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金大中 연구②-3
趙甲濟
경찰서 습격 사건에 연루
1차 피의자 신문 조서(1980년 5월29일)로 돌아간다.
문: 피의자가 위에서 진술한 10·1 폭동사건은 어떤 사건인가요.
답: 10·1 사건은 1946년 10월1일 신민당 공산당 및 民靑 등 좌익 정당 단체와 신민당의 좌익계가 합세하여 목포경찰서 남교동 파출소 등 경찰관서를 습격한 좌익계 폭동사건입니다.
문: 피의자는 10·1 사건시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가요.
답: 당시 저는 8·15 해방 전부터 근무하던 전남기선(주)에 적은 두고 있었으나 별로 일거리가 없어 목포시 상낙동 소재 장인 車寶輪의 인쇄소 일을 돌보아 주고 있던 중이었는데 1946년 9월20일경 해산차 목포시 서산동 소재 親家에 가 있던 亡妻 車蓉秀의 분만이 임박하였다 하여 9월30일 밤 처가에 가서 10월1일 새벽 처가 분만하는 것을 보았으며 10·1 사건은 그날 오후에서야 알았습니다.
문: 피의자는 權庠植이란 사람을 알고 있는가요.
답: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제가 신민당 조직부장으로 있을 때 제 밑에서 조직부장으로 일을 보다가 10·1 폭동사건에 가담 피신하였다가 검거되어 조사를 받은 일이 있고 그 후 전향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 목포경찰서 형사로 특채되어 6·25 사변 이후까지도 경찰관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피의자는 위 權庠植과 張금성의 진술 기억에 의하면 10·1 사건시 신민당 조직부장과 민청의 부위원장으로서 10·1 사건에 가담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이 아닌지요.
답: 제가 民靑의 부위원장이나 간부직에 있었다면 사건에 당연히 가담하였겠고, 또한 가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당시 民靑에 가입은 하였었으나 평맹원이었을 뿐 간부직에 종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동에 가담한 사실은 없습니다.
문: 피의자의 호적부상 1946년 10월1일 출산자는 출생사실이 등재된 바 없는데 어떻게 된것인가요.
답: 당시 출산자는 여자로 이름은 素姬였었는데 2歲時 결핵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죽었는데 출산 직후 호적신고를 못하고 있다가 사망으로 그냥 지나버린 것 같습니다.
문: 그러면 피의자는 10·1 사건 관련혐의로 조사를 받은 사실이 없는가요.
답: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1946년 10월1일 오후 妻家에서 처의 출산을 보고 나오는데 평소 본인과 감정이 극히 나빴던 우익단체인 독립촉성회 목포시지부 청년대장 洪益先 등이 본인을 촉성회 사무실 창고로 끌고가 구타하며 10·1 사건 가담 여부를 추궁하였으나 가담 사실을 계속 부인하자 목포 경찰서 사찰계로 인계, 同署에서 10여 일간 조사를 받고 당시 한국민주당 목포시당 부위원장으로 있던 장인 車寶輪의 신원보증으로 다시는 좌익계 단체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훈방된 사실이 있습니다.
좌익 전향자 先導 단체 보도연맹 운영위원
문: 피의자의 한국민주당 입당 경위와 활동사건을 말하시오.
답: 10·1 사건 후 경찰서에서 좌익단체에 관여치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훈방되자 장인 車寶輪과 당시 同黨 부위원장이던 金炫庠이 입당을 권유하여 입당, 상임위원직에 있었으나 별로 활동한 사실은 없습니다.
문: 피의자는 보도연맹이란 단체를 알고 있으며 同 단체에 가입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보도연맹이란 좌익단체에 가입 활동한 사실이 있는 자들을 가입시켜 선도하던 단체로 경찰서장 등 기관장들이 지도위원이며 위원장만은 우익계 인사이나 기타 맹원들은 좌익단체에 가입 활동한 자들이었던 바, 본인도 좌익단체에 관여했던 사실이 있어 同 연맹의 운영위원으로서 수차에 걸쳐 찬조금을 낸 사실이 있습니다.
문: 당시 목포시 보도연맹에는 어떤 인물들이 관여하였던가요.
답: 지금 기억되는 인물로는 초대 위원장 吳栽均, 2대 위원장 趙壽男, 부위원장 薛俊錫(남로당 목포시당 부위원장) 총무부장 金南喆(남로당원) 등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가 위에서 진술한 2대 위원장 趙壽男의 진술기록에 의하면 피의자가 보도연맹의 총무부 차장직에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본인은 同 연맹의 운영위원직에 있었던 사실은 있으나 총무부 차장직은 맡은 일이 없습니다. 당시 저는 해운회사를 自營하고 있을 때였는데 목포경찰서 사찰과 보도연맹 담당인 林春吉 경사가 저의 사무실에 수시 출입하며 형님, 동생하고 지내는 사이여서 보도연맹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저도 좌익단체에 관여하였던 사실이 있기에 해당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사업과 정치적 포부를 가지고 있는데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면 지장이 있으니 빼달라고 하였더니 『자네는 돈이 많으니 찬조금을 내는 운영위원이나 하라』고 하여 운영위원이 되었을 뿐입니다.
保導聯盟 약 30만 명
보도연맹을 구상한 것은 당시 사상검사란 말을 들으면서 좌익 수사에 중심이 되어 있던 吳制道, 鮮于宗源 서울 지검 검사였다고 한다.
鮮于宗源 변호사는 『좌익을 수사해 보면 이러다가는 官製 빨갱이들을 많이 만들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종로서에서 풀어 준 좌익을 성동서에서는 건수를 올리기 위하여 또 잡아넣는 식으로 무리한 수사가 많았다.
그래서 좌익 사건에서 검사로부터 불기소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사람들을 주로 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도록 하고 이들을 감시도 하고 선도도 하기로 한 것이다. 1949년 초부터 조직에 시작했는데 그해 가을 출범할 때 전국적으로 20만 명, 나중에는 약 30만 명까지 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보도연맹의 조직은 6·25 남침 때문에 비극적인 사건으로 가버린다.
개성, 서울이 敵 치하에 들어가자 전향했다던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표변하여 군인과 경찰관 가족들을 찾아내 학살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 소식이 후퇴하는 국군·경찰에게 전해지면서 전국의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하여 예방적으로 처리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던 것이다. 수많은 보도연맹 사람들이 국가 생존의 몸부림 과정에서 치여 죽어갔다.
남로당으로 따라가지 않았다
문: 피의자가 관여한 신민당은 10·1사건 후 어떻게 되었던가요.
답: 신민당은 당초 左·右翼 합작 명분으로 창당되었으나 시일이 감에 따라 좌익계가 득세하여 주도권을 잡고 10·1 폭동 사건에도 가담하였는데 당시 군정 포고령에 의해 좌익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공산당의 金영재, 인민당의 薛俊錫, 신민당의 李彩鉉 등이 주동이 되어 남로당 목포시당을 결성, 1946년 11월경부터 지하활동에 들어 갔습니다.
문: 피의자가 남로당에 관여한 사실은 없는가요.
답: 본인은 당초 신민당이 左·右翼 합작을 위한 정당이라고 하여 입당, 조직부장으로 일하였으나 좌익계가 득세하여 좌익 정당이 되었고 저 또한 좌익시되어 10·1 사건 가담 혐의로 경찰에서 조사 후 각서까지 쓰고 나온 터였기 때문에 완전한 지하 불법단체인 남로당에는 가입하지 않고, 해운사업계획 등 사업 착수 준비에 전념하였습니다.
문: 피의자는 좌익계 인물 지원 혐의로 수사 기관에서 조사를 받은 사실이 있습니까.
답: 1949년 2월경 저의 국민학교 친구였던 兪在植의 형 兪 名 미상이 제가 자영하던 동양해운 사무실에 찾아와 서울 가는 여비를 도와 달라고 하여 차비를 준 일이 있는데 약 20일 후 위의 兪 名 미상이 전남 경찰국 사찰과에 남로당 활동 관련 혐의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 본인이 여비를 준 사실이 밝혀져 본인도 남로당 관련 및 자금 제공 혐의로 전남 도경 사찰과 형사에게 체포되어 10여 일간 조사를 받았으나 친구의 형에 대한 단순한 여비 보조라는 사실이 밝혀져 당시 해군목포헌병대장 朴成哲 소위(現 본인의 비서실 차장) 등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된 사실이 있습니다.
문: 당시 피의자가 兪 名 미상에게 준 여비는 얼마 정도나 되었던가요.
답: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확실한 기억은 없으나 서울까지의 기차요금과 食代 정도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 피의자가 처음으로 착수한 사업은 어떤 것이었는가요.
답: 본인은 8·15 해방 전부터 선박회사에 근무하였기 때문에 그 방면에 지식을 갖게 되어 해운업에 뜻을 두고 있다가 1947년 2월경 50t급 선박 1척을 구입하여 목포해운공사라는 社名으로 연안해운업을 시작, 1948년 말경에는 상호를 동양해운으로 고치고 사업을 계속하였는데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6·25 사변 당시에는 70t급 2척 50t급 1척 등 3척의 선박을보유하게 되었고 상당한 돈도 벌었습니다.
문: 피의자의 대한청년단 입단 경위 및 활동사항을 말하시오.
답: 대한청년단 목포시단은 1948년 정부수립 후 창단되었는데 본인은 당시 한민당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가입하지 않고 있었는데 1950년 3월경부터 청년단의 조직을 확대하고… (해독 불명 세 줄) 있었고, 많은 청년들이 선박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해남운수의 전무로 있던 閔丙安과 협의, 해상단을 창설키로 하고 대한청년단 목포해상단을 결단 위 閔丙安이 단장, 본인이 부단장이 되어 해상운동청년들을 규합, 조직확대 사업을 하다가 6·25 사변을 만났습니다.… (해독불명 세 줄) 운수회사를 자영하면서 서울 조선상선회사와 목포지방의 정부 양곡 해상운송 하청계약을 체결하고 양곡운송을 하고 있었는데 1950년 6월15일경 미수된 운임 2000여만 환을 받기 위하여 당시 조선상선 목포출장소장이던 韓道源 20세 가량(現 백범기념 사업회 이사)과 같이 상경, 회사 측과 미수 운임을 계산하던 중 6·25 사변이 발발, 귀향하지 못하고 1950년 7월 중순경까지, 상경 후 투숙중이던 신문로 소재 林여관, 처남 車元軾의 처가인 동양장부제본사 사장 裵仁植 家를 전전하며 활동하다가 돈도 떨어지고 목포 가족들의 생활이 궁금하여 위 韓道源과 같이 귀향키로 하고 1950년 7월 중순경 서울을 출발 도보로 온양, 군산, 함평 경유 1950년 8월10일경 목포에 도착하였습니다.
목포에 도착, 행복동 소재 집에 가보니 亡母 張鹵島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으며 인민군이 수차 잡으러 왔다 갔고 亡妻 車蓉秀는 목포시 죽동 소재 저의 회사 선장 朴東連 家에 피신하여 2남 홍업을 출산하고 숨어 있다고 하여 저도 위 朴東連 家로 피신하여 있다가 1950년 8월12일경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 조사를 받고 제가 6·25 전 민주국민당 상임위원, 해군부대 문관, 대한청년단 해상단 부단장 등으로 활동한 사실이 탄로되어 1950년 8월경까지 內務暑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다가 그 후에는 목포형무소로 옮겨져 9·28 수복으로 탈출할 때까지 형무소 감방에 수용되어 있었습니다.<5편에 계속>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4)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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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1-18, 12: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