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의 김대중 연구(6)
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金大中 연구③-1;
「암살기도」라는 김대중 교통사고 30년 만의 현장 검증;
禹 鍾 昌 月刊朝鮮 기자
현장을 찾아서
아침부터 전국에 짙은 안개가 낀 2001년 3월2일 오후 4시경, 기자(禹鍾昌)는 木浦市(목포시) 외곽에 위치한 삼향洞의 「대양 검문소」 앞에 서 있었다. 이 검문소는 木浦에서 務安(무안), 羅州(나주)를 거쳐 光州(광주)로 가는 4차선 옛 국도와 木浦에서 서울로 향하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갈라지는 3거리에 있다. 「대양 검문소」는 木浦와 외지를 연결하는 관문이었다.
사건 발생 그날, 東亞日報는 이렇게 보도했다.
<【木浦】 (1971년 5월)24일 오전 9시 반경 전남 무안郡 삼양面 대양里 앞길에서 木浦를 떠나 光州로 가던 신민당 前 대통령 후보 金大中씨의 승용차 서울자3-8797호 크라운(운전사 양승만·28)이 앞에서 오던 경기 영 7-4755호 트럭(운전사 權重億·36)을 피하려다 높이 2m의 길옆 개울로 처박혀 金씨는 오른손에 찰과상을 입고, 비서실장 李明雨(이명우·45)씨와 비서관 權魯甲(권노갑·45)씨가 각각 중경상을 입었다.
또 뒤따라오던 木浦 다니엘 회사 소속 전남 영 1-2160호 코로나(운전사 崔정로·29)도 이 트럭과 정면 충돌, 운전사 崔씨가 현장에서 숨졌다. 金씨는 인근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후 열차 편으로 서울로 떠났다>
이날字 朝鮮日報 보도도 東亞日報와 비슷했다. 두 신문은 사고 현장을 「전남 무안군 삼양면 대양리 앞길」이라고 막연하게 보도했다(편집자 注: 두 신문은 삼향面을 삼양面으로 誤記했다). 다음날 續報(속보)에 따르면 현장은 「무안경찰서에서 10분 거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단서를 갖고 기자는 목포~광주 간 國道에서 務安郡 일대를 집중적으로 살폈다.
金大中 대통령을 치료한 李和東씨 가족
무안郡 청계面 남안里에서 이장을 지냈다는 정판성씨로부터 『지산재 부근의 군부대 근처에서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지산재 밑의 마을에서 40년을 살고 있다는 한 할머니가 『대양검문소 부근인데 거기 가서 물어보면 알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도중, 「교통사고를 당한 金大中 대통령 일행을 최초 치료해 준 집의 아들」이라는 李道根(이도근ㆍ54)씨가 나타났다. 『金大中씨의 생명을 구해 주었기 때문에 金大中씨가 대통령이 되면 맨먼저 인사받을 집』이라고 주민들이 이야기하던 그 집의 아들이었다. 교통사고 당시 논 한가운데 외따로 서 있던 농가의 주인이 李씨의 부친 李和東(이화동) 노인이라는 것이다.
李道根씨에게 『金大中 대통령의 경호원을 지낸 李동신씨란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李씨는 『우리 아버지가 李동신씨 당숙이고, 李동신씨는 나한테 6촌 형이 된다』고 말했다. 李씨는 『사고 당시 나는 집에 없었고, 형이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며 金大中 대통령을 치료한 경위는 자기 형이 잘 안다고 말했다.
李道根씨의 형 李敬根(이경근·57)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金大中씨가 탄 승용차는 트럭에 부딪히는 순간 약 5m 가량을 공중에 붕떠서, 개울을 건너 논에 떨어졌습니다. 검문소 자리가 옛날 개울이었죠. 검문소 옆, 현대주유소가 들어 서 있는 곳이 당시 우리 집이었습니다. 그 일대에서는 한 채밖에 없었죠. 그때 내 나이 스물 일곱이었소. 우리 집에 들어올 때 金大中씨는 재건복을 입고 있었는데 옷이 찢어지고 피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어깨도 부상을 입었고요. 마침 우리 집에는 내 아들 기저귀감으로 끊어놓은 광목이 있었어요. 그 광목으로 피를 막았습니다』
―그날 날씨는 어떠했습니까.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그날, 교통사고가 참 많이 발생했습니다』
―도로 상태는 어땠습니까.
『1968년부터 2차선 확장공사가 시작되었고 1971년경에 아스팔트 포장이 이뤄졌습니다. 아스팔트 포장이 되고나서 얼마 안 돼 金大中씨 교통사고가 일어났습니다. S자 커브길인데다 도로가 갓 포장되어서 빗길에 미끄러지는 사고가 많았습니다. 당시 대양里는 사고 다발지역이었습니다』
교통사고 현장인 대양검문소 앞 도로는 왕복 8차선의 大路(대로)로 넓혀져 있었다. 30년의 세월이 도로를 넓혀놓기는 했으나 주변의 山勢(산세)까지는 바꾸지 못했다. 보면 볼수록 이곳 지형은 참 묘했다. 약 100m 가량의 평지를 사이에 두고,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이 만나고 있었고, 평지 중간 지점에 대양 검문소가 있었다.
목격자들의 증언과 사고현장 지형을 종합할 때 이 사고는 목포에서 광주 방향으로 고갯마루에서 내려오던 金大中 의원 승용차와, 맞은 편 내리막길 뒤편에서 올라와 평지로 들어서던 트럭이 평지에서 맞부딪친 것이다(그림 참조).
목포에서 광주 쪽으로 가는 고갯마루에서는 위치가 높기 때문에 전방을 살필 수 있으나 내려가는 순간부터 커브길에 접어들어 시야가 막히고 평지에 이르면 맞은 편 내리막길의 뒤편에서 올라오는 차량을 보기 힘든, 교묘한 사각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평지 중간인 대양검문소 앞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점으로 미뤄, 고갯마루에서 커브길을 내려오던 金大中 의원 승용차와 내리막길 뒤편에서 올라오던 화물트럭은 100m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달려온 셈이다.
기자는 당시 수사검사였던 許京萬 전남지사를 그의 집무실에서 만나 사고 상황을 再확인해 보았다.
추월, 중앙선 침범 여부
이 교통사고의 직접적인 원인 규명과 관련된 쟁점의 하나는 「추월」 여부다. 許京萬 지사는 金大中 의원 승용차가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앞에 가던 택시를 추월한 후 자기 차선을 달리다가 사고가 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金珍培(김진배ㆍ민주당 국회의원)씨가 쓴 「金大中 受難史-인동초의 새벽」(1987년 10월31일 발행)에는 택시가 金大中 의원의 승용차를 추월하려다 사고가 일어났다고 기록돼 있다.
金大中 대통령 취임 1주년이었던 1999년 2월25일에 발행된 「김대중 자서전①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라는 책에도 金대통령이 탄 승용차의 뒤쪽에서 달려오던 택시가 경호차를 추월해 金의원 승용차 바로 뒤에 붙어서 달리다가 사고가 났다고 기록, 許지사 주장과 상황이 다르다. 인용하면 이렇다.
<光州·木浦 간 도로의 중간 지점인 務安郡 지점에 들어섰을 때였다. 갑자기 택시 한 대가 내(金大中) 차와 뒤의 경호차 사이에 끼어들었다. 택시에는 앞 좌석에 3명, 뒷좌석에 3명이 타고 있었다. 신혼부부인 그들은 날 보더니 반가워서 아는 체를 하려고 끼어든 것이었다>
許지사는 月刊朝鮮에 대한 반론문에서 金大中 의원 승용차는 택시를 추월한 후에 자기 차선으로 진입해 정상적으로 달리고 있던 중 잠시 후에 사고가 발생했다고 주장했으나 金大中 의원 승용차가 택시를 추월한 구체적인 지점을 반론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위에 언급한 金대통령 자서전에도 나와 있지만 사고 당시 金大中 의원은 경호차 두 대의 경호를 받으며 광주로 가고 있었다. 金의원 승용차에는 앞좌석에 운전사 양승만씨와 비서실장 李明雨씨가 탔고, 뒷좌석에는 金의원과 비서 權魯甲씨가 앉아 있었다.
경호원 증언:『택시의 추월시도를 막다가…』
金의원이 탄 승용차 바로 뒤에는 경호원 咸允植(함윤식), 李동신씨 등이 탄 경호용 택시와 金의원 주치의 이경호(李姬鎬 여사의 오빠)씨가 탄 경호용 택시가 뒤따르고 있었다.
咸씨는 「동교동 24시」란 책에서 이 교통사고를 언급한 적이 있다. 다음은 咸允植씨와의 일문일답.
―사고 당시 金대통령을 경호한 차량은 몇 대나 됩니까.
『그날은 목포공항에서 항공편으로 상경할 계획이어서 승용차와 운전사들은 하루 전날 서울로 출발시켰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결항하는 바람에 목포에서 광주공항으로 가기 위해 크라운 승용차 한 대와 택시 두 대를 빌렸습니다. 金大中씨가 탄 크라운 승용차 운전사 양승만씨는 렌터카 회사 소속이었습니다. 선두 1호차에 金大中씨, 2호차에 나를 비롯한 경호원, 3호차에 주치의 이경호씨가 타고 광주를 향해 일렬로 달렸습니다』
―왜 경호차가 맨 앞에 나서지 않았습니까.
『대절한 택시였기 때문에 앞장 서지를 못하고 1호차 바로 뒤에 따라 붙은 겁니다』
―날씨는 어땠습니까.
『가랑비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세찬 비도 아니었지만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시야가 뿌옇게 흐린 상태였어요』
─사고 직전의 상황을 말해 주십시오.
『저는 경호를 맡은 사람으로서 2호차 택시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서 선두 1호차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택시 한 대가 3호차를 추월한 후 제가 탄 2호차 뒤에서 깜박이를 켜면서 추월을 시도했습니다. 저는 운전사에게 추월시켜 주라고 지시했습니다. 제 차를 추월한 택시는 다시 라이트를 켰다 껐다 하면서 선두 1호차를 추월하기 위해 몇 차례 차선을 넘나들었습니다. 편도 1차선 도로인데 그때마다 1호차가 추월을 막았습니다. 저러다가 사고가 날까 싶어 저는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1호차에게 택시를 먼저 통과시켜 주라는 신호를 보냈는데, 1호차(金大中 의원이 탄 크라운 차) 운전사가 계속 추월을 막았던 것입니다. 그때 제가 클랙슨을 울리며 강력하게 택시를 추월시켜 주라고 의사표시를 해야 했는데 그걸 못했어요. 그러다가 사고가 났던 겁니다. 제가 강하게 제지 못해 몇 사람이 죽은 것을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사고 지점에서는 어느 차가 중앙선을 넘었습니까.
『택시가 추월을 시도하고 있는데 고갯길이 나타났습니다. 택시는 속력을 내며 1호차 뒤에 바짝 따라 붙은 뒤 고개를 넘어 내리막 길로 들어서자 추월하기 위해 중앙선을 넘어 왼쪽으로 달렸습니다. 그러자 1호차도 추월을 막으려고 왼쪽 차선으로 들어갔습니다. 두 차 다 중앙선을 넘어버렸죠. 그 순간 트럭의 윗 덮개가 보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앞에서 트럭이 나타났습니다. 피하기가 힘든 아주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중앙선을 침범한 1호차와 택시가 트럭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1호차 운전사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어 자기 차선으로 들어서는 바람에 왼쪽 뒷부분을 트럭에 부딪치며 논에 떨어졌고, 1호차 뒤에 있던 택시만 트럭과 정면 충돌했던 것입니다. 트럭이 1호차 왼쪽 뒷부분과 충돌했기 때문에 1호차 뒷좌석 왼쪽에 타고 있던 權魯甲씨가 왼쪽 목에 부상을 입었던 것입니다.
사고는 1호차가 택시의 추월을 막으려 하다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사고 후 렌트한 승용차 운전사에게 「택시를 먼저 보내 주라고 그렇게 신호했는데도 듣지 않고 추월경쟁을 벌여 사고를 냈느냐」며 굉장히 혼내 주었습니다. 그 운전사는 호남의 존경받는 정치지도자 金大中씨를 자기 차에 모셨다는 우쭐한 기분에서 양보해 주지 않았던 것으로 봅니다』 <7편에서 계속>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6)
- 禹鍾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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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1-21, 1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