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金大中 연구②-2
趙甲濟
白南雲의 신민당에 가입
다시 1차 피의자 신문(1980년 5월29일자)으로 돌아간다.
문: 피의자의 정당 사회단체 가입 관계를 말하시오.
답: 저는 8·15 해방 직후부터 정당 및 사회단체에 가입 활동하고 있는 바 1945년 8월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 선전부원, 1945년 8월 목포청년동맹 평맹원, 1945년 10월 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 1946년 6월 민주청년동맹 목포지부 가입, 1947년 7월 한국민주당 입당 목포시 지부 운영위원, 1949년 2월 보도연맹 목포시 지부 운영위원, 1950년 3월 대한청년단 입단 목포 해상단 부단장, 1957년 8월 민주당 중앙당 입당, 중앙상무위원 노농부 차장, 1959년 7월 민주당 강원도당 부위원장, 1960년 10월 민주당 기획위원 겸 대변인, 1963년 7월 민주당 대변인, 1965년 6월 민중당 대변인, 1966년 8월 민중당 정책심의위 의장, 1967년 2월 신민당 운영위원 겸 대변인, 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1973년 7월 在美 韓民統 의장(명예), 1973년 8월 在日 韓民統 의장, 1974년 12월 민주회복 국민회의 고문, 1979년 3월 국민연합 공동의장으로 취임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 피의자가 위에서 진술한 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한 동기와 同 단체에서 활동한 사실을 말하시오.
답: 당시 저는 전남 기선회사의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1945년 8월19일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시 지부가 목사 李南奎에 의해 설립되었고, 8·15 해방 전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한 바 있던 저의 이웃집(목포시 복만동 9번지) 거주 林永春(당시 35세 가량)이 建準의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저에게 가입을 권유하여 해방된 나라를 위해 일해 보겠다는 마음에서 가입하였으며, 林永春의 지시에 따라 중앙에서 시달되는 홍보용 삐라 등 유인물 撤布와 치안활동에 종사하던 중 1945년 9월 하순경 좌익계 인물 등에 의해 建準이 인민위원회로 개칭되었고, 1945년 9월 말 경 미군이 進駐하자 인민위원회는 자동 해체되었습니다.
문: 피의자의 신민당 입당 경위와 활동 사항을 말하시오.
답: 1945년 10월 목포시 보광동에 白南雲이 창당한 신민당의 목포시당을 친일파 徐基華의 장인인 李彩鉉이 결성하고 같이 일할 것을 권유,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서 同黨 상임 위원급으로 있던 徐得均(6·25시 서울에서 총살 처형), 權五哲(9·28시 월북), 權庠植(경찰특채사찰계 근무), 金鎭剛(6·25시 行不) 등과 같이 1946년 10월1일 폭동사건시까지 각종 회합에 참석, 교양 및 선전 유인물 살포 등 조직확대 사업에 종사하였습니다.
문: 피의자는 민주청년동맹(民靑)에 가입활동한 사실이 있습니까.
답: 1946년 6월경 民靑 목포시지부에 가입한 사실은 있으나 당시 저는 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직에 있었기 때문에 民靑에서는 별로 활동한 사실이 없습니다.
문: 민주청년동맹은 어떤 성격의 단체이었던가요.
답: 民靑은 당시 좌익 정당이던 공산당과 인민당·신민당의 행동대원들이 모인 단체로 10·1 폭동 사건을 주도하는 등 좌익계 극렬 단체입니다.
문: 1950년 9월7일 당시 목포시 서산동 4번지 거주 張금성의 조선 노동당 전라남도 목포시당 위원장 앞 당원등록청원서 기록에 의하면 피의자가 民靑 목포시 지부 부위원장으로 民靑사업 취지 및 국내외 정세 등을 敎養한 사실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답: 민청의 부위원장 등 간부직에 종사한 사실은 없으나 당시 저는 신민당의 조직부장으로 국내외 정세 등 많은 교양을 한 바 있으므로, 民靑의 모임에서도 교양을 한 일이 있는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장금성이란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인물입니다.
장금성의 조선 노동당 당원 등록 청원서에 등장한 金大中
다시 자료를 보충한다. 위에서 등장하는 장금성이란 인물이 남긴 글이 있다. 육군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서 金大中씨를 기소하면서 법원에 제출한 증거자료에는 장금성이란 사람의 조선노동당 당원 등록 청원서 사본이 있었던 것이다.
장금성은 民靑을 거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가 조선공산당이 신민당(당수 白南雲), 인민당(당수 呂運亨)의 일부 세력과 합당, 남조선 노동당(당수 朴憲永)을 만들 때 따라갔던 사람이다. 그는 지하 활동을 하다가 6·25 직전에 전향한 좌익들을 敎導하기 위해 조직된 保導연맹에 가입했었다.
그는 6·25 남침으로 인민군이 목포에 진주하자 1950년 9월7일에 다시 조선 노동당 전라남도 목포시당 위원장 앞으로 당원 등록 청원서를 낸 것이다.
우리 경찰이 이 서류를 압수,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문서에 金大中씨의 이름이 등장한다. 청원서의 요지를 소개한다.
<성명: 장금성, 지하당 시절 별명: 장세철
생년월일: 1925년 7월1일(26세)
입당년월일: 서기 1946년 10월15일
입당당시 직책: 조선공산당 목포시 북지구 제22야 세포 당원
현재: 전라남도 목포시 제22동 노동당 부책임자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아 그달 19일 목포시 건국준비위원회 청년대에 입대, 9월20일경에 목포시 창평정 적색 로동조합 보안대 남부에 가입하여 치안확보에 노력하였으며, 1946년 6월16일에 민주주의 청년동맹 목포시 위원회 간부 김진강, 서득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民靑 사업의 취지 설명을 듣고 이에 적극 찬동하고 民靑에 가입하여 1946년 20일에 민청 제22동 분회를 목포시 서산동 김판섭 동무 집에서 결성하는 데 참가하였고 맹원 획득에 주력하였음. 매주 3회씩 목포시 금화동 윤양신 동무 집에 강습 장소를 정하고 민청 목포시 위원회 위원장 송제경, 부위원장 김창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교양을 받았으며 분회장 김판섭 동무의 지시에 의하여 1946년 9월23일 총파업 직전에 모든 선전투쟁에 참가하였음.
1946년 10월15일 목포시 서산동 김판섭 동무에게서 입당선언을 받았으며 추천동무도 정철, 김판섭 동무이었음. 입당 직후부터 세포위원장 정철 동무의 지시에 의하여 1946년 10월31일 인민항쟁 준비투쟁으로 민청 제22동 분회장으로 임명받으면서 10월31일 오전 7시 정각에 집합장소 목포시 금화동 조선회사 앞으로 나갔으나 아무도 집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위행진에 실패하였으며 당일 시내 각처에서 악질 경관 살해, 경찰파출소 습격 시위 등으로 목포시 전체가 혼란소동하여 경찰은 물론 우익청년단체 총동원 등 일제 검속 비상경비가 실시되어 조직이 분산되고 사업을 중지하고 있었음. 11월 말일경부터 민청 조직을 수습하여 분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세포원으로서 당 지시에 의하여 집회, 당비납부, 삐라, 전단, 벽보 등 투쟁에 참가하였으며, 1946년 12월에 남로당으로 발족하였음.
1947년 10월15일까지 투쟁하다가 악질 경관 모종남에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948년 2월19일에는 대한청년단 악질간부들과 사찰계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살인적 고문을 당하였음. 벌금을 물고 석방된 이후 1948년 10월에는 미군철퇴 진정서에 날인하고 소련군 철퇴 감사선물을 만드는 사업에 참여하였음.
서기 1949년 1월 목포시 대한청년단 남지단부에 신변보장을 하기 위하여 가입하였으나 身病으로 진단서 첨부하여 휴가원을 제출하고 출근치 않았음. (중략) 1950년 4월 중순에 보도연맹 목포시 간부인 김진강 동무의 권고로 가입하지 않으면 체포될 수가 있다 하기에 부득이 가입하였음. 1950년 6월26일 보련(보도연맹) 총소집으로 구금당하였다가 6월27일 오후 1시경에 석방되었으며, 1950년 7월4일 보련 소집으로 왔으나 신병으로 그대로 돌아왔다가 1950년 7월12일 해군 방첩대에 체포되어 목포 경찰서로 인치, 유치당했다가 7월23일 오후 2시경 무조건 풀려났음. 1950년 8월7일부터 1950년 8월23일까지 목포시 제22동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다가 8월24일 신병으로 목포시 죽교리에 가서 치료하고 있었음. 이상과 같이 틀림없사옵기에 당원 등록을 청원합니다.
서기 1950년 9월7일
전라남도 목포시 서산동 4번지
청원인 장금성
조선노동당 전라남도 목포시 당위원장 동지 앞
대필 김판섭>
金大中 반론: 민청에서 교양은 했으나 목포시 부위원장은 아니었다
장금성의 자술서 내용과 金大中의 자술서 내용을 비교해 보면 평행선을 달리는 부분이 발견된다. 이 시대 같은 무대(목포시), 같은 좌익 단체에서 활동했던 두 청년의 궤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金大中씨는 합수부에서 軍 검찰로 송치된 후인 1980년 7월17일자 피의자 신문조서에서도 『장금성은 모르는 사람이며, 民靑 목포시지부 부위원장이라는 직위를 가진 적이 전혀 없다. 본인이 부위원장이었다고 그 서류만으로 인정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軍 검찰은 그러나 장금성의 자필 기록을 받아들여 金大中씨에 대한 공소장에서 「신민당(후에 공산당, 인민당과 합쳐 남로당이 됨―편집자 注) 목포시 위원장이며 그 후에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암약하다가 행방불명된 이채현의 권유로 위 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공산계열의 행동전위대원 집단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이라고 적었다.
장금성의 자술서에 따르면 좌익 통일전선 조직인 民靑에는 金大中씨 같은 신민당원이나 장금성 같은 조선 공산당원(뒤에 남로당원)이 섞여 있었고 이들이 동일한 노선의 행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장금성의 글에는 民靑 목포시 위원회 부위원장이던 金大中씨가 신민당 간부로서 조선 공산당원이던 장금성을 설득하여 民靑에 가입시키고 맹원들을 교육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물론 金大中씨는 자신이 「민청의 모임에서 교양을 한 사실」은 인정했으나, 民靑 목포시 부위원장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4편에 계속>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3)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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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1-18, 12: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