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121 격추사건과 NSA
1969년4월14일 동해의 공해상에서 미해군 전자첩보기 EC-121이 북괴공군기의 공격을 받고 격추돼 승무원 31명이 몰사했다. 이 비행기는 그 전해에 납치된 푸에블로호와 마찬가지로 공산국가의 통신감청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다. 이 사건이 터지자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은 무력보복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레어드 국방장관과 헬름즈 CIA부장은 외교적 보복을 주장했다.
전 뉴욕 타임즈의 퓰리처상 수상기자인 세이머 허쉬는 「권력의 대가(代價)」란 책에서 당시의 비화를 소개했다. 허쉬 기자에 따르면 국가안보국(NSA)의 통신도청기지는 격추사건을 전후하여 북한의 통신을 감청, 이 사건이 고의적인 도발이 아니고 전투기조종사에 대한 관제실수에 기인한 것임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이런 정보에 입각하여, 결국 CIA의 온건한 보복정책이 채택됐는데, 닉슨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중대한 실수를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격추될 때 EC-121이 공해상에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격추 당시, 우리는 북한의 레이다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었는지, 소련 레이다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었는지도 알고 있다. 세 나라(미국, 소련, 북한)의 레이다는 꼭 같은 위치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것은 NSA의 도청장치가 소련과 북한의 레이다전파를 포착, 분석, 이를 재구성함으로써 상대방 레이다의 추적 상황을 환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NSA에선 닉슨대통령의 이 실토를 듣고 경악했다고 한다.
1960년에 NSA의 암호해독원 2명이 소련으로 달아나 비밀을 털어놓은 다음 기자회견을 갖고 NSA의 활동을 폭로한 적이 있었다. 이 폭로 뒤 월맹은 통신암호를 고도의 복잡한 방식으로 바꿔버렸다. 이 때문에 NSA는 그 뒤 6년간 월맹이 월남의 베트콩 기지로 보내는 암호문을 해독할 수 없게 됐다. NSA에선 소련뿐 아니라 우방국의 통신도 도청하고 있기 때문에 NSA의 능력이 알려질 경우, 우방국의 암호까지도 변경될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실제로 닉슨 대통령의 회견 이후, 소련 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의 통신 암호가 바뀌어졌다.
아시아 재단에 돈 댄 CIA
라자스키 지부장 시절인 1967년 미국에선 CIA의 활동에 대한 중요한 폭로가 한 건 있었다. 이 폭로는 한국에도 파문을 줄 만한 것이었지만 일체 보도되지 않았다. 서울의 비원 근처에 있는 아랍문화회관엔 아시아재단(The Asia Foundation) 서울 사무실이 들어 있다. 올해로서 설립된 지 32년째인 이 미국 재단은 본부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다. 서울지부는 지난해 약 86만1천 달러를 한국의 연구기관, 대학, 사회단체에 댔다. 지원금을 받은 연구 및 사업계획은 1백 종목이었다. 이밖에도 약 10만 권의 영어 원서를 각 대학도서관에 기증했다.
지난 58∼84년 사이 이 재단에서 한국의 도서관에 기증한 책은 1백22만4천3백여 권이나 된다. 아시아 재단을 모르는 대학생이라도, 원서의 표지 다음장에 찍힌 이 재단의 기증 표시 도장을 대학시절에 한번쯤 본 기억이 날 것이다. 지난해 이 재단은 종속이론에 대한 심포지엄에 보조금을 댔고 나이로비의 여성대회에 참석한 비정부 대표의 여비를 보조해주었으며, 12명의 대학원생들이 국회상임위원회에 배치돼 국회활동을 견학하도록 하는 계획에도 돈을 댔다. 지난해 이 재단의 금전적 지원을 받은 학자들은 수백 명에 이른다.
지난 32년간 이 재단의 덕을 본 수천 명의 학자들 가운데는 오늘 날 한국의 대학과 학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한국에선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이 외국 학술지원재단이 한국에 끼친 영향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그 지원금의 출처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지난 84년에 아시아 재단은 미국 내에서 약 2천4백만 달러의 자금을 기증 받았다. 그 가운데 1천2백40만 달러는 미 국무성, 1백88만 달러는 국제개발처(AID)로부터 받는 등 미국 정부 예산에서 기증 받은 자금이 약 1천6백22만 달러였다. 주로 미국 정부 돈으로 움직이는 재단일 경우, 재단의 사업에 그 정부의 정책이 반영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총재인 해이든 윌리암스씨는 국가안보위원회에서도 근무한 바 있는 국무성 관료출신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시아 재단의 현재 활동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1967년 이전으로 거슬러 오르면 문제는 달라진다. 전직 CIA정보원이 쓴 「CIA와 정보숭배」란 책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다.
「CIA의 보조를 많이 받고 있는 다른 기관은 아시아재단이다. 이사진을 엄선하여 CIA가 1956년 설립한 아시아재단은 공산권에 관한 학문 및 공동 관심사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공동 관심사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설립했다. CIA는 8백만 달러를 들여 학문 연구자금을 대고 국제회의와 심포지움을 여는 한편, 학자 교환 계획을 실시했다. 아시아재단의 활동은 합법적이었다. 그래서 CIA는 아시아 각국의 반공학자들에게 연구자금을 대주었다.
아시아 재단의 활동 무대는 해외였다. 그러나 아시아 재단은 극동보다는 미국 학계에 더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많은 미국 지식인들이 아시아재단 계획에 참여했다.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CIA의 극동에 대한 생각을 선전했던 것이다. 아시아재단은 단순한 CIA자신의 아시아관(觀)을 미국민의 그것처럼 선전하는 죄를 저질렀다. CIA와 아시아재단과의 관계는 CIA가 전국학생연맹에 보조금을 지급한 사실이 들통난 1967년 이후 명백해졌다. 아시아재단은 CIA가 재정보조를 해서는 안 되는 기관 중의 하나였으며 카첸바크위원회 규정은 CIA의 자금보조를 막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CIA 자금문제에 대해서 아시아재단 서울사무소의 벤 크레메낙 대표는 이렇게 해명했다. 『CIA자금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안 사람은 이사진 중에서도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직접 CIA로부터 돈을 받은 게 아니고 CIA가 만든 대외용 위장회사(Front Company)로부터 받은 것이다』 CIA자금관계가 폭로되자, 아무 것도 모르고 일하고 있었던 직원들 가운데는 그만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아시아 재단에선 직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2m나 되는 긴 해명 전문을 세계 각국의 지부로 보냈다고 한다.
CIA냄새는 안 나지만…
67년까지 아시아 재단이 주로 CIA자금에 의해 운영돼 왔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 재단 서울지부가 이 기간에 어떤 사업을 했는지 살펴보자.
1954년에 서울에서 문을 연 이 재단의 초대 대표는 필립 로우씨였다. 그는 주한 미 대사관의 직원이었다. 이 재단은 李태영 여사가 설립한 가정법률상담소에 대해 사무실 임대료를 보조해 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 뒤로도 계속하여 이 상담소를 돕고 있다. 아시아 재단은 고려대학교의 아시아문제연구소에도 초창기부터 꾸준히 지원을 해주었다. 5·16뒤엔 외교안보연구원을 짓는 데 건축자재를 대주었다.
이 연구원의 설립 아이디어는 5·16주체세력과 당시의 아시아 재단 서울대표인 윌리엄 아일러즈씨 사이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아일러즈씨는 6·25때 심리전 요원으로 참전, 육사 8기생들과도 안면이 깊었다. 외교안보연구원이 개설되자 아시아재단은 상담역으로 웰드마 골만씨(전직 대사)를 2년간 파견하여 길잡이 역할을 맡겼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천에 들어가자 통계학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아시아 재단은 통계학자 울프씨를 2년간 경제기획원 통계국에 보내 근무시켰다. 알라바마 대학의 제이 머피 교수를 서울 법과대학원에 보내 우리 나라 사법제도의 발전방안에 대해 조언을 하도록 한 것도 아시아 재단이었다. 머피 교수는 한국의 사법서사 제도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몇 가지 보기를 든 이런 사업 이외에 교수들은 유학, 언론인의 해외여행, 대학생의 해외연수에 많은 돈을 댄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사업에서는 CIA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직설적이지 않은 이런 방식이 보다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친미 효과를 가져다 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외교관, 법학도, 아시아문제전문가, 교수 등에게 교육과 학문을 통해 보다 자연스럽게, 보다 깊게 친미사상을 주입시키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아시아 재단의 사업은 CIA가 손을 떼기 전에는 주로 정치, 사회, 법에 관련된 것이 많았다. 70년대에 자금원이 AID로 바뀐 다음엔 인구문제, 보건 위생, 농촌개발 부문 등에 치중하게 됐다. 80년대에 들어서서 국무성이 주로 자금을 대면서부터는 다시 정치, 법, 사회 부문 쪽으로 돌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아시아재단의 사업이 아무리 아카데믹한 것이라 해도 돈을 대는 측의 의도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증거인 것 같다. 최근 하바드 대학은 CIA의 보조금을 받고 중동문제 심포지엄을 연 사프란 교수를 중동문제연구소장 직에서 해임했다. CIA자금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런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참석자들에게 사전에 알리지 않은 데 대한 문책이었다.
CIA, 6·25때부터 상주
여기서 잠시 CIA 한국지부의 연혁을 더듬어 보아야겠다. CIA는 1947년에 창설됐지만 한국에 상주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6·26동란이 터진 이후였다. 45∼50년 사이엔 G2로 일컬어지는 미군의 정보기관이 한국에서 정치공작 등 CIA기능까지 맡고 있었다. 한국과 관련하여 CIA의 이름이 처음 공문서에 나타나는 것은, 1949년 2월28일 CIA가 작성한 「1949년 봄, 한국에서 미군철수가 끼칠 영향」이란 보고서일 것이다. 이 문서는 최근 비밀등급이 해제됐다. 백악관 등 12개 관련 부서에 돌려진 이 보고서에서 CIA는 「미군철수는 북한인민군의 남침을 부를 위험이 높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미군철수를 유리하게 이용한다면 남한정부는 붕괴될 것이다」고 예언했다. 이 CIA 보고서는 철군에 반대하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전쟁중 CIA는 독립조직으로서가 아니라 미8군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CIA는 간첩이나 포로의 신문, 적진으로의 침투·정찰, 적의 작전 명령에 관한 정보분석 등의 활동을 했다. 1952년 여름의 부산정치파동 때 CIA는 아마도 미8군 정보기관과 합동으로 李承晩대통령 제거계획에 참여했을 것이다. 최근 비밀등급이 해제된 당시의 국무성 극비문서를 보면 정치 파동의 전개를 미국의 조종이란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미국은 주한 미 대사관과 미군 및 군정보기관을 3대 도구로 이용, 세 가지 방향에서 반李承晩캠페인을 전개했다.
첫째는 장면(張勉)총리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미는 것이었다. 52년 2월15일 무초대사는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 앞으로 보낸 전문에서 「국회에서 張勉박사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우리의 최선의 희망이다」고 했다. 그는 또 「미국이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국회 안에서 그의 가장 중요한 강점이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둘째는 李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려고 하자, 유엔군에 의한 계엄령 선포로 李박사를 감금 또는 납치, 실각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셋째는 한국 육군본부의 반李承晩 장성들을 이용, 부산에 병력을 투입, 원용덕(元容德) 계엄사령관의 병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李대통령의 실각을 가져오는 계획을 지원했다.
이 계획엔 당시 육본의 작전국장이던 李龍文준장과 작전차장 朴正熙대령 등이,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의 양해하에 참여하고 있었다. 李장군은 張勉 진영과의 협력도 꾀했다. 미국의 이런 계획은 李대통령을 대체할 지도자가 없고, 야당이 투쟁을 포기하는 바람에 취소되었다. 장택상(張澤相) 총리의 아이디어로 알려진 발췌개헌은, 사실은 미국 측이 경색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 張총리가 총대를 맨 것으로 풀이된다. 張는총리는 『개헌이냐, 미 군정이냐』의 기로에서 개헌을 선택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다.
미8군정보기관은 李대통령의 승리가 확실해진 후, 신변이 위태롭게 된 張勉전총리의 참모 선우종원(鮮于宗源)씨를 밀항선에 태워 일본으로 피신시키기도 했다. 미국정보기관은 그 뒤에도 張勉박사를 계속해서 선호했고 그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원했다. 후진국에서 미국정보기관은 정치가를 민족주의자와 국제주의자로 2분(分)하여 민족주의자를 견제하는 관습을 갖고 있다. 그런 구분의 기준은 영어를 할 줄 아느냐, 못하느냐 일 경우도 많다. 이런 관점은 정보기관 주변에 친미적이고 사대주의적인 인사들을 끌어 모음으로써 정보기관의 촉각까지 마비시키기도 한다. CIA는 5·16에서 바로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CIA, 李대통령 탄 선박에 발포
휴전 뒤에도 CIA는 첩보활동을 계속했다. 2대지부장 실버씨에 따르면 CIA는 서해의 작은 섬에 비밀기지를 두고 공작원들을 비행기나 선편으로 북한에 침투시켰다고 한다. CIA요원들은 한국장교들과 함께 이 섬에 살면서 공작원들을 훈련했다. 어느 날 李承晩박사 일행이 탄 배가 이 섬 앞을 지나가다가 CIA 요원들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CIA는 이 선박의 통과에 대한 사전 통보를 받지 못했었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대통령은 미국대사를 불러 CIA요원들을 72시간 이내에 내보내라고 명령했다. 이 섬의 CIA요원은 남김없이 추방됐다. 그러나 CIA는 위장한 요원들을 한국 내에 계속 상주시켰다.
CIA의 해외활동은 「노출」(Overt)과 「비노출」(Covert)로 구분된다. 노출된 공작은 CIA지부를 대사관 안에 설치하고 CIA직원들을 형식상 대사관 소속으로 해두는 방식이다. 이 「노출 공작」에선 CIA지부장은 대사의 감독을 받게 돼 있다. 이런 노출 활동이 한국에서 재개된 것은 1958년부터였다. 대사특별보좌관이란 직명을 가진 넬슨씨가 제1대 지부장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김정렬(金貞烈) 국방장관을 설득, CIA지부와 상대할 중앙정보기관을 만들게 했다. 그것이 국방부장관 직속의 79부대였다. 초대 책임자는 李厚洛준장이었다.
드 실버― 파란만장의 사나이
넬슨씨의 후임으로 59년 9월∼62년7월 사이 제2대 한국지부장으로 근무했던 피어 드 실버씨는 4·19와 5·16을 치렀다. 그는 지난 73년 은퇴한 뒤 「서브 로자」란 회고록을 남겼다. 24장으로 된 이 책의 두 장은 한국체험이다. 이 책은 CIA한국지부의 행동양식을 이해하는 데 기본적인 자료다.
실버씨는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동서냉전의 뒷무대를 15년간 누비고 다닌 베테랑 첩보원으로서 CIA안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육군의 원자탄 연구개발부서에서 근무하게 됐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를 강타한 원자폭탄은 서태평양 티니안 섬에서 조립됐다. 그는 이 조립 업무를 감독했다. 일본의 항복 뒤에는 과학자들을 이끌고 히로시마와 나가사끼를 찾아 가, 피해조사를 했다.
그 뒤 CIA로 옮겨 핀란드, 모스크바, 서독, 빈의 지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숱한 모험담을 남겼다. 그는 겁이 없고 KGB요원이라도 서슴없이 만나는 행동파였다. 빈의 외교파티에서 미국대사관 직원이 소련대사관의 KGB책임자를 만나 넌즈시 물었다고 한다.
『소콜니코프씨, 당신은 대사관에서 무슨 일을 맡고 계십니까?』
『예, 나는 당신네의 드 실버씨가 하는 것과 꼭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빈의 KGB팀과 두 켠에선 피나는 투쟁을 벌이면서도 사적(私的)으로는 파티를 함께 열고, 일요일만 되면 부책임자와 송어 낚시를 즐기곤 했다. 낚시를 함께 하면서 KGB간부와의 사이에서 싹트던 우정을 그는 감동적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CIA와 KGB요원들이 한데 어울려 파티를 벌이고 있을 때 라디오를 통해 헝가리의 폭동이 전해지자, 양쪽이 악수를 나누며 헤어져 맡은 임무로 되돌아가는 張勉의 묘사는 깔끔하다.
그는 서울로 부임할 때 CIA본부에서 한국에 대한 정보활동의 방향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李承晩정권의 통치력에 대한 의구심, 대중봉기의 가능성, 그럴 경우의 주한 미군의 안전문제에 CIA본부는 굉장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 내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특수한 위치를 감안, 한국정부가 미국의 정책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이것이 실버씨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실버씨는 월터 매카나기 대사와 함께 경무대에 들어가 李承晩대통령을 만났을 때, 『대통령은 건강은 좋으나 주의력이 없고 국사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도 거의 없다는 것을 첫눈에 알아냈다』고 썼다. 동서냉전의 최전선에서 일해온 실버씨는 한국에서 정치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술회했다. 정작 어려운 것은 풍성한 첩보들 가운데서 루머와 진실을 구별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張勉박사와 절친해진 지부장
실버씨는 곧 張勉부통령에게 접근, 아주 친숙하게 됐다. 「1959년 연말에 한국정부가 반도호텔 대연회장에서 주한 외교관들을 위한 크리스머스 파티를 열었다. 張勉부통령에게 접근, 아주 친숙하게 됐다. 「1959년 연말에 한국정부가 반도호텔 대연회장에서 주한 외교관들을 위한 크리스머스 파티를 열었다. 張勉박사가 참석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한 채 홀로 서 있었다. …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미국 정부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일들이 있으니 집으로 찾아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실버씨에 따르면 張勉박사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 권력남용 등의 실태를 소상히 이야기해주었다고 한다. 실버씨는 적어도 1주일에 한번씩, 張박사의 집에 가든지, 자기 집에 그를 초대하여 만났다고 한다. 4·19까지의 격변기에 張박사와 지속적인 대화채널을 유지했던 대사관 직원은 실버씨뿐이었다. 실버씨는 미군들 사이에 마이크 김이란 애칭으로 알려진 金貞烈 당시 국방장관과도 특별히 두터운 우정을 맺게 됐다고 썼다.
4·19를 전후하여 그는 분주했다. 데모대를 쫓아다니고, 내무장관을 만나면서 그는 사태의 추이를 관찰했다는 것이다. 60년 4월26일 李承晩대통령이 하야결심을 한 뒤, 이를 통보해주기 위해 매카나기 대사를 불렀을 때 실버씨는 대사, 매그루더 사령관과 함께 경무대로 갔다.
「…회담은 15분 가량 계속됐다. 李대통령은 과도정부로 하여금 새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이 나라를 이끌어가도록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매키나기 대사도 찬동했다. 金貞烈장관은 대통령이 기진해 있으므로 호놀롤루의 미육군 종합병원에서 일정기간 요양할 수 있도록 조처해줄 것을 요청했다」
실버씨는 李承晩박사가 하와이로 출국하는 준비작업에도 관계했다. 張勉박사가 총리가 되자 실버씨는 휴가신청을 냈는데 본부에선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새로운 정부를 영도하는 張勉박사와 당신의 특별한 인간관계에 비추어 휴가를 1년간 늦추라」는 지시가 내렸다는 것이다. 張勉총리의 집권은 미국 정부나 CIA가 바라던 바였다. 그 적극적 후원자의 한 사람인 실버씨가 張勉 박사 곁에 있기를 CIA에선 바랐던 것이다. 이 무렵 張박사에 대한 실버씨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는 것은 중앙정보위원회의 설립에서 잘 드러난다.
실버씨는 李厚洛씨를 실장으로 앉히는 조건으로서 중앙정보위원회의 조직, 훈련, 운영에 자금지원을 하겠다고 長박사에게 제의했다. 측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張박사는 실버씨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우방국에 친미적이고, 강력한 정보기관을 만들어주는 것은 CIA의 확립된 정책이다. 잘만 관리하면 그 정보기관은 그 나라에 박아놓은 CIA의 협력자가 되기 때문이다. 張勉 국무총리는 이때 흥미로운 미국인을 정치담당 고문으로 썼다.
그는 도널드 위터카씨였다. 위터카씨는 해방직후 미군이 한국에 상륙할 때 따라왔다. 정보처(G2)에서 문관으로 북한반장을 했다. 당시 그의 밑에서 일했던 高貞勳씨에 따르면 위터카씨는 중국어, 한국어도 곧잘 했다고 한다. 아마도 2차대전 때 한국문제 전문가로 군에 차출된 사람인 듯했다고 한다.
위터카 씨는 張勉총리의 고문으로서
①영문으로 된 문서의 작성
②미국기관과의 연락을 주임무로 했다. 정보처 문관 출신이란 경력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한국내 미국 정보기관과 張勉총리 사이의 연락인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역대 정권 가운데 張勉정부처럼 미 대사관이나 CIA와 친밀했던 정권은 달리 없다. 그때 미 대사관의 매카나기 대사, 그린 부대사, 도날드 레이나드 정치담당 영사, 그레고리 핸더슨 문정관 등은 모두 張勉씨와 개인적으로 가까웠고, 정치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밀월시대는 짧게 끝나고 만다
한국 내의 美CIA(4)
- 趙甲濟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05-11-20, 1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