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手記/여섯 살 소녀의 목격記



여섯 살 소녀의 목격記

할머니를 괴롭힌 인민군이 물러나던 날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비단 이불을 뜯어 태극기를 꺼내 들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셨다. 기쁨과 슬픔에 겨우신 듯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인민군에 끌려간 아버지는 3년 만에 돌아오셨으나…

김 평 순 충남 공주시 옥룡동





보리 타작中 피난길 올라

엄청나게 무섭고 비참한 전쟁이었다. 내 나이 겨우 여섯 살 때 6·25를 겪었지만, 49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오늘도 또렷이 기억하는 건, 당시 받은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충남 공주 의당면 요룡리에도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져 집집마다 방공호를 파놓으라는 지시가 있었다. 곧 남하하는 북한 괴뢰군의 진공을 지연시킨다는 목적으로 1950년 7월13일 새벽, 공주의 명소인 「금강다리」를 폭파하는 아주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7월14일 낮, 나는 동네 아이들과 냇물에 첨벙첨벙 뛰어들어 신나게 멱을 감고 있었다.

그때 별안간 『탕탕탕』 하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공포감을 주는 총과 대포를 쏘아대는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들은 잔뜩 겁에 질려 재빨리 옷을 입고 정신없이 각자 집으로 뛰었다.

마침 우리 집은 마지막 보리 타작중이어서, 마당에 보릿단을 널어 놓고 도리깨질을 하고 있었는데, 할머니와 아버지는 어쩔 줄 몰라 하셨다. 만삭의 엄마는 마당 구석 방공호에 무언가 힘겹게 옮기고 계셨다. 너무나 궁금하고 호기심 많은 나는 슬그머니 집을 나와 온 동네를 쏘다니며 구경을 했다. 온통 『난리가 났다』고 야단이었고 벌써 피난길에 오르는 이웃이 보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집에 오니, 보리 타작은 하지도 못한 채 헛간에 쌓아 두고 피난 준비를 해놓았다.

엄마는 머지 않아 해산하고자 외갓집인 두만리로 가시고, 아버지는 홑이불과 양식을 지게에 짊어지고, 할머니(당시 나이 56세)는 세 살 난 여동생을 업고 암탉 한 마리 들고, 나는 잘 걷는다고 새끼 밴 토끼 한 마리를 바구니에 넣어 들려 주었다. 온 식구가 사립문을 나설 때 송아지가 「음매」 하고 울어 마음을 저리게 했다. 동네를 뒤로 하고 신작로에 이르니 피난민이 엄청 많았다.

『야! 지지배들, 죽고 싶어 왔어?』

그 인파 속에서 할머니, 아버지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종종 걸음으로 걸어, 날이 어두워서야 도착한 곳은 무성산 아래 「동백골」이란 아주 깊숙한 산골이었다. 듬성듬성한 촌락에서, 우리는 어떤 집 외양간으로 쓰던 곳을 얻어 들었다. 쇠똥 냄새 나는 흙바닥에 보리짚을 깔고, 멍석을 펴고 잠을 자는데 모기가 자꾸 달려들어 혼났다.

그런데 아버지는 33세 젊은이라 잡혀 갈 대상이어서, 낮에는 산으로 도망을 가 숨어 지내야 했다. 그러다 밤이면 바람처럼 나타나 우릴 품어 주셨다. 피난간 지 보름쯤 되는 어느 날, 깊숙한 그곳에도 인민군이 쳐들어 왔다. 내가 끙끙거리며 가져온 어미 토끼는 귀여운 새끼를 낳아, 금방 커서 피난살이의 설움을 달래주었는데, 인민군이 몽땅 빼앗아 갔다.

더구나 아버지는 잡혀갔는지 우리 곁에 다시는 오지 않았고 소식이 끊겼다. 설상가상으로 가져간 양식도 떨어져 『무엇을 먹고 사나』 하시는 할머니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할머니는 별 수 없이 동생을 업고 나의 손을 꼭 쥐시고는 끼니 때마다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 먹였다. 거지가 된 지 얼마 안되는 8월 말의 아주 무더운 어느 날 아침, 할머니는 여느 날과는 달리 『저기 잠깐 갔다올 테니 잘 놀거라』 하시고는 동생을 업고 나가셨다. 할머니와 떨어지기 싫어 잠시 후 뒤를 밟았다.

뜻밖에 가시는 방향은 저 멀리 우리 집가는 남쪽이었다. 전쟁중인 대지는 뜨거운 햇볕만 쨍쨍,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이 적막했다. 정안천이 유유히 흐르는 모란둑에 이르자, 곳곳에 시체가 눈에 띄었고 어느 곳엔 많은 시체가 버려져 있었는데,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비참한 모습이었다. 파리떼가 들끓고 말할 수 없는 악취가 코를 찔러 얼마나 몸서리쳐졌는지 모른다.

할머니는 무섭지도 않은지, 시체 곁에 떨어진 컵을 주워, 냇물로 들어가시더니 냇물을 떠 마시곤(당시는 먹을 수 있는 물이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멀찍이 떨어져 따라 오는 날 보시더니 얼른 오라고 손짓하셨다. 불안과 공포에 떨던 나는 안심하고 할머니한테 달려가 그리도 가고 싶었던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동네에 들어서자 놀라움과 애통함과 비참함이 말할 수 없었다. 커다란 방앗간이 불탔고, 조금 떨어진 콩밭에는 내 친구 재택이 엄마가 콩밭을 매다 죽어 있었다. 동네에서 양반댁이라고 칭송을 듣던 아주 오래되고 아름다운 기와집, 재화네 사랑채가 불타서 쑥밭이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연못가에 심어진 세 그루의 늙은 향나무가 베어져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제사 지내는 집에서 향불에 쓰고자 자귀로 조금씩 떼어 가던 동네 사람이 아끼는 향나무를…. 다행히 우리 집은 멀쩡했다. 엄마가 장독대 옆에 심은 백일홍이 곱게 피어 문득 엄마 생각을 하게 했다.

뜰방에 올라 안방 문을 여니 방바닥에 웬 군용 이불이 펴져 있었고, 광을 열고 보니, 겉보리쌀밖에 없던 뒤주에는 귀한 쌀이 가득해 놀랐다. 그런데 경악할 만큼 큰 일이 생겼다. 해가 질 무렵, 인민군 일곱 명이 들이닥쳐 『야! 지지배들, 죽고 싶어 왔어? 꼼짝 마라』하고 소리치더니 우리한테 총부리를 겨누려고 했다. 순간, 할머니 등에 업힌 동생은 까무러칠 듯이 울었고, 난 그만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 와중에서도 할머니는 용감하셨다.

『죽어도 내 집에서 죽겠다. 어린 것들 봐서 살려다오!』
손을 빌며 애원하셨다. 그러자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신호를 보내니, 놈은 총을 내렸다. 대신 할머니는 반노예나 다름없는 위안부가 돼, 놈들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루 세 끼, 놈들의 밥짓기며 온갖 궂은일을 하셔야 했고, 밤이면 사랑채에서 문고리를 잠그고 손녀들과 한숨 좀 쉬고 편히 자려는 할머니를 끌고 가서는 죽도록 일을 시키시고는 한밤에야 풀어주곤 했다. 다 죽다시피, 쓰러질 듯 손녀들 곁에 와서 누우시곤 작은 목소리로 『죽일 놈들…』하고 욕을 중얼중얼 퍼붓다가 훌쩍훌쩍 우셨다. 눈치 빠른 나는 몰래 깨어 귀를 기울이고 할머니의 애달픈 분노를 듣고 있었다. 그같은 희생의 대가로 제삿날이 아니면 당시 좀처럼 먹기 어려웠던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니, 쓰레기 같은 아이였다고나 할까.

할머니·아버지의 불행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초가 지붕 위의 박이 익어갈 무렵이었으니 가을이었다고 기억된다. 초가집 황토벽이 심히 흔들리고, 미루나무 위를 지날 정도로 낮게 뜬 유엔군 전투기가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도 공포감을 주던 원수 인민군들이 쫓겨 물러가는 날이 돌아왔다.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비단 이불을 뜯어 태극기를 꺼내 들고, 뒷동산에 올라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셨다. 할머니는 기쁨과 슬픔에 겨우신 듯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아, 아! 얼마 만에 되찾은 자유란 말인가. 소중한 자유를 찾은 사실을 안 어린 나도 목이 메어 할머니와 함께 울었다. 피난갔던 사람들도 하나 둘 돌아오고, 집을 잃거나 식구들을 잃어버린 집에선 통곡하는 소리가, 가슴속 깊이 아프게 들려 왔다. 나의 아버지는 인민군에 끌려가 몇 번의 死線(사선)을 넘어,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홉 살 되던, 전쟁이 끝난 1953년에야 집에 돌아오셨다.

그런 아버지이건만, 한동안 아버지한테는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식구들이 평화스럽게 잠을 자는 밤중에, 느닷없이 방문을 활짝 열고 『빨갱이 나와』 소리치며 잡아가려고 해 마음놓고 살 수가 없었다. 할머니, 아버지의 불행은 전쟁이 가져온 어쩔 수 없는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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