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의 김대중 연구(2)

좌익 조직원 시절의 사건들
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金大中 연구②-1

趙甲濟



좌익 조직원 시절의 사건들

청년 金大中이 建準을 거쳐 좌익정당 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이 되고 좌익 청년 행동대 民靑에도 가입,
盟員 교육을 맡았던 시절의 진술과 증언과 쟁점

●『신민당 조직부장으로서 同黨 상임 위원급으로 있던 徐得均(6·25시 서울에서 총살 처형), 權五哲(9·28시 월북), 權庠植(경찰 특채 사찰계 근무), 金鎭剛(6·25시 行不) 등과 같이 1946년 10월1일 폭동사건시까지 각종 회합에 참석, 교양 및 선전 유인물 살포 등 조직확대 사업에 종사하였습니다』(金大中 진술)
●『1946년 6월16일에 민주주의 청년동맹 목포시 위원회 간부 김진강, 서득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民靑 사업의 취지 설명을 듣고 이에 적극 찬동하고 民靑에 가입하여…』(장금성의 조선 노동당 입당 청원서)

<편집자 注> 필자가 지난 3월호에서 소개한 자료는 金大中씨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된 3일 뒤(1980년 5월20일)에 작성한 자필 진술서 중 광복 후 좌우 대결 시대와 6·25 전쟁중에 그가 겪었다고 주장한 내용들이었다. 金大中씨가 22~27세 청년기에 직면했던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는 그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큰 자국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 시기를 연구하는 것은 곧 오늘의 金大中 대통령을 이해하는 길이 된다.
1980년 11월26일 金大中 피고인은 대법원에 상고 이유보충서를 제출했는데 이런 대목이 있다.
<본인은 수사기관에서 세 가지 부문의 자술서, 즉 첫째 해방 이후의 본인의 사상과 정치적 경력, 둘째 1972년 10월 유신 이후부터 1973년 8월의 강제 귀국시까지의 본인의 해외에서의 정치적 활동과 이를 뒷받침하는 소신, 셋째 1979년 10월26일 사태 이후의 정치적 신념과 그에 의한 행동의 이상 3種의 진술서를 작성 제출했습니다. 이 진술서들의 내용은 본인의 숨김 없는 신념과 활동을 그대로 기술한 것임을 본인이 믿는 하느님께 맹세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3種의 진술서를 본인의 상고 이유보충서의 내용으로 그대로 援用해서 이를 받아 주시도록 요청하는 것은 본인의 거짓 없는 주장의 일관성을 입증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믿고 감히 이를 仰請하는 바입니다>
필자는 우선 「해방 이후의 본인의 사상과 정치적 경력」 부분을 검토하고자 한다. 金大中씨가 자필 진술서를 1980년 5월20일, 5월25일에 써내자 관례에 따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나흘 뒤 그 진술서를 토대로 하여 제1회 피의자 신문을 한다. 이 신문 조서 중 일부를 소개한다.

金云式과 張鹵島 사이에서 출생

피의자 신문조서
피의자 金大中. 위의 사람에 대한 내란선동 및 계엄포고위반 피의사건에 관하여 서기 1980년 5월29일 합동수사본부에서 軍 사법경찰관 육군 준위 粱一根은 軍사법경찰관 육군준위 張炳和를 참여하게 하고 피의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문하다.
문: 피의자의 성명 연령 원적 본적 주거 직업 주민등록 번호를 말하시오.
답: 성명은 金大中, 연령은 55歲(1925년 12월3일생), 원적은 전남 신안군 하의면 대리 231, 본적은 서울 마포구 동교동 31-1, 주거는 서울 마포구 동교동 178-1, 직업은 무직, 주민등록 번호는 251203-1047611입니다.
사법경찰관은 피의사건의 요지를 설명하고 신문에 대하여는 형사소송법 제200조 제2항에 의하여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알린 즉 신문에 따라 진술하겠다고 대답하다.
문: 피의자는 형사처분이나 선고유예, 기소유예 등 처분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까?
답: 본인은 1946년 10월1일 舊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으로 활동중 목포경찰서 남교동파출소 습격사건 관련혐의로 목포 경찰서에 입건되어 10여 일간 조사를 받고 훈계방면된 사실이 있고, 1967년과 1971년에 실시된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시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서울지검에 입건되어 1975년 12월13일 서울 형사지법에서 금고 1년, 벌금 5만원의 선고유예처분을 받고 항소하여 현재 서울고등법원에 재판 계속중에 있고, 1976년 3월1일 명동성당에서 민주구국선언사건을 주동하여 긴급 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입건되어 1977년 3월23일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978년 12월27일 형집행 정지로 출소하였고 1980년 2월29일 복권된 사실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는 훈장이나 記章 연금 등을 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답: 본인은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피의자의 출생 성장과정을 말하시오.
답: 저는 1924년 1월7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97에서 당시 농업에 종사하던 亡父 金云式과 亡母 張鹵島(장노도)의 4남 3녀 중 2남으로 출생하여 성장하며 하의국민학교 4년에 재학중이던 1936년경 목포로 全가족이 이주하여 1939년 3월 목포 북교국민학교, 1944년 3월 목포상업학교를 각각 졸업하였습니다.

재산은 3억3000만원

문: 피의자의 학경력을 말하시오.
답: 저의 학력으로는 1939년 3월 목포 북교국민학교 졸업, 1944년 2월 목포상업학교 5년 졸업, 1967년 2월 경희대학교 산업대학원 연구과정 수료, 1969년 2월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 과정(경제정책)을 수료하였으며, 경력사항으로는 1944년 5월 全南汽船(株) 사원, 1947년 2월 목포해운공사 자영, 1950년 10월 목포일보사 사장, 1950년 11월 해상방위대 전남 지구대 副대장, 1951년 3월 목포상선(주) 사장, 1951년 10월 대한해운조합 이사, 1952년 7월 흥국해운(주) 사장, 1955년 4월 동양웅변학원 원장, 대한웅변협회부회장, 1957년 2월 신세계誌 주간, 1960년 10월 민주당 대변인, 1961년 5월 제5代 국회의원 당선, 1963년 7월 민주당 대변인, 1963년 11월 제6代 국회의원 당선, 1964년 1월 국회 재경위원, 1965년 6월 민중당 대변인, 1966년 9월 민중당 정책위원회 의장, 1967년 6월 제7代 국회의원 당선, 1967년 12월 국회 건설위원, 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1971년 4월 제7代 대통령 선거 낙선, 1971년 5월 제8代 국회의원 당선, 1972년 10월 유신으로 의원직 상실, 1974년 12월 민주회복국민회의 고문, 1979년 3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의장으로서 민주회복을 위한 정치활동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 피의자의 가족사항을 말하시오.
답: 저의 가족으로는 처 李姬鎬 57세 YWCA 이사, 2남 金弘業 30세 본인의 비서, 3남 金弘傑 17세 이대부속 2년은 위 주소지에서 동거중이고, 장남 金弘一 33세 민주연합청년동지회장, 子婦 尹惠羅 29세 무직, 손녀 金志榮 4세, 손녀 金貞華 2세 등은 서울 강남구 반포동399-2 한신공영아파트 216동 201호에서 주거하고 있으며, 姉 金梅月 63세, 姉 金安永 57세는 出嫁, 전남 신안군 도초면 이하 미상지에서 농업에 종사중이고 妹 金周永 54세는 출가 전남 신안군 장산면 이하 미상지에서, 弟 金大義 53세는 무직으로 서울 성북구 성북동 번지미상에서 가족과 동거중이고, 弟 金大賢 45세는 본인의 경호원으로 서울 강서구 화곡동 번지 미상에 거주하고 있으며, 저의 처가 가족으로는 처남 李康鎬 66세 무직 서울 필동 주거, 처남 李台鎬 60세 상업 서울 강남구 거주, 처제 李泳鎬 56세 주부 서울 강남구 거주, 처남李商鎬 54세 書畵商 서울 종로 거주, 처남 李哲鎬 52세 약국 서울 영등포 거주, 처남 李聖鎬 47세 여행사 미국 워싱턴州에 있으며 在北 및 해외거주 친족은 없습니다.
문: 피의자의 재산 및 생활 정도는 어떠한가요.
답: 저의 재산으로는 서울 동교동 178-1 대지 153평, 建 45평, 시가 약 1억2000만원(본인 명의), 서울 영등포동 432-95 垈 119평, 가건물 30평 시가 약 1억7000원(처 명의),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잡종지 900평, 시가 약 2700만원(처 명의) 등 부동산 시가 약 3억2000만원과 動産으로 가재도구 시가 약 300만원, 승용차 두 대 시가 약 1000만원, 현금 약 700만원 등 도합 3억3000만원의 재산이 있고 저의 월 고정 수입은 영등포 소재 가건물 임대료 50만원뿐이나 비서·경호원 등 급여와 기타 생활비 등 월 소요액 500여만원은 각계 인사들의 성금으로 충당, 비교적 상류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문: 피의자는 종교를 신봉하고 있는가요?
답: 저는 1956년 7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영세를 받은 이후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으며(영세명 토마스) 현재는 연희성당의 평신도로 매주 성당에 나가고 있습니다.

정규군에 복무한 사실은 없으나…

문: 피의자는 군에 입대 복무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저는 정규군에 입대 복무한 사실은 없으나 1949년 10월경부터 6·25 사변시까지 해군 목포 경비대 문관으로 근무한 사실이 있고, 6·25 사변 후에는 1950년 11월경부터 1951년 10월경까지 해군 경비부 소속 해상방위대 전남지구대 副隊長으로 종사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의 해외 여행사실에 관해 진술하시오.
답: 저는 1965년 10월경 국회 재경위원으로 최초 일본을 시찰 여행한 이래 1966년 4월경 및 1967~1972년 간 매년 1~2회 미국, 구라파, 동남아 등지를 여행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는 특별히 숭배하는 인물이 있는가요.
답: 제가 숭배하는 인물은 임금으로서는 世宗大王, 관록을 먹은 이로서는 李舜臣 장군, 평민으로서는 全琫準 장군이 있습니다.

해상방위대의 성격: 현지 지휘관이 임의로 만든 法外 단체

金大中씨 신문조서에서 말이 나온 김에 金大中씨의 軍 경력과 관련한 또 다른 자료를 소개한다. 金大中씨는 1차 피의자 신문 조서에서 자신이 정규군에 입대한 적은 없지만 해군 경비부 소속 해상방위대 전남지구대 副隊長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법률에 의거한 軍 복무인가 하는 문제가 쟁점이 되어 왔다.
1997년 8월 새정치 국민회의에서 만든 「金大中 總裁 6·25 前後 軍經歷 및 思想關聯事實糾明資料」는 千容宅 의원이 미국 뉴욕에 가서 8월14일 낮에 宋寅明 예비역 해군 준장과 나눈 대화 녹음 내용을 담고 있었다. 宋씨는 1950년 12월부터 2년7개월 동안 해군 목포경비부 사령관으로 근무했었다. 의미 있는 부분을 뽑아보았다.
▲宋寅明: 그 당시에 해상방위대는 물론이고 각 시민단체 애국단체를 조직하여 군에 협조하게끔 했던 것입니다. 당시 목포 해상방위대 대장은 오재균씨로 아는데 金大中 총재께서는 해군이 아니라 목포상선 사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오재균 대장하고 같이 근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千容宅: 金大中 총재를 6·25 때 석연치 않은 활동을 한 것처럼 주장한 분들이 계십니다. 그때 혹시 金大中 총재의 사상문제에 대해서 의심해 보았다든지 미심쩍게 생각했다든지 그런 것 없으십니까.
▲宋寅明: 제가 사령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기간 동안에 있어서는 金大中 총재께서는 뭐 전혀 그런 얘기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고, 또 그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나중에 목포신문 사장까지 수행하셨고.(중략) 그리고 이 조직(해상방위대 지칭. 편집자 注)은 정부 조직법이라든가 또는 국군조직법 또는 병역법에 의거해서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전시下에 현지 사령관의 재량에 의하여 조직되었던 것입니다.
▲千容宅: 저희들 생각으로는 우익진영에 계신 차보륜씨의 사위인 金大中씨, 또 우익진영에 당적을 가지고 활동했던 오재균씨 이런 사람들이 지금 사령관 기억에나 제가 듣기로는 아주 철저한 우익진영에 속했던 사람들이라고 저는 생각이 되는데 맞는 말씀이죠?
▲宋寅明: 예, 그것 뭐 맞습니다.
▲千容宅: 이제 세상에 金大中씨가 마치 6·25 때 무슨 뭐 이상한 활동을 한 것처럼 말한 사람이 있기에 하도 답답해서 물어본 것입니다.
▲宋寅明: 아, 뭐 제가 알기에는 그런 것 없는 걸로 압니다.
▲千容宅: 해상방위대가 宋사령관님 계실 때 해체한 겁니까, 그 후 해체한 겁니까.
▲宋寅明: 내가 이동함으로써 해체돼 버렸어.
▲千容宅: 그때 상황을 잘 모르고들 제1국민역 소집 대상인데 (金大中씨가) 피한 것처럼 비난하는 사람도 있어요.
▲宋寅明: 병역관계다, 이런 거는 직접 제가 담당 부서가 아니라….
▲千容宅: 그때 목포에 계실 때 金大中 총재가 속해 있었던 소위 가족 또는 서클 이런 사람들은 철저한 우익진영 사람들로서 사령관님이랑 잘 지내신 것 같은데, 그런 가족 배경이나 여러 가지 봤을 때 金大中 총재가 6·25 전쟁 후에 혹시라도 뭐 좌익활동을 했다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상황 같은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宋寅明: 제가 봐서는 金大中 총재 자신도 軍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했던 것으로 알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다고 봅니다.

법원의 판단

이상의 대화에서 宋寅明씨는 金大中씨가 副隊長으로 근무했던 해상방위대가 법적 근거가 있는 단체가 아니라 현지 사령관인 자신이 임의로 만든 것이며 轉補될 때 없어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임의단체에서 근무한 것이 병역법상의 복무에 준한다는 말도 해주지 않았다. 金大中씨가 국군 정규 부대에서 복무한 적이 없음은 명백하다.
金大中씨는 1980년 5월20일자 자필 진술서에서 「해군 목포 경비부는 상부의 지시에 의하여 해상방위대 전남지구 본부를 만들게 되고 공비 토벌, 군경수송, 수복 도서의 경비, 정보 연락 등 軍의 보조 부대 역할을 하였음. 본인도 직접 승선하여 출동 지휘하였는데 이 해상방위대는 육군방위군 사건이 나지 않았다면 해상방위군이 되었을 것이며 본인은 해군방위 소령에 임명될 것으로 통고받은 바 있음」이라고 썼다.
千容宅 의원도 宋寅明씨에게 국민 방위군 사건 때문에 해상방위대도 같이 해체했지 않느냐고 물었으나 그의 대답은 그것 때문에 해체한 것은 아니고 『제가 이제 임무 수행이 완료되고 자동으로 해체돼 버렸어』였다. 즉, 宋寅明 사령관 임의에 의하여 조직되고 그렇게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서울지방법원 재판부(재판장 최세모)는 1998년 11월26일 명예훼손으로 金大中 대통령 측으로부터 고소된 손창식씨에 대해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유죄를 선고하면서 판결문에 유죄의 한 이유를 이렇게 썼다.
<金大中은 6·25 당시 전남지구 해상방위대 副대장으로 활동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역기피자, 金大中 대통령 후보 자격 없다」는 제하로 제6면에 「金大中과 국민회의의 간교한 작전은 주효했다. 그러나 이는 국민들의 눈과 귀를 다시 한번 속인 파렴치한 권모술수였다. 사실 병역에 관해서 金大中은 할 말이 없다. 그가 병역필증(제대증)도 없는 병역을 기피한 병역 미필자라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하략)」는 허위내용 내지 비방 내용의 글을 게재하고(하략)>
재판부는 金大中씨가 해상방위대에 근무한 경력을 인정하여, 그러한 그를 병역 기피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명예훼손이 된다고 판시한 것이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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