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手記/초등학생이 본 인민재판



초등학교 3년生이 본 인민재판의 모습


몽둥이로 사람을 패죽이다




몽둥이로 때려죽인 시체를 일렬로 운동장에 뉘어 놓았다. 때려죽인 놈들은 인민재판을 구경나온 주민들에게 그 시체를 밟고 가도록 했다

이 용 범 서울 관악구 봉천11동

읍내에서의 연극 구경

나는 충남 예산군 광시면 미곡리 277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윗마을, 아랫마을 합쳐 30여 호가 모여 사는 시골 마을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 장신초등학교(예산군 광시면 장전리 소재·그 당시에는 간이 학교였음)에 입학하여 10여 리 길을 산과 들길을 따라 등교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50년 6·25를 맞았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으로 기억된다.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나는 전과 다름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모든 것이 평화롭기만 하였다. 그런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며칠 있으면 신대초등학교(예산군 광시면 신대리 소재)에서 연극공연이 있으니 우리 학교에서도 모두 다 참가해야 한다고 하셨으며 몇 학생을 모아 음악 연습도 시키셨다. 그때 나도 그중에 끼게 되었으며 며칠간은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으며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기다리던 날(1950년 8월30일)은 내일로 다가왔고 나는 밤잠을 설친 채 일찍 일어나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급우들과 함께 선생님의 인솔하에 읍내 학교를 향하여 산과 들길을 따라 즐겁게 10여 리 길을 걸었다. 가는 길에 비행기가 지나가면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우리들은 풀숲에 숨기도 하며…. 이곳 저곳 각 동네에서 농악대를 앞세우고 흥겨운 농악에 맞춰 많은 사람들이 뒤를 이어 따르고 있었다. 나는 더욱 더 흥분이 되었다. 처음으로 읍내에 있는 학교로 연극을 보러 간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 더욱 그러했다.

8월의 찌는 듯한 더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연극을 보러 간다는 기쁨에 그런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드디어 목적지 운동장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으며 정문을 통하여 일렬로 순서 있게 들어갔다. 나는 우측 제일 앞줄에서 두 번째 줄에 자리하여 연극을 보기에는 아주 좋은 자리였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을까. 넓은 운동장은 각 동네에서 모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이제 조금 후에는 기대하는 연극이 시작되겠지, 초조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기다리며…. 조금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연극을 하려면 그럴 듯한 무대가 있고 무대가 있으면 주위에는 그림이나 연극에 필요한 시설들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교단 위에는 무명치마 저고리를 입은 여인 서너 명이 앉아 있었고 교단 아래쪽에는 젊은 청년 두서너 명이 서 있을 뿐이다. 운동장에는 각 동네에서 모인 사람들로 꽉 차 있건만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

침묵이 흐르고 잠시 후, 젊은 청년 한 사람이 종이로 말아 접은 확성기를 입에 대고 누군가를 호명하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호명된 사람이 관중을 헤치고 교단 앞으로 나왔다. 젊은 청년이 종이로 말아 접은 확성기를 입에 대고 『이 사람을 죽여야 옳소, 살려야 옳소』하고 묻는다. 넓은 운동장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8월의 뜨거운 태양은 작렬하건만…. 지금 여기는 시베리아의 혹독한 한파가 몰아닥친 듯 누구 하나 살려야 옳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민재판

아…, 이럴 수가. 이것이 인민재판이란 말인가! 호명된 사람을 교단 앞 운동장에 무릎 꿇리고 어깨 오른쪽, 왼쪽을 사정없이 몽둥이로 내려친다. 참혹한 현장. 총으로 죽이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몽둥이로 사람을 패 죽이는 현장…. 나는 몸서리가 쳐지고 내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있었건만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이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보기 위해 나는 지난밤 잠도 설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단 말인가. 이 끔찍한 현장을 피하여 도망이라도 하였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었다. 운동장 주위에는 인민군이 총을 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살육은 계속되고 죽은 사람을 한쪽으로 밀어 놓는다.
죽은 사람 가운데는 설죽어서 꿈틀거리는 사람도 있었는데 단상에 앉아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무명치마 저고리의 여인이 쏜살같이 내려와 설죽은 사람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욕설을 퍼부으며 다시 끌어내어 죽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잊었고, 떨어야만 했다. 도중에는 도망가다 잡힌 사람들도 있었는데(2~3명으로 기억됨) 그 사람들은 포승줄로 결박하여 무대앞에 무릎을 꿇려 놓았다. 그날 저녁 시냇가 모래사장에 생매장되었다고 하였다. 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일인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8월의 긴긴 낮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연극은 계속되고 나는 친구의 손을 잡고 그저 떨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우리 아랫마을에 사는 구장 어른이 호명된 것이다. 그 어른이 운동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먼저와 똑같은 방법으로 어깨 우측과 좌측을 사정없이 내려친다. 순간 연세가 높으신 구장 어른이 물구나무서듯 거꾸러지면서 호주머니에서 옥수수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연극을 보시면서 간식으로 드시려고 삶은 옥수수 몇 개를 호주머니에 넣고 오신 것이다.

아― 이럴 수가. 몽둥이를 든 젊은 사람의 다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살려줄 사람들인가. 발길질을 하며 다시 몽둥이로 사정없이 패 죽인 것이다. 이 참혹한 현장에는 그 가족들도 다 참석했다.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한 그 가족들은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연극은 계속되었고 8월의 긴긴 해도 서산을 넘을 무렵 그 끔찍한 연극도 막을 내렸다. 죽은 사람을 일렬로 운동장에 뉘어놓은 다음 맨 우측렬부터 일렬로 죽은 사람을 밟고 가도록 하였다. 물론 몽둥이를 들고 직접 사람을 죽인 장본인이 대열을 지켜본다. 한 사람이라도 건너뛰면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 나도 순서가 되어 죽은 자를 밟고 지나가는데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명치 부위는 더욱 더 아파 왔다. 엉겁결에 한 사람을 건너뛰어 다음 사람의 정갱이 부위를 밟는 순간 뒤에서 몽둥이를 든 사람이 큰 소리를 쳤다. 나는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너무도 무서웠고 하루 종일 떨고만 있었기에….

9·28 수복의 감격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들판을 지나 서낭당 고개를 넘어야 했다. 10여 리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나는 어떻게 집에 왔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집에 오니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계셨다. 지금도 나는 그때를 생각하며 조금은 다행스런 생각이 든다. 만약 그 자리에 우리 아버지가 참변을 당했더라면 지금 나는 어떻게 변하여 있을까? 그 당시 우리 아버지는 대한 청년단 단장으로 계시면서 동네 청년들을 모아 놓고 넓은 광장에서 훈련을 지휘하셨기에, 1차 연극에서 호명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버지께서는 차분히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죽든 살든 도망가려고 마음먹었다고 하셨다. 그 자리에 계셨던 본인(아버지)은 얼마나 마음 조이셨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며 10년은 감수하셨을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다음 달 9·28 수복이 되면서 2차 명단에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사실과 2차 연극이 또 우리 학교에서 있을 예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과 9·28 수복이 나에게는 말할 수 없이 감격적인 일이며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여기서 다시금 생각게 하는 것은 이 연극을 주도한 사람들이 인민군이 아닌 이웃한 마을에서 살며 안면이 있는 자의 소행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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