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과 투병, 격동기 치른 CIA맨
12·12사태가 났을 때 CIA 한국지부는 10·26때보다, 또 미8군보다도 훨씬 덜 당황했던 것 같다. 따라서 12·12 사태 뒤의 대한(對韓)정책도 서로가 약간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위컴 사령관은 5·16때의 매그루더처럼 권위의 손상을 당한 입장에서 강력하게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12·12사태의 당일 밤 위컴은 8군 영외로 차를 타고 나왔다가 한국 계엄군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안테나가 부러지는 등 혼이 난 개인적 체험도 했으니 감정도 나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브루스터씨는 기정사실화 쪽으로 나갔고, 결국은 CIA노선이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한국의 미국통 인사들이 그리릴, 그랙, 클리블랜드씨(주한 미 대사관의 한국과장)등 CIA와 국무성의 한국인맥을 설득, 한미간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암을 앓고 있었던 브루스터씨는 재임 중 한국 중앙정보부장이 네 번이나 바뀌고, 한국 대통령을 세 명이나 겪는 격동의 시절을 보냈다. 재임중 암이 재발, 일시 귀국하여 2차 수술을 받고 돌아와 다시 근무에 임해야 할만큼 격무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그는 병색을 일체 내보이지 않고서 의연하게 임무를 해내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국 고위층과의 인간적 유대도 더욱 돈독해졌다.
CIA본부의 뜻도 그러했지만, 본인이나 한국정부도 그의 계속 근무를 희망했었다고 한다. 미국 CIA지부장들 가운데는 자기가 주재하는 나라의 정계 실력자와 특별히 깊은 인간관계를 맺어, 주요한 시기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딘디엠과 막사이사이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지하 공작을 지휘한 에드워드 랜스데일, 낫셀 대통령과 너무 친해져 독이 든 담배에 의한 독살명령을 무시한 카이로지부의 마일즈 코플랜드, 태국의 크라이앙사크 장군과 친한 아놀드 같은 사람이 그런 맨 투 맨의 인맥을 가진 CIA맨이었다. CIA에선 브루스터씨를 그런 지부장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브루스터씨는 그러나 80년 말 암이 악화돼 본국으로 후송됐다. 그 얼마 뒤 그는 사망했다.
지부장의 두 유형―공작형, 분석형
CIA본부의 관점에서 한국지부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중요한 거점이다. 공산국과 대치하고 있는 민감한 군사분쟁 지역인데다가,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지정학적으로도 미국 중공 소련 일본이 각축하는 중요한 자리에 놓여 있으며, 국내 정치정세가 격동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중요성을 반영하여 CIA 한국 지부장으로는 대체로 거물들이 왔다. 12명의 역대 지부장 중 한두 명을 빼고는 전부가 50대의 나이에 부임했다. 2차대전중 OSS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20∼30년의 공작경험을 가진, 원숙한 첩보원들이었다.
한국지부장들의 유형은 행동파적인 공작전문가와 냉철한 분석형으로 나눌 수 있다. 70년대 초까지는 대체로 공작베테랑들이 주류였다. 실버나 리차드슨 같은 CIA 안에서는 신화적인 인물들이 대표적인 행동파 지부장들이었다. 70년대 중반 이후엔 분석형 지부장들로 바뀌었다. 그것은 CIA간부들의 세대교체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해 5월 윌리엄 케이시 CIA부장의 한국방문 때, 그를 수행한 사람은 극동 담당국장 로버트 그리릴씨였다. 76∼78년 사이 한국지부장으로 일하다가 필리핀지부장으로 옮겼던 사람이다. 그는 지난해 11월에도 조용하게, 한국을 찾아왔다. 박정수(朴定洙)씨 등 미국통 인사를 비롯, 각계 각층의 중요 인물들을 만나고 돌아갔다. 2·12총선 이후에 격동하는 한국정세를 현장에서 좀더 가깝게 느껴보려는 출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격동하면 전직 CIA지부장들이 홀연히 서울에 나타나는 일들이 가끔 있다.
이들이 어떤 밀명을 받고 오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광여행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릴씨의 재임시절은 한미관계가 가장 불편했던 때였다.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청와대도청설이 연일 매스컴을 탔다. 카터 행정부의 등장과 미군철수문제, 한국의 핵개발에 대한 미국의 신경질적 반응 등 악재(惡材)가 겹쳤다.
특히 미국 언론의 청와대도청설 보도는 한국정부의 분노에 찬 성명을 부르는 등 CIA한국지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서울시청은, 미 대사관이 한국일보 맞은편에 있는 직원관사촌에 건물을 신축하려고 하자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한국지부 직원들은 사석에서 『우리가 청와대 도청을 꼭 하고 싶다면 그런 방법(건물신축에 의한 시설)으로 하겠느냐』고 냉소하기도 했다.
포터대사도 청와대도청 시인
문제의 발단은 1970년 가을 청와대에서 있었던 밀담내용을 미국정부기관이 어떻게 알아냈느냐 하는 점이었다. 이 회담은 朴正熙대통령이 주재했고, 고위 청와대 간부들이 참석했다. 밀담의 주제는 대미(對美)로비활동 채널을 朴東宣씨 아래로 일원화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밀담의 내용은 미국 언론의 보도 이후 미국정부에 의해 미 하원 국제관계 소위원회에 제출됐다. 미국정부는 이 정보의 원천을 밝히지 않았다.
미정부의 자료는 청와대 1차 밀담에서 토의된 로비계획이 2차 밀담에선 보류된 과정도 자세히 담고 있었다. 청와대도청설을, 76년10월15일자 워싱턴 포스트지에 특종으로 보도한 것은 사교란 담당의 맹렬 여기자 맥신 체사이어씨였다. 체사이어 기자는 朴東宣씨에 관한 정보를, 미국 정부가 청와대와 주미 한국대사관 내부에 있는 정보원(源)으로부터 빼냈다고 보도했다. 이 정보원(源)은 첩자, 도청장치, 또는 전파감청 등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체사이어 기자는 취재기에서 이 사실을 전직 국무성 관리에게 확인했다고 썼다. 이 관리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으나 한국 담당관이었음은 인정했다. 국무성 한국과장을 지내고 70년대 초에 퇴직한 도널드 레이나드씨가, 체사이어 기자가 말하는 확인자란 추측도 있었다.
1978년 4월3일 미국 CBS방송은 윌리엄 포터 전 주한미국대사와의 인터뷰를 소개했다. 포터씨는 『미국정부가 청와대에 도청장치를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내가 부임하기 전에 그것(필자 주:도청장치를 의미)이 중단됐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새로 가동시키지 말라는 특별지시를 내렸습니다』 포터대사의 이 실토는 그 전해인 1977년8월10일에 터너 CIA부장이 워싱턴 포스트지 기자에게 했다는 말과 상충되고 있다. 터너는 『청와대에는 녹음테이프나 도청장치가 없었다. 나는 CIA, NSA, 그리고 다른 모든 미국 정보기관을 대표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고 했었다.
도청 전문가였던 실버 지부장
포터대사가 한국에 부임한 것은 67년8월9일이었다. 포터 대사와 터너부장의 말을 『67년 이전엔 도청장치가 있었으나 그때(1970년 가을)는 도청장치가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두 사람의 증언은 상충되지 않게 된다. 적어도 포터대사의 증언을 믿지 믿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67년 이전에 CIA한국지부장으로 부임했던 넬슨, 실버, 나오시스, 에드워드, 라자스키 등 다섯 명에게 도청의 혐의가 돌아가게 된다. 이들 가운데 실버씨는 CIA를 물러난 뒤인 1978년에 회고록을 썼다. 「서브 로자(Sub Rosa)」(라틴어로 비밀이란 뜻)란 이 책에서 그는 여러번 자신의 도청공작을 소개하고 있다. 도청전문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공작기술은 다양하다. 그의 체험담을 소개한다.
사례1 : KGB 지부장 집 도청
1955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지부장으로 있을 때였다. 나는 잘츠부르크의 어느 호텔에 모 중립국의 대표단이 투숙할 예정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이 사절단은 고위 회담을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었다. 사절단이 호텔에 도착하기 며칠 전 나는 첩보조장 부부를 손님으로 위장시켜 사절단이 묵을 특실에 투숙시켰다. 그 부부는 탁자다리에 송신기를 설치했다. 그들의 대화를 수신하여 우리는 그 중립국이 다가올 회담에서 소련에 대하여 철강기술의 지원 등을 요구할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이 정보를 우리는 워싱턴으로 보고했다. 그 중립국에서의 전략계획수립에 적절하게 활용됐다.
사례2 : 공중전화 도청
빈의 소련 대사관 앞에는 공중전화 박스가 있었다. 우리는 전화박스 천장에다가 도청용 송신기를 몰래 붙여놓았다. 우리는 기다렸다. 낯이 익은 KGB요원이 공중전화박스에서 전화를 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스트리아인 첩자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첩자의 사는 곳을 알아냈다. 우리 요원들이 그를 협박하여 우리의 첩자로 만들었다. 그는 KGB에 박힌, 우리를 위한 2중첩자가 된 것이다.
사례3 : KGB 지부장 집 도청
우리와 협력하는 부동산 중개인이 빈의 KGB책임자가 캐나다 외교관이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갈 계획이란 정보를 갖고 왔다. 캐나다 외교관이 집을 비우고 KGB책임자가 이사를 오기까지의 어느 날 밤 나는 요원들을 그 빈집에 들여보냈다. 서재의 창문 쪽에 붙은 장식판자를 뜯어내고 콩알만한 송신기를 붙였다. KGB책임자는 그 서재에서 가끔 작전회의를 열었고, 우리는 죄다 그 내용을 듣게 됐다. 배터리가 소모되어 가동이 중단될 때까지 여덟 달 동안―.
우방국 원수 도청은 관례
실버씨는 지난 59∼62년 7월까지 한국지부장으로 일했다. 그가 경무대(뒤에 청와대)에 도청장치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 확실한 것은, 그가 만약 그런 장치를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빈에서 보다는 아주 쉽게 할 수 있었으리란 점보다는 아주 쉽게 할 수 있었으리란 점이다. 행동의 자유, 접근의 용이함, CIA커넥션의 풍부함 등에서 한국은 CIA가 활동하기에 가장 편한 나라일 것이다(더구나 60∼70년대의 놀라운 전자기술 발전을 생각해 보라). 그런 점에서 우리와 비슷했던 월남의 도청사례를 참고해 본다.
사례1 : 티우집무실 도청
사이공함락 직전 CIA사이공 지부에 분석관으로 근무했던 프랭크 스넵씨는 77년에 「Decent Interval」이란 책을 써 CIA공작을 폭로했다. 그에 따르면 티우 대통령의 집무실뿐 아니라 거실도 도청됐고, 그의 정적이던 민 장군의 집도 도청됐다. 75년4월21일 티우 대통령은 수상과 부통령을 불러 사임의사를 밝혔다. 도청장치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CIA지부장 폴가씨는 『월남정전 이후 최대의 특종을 했다!』고 즐거워했다는 것이다.
사례2 : 도청기술
14년간 CIA간부로 일했던 빅터 마체티씨가 쓴 「CIA와 정보숭배」란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오늘날 CIA 및 기타 정보기관은 출입금지 구역에 도청장치를 하거나 전파도청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경호원이나 수위를 찾고 있다. 다른 나라의 전화전신회사도 CIA의 표적이 되어왔다. 외무성 및 국방성 침투 이외에도 CIA 공작원들은 당사국가의 전신조직에 침투하려 한다. 이 작업은 때로 미국 회사 특히 국제전신전화회사(ITT)의 도움을 받는다. 우편업무도 첩보 목적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CIA 공작원의 대부분은 도청에 관한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도청장치를 하는 것은 CIA 본부나 지부에서 온 기재과 전문요원들이 대부분 맡고 있다.
작업이 복잡하면 할수록 CIA 본부의 전문가들이 더욱 많이 동원된다. 어떤 경우에는 CIA 요원 및 책임자급 까지도 이러한 장비설치 기술에 관해 기재과 전문가의 특별훈련을 받아야 한다. 물론 가청(可聽) 주파장치는 복잡하고 어렵다. 고도로 위험이 수반되는 작업은 광범위하고도 상세한 조사가 끝난 후 엄청난 사전 계획을 필요로 한다.
이를테면 건물 및 바닥에 대한 계획은 1차적으로 눈으로 감식한다. 건물 벽의 구조, 방 내부의 색깔 및 이와 유사한 사실도 신중히 결정되어야 한다. 이 장비가 설치될 건물이나 방 혹은 사무실내의 활동이 관찰, 기록되어 그 지역에 언제 접근할 수 있느냐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의 움직임과 순찰 상황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후에라야 어디에 언제 도청장치를 할 것이냐가 최종 결정된다. 보통 문제의 장소는 밤이나 주말에 침투하며 주의 깊게 사전 계획된 시간에 도청장치가 설치된다. 속력 빠르고 소리나지 않는 고속 착공기로 벽을 뚫고 도청장치를 한 뒤 손상된 부분은 빨리 응고하는 도벽제로 막고 처음과 똑같은 페인트칠을 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 장치는 옆방 혹은 아래 윗방으로부터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천장이나 마루바닥이 있는 경우).
CIA가 도청에 성공한 나라는 보통 국내 안보체제가 해이해서 이 장치를 하는 데 필요한 CIA 활동의 자유를 용인하는 비공산국가에 한정되어 있다. 일부 동맹국에서 CIA는 당사국 정보기관이 설치한 도청장치로부터 얻은 정보를 같이 쓰고 있다. 당사국 정보기관은 CIA로부터 기술적 원조를 받으며 이 과정에서 CIA가 침투할 수도 있다」 FBI는 케네디 대통령의 백악관 전화까지 도청, 케네디 대통령이 마피아 단원의 정부와 정을 통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낸 적도 있다.
에드가 후버 국장이 식사시간에 조용히 이 사실을 대통령께 통보, 관계를 끊도록 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증거로 보아 청와대가 CIA에 의해 도청된 적이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朴대통령도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집무실에서 정원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CIA가 사람에 의한, 또는 외부로부터의 전파발사에 의한, 도청을 했다면 그런 회피 방법은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분쟁지역만 쫓는 8대 지부장
75년 봄에 태국으로부터 부임, 아홉 달만 있다가 다시 태국으로 돌아간 다니엘 C 아놀드 지부장(8대)은 해병대 장교 출신이었다. 행동이 절도가 있고 약간은 딱딱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는 분쟁지역만 찾아다닐 정도의 지하공작전문가였다. 그가 부임했을 땐 한국의 국내정세는 긴급조치 9호의 공포 이후, 비교적 잠잠한 때였다. 그는 『너무 조용하니 아마도 오래 있게 되지 않을 것 같다』고 우스개를 했다. 그의 우스개는 적중했다.
76년에 들어서자 태국의 쿠크리트 수상 내각이 하원에서 불신임을 받았다. 쿠크리트씨는 의회를 해산, 선거전에 들어갔다. CIA는 태국사정에 정통한 아놀드씨를 다시 뱅콕으로 보냈다. 아놀드씨는 그 뒤의 혼란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쿠크리트 수상이 선거에서 참패한 뒤, 좌익계 학생데모가 유혈사태로 치닫자 태국군부는 76년10월6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군부가 추대한 새 수상은 크라이앙사크 차마난드 총사령관이었다. 크라이앙사크의 뒤에는 아놀드씨가 있었다. 두 사람의 깊은 개인적 인연은 태국정치 역학의 중요한 함수로 지적될 정도였다. 아놀드씨와 가깝게 지낸 한국인으로는 백두진(白斗鎭)씨(당시 유정회 의장)가 있다. 白씨는 78년3월에 태국을 방문, 아놀드 지부장과 저녁을 함께했다. 그 자리에서 아놀드씨는 『스나이더 주한 미대사의 후임으로는 글라이스틴씨가 확정적이며 카터 대통령의 철군계획은 결국 좌절되고 말 것이다』고 말했다. 이 두 가지 예언은 1년 뒤에 모두 적중했다.
『金大中씨는 CIA가 살렸다』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金大中씨 납치에 관련했다는) 정보를 얻는 데는 강대국이 관계됩니다. 세계제일의 강대국의 정보가 8일(납치 당일) 저녁 무렵에 들어왔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죠. 미국의 CIA가 한국 중앙정보부에 지령을 한 것이죠. 강대국은 「죽여서는 안 된다」고 지시를 내렸죠. 나는 金씨가 그렇게 해서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작은 배에서 큰 배로 金씨를 옮기기 전에 배에 직접 지령을 내렸던 것이 아닐까요. 계획을 사전에 알고서 바다 속에 던져버릴 우려가 있으므로 그런 지시를 내렸겠죠.
어쨌든 죽이지 말라고 하니 엄청나게 당황했겠죠. 그래서 큰 배가 출항하여서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동안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우스노미야씨가 사건직후에 나를 찾아 왔을 때 나는 「金大中씨는 절대로 살해되지 않습니다. 제게 믿는바가 있습니다」고 안심시켰죠』(73년8월8일 金大中씨 납치사건 당시 일본 법무장관이었던 다나까 이사마씨가 78년 8월에 마이니찌 신문기자에게 털어놓은 이야기)
「당시 미 국무성 한국과정 레이나드씨에 따르면 사건 직후 서울주재 CIA챔임자였던 도널드 그랙씨가 한국중앙정보부에 문의하여 金大中씨 납치는 한국중앙정보부가 했다는 것과 범행을 실행한 정보부 공작원 몇 명의 이름까지 확인, 그랙씨는 그것을 미국에 보고했다고 한다. 사건이 발생한 8월8일 직후부터 2∼3주간 동안 레이나드 한국과장의 책상 위에는 연일 서울과 도오꾜의 미 대사관과 CIA에서 올라오는 방대한 보고서가 싸였다. 특히 CIA는 한국 중앙정보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을 뿐 아니라, 레이나드씨에 의하면 「한국 정보부 내부에 미국 측에의 통보자가 많아 사건의 내용을 그 계획단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상세하게 전달했다」고 한다.
미 CIA의 극비보고서는 사건 후 2∼3주간만에 범행에 가담한 주요인물, 범행방법, 金씨가 도오꾜에서 오오사까까지 연행된 과정, 오오사까 부근에서 金씨가 『안전가옥』에 잠시 감금된 사실, 그곳에서 배까지 운반된 상황 등을 전해 왔다고 한다」(1977년 11월4일치 아사히신문 조간의 레이나드 인터뷰 기사). 「주한, 주일 CIA의 비밀보고에 의하면 한국에서의 공사계약을 둘러싸고 일본의 회사들이 한국측에 뇌물을 제공했다고 레이나드씨는 밝혔다. 이 보고서에는 일본의 대한(對韓)로비스트로서 기시 전 수상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마이니찌 신문 1977년 1월28일치 인터뷰 기사).
李厚洛씨를 밀어낸 그랙 지부장
이상의 인용문에 나오는 CIA보고의 당사자는 金大中씨 납치사건 때 CIA한국 지부장이었던 도널드 P 그랙씨(Donald P Gregg)다. 그랙씨는 미국의 명문 윌리엄스 칼리지를 나온 엘리트다. 지금은 50대 후반의 나이에 부시 부통령의 국제문제 담당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다. 부시씨가 차기 대통령이 되면 제2의 키신저 역할을 맡게 될 것이란 평을 벌써부터 듣고 있다. 그는 75년에 한국에서 본부로 돌아가 백악관의 국가안보위원회(NSC)에 파견됐다가, CIA부장 출신인 부시 부통령에게 발탁된 것이다.
국무성과 CIA에 있는 한국통 실무 관료들의 총수 격으로 뒷무대에서 조용하게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평이다. 그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조지 타운 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하고 있는 학구파다. 역대 CIA한국지부장 가운데서 그랙씨 만큼 좋은 인상을 심고 간 사람도 드물 것이다. 白斗鎭씨는 『부부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대만의 고아를 양자로 기르고 있었다. 친자식보다 더 귀여워했고, 식탁에선 기도를 열심히 해 밥이 식을 정도였다』고 했다. 장우주(張禹疇)씨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파워보다는 머리를 쓰는 타이프였고,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평했다.
李厚洛씨와 CIA의 관계는 그랙씨의 전임자인 리차드슨씨의 재임 후반기에 와서 급속히 냉각하더니 그랙씨의 시절에 와선 파탄되고 만다. 독실한 천주교인의 윤리관을 가지고 있던 그랙씨는 李厚洛씨의 돈 관계를 소상히 알고 있었고, 그를 싫어하게 됐다고 한다. 李씨는 그랙씨에게 金日成을 만난 인상을 이야기하면서, 『상당한 인물』(Quite a Character)이란 표현을 썼는데, 그랙씨는 정보부장으로선 너무 경솔한 이야기란 표정이었다고 한다. 李씨에 대한 그랙씨의 이런 평가는 金大中씨 사건을 계기로 하여 李씨의 실각 쪽으로 작용하게 된다. 레이나드씨의 증언은 金大中씨 사건에 있어서, CIA의 역할에 대한 가장 정확한 증언이다.
사건당시의 국무성 한국과장이었으므로, 신문사에 비유하면 사회부장이었다는 얘기다. 다만 그의 신빙성이 문제다. 레이나드씨가 77년 1월28일자 마이니찌 신문 인터뷰 기사에서 일본회사의 뇌물제공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일본 정부나 기시 전 수상은 근거 없는 중상이라고 일축했었다. 그러나 1년도 못 돼 일본 의회에서 일본의 상사연합이 서울지하철 공사를 맡으면서 공화당 정권에 뇌물을 주었고, 기시 전 수상이 이 공사를 따내는 데 로비스트로 뛰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레이나드씨의 증언과 CIA 한국지부의 보고가 정확했음이 입증됐었다.
레이나드씨의 증언에는 金大中씨 사건 때 CIA 서울지부가 한국정부안의 정보망을 통해 진상을 알아낸 것처럼 되어 있는데, 이런 방법보다는 통신도청에 의한 정보수집이 더 결정적이었다는 설도 있다. 즉, 미국 정보기관이 서울과 납치선 사이를 오가는 무선을 가로채 납치의 진행과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 법무장관이 벌써 납치 당일 저녁에 『金씨가 무사할 것이다』는 CIA정보를 접수했다면, CIA의 개입은 즉각적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순발력은 CIA의 정확한 정보입수와 이에 따른 키신저의 강력한 경고에서 나온 것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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