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手記/ 「톱질 戰線」에서 겪은 일들



「톱질 戰線」에서 겪은 일들


양담배 한 보루가 나의 운명을 바꾸다



특무대원은 내게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이곳에서 내리면 첩보요원이 되어 北으로 보내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지난번 국군 수색대원으로부터 받은 양담배를 주고 이 난국을 벗어날 생각을 했다

孫 海 鎭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2년 前부터 전쟁 준비

1945년 8월15일 해방으로 일본 군대에서 자연 제대가 되어 고향인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거례리에 돌아와 부모형제와 동네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때 내 나이 22세였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고향인 화천군 하남면 거례리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8㎞ 지점에 38선이 그어져 남북의 왕래를 제한하고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그때부터 같은 민족을 남과 북으로 갈라 놓았다. 나는 그 당시, 남쪽에 일가친척이 살고 있고 더욱이 경찰로 근무한다 하여 성분 불량자로 분류되어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공산당이 실시한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에도 성분 불량자로 분류된 탓으로 토지분배를 받는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화전을 일구어 화전농사를 지으며,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1948년 3월 어느 날 밤에 20세 이상 50세 이하의 마을남자 전원이 지게를 지고 출동하라는 공산당의 준엄한 명령을 받았다. 나도 그 일원으로 지정한 장소로 출동하였더니 모두 50여 명이 모였다.

소리내지 말고 조용히 따라오라는 공산당원의 지시에 따라 38선 쪽으로 태산준령 험한 산길을 넘고 넘어 이북지역으로 38선에 가장 접근한 마을로 갔다. 그 당시 춘천군 사북면 고탄리, 송암리, 일남리 산골에 한두 집씩 흩어져 농사짓고 사는 주민들을 모두 원산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사업에 동원된 것이다. 각자 자기 힘에 맞는 무게의 이삿짐을 나누어 지고 50여명이 되돌아 화천을 향해 날이 새기 전에 그곳을 떠나 얼음이 채 녹지 않은 고개를 넘고 넘어 그날 오전 9시경에 당시 화천인민학교 교정에 짐을 풀었다.

이렇게 하기를 네다섯 차례, 쥐도 새도 모르게 6·25 전쟁 사전준비 작업을 6·25 발발 2년 전부터 착착 시행하는 데 강제로 동원된 사실이 있다. 2년 전부터 6·25 전쟁을 일으키려고 미리 장해가 되는 주민을 이주까지 시켜놓고 6·25 전쟁을 미리 준비한 공산당이 적반하장 격으로 남한에서 먼저 북침했다고 생트집을 하니 북한 공산당을 만천하에 고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1950년 6월23일 밤부터 6·25 도발 사전 무력증강 준비로 김화 방면에서 화천으로 탱크 수십여 대를 몰고 밤중에 넘어왔다. 굉음 소리에 놀라서 길가에 나온 주민들을 모두 집으로 쫓아 들여보내고 탱크부대 진격 장면을 못 보게 막았다. 그리고 날이 새기 전에 탱크를 북한강 주변 풀밭에 풀로 덮어 위장 매복시켜 놓았다.

인민군에게 체포되다

그리고 6월24일 밤이 어두워지자 탱크부대가 모두 38선 쪽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월23일 인민군 여단병력이 화천군 하남면 일대 산 속에 매복하여 있다가 6월24일 밤에 탱크부대와 같이 동시에 38선 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38선 현지훈련을 가는 부대라고 주민들을 속였다. 그 후 나는 전쟁에 패하고 후퇴하는 인민군 패잔병들이 무고한 주민들을 분풀이나 하듯이 마구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가족들과 같이 깊은 산중에 숨어 지냈다. 그러나 국군이 인민군을 격퇴시키고 화천에 개선 진주한다고 하여 특히 화천 출신 張중령이 연설까지 한다고 환영행사에 나가자고 해서 환영식에 나갔다.

얼마 후 戰勢가 불리하여 국군이 화천에서 후퇴하였다고 한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다시 산 속으로 피신했다. 국군이 후퇴하자 인민군 패잔병(사단병력)이 다시 화천을 점령했다. 1950년 9월에 국군이 처음 화천에 입성 진주했을 때 국군 환영행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지방 공산당원의 밀고로 공산당 정보원에게 체포되었다. 나는 산 속에 깊이 숨어 있었던 탓으로 시일이 많이 지난 뒤에 체포되었다.

초기에 체포된 사람들은 대부분 즉시 처형당했다. 체포될 당시 즉결처형은 당하지 않았으나 나도 예외없이 고문과 구타를 많이 당했다. 무고한 사람을, 재판에 의하지 아니하고 처형한다는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내가 체포될 당시부터는 인민재판에 부쳐 처리한다고 했다. 어느 날 재판날이 돌아와 마을 재판장으로 끌려가 보니 피고가 나하고 최윤극 두 사람이었다.

인민재판이 시작되어 검사의 심문에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 재판장이 바로 둘도 없는 고향 친구 박승구의 아버지인 박지양씨였다. 본의가 아니었으니 용서를 빌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더니 나는 근신 1년형을 선고받았다. 최윤극 피고에게는 두문불출刑을 선고했다. 나는 다행히도 목숨은 건진셈이다. 그 당시 형의 종류가 세 가지였는데 첫째 제일 중형은 사형이고, 두 번째 형은 두문불출형이며 세 번째는 근신형이다. 사형은 그대로 집행하고 두 번째 두문불출형은 가슴과 등에 두문불출이라고 붉은 색깔로 커다랗게 써서 가슴과 등에다 붙이고 刑期(형기) 동안 집, 대문 밖에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형이다. 근신형은 자기 거주하는 마을 안에서는 자유로 다닐 수 있으나 마을 밖을 나갈 때는 재판장의 허가를 받아야 나갈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51년 1월경, 인민재판에서 근신형을 받은 사람은 국군이 진격해 오면 다시 전향할 우려가 있다 하여 멀리 후방 쪽인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 깊은 산중에 격리수용해야 한다는 그들의 방침에 따라 나는 1951년 2월 초에 다시 체포됐다.

무장한 인민군에 끌려 화천을 떠나 신읍리를 거쳐 율대라는 산골에서 태산을 넘고 넘어 다시 주파고개를 넘어 금성군 세원리 넓은 들녘을 지나 닭바위 골이라는 곳을 지났다. 날이 저물어 어느 토굴 속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아침에 식사도 못한 채 그곳을 떠나 창도읍을 거쳐 하루종일 걸어서 그날 저녁에 회양군 난곡면 어느 오지마을에 도착해보니 그 마을 사람들도 원산 방면으로 피난을 떠나라고 해서 피난가고 동네가 모두 빈 집이었다.

나는 깨끗한 빈 집에 여장을 풀었다. 나를 인솔한 인민군이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이집에서 묵고 있으라고 엄포를 놓고 떠나갔다. 날이 어두워졌다. 이틀간이나 밥을 굶어서인지, 그리고 여행길에 지쳐서인지 나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 후 잠에서 깨어나니 캄캄한 밤중이었다. 배가 고프다 못해 속이 쓰려서 잠에서 깨어났다. 먹어야 살겠다는 생각에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낯설은 집의 부엌을 더듬더듬 장 항아리에 손을 넣어 된장을 퍼서 물에 풀어 허기진 배를 채우고 지친 몸으로 밤을 지새웠다.

「톱질 전쟁」의 무대

그 이튿날 하는 수 없이 난곡면 인민위원회를 찾아가 남쪽에서 피난온 사람인데 먹을 것이 없으니 식량을 달라고 요청했더니 그곳에 논은 없고 밭농사만 짓는 산골이라서인지 좁쌀을 석 되 정도 주었다.

그것으로 연명을 하면서 닷새째 되던 어느 날 사람들이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아이들과 노인들도 태우고 남쪽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급히 달려가서 어디로 가는 사람이냐고 물어보니 화천에서 안변으로 피난갔다가 화천이 해방됐으니 농사지으러 나가라고 해서 화천으로 되돌아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는 생각으로 빈 집에 가서 헌 바지저고리로 갈아입고 농사지으러 나가는 농민으로 가장하였다.

그 일행과 같이 걷기도 하고 때로는 소달구지에 타기도 하며 창도읍을 지나 세원리를 거쳐 주파고개를 넘어서 화천땅 사방거리에 도착했다. 그때 시간이 오후 8시경이었다. 나는 간단한 조사를 마치고 그 일행과 헤어져 남쪽으로 24㎞나 떨어진 고향인 화천군 하남면 거례리를 향해 밤새도록 은밀히 산길로 걸어서 새벽 2시경에 집에 도착했다.

무사하게 돌아온 나를 가족들은 울며 반겨주었다. 집은 이미 폭격에 타버렸다. 집이라고 해야 방공호 토굴 속이었고 출입문은 가마니 한 장으로 된 거적문이었다. 이때 이 지역은 유엔군과 중공군이 밀고 밀리며 한 달에도 몇 차례씩 주인이 바뀌는 지역이었다. 자주 밀고 밀리는 전쟁이기에 「톱질 전쟁」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그래서 유엔군이 진주해오면 性폭행이 두려워 주민들은 부녀자를 이끌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고 반대로 중공군이 진주해 오면 땅 속에 은밀히 감추어 둔 식량까지 들추어내서 약탈해가기에 이를 막기 위하여 산 속에서 모두 마을로 내려와서 식량을 지키기 위하여 중공군과 주민들 간에 종종 싸움이 벌어진다.

중공군과 대항해서 식량을 지키는 데는 남자보다 여자측이 월등히 우세한 편이다. 중국은 여자를 위하며 존경하는 풍습이 있는지 여자에게 식량을 뺏기 위하여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 내가 집에 와 있을 때는 중공군이 진주하였다. 1951년 4월 초, 어느 날 갑자기 우리 토굴집 가마니 거적문을 총검으로 들추며 손들고 나오라는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내 식구들은 벌벌 떨며 네 살난 아들아이를 안고 토굴 속에서 나와보니 뜻하지 않게 유엔군 한 명과 국군 병사 한 명이 총을 겨누고 서 있었다.
유엔군이 서툰 우리말로 나를 보고 모두 당신의 가족이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때 나는 전쟁에 시달리고 시달려 말할 수 없이 남루한 모습이었다.

국군병사가 내 모습을 보고 동포애에서 동정이 갔던지 불쌍하다는 말을 했다. 보슬비가 오는 날이어서 군용 우비를 입고 있었는데 우비 속에서 무언가 두 개를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기에 고맙다고 정중히 인사하니 중공군 패잔병을 소탕하러 나온 수색대라고 일러주고 가버렸다.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토굴 속에 들어가 뜯어보니 생전 처음 보는 양담배 아카마루 한 보루와 카멜 한 보루였다.

양담배가 살린 목숨

냄새를 맡아보고 한 개비를 피워보니 그렇게 담배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때 그 기쁨은 잊을 수가 없다.

1951년 4월 중순경, 느닷없이 강 건너에서 요란한 스피커 소리가 들려왔다. 내용은 잠시 며칠간 나갔다 올 터이니 극히 필요한 물건만 싸가지고 동네사람 모두 다들 나오라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기에 주민들을 대피시키려는가 생각하고 나도 부랴부랴 짐을 싸서 지고 모이라는 곳으로 나가보니 군용트럭 50여 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 한 대에 다섯 가구 이하로 타라는 것이다.

환자가 있거나 짐이 많은 가구는 트럭 한 대씩을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환자가 있어서 누워서 가야 하겠기에 트럭 한 대를 이용하게 되었다. 얼마 후 군용트럭은 서서히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호로 속이라 도저히 밖을 볼 수가 없었다. 가는 목적지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꽤 오랜 시간 달리다 군용차량이 일제히 멈추어 섰다. 어딘가 했더니, 그당시 춘천읍 석사동 춘천사범학교 운동장이었다. 그곳에 집결해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다시 춘천을 떠나 홍천 쪽을 향해 서서히 달리기 시작하였다.

서쪽 하늘에 낙조가 보이고 황혼이 짙어지는 시간이었다. 난민 중에는 환자가 많아서인지 군용 트럭은 아주 느린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홍천 쪽으로 약 40분 정도 왔을 때 군용 트럭이 일제히 모두 서서 검문을 받는 모양이었다. 당시 검문소에서 특무대 요원들이 검문하면서 젊은 사람은 모두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젊은 사람은 모두 첩보요원으로 선발하여 北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이때 내 나이 28세였다. 나는 여기서 가족을 버리고 첩보요원으로 北으로 갈 수가 없었다. 특무대원은 나를 쳐다보고 계속 내리라고 호통을 친다. 그러나 나는 환자인 처와 아들을 떼어놓고 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해는 지고 사방은 캄캄한 밤중이었다.

나는 그때 최후의 수단으로 묘안이 떠올랐다. 전번에 수색대 국군 병사로부터 받은 양담배를 선물로 주고 이 난국을 면해 볼 생각을 했다. 어두컴컴한 트럭 위에서 보따리 속의 양담배 카멜 한 보루를 꺼내어 그 특무대원에게 주었더니 그 군인은 놀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너, 이 양담배 어디서 났냐』고 물었다.

『유엔군 병사로부터 받은 귀한 선물을 당신에게 드리니 잘좀 봐주시오』 하고 사정을 했더니 다시 두말 없이 가족과 함께 같이 가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 당시 38선 이북 피난민 처지에서는 양담배는 볼 수도 없고 더욱 가질 수도 없는 참으로 귀하고 귀한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천하고 하찮은 피난민 주제에 양담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래서 가족과 함께 무사히 목적지인 원주군 흥업면 피난민 수용소에 입소하여 3년간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1955년 3월에 고향에 돌아가 재건사업에 진력하였다.
나는 1951년 4월에 화천군 하남면 거례리에서 전방 수색대원으로 유엔군과 함께 동행하여 나에게 양담배 두 보루를 선물로 전해준 그 국군병사를 잊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한번 만나서 은혜를 갚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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