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짜리 눈에 비친 피난과 전쟁
신기하고도 슬픈, 핏빛 하늘
분홍빛 하늘을 배경으로 맴돌다가 솟구치다가 떨어지곤 하던 비행기 구경, 그것은 슬픔과 저주를 민족의 가슴에 안겨다 준 전쟁의 한 모습이었다.
김 부 미 스웨덴 하닝게 거주
어머니의 결심, 『남으로 가자』
황해도 신천군에 살다 해방 후 공산당을 피해 서울로 가신 아버지는 국민학교 교사로 계속 일하시며 가족을 만나러 가끔 밤에 38선을 넘어오곤 하셨다. 그런데 점점 38선 경비가 심해졌다.
어느 날 밤 집에 도착하신 아버지(金堯燮)는 다음날 새벽에 할아버지와 함께 아침 신문을 읽으시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셨다. 신문기사 내용은 사람들이 38선을 넘다가 공산당원들에게 붙들려 사살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기사는 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으나 사진 속의 얼굴은 머리가 짓이겨지고 피로 얼룩져 도저히 누구인지 분별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죄없는 한 사람이 타살되었다는 사실만이 분명할 뿐. 아버지는 그 밤을 기다려 이남으로 가셨고, 다시는 목숨을 건 모험을 하실 수가 없었다.
그때 공산당원들의 심한 공출 독촉이 부유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분이 나쁘다며 못 살게 굴어, 드디어 어머니의 단호한 결정이 내려졌다.
『남으로 가자!』
1947년 늦가을의 어느 날 저녁, 어머니는 소달구지를 빌려 짐을 실었다. 당원들의 눈을 피하느라 밤을 이용한 것이었다. 달구지 주인이 같이 짐을 실었고, 맨 나중에 나와 여동생을 달구지의 맨 앞에 앉혔다.
벌써 별이 총총 빛나고 있었다. 황해도 신천군의 문화면에서부터 외가가 있는 해주까지 남동생을 업은 어머니와 달구지꾼은 밤을 새워 걸었다. 고르지 않은 길이라 달구지가 흔들리는 통에 별을 세다 잠들었던 나는 마른 논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어머니와 달구지꾼은 나와 여동생을 굴러 떨어지지 않게 짐에다 묶으셨다. 어머니는 친정에서 3일간 지낸 후 짐을 그곳에 두고 우리 형제들만 데리고 모험의 길을 떠났다. 청단과 연백을 거쳐 밤배를 타고 몰래 인천항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남하하던 사람들이 당원들의 총탄에 맞아 황해의 물귀신이 되었으나 죽음도 南下(남하)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다. 해안선 경비도 삼엄해졌다.
이런 때 어린애들을 데리고 가는 사람을 태워주겠다는 뱃사공은 아무도 없었다. 배삯의 몇 배를 내겠다고 해도 머리를 저었다. 연백의 여관에서 발이 묶인 채 위급함을 느끼신 어머니는 독립운동가이신 할아버지(金明奎)와 김구 선생님의 이름을 들어가며 설득해, 마침내 뱃사공을 구했다. 불안한 뱃사공은 잊지 않고 말했다.
『만약 애기가 자다 깨어 울면 그땐 모두 물고기밥이 되오』
『우리 애들은 아무 때나 울지 않아요』
어머니는 자신 있게 뱃사공을 안심시켰다.
인천역 계단서 아버지 상봉
그것은 천막을 두른 작은 나룻배였고, 또 칠흑같이 캄캄한 그믐밤이었다. 남동생은 잠들었고, 어머니는 우리들을 두 팔로 품으신 채 한숨과 눈물로 기도를 시작하셨다. 나와 동생들이 자는 동안 배는 무사히 인천에 닿았다.
인천의 기차역, 그곳은 우리 가족에게 잊을 수 없는 운명의 장소다. 北에 있는 가족 때문에 불안해진 아버지가 마침내 뱃길을 따라 고향으로 가서 우리를 데려 오시려고 결정하시고 기차로 인천에 도착하셨다. 아버지는 기차에서 나가려고 계단으로 내려섰고, 어머니와 우리는 기차를 타려고 그 계단으로 올라섰다.
약속하지 않은 그 계단에서 온 가족이 합치게 되었다.
어머니는 남동생을 업으시고, 아버지는 여동생을 안으시고, 난 그냥 걸어서 가야만 했는데 쏟아지는 잠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내 잠을 쫓기 위해 빨간 사과 하나를 내 손에 들려 주셨지만 흔들리는 전차 안에서 밀려드는 잠을 쫓을 길이 없었다.
임시 숙소를 거쳐 우리는 미아리로 이사했다. 바로 큰 길 옆에 방 하나와 부엌 그리고 넓은 마당이 있었다. 그 마당에는 옹기들이 가득 쌓였고, 펌프가 입구 가까이에 있었다. 어머니가 옹기 장사를 시작하신 것이었다. 늘어나는 가족의 수에 비하여 교사의 월급은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부지런하고 현실적인 어머니의 성격 탓이었다.
인민군 행렬
1949년 겨울, 둘째 남동생이 태어났다. 그 작은 방이 넉넉할 리 없었는데도, 아버지는 풍금을 가져다 놓으셨고, 새벽마다 그것을 치셨다. 잠결에 종종 「성불사의 밤」을 들었는데, 그 가락이 한없이 슬프게 느껴졌었다.
「울밑에 선 봉선화」 등 많은 동요와 옛노래들이 새벽하늘을 타고 퍼져나갔는데, 그것은 유일한 위안으로 내 가슴속에 남아 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일찍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쌀 배급을 타러 가셨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며 사람들이 이리저리 허둥거리며 뛰었다.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시던 어머니도 불안해진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안 되겠어, 집으로 가자』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뛰다시피 걸으셨고, 얼마 못 가서 우리는 물밀듯이 행렬지어 미아리의 개천을 건너오는 군인들을 만났다. 그 행렬은 우리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난생 처음 엄청난 행렬을 보는 어린 내겐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그들은 총과 배낭을 메고, 푸른 제복을 입었는데 인민군 행렬이라고 했다.
그 길고 긴 행렬이 끝나자, 이번엔 짐보따리를 이고, 지고 오는 남녀노소로 그 큰 길을 꽉 메웠고, 가족을 찾느라 부르는 아우성으로 그 행렬은 아수라장이었다. 부모를 놓친 아이들은 큰 소리로 울며 엄마 아빠를 외치고, 무작정 밀려가는 행렬에 휩싸여 버렸다.
너무나 뜻하지 않은 광경에 놀란 내 가슴은 무섭게 뛰었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 왔다. 방 안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투고 계셨다.
『우리도 피난가야 해요!』
어머니의 울음 섞인 애원이었다.
『안돼! 지금 나서면 모두 죽게 돼. 어서 풍로에 불 피워 맛있는 밥이나 지어요』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아침을 마련하셨고, 아버지는 모든 이부자리를 다 꺼내어 방바닥에 펴 놓으셨다. 그리고는 우리 4남매를 모두 이불 속으로 들였다. 맛있는 팥밥이 준비되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번갈아 식사 기도를 하셨다. 불안과 긴장이 감도는 속에서 그 맛있어야 할 팥밥이 제대로 목구멍을 넘어갈 리가 없었다. 대강 먹는 시늉만 하고 상을 치운 뒤, 온 가족이 겹겹으로 이불을 머리까지 푹 뒤집어 쓰고 앉아 있었다.
어린 내겐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그건 총알을 막기 위한 것이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오열이 섞인 기도가 다시 시작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밖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이것이 만 아홉 살이 채 못된 내 기억 속에 남겨진 6·25 동란의 첫 장면이었다.
한낮인데도 사방은 밤처럼 고요했고, 가끔 누군가를 부르고 지시하는 외침이 들려올 뿐 다시 정적으로 빠져들곤 했다. 갑자기 피웅하는 소리가 쏟아지며 총알들이 벽을 뚫고 날아들었다. 앞으로 뒤로 뚫린 구멍들이 무슨 무늬인 양 벽과 창호지 문을 장식했다.
어린 나에겐 절망보다 긴장과 호기심이 더 크게 발동했다. 살금살금 기어가 뚫린 벽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총을 멘 군인들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급히 이불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도 달려나갔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그들의 시선을 따라 의정부 쪽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저녁 노을보다 더 붉게 하늘이 물들어 있었다. 북쪽 하늘이라 저녁 노을이 설 리 없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한 대의 비행기가 그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나타났고, 잠시 후 빙글빙글 몸체를 돌리다 폭발되어 떨어지는 것이었다.
『와!』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다시 몇 대의 비행기가 나타나 그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맴돌다 날아가 버렸다. 아름답고 신기하게만 느껴졌던 신기루 같은 그 분홍빛 하늘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슬픔과 저주를 우리 민족의 가슴에 안겨준 6·25 동란의 한 모습이었다.
유엔군 트럭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달려나가 그쪽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두 번 다시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다.
어느 날 한낮이었다. 세 살난 남동생이 큰 길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아주 크고 높은 유엔군 트럭이 달려왔다.
동생은 꼼짝않고 선 채로 달려오는 차를 바라보고 있었고 군용트럭은 멈추지도 않은 채 그냥 동생을 향해 달려갔다. 밖에 나와 있던 동네 사람들은 신음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뜬 동네 사람들은 자기네의 눈을 의심했다. 길 한 가운데 여전히 동생은 우뚝 서 있었고, 군용트럭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어른들이 달려와 동생을 안아 집으로 데려갔다. 그 애는 아무 데도 다친 데가 없었고, 그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차 바퀴들이 보통 이상으로 컸고, 차체가 높아 세 살짜리의 키를 훨씬 넘었던 것이 운이었다.
아버지는 『짓궂고 고약한 유엔군 운전사였다』고 한 마디 하셨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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