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軍의 6.25 - 육군 3사단 본부중대원 포로되다
인민군 대좌는 우리 앞에 나타나 일장 사설을 늘어 놓았다.
『…동무들의 영웅적인 거사를 높이 찬양하는 뜻에서 동무들에게 해방戰士라는 영웅적 칭호를 부여합니다』
박 종 익 서울 동대문구 전농3동
敵 매복에 걸려 포로가 되다
나는 1950년 9월8일 피난지인 부산에서 軍에 입대, 일주일 만에 군사훈련의 全 과정을 마치고 동부전선에 포진한 육군 3사단 23연대 본부중대 인사과 행정요원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치열하였던 포항전투가 끝났을 때였고, 인민군이 全 전선에서 총퇴각할 무렵이었다.
우리 부대는 인민군을 추격하면서 北進, 10월5일에는 38선을 넘었고, 원산, 함흥, 성진, 길주를 거쳐 12월 초순경 함경북도 백암에 이르렀고 전방부대는 두만강 국경 가까이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작전상 후퇴하게 되었으며, 1951년 1월6일(?) 성진에서 L.S.T에 승선 南下(남하)하였다.
동해안 울진 근처 항구에서 하선한 우리 부대는 강원도 태백, 정선, 평창을 거쳐 홍천에까지 진격하였다.
전방에서는 영하 20도가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우리 후방의 본부중대원들은 전쟁의 참상과 고통을 모른 채, 비교적 편안한 軍복무를 하면서 전방부대의 뒤를 따라다녔다.
1월20일, 우리 중대원들은 홍천에서 전투 중인 전방 부대를 따라가기 위하여 홍천에서 가까운 평창군의 산간 마을에서 1박하고 동틀 무렵에 대열을 정비하고 홍천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군가를 부르면서 새벽의 고요를 뚫고 1㎞쯤 갔을 때, 전방 우측 산 중턱에 인민군복 차림을 한 사람이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대열 선두에서 선임하사가 수하(암호)를 외치자 그 사람은 쏜살같이 山頂(산정)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에 선임하사는 적군임을 감지하고 그를 향하여 발사하였다. 그 순간 사방에 매복하고 있던 인민군들이 우리를 향하여 응사하였다. 전방 부대가 포위된 것을 모르고 敵의 포위망을 지나다가 당한 봉변이었으며, 기습에 당황한 우리는 풍비박산, 백설이 수북이 쌓인 길가 논두렁에 머리를 박고 敵에게 대항조차 못하였다. 한 마디로 오합지졸이었다.
敵은 우리들을 향하여 조여들면서 항복할 것을 종용하였으며, 패색이 짙은 우리들은 총을 버리고, 양팔을 번쩍 들고 항복, 인민군에 의해 산꼭대기로 끌려 올라갔다. 산꼭대기에는 인민군 대좌가 버티고 서서 겁에 질린 우리들을 웃는 얼굴로 대하면서 『동무들! 환영합니다. 팔을 내리시오, 수고가 많소』라며 일일이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동무들은 이 시각부터 영웅적 戰士로…』
인민군들은 우리 포로들을 미리 피워 놓은 숯불로 안내하면서 『동무들 춥지요, 불을 쪼이시오』하는 것이었으며, 숯불 둘레에는 인민군 여군 5명이 하나같이 미소를 짓고 우리들의 손등을 비벼주며 『동무들 고생합니다. 매우 춥지요, 자 어서 몸을 녹이시오』라며 아양을 떨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인민군의 태도를 읽었다. 「분명히 무슨 꿍꿍이 속이 있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잔뜩 겁에 질렸던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하였으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반드시 탈출의 기회가 생길 것을 믿었다.
우리 중대원은 100여 명이었는데 포로가 된 수는 50여 명이었으며, 나머지는 도주했거나, 부상 내지는 전사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우리를 포로로 잡은 부대는 인민군 8사단이었다.
우리 포로들은 인민군의 지시에 따라 한 곳으로 집결하였으며, 얼마 후 인민군 대좌가 우리 앞에 나타나 일장 사설을 늘어놓았다.
『국방군 동무들! 국방군을 박차고 우리 인민해방군에 투항한 동무들의 영웅적 거사에 대하여, 우리 민족의 영도자이신 위대한 수령 金日成 장군님을 대신하여 치하하고 환영합니다. 우리의 위대한 수령 金日成 장군께서는 동무들의 영웅적인 거사를 높이 찬양하는 뜻에서 동무들에게 해방전사(이하 포로들을 해방전사라 칭함)라는 영웅적인 칭호를 부여합니다.
동무들은 지금 이 시각부터 조국 해방 대열에 영웅적인 전사로 참여하게 됩니다. 지금의 공포심과 긴장을 풀고 기꺼이 우리와 행동을 같이 하여 주기 바라오』
인민군 대좌의 말이 끝난 후, 해방전사들은 인민군의 감시 속에 산을 내려와 民家(민가)에 분산 수용되었으며, 그로부터 인민군 적치공작대(이하 적공대라 칭함)의 심문을 받았다.
나는 평안도 태생이지만 입대 전에 Y여중, M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관계로 별로 사투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들 사회의 반동인 월남자라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 퍽이나 다행이었다.
심문이 끝난 후 저녁 식사를 하였는데 분산 수용된 집마다 음식의 종류가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인민군의 식량보급은 전방에만 있고, 후방에서는 자급자족을 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집은 강냉이밥, 어떤 집은 찐감자, 찐고구마 아니면 콩밥, 보리밥 등이며 찬이라고는 멀건 된장국 아니면 소금국이었으며, 식기로는 뚝배기, 사발, 대접, 냄비, 양재기 심지어는 바가지까지 등장하였다.
그들은 식량을 民家에서 조달하였으며, 민가에서 뺏은 식량에 대하여는 수령증을 써 주었으며, 후일 인민위원회가 생긴 뒤 수령증을 제출하면 10배의 식량을 받을 수 있다는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이었으며, 해방전사들도 그런 식으로 식량을 조달해야 했으므로 굶기를 밥먹듯 해야만 했다.
세 명의 동지와 함께 탈출
저녁을 마친 해방전사들은 인민군의 지휘 아래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낮에는 공습 때문에 밤에만 이동한다는 것이며, 그날따라 유난히 달이 밝아 끌려 가는 해방전사들의 모습이 처량하고 가엾게만 보였다. 밝은 달을 쳐다보니 불현듯 아내의 모습과 철 모르는 네 살배기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으며, 나는 그리움을 달래기 위하여 무심코 노래를 불렀다.
『아- 신라의 밤이여…』
이때 내 옆에서 걸어오던 인민군 병사가 『동무 조용히 부르기요』라고 하면서 은근히 노래를 배우고 싶어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남한의 가요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마음씨가 무척 착해 보였고 인상도 좋은 편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해방전사 처리에 대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인민군은 턱없이 병력이 부족하여 해방전사들을 일주일 정도 세뇌 교육을 시키고 최전방 총알받이로 투입한다는 것이다. 전투시 용감히 싸워주면 더욱 좋고, 그렇지 않으면 국방군 쪽으로 돌아가도 좋으나, 만일 돌아가게 되면 다음 전투 때 인민군은 포로를 우대한다고 설득, 국방군을 帶同(대동)하여 투항하도록 하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틀 무렵 목적지인 깊숙한 산간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붙들린 해방 전사들이 약 30명 있었다. 그곳은 해방전사들의 세뇌 교육장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세뇌 교육을 받으면서 탈출할 것을 결심하고 동지를 구하였다. S일병, K하사, L하사가 응해주었다.
약 1주일이 지난 어느 날 해방전사들의 머리를 깎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는 해방전사들을 전방에 투입한다는 신호였다. 「전방에 투입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면 되겠지만, 깎은 머리를 하고 어떻게 국군 쪽으로 넘어갈 것인가」라는 생각이 뇌리에 떠올랐다. 「탈출할 때가 왔구나」라고 생각한 나는 3명의 동지와 숙의 끝에 거사하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기로 하였다.
탈출 계획 내용은 식량 공작을 나가서 인민군을 따돌리는 것이었다. 우리를 담당한 인민군 병사에게 식량 공작을 하러 가자고 하였더니 『나 지금 할 일이 있으니 朴동무가 책임지고 다녀오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그때가 낮 12시경이었다. 우리 넷은 죽기를 각오하고 산 정상을 향하여 올라갔다. 다시 붙들릴 것에 대비, 인민군 8사단의 전투 지역을 벗어나기 위해 산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한없이 걸었다. 어느덧 해는 지고 어두운 밤이 되었으나 흰 눈에 덮인 탓에 밤길을 걷기엔 그리 불편함이 없었다.
날이 훤히 밝아올랐다. 한나절, 한밤을 굶주림을 참고 혹한과 싸우면서 걸은 우리는 기진맥진하여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낼 수가 없어서 민가를 찾아 하산하기로 하고 산을 내려갔다. 산 중턱에 민가가 한 채 보였다.
우리는 미친 듯이 민가로 달려가 주인을 불렀다. 50代의 남자가 문을 열고 누구냐고 물으면서 우리를 의아하게 보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국군 낙오병인데 먹을 것을 좀 주시오』라고 하였더니 주인은 친절하게 우리를 방으로 안내하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된장국과 갓 지은 강냉이 밥을 주었다.
밥을 먹고 나니, 路毒(노독)과 식곤증이 엄습하여 주인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한나절이 지나서야 주인이 우리를 깨우는 것이었다. 우리는 부시시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고서야 주인에게 정중한 인사를 하고 주인과 대화를 하였다.
해열제로 어린아이 살려
주인의 말에 의하면 후사가 없어서 20세나 아래인 아낙을 얻어 아들을 낳아 이제 두 살이 되었는데 지금 열병을 앓고 있어 죽을까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때 내 주머니 속에 해열제 「다이아친」이 10여 개 있어서 그것을 먹였더니, 한 나절이 지났을 때 그 아이는 신기하게도 열이 내리고 멀쩡하였다.
주인은 기쁜 나머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요』라며 우리를 으슥한 산 속에 파 놓은 방공호로 안내하였다. 국군이 진주할 때까지 안심하고 지내라고 하면서, 그 주인은 조석으로 식사를 제공해 주고 인민군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기도 하였다.
방공호에 은신한 지 5일 만에 인민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였는데, 운이 나빴던지 인민군이 통신 장비를 설치하기 위하여 우리가 있는 방공호로 찾아 들었다.
우리는 또 포로가 되었으나 다행하게도 인민군 8사단이 아닌 11사단이었다.
우리는 11사단 적공대로 끌려갔으며, 또 다시 세뇌 교육을 받았다. 아쉽게도 우리의 동지인 S일병이 폐질환으로 후송되어 헤어지게 되었다.
동지 하나를 잃고 허전해 하던 차에 공교롭게도 대학시절 반공운동을 같이 했던 K동지를 만나게 되었다.
K동지는 2주일 전에 붙들린 해방전사였으며, 그동안 인민군의 신임을 듬뿍 얻고 있으며, 기회만 되면 탈출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K동지와 같이 탈출하기로 하고 모든 계획을 K동지에게 일임하였다.
다시 잡힌 지 5일 만에 마침내 탈출의 기회는 왔다. K동지와 우리 셋이서 인민군 부상 장교를 야전병원으로 후송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넷은 야전병원의 위치를 파악하고 부상 장교를 들것에 싣고 홍천 후방에 있는 야전병원을 향하여 밤새 걸었다. 부상 장교는 총좌였으며 대퇴부 관통상을 입은 중상자였다. 야전병원에 환자를 인도한 우리는 낮동안 그곳에서 밤이 되기를 기다리며 야전병원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전상자보다는 열병 환자가 더 많았으며, 의약품이 없어서 의료 행위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며 죽어가는 사람이 많았다.
무작정 남쪽으로 탈출
밤이 되어 우리는 귀환 길에 올랐다. 숙의 끝에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온 길을 버리고 무작정 남쪽으로 향하였다.
동이 틀 무렵 우리는 산 중턱에 있는 빈 집을 발견, 그 집 천장에 올라가 숨기로 하였다. 다행히 집안에 날고구마가 있어서 끼니를 때울 수가 있었다.
은신한 지 3일이 되던 날 아침부터 국군의 포탄이 집 근처에 무수히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인민군들은 걸음아 나 살리라는 듯이 걸음을 재촉하면서 후퇴하는 것이었다.
오후가 돼서야 포성과 총성이 그치고 인민군의 왕래도 그쳤으며, 사방은 고요한 장막 속에 묻힌 듯 바람 소리만이 귀를 스쳤다.
해질 무렵에 밖에서 말 소리가 들렸다. 주인을 찾는 소리였다. 그들은 국군 수색대였다. 우리 넷은 전광석화같이 천장에 서 뛰어내려와 그들 품에 안겼다.
그 감격을 무엇으로 표현하리오!
그 날이 바로 2월20일, 30일간의 해방 전사의 딱지를 떼는 날이었다.
6.25 手記/3사단 본부중대원 포로되다
- 박종익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05-11-22, 13: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