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던 날 어머니의 체온
행복이란 신기루인가?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많은 것들이 그 본래의 의미와 색깔이 바래가는 요즈음에도, 아직 순수가 남아 있는 단어들이 있다.
「행복」이라는 말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러기에 TV 드라마나 범람하는 출판물 속에서 「행복론」이 여전히 중요한 話頭로 등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저마다 행복, 행복 하며 살아가는데, 과연 그 행복이란 게 도대체 무엇일까?
『행복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행복 이외의 무엇인가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고 J.S. 밀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몸살을 앓듯 좇는 행복이라는 건 신기루란 말인가?
혹자가 말하는 것처럼, 「심신의 욕구가 충족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한다면, 찌든 가난 속에 늘 부족함에 익숙해져 살아온 내 청년기까지의 기억 속에 그 무슨 행복한 순간이 있으랴.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단순히 지난 일에 대한 관대함이나 미화 때문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행복이란 어떤 한순간의 교감에 의해 느껴지는 자기 영혼의 미세한 떨림 같은 것이다.
성찬 뒤의 포만감 따위와는 전혀 다른, 기다림만으로도 즐겁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초의 일이다.
겨울이 뒷모습을 보이고 저만치 갔건만 여전히 쌀쌀하던 때였다.
학교가 파할 때쯤부터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우리 집까지는 5리가 족히 넘어 그때 그 나이로서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담담히 학교 문을 나섰다.
얼마쯤 걸었을까? 진눈깨비가 눈 앞을 가릴 정도로 쏟아지기 시작했고, 바람 역시 억세게 몰아쳐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였다.
바로 그때, 목을 움츠리고 고개를 푹 숙인 내 앞에 내 이름을 부르며 우뚝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손에 무언가 포대기 같은 것을 드신 어머니였다.
마땅히 병석에 누워 계셔야 할 어머니께서 마중을 나오신 것이다.
엄마는 나를 치마에 감싸 안으시고 눈비에 젖은 머리칼이며 얼굴을 닦아 주시고, 곧 업으셨다.
기억이 머무는 저기 저 끝에 내가 어머니 등에 업힌 일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니, 그날 그일이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인 어머니 등이다.
포대기에 싸인 어머니의 등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병약한 몸에 진눈깨비 속을 헤쳐 가시며 가쁘게 몰아쉬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썩이는 어머니의 가냘픈 등을 통해 들려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편안함, 그 따뜻함 속에서 왠지 모르게 자꾸만 눈물이 난 것 같다.
병든 몸으로 자식을 등에 업고
돌아가실 때까지 병석에 누워 계신 날이 많던 어머니.
産後 조리를 잘못 해서 얻은 병이라고 했다.
그런 어머니와 나는 서로 주고받은 대화도 많지 않았고, 내가 엄마에게 살갑게 군 것 같지도 않다.
나는 그저, 어머니를 대신해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고, 어머니는 그걸 안타까운 눈으로 힘없이 바라보실 뿐이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날 그일이, 나와 어머니가 체온을 서로 나누며 함께했던 가장 긴 시간이었다. 내가 그때 어머니 등에서 가졌던 것과 똑같은 느낌을 아마 어머니도 느끼지 않았을까? 분명 그러셨을 게다.
진눈깨비 속을 걸어올 자식이 눈에 밟혀 마중을 나오셨고, 자식을 등에 업고 병든 몸에 숨이 가빠 괴로우셨겠지만, 자식을 위해 당신께서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셨을 게다.
만일 그때 어머니의 마음이 그렇지 않으셨다면, 내가 지금 그 일이 이토록 행복하게 여겨지지는 않을 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느끼는 행복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혼자만의 思惟(사유) 끝에 누릴 수 있는 만족스러움과는 또 다른, 측은지심의 공유 같은 것 말이다.
톨스토이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제가 인간이 되어서도 살아갈 수 있던 것은,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염려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길을 가던 한 사람과 그 아내의 마음속에 깃든 사랑, 그들이 제게 보여준 동정심과 관심 때문이었습니다』라고 썼다.
동정심과 관심을 서로 주고받는 것 - 그것이 곧 사랑이요, 행복의 원천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운 어머니
내가 광복 이듬해 태어났으니,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호사와는 먼 삶을 사셨을 테지만, 병마에 시달리시던 내 어머니의 삶은 너무나 쓸쓸하셨으나, 자식에 대한 無言의 관심만은 남다르셨다.
그 시절 그 어려웠던 시기에, 내가 절망의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등에서 느낀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체온이 늘 내 온몸과 온 마음으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학업에서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았음은 물론, 웅변이나 체육 등 학생회 특별활동으로 보람찬 생활을 할 수 있던 것도 모두 그분의 애정 덕택이었고, 그분의 기쁨을 보는 내 기쁨 때문이었다.
웬만한 세상일은 모두 알 나이였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백결 선생」이란 별명을 가질 만큼 누더기 교복을 입고 다녔지만, 내가 그걸 「불행」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번도 없는 것 또한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고시에 합격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아 자식을 셋씩이나 둔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에게 왜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더 없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끼니조차 잇기 어렵도록 가난했던 그때 그 시절의 일들이 더욱 행복스럽게 느껴지는 것은,『행복은 일상 속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제 깨달았기 때문도 아니요, 추억은 그저 아름다운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지금은 없는 어머니의 동정심과 관심이 그때는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을 누구보다도 기쁨으로 보아 주셨던 어머님의 사랑말이다.
행복은 그런 것이다.
행복이란 신기루인가?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많은 것들이 그 본래의 의미와 색깔이 바래가는 요즈음에도, 아직 순수가 남아 있는 단어들이 있다.
「행복」이라는 말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러기에 TV 드라마나 범람하는 출판물 속에서 「행복론」이 여전히 중요한 話頭로 등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저마다 행복, 행복 하며 살아가는데, 과연 그 행복이란 게 도대체 무엇일까?
『행복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행복 이외의 무엇인가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고 J.S. 밀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몸살을 앓듯 좇는 행복이라는 건 신기루란 말인가?
혹자가 말하는 것처럼, 「심신의 욕구가 충족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한다면, 찌든 가난 속에 늘 부족함에 익숙해져 살아온 내 청년기까지의 기억 속에 그 무슨 행복한 순간이 있으랴.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단순히 지난 일에 대한 관대함이나 미화 때문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행복이란 어떤 한순간의 교감에 의해 느껴지는 자기 영혼의 미세한 떨림 같은 것이다.
성찬 뒤의 포만감 따위와는 전혀 다른, 기다림만으로도 즐겁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초의 일이다.
겨울이 뒷모습을 보이고 저만치 갔건만 여전히 쌀쌀하던 때였다.
학교가 파할 때쯤부터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우리 집까지는 5리가 족히 넘어 그때 그 나이로서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담담히 학교 문을 나섰다.
얼마쯤 걸었을까? 진눈깨비가 눈 앞을 가릴 정도로 쏟아지기 시작했고, 바람 역시 억세게 몰아쳐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였다.
바로 그때, 목을 움츠리고 고개를 푹 숙인 내 앞에 내 이름을 부르며 우뚝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손에 무언가 포대기 같은 것을 드신 어머니였다.
마땅히 병석에 누워 계셔야 할 어머니께서 마중을 나오신 것이다.
엄마는 나를 치마에 감싸 안으시고 눈비에 젖은 머리칼이며 얼굴을 닦아 주시고, 곧 업으셨다.
기억이 머무는 저기 저 끝에 내가 어머니 등에 업힌 일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니, 그날 그일이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인 어머니 등이다.
포대기에 싸인 어머니의 등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병약한 몸에 진눈깨비 속을 헤쳐 가시며 가쁘게 몰아쉬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썩이는 어머니의 가냘픈 등을 통해 들려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편안함, 그 따뜻함 속에서 왠지 모르게 자꾸만 눈물이 난 것 같다.
병든 몸으로 자식을 등에 업고
돌아가실 때까지 병석에 누워 계신 날이 많던 어머니.
産後 조리를 잘못 해서 얻은 병이라고 했다.
그런 어머니와 나는 서로 주고받은 대화도 많지 않았고, 내가 엄마에게 살갑게 군 것 같지도 않다.
나는 그저, 어머니를 대신해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고, 어머니는 그걸 안타까운 눈으로 힘없이 바라보실 뿐이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날 그일이, 나와 어머니가 체온을 서로 나누며 함께했던 가장 긴 시간이었다. 내가 그때 어머니 등에서 가졌던 것과 똑같은 느낌을 아마 어머니도 느끼지 않았을까? 분명 그러셨을 게다.
진눈깨비 속을 걸어올 자식이 눈에 밟혀 마중을 나오셨고, 자식을 등에 업고 병든 몸에 숨이 가빠 괴로우셨겠지만, 자식을 위해 당신께서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셨을 게다.
만일 그때 어머니의 마음이 그렇지 않으셨다면, 내가 지금 그 일이 이토록 행복하게 여겨지지는 않을 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느끼는 행복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혼자만의 思惟(사유) 끝에 누릴 수 있는 만족스러움과는 또 다른, 측은지심의 공유 같은 것 말이다.
톨스토이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제가 인간이 되어서도 살아갈 수 있던 것은,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염려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길을 가던 한 사람과 그 아내의 마음속에 깃든 사랑, 그들이 제게 보여준 동정심과 관심 때문이었습니다』라고 썼다.
동정심과 관심을 서로 주고받는 것 - 그것이 곧 사랑이요, 행복의 원천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운 어머니
내가 광복 이듬해 태어났으니,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호사와는 먼 삶을 사셨을 테지만, 병마에 시달리시던 내 어머니의 삶은 너무나 쓸쓸하셨으나, 자식에 대한 無言의 관심만은 남다르셨다.
그 시절 그 어려웠던 시기에, 내가 절망의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등에서 느낀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체온이 늘 내 온몸과 온 마음으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학업에서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았음은 물론, 웅변이나 체육 등 학생회 특별활동으로 보람찬 생활을 할 수 있던 것도 모두 그분의 애정 덕택이었고, 그분의 기쁨을 보는 내 기쁨 때문이었다.
웬만한 세상일은 모두 알 나이였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백결 선생」이란 별명을 가질 만큼 누더기 교복을 입고 다녔지만, 내가 그걸 「불행」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번도 없는 것 또한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고시에 합격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아 자식을 셋씩이나 둔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에게 왜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더 없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끼니조차 잇기 어렵도록 가난했던 그때 그 시절의 일들이 더욱 행복스럽게 느껴지는 것은,『행복은 일상 속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제 깨달았기 때문도 아니요, 추억은 그저 아름다운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지금은 없는 어머니의 동정심과 관심이 그때는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을 누구보다도 기쁨으로 보아 주셨던 어머님의 사랑말이다.
행복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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