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내의 美CIA(5)

KGB에 노출됐던 실버 지부장

실버씨는 빈이나 한국에서 자기 신분을 드러내 놓고 활동했다. 그는 1955년 이후엔 자신의 신분이 소련 KGB에 알려졌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CIA간부란 사실이 알려졌다고 해서 그의 효용이 끝나는 건 아니다. 어차피 CIA고위직으로 오르면 비밀공작에 몰두할 기회가 적어진다. 그 대신 신분이 은폐된 비밀공작원을 지휘하는 일이 많아진다. 훌륭한 CIA간부는 비밀공작을 하면서도 평범하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 이 책략은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신분이 노출된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실버씨가 자신을 노출된 첩보원으로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다. 킴 필비는 한국전쟁 때 미국에 파견된 영국정보기관 현지 책임자였다. 영국정보기관의 서열3위까지 올랐던 사람인데, 1930년 이후 KGB의 첩자였다. 그는 영국 정보기관 사람들이 사촌이라고 부르는 CIA를 무상출입했다. CIA부장인 알렌 덜레스씨 등 간부들도 자주 만났다. 두 기관의 정보교환에도 관계했다. 더구나 필비와 같이 KGB첩자였던 매클린은 그때 영국정보기관의 본부에서 미국담당과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필비―매클린 루트를 통해 CIA간부들의 신상명세뿐 아니라 한국전쟁에 대한 주요 전략 정보가 모조리 소련권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중공군이 참전해도 미국은 원자탄을 쓰지 않고, 중공본토로 확전하지 않는다는 계획도 필비를 거쳐 소련을 경유, 중공으로 새나갔다는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이 우리 작전계획을 죄다 미리 알고 있다』고 불평했었다.

5·16쿠데타는 CIA한국지부와 미군, 그리고 미대사관에겐 잊을 수 없는 참패였다. 사전에 알지 못했고, 사후에 진압하지 못했고, 수습에서도 워싱턴 당국에 기선을 빼앗기는 굴욕을 당했다. 실버씨는 회고록에서 5·16주체세력 등장을 눈치채지 못했던 점을 자가비판하고 있다. 「미국?한국장성들을 부패하게 만들었다. 골프, 테니스, 포커, 칵테일 파티 등을 통해 미국은 한국장성들이 한국의 전통과 문화와 소망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한국 군부내에선 미국 고위층이 주최하는 사교모임에 전혀 참석하지 않는, 소외되고 알려지지 않은 일단의 장교들이 있었다」 그 5·16은 실버씨에겐 「가장 긴 날」이었다.

CIA, 5·16쿠데타 정보 입수

그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우리는 朴正熙 직속참모의 일원인 어느 한국군 장교로부터 며칠 전에 군사혁명에 관한 사전제보를 받았었다. 그 장교는 우리 분실의 요원과 친한 사이였다. 나는 매카나기 대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는 이 보고를 확인해 볼 방법이 없으므로 당분간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 내가 張총리에게 통보해 주는 것을 허락했다. 나는 정보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행동개시 일자만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고 알려 주었다. 張총리은 이 보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몇 달 전부터 군사혁명에 관한 루머들이 있었다. 군사혁명의 가능성이 짙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대사관 사택 제2단지 내에 있는 내 집에 소형 송수신 무전기를 설치하여 대사관 건물 옥상에 있는 전용 통신실과 연락할 수 있도록 했다. 전용 통신실에는 2명의 무전사들이 밤낮없이 24시간 근무하도록 했다. 문제의 그날 새벽 2시30분경, 나의 무전기가 삑삑 울려 잠이 깼다. 대사관 옥상에 있는 나의 무전사는 남산 기슭에서 예광탄이 무지개를 그리고 있으며, 한강다리가 있는 지역으로부터 총성이 들려오고 있다고 긴급히 보고를 했다. 어떤 군부대가 한강다리를 건너 서울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나는 몇 군데 전화를 건 후, 우리 분실 요원들에게는 각자의 집에 설치된 무전기를 통해 비상을 걸었다. …대사관으로 가자면 중앙청과 덕수궁 사이의 큰길을 지나가야 했다. 우리 대사관은 덕수궁에서 왼쪽으로 약 1백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내가 큰길로 나왔을 때에는 여러 대의 한국군 트럭과 지프들이 평상시에는 늘상 붐비던 교차로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으며 30㎜와 50㎜ 구경의 기관총을 세워놓고 있었다. 나는 내 세단의 차안에 있는 등을 켜고 차의 속도를 줄였다. 신경이 곤두선 보초들에 의해 총격을 받는 이리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가까운 거리를 가는 동안 나는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몇 번이나 저지를 당했다. 그들은 내 차로 다가와서 나의 신분을 확인한 후 가라고 손짓했다. 張勉의 행방과 안전이 걱정되었다. 2명의 무전사 중 한 명이 내 사무실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무전 방수(傍受) 수단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다.

나는 워싱턴에 쿠데타의 발생을 알리는 전문을 쳤다. 그리고 대사관 직원 중 누가 없는가 찾아보았다. 대사관에는 당직직원인 정치과의 말단직원 한 사람 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직원이 직속상관을 통해 대리 대사에게 사태를 보고했을 것이다. 유엔군 사령부 및 미8군 사령부와는 아직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다가 문득 張총리에게 연락을 해보기로 결심하고 그의 비밀 전화번호를 돌렸다. 그는 길 건너 반도호텔에 방을 하나 마련하여 시내에서 늦게까지 일을 할 때에는 거기서 쉬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고 떨리는 목소리가 응답을 해왔다. 내가 영어로 말하자 상대방도 영어로 대답했다. 나는 내 이름을 대고 길 맞은편 미대사관에 있는데 張총리가 그곳에 있는지 물었다. 상대방은 긴장된 목소리로 張총리는 실각했으며, 그곳에 없고, 도주중이며, 혁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내가 상대방의 이름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朴鐘圭 소령입니다. 혁명군을 대표합니다』 나는 호텔 객실로 가서 그를 만나고 싶다고 말한 후 대답을 듣지 않은 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朴鐘圭 통해 金鍾泌 만난 실버

이때가 새벽 5시경이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서 해병 경비 데스크를 지나 반도호텔 쪽으로 길을 건넌 후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한떼의 서양인들이 잠에서 깨어나 잠옷과 실내복을 급히 걸치고 나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로비에는 한국군 공수단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걸어가자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와진 호텔 직원이 나의 이름을 대라고 고집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키가 큰 사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내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는 내게로 다가와서 한국어로 뭐라고 말을 걸었다. 그는 거만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영어로 고맙다고 인사를 했으나 그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서 총리실이 있는 8층의 버튼을 눌렀다. 그 사병이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엘리베이터는 스르르 닫혔고 윗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8층으로 올라와 오른쪽 張총리의 방으로 갔다.

문을 두드리자 마른 얼굴에 호리호리한, 잘 생긴 한국군 소령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기진맥진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무장은 철저했다. 무기를 든 채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다른 공수단원들이 몇 명 더 있었는데 모두가 초긴장 상태였다. 내가 朴鐘圭 소령이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는 볼멘 목소리로, 그가 도착했을 때 張勉과 그의 측근 보좌관들은 이미 도주했더라면서 朴장군을 찾아서 보고하려던 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대사관 직원용 명함 한 장을 꺼내어 그 뒤에 나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적은 후 그에게 건네주면서 어떤 경우든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대사관으로 찾아오거나 전화를 걸라고 말했다. 나는 길을 건너 내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는 朴正熙와 朴鐘圭에 관한 전체자료를 알려 달라고 본부에 요청했다. 이들은 내가 그 시점에서 알고 있던 유일한 이름들이었다. 커피를 더 마시고 담배를 연달아 피워 대면서 앞으로의 사태발전에 신경을 쓰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張총리는 첫 총성을 듣자마자 지프를 타고는 나와 연락을 취하러 우리 대사관 사택으로 왔었다(나는 벌써 대사관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정문이 닫힌 뒤에 도착했으며 아무렇게나 옷을 주워 입은 모습으로 신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다시 서울 동쪽에 있는 카톨릭 수녀학교로 가서 피신했다. 아침 9시쯤 되었을 때 대사관 정문의 해병대 경비병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정문으로 나의 명함을 가지고 온 한국군 소령이 즉시 나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

朴소령은 나를 데리고 4층으로 올라가서 어둠침침한 복도를 지나 큰 회의실로 나를 안내했다. 책상엔 金鍾泌 중령이 앉아 있었다. 그는 중키였고 체격은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동안(童顔)이었으며 조용하고 침착했다. 朴소령이 한국말로 나를 소개하자 나에게 의자를 권했다. 朴소령은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통역을 맡아 주었다. 내가 그 뒤 朴正熙장군 주도하의 정부와 접촉하는 데 있어 金鍾泌중령은 시종일관 주요 대상인물이었다.

朴정권이 집권 2개월 후 한국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게 되면서 우리들의 이 관계는 더욱 그럴싸하게 되었다. 접촉이 시작되면서 金鍾泌은 미국 CIA중견간부라는 나의 지위에 대해 예리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는 미국 CIA가 미국 정부조직상 어떤 법적 지위를 갖고 있는가에 대해 정중하나 주의깊게 질문했다. 그의 관심사항은 대부분 내가 자유롭게 충분히 개진할 수 있는 주제들이었다.

나는 이 기회에 「기초 공민학적」 성격에 준하는 강의를 하였다. 대화의 주도권은 분명히 金鍾泌 쪽이 갖고 있었다. 그는 朴소령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朴장군이 왜 군사혁명을 일으켰으며, 왜 그것이 필요했고, 가까운 장래의 개괄적인 계획이 무엇인지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金鍾泌은 그의 생각을 적절하고 깊이있게 표현할 줄 아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잠시 후 그는 말을 그친 다음 그가 말한 내용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그들이 이제 대한민국을 통치할 책임을 떠맡았으므로 그들이 이니셔티브를 갖고 미국 대사관 및 미군 사령부와 우호적인 업무관계를 재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한국동란 동안 함께 많은 피를 흘렸던 한국과 미국이 적대적 관계로 되면 이것은 비극이라고 말했다. …

나는 본부에다 그날 일어났던 사건들, 내가 朴소령 및 金鍾泌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 그리고 내일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사항 등에 관해 긴 전문을 보낸 후에야 대리대사가 몇몇 간부들과 함께 아직도 대사관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들에게 그날 낮에 내가 한 일과 워싱턴에 보낸 보고서 내용에 대해 기본적인 것들을 알려 주었다. 대리대사는 한숨을 쉬고 일어서더니 천천히 왔다갔다 했다.

그는 매그루더 장군이 미8군뿐만 아니라 유엔군사령부를 지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더라면서,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한국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내란죄를 범한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더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므로 매그루더 장군은 朴장군을 만나지도 않고 상대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리 대사는 쓴웃음을 짓더니 매그루더의 정보참모가 朴장군의 좌익 경력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고 계속해서 말해 주었다.

朴正熙, CIA지부장과 대면

내 사무실은 그날 하룻 동안 전문의 송수신으로 바빴다. 나는 이미 좌익사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사망한 朴正熙의 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朴正熙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란 확고한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와 같은 사실을 대리대사에게 보고하였으며, 그는 내가 매그루더 장군을 만나 그의 태도를 돌려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 국방성의 자문을 받아 국무성이 대사관에 내린 지시내용은 별도지침이 있을 때까지 朴正熙를 만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리대사는 이와 같은 미묘한 정치적 배경문제가 어떤 방향으로든 해결이 날 때까지 내가 金중령 朴소령을 계속 접촉해 주도록 부탁했다. 나는 내가 金중령이나 朴소령과 가졌던 모든 회합 내용을 대리대사에게 알렸다.

다음 날 아침 정각 9시, 朴소령이 정문에 와 있다고 해병대 경비병이 전화로 알려왔다. 내가 내려가 보니 朴소령은 지프 옆에 서 있었다. 차 뒤의 보좌관석에는 2명의 사병이 각자 톰프슨형 기관단총을 받쳐들고 앉아 있었다. 그는 나에게 지프의 오른쪽 좌석을 권하면서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로 간다고 말했다. …朴소령은 어느 문을 두드린 후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다시 나오더니 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朴소령은 다시 통역을 맡았으며 이것이 朴正熙 장군과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朴장군은 둥근 티 테이블 옆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 주위에도 몇 개의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는 단구에 몸이 단단하게 짜여져 있었으며 피부는 부드럽고 눈은 의욕에 불타는 듯 했다. 朴장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朴소령은 朴장군이 나를 만나 대화할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고 먼저 말해 주었다. 우리가 적당히 인사말을 나누고 자리에 앉자 당번병이 차주전자와 찻잔, 코카콜라와 유리잔이 담긴 쟁반을 즉각 들여왔다.

그가 이 쟁반을 테이블 가운데에 놓자 이번에는 다른 당번병이 떡이 담긴 그릇을 갖고 들어왔다. 朴장군은 영어를 거의 쓰지 않았으며 통역을 통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답변을 하기 전에 영어로 대답할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는 영어를 상당히 알아들을 수 있었으며 朴소령의 말을 막고 자기 생각을 보다 간결하게 표현한 영어 어휘를 삽입시키기도 했다. 그는 매우 지치고 피로한 표정이었다. 그의 참모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어수선한 가운데서 몇 시간 동안 시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張총리에 대한 군사혁명이 왜 필요했었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열변내용은 전날 金중령이 제기했었던 주요 관점과 일치했다. 그는 조용하고 사려깊게 이런 말들을 개진했다. 얼마 후 朴장군은 내가 강조했던 주제에 대해 언급했다. 즉 외교적이거나 군사적인 면에서의 상호접촉, 우호관계 유지, 건설적인 한미관계의 수립 등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자세를 바꾸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매그루더 장군을 만나려고 시도했었지만 매그루더 장군은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며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朴장군은 朴소령이 이런 말들을 나에게 통역해 주고 있을 때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한국정부를 전복한 쿠데타가 일어난 지금, 미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바쁘다는 이유로 그 나라의 새로운 지도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언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나는 안절부절 못하게 되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朴장군은 언제든 매그루더 장군을 만날 용의가 있으며, 대리 대사도 물론 만나고 싶다고 말하고 그의 생각을 그들에게 전달해 주도록 나에게 부탁했다. 대담은 동양적인 신중함과 꼼꼼함 때문에 대화가 앞뒤로 왔다갔다 했다. 약 2시간 후, 마침내 논리적이고 합당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朴장군은 내가 金중령과 계속 접촉하면 좋겠으며 내가 金에게 주는 메시지는 모두 그가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거듭 말했다. 그리고 만일 긴급한 용무가 있으면 金중령이 자신을 만날 수 있게 주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張勉은 우리의 첩자가 아니었다』

실버씨의 회고록에 따르면 5·16직후 사태가 유동적이던 며칠 간 쿠데타 주체세력과 대화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실버·朴鐘圭·金鍾泌·朴正熙 채널이었던 것 같다. 미8군과 대사관을 통한 공식 채널이 막혀 있었던 때라 CIA가 가진 막후의 통로가 중요한 기능을 했던 것이다. 실버씨의 회고록을 믿는다면 CIA한국지부는 사태를 안정시키고, 군사정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움직였던 것 같다. 5월19일의 매그루더·金鍾泌 회담, 5월23일의 매그루더·朴正熙 회담을 통해 작전권을 둘러싼 갈등이 일단 풀렸다. 실버씨는 자신이 매그루더 사령관에게 朴장군과의 면담을 건의했고, 그때쯤에는 朴장군에 대한 사상적인 의심도 풀렸다고 썼다.

張勉총리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나 가까웠지만, CIA의 조직인으로서 실버씨는 張총리와 연연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반쿠데타 진압작전을 기도했던 매그루더는 6월20일 퇴역 당했고, 그린 대리대사도 홍콩 총영사로 전보됐다. 한국의 새 정권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한 미국 정부의 장애물 제거 작업이자, 문책인사였다. 실버씨는 62년 7월까지 계속 근무했다. 金鍾泌씨가 중앙정보부를 발족시킨 것은 61년 6월19일이었다. 실버씨는 정보부의 조직과 운영에 자문을 많이 했다. 70년대 후반 미국 의회는 CIA가 KCIA의 설립때 자금을 댔다는 소문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었다. 결론은 『아니다』였다. 의회보고서에 따르면 CIA는 金鍾泌씨에게 국내안보와 해외정보수집 기능을 KCIA가 독점해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는 것이다.

즉, CIA와 FBI를 한데 묶는 것과 같은 기능엔 반대했다는 얘기다. 실버씨는 金鍾泌씨가 미국의 CIA와 꼭같은 이름을 사용하려는 것을 말렸다고 썼다. 실버씨는 또 쿠데타군에 체포된 李厚洛씨와 군 장성들을 석방시키는 데 힘을 썼다. 석방된 장성들은 미대사관측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 갔다. 실버씨의 회고록에는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두 군데 있다. 「張박사가 전문적인 의미의 미국 첩자(Agent)였던 적은 결코 없었다. 그는 나와의 비밀접촉이 미국과의 정직한 관계라고 믿고 있었다」 張勉박사가 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미국측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가 미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CIA가 말하는 「전문적인 첩자」는 돈을 받고, 조국의 비밀을 파는 부류를 뜻한다. 張박사가 실버씨에게 유용한 정보를 더러 주긴 했지만, 그것은 한국을 위해 유익하다고 판단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총리를 지낸 사람을 보고 『그는 우리의 첩자는 아니었다』고 굳이 해명한, 그 의식이 문제이겠다.

CIA, 提報者를 해외로 피신시켜

「…쿠데타가 성공한 뒤, 그 전에 쿠데타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했던 한국장교는 불안해했다. 그는 미국으로 탈출, 망명처를 구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를 오끼나와로 옮겼다가 미국으로 데리고 갔다. 가족도 데려다 주었다. 얼마 뒤 고향이 그리워진 그는 朴대통령으로부터 면책 보장을 받은 뒤 한국으로 돌아가 지금 평화롭게 살고 있다」 실버씨는 이 제보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김재춘(金在春)씨(전 중앙정보부장)에게 물어봤더니 이런 이야기를 했다.

『5·16직후 내가 육군방첩대장으로 부임했는데 부대장인 백운상(白雲祥)대령이 며칠간이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8군 정보부대에 문의했더니 자기들이 오끼나와를 거쳐 미국으로 피신시켰다고 실토하더군요』 이 白씨가 실버씨가 말하는 제보자인지는 알 수가 없다. 白씨는 미국에 정착, 잘 살고 있다니까 실버씨의 제보자 설명과는 다르다. 이 제보자에 대해 취재를 하다가 미국 정보기관이 관련된 흥미있는 사건을 알게 됐다.

5·16이후에 발표된 숱한 반혁명사건 가운데는 2주당(二主黨)사건이란 게 있었다. 안병도(安柄都)씨 등 17명의 장교 출신, 출판인, 학생 등이 朴正熙 최고회의 의장을 암살, 정권을 탈취하려고 모의를 했다는 사건이다. 張勉 박사는 이들에게 거사사금 1백만환을 댔다고 하여 공판진행중 구속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었다. 1심에선 2명이 사형, 11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4년 이내에 모두 석방됐다.

이 사건 기소장을 읽어보면 미스터리 투성이다. 먼저 張勉총리 고문이던 위터카씨가 배후조종자로 등장한다. 그는 이 사건으로 추방당했다. 미8군 309정보부대의 뉴랜드 대위, 다아링 문관이 등장한다. 모의자들이 자주 찾아가 만났고, 반혁명 모의진행의 정보를 상부에 보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직접 가담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安柄都피고인은 朴正熙장군, 金鍾泌 당시 정보부장과는 10여년 전부터 친교가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암살 하수인으로 쓰여져 있는 최고회의 본회의실 경비책임자 박준(朴駿)상사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면 이 사건은 조작인가? 아니면 핵심적 사실을 숨기고 기소를 했기 때문에 기소내용이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인가.

기소장에 나타난 이 사건의 핵심 줄거리는 결국 이렇게 요약된다. 5·16때 국방부 조사대 부대대장이었던 이용환(李龍煥)씨(중령)가 최고회의 경호원인 한운규(韓雲奎)헌병상사와 朴駿상사를 포섭, 기관단총으로 朴正熙의장, 李周一부의장, 金鍾泌정보부장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李씨의 행적은 기소장에 나타난 것과는 달랐다.

미국인, 朴正熙 암살 계획의 배후

張勉박사의 측근으로서 미국 정보기관과도 가까웠던 李씨는 5·16 며칠 전 쿠데타 정보를 張총리에게 전달했다. 5·16당일엔 헌병대를 동원한 진압작전에 잠시 참여했다. 5월16일 새벽, 미8군 정보부대의 지프가 그의 집에 나타나 그를 태우고 8군 영내로 들어갔다. 여기서 헬리콥터로 오산, 오산에서 다시 군용기로 오끼나와의 미군기지로 날아갔다. 李씨는 오끼나와에서 며칠간 머물면서 5·16쿠데타의 발전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그는 며칠 뒤 다시 미국의 모처로 보내졌고, 서울을 떠난 지 열흘쯤만에 미8군으로 돌아왔다.

8군 영내에 머물면서 그는 미8군 정보부대로부터 임무를 부여받게 됐다. 최고회의 수뇌부를 체포, 또는 납치하라는 임무였다. 위터카씨도 이 작전에 끼여들었다. 李씨는 옛날에 자기 부하였던 韓雲奎헌병상사가 최고회의에서 경호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와 몰래 접촉,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韓상사는 다시 朴駿상사를 포섭했다. 그런데 朴상사가 겁이 나서 모의사실을 수사기관에 신고해버렸다. 韓상사는 체포됐다. 朴상사는 불기소됐다. 李씨는 이것을 모르고, 韓상사와 연락하기 위해 8군 영외로 나왔다가 체포됐다. 61년6월의 일이었다.

5·16 주체세력에선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미군 정보기관의 개입사실을 빼고 기소를 했으며, 재판을 연 것도 李씨의 체포 1년 뒤였다는 것이다. 미군에 대한 수사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사실은 완벽하게 진실로 입증됐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위터카와 미8군 정보기관이 암살계획의 배후에 있었다는 큰 줄거리는 사실인 듯하다. 미국의 고위층에서 보면 그 계획이 하나의 안으로 검토된 정도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국내정치에 대한 미국 정보기관의 계획의 대담성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실버씨는 62년7월 한국을 떠났다. 홍콩 지부장으로 잠시 있다가 64년6월 사이공지부장으로 옮겼다. 그의 사이공 지부 전임자는 60년대 말 한국지부장으로 왔던 존 리차드슨씨였다. 당시의 CIA 극동과장은 뒤에 CIA부장이 된 콜비씨. 미국이 월남전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들어가는 과정에서 세 CIA첩보원―리차드슨, 실버, 콜비씨가 한 역할은 월남전의 향방에 큰 영향을 끼칠 만한 것이었다.

실버씨는 사이공지부장으로서 베트콩의 테러에 대한 반(反)테러작전을 계획, 추진했다. 그가 조직한 국민행동대란 월남 특무기관은 베트콩 준동지역으로 잠입, 베트콩 간부들을 암살했다. 65년 5월30일 오전, 베트콩의 폭탄차가 사이공의 미 대사관 앞에서 폭발했다. 이 사고로 실버씨는 한쪽 눈을 실명했다. 그 뒤 그는 본부로 돌아와 해외정보국 참모장, 오스트랄리아 지부장 등 한직을 돌다가 지난 73년에 정년퇴직했다.

黃泰成의 신문권 요구한 CIA

실버씨의 후임으로 62년 7월 제3대 지부장으로 한국에 왔던 이는 그리스계 미국인 나시오스씨였다. 그는 1년도 못돼 다른 곳으로 전임됐고, 4대 지부장에 에드워드씨가 나타났다. 에드워드씨는 거물간첩 황태성(黃泰成)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한다. 북한의 무역성 부상(副相)을 지낸 바 있는 黃은 朴正熙 장군의 형(대구 폭동때)과 친구였었다. 그는 5·16직후 서울에 잠입, 朴장군의 형수 趙여사를 만나려다가 趙여사의 신고로 붙들려 1,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대법원에 상고중이었다. 항간에서는 黃이 남북협상의 카드를 갖고 왔다느니, 金鍾泌 부장을 만났다느니 하는 루머가 돌고 있었다. 5·16때부터 CIA는 朴장군과 金부장의 사상적 배경을 의심하고 있었으므로 黃의 남파목적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질 만했다.

金炯旭에 따르면 에드워드씨는 미국 정보기관이 黃을 신문하도록 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 압력으로써 미공법 480호에 의해 도입 양곡을 싣고 온 수송선을 인천항에 띄워놓고 양곡을 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는 흉작으로 식량난이 심각할 때였다. 우리 정부는 黃을 미국측에 잠시 넘겨 조사를 받게 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원래 한미간엔 군사정보 교환협정이 체결돼 있지만, 사안에 따라선 잘 지켜지지 않았다. 에드워드씨는 6·3사태 이후 金鍾泌씨가 2차 외유를 갈 때 미 대사관과 함께 그 준비작업에 관계했었다고도 한다. 에드워드씨는 朴鐘奎씨와 무척 가깝게 지냈다. 그는 66년에 본부의 극동담당국장으로 전보됐다.

흔히 미국측과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丁一權, 白斗鎭, 金正烈, 朴定洙, 張禹疇, 李厚洛, 朴鐘圭씨 등이 그런 유력인사다. 이들은 대체로 CIA지부장들과도 친했다. 朴定洙씨(전 국회의원)는 이렇게 말했다.

『CIA지부장들은 거의가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는 교양인들이다. 만나서 대화하는 게 우선 즐겁다. 항간에선 나 같은 사람을 오해도 하는 것 같지만, 미국인들에게 나 만큼 비판적으로, 제대로 충고해주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자꾸 만나고 싶어하는지 모른다. 내가 겪은 CIA사람들은 대체로 한국인에 대해 진심에서 호의적이었다. 정권에 대해선 비판적이어도, 한국을 좋아한 사람들이었다. 두 나라 사이에서 한미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노력한 그들의 고민도 평가해야 할 것이다』

CIA와의 관계에서 지미파(知美波)와 친미파, 그리고 첩자는 구별해야 한다. 미국과 가깝다고 널리 알려진 인사들은 거의가 지미파나 친미파에 속한다. CIA는 이들에게서 정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주로 구한다. 자유당시절의 張勉박사처럼 CIA와의 밀접한 관계가 한국을 위해 보탬이 된다고 믿는 이들은 지금도 있을 것이다. 자유당이나 공화당 정권 치하에서는 미국의 힘을 빌어 독재에 저항한다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CIA의 활동은 그런 정치사회 풍토에선 참으로 수월할 터이다.

◇ 역대 한국 CIA 지부장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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