밴드를 불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김 총재가 마이크를 잡더니 ‘나그네 설움’을 불렀다. 중저음이 웅장한 63세 대정객(大政客)의 노래는 압도적이었다.

 

ᅠ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을 합쳐 민자당이 되는 데 내각제 개헌약속이 연결고리였으나 김영삼이 이를 깨고 1992년 대선으로 질주할 때 JP는 김영삼 편을 들었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뒤엔 민자당 대표로서 매주 한 번씩 주례회동을 했다. 1995년 초, 민자당의 YS 친위세력이 그를 대표직에서 밀어내려고 하자 탈당, 자민련 창당 작업에 나선다. 공화당, 신민주공화당에 이은 세 번째 창당이었다. 이때 만난 그는 투지만만하였다. 역사관이 다른 대통령 밑에서 눌려 지냈다가 멋대로 보수의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는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김종필 탈당은 2년 뒤 DJP 연합으로 이어져 김영삼이 한사코 막으려 했던 대통령 김대중이 등장한다. 김영삼은 퇴임 후 나에게 “그때 JP 집을 찾아가 말렸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는 토로를 했다. 

 

 

ᅠ역사를 마주한 느낌


1995년 2월12일 오전 10시 서울 신당동 자택 응접실에서 기자 일행을 맞은 JP는 점퍼차림으로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 뒤 10시간, 점심·저녁 식사를 함께 해 가면서 내리 쏟아 낸 그의 말들은 목에서가 아니라 뱃속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열변이었다. 말하기를 즐기는 그는 3당 합당 이후 5년간 그 말을 조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과의 결별 이후 그는 언론자유를 되찾자 직격탄을 거침없이 쏘아댈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신나는 일인 듯 보였다. 종일 인터뷰한 뒤 나는 이런 단상을 남겼다. 

 

<김종필을 대면하면 늘 역사와 마주한 느낌을 받는다. 1961년 5·16쿠데타로 시작된 그의 정치궤적은 한국 현대사의 나이테를 그리면서 한국인들의 삶에 크나큰 자취를 남겼다. 5·16 기획자, 중앙정보부 창설에 의한 정권 보위,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의 결정적 역할, 개발연대(年代)의 집권당 공화당 창당, 유신시대의 실세 총리,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당 합당,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와 결별, 신당 창당 착수. 이런 파란만장의 정치 풍상(風霜)은 30대의 날렵한 미청년(美靑年)을 이제 고희(古稀)를 눈앞에 둔 고목 같은 둔중한 대정객(大政客)으로 그를 변모시켰다. 나이로 치면 老정객인데 老자를 붙일 수 없는 것은 이번 인터뷰에서도 재확인된 그의 절륜(絶倫)한 체력과 정신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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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련 총재 시절인 1997년 9월 8일 JP가 일행들과 함께 이화장을 방문, 

신도환 이대통령 기념사업회장(사진 맨 왼쪽)의 안내로 경내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조선DB

 

 

ᅠ피카소·프랑코 추억


ᅠ김종필 총리는 1999년 여름에 김대중 대통령의 설득을 받아들여 내각제 개헌을 포기한다. 문제는 2000년 4월 총선이었다. 그는 총리직을 박태준에게 물려주고 자민련 총재로 복귀, 선거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 선거 직전에 만난 김종필은 이미 김대중 노선과는 같이 갈 수 없음을 밝힌다. 서울 조선호텔 1층 양식당 나인스게이트의 별실에서 점심 식사를 겸해서 만났는데 몇 명의 국회의원과 후보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ᅠ그는 “기본적으로 바탕이 틀리니까 안 되더만. 나는 철두철미 보수야. 심지어 나는 골프를 쳐도 슬라이스지 훅을 내는 일이 없단 말이야”라고 했다. “총선 이후에도 대통령과는 절대로 공조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확실히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는 “절대 안 할 거요”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데도 저쪽에선 구리니까 아 뭐, 정치적 공조는 남아 있느니 뭐니 그러는데 참 후안무치한 사람들이여, 그런 일이 어디 있어, 그런 소리가. 한마디로 갓뎀밖에 없어, 지금.”

ᅠ김 총재의 말은 방안을 쩡쩡 울렸다. 목소리는 오페라 가수처럼 뱃속에서 우러나오고 있었다. 이날도 JP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 

 

“뒤에 주한미국 대사를 역임한 필립 하비브 대사가 1970년부터 파리의 미국 대사관을 근거지로 삼아 폴란드 주재 중국대사와 비밀회담을 벌인 적이 있어요. 내가 이 무렵 스페인에 가서 프랑코 총통으로부터 명예 아카데미 회원증을 받았는데 돌아가는 길에 파리에 들렀어요. 하비브 대사와 함께 맥심(식당)에 다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보니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머리카락이 하얗고 바싹 마른 노인의 무릎에 앉았다가 내려왔다가 하면서 교태(嬌態)를 부리는데 가관이야. 저게 뭔가 하고 물었더니 하비브가 가만히 쳐다보더니 저 노인이 피카소래. 젊은 여자가 저러는 건 피카소로부터 무슨 그림 사인을 하나 받을까 해서인데 그렇게만 되면 큰돈이 된다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교성(嬌聲)을 질러도 사인 얻는 데는 대부분의 경우 실패한다더군. 피카소의 실물을 그때 봤는데 그 3년 뒤엔가 죽었어요.”

 

 

“일찍 죽어버려야지”


ᅠ스페인 내전을 통하여 집권한 프랑코 총통은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히틀러의 참전 권유를 물리치고 중립, 전범 신세를 면하고, 전후엔 친미노선을 걸어 국체를 보존했다. 김종필은 공산주의 세력을 말살한 프랑코가 월남전을 지휘하던 호지명(胡志明)은 높게 평가하더라고 했다. 내가 “주로 일본책을 통해 독서를 하십니까”라고 했더니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리나라 책은 내용도 별것 없지만 한자가 없으니 읽는 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려요. 요사이 한자를 외국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자는 우리 것이란 말이야. 우리말의 어원(語源)이 거의 다 한자인데 그런데도 외국어라고 하니 도대체가…. 어느 날 한글전용주의자가 찾아와서 나한테 항의를 제기했어요. 저들이 주민증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도록 해두었는데 내가 나서서 한자를 병기하도록 했다고 따지더라고. 

ᅠ이런 게 무슨 학자야. 동양의 같은 문화권을 파괴하고 고립을 자초하자는 게 이게 무슨 학자여. 그런 자가 왜 두루마기를 입고 돌아다니나. 한글로는 우리말의 뜻을 반도 전달하지 못해! 컴퓨터가 발달해 이제는 한자를 써도 불편이 없어요. 우리말을 반신불수로 만들어놓고 말이야. 아이구 일찍 죽어버려야지.”

ᅠ두 시간에 걸친 대화 끝에 그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이번엔 싸울 거요”라고 혼잣말처럼 다짐했다. 

 

ᅠ나는 월간조선 인터뷰 기사 뒤에 이런 감상을 남겼다. 

 

<그의 인생관과 생활철학, 그리고 정치소신은 생활 속에서 우러나오는 일견 평범한 것이고 그것은 우리 역사와 미풍양속에 뿌리박은 흐름이기도 하다. 그는 옛것과 기성세대를 거쳐 이어져 오는 가치를 기초로 해야 진정한 개혁도 가능하다고 믿는 온건론자이다. 어떻게 보면 동양의 역사와 한자문화를 교양의 토양으로 가진 마지막 세대(世代)의 마지막 정치인인 셈이다.>

 

 

ᅠ마지막 인터뷰


2000년 4월 총선에서 자민련은 참패했다. 1996년 총선에서 얻었던 50석은 17석으로 줄어들어 원내교섭단체도 만들지 못했다. 제1당이 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김정일을 만난 김대중의 대북(對北)정책을 세게 비판하면서 JP는 보수세력의 주도권도 놓쳤다. 2002년 대선의 이회창-노무현 대결 구도에서 후보를 내지 못한 자민련은 변수가 되지 못했다. 2004년 총선에선 자민련 의석수가 4석으로 줄고 비례대표 후보 1번 김종필은 낙선, 정계를 은퇴하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인터뷰한 것은 2005년 7월이었다.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만난 만 79세의 노신사는 혈색이 아주 좋았으며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주말에는 집에서 중국 고사집(古事集)을 읽고 있다고 했다. 

 

ᅠ현직을 떠난 홀가분한 입장이어서 그런지 솔직한 술회가 많았다. 그는 국무총리 시절이던 1973년 정보부에 의한 김대중 납치사건 때는 주권침해에 대하여 일본 다나카 총리에게 사과하는 특사로 갔고 이듬해에는 재일교포 출신 문세광이 일본 파출소에서 훔친 권총으로 육영수 여사를 살해한 사건에서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내는 역할을 했다. 김대중 납치 때는 한국이 수사협조를 하지 않았고 문세광 때는 일본 측에서 수사협조를 하지 않은 경우이다. 

 

“문세광 사건 때는 다나카 총리와 아주 친한 NHK 회장 마에다가 중간 역할을 많이 해주었어요. '1895년에 명성황후를 죽인 데 이어 두 번째다. 두 번에 걸쳐 국모(國母)를 시해한 거다'고 추궁했지요. 마에다는 자기가 중재를 해서 결정적인 사죄를 하도록 하겠다며 두 번 왔다 갔다 했어요. 결국 시이나 자민당 부총재가 왔습니다. 박 대통령이 ‘그 진의(眞意)를 내가 산다’고 해서 해결된 겁니다.” 

 

ᅠ박정희는 시이나 특사한테 “일본 청년이 미국에 가서 포드 대통령을 쏘려고 하다가 빗나가서 그의 부인을 죽였다고 할 때 일본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느냐”라는 말까지 했다. 박정희는 1975년부터 ‘조총련 모국방문 행사’로 북한노동당 재일(在日)지부 역할을 하던 이 단체를 분열시키는 복수를 했다. 그는 장쩌민(江澤民)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만났을 때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강택민 사무실에 갔는데 큰 매화 그림이 있었어요. 그 그림에 枯木逢春〔고목봉춘〕이라고 써 있었어요. 그에게 ‘공산주의 하에서 시장경제를 하자는 뜻 아니냐. 저것이 중국의 방향을 제시한 등소평의 생각이냐’고 했더니 ‘여기에 수많은 사람이 왔지만 저걸 해석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그는 굉장히 유쾌한 사람이에요. 말을 몇 마디 할 때마다 영어 단어 한두 개를 꼭 집어넣어요. 원래 30분간 만나기로 했는데 거의 두 시간 정도 얘기했어요.”

 

ᅠ중국에선 원만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모양이라고 했더니, “어디나 그래요. 알고 보면 모자란 듯한 사람들이 지도자가 돼요. 우리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사람들이 돼요”라고 했다.

 

 

“정치는 虛業”


DJP 연합으로 김대중에게 속았다는 항간의 평가에 대하여 그는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걸 도와서 오늘 이런 나라가 되었다? 날 비난하려면 하라지. 본심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걸 탓할 테면 하라지.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고 겪을 과정을 겪는 중이에요. 결과는 역사가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날 속였지. 난 그 사람을 속인 일도 없고. 김대중 씨 밑에서 장관·총리 지낸 사람들이 저녁 먹는다고 해도 난 가지도 않지만 초청도 않더라고.”

ᅠ김종필은 해방 직후엔 “좌경되지 않으면 어디 가서 행세 못 했어.”라고 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한 지도력이 공산화를 막아냈다고 평가했다. 

 

“전쟁을 막아내고, 어려움 속에서도 미국과 방위조약을 맺어서 북한으로부터의 침공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그 다음에 어렵게 생각했던 한일(韓日) 국교정상화를 이룩하고, 그걸 계기로 조국 근대화가 진행되어서 오늘날 경제규모가 세계 11번째 국가가 된 거 아닙니까. 이렇게 되기까지 지도력과 리더십도 중요했지만 결국은 우리 국민들의 힘입니다.”

 

ᅠ그는 선거를 통해 자신을 퇴장시킨 국민들에게 의외로 “대단하다”는 평을 연발했다. 극빈상태에서 24시간 침략위협을 받으면서 이 정도의 민주주의를 이룩했기에 더욱 대단하다고 말했다.

 

“대단한 나라, 대단한 국민들이여. 아까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우리 국민은 당하면 강해지고 당하면 선택하더라’고 했지만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실감합니다. 나는 믿어요. 지금 별짓을 해도 어느 날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못 되는구나’ 할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ᅠ김종필이 가장 미워한 사람은 자신을 부정축재자로 몬 전두환이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이 소급입법으로 12·12 사건 등을 내란으로 규정, 단죄하려고 할 때는 공개적으로 반대했었다. 이날도 그는 “전두환이 나올 이유가 없었지만 나온 다음에는 하긴 잘했어요”라고 자신을 객관화 했다. 

 

“나카소네가 총리가 되더니 돈을 잔뜩 갖다줬어. 40억 달러 경협자금을 갖고 한국이 움직였습니다. ‘한국을 중요시해서 그렇게 했다’는 말을 나카소네(당시 총리)가 합디다. 그가 총리가 된 뒤 가장 먼저 찾아간 게 한국이고, 그 다음이 미국이었다고. 이유는 어떻든 그렇게 해서 잘 갔어.”

ᅠ김종필은 하와이에서 서거한 이승만 대통령을 두 번 만난 적이 있다. 

 

“1962년에 그분의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뵈었지요. ‘나 서울 가’ 그러다가 침대에서 낙상하셔서 두 팔이 다 부러졌어요. 내가 갔을 때 팔을 병원 천장에다 매달고 계셨어요. 사람을 못 알아보시더구먼.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2만 달러를 전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좀 더 해드리고 싶지만 나라가 어려워서 이것만 보낸다. 적지만 보태쓰시라’고 했다고 하니까 프란체스카 여사가 눈물을 막 쏟았어요.”

 

ᅠ내가 “정치는 은퇴했지만, 국민으로 사시면서 앞으로 뭘 하실 겁니까”라고 물었다. 

 

“이대로 사라지는 거지, 앞으로 뭘 하나. 다만 나라가 안 되겠다 하면, 늙은이 몸으로 해야 한다면 주저하지는 않을 거요. 79세지만 아직 젊은 사람에게 지지 않을 패기는 있어요.”

 

ᅠ그러더니 결정적 한 마디를 했다. 

 

“내가 실업인으로 갔으면 돈관이나 모았을 텐데 정치는 허업(虛業)입니다. 실업(實業)은 움직이는 대로 과실을 따니까 실업이지요. 경제하는 사람들을 왜 실업가라고 하냐면 과실을 따먹거든. 정치하는 사람은 이름은 날지 모르지만 속은 텅텅 비었거든. 나도 2~3년 후에는 어떻게 살까 걱정이여.”

ᅠ민족사적 족적을 남긴 그의 입에서 나온 허업(虛業)의 참뜻은 뭘까? 그가 미리 써둔 묘비명이 참고가 될 것이다. 

 

 

일본인을 감동시킨 김종필 연설


김종필은 정계은퇴 직후인 2005년 여름, 한일국교 수교 40주년을 맞아 열린 요미우리 신문 주최 강연회에서 감동적 연설을 했다. 1962년 ‘김종필-오히라 메모’로써 수교 협상의 가장 큰 장애물이던 청구권 액수를 타결한 역사적 인물이 그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직설적으로 토로했던 것이다.

 

ᅠ일본 측 연사이고 평생 친구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도 “40년간 우정을 나누어 온 사이이지만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픈 곳도 있었지만 선의(善意)를 깔고 한 충고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특히 김종필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런 일이 일본의 황거(皇居)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라”고 말했을 때는 청중석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ᅠ이 연설은 그의 정치적 유언장처럼 들리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의 명치유신, 등소평의 중국 개방정책과 함께 아시아의 3대 성공사례로 꼽힐 것입니다. 한일중(韓ᄋ日ᄋ中)의 이 성공적 개혁은 이 세 나라의 지도층이 서구에서 발전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무조건적 수용을 거부하고 동도서기(東道西器), 또는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철학으로써 선진문물을 자기 나라의 토양 속에서 주체적으로 변형(變形)시키고 응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관중(管仲)에서 시작되는 이러한 동양적 실용정치의 사상은 놀라운 합리성과 과학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동아시아의 위대한 정신적 자산인 것입니다.”

 

“이제 양국(兩國)의 전중(戰中) 세대는 거의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습니다. 넘어야 할 고지는 아직 있으나 그곳은 저와 같은 노병(老兵)이 나타날 무대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남은 생애 중에 우리가 졌던 역사의 짐을 다음 세대에는 넘기지 않도록 미력(微力)이나마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ᅠ이 연설문은 중앙일보가 김종필 증언을 연재할 때 전문(全文)을 소개하여 널리 알려졌다. 김종필의 부탁으로 연설문 작성 때 간여한 적이 있다. 그가 최종적으로 교정을 보면서 완성했는데 탁월한 어휘력과 문장력에 감탄했다. 이승만·박정희·김종필·김대중은 국어실력에서도 당대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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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4일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된 김종필 전 국무총리 빈소 모습. 사진=조선DB

 

 

ᅠ墓碑銘


ᅠ그가 박정희와 함께 이끈 5·16 군사혁명에서 다친 사람은 있었지만 죽은 사람은 없었다. 천지개벽의 조국 근대화 과정도 최악의 조건에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단기간에 최대의 업적을 남겼다. 이는 교양인 박정희·김종필 콤비의 따뜻한 마음을 반영한다. 사특한 마음을 갖지 않고 당당하게 국민들을 설득하고 교육한 덕분이다. 두 사람은 교사 군인 혁명가 경영가의 네 얼굴을 가졌는데 근본은 교사였다. 그래서 권력도 타락시킬 수 없는 순수한 영혼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 김종필이 가장 존경한 드골의 묘비명은 이름뿐이지만ᅠJP는 멋을 부렸다. 1926년생인 그는 2018년 6월23일 별세, 27일 화장, 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가족묘원에 3년 전 먼저 떠난 부인(박영옥) 곁 유골함에 안치되었다. 그는 작심하고 묘비명을 한자·한글 혼용으로 새기도록 했다. 



‘思無邪’를

人生의 道理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

‘無恒産而無恒心’을

治國의 根本으로 삼아

國利民福과 國泰民安을 具現하기

위하여 獻身盡力 하였거늘

晩年에 이르러ᅠ

‘年九十而知 八十九非’라고 嘆하며ᅠ

數多한 물음에는ᅠ

‘笑而不答’하던 者- 

內助의 德을 베풀어준 永世伴侶와ᅠ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ᅠ


銘 雲庭 自僎ᅠ

書 靑菴 高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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