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운동에 바란다

다음은 자유기업원 NGO 모니터에 실린 글이다.
최근 관심을 얻고 있는 뉴라이트를 위한 글이기는 하나 뉴라이트로 지칭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좌익들에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 全文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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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운동에 바람

최근 뉴라이트 단체가 하나 더 출범하였습니다. 지난 11월 7일 발족한 뉴라이트 전국연합은 앞서 발족한 뉴라이트 네트워크와 함께 우리나라 자유주의 운동을 선도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아울러 두 단체가 자유주의 노선을 일반 국민에게 보다 정확하게 이해시키고, 자유주의 노선이 개인의 삶을 제고함은 물론이고 우리의 미래를 보다 번영된 사회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기를 기대합니다.
이러한 기대와 함께 교육현장에 몸담고 있는 필자가 겪은 일화를 단초로 하여 이 단체들에 거는 기대를 피력하고자 합니다. 지난 겨울 편입생 면접시험에서 수험생이 뽑는 문제 중에 이른바 ‘도롱뇽 재판’에 관한 것이 있었는데, 수험생 대부분의 응답이 천편일률적으로 환경보호를 위하여 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구간 공사는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환경이냐 개발이냐는 조잡한 이분법적 사고도 문제려니와 개발은 환경을 파괴하는 사회악이라고 하는 인식에는 개발선진국이 개발도상국보다 환경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사실이 묵살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일화는 필자가 봉직하는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초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현직 선생님들에게 아는 경제학자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교사가 케인즈만을 지목하는 데에 그치고 맙니다. 아니면 기껏해야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거명하면서 동시에 ‘시장’의 ‘비인간성’, ‘비도덕성’을 지적하는 데에 그치는 것입니다. 또 어느 토론 자리에서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 신장, 사립학교의 자율성과 평준화의 폐해와 같은 문제를 지적하면, ‘당신은 신자유주의자냐’고 반문하면서, 마치 신자유주의가 사회적인 적 또는 기피 또는 타도해야 할 대상인 것처럼 호도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를 옳게 이해하는 일이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필자와 같이 교육현장에 있는 교육자의 일차적인 책무이지만, 요즈음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왜곡된 논리를 시정하는 데에는 기왕에 출범한 뉴라이트 단체에서 교육적 측면의 사안에 보다 많은 관심을 경주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첫째, 뉴라이트 단체는 그들이 정치적인 목적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고 천명한 바와 같이, ‘자유’의 이해와 자유주의 노선 정책의 장점을 보급하는 데에 주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복거일 선생님의 지적처럼,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효율적인 것에 그친다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그 자체로 정의로운 체제라는 것은 ‘자유’의 개념을 보다 정확하게 학습하고, 자유주의 정책을 심층적으로 검토해야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유와 자유주의에 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필수적인 데 이를 뉴라이트 단체가 선도해야 한다고 봅니다.

둘째, 흔히 좌파가 내세우는 주장에 담긴 언어의 허구성을 지적하여야 하여야 합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자유주의 정책으로 비롯되었다든가, 토지가 공개념이라는 인식, 개인의 이기심은 사회악이라는 인식, 이와 함께 공동체적 삶이 개인의 삶에 우선하기 때문에 이타심은 절대 선이고 이기심은 악이라는 이분법을 타파하는 데에 뉴라이트 운동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이기심은 개인과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며, 이기심의 추구가 종국에는 사회 공동체적 선에 기여한다는 인식을 확산해야 합니다. 특히 아동?청소년과 젊은 층에게 이러한 인식이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 사회가 이른바 ‘통계적 허구’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전체 토지의 소유가 상위 몇 %에 집중되어 있고, 우리나라 학생의 평균 학력이 OECD 국가 중에서 어떠하다는 식의 통계치는 우리의 인식을 오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이른바 ‘평균치의 허구’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100명을 선발하는 기업에 200명이 지원하면 경쟁률이 2:1이고, 200명을 선발하는 기업에 지원자가 360명이 지원하면 경쟁률이 1.8:1이 됩니다. 이 때 경쟁률은 지원하는 사람은 물론 선발하는 사람이나 취업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참고 자료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원자의 입장에서 보면 경쟁률 자체보다는 생존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가가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지원자의 합격가능성은 낙오자의 숫자가 적은 쪽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연못 주변에 평균 수심 1.2m라는 푯말을 보고 신장 1.8m인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그 연못을 안심하고 건너는 경우와 유사합니다. 연못의 평균 수심은 1.2m일지 몰라도, 최고 수심은 2.1m이고 최저 수심이 0.3m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최대의 리스크를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뉴라이트 운동은 사회 전체의 동질적인 평균이 아닌 다양성과 우수성, 그리고 우리가 처할 수 있는 최악의 리스크를 대비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 전반의 삶을 제고하도록 해야 합니다. 아울러 평균적 수치가 사회의 보편성이나 공동의 이익을 지칭하는 것처럼 오도되는 것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넷째, 교육문제와 관련하여 뉴라이트 운동은 경쟁력 있는 사회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져야 합니다. 흔히 교육 경쟁 체제와 서열화 문제가 인성교육을 해친다고 보는 그릇된 인식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이나 기능이 아니라 인성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런 말에 언뜻 동조하곤 합니다. 하지만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은 지식과 기능뿐입니다. 그걸 배운 연후에, 그것도 제대로 배운 연후에,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신념이 변화하거나 새로운 신념이나 가치체계가 형성되면, 그것이 인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성을 제대로 기르려면 거꾸로 지금보다 더욱 열심히 지식과 기능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일부 단체에서 주장하듯 이른바 교육논리 대 경제논리의 이분법은 허구입니다. 이를테면 지식과 기능에 치중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이고, 인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교육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분법은 지식과 기능을 잘 가르쳐야 인성이 길러지기 때문에 성립하지 않습니다. 인성을 그리도 중시한다는 단체에서 다른 한편으로 머리 띠 두르고 임금협상에 매달리는 것이 교육논리입니까? 경쟁과 서열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열이 없는데 어떻게 경쟁이 일어납니까? 선진 외국의 대학이나 고등학교에서 각 영역별, 그리고 종합적 순위를 매기고 이를 공표하는 것은 그 사회가 경쟁을 미덕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경쟁이 사회의 미덕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이른바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은 사교육비 경감, 인성교육의 실현, 평균학력의 상승을 이유로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반대입니다. 이른바 평준화 지역의 사교육비가 더 많고, 인성교육과 평준화는 무관해 보입니다. 평균학력의 상승을 예로 드는 데, 이는 이른바 평준화 지역이 문화?경제적 혜택이 많은 대도시 지역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백 배 양보하여 이른바 평준화 정책이 그 지역 학생의 평균학력을 근소하게 신장하였다 해도 그것이 앞서 지적한 ‘평균치의 허구’의 예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뉴라이트 운동이 성공하는가의 관건은 필자가 보기에 교육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뉴라이트 운동은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교육문제에 관한 실상 파악과 올바른 인식 제고에 경주해야 합니다.

다섯째,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필자가 여기서 자세히 밝히지 않더라도 많은 관계자가 여러 차례, 그리고 여러 경로를 통하여 강조한 바 있어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인권의 보편성이 자유주의의 핵심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이 문제가 이른바 상황의 특수성에 파묻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 우선 순위가 마지막이어서 그 의미가 마지막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지만, 뉴라이트 운동은 정보화사회 내지는 지식기반사회에서 역할을 담당할 개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개인의 인적 자원개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지식기반사회에서 요구되는 개인을 드러커 교수는 지식근로자라고 합니다. 이제는 단순노동이나 육체노동에 근거한 인적 자원의 의미는 없습니다. 지식근로자로서 개인은 산업혁명을 토대로 한 산업사회의 산업인력으로서 개인과는 판이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지식기반사회에서 지식근로자에 운동의 초점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뉴라이트 운동을 제창하고 선도하신 많은 분들이 지적하듯 뉴라이트 운동이 올드라이트와 구분되어야 한다면, 지식근로자로서 개인과 지식기반사회에서 기업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외에도 뉴라이트 운동이 경주해야 할 산적한 문제가 있겠습니다만, 여기서 필자가 언급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교육적인 문제이거나 사회 인식에 직접적으로 관계된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개방화, 세계화 추세에 우리가 번영하고자 하는 노력의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 될 것입니다. 앞서 지적했다시피, 이러한 문제는 교육현장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필자와 같은 교육자의 일차적 책무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 은연 중 만연된 그릇된 인식은 교육자의 노력뿐만 아니라 사회 인식의 변화를 꾀하는 사회운동을 통하여 개선되기 때문입니다.

뉴라이트 단체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김정래 (부산교대 교수/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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