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SA의 통신도청, 청와대까지?
미국 측의 통신도청 기술에 참고가 될 기사가 78년 5월26일자 워싱턴 스타지의 1면 머리에 실린 적이 있다. 이 기사는 미국의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가안전국(NSA)이 주미 한국대사관과 한국정부 사이의 암호 전신문을 모니터 했다고 전했다. 암호 해독반은 그 전신문을 풀어서 金東祚대사가 미 의회를 상대로 벌인 로비활동의 진상을 낱낱이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전파 도청을 전문으로 하는 이 NSA에 대해선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푸에블로호 납치, EC-121 정찰기 피격, KAL007피격 사건 때마다 NSA란 이름이 등장했다. 그리곤, 곧 비밀의 장막 너머로 사라지곤 했었다. NSA의 주임무는 엘린트(Elint=Electroric Intelligenec), 즉 전자기술을 동원한 첩보활동이다. NSA는 너무나 비밀에 쌓여 있어 NSA에 대해 쓴 책이 NASA, 즉 우주항공국에 대한 책으로 잘못 선전될 정도이고, NSC 즉 국가 안보위원회와 혼동되는 일도 있다.
NSA는 세계 곳곳에서 약 2천 개소의 통신 모니터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워싱턴에서 가까운 메릴랜드주의 포트 미드에 있는 본부에선 매일 40t씨의 극비 자료를 생산한다고 한다. 암호 해독 이외에도, 대용량 컴퓨터로써 상대국의 통신을 분석하여 그 내용을 알아내고, 「트랙킹 어낼리시스」란 방법을 쓰면 국내배치의 변경상황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때 아르헨티나 군의 암호를 해독, 영국에 정보를 제공한 것도 NSA였다. 카터 대통령이 한국 주둔군의 철수계획을 포기한 것도 NSA의 북괴군 배치상황 정보에 의한 결단이었다고 전한다. 1년 예산이 약 1백억 달러나 돼 CIA를 비롯한 다른 정보기관의 예산을 합친 것보다도 많다. KAL 007 사건 때 소련 요격기와 관제소 사이의 대화를 녹음한 것도 북태평양의 미국령 시미아 섬에 있는 NSA기지였다. 일본의 아오모리와 가나까와 지방에 있는 NSA기지도 007 피격상황을 모니터했다.
물론 한국에도 여러 군데에 NSA기지가 있는 것으로 보도됐다. CIA 한국지부장은 NSA의 업무를 지도하는 자리에 있고, 매일 중요한 보고를 받는다고 한다. 金大中납치 사건 때 NSA의 「전자 귀」가 동원됐다고 판단하는 것은 자연스런 추리겠다. 청와대 도청에 관계한 시설은 미 대사관 안테나가 아니고 NSA란 설도 있다.
朴鐘圭 채널을 통한 李厚洛 거세
이후락(李厚洛)부장에 대한 미CIA의 「비토 선언」은 1973년 8월17일자 미국무성의 내부 회람 메모란덤에 나온다. 5년 뒤 프레이저 위원회에 제출된 이 문서는 미국 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한국 교민에 대한 한국정부기관의 활동을 지적하여 FBI에 수사를 의뢰했음을 밝힌 다음 이렇게 못박았다.
「…우리(국무성)는 이 문제로 CIA측과 협의했다. 그들은 李厚洛씨와의 관계에 대해 신중한 검토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내의 불안정을 우려하고 있는 CIA는 금명간 李씨를 겨냥한 조치(action directed against him)를 취할 생각이다」
미 하원 보고서에 따르면 주한 미 대사관은 李厚洛씨에 의한 金大中씨 납치, 반정부 대학생들에 대한 강경 진압, 어느 교수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또 위의 국무성 문서에 적힌 대로, 미국 측(CIA)은 朴鐘圭경호실장을 통해 朴대통령에게, 李부장의 행동에 대한 불만과 그것이 한미 관계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란 점을 전달, 그를 제거시켰다고 했다.
이 보고서는 미국 측의 관점에서만 李厚洛씨의 실각을 해석하고 있는 듯하다. CIA의 압력은 李씨 실각의 한 원인이었을 뿐이다. 7·4성명 이후 李씨의 독주가 朴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尹必鏞씨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대통령으로부터 받았으며, 金씨 납치사건으로 나라를 망신시켰다는 점등으로 해서 대통령의 불신임이 깊어 가고 있을 때 CIA의 제거요청이 왔던 것이다. CIA에선 이처럼 李씨의 기반이 약해지는 시점을 택해서 펀치를 날린 것인지도 모른다.
CIA가 李씨 제거공작을 朴鐘圭씨를 통해서 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李厚洛씨와 미 CIA의 밀착은 잘 알려져 있지만 朴鐘圭씨도 역대 CIA 지부장들과 친밀했었다. 5·16당시의 지부장 실버씨와 10·26당시의 브루스터씨가 다 같이 朴鐘圭씨를 통해 정변의 진상과 주동세력의 성격을 파악하려 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CIA는 朴대통령 측근 2대 권력자와 직통 채널을 갖고 있었다. 그 한 채널을 가동하여 다른 채널(아마도 쓸모가 없게 된)을 제거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CIA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랙 지부장 시절에 李厚洛씨뿐아니라 朴鐘圭씨도 8·15저격사건으로 물러나 CIA의 2대 채널이 끊어져버렸다. 이와 함께 한미간의 불편시대가 시작된다. 정보기관이 하는 역할은 무대 위의 마찰을 막후의 교섭으로 해결하는 일인데, CIA의 고급 채널이 끊어짐으로써 해결사의 기능이 약화됐다. 李, 朴씨의 후임이 된 申稙秀, 金載圭, 車智澈은 CIA와의 관계나 정치역량에서 앞의 두 사람에 미치지 못했다.
金載圭는 중정부장 취임 이후, 한국의 핵개발 정책에 반대하는 등 친미적인 경향을 보였으나 朴대통령의 신임쟁탈전에선 車智澈에게 밀렸다. 車는 이 조직을 통해 金載圭가 올리는 정보의 정확성 여부를 검증, 朴대통령에게 金부장의 보고가 엉터리란 쪽으로 몰고 가기도 했다. 이에서 비롯된 車에 대한 金의 증오심이 10·26의 가장 중요한 동기였다. 국가정보의 채널을 지도자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때는 재앙이 생길 수도 있다는 교훈을 준다.
CIA가 아무리 막강해도, 미국 대통령은 CIA의 정보를 정책의 참고자료로 쓸 뿐이다(CIA 이외에도 다섯 개의 주요 정보기관이 더 있다). 정보의 수집, 평가, 판단, 실행을 한 기관이 독점해버리면 「정보의 객관화」가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CIA의 기능을 정책결정이나 실행에서 멀리 떼어놓고 있는 것이다. 정보는 어디까지나 정책의 도구이지, 그 주인은 아니다. 정보가 주인이 되면 권력자는 정보의 노예가 돼 버린다.
가장 막강했던 리차드슨
CIA한국 지부장의 임기는 2년이 원칙이다. 급박한 사태가 발생하면 이 기간이 단축되거나 연장된다. 제6대 지부장 존 리차드슨씨는 69년부터 73년5월까지 4년을 근무했다. 역대 지부장 가운데 최장기 근무자다. 그의 시절에 3선개헌, 대통령선거, 남북회담, 유신선포가 있었다. 격동기에 오래 근무했기 때문인지 얼굴이 가장 널리 알려진 지부장이다. 부임할 때 56세의 대머리 노인이었다. 허리가 꾸부정한 그는 어떤 사람과도 만나는 화통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딸을 데리고 나이트 클럽에 가서 고우고우 춤도 곧잘 추곤 했다. 그는 한국이 마지막 근무처였다. 즉, 한국에서 60세를 맞아 정년은퇴한 것이다. 지금은 멕시코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CIA의 직원들 이름은 거의 활자화되지 않는다. 부장이나, 가끔 국장급 정도가 공개될 뿐이다. 그런데도 리차드슨씨의 이름은 웬만한 CIA관계 서적에는 반드시 나온다. 세계적인 대사건의 현장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상한 영감처럼 말도 나지막하게 하던 리차드슨씨는 2차대전 때 이미 CIA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 몸 담았다. 윌리엄 콜비, 리차드 헬름즈씨 등 뒤에 CIA부장이 된 사람들과 같은 그룹이었다.
전후에 그는 그리스의 국가정보기관 KYP를 조직하고, 훈련하고, 자금을 대주는 데 깊이 관여했다. 1956년 하바드 대학 교수이던 키신저씨는 그리스를 여행했을 때 CIA지부장이던 존 리차드슨씨의 영접을 받았다. 리차드슨씨는 그리스의 유력 언론인을 키신저씨에게 소개시켜 주는 등 안내를 잘 해주었다고 한다. 이 여행에서 키신저씨는 미 CIA가 그리스 군부를 지원하는 구심점이란 선입견을 갖게 됐다고 한다. 60년대에 그리스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 독재체제가 들어섰을 때도 키신저씨는 CIA와 군부의 유착을 계속 뒷받침하게 됐는데, 그리스 여행 때의 인상이 아주 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리차드슨씨와 친했던 한국인들은 역대 지부장 중 가장 막강했던 인물로 그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직급도 역대 지부장 중 가장 높았다. 한국에 왔을 땐 이미 산전수전 다 격은 첩보원으로서, 어떤 공작을 조직하고, 조종하는 데는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더구나 리차드 헬름즈나 윌리엄 콜비 등 그의 친구들이 CIA의 지휘부에 있어 미국 본부에 대한 그의 발언권도 컸었다.
71년 대통령선거 직후, 청와대에서 朴대통령, 李厚洛중앙정보부장, 그리고 또 다른 정보기관장이 비밀회합을 가졌다. 유신에 대한 기본 구상이 토의됐다. 그 며칠 후 리차드슨씨가 모 정보기관장을 찾아가 그 토의내용을 확인하려고 했는데,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스 정보기관의 후견인이었던 리차드슨씨는 월남의 고딘디엠 대통령 시절 사이공 지부장이었다.
여기서도 그는 대통령의 동생 고딘누가 대장으로 있는 비밀경찰을 조직, 훈련하고 자금을 대는 대부(代父)의 역할을 수행했다. 미 CIA는 우방국의 정보기관을 강화하는 정책을 오랫동안 추진해왔다. 그런 지원을 통해 상대국의 정보기관을 친미화 시키고, 그 내부에 CIA의 협력자를 박아 놓는다. 우방국의 정보기관이 막강할수록 그 상대역인 CIA도 일하기가 편해진다.
고딘디엠 제거에 반대. 소환 당해
리차드슨씨는 고딘누와 친하면서도 루치엔 크네인이란 CIA직원을 연락원으로 하여 반정부 장성들과도 직통 채널을 뚫어 놓고 있었다. 1963년 여름에 미국 고위층에선 고딘디엠 대통령에 대한 처리문제로 심각한 이견이 빚어졌다. 해리만, 힐즈맨 등 국무성 팀에선 고딘디엠을 제거해야 공산게릴라를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존 맥콘 CIA부장이나 멕스웰 테일러 대통령 보좌관 등은 고딘디엠을 대체할 인물이 없다고 쿠데타 계획에 반대했다. 리차드슨씨나 당시 극동 담당 국장이던 콜비씨도 쿠데타에 반대했다.
맥콘 부장은 『고딘디엠이 xx일지는 모르나 적어도 그는 우리의 xx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고딘누의 비밀경찰이 63년8월에 반정부 불교사찰을 습격, 국내정세가 불안해지자 국무성의 발언권이 강화됐다. 국무성 팀에선 드디어 케네디 대통령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핸리 캐보트 롯지 대사가 새로 사이공에 부임했다. 쿠데타 계획의 추진지시가 그에게 떨어졌다. 리차드슨씨는 반발했다. 거물정치인인 롯지 대사는 워싱턴에 CIA지부장의 항명을 보고, 그를 소환케 했다.
63년10월28일 롯지대사는 CIA지부의 코네인을 통해 장성들의 쿠데타 일정을 통보받았다. 케네디는 롯지대사를 통해 군장성들에게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통보했다. 11월1일 쿠데타가 성공했다. 고딘디엠과 고딘누는 피살체로 발견됐다. 그 둘을 사살한 혐의를 받은 월남군 장교는 며칠 뒤 목 매단 시체로 발견됐다. 그 장교는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했다고 발표됐다.
고딘디엠의 피살 소식이 백악관에 전달됐을 때 케네디 대통령은 보좌관들과 함께 국무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케네디는 벌떡 일어나더니 방을 나가버렸다고, 그 자리에 있었던 테일러 장군은 뒤에 말했다. 그 다음날 CIA간부회에선 케네디 대통령을 비웃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이 댈라스에서 피살된 것은 그 21일 뒤였다. 이제 와서는 월남전의 패인 제1번은 고딘디엠의 축출로 꼽혀지고 있다.
유신계획 미리 안 CIA
리차드슨 지부장은 4년 동안 3명의 중앙정보부장을 상대했다. 金炯旭, 金桂元, 李厚洛. 李厚洛씨와는 상대한 기간이 약 3년간이나 된다. 두 사람은 호적수였다. 李씨는 권력의 절정기에 있었고, 리차드슨씨는 첩보원으로서 완숙기에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협력해야 할 일도 많았지만, 서로 견제해야 할 일도 많았다. 金炯旭은 그의 회고록에서, 리차드슨 씨가 李厚洛씨의 평양 비밀방문을 사전엔 새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그가 판문점을 넘어갈 때에야 알게 됐다고 썼다.
李씨는 회담내용을 미국 기관에 일체 알리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사실과 다르다. 우선 70년대 남북회담의 시작에는 미국의 강력한 권고가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미국이 한국의 등을 밀고, 미국의 부탁을 받은 중공이 북한의 등을 밀어 회의장에 나서도록 한 일면이 있는 것이다. 남북한 적십자 회담이 열릴 때, 키신저는 중공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돌아갈 때 보좌관을 서울로 보내 대사관의 간부들과 한국적십자 측 핵심인물에게 미국과 중공의 생각을 전해주기도 했다. 미국과의 밀접한 협의 아래서 남북비밀협상이 이뤄졌다고 봐야 옳다.
金炯旭은 李厚洛씨가 74년5월2일 판문점을 넘을 때 미 CIA가 처음 알았다고 했지만, 그 35일 전인 3월28일 정홍진(鄭洪鎭.당시 중정 국장 겸 적십자 회담 3석 대표)가 판문점을 넘어 평양으로 갈 때도 CIA는 알고 있었다. 張禹疇적십자사 사무총장이 직접 판문점에 나가 UN군 측에게 이를 통보했던 것이다.
朴대통령이 張씨를 사무총장으로 발탁한 것도 그가 한국군 장성 가운데서 미 대사관이나 CIA를 포함한 미국 측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란 것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張씨는 남북회담의 진전에 관해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연락관 역할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李厚洛씨는 나중엔 張씨에게 미국 측과의 접촉을 금하도록 명령했으나, 리차드슨씨 쪽에선 KFMS 루트를 통해서도 남북회담의 경과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즈음 공화당 전국구의원이던 金炯旭은 『리차드슨씨와 한 주일 걸러 교대로 만찬을 열었다』고 회고록에다 썼다. 어느 날 리차드슨씨는 金에게 『白대통령이 결국 총통제를 강행할 것으로 보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며칠 뒤 李厚洛씨는 부하를 金炯旭에게 보내 『왜 총통제 이야기를 발설하고 다니느냐?』고 경고를 했다고 한다. 金은 리차드슨씨가 李부장에게 총통문제로 질문을 할 때 자기에게서 들은 것처럼 말했던 것 같다고 추리했다.
리차드슨씨는 유신의 구상단계에서부터 이를 추적, 유신선포 훨씬 전에 이미 전모를 파악하고 있었다. 유신계획의 한 실무자는 이렇게 말했다. 『궁정동 밀실에선 72년4∼10월 사이 격리 상태 아래서 실무작업이 이뤄졌다. 이 실무반을 제외하고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대통령, 부장, 유혁인(柳赫仁)씨(정치담당 비서관), 金정렴 비서실장 뿐이었다. 선포 직전에 가서 洪性澈 정치담당 수석 비서관과 김성진(金聖鎭) 대변인이 알게 됐다. 李부장은 金鍾必총리에게도 알리자고 했으나 朴대통령은 「말이 샌다」면서 못하게 했다. 金총리에겐 닷새 전에 朴대통령이 골프를 같이 치면서 직접 알렸다. 미국 측엔 金총리에게 보다도 먼저 알렸다』
朴대통령에게 업어치기 당해
리차드슨씨는 李厚洛씨가 7·4성명과 유신에 대해 공식 통보해 줄 때는 이미 상황을 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李씨의 때늦은 협조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72년10월17일 아침 청와대에서 朴대통령이 특별보좌관들과 함께 유신선포 배경설명문을 읽고 있을 때 미 대사관에선 李厚洛부장에게 불만을 전달했다. 배경설명엔 「미국과 중공의 접근」 「월남 평화협상」의 예를 들면서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조처라는 대목이 있었다. 미국을 걸고 들어가는 듯한 이 구절을 빼달라는 것이 대사관측의 부탁이었다.
李부장이 朴대통려에게 보고하니, 대통령은
『뭐, 내가 거짓말했나. 미국 놈들이 안 그랬으면 내가 뭐 답답해서…』
라면서 못마땅해했다. 金정렴 비서실장이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라면서 설득하자 朴대통령은
『그래, 빼줘!』라고 했다.
유신 선포 직후 마샬 그린 국무성 차관보는 워싱턴에 주재하던 조세형(趙世衡)한국일보 특파원에게 밤중에 전화를 걸어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 당신은 무엇인가 소식을 들은 게 있는가?』고 물었다고 한다. 사전에 유신의 내용을 소상히 알고 있었던 국무성 간부의 이런 행동은 고단수의 더듬수가 아니었을까. 유신을 몰랐던 것처럼 처신함으로써 묵인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유신 선포는 한미간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출발점이 됐다. 남북회담을 권고해 온 미국으로선 그 남북회담이 朴대통령과 李厚洛씨에 의해 유신 선포의 한 이유로 역이용됐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리차드슨씨와 李씨의 관계도 유신 이후 급속히 냉각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CIA의 눈에서는 李씨가 협력자로 보이지 않게 됐던 모양이다. 78년에 미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가 펴낸 한미관계 보고서에는 李厚洛씨의 권력 남용 및 돈과 관련된 부정에 대한 언급이 유달리 많이 나온다. 이 정보의 상당부분은 리차드슨씨가 지휘한 당시의 CIA 한국지부가 수집한 것으로 추리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CIA의 도구, 디크社의 검은 가방
이 보고서 238쪽엔 이런 대목이 있다. 「李厚洛부장 시절 KCIA는 『검은 가방』(Black Bag)작전에 관계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소위원회는 KCIA가 국제 환전상인 디크사(Deak & Co.)로 하여금 외화를 『검은 가방』에 넣어서 청와대로 운반하게 했음을 밝혀냈다. 1973년 9월에 한 미국회사가 하와이에 있는 디크사의 구좌에 2만 달러를 입금시킨 것에 소위원회는 관심을 가졌다.
이 돈을 그 미국 회사가 한국 측 대리인(한국 엔지니어링 제조 회사)의 지시에 따라 송금한 커미션의 일부였다. 이 대리점은 그 전에 J모씨에게 5천 달러, UN대표부의 李모씨에게 1만 달러를 송금하도록 지시한 바가 있었다. 디크사는 이 거래에 관련된 문서를 찾을 수 없다고 소위원회에 알려 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환전상 디크사다. 디크사는 일본의 록히드 사건 수사에서도 드러난 이름이다. 69년6월∼75년1월 사이 디키사는 록히드사의 뇌물성 비밀 자금 8백여만 달러를 27회에 걸쳐 도오꾜의 록히드지사 대표에게 송금했었다. 전 뉴욕 타임즈지의 기자 태드 슐크씨는 76년4월2일자 「누 리파블릭」 잡지에다가 「록히드와 CIA, 디크 커넥션」이란 기사를 기고했다.
이 글에 따르면 디크사는 CIA가 범세계적 규모의 자금조작용 지하 채널로서 오랫동안 이용해온 회사라는 것이다. 예컨대 1954년 이란의 모사데크 정권을 무너뜨리는 공작을 할 때 CIA는 디크사를 이용, 공작자금을 관리했다. 월남전쟁 때도 CIA는 디키사의 홍콩지점을 통하여 CIA자금을 암시장에서 피아스타화(貨)로 바꾸었다. 따라서 CIA가 록히드사에 의한 일본 내 뇌물공작의 전모를, 디크사를 통해, 소상히 알고 있다는 것은 단순한 가능성 이상의 것이라고 슐크 기자는 지적했다.
디크사의 설립자는 니콜라스 디크씨.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항가리, 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5개 국어에 능통하다. 1939년 뉴욕에서 환전상을 설립한 뒤, 2차 세계대전 중엔 CIA의 전신인 OSS의 정보장교가 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OSS를 떠났으나 그 뒤에도 CIA의 고위관리들과 친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는 것이다. 이 디크사가 왜 CIA의 심부름을 하게 됐는지 알길이 없다. 디크사가 CIA와 관련된 회사란 사실을 알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디크사가 우리 정부의 검은 돈의 국제간 이동에 관여했다면 CIA가 그 돈의 흐름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추리하는 것도, 단순한 가능성 이상의 일일 것이다.
金炯旭이 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달아난 것은 73년4월 하순이었다. 그 전에 이미 수천만 달러를 미국으로 빼돌린 뒤였다. 그의 망명과 자금 빼돌리기에 CIA한국지부가 도움을 주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당시의 지부장 리처드슨씨가 金과 자주 만나 정보를 주고받는 사이였다는 단순한 상황증거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고, 재미동포 출신인, CIA한국지부의 당시 모 요원이 관련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CIA내부에서 나돌고 있다. 천만 달러 단위의 외화를, 권좌에서 물러난 金이 쉽게 빼돌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디크사의 사장 니콜라스 디크는 지난해 11월 뉴욕 사무실에서 그의 비서와 함께 총 맞아 죽었다. 그를 사살한 범인은 44세의 여자였는데 정신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CIA도움으로 李穗根 체포
리차드슨씨의 전임자인 제5대 지부장 라자스키씨는 67∼69년 사이 근무했다. 68년의 1·21 사태를 비롯, 푸에블로호 납치, 울진·삼척 공비침투, EC-121기 피격사건 등으로 한반도가 요동칠 때였다. 라자스키씨는 민간인들과 접촉을 별로 하지 않았는지, 그의 면모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수근(李穗根)이 해외로 달아났을 때 라자스키씨가 미 CIA첩보망을 동원, 한국 측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것은, CIA와의 밀월시기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라자스키씨의 재임시절, 한국은 월남에 파병, 미국이 한국의 빚을 지고 있을 때였다. 두 나라 관계는 해방 뒤 그 어느 때보다도 순탄했다.
李穗根사건과 CIA의 협력에 대해선 그를 탄손누트 공항에서 직접 체포했던 李大鎔씨(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당시 주월 한국대사관 공사·예비역 준장)의 증언을 직접 들어본다
『李穗根이 서울의 거주지에서 종적을 감춘 것은 69년 1월27일이었다. 나는 그 날밤 李穗根이 李세준이란 가명을 쓴 여권을 가지고 조카 배경옥(裵慶玉)과 함께 사이공으로 떠났다는 통보를 서울로부터 받았다. 그 다음날 조사해보니 월남에 온 李세준은 李穗根이 아니었다. 본부에서 다시 조사해 보니 李穗根은 오제영(吳濟寧)이란 가명으로 여권을 만들어 조카와 함께 28일 오전 7시30분 CPA여객기 115편으로 홍콩으로 출국했음을 밝혀냈다.
29일 오후 홍콩의 한국영사관 직원들이 홍콩 공항을 지키고 있다가 프놈펜행 CPA기를 타려고 나오는 李와 조카를 만나 격투를 벌였다. 李의 가짜 콧수염이 떨어지고 가발이 벗겨졌다. 영사관 직원들과 李 및 그의 조카는 홍콩정청 경찰에 의해 경찰서로 연행됐다. 직원들은 외교관 신분이었기 때문에 즉각 풀려났다. 이때 본부에선 李병두 차장을 홍콩으로 보내 李의 행방을 지켜보도록 했다. 金炯旭은 라자스키씨에게 부탁, CIA의 협조를 요청했다.
1월31일 아침 CIA는 홍콩정청이 李穗根을 사이공 경유, 프놈펜으로 가는 CPA기 편으로 출국시키기로 결정, 일행이 공항으로 출발했다고 金炯旭에게 통보했다. 金炯旭이 홍콩에 파견된 李병두 차장에게 이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李차장은 李穗根이 아직 경찰서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얼마 뒤 CIA가 다시 金炯旭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李의 출발을 알려주었다. 다시 홍콩으로 확인하니 李차장은 李穗根이 아직 경찰서 안에 있다고 했다.
金炯旭은 욕설을 퍼붓고 전화를 끊은 뒤 나에게 긴급 연락을 했다. 그때는 이미 李穗根이 탄 CPA기가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 도착한 2분 뒤인 31일 오전 10시17분이었다. 대사관에서 공항까지 가는 데는 1시간쯤 걸린다. 이 비행기는 30분만 머물렀다가 이륙하게끔 돼 있었다. 나는 보좌관을 티우대통령에게 보내 비행기의 이륙을 지체시켜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미국에서, 티우대통령이 군 장교시절, 함께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내가 63년에 무관으로 부임해 온 이래 절친한 친구가 됐는데, 대통령 관저도 뒷문으로 무상출입할 정도였다. 나는 차를 몰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티우대통령의 지시로 비행기는 아직 이륙하지 않고 있었다. 비행기로 뛰어올라갔다. 부하인 李택근씨만을 데리고 갔다. 단박에 李穗根을 알아봤다.
그는 앞자리의 창 쪽에, 그이 옆엔 조카 裵慶玉이 앉아 있었다. 나는 스튜어디스에게 신분을 밝히고 승객 리스트를 가져오라고 했다. 마침 그 스튜어디스는 미스 장이란 예쁜 한국 아가씨였다. 리스트 맨 끝에 오재영이라고 볼펜으로 써 넣은 이름을 확인했다. 2대2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끌어낼까 궁리하고 있는데 조카가 다가왔다.
「대사관에서 오셨습니까」
「너 裵慶玉이지!」 裵慶玉은 기가 푹 죽은 표정으로 여권을 내밀었다. 李택근씨에게 裵를 꼭 붙들고 있게 했다. 나는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李穗根에게 다가가 「李선생이시죠」라고 했다. 갑자기 그는
「야, 이놈아! 난 죽을 각오가 돼 있어!」라면서 나의 정갱이를 걷어찼다. 태권도 2단인 나는 위에서 그의 어깨를 갈겼다. 기장이 달려 와 「왜 이러느냐」고 물었다. 나는 신분을 밝히고 티우대통령의 특명이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기장은 물러났다. 그 사이 우리 대사관 직원 대여섯 명이 달려 와 합세, 李穗根을 무사히 끌어낼 수 있었다.
수갑을 채워 대사관으로 데려가는 차 중에서 그는
「야, 우리 부장 좋아하시겠구만」
「야, 李선생은 훈장 타게 됐구먼」이라고 빈정대기도 했다』
이 사건에서 미 CIA는 홍콩주재 영국정보기관의 협조를 받았다. 영국 측은 한국정보부와 직접 접촉하지 않는 대신 긴요한 정보를 CIA에 흘려줌으로써 그것이 자연스럽게 한국 쪽으로 들어가도록 했다고 한다. 영국 측이 李穗根을 출국시키되 사이공을 경유하는 비행기편에 태운 것도 한국 측을 위한 배려였던 것이다. 이 수사에 관계했던 사람들은 영국정보기관의 신중하면서도 세련된 조처에 감탄하면서 『역시 전통있는 정보기관이 다르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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