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내의 美 CIA - 韓國現代史의 뒤안길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歷代 지부장 12명의 이력서
한국 현대사의 뒷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미국CIA 한국지부는 대사관5층에 있다. [대사특별보좌관]이란 직명을 가진 역대 지부장들은 4ㆍ19, 5ㆍ16, 유신선포, 金大中납치, 10ㆍ26의 격변기에 어떻게 행동했던가, CIA캐이시 부장과 그리릴 극동국장의 극비방한은 무슨 의미를 지녔는가. 이 글은 미CIA의 한국 내 활동36년을 추적한 최초의 보고서다.
<1986년 2월 월간조선>
CIA를 다루는데 있어서...
대한민국에서 이뤄지고 있는 미국 중앙정보부(Central Intelligence Agency : CIA)의 활동을 보도함에 있어서, 지난 70년대에 미국언론과 의회가 미국 안에서 활동한 한국 중앙정보부를 까발린 식으로 할 생각은 없다. 미국사람들은 망명한 전직 중앙정보부장, 뉴욕분실장, 워싱턴책임자들을 청문회에 불러내 거의 자학적으로 국가정보기관의 내막을 폭로하도록 유도했다.
우리 정보기관원의 신원은 물론이고 대미(對美)공작계획서 같은 기밀문서, 미국 국회의원들이 한국의 대통령과 중정부장에게 보낸 사신(私信)까지도 노출시켰다. 그런 식으로 미 CIA의 한국 내 공작을 폭로할 생각은 없다는 말이다. 미CIA나 미군정보기관의 활동에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두 번이나 우리 나라의 대통령을 암살하거나, 쿠데타로 뒤엎으려는 모의에 관계했다. 한국 수사기관에 쫓기고 있는 한국인들을 몇 차례 외국으로 탈출시켜 주었고 그들의 치외법권적 시설을 반정부 모의에 제공하기도 했으며, 대통령집무실을 도청했다. 우리 정보기관이 미국에서 활동한 것에 비교하면 질이나 규모에서 상대가 안 되는 일을 하고도 여짹沮?한번도 본격적인 취재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던 미국CIA 한국지부를 알리는 데 있어서, 미국의 언론이나 의회보다는 훨씬 자제할 생각이다. 특히, CIA 종사자들의 인명을 밝히는 데 있어서는,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노출시킴으로써, 이미 보호할 가치가 없어진 범위 안에서만 할 것이다. 보고들은 것을 다 쓰지는 않을 것이다. 미 CIA 한국지부는 그래도 한국인을 위해서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을 더 많이 한다고 믿고싶기 때문이다.
테니스 2관왕이 12대 지부장
지난해 11월초 서울 장충 테니스 코트에서는 전한국 테니스선수권대회가 10일간 열렸다. 45세 이상의 선수들이 참여한 장년부의 개인 및 복식에서 모두 우승, 2관왕이 된 사람은 제임스 E딜래니(James E Delaney)란 56세의 미국인이었다. 6척 장신에 반백의 머리카락, 벗겨진 머리, 불그스레한 얼굴, 안경을 낀 이 사람은 한국 테니스인들에겐 널리 알려져 있다. 테니스 선수단의 미국 방문 때는 비자문제를 척척 해결해주고, 미국에서 연습을 잘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봐 주기도 한다. 마음씨 좋은 촌 늙은이처럼 생긴 그는 태국과 일본에서 일한 적이 있고, 일본어도 꽤 한다. 용산의 미 8군내 사우드 포스트 관사에 살고 있다. 그는 도요다 크라운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
[외교 01-004]란 차번호는 그가 주한 미 대사관에서 서열이 대사, 부대사, 문화원장에 이어 네 번째란 표시다. 그의 사교범위는 넓다. 골프장과 테니스장에서 그와 어울리는 한국인들 가운데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많다. 조찬, 만찬, 오찬, 파티 등등의 자리를 빌어 그는 여권과 야권의 인사들을 두루 만난다. 한국에 와 있는 미국인들 사회에서도 그는 약방의 감초처럼 중요한 자리엔 꼭 낀다.
지난해 5월25일 아침엔, 미국 문화원을 점거중인 학생들을 만나러 현장에 나타났다가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는 6ㆍ25때 육군 장교로 참전한 바 있어 지난 83년8월 한국에 부임하기 전에도 우리 나라 실정에 어둡지 않았다. 그의 사무실은 미국대사관 8층, 워커 대사의 바로 옆방이다. 그의 대외적 직함은 대사특별보좌관(Special Assistant to Ambassador)이다. SAA로 약칭되는 딜래니씨는 그러나 파티에서 만난 한국인에게 서슴없이 말한다고 한다. [나는 CIA에서 왔습니다.](I came from CIA).
그는 미국 CIA 한국지부의 제12대 지부장이다. 역대 지부장들은 CIA의 관례에 따라 모두 대사특별보좌관이란 직명을 갖고 있었다. 딜래니씨의 옆방엔 또 한 사람의 특별보좌관이 있다. 애드거 E 플레이어씨. 그는 CIA 한국지부의 부지부장, 즉 제2인자다. 플레이어씨는 한국지부의 36년 역사에서 처음 보는 흑인이다. 아내도 흑인. CIA의 간부진엔 미국 정부의 어떤 부서보다도 유색인종이 적기로 유명하다. 인맥의 주류는 미국 동부지역의 명문대학 출신 백인이다. 플레이어씨의 한국 내 교제범위는 좁다는 평이다.
RU로 불리는 본부엔 20명 근무
미 대사관의 7층은 무전실이다. 한때 청와대를 도청하는 곳이란 의심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미국대사관에서 가장 보안이 엄중한 곳이다. 지정된 사람만 출입할 수 있다. 암호로 본국과 교신하는 장소이니까, 24시간 계속 근무한다. 5층엔 RU(Research Unit)란 부서가 있다. 84년5월에 발행된 미 대사관의 전화번호부에는, 조사부란 뜻의 이 RU에 근무하는 미국인의 이름이 실려있다. 딜래니, 플레이어씨 이외에 김 진악, 필립 선우, 제임스 D 쉘던, 브리짓드 모로우, 캐더린 다이아먼드씨 등 모두 일곱 명이다. 김 진악, 필립 선우씨는 미국국적을 가진 50대의 한국인이다.
필립 선우씨의 경우, 평양이 고향인데, 어릴 때 중국에서 생활하다가 해방 직후 미국에 건너갔다. 미국여인과 결혼했고 3년 전 서울에 왔다. 쉘던씨는 6ㆍ25에 참전한 장교출신으로서 RU부서의 책임자, 즉 한국지부의 제3인자였다. 최근 정년으로 은퇴 귀국했다. 쉘던씨는 지난 83년10월의 버마 아웅산 폭파 사건 때 경호협조임무를 띠고 현장에 파견 나가 있었다. 참사가 나자 중상을 당한 李基百 대장을 필리핀으로 긴급 후송, 목숨을 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RU부서는 물론 CIA 서울지부의 본부다. 미국인과 한국인 운전기사, 사무원까지 합치면 20명 안팎의 이원이다. 미군 정보기관이나 CIA정보원이 보내는 갖가지 보고서를 모아서 정리, 분석하는 내근부서의 구실을 맡고 있다. CIA 한국지부의 조직 가운데 공개된 부분인 셈이다. CIA 서울지부의 정규직원이 몇 명이냐 하는 데는 여러 설이 있다. 대체로 40∼50명 선이란 얘기가 지배적이다. 비상시엔 1백명 선으로 늘어난다고 한다(사이공 지부는 3백명이었다).
RU이외의 부서에서 이들 직원이 어떤 신분으로 활동하는가 하는 것은 월남 등 외국에서 드러난 CIA의 활동상으로 미뤄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미국회사의 상사원, 평화봉사단의 단원, 미국 문화원의 직원으로 박혀 일하거나 대사관의 정치과, 무관실, 미군 기관 등에 파견돼 있기도 한다.
캐이시 CIA부장의 비밀방한
딜래니씨 등 정보요원들의 행동은 늘 지상과 지하로 구분돼 있다. 지상의 양지에서 바라다 보이는 그들은 한결같이 세련되고 교양이 풍부한, 매력적인 신사들이다. 그러나, 일단 무대 뒤로 돌아서면 그들은 음모자가 될 수 있고, 살인자나 절도로 변하기도 한다. 한 정권이나 나라의 악역을 떠맡는 그들은 [익명(匿名)에의 정열](Passion for Anonymity)을 직업상의 명예로 삼는다. 화려한 주인공 역은 정치인에게 돌리고, 추한 역을 자청하는 그들에겐 독특한 논리와 윤리기준이 있을 것이다.
딜래니 지부장은 전임자들에 비해 편한 근무를 하고 있다. 부임하자마자 아웅산 사건이 있었지만, 그것은 미국과 크게 관련된 일이 아니었다. KAL007사건은 한국지부의 수준에서 신경을 쓰기에는 너무 큰 일이었다. 2 12총선 이후 그는 학생들의 잇단 반미데모와 미국문화원 점거사태로 조금 바빠졌다. 야당과 재야권 인사와 접촉이 빈번해졌다. 그는 정부, 여당 인사와의 접촉은 공개적으로 하지만 야권 인사와의 면담은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하려고 한다. CIA직원들은 재야나 야당 인사를 만날 땐 관용차를 쓰지 않고 개인차를 직접 운전한다고 한다. 최근 그는 신민당 비주류의 거물 李모 의원과 비밀리에 만났다.
딜래니씨의 재임기간 중 윌리엄 케이시 미 CIA부장이 두 차례 한국을 다녀간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84년 여름과 85년 봄, 두 번 전용기편으로 오산을 통해 서울에 온 케이시 부장은 盧信永총리 등 정부 고관들도 만나고 갔었다. 딜래니씨보다 더 편하게 있었던 사람은 81년1월∼83년6월 사이에 재임했던 11대 지부장 로버트 케네디씨였다. 올해 58세인 그는 70년대에 부지부장으로 서울에서 근무했던 사람이다. 영화배우 클라크 케이블을 닮은 미남자였다. 한미관계나 국내정세가 무난했던 시기에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떠난 그는 李奎浩 당시 문교부장관과 각별히 친밀했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설명이 잘 안 되는 사건은 미국CIA를 끌어들임으로써 해답을 구해보려는 심리가 생겼다. 4 19를 CIA가 조종했다, 金載圭가 CIA에게 이용당했다, 심지어 5 16도 CIA의 양해하에 일어난 쿠데타라는 식의 루머를 통해서 CIA는 무소불능의 기관으로 과대포장 되기가 일쑤다. 10 26에 CIA가 개입했다는 루머의 한 근거로 金載圭가 육본 벙커에서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말했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었다.
그러나, 79년10월26일 밤9시30분께 육본 벙커에 도착했던 金致烈 당시 법무장관은 기자에게 정반대의 증언을 했었다. [어떻게 앉다가 보니 金載圭와 마주 앉게 됐습니다. 살기가 등등하고, 초조해 보이더군요. 연신 물을 마셔댑디다. 金載圭는 [기금 각하께서는 유고입니다. 전방경계를 강화하고, 이 사실을 최소한 48시간 국내외에 비밀로 붙여야 합니다. 그리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해야 합니다]고 말했어요. 그는 또 [미국에도 비밀로 해야 한다]고 덧붙였어요. 제가 반박을 했어요. 어떤 이유에서 48시간이나 보안에 붙여야 되느냐고요.
金載圭는 북괴남침 위협 때문이라고 해요. 저는 그런 보안은 불가능하다고 반대했지요. 북괴남침 위협이 있다면 출동준비가 있어야 하고, 미국에 알려야 효과적인 대비책을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지요. 옆에 있던 朴東鎭외무부장관도 [미국에 비밀을 붙이는 것은 한미우호정신에도 어긋난다]고 거들었어요]
10 26직전 관광여행간 지부장
10 26사태 때 CIA한국지부장은 제10대인 로버트 브루스터(Robert Brewster)씨였다. 그때 52세였다. 78년 말에 한국에 온 브루스터씨는 6대지부장인 존 리처드슨씨 밑에서 부지부장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공군장교 출신인 그는 눈이 아주 크고 시원한 인상에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한국에 오기 직전 그는 방광암(췌장암이었다는 설도 있음)수술을 받았었다. 그런 몸으로 격변의 79년을 한국에서 맞게 된 것이다. 10월16일 부산, 10월18일 마산에서 격렬한 시위가 터져 부마사태로 발전했을 때 그는 현장으로 요원들을 보내 정보수집에 분주했다.
그러나 부마사태가 가라않고, 다른 도시로 확산이 되지 않자 그는 10월21일∼24일 사이 경주, 동해안, 설악산 등지로 관광여행을 갔다. 그 급박한 시점에 관광여행을 다녔다는 것이 오히려 오해를 살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가족끼리의 관광이었음은 우리 쪽 정보에서도 확인됐다. 관광에서 돌아온 지 이틀만에 10 26이 나자 그는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27일 아침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와 정보부를 찾아갔으나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는 용산 유엔촌에 있는 전 대통령 경호실장 朴鐘圭씨(당시 공화당 의원) 집을 찾아갔다. 이때 브루스터씨를 목격한 朴씨의 한 측근은 그가 굉장히 초췌한 표정이었다고 했다. 답답할 때 CIA지부장이 찾은 사람이 朴씨였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점이 많다. 그 18년 전 5월16일 아침에 당시의 CIA지부장 피어 드 실버씨는, 브루스터씨와 꼭 같은 암중모색의 상황에서 朴鐘圭소령과 처음으로 우연히 만나, 쿠데타 주체세력과 대화채널을 확보하게 됐었다.
나중에 쓰겠지만 이 만남은 주체세력에 대한 CIA의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됐었다. 그 뒤로 朴鐘圭씨는 역대 CIA지부장들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반미성향이 강한 朴正熙대통령 측근에서 친미적 파이프라인을 갖고 있었던 것이 朴鐘圭씨였다.
우연하게도, 朴鐘圭씨는 10 26 뒤 등장할 군의 신진세력과도 깊은 인간적 유대를 갖고 있었다. 12 12사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 장성들 가운데는 5 16당일과 직후 朴소령 밑에서 朴正熙의장 경호요원으로 일했던 사람들도 많다. 브루스터 지부장이 그런 시기에 朴씨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10 26뒤의 사태 발전에 대비하는 데 큰 보탬이 됐다. 어쨌든 브루스터씨의 10 26전후 행적으로 봐서도 이 시해사건에 미 CIA가 관련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확실해지는 것은, 10 26이 金載圭의 즉흥적 단독범행이었다는 사실이다. 朴정권 시절, 역대 미국CIA한국지부장이 업무상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한국의 중앙정보부장과 국군보안사령관이었다. 특히 중앙정보부장관과는 한 달에 두 세 번은 만났다. CIA지부장은 꼭 한국 측 두 기관장을 찾아가 만난다. 한국과 미국 사이엔 지난 1958년에 군사정보교환 협정이 맺어져 있다. 이 협정에 따라 CIA한국지부와 정보부는 연락관을 통해 정보를 교환해 왔다.
미8군의 한국통 고문들
10 26 뒤 한국군의 동향에 대해선 미8군사령부 산하의 군 정보기관 쪽보다도 CIA측이 더 정확하게 감을 잡았다는 평이다.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 안에는 3군별로 군정보기관이 따로 있다. 이들이 따로 올리는 보고는 국방정보부(Defense Intelligence Agency)에 가서 종합된다. 주한미군 산하에는 또 통신감청을 주 업무로 하는 국가안보국(NSA=National Security Agency)의 부대가 있는 것으로 외국에선 보도된 바 있다. 이들 여러 정보기관의 활동은 CIA지부장에 의해 통합, 조정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협조관계이지 CIA지부장이 미군 정보기관에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대체로 한국군에 대한 정보활동은 미8군 정보부대가, 한국의 정치 경제에 대한 것은 CIA가 맡도록 업무분담이 돼 있다. 미8군도 막강한 정보기능을 갖고 있다. 군사정보수집이란 본연의 기능 이외에도 한국의 정치문제에 대해서도 초연하지만은 않다. 미8군 쪽에는 한국의 군 및 정계에 깊은 인맥의 뿌리를 갖고 있는 한국통이 많았다. 이들은 미8군 부사령관의 국제정치담당 고문이나 미8군 정보부대의 문관 자격으로 일해 왔다.
가장 유명한 한국통은 하우스맨씨였다. 그는 해방직후 미 군정시절에 한국에 왔다. 당시는 대위였다. 대령으로 진급할 때까지도 李承晩대통령은 그를 [캡틴 하우스맨]이라고 불렀다. 그는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고문으로서 한국군의 창설기에 산파역을 맡았다. 초창기 장교들의 양성소였던 군사영어학교나 그 뒤의 육군사관학교 설립에도 관계했다. 정부수립 후 국군창설안을 李承晩대통령에게 브리핑한 것도 하우스맨이었다. 그 브리핑 때 통역을 맡았던 고정훈(高貞勳)씨(전 新社黨총재)에 따르면 하우스맨씨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특별히 강조했었다고 한다.
그의 지도 아래서 배출된 새파란 장교들이 그 뒤 장성이 되고 5 16을 거치면서 이 나라의 권력 핵심에 자리잡게 됐으니, 그의 영향력도 막강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우스맨씨는 줄곧 미군사고문단에서 일하다가 제대한 뒤에는 부사령관 보좌관이 되어 한국의 정치정세에 대한 조언을 하게 됐다. 그는 80년대 초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미8군 부사령관 고문자격으로 국내정치에 관한 자문을 하다가 지금은 하와이에 돌아가 살고 있다고 한다.
로버트 키니씨는 아버지가 한국에서 선교사로 있었던 사람이다.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그는 미군정 때부터 주한미군의 자문역으로서, 나중엔 8군 부사령관 고문으로서 일했다. 한미행정협정 위원회 미군측 간사도 지냈다. 4년 전 은퇴, 하와이에서 한국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지금 부사령관 고문으로 있는 캐롤 핫지스씨는 군사고문단 참모장을 역임했고, 교수경력도 있다. 한미재단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아내는 한국의 수많은 심장병어린이를 미국으로 데려가 무료수술을 시켜주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핫지스 할머니」로 통한다.
미국 CIA나 국무성·국방성에선 이들처럼 어느 나라에 정통한 사람은 퇴직 후에도 촉탁으로 계속 쓰는 관습이 있다. 그들이 가진 지식과 인맥과 정보망을 활용하기 위해서다. 미 CIA월남지부는 월남군 고문단장을 역임한 팀즈 장군이 은퇴하자 특별한 요원으로 고용, 월남군과의 연락관 역할을 하도록 했었다.
10·26전후에 미군의 판단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또 한 사람의 한국통으로는 8군사령부 고문인 스티픈 브레드너씨가 있었다. 1950년대부터 그는 미8군의 정보기관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일해 오고 있다. 일부 한국인은 그를 CIA직원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는 미8군 정보기관과 CIA한국지부 사이를 자주 오가며 연락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농구선수 朴信子씨의 남편인 브레드너씨는 올해 55세. 미국 로드 아일랜드에서 출생, 예일대학과 하바드대학원을 나왔다. 6·25때 한국전에서 싸운 경력도 있다. 그의 석사논문(1963년)은 「1960년의 선거위기에 있어서 학생운동」이다. 4·19때 브레드너씨는 미8군에 있었기 때문에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 논문을 썼다. 4·19에 대해서 외국인이 쓴 가장 뛰어난 논문으로 꼽힌다.
10·26 뒤 감 빨리 잡은 CIA
이런 한국통이 미8군 주변에 있었지만 10·26이후 제5공화국 출범까지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은 미군의 의도보다는 CIA의 노선에 더 가깝게 추진됐음이 확실하다. 5·16뒤에 매그루더 사령관 휘하 주한 미군의 강경정책이 국무성과 CIA의 온건노선에 밀린 것과 흡사한 경과였다. 미군 정보기관에 대한 CIA의 이런 우세는, 정변 이후 권력의 향방에 대한 감을 제대로 잡았고, 한국의 정치질서를 안정시키는 쪽으로, 또 기성사실화하는 쪽으로 현실적인 정책을 건의했기 때문이었다. 10·26에서 12·12까지는 권력의 공백기였다. CIA는 이 중요한 시기에 새로 대두될 세력에 대한 탐색작업을 진행했다. 그런 문제에 대해 브루스터씨는 이미 확실한 채널을 갖고 있었다. 미국본부에서도 한국통을 가동시켰다.
10·26사태 5일 뒤인 10월31일 워싱턴에선 흥미있는 모임이 있었다. 그때 현대건설 대표이사로 있던 장우주(張禹疇)씨(59)·전 국방부관리차관보·예비역 소장)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워싱턴에 와 있었다. 張씨는 주한 미국대사관이나 주한미군 사람들과는 수십년 동안 교분이 두터운 미국통이다. 그는 워싱턴에서 두 CIA본부 간부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1976∼78년 사이 CIA한국지부장이었고 그땐 극동담당국장이던 로버트 그리릴씨(Robert Grealy)와 73∼75년 사이 한국지부장이었고 그땐 국가안보회의에 파견 나가 있던 도널드 그랙씨(Donald Gregg)는 張씨에게 10·26이후의 사태진전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張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3金씨가 거론되고 있지만 집권하기엔 어려울 것이다. 권력이란 것은 집권하기엔 어려울 것이다. 권력이란 것은 집권 의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권능력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한국에선 그런 능력이 군부의 지원 아래서만 나올 수 있다』 張씨는 이어서 정규육사출신 장교집단의 부상(浮上)과 세대교체의 조짐, 그리고 全斗煥장군의 리더쉽에 대해서 설명했다고 한다. 그랙은 全장군의 이름을 메모할 만큼 열심이었다고 한다.
11월1일치 일본 마이니찌 신문은 일본 외무성 소식통을 인용, 「全斗煥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란 좀 성급한 기사를 썼다.
「…이 소식통은 비상계엄령 하의 한국에서는 군부가 치안·국정 전반을 장악하고 鄭昇和계엄사령관·金鍾煥합참의장·全斗煥보안사령관 등 군수뇌가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全사령관에 대해서는
①朴대통령을 사살한 金載圭 전 중앙정보부장이 군부를 끌어들이려 했을 때 보안사령부를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고 평온을 유지하도록 했다는 정보를 갖고 있다
②군의 젊은 엘리트를 배출한 육사11기생의 실력자로서 동기생들이 실전부대의 사단장으로 있다
③사건 수사의 최고책임자로서 군의 질서유지에 있어서 중심인물이라는 점등을 들어 군의 실권은 鄭계엄사령관 등 군의 장로들이 아니라 全사령관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뒤에 정확한 예측으로 판명된 이런 기사에도 불구하고 위컴 사령관측에선 유교적 전통에 입각한 군의 서열질서가 유지될 것으로, 사태를 안이하게 판단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한 미군의 정보 안테나가 한국군의 장로들 쪽으로 편향돼 있어서 군 내부의 새로운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뒤에 받게 된다.
한국내의 美CIA(1)
- 趙甲濟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05-11-18, 0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