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의 김대중 연구(5)
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金大中 연구②-4
신민당과 金大中과 남로당
여기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金大中 청년이 가입했던 신민당과 그 창설자인 白南雲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한다. 白南雲은 1894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 東京상과 대학을 졸업한 뒤 연희 전문의 교수로 일했다. 그는 1938년 연희전문을 그만두기까지 유물사관과 계급투쟁론의 입장에서 조선역사를 강의하는 한편 「조선사회경제사」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썼다.
광복 뒤 그는 강단에서 정계로 나와 좌익 운동에 참여했다. 좌익의 통일전선 조직인 민주주의 민족전선(民戰)의 공동의장으로 뽑히기도 했다.
1946년, 모스크바 의정서에 의해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된 직후 그는 북한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 金枓奉 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왔다. 중국공산당과 가까운 金枓奉이 북한에서 조선독립동맹을 신민당으로 개편하자 白南雲은 남조선 신민당을 만들고 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8월 金日成의 북조선 공산당과 金枓奉의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 노동당이 되는 것과 맞추어 1946년 11월 남한에서는 소련과 金日成의 지령에 따라 좌익 3당, 즉 呂運亨의 조선인민당, 白南雲의 남조선 신민당, 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이 합쳐서 남조선 노동당, 즉 南勞黨을 만들었다.
이 합당 과정에서 白南雲과 呂運亨은 소외된 끝에 남로당에 합류하지 않고 사회노동당을 만들었으나 해체하고 근로인민당을 창당, 呂運亨은 위원장, 白南雲은 부위원장이 되었다. 呂運亨이 암살된 이후 고전하던 白南雲은 1948년 5월 총선 직전 자진 월북하여 거기서 눌러앉았다. 196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뽑혔고 1979년 85세에 죽었다.
6·25 당시의 남로당 地下黨 최고위 간부 朴甲東씨에 따르면 白南雲은 6·25 이전에 이미 金日成으로부터 지령을 받는 관계가 되어 朴憲永의 남로당을 견제했었다고 한다.
남로당이 발족했을 때 朴憲永은 북한에 있었다. 美 군정에서 1946년 9월 그에 대한 체포령이 내리자 월북했던 것이다.
정판사 위조지폐사건 및 10월 폭동으로 남로당 간부들이 수배되면서 남로당 자체는 不法化되지 않았지만(남로당 不法化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조직원들은 지하로 잠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金大中 조직부장의 부하 權庠植 진술
金大中씨가 신민당 목포시당의 핵심인 조직부장이었고 좌익 청년 행동대 民靑에도 가입하여 맹원 교육을 했다는 心證을 갖게 한다. 여기 다른 자료를 하나 더 소개한다.
1회 피의자 신문에서 金大中씨는 자신이 좌익정당인 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으로 있던 시절의 同黨 상임위원급으로 權庠植 등과 같이 활동했다고 썼다.
이 權庠植이란 인물은 1971년 2월10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술서를 수사기관 앞으로 작성하여 낸 적이 있었다(軍 검찰은 이 진술서를 金大中씨 기소 자료에 덧붙여 재판부에 냈다). 그해 4월27일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朴正熙 후보의 여권에서 金大中 후보를 공격하기 위한 자료로서 확보해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생긴다.
<진술서. 權庠植 서기 1923.11.5일생. 본인은 해방 후(중략) 좌익계 신민당에서 활동 당시 金大中은 조직부장으로 활동중 1946년 10월 소위 인민항쟁 당시는 각각 동별로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金大中은 무슨 활동을 하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로 전부가 지하로 들어갔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다가 본인은 서울로 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목포경찰서 형사대에 체포되어 특채발령을 받고 목포서에서 근무하다가 6·25 동란으로 부산으로 가 있었습니다. 목포가 수복된 뒤 목포로 돌아와 있었는데 金大中의 동생 金大義를 시내에서 만났는데, 「유격대 李文基를 잡소」라고 하기에 물어 보니 「李文基가 우리 형 金大中이를 체포하였다네」라고 했습니다. 그 후 金大中이를 內査한 바 李文基가 확실히 체포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吳世一 인쇄소 2층
그 당시 좌익계 신민당 간부
위원장 李彩鉉
조직부장 및 선전부장 金大中
부원 金相培(현재 이북에 있음), 徐得均(사망), 張在赫(행방불명), 權庠植, 權五哲(이북에 있음).
그 당시 金大中은 새벽으로 공산당 교육을 받고 당 사무소에 와가지고 국제정세 및 국내정세를 말하고 나갔기 때문에 활동상을 잘 모릅니다. 1946년 10월 인민항쟁 이후 신민당이 해산되자 金大中이는 그 후 보니까 全南汽船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그 후로 金大中이가 금전관계 사고가 나자 共黨에서 제명당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金大中의 동창생 金錫哲이 신민당 재정부장으로 있다가 탈당하여 있기 때문에 아마도 金大中 활동상을 잘 알 것입니다.
서기 1971년 2월10일 權庠植>
위의 진술서에 나타난 金大中 조직부장의 부하 다섯 명의 그후 운명이 처절하다. 두 명이 북한으로 갔고, 한 명은 사형, 다른 한 명은 행방불명, 그리고 權庠植 본인은 경찰에 체포되어 아마도 수사에 협조한 代價로 경찰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광복을 맞자마자 남북이 분단되고 남한에선 金日成·소련의 조종을 받는 좌익과 李承晩의 지도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익 사이에 이념대결이 벌어졌다. 그 좌익의 선동과 폭력에 우익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피를 피로써 씻는 학살이 벌어지던 시절, 그 한복판에 20代 초반의 金大中 청년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은 신민당이 남로당으로 합병될 때 金大中씨가 남로당원으로 신분을 바꾸지 않았었느냐 하는 의문을 가지고 추궁한 흔적이 있다. 수사관들은 의심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탈출
문: 9·28 수복시의 형무소 탈출경위와 그 후의 행적을 말하시오.
답: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1950년 8월경부터 탈출시까지 목포형무소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1950년 9월28일 16시경 감방에 있던 사람들을 전원 형무소 강당으로 끌어 내었는 바 그 숫자는 120~130명이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그 강당의 안 쪽에 있었는데 인민군들은 출입구 쪽에 있던 사람들부터 15~16명씩 불러내어 차에 실어가기 시작하였는데 2~3차 실어가더니 인민군들은 어디론가 가 버리고 목포지방 출신 내무서원들이 저희들을 다시 감방에 수감시킨 후 그들마저 어디론가 가버려 저희들은 사태가 달라졌음을 직감하고 감방 문을 부수고 탈출, 9·28 수복이 되었음을 알았고 그 후 1950년 10월3일경 해병대가 진주할 때까지 잔당들이 학살을 계속 자행하여 저는 집에 숨어 있다가 6·25시 군경에 징발당했던 선박 1척과 목포 부두에 정박해 있던 선박 1척을 수리하는 등 해운업 재개 준비를 하는 일방 목포일보사를 인수, 운영에 참여하였습니다.
兩說
金大中씨는 6·25 남침 때 서울에 있었고 목포에 돌아왔을 때는 공산군에게 검거되어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고 말하고 있다. 異說도 있다.
1995년 8월24일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워싱턴 투데이라는 한국어 신문에 在美 교포 김영훈씨가 쓴 「행동하는 야심가냐, 행동하는 양심가냐」 題下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金大中씨가 6·25 남침 직후 보도연맹 정리 때 끌려가 처형되기 직전에 친구 K씨의 도움으로 살았다는 K씨의 증언을 실었다.
1996년 일본에서 발행되는 SEIKAI (政界)란 잡지의 2월호에는 저널리스트 야마자키(山崎 一)가 쓴 「金大中의 虛와 實·드러난 『봉인된 과거』」 題下의 기사가 실렸다.
야마자키씨는 워싱턴으로 가서 먼저 K씨 관련 기사를 쓴 김영훈 목사를 만나 K씨의 소재지를 알았다고 한다. K씨의 본명은 金○○씨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야마자키씨는 그를 만나 김영훈씨가 쓴 내용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金○○씨는 金大中씨가 난 하의도에서 약 500m 떨어진 安佐島에서 출생하여 金大中씨와는 초등학교와 목포상업학교를 같이 다녔다는 것이다.
金大中씨는 4·19 혁명 후 민주당이 집권하자 생명의 은인인 金○○씨가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것을 찾아내 張勉 총리에게 부탁하여 외무부에 과장으로 특채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金씨는 외무부에서 아시아 담당 부국장까지 승진하였지만 5·16 군사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와 살게 되었다는 것이 「政界」誌의 보도였다.
필자는 지난 3월7일 워싱턴에 살고 있는 김영훈 목사 댁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일본 잡지 「政界」에 실린 야마자키씨의 글에 틀린 내용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K씨가 金大中 정부의 출범 이후엔 과거 자신에게 말했던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영훈 목사는 K씨가 한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6·25가 나자 당국에선 金大中씨 등 보도연맹원들을 처형 대상자로 분류하여 배에 태워 바다로 나가 선상에서 사살하고 시체는 소용돌이가 강한 바다에 버릴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金大中씨 등은 전날 밤 해안 창고에 갇혀 있었는데 그때 영어교사이던 K씨가 이 소식을 듣고 창고로 찾아가서 金大中씨에게 자신의 명찰을 전해 주면서 金大中이라 호명할 때 절대로 나가지 말고 K씨 자신의 명찰을 보이면서 사람을 잘못 데리고 왔다고 말하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金大中씨가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제가 1995년에 쓴 기사에 대해서 金大中씨 쪽으로부터는 어떤 항의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K씨는 저에게 그 말을 하기 전에 일본 기자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어 일본 잡지에 기사화된 적도 있었답니다. K씨는 몇년 전 喪妻한 뒤 이사를 갔는데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80년 7월호 일본 잡지 中央公論에 산케이 신문 칼럼니스트 시바다 미노루(柴田穗)씨가 쓴 「광주시 소란의 배경에 있는 것」이란 기사가 실렸는데 이런 대목이 있다.
<金大中씨는 동란 직후 보도 연맹에 구속되었다. 미군 CIC(방첩부대) 기록에 따르면 이때 북한군의 진출과 함께 철수시의 사살대상자로 지명돼 있었으나 金鎭夏라고 이름을 잘못 불러 살아났다고 한다>
계엄사 합수본부의 수사기록을 보면 金大中씨는 6·25 전란중 보도연맹 처리와 관련하여 일관되게 자신의 알리바이(不在증명)를 역설하고 있으며 합수본부는 反證을 제시하지 않았다.
여러 상충되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또, 보도연맹과의 관계에 대해서 상반된 주장이 있어도 광복 직후 金大中씨가 목포의 좌익 진영 조직원이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좌익 활동과 관련하여 한국 경찰에 두 번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며 6·25 직후 목포를 점령한 인민군에게도 붙들려 죽음 직전에 탈출했다고 한다. 좌우익으로부터 다 같이 당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의 생애에 다가올 폭풍의 序幕이었다.
간첩 鄭泰默과 선거전략
다시 1차 피의자 신문조서로 돌아간다
문: 목포일보사의 인수 경위와 운영 상황을 말하시오.
답: 목포일보사는 8·15 해방 이후 목포의 지주였던 金哲鎭이 인수 운영하였으나 경영부실로 근근이 끌어오다가 6·25 사변으로 신문발행이 중단되고 金哲鎭은 경영에서 손을 떼고, 金哲鎭의 子 金昇漢(現 中央日報 主筆)과 기자들이 신문 再발행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자금이 부족하여 저에게 인수할 것을 제의해 와서 제가 일부 투자 후 사장으로 취임, 1950년 11월 중순경부터 200~300부씩 신문을 발행하였으나 별로 신통치 않아 1951년 3월경부터 손을 떼기 시작하여 1951년 10월경에는 완전히 손을 끊었습니다.
문: 피의자가 6·25 사변 이후 관여한 해운사업에 관해 말하시오.
답 6·25 사변 이후 위에서 말씀드린 선박 2척을 수리 해운업을 재개, 1951년 3월경 商號를 목포상선으로 고쳤으며 1952년 7월 부산에서 흥국해운을 창설할 때는 일본에서 중고선 3척을 도입하여 선박 5척 총 t수 400여t으로 1955년 4월경 상경할 때까지 해운업을 계속하였습니다.
문: 피의자의 6·25 사변 이후의 정당활동 사항에 대하여 말하시오.
답: 본인이 1954년 5월 목포에서 제3代 국회의원에 입후보 낙선하기 직전까지는 민국당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있다가 1957년 7월경 민주당에 입당 이래 민주당을 거쳐 신민당으로 1971년 5월 제8代 국회의원에 당선될 때까지 국회의원 선거에 8회 입후보하여 4회 당선되었고 1971년 4월 제7代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가 낙선되었는 바 기타사항은 위의 경력 사항과 정당 사회 단체 가입활동사항에서 진술한 내용과 같습니다.
문: 피의자는 鄭泰默이란 사람을 알고 있는가요.
답: 네.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鄭泰默은 저의 목포상업학교 1년 선배로 1946년 제가 신민당 목포시 조직부장을 할 때 공산당원으로 좌익활동을 하다가 1946년 11월경 검거선풍 후 행불되었었는데 6·25당시 서울에서 들은 말로는 서대문 형무소에 있다가 사변으로 출소하였다 하였고, 1967년 제가 목포에서 제7代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였을 때 몇 번 만났는데 고향인 荏子島(임자도)에서 염전을 한다고 하며 저의 선거운동을 도와 준 일이 있는데 후에 들으니 간첩으로 남파된 자였고 체포되어 사형당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문: 피의자는 선거운동 당시 어떤 도움을 받았는가요.
답: 당시 鄭泰默으로부터 금전적 도움을 받은 것은 없습니다만 1967년 5월경 제가 선거운동본부로 쓰고 있던 목포시 죽동 소재 한일 여관에 2~3차 찾아와 격려의 말과 함께 지금 이름은 기억할 수 없는 국민학교 선생 등 荏子島 사람 2~3명을 선거운동원으로 소개시켜 준 사실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는 당시 鄭泰默이 북괴의 간첩인 사실을 알지 못하였던가요.
답: 당시 鄭泰默이 여당인 공화당을 욕하는 소리를 들은 바는 있으나 제가 야당으로 입후보하였기 때문에 저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으로 가볍게 생각하였을 뿐 그가 북괴의 간첩인 사실은 전혀 몰랐습니다.
문: 피의자가 7代 국회의원 당선 이후 鄭泰默을 만난 사실이 있는가요.
답: 1967년 9월경 서울 뉴 코리아 호텔 지하 다방에서 목포상업학교 5년 선배인 金씨의 사업 관계 부탁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잠깐 보았을 뿐입니다.●
<6편에서 계속>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5)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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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1-21, 1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