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北韓 鐵道員의 증언
내가 만든 태극기 걸고 떠난 함흥行 첫 열차
국군의 北進 후 최선을 다해 철도를 지킨 나에게 누구도 국군의 후퇴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 내 아이들, 나만 믿고 함께 철도를 지켜준 역무원과 그 가족들 누구도 피난 나오지 못했다
한 선 식 부산시 동구 초량2동
1. 南行하는 군용 열차와 6·25 전쟁 발발
내가 여호역에 부임한 것은 1949년 9월의 어느 날이었다. 해발 150m의 산 중턱에 위치한 이 寒驛(한역)은 역 구조가 특이하여 역사에서 내려다보면 때로는 객차 (구식객차) 화장실에서 용변 보는 사람이 보이기도 하였다.
1950년 3월경부터 無側車(무측차)로 탱크와 야포 등 무수한 군용차가 南下(남하)하였다. 4월 들어 無蓋車(무개차)에 석탄을 만재한 長大(장대) 화물열차가 交行하기 위하여 대기 정차하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通票(통표)를 메고 화차 연결기 사이를 넘는 순간 貨車側板(화차측판) 사이로 나무상자가 보인다. 탄약이었다. 위에다 석탄을 싣고 위장한 것이었다. 「전쟁 준비를 하는구나」하고 나는 직감하였다. 6월25일 아침 라디오에서 『적이 38선 전면에서 침공하여 인민군이 일대 반격에 나서 전면전이 시작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나는 「이남에서 침공」이란 보도는 결코 믿지 않았다.
2. 北行열차
전쟁 발발 후 남행열차가 뜸해지고 북행열차가 많아졌는데 남쪽 화차가 눈에 뜨이게 많아졌다. 화차는 똑같은 화차지만 화차에 그려진 「철도마크」로 식별할 수 있었다. 석탄을 사용하는 시절의 철도마크나 숫자는 흰색의 굵은 線(선)으로 그려져 북한에서는 日政(일정) 때 마크를 그냥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남화차는 가는(細) 劃(획)으로 새(鳥) 모양을 그렸고 그 圖案(도안)도 유치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듣는 이남 사투리의 부녀자를 가득 싣은 有蓋(유개) 화차의 문을 반쯤 열고 쇠줄을 잡고 문 밖으로 엉덩이를 내놓고 용변을 보는 여인들…. 전쟁의 양상을 눈앞에서 보았다.
비 오는 어느 날 무개화차에 옷을 홀랑 벗긴 젊은 사람들을 실은 북행열차가 대기 정차하였는데 이들은 추위를 이기려고 신음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포로가 된 以南 군인이 분명하였다.
3. 낮에는 터널 속에 숨고 밤에만 운행하는 열차
경원선 고산역을 지나 함경선 원산 함흥 서호진에 이르기까지 약 200㎞나 되는 긴 구간에는 터널이 없다. 그런데 서호진을 지나 퇴조를 중심으로 남북 40㎞ 구간에 大小(대소) 15개 터널이 있다. 전쟁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보급로 차단을 위해서 철도에 대한 전투기의 기총소사가 심해졌다.
9월부터는 열차를 낮에는 터널 속에 숨겨두고 밤에만 운행하게 되었다. 터널 근처의 역은 바빠졌다. 철도 운전司令(사령)의 지시에 따라 화차를 선별 再편성하여 터널 속에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터널 입구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고 어디서 날아오는지 쌕쌕이 비행기가 소형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했다. 재빨리 산에 올라가 비행기를 살펴보았다. 프로펠라도 없는 저 비행기는 어떻게 하늘을 나는가? 일본을 이긴 미국의 신무기 전쟁의 승패는 뻔하고, 以南이 이긴다고 생각했다.
4. 철도 간부들을 장교로 징집
이북 철도원은 군대식으로 계급 견장을 달고 있었다. 중간역의 역장은 조그마한 별 2개. 9월 어느 날 바로 인접한 퇴조역 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軍 장교로 나가라 하는데 어떻게 하나』하고. 나보다 2세 위인 원봉오씨. 그는 私鐵(사철)인 신흥철도 挾軌(협궤)에 있다가 온 사람인데 성격이 대단히 온순한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그는 해방 후 국철 廣軌(광궤)에 근무하게 돼 업무상 重壓感(중압감)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나의 처와 한 병원에 입원했다가(나의 처는 그 전 해 10월 부임 직후 산후에 과로가 겹쳐 늑막염으로 장기 입원하고 있었다), 퇴원한 지도 얼마 안되고 해서 나는 『나가지 말라』고 극구 만류하였다. 그러나 元역장은 징집에 응해 나가버렸다.
인민군 징집장교는 내게도 왔다. 같은 수법으로 징집에 응해 나가라 한다.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안 나간다고 항거했다. 『처는 입원해 있고 아들과 딸들 그리고 갓난아기(그후 죽었지만)를 두고는 못 나간다』 하며 『나를 죽여라』하고 달려드는 내 험상에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아 징집을 모면하였다.
5. 라디오 모두 몰수해
당시의 라디오는 진공관식으로 상자 같이 생긴 것인데 어느 날 안전부(경찰)에서 라디오를 가져오라 하더니 평양방송만 들리도록 다이알을 고정해 버렸다. 그러다가 며칠 후에는 아예 라디오를 모두 몰수해 갔다. 그러나 친한 사람끼리 口傳(구전)으로 전세를 전하여 UN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서울도 탈환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6. 폭격에 박살난 퇴조驛
흥남에 콤파스를 대고 圓(원)을 그리면 함흥과 퇴조는 하나의 원이 된다. 흥남 철수작전의 그늘에 가려진 조그마한 퇴조역은 이 지역 철도수송의 중요한 시설이 집중된 역이다.
▲북방 장내신호기 밖은 1000분의 14나 되는 急勾配(급구배)이고 ▲따라서 상행열차가 失速(실속)할 때는 脫線(탈선) 犧牲(희생)시키는 安全側線(안전측선)이 있고 ▲給水(급수)와 給炭(급탄)의 시설이 있고 ▲철도의 모든 유선 전화선의 고장을 점검하기 위한 집중점검 시설이 있다.
여호역과 퇴조역 사이는 불과 4㎞. 그 사이에 터널이 4개 있다. 10월13일이었던가 폭격기 한 대가 퇴조 상공을 유유히 선회하더니 역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육중한 폭발음, 통신과 수송은 이 조그마한 역의 폭격으로 완전히 마비되었다.
나는 퇴조역으로 뛰어갔다. 수라장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驛舍(역사)는 완전히 날아갔고 상하 선로는 엿가락처럼 휘어져서 폭탄 구멍 위 허공에 떠있다. 직경 10m 깊이 5m 정도의 구멍이 네 곳. 역장이 징집돼 가고 철도원들은 망연자실하고 있다. 물론 미군이 전략상 필요로 이 조그마한 역을 폭격했겠지만? 철도라는 직장은 차가 안 다니면 할 일이 없다. 하지만 퇴조역 철도원들은 엄청난 일을 하게 되었다.
7.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포성
밤, 아주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포성. 국군이 진격해 오는 포성이다. 간밤에 인민위원회 안전부(경찰)가 도망가고 面民(면민)들이 덕망 있는 분을 면장으로 추대하고 행정과 치안조직을 짜기 위하여 발빠르게 움직였다.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포성은 새로 일을 맡게 될 사람들에게 무언의 용기를 안겨주는 것 같았다.
나도 한산한 근무지 여호역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역무를 조역에게 맡기고 퇴조역을 빨리 복구하기 위하여 자임하고 나섰다. 역원 보선원 전기 탄수원 전원에게 합심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또 전원 열심히 협력해 주었다. 새로 추대된 면장 朴源駒(박원구) 선생에게 선로복구 지원인력 20명을 요청하였더니 쾌히 응낙하여 5일 만에 대강 차가 徐行(서행)할 수 있게 복구하였고 통신시설도 정비하였다.
8. 터널 속의 열차 견인
한편 遠方信號機(원방신호기) 밖 터널속에 있는 열차를 견인하여야 하겠는데 역을 폭격하는 통에 기관사들이 피신하여 탄수원으로 하여금 기관차 상태를 살펴보게 한 결과 火床(화상)에 불씨가 남아 있고 炭水車(탄수차)에도 탄수가 충분하다고 하였다. 불씨를 잘 유지토록 지시하고 기관사 찾기에 나섰다.
이때 연로한 보선원 李翼浩(이익호)씨 댁에 기관사가 은신해 있다는 연락이 있었다. 그를 설득하여 열차를 역 구내로 견인하였다.
9. 아내의 새 치마로 태극기를 만들다
집으로 돌아와 처가 결혼할 때 가지고 온 흰 치마로 대형 태극기 두 장을 만들었다. 8·15 직후 태극기를 잠깐 보았을 뿐 태극기를 모르는 사람이 허다한 그 시절 나도 지금 생각하니 그때 청홍태극은 잘 만들었는데 네 귀에 배치한 네 개의 괘가 순서대로 된 것 같지 않다. 이 태극기는 처음 출발하는 함흥행 열차 기관차 앞에 交叉(교차)로 달기 위해서였다.
10. 「만세」 환호 속에 함흥行 열차 출발
停電(정전)은 발전소에서 송전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급수탑 양수는 증기기관이므로 지장이 없으나 각 역의 신호기 등 체계에는 지장이 있을 것 같고 또 밤을 피하기 위해서 10월19일 낮에 출발키로 하였다. 참으로 어려운 일을 이겨낸 퇴조역 철도원들과 협력해준 面民들의 만세 환호 속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차는 떠났다. 콧등이 찡했다. 모두 고생한 뒤라서 그랬는지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11. 처의 殞命
작년 이맘 때 입원한 처는 항생제 주사가 꼭 필요한데 병원에도 없고 私費(사비)로 페니실린 한 병을 구하는 데 두 달 봉급을 몽땅 줘야 하니 고달픈 생활에 주사도 몇 대 맞지 못했다. 약 1주일 동안 북새통에 처를 돌보지 못해 죽음을 앞당긴 것 같다.
1950년 10월20일 오후 1시 처는 내 품에 안겨 『애들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처의 장례를 치르라는 듯 열차운행도 없고 전기도 들어왔다. 폭격으로 부서진 역사 판자를 주워다 棺(관)을 만들고 철도원들이 도와주어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12. 육군 301철도연대 수송 감독관
당시 자동차는 별로 없고 군수물자 수송은 철도에 의존하였다. 11월 초 어느 날 감독관 육군중위 李哲遠(이철원)이 육군중사 金昌洙(김창수)를 대동하고 왔다. 중사 김창수는 호남 사투리였고 중위 이철원은 함경도 사투리인데 내가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 같았다.
日政 때 내가 車掌(차장)할 때 어느 역에서 보았던가? 생각하면서 반갑게 맞이하려는 나에게 威嚴(위엄)으로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수송은 내 지시를 받으시오』
역원들 앞에서 나는 無顔(무안)을 당하고 伏地(복지)자세가 됐다. 그런데 李중위는 퇴조역에 주재해야 하겠는데 역사가 전파되고 다섯 평 정도의 창고에 機器(기기)를 넣고 역무를 보기 때문에 앉을 자리도 없다면서 마전역을 정위치로 하겠다 하고 가버렸다.
13. 후퇴 작전과 감독관의 명령
후퇴 작전이란 정식통보된 것은 아니지만 남행열차 횟수가 많아지고 군수물자(철조망) 등이 逆送(역송)돼 내려오고 무개차에 편승해오는 민간인은 軍에 의해 퇴조역 이남으로 못 가도록 강제하차, 제지당했다. 어수선한 공기로 후퇴를 감지하지만 원자탄을 가지고 있는 막강한 미국과 UN군을 신뢰하였다. 이때 감독관의 명령이 왔다.
『모든 남행 열차의 空화차는 퇴조역에 解放留置(해방유치)하고 영차(짐싣은 차)와 기관차만 선별편성해 출발케 하라』
퇴조역은 上下(상하)본선과 측선 2, 화물선 1, 짧은 안전측선 1이 전부인데 순식간에 만선이 됐다.
14. 閉塞區間(폐색구간)에 無通票로 열차가 마구 진입, 安全守則을 완전 무시
신호기 밖에 3개 열차가 無通票(무통표)로 진입해 와 추돌의 위험이 있어 나는 장내 선을 비우기 위해 장대열차를 편성해 인접 역으로 출발시키니 다음 구간 도중에서 견인력 부족 때문에 정지하였다. 할 수 없이 열차의 전반 후반을 잘라 분할운전을 하려고 하니 후반의 군인이 총검으로 나를 위협해 내가 인질이 되었다. 군인과 기관차에 동승하여 앞부분을 여호역에 유치하고 돌아와 뒷부분을 보내고 밤길을 도보로 역에 돌아오니 나와 모든 철도원은 지칠 대로 지쳤다.
15. 「중요시설을 파괴하고 후퇴 하라」
퇴조역 유선전화 시설에 전화선을 연결하면 교환을 거치지 않고 성진에 직통전화를 할 수 있었다. 감독관 이철원 중위는 1950년 12월7일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나에게 전해왔다. 「성진역을 출발하는 최종열차를 엄호하고 중요시설을 파괴하고 후퇴하라」는 내용이다.
수신자는 3사단 23연대 尉官(위관)이었다. 이 짧은 명령을 전하는데 처음에 잘 들리던 전화가 도중에서 도청하는 탓인지 잘 안 들렸다. 나는 이 명령을 전달한 다음 목이 쉬어 오랫동안 發聲(발성)을 못했다.
16. 『왜 열차를 빨리 받지 않느냐』
신호기 밖에는 여전히 2개 열차가 있고 그뒤에 최종열차가 무통표로 진입했고 그차는 원방신호기 밖 터널 속에 정차하였다. 선착 열차순으로 再편성해서 보낸 다음 마지막으로 최종열차가 장내로 진입해 왔다. 기관차에 동승해온 젊은 군인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실탄이 裝塡(장전)된 소총으로 내 가슴을 쿡쿡 찌르며 『왜 차를 빨리 받지 않느냐』고 했다.
이 광경을 본 역원들이 상스러운 함경도 사투리로 『네놈이 날고 뛰어도 먼저는 못 간다』는 식으로 나를 감싸주어 역원들 앞에서 나는 울었다. 이 열차에는 성진, 단천 지방의 철도원과 가족들도 동승해 있었다. 아직도 구내에는 기관차 세 대(데호형1 미카형1 소리형1), 그리고 수많은 영차가 남아 있다.
17. 밤 하늘에 불덩어리가 수없이 날고 급수井의 물이 마르고 돌연 통신이 끊겼다
흥남에서 함흥 쪽으로 발사하는 함포탄이 불덩어리가 되어 수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감독관 李중위는 퇴조역 현황을 보고받았다. 내가 언제까지 역무에 매달려야 하는가 의논하려고 전화하니 안 받는다. 여호역을 통해 폐색전화로 호출해도 안된다. 일순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보선용 핸드카를 타고 마전역에 나오니 역사가 텅 비어 있다. 서호진도 흥남도 함흥기관구로 갔다. 여기에서 李중위를 만났다.
18. 豹變한 감독관 이철원 육군중위
이때 李중위는 승무원 대기실에서 젊은 여자들(전화 교환수로 보임) 10여 명에게 軍 작업복을 갈아 입히면서 喜喜樂樂(희희낙락)하고 있었다. 내가 다급히 쉰 목소리로 퇴조역 현황을 말하니 그는 듣지도 않고 나를 언제 봤느냐 하는 식이다. 급히 밖으로 나와보니 타고 왔던 핸드카가 없어졌다. 함흥에서 퇴조까지 죽기로 뛰었다.
19. 驛舍가 텅 비어 있고 200m 저쪽에서 함포가 작렬하고 있다
역에 당도하니 역사가 텅 비어 있고 200m 저쪽 사동리 앞 밭에서 흥남에서 발사한 것으로 보이는 함포가 작렬하고 밭 사이의 길을 걷던 여인이 폭사하는 것이 보인다. 다급하게 집에 뛰어와 보니 애들도 보이지 않는다. 이름을 불러도 목이 쉬어 말이 나가지 않는다. 안절부절 못면서 허둥거리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했다.
함흥에서 뛰어올 때 본 흥남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수십만 아니 수백만으로 보였다. 「저 사람들이 무슨 수로 배를 다 탈 수 있단 말인가?」 후퇴할 때 협력한 이유로 나는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다. 처가 임종 때 『애들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생각하며, 그렇다 어차피 죽을 바엔 혼자 죽어야지 배를 못 타면 바다에 투신자살하겠다는 각오가 섰다. 거리는 죽은 듯 고요하다가도 역 뒤에서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사방에서 개들이 미친 듯이 짖어댄다.
20. 『아이 레일 스테이션 맨』
흥남을 향하여 혼자 뛰었다. 애들이 무사하기를 빌면서. 해가 지기 시작해 서호진 터널을 통과하지 못하고 터널 위를 넘어가는데 빵떡모자를 쓴 캐나다 병사가 무슨 소리를 지르며 내게 총검을 들이댄다. 나는 양손을 들고 외쳤다.
『아이 레일 스테이션 맨(I RAIL STATION MAN)』
손짓 발짓 이 외마디 영어가 통했는지 경계선을 통과할 수 있었다. 8·15 해방 때 「로스케」 병사에게 써먹은 외마디 영어다.
21. 사람에 밀려서 LST선상에 올랐다
배가 항로를 잡기 위해 퇴조 앞바다 쪽을 향하는 것 같다. 퇴조는 연기에 뒤덮여 있다. 나는 주먹으로 뱃전을 두들기며 하염없이 울었다. 추위에 떨며 얼마나 지났을까. 일본말 소리가 들려 쳐다 보니 선원이었다. 내가 일본말로 『오늘이 며칠 입니까』하니, 그는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요』라고 했다. 내가 다시 『이배는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으니 그는 『거제도』 하고 가 버렸다.
22. 감독관 육군중위 이철원 당신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흥남 철수의 사실상 최북단 퇴조역에서 최종열차 출발 직후 불과 몇분 전까지 남아 있는 기관차 화차에 대하여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던 이철원 중위는 忠直(충직)한 퇴조 철도원에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먼저 후퇴해 버렸다. 그리고 함흥기관구에서 여인들과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어촌 퇴조 시민은 수백 명이 전란을 피해 월남을 하였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과신한 까닭에 나의 거동만 보고 열심히 따라주던 퇴조 全철도원과 그 가족들은 한 사람도 피란, 월남을 하지 못했다. 내 자식들도. 나는 많은 퇴조 철도원과 그 가족들 그리고 내 자식들에게 지울 수 없는 恨(한)을 안겨주었고 반세기 오늘날까지 苦惱(고뇌)에 싸여 있다.
23. 6·25 전쟁 발발 전에 월남한 자와 전쟁 발발 후(1·4 후퇴)에 월남한 자
6·25 전쟁 발발 전에 월남한 사람 특히 軍과 官에 복무하는 사람 중에는 애국자로 自處(자처)하고 우월감과 고자세를 갖는 이들이 많다. 반면 전쟁 중(1·4후퇴)에 월남한 사람은 非애국자로 卑下(비하) 열등시하는 拙者(졸자)를 많이 보았고 또 侮蔑(모멸)도 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受侮(수모)를 잘 소화하고 분발 노력하였다. 우리는 후일 통일시에 이런 졸자 행세를 해서는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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