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는 唐과 聯盟에 依하여 百濟와 高句麗를 征服하였다. 그러나 實質上으로 大同江·元山 以南의 半島를 統一한 것은 六七六年 頃이었으니, 新羅는 이 統一大業의 完成을 爲하여 約 十六年 間 唐軍과 鬪爭하는 苦難을 겪었던 것이다.
唐은 百濟·高句麗王朝를 顚覆한 後 羅·唐 同盟 當初부터 가졌던 內凶心를 暴露하여, 그 占領地를 모조리 自己의 所有로 하였다. 그래서 百濟에는 態津 以下 五箇所에 都督府를 두어 이것을 統治하였는데 王文度를 初代의 態津都督으로 하고, 部將 劉仁願으로 하여금 唐兵 一萬으로써 사비성에 駐屯하게 하였으며 新羅에게 준 것은 王子 金仁泰로서 그 副將의 地位에 둔 것 뿐이었다. 어디까지나 新羅를 利用의 方便으로서만 弄絡하고자 하는 政策이었다. 이에 順從하는 것은 新羅의 統一理想의 蹂躪을 意味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唐은 그 傳統政策에 基하여, 民族的인 支配政策을 取하지 않고, 漢의 樂浪郡 同樣으로 다른 四 都督府와 府 州 縣의 都督·刺史·縣令에는 모두 百濟人을 任用하였다. 一方으로 高句麗에는 西域地方의 土耳其民族에 對한 安西都護付·北庭都護付와 同格으로 平壤에 安東都護府를 두고, 薛仁貴를 그 都護使에 任命하여 二萬兵으로써 이에 駐屯하게 하였으나 餘他의 府 州 縣에는 亦是 高句麗人을 任用하여 그 都督 刺史·縣令 等에 任命하였다. 이것은 民族的 支配에 依한 無用한 民族感情의 挑發을 回避하고, 將來 適當한 機會에 親唐的인 다른 臣服王朝를 再建하여 堂室의 安全과 商業的 利益을 꾀하려는 政策이었으니, 果然 未久에 六七七年 義慈王子 抉餘隆을 帶方王으로, 또 寶藏王을 朝鮮王으로 封하여 兩國의 再建을 計劃하였다. 이것이 비록 成功하지는 못하였으나 樂浪國에 對한 그것과 全然 同一한 思想과 方法이었음을 알 수 있다.
唐의 獨存思想은 同盟國인 新羅에 向해서도 一方的으로 强制適用되어, 新羅도 唐의 屬領視하여, 慶州에 鷄林都督付라는 것을 두고 新羅의 文武王을 그 都督에 任命하였다. 新羅는 一時 이에 忍從하지 아니할 수 없었으나 이것은 決코 新羅의 堪耐하지 못할 바이었으니, 첫째 이것은 新羅의 自尊心을 害하는 侮辱이었으며, 둘째 이것은 新羅의 統一理念에 背馳되는 것이었고, 셋째 唐은 少數 兵力으로써 遠隔한 麗·濟 二國을 永久統治하지는 不可能한 일이므로 唐의 兵力의 衰弱과 함께 二國은 當然히 謀叛 獨立하여 다시 新羅의 敵이 될것이었고, 넷째 이 二戰役에 있어 新羅는 多大한 犧牲을 내밀었음에 不拘하고 唐은 新羅에게 一片의 領土도 割讓하지 아니하였으므로써이었다. 三國이 中國의 王室로부터 王·公 等의 爵位를 받는 것은 單純히 外交上의 方便에 不過한 것이요. 또 許多한 境遇에 그것은 中國王室의 强制 贈與이었고, 三國은 모두 內心으로는 民族自尊心에서 恒常 對等的 思想을 所有하였으므로 未開時代와 달라 그러한 外民族의 爵位에는 關心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이에 關해서는 前에도 말한 바 있었지마는 新羅가 一意 親唐에 勞力하였을 時代에 있어서도 그들은 金春秋에게 唐 太宗과 同一한 太宗武烈王의 謚號를 加하여 唐의 問責을 받은 일이 있었고, 또 唐·羅 聯合軍이 百濟를 挾攻하였을 때, 金庾信이 黃山平野에서 百濟將 階伯軍에게 阻止되어 唐軍과 約束한 期日에 挾餘에 到達하지 못하였다는 理由로 唐將 蘇定方은 新羅將 金文永을 處斷하고자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金庾信은 怒髮이 衝天하고 腰間의 寶劍이 스스로 躍出하여 「唐軍과 一戰을 決한 다음에 百濟를 殲滅하리라」라 절규하여 蘇定方으로 하여금 唐慌 狼狽하여 金文永을 釋放하게 하였다고 한다. 新羅人의 意氣와 唐에 對한 心的 態度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態度는 何必 三國에 限 한 것이 아니요, 若干 强弱의 差는 있을망정 高麗·李朝를 通해서도 大禮로 同一하였다.
新羅의 唐에 對한 不滿과 憤怒는 當然한 일이었다. 그러나 新羅는 淵蓋蘇文式 輕動을 警戒하고 隱忍自重하여 外柔內剛 唐에 對하여 外交的으로는 恭順을 表하면서, 或은 唐·契丹·靺鞨의 聯合軍과 八年 間에 大小 五十餘戰을 敢行한 後 實力으로써 半島 內의 唐兵을 漸次的으로 驅逐하여 六七六年頃(文武王 十六年) 겨우 大同江 以南과 元山 以南의 半島를 完全히 占領 統一하고 그 以上의 北進을 斷念하였으니, 百濟 强亡 後 實로 十六年의 歲月을 要하였다. 이러한 唐과의 鬪爭은 新羅가 唐과 同盟하였을 當初부터 이미 覺悟하였던 바 있었을 것이다. 新羅의 이 壓迫에 놀랜 唐은 安東都護府를 平壤으로부터 遼東에 移轉하지 아니할 수 없었고, 또 一方으로는 麗·濟 兩國을 復興하여 新羅를 牽制하고자 하여 前述한 바와 같이 扶餘隆을 帶方王에, 寶藏王을 朝鮮王에 封하여, 百濟·高句麗 代身에 帶方國·朝鮮國의 新建을 꾀하였으나, 新羅와의 衝突이 不利함을 깨달았을 때에는 구태여 이것도 武力으로 强行하려고까지 하지 않고 斷念한 모양이다. 그리고 未久에 高句麗의 故土에는 渤海王國이 일어나(六九九年) 新羅와 唐은 黃海를 隔하여 相隣하게 되었고, 그 뒤로도 北方에는 遼·金·元 等이 繼起하여 漢民族과 朝鮮民族은 約 七百年 間 平和를 持續하였으며 明·淸時代에 있어서도 두 民族 사이의 衝突은 없었다. 이리하여 朝鮮과 韓民族 間의 親善平和關係는 實로 一千二百七年에 亘하여 繼續되었다.
高句麗에 依한 民族統一이 成就되지 못하고 新羅에 依하여 民族과 領土의 半分的 統一이 遂行된 것이 民族的으로 커다란 不幸事이었다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何如間, 新羅의 이 統一에 因하여 朝鮮의 民族은 이에 決定되었던 것이니, 비록 未久에 高句麗 故地에 渤海國이 高句麗 遺民에 依하여 建設되기는 하였으나, 二百三十餘年 間 新羅와의 사이에 注目할만한 아무 交涉도 없이 極히 平穩 無事히 지내다가 九二六年 遼(東蒙古民族)에게 亡하였다. 이리하여 時間의 經過에 따라 滿洲의 土地와 住民은 朝鮮民族 系列로부터 漸漸 離脫하게 되었다. 遼가(九一六年-一一二四年)亡한 뒤 滿洲에서 金帝國(一一一四年-一二三四年)이 渤海 遺民에 依하여 建設되었을 때까지는 그래도 高句麗와의 사이에 兄弟之誼가 持續되었으나, 그 以後로 兩者間에는 血緣的 關係조차 全然 忘却되어, 後世의 滿洲民族(女眞民族)과 朝鮮民族은 別個의 民族으로 되고 만 것이다. 오랜 동안의 政治的·經濟的·社會的 分離生活은 地理的 別異를 招來하고, 또 血緣的 別離와 文化 및 言語의 別離와 歷史의 別離 等을 재래하였다. 이렇게 되면 同一種族이라는 意識과 感情을 일으키게 하는 모든 要素가除脫되어, 元來는 비록 同一血族에 屬하지마는民衆의 感情과 意識은 서로 異民族視하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지금 朝鮮民族의 母體는 當時의 新羅 領土로써 一但 決定되었으니, 그것은 大禮로 大同江 以南과 元山 以南의 土地와 約 八百萬의 人口로 構成되었다. 이 民族은 高麗朝와 李朝 初期 世宗朝)까지에 西北과 東北으로 漸漸 領土와 人民을 獲得하여 現在의 國境線을 이루게 되고, 또 若干의 蒙古民族과 女眞民族을 句攝 同化하여 그것을 朝鮮民族化하였다. 그리하여 李朝 末年까지 約 一千萬의 人口를 가졌던 것이다. 現 朝鮮民族의 完成은 一四三四年(世宗 十六年) 金宗瑞將軍의 咸鏡北道 回復으로부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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