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手記/ 宋村의 동족 상잔

平南 平原郡 龍湖面 宋村의 동족 상잔



카인의 후예들」이 불러들인 살육극


전쟁 기간中 인민군, 국군, 중공군 누구 하나 이 마을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온 마을이 피바다가 되고 말았다



백 호 서울 중랑구 면목동

1. 宋村의 최후

이 글은 6·25 동란 중에 실지로 행해진 일이다.
平南 平原郡 龍湖面 宋村(평남 평원군 용호면 송촌). 약 100여 호의 마을. 이 마을은 오래 전부터 宋씨 성을 가진 친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몇대를 이어 번성하여 살아 왔다.

京義線(경의선·서울~신의주 간의 철도)이나 國道(국도)도 멀리 떨어진 벽촌이었고 그러면서도 산도 많지 않고 바다도 가까우며 넓고 기름진 논밭이 있어 비교적 富村(부촌)으로 알려져 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1930년대에는 他地(타지)의 他姓(타성)을 가진 세대가 한두집 끼어들었고 떠돌이 他姓들은 대개 宋씨네 땅을 경작하는 소작인들로 그런대로 해방 때까지는 경조사를 같이 도우며 가족같이 평화롭게 살아왔으며 他姓도 20여 가구가 훨씬 넘었다.

평화롭던 이 마을에 계급의식과 이념갈등이 생긴 것은 해방 후 소위 토지개혁부터이다.
대개 地主(지주)였던 宋氏一家(송씨일가)는 반동으로 몰리고 소작으로 맡겼던 농토는 전부 빼앗기고 그나마 自作(자작)농토만을 경작할 수 있었다. 반면 공산당 조직이 강화되면서 他姓의 우두머리들의 목에 힘이 들어갔고 里(리) 인민위원장, 당세포위원장, 여맹위원장, 민청위원장 등 그 많은 감투와 벼슬은 전부 他姓의 몫으로 넘어갔다. 살기등등하고 위압적인 분위기가 계속 되었으나 6·25까지는 그런대로 큰 마찰없이 지냈다.

6·25가 터지자 里간부들은 마을의 젊은이들을 軍(군)에 징집시키려고 혈안이 되었고 일부는 끌려가 전사하였고 일부는 전쟁 중(특히 후퇴시) 도망하여 마을 근처에 은신하였으며 징집 전에 도피 은신한 젊은이도 많았다.

전쟁이 不利(불리)해질 즈음 他姓의 간부들은 총기를 지급받고 은신한 젊은이 색출에 혈안이 되었고 색출되면 언제 어디서 처단이 된지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러던 중 연합군의 평양 탈환이 가까운 즈음 黨으로부터 사살명령을 받은 이들은 마을의 有志(유지라야 마을의 원로급들)들을 10여 명 묶어다가 참호 속에 앉히고 전원사살하였다(북한 전역에서 이루어진 일). 연합군의 급한 北進(북진)에 당황한 里간부 핵심 몇 명은 자기네 가족도 도피시키지 못하고 中共(중공)으로 도망쳤다. 전쟁중이라 하여도 워낙 外地(외지)라 인민군의 철수와 연합군의 北進 등 누구 하나 쌍방 군인들의 얼굴도 못 본 채 마을 스스로 해방이 되었다.

산 속, 땅 속 깊이 숨었던 宋氏네 청년들이 살기등등하게 하나 둘씩 마을로 돌아왔고 죽었다던 청년들도 몇몇이 살아 돌아왔다. 더더구나 가족이 희생된 청년들의 눈엔 핏발이 섰다.

피의 보복이 시작됐다. 他姓의 가족들(노인, 부녀자, 어린아이들)은 처참한 매질에 죽어 갔고 그 비명소리는 수십 리를 이어 갔다. 어떤 他姓집은 온 가족을 집에 가둔 채 가옥째 불을 질러 全 가족이 타 죽었다. 또 어떤 가족은 흙구덩이를 파고 산채로 생매장을 시켰다.

환희와 혼란도 잠시뿐…. 40여 일 만에 연합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간헐적으로 포성이 들려왔다. 중공군이 쳐내려온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외지의 소문보다 중공군의 진군이 앞섰다. 아울러 이 마을보다 훨씬 남쪽에 중공군이 南進을 하고 있었다. 혼비백산한 宋씨네 청년들은 남쪽으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길은 이미 막혀 있었다. 몇이나 남쪽으로 남하하는 데 성공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 얼마 후 중공으로 도망쳤던 他姓의 里간부 몇 명이 마을에 나타났다. 그들의 살아남은 가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상상해 보라. 그후의 마을의 결과를…. 미처 도망을 못간 宋씨네 가족(남녀노소)은 전원 손등에 구멍을 뚫고 전화줄(야전용)에 꿰인 채 등에는 「나는 미제의 압잡이 반동이오」라는 큰 글씨를 붙이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끌려다니다 전원 사살되었다.
평화롭던 宋村의 100여 가구 중 지금은 남쪽에 와 있을 宋씨 청년 몇 명(70 나이가 됐겠지만)과 他姓의 里간부는 몇 명 정도 살아 있을까?

이 마을엔 인민군 군화의 발자국도, 연합군도, 중공군도, 어느 군인의 발자국도 없었으며 간혹 높이 지나가는 B-29와 전투기들이 내뿜고 지나가는 긴 구름같은 꼬리와 희미하게 들려오는 폭음 정도로 전쟁 중이라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 왜 서로 죽이고 죽고 하여 全마을이 멸망했을까?

사상? 이념? 이것은 전쟁 중에 있었던 수많은 처참한 참상 중의 한 마을사건일 뿐이다.

2. 金日成과 스탈린 사망시의 통곡

오늘이 金日成 사망 5주기라 한다. 5년전 그날 점심 때 金日成 사망 뉴스를 듣고 첫째는 귀를 의심했고 재확인된 순간 심장이 고동쳐 끝내 도시락을 비우지 못했다.
수백만의 대학살자, 지구상에서 진시황 빰칠 정도로 호의호식하면서 국민들은 제 자식을 삶아 먹을 지경으로 만든 독재자….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제 명에 죽게 하다니….

그로부터 얼마 후 북유럽을 여행 중이었다. 우연치 않게 外信 記者(외신 기자)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金日成 사망과 북녘 동포의 통곡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질문인즉 독재자로만 알려진 金日成이 그의 죽음 소식에 북녘의 全국민이 동상이나 제단 앞에 엎드려 그렇게 오래도록 통곡하는 장면을 보니 굉장한 지지와 충성심이 아니냐고….

대답은 간단했다.
『그들은 슬퍼도 울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오만 슬펐던 한을 그 기회에 한꺼번에 소리내어 한을 풀었다. 누구도 의심 않고 충성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다음 이야기를 해 주었다.
1953년 3월5일은 저들이 말하는 全세계 피압박 민족의 태양이며 조선 민족의 해방을 안겨준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가 사망한 날이다.
나는 그때 평북 구성군 구성읍 지하 동굴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구성이란 누우면 별 셋밖에 안 보인다는 산골이며 작고한 최창학씨의 고향으로 그는 그곳에서 금광으로 성공하여 한때는 한국 최대의 갑부이기도 하였다. 요즈음 핵 의혹 동굴도 그 근처인 것으로 확인됐다.

내가 있던 지하동굴은 입구가 5개로 입구 이름은 1호동에서 5호동까지였다. 입구 간격이 40여m였다.
입구에서 40여m 들어가면 1호동에서 5호동까지 폭이 30m, 높이가 5m의 굴이 연결되었다. 그렇게 계속 들어가면 5개의 대동굴이 계속된다. 이 동굴 속에 근로자만 약 5000명이 있었으며 그곳은 첫 1호동에 綿(면)이 들어가면 5호동에서는 군복이 생산되는 구성 방직 공장, 즉 군수품 중 군복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근로자 5000여 명 중 2000여 명은 동굴을 뚫는 건설 노동자들이고 약 5000여 명은 방적(실 뽑는)에서 방직(천을 짜는), 제복(옷 만드는 공정)으로 이어져 목화가 들어가면 끝에서는 군복이 생산되었다. 남자 근로자들이란 핵심 간부를 제외하고는 軍에서 부상당한 명예군인 아니면 남쪽에서 강제 징집되었던 의용군 출신이나 빨치산 출신이었다. 여공들은 대략 18세에서 23세 정도의 미혼 처녀들로 각 도에 할당하여 강제 징집된 아가씨들이었고 청진방직공장 등 근방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여공들도 있었다.

식사라야 하루 600g의 옥수수가 태반인 풀기 없는 밥에 소금국에 풀잎 몇개 띄운 국 한 공기가 전부였다. 숙소는 산 기슭에 반움막을 파고 갈대지붕에 풀더미를 깔고 자니 12시간의 작업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오는 모습이나 풀더미에서 자고 작업장으로 나가는 그네들의 모습은 정녕 유령의 행렬 같았다.

처음 차출되었을 때의 그녀들의 해맑았던 얼굴은 3개월이 못 가서 완전히 병색이 만연했고 반년을 못 넘기고 죽어 나가는 여공들이 늘어났다. 원래 방직공장은 솜먼지가 많아서 특수한 환기장치를 하지 않을 경우 불을 붙이면 솜먼지가 공중으로 불을 옮겨 붙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동굴이므로 공기를 환기시킬 방법이 없었다. 여기에 더하여 저 깊은 곳에는 계속 동굴을 뚫는 착암기의 돌가루와 바위를 폭파하는 폭풍에 앞이 안보일 정도로 짙은 안개 속과 흡사하다. 돌가루에 솜먼지를 뒤집어쓰고 하루 12시간을 계속 호흡하다 보니 건강한 몸으로도 6개월을 버티지 못하였다.

시체 처리 작업조가 있었다. 이들은 들 것을 들고 여공들이 교대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면 흔들어 본다. 장작개비처럼 굳어 있으면 들것에 옮겨 폭격 구덩이에 굴려 넣는다. 얼마 가지 못해 구덩이가 찬다. 그러면 그 구덩이를 메워 버린다.

연합군이 폭격을 하여 구덩이가 생기면 그들은 그곳에 시체를 버리고 다 차면 덮어 버리면 그뿐이었다. 병원도 명색은 있었다. 의사도 간호사도 한 명씩 있었다. 그러나 치료할 약이나 의료시설은 전무했다. 병이 들었다고 진단서를 발급해 주었는데 병들어도 진단서가 없으면 그나마 식량배급이 끊겼다. 죽어 없어진 숫자만큼의 인원은 각 도에서 강제 차출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스탈린이 죽기 3~4일 전쯤으로 기억됨) 그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확성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의 병세가 악화되었다고, 맥박은 얼마이고 열은 어떻고 하며 시간대로 계속 방송을 하였다. 3월4일부터는 스탈린이 운명하는 순간 긴 사이렌 소리가 울릴 테니 全직공은 기계를 멈추고 기립하여 고마우신 대원수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묵념을 올려야 한다고….

아니나 다를까 3월5일 동굴 속의 모든 기계가 멈추고 고요 속에 긴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5000여 직공들은 하던 작업을 멈추고 기립하여 목을 숙인 채 묵념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디서랄 것 없이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렸고 급기야는 대성통곡 소리로 변하였다. 스탈린의 죽음이 그렇게 슬퍼서일까? 그녀들은 정든 부모형제를 멀리하고 강제로 차출되었다.

울고 발버둥을 치고 싶어도 그들 사회는 용납되지 않던 차에 때는 이때다 하고 그들의 울음은 끝이 없었다. 사실 동굴 속에서 나도 울었다. 부모 형제들의 안위와 이 死地(사지)를 빠져 나갈 길이 막막하고, 보위부의 감시 눈초리는 날로 심하고, 이 답답하고 기가 막힌 생각을 하며 소리내어 울다보니 한결 마음에 안정이 생겼다. 그 며칠 후 스탈린의 장례식 광경을 영상으로 보여 주었는데 또 통곡이 계속되었다. 자기 한탄에….

나는 金日成의 죽음과 스탈린의 죽음 때 나온 全인민의 통곡소리는 위에 기술한 내용과 한치의 차도 없다고 생각한다.

3. 전쟁과 담배 이야기

『저 미국놈의 폭격기들은 평양 연초공장은 폭격하지 않고 엉뚱한 시설만 파괴하노』
1953년 停戰(정전) 협상이 무르익을 무렵 평양의 연초공장이 복구되어 당과 군부의 고위층에는 평양산 담배가 배급되었다. 그런데 질이 형편 없어서 목안이 찢어지는 듯이 고약하여 하소연하는 소리였다.
평양 연초공장이 폭격된 뒤부터는 고위층은 담배를 중국이나 소련에서 구입하여 배급하였으므로 그 난리통에서도 고급 담배를 피울 수가 있었다.

그럼 인민군 졸병이나 노동자 등 일반인은 어떤 담배를 피웠을까? 평양 노동신문사에서 저질인 마분지(폭 5㎝, 길이 7㎝)를 30여 장 절단하여 한 면에 풀칠을 하여 한 장씩 뜯어 쓸 수 있도록 담배말이 용지를 배급하였고 대담배잎 썰은 것을 한 봉지씩 배급받아 누구나 헝겊주머니에 부스럭 담배와 담배말이 종이를 갖고 다니며 말아 피웠다.

성냥은 당시 중공군의 딱성냥(딱딱한 곳이면 어디든 그으면 불이 붙는)을 갖고 다녔고 없으면 부싯돌과 부시를 이용하였다.
내가 산중에 있을 때에는 정말 종이가 무엇보다 귀했다. 위생지와 담배말이 종이 때문이었다. 산중에 식량이 있을 리 없어 풀뿌리와 솔잎과 산열매로 목숨을 연명하면서도 그 담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가랑잎, 쑥, 수리취잎을 뜯어서 바위 위에 말려 비벼서 피우면 그런대로 담배갈증은 해소된다. 그런데 종이가 문제다.

연구 끝에 삐라를 주워 쓰기로 작정했다. 당시에는 연합군의 공군기들이 폭격중에 많은 삐라를 살포하곤 했다.
쏴-하는 귀가 찢어지는 굉음 끝에 천지가 진동을 하면 근방의 교량이나 시설물을 폭격하는 소리이고 쏴-하다 퍽하는 소리가 나면 틀림없는 삐라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럴 때면 우리 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삐라 떨어진 곳을 찾아가 대량으로 주워 온다.
주둔 부대로부터 여러 번 총격도 받았다. 이 삐라를 통해 우리는 우선 남쪽의 전황을 알았고 위생지와 담배말이 종이로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평북 구성 땅굴 속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담당부장이 날이 밝을녘 모두 깨웠다. 그때는 별도 침실 없이 자기 책상에서 담요나 거적 같은 것을 덮고 취침을 할 때였다. 5~6명의 남자 직원들이 무슨 비상이 걸렸나 하여 놀라 깨어나니 부장이 인솔하여 큰길로 나섰다. 부장은 정주에서 구성읍으로 통하는 길에 우리들을 종대로 세우고 읍까지 약 2㎞를 걸으며 담배꽁초를 줍자는 것이었다.

당시 중공군은 UN군 폭격 때문에 주로 야간행군을 하고 날이 밝으면 마을 인가에 종일토록 은신하고 또 해가 지면 남쪽으로 행군하였다.

그런데 그 중공군이 피우는 담배는 양담배 못지않게 고급이었다. 행군하며 피우다 버리고 밟고 지나간 꽁초가 여간 많이 널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다지 중의 노다지였다. 어떤 것은 몇 모금 빨지 않고 버린 것도 있어 주워 모으니 거의 한 됫박이나 되었다. 종이를 벗기고 딱딱하게 밟힌 것을 다시 손질하여 종이에 말아 피우니 그만이었다. 그날 이후 매일 새벽 꽁초 줍기에 나섰다. 그러나 그것도 소문이 퍼져 새벽이면 길가에 꽁초주이 인파가 늘어 하루 피울 분량이 모자라 배급받는 잎담배와 섞어 피웠다.

하루는 크나큰 실수를 범하였다. 동굴 밖에서 일을 하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주위가 어둠침침하였다. 그런데 여럿이 책상 앞에서 심각히 앉아 있는데 업무부에 있는 동무가 소련에서 생산되는 고급담배(보통담배의 두 배 길이로 반은 담배이고 반은 딱딱한 종이로 된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얼떨결에 친구가 입에 문 담배를 뽑아 내 입에 물려는 순간 다시 보니 내 친구가 아니었고 고급옷을 입은 고위층이었다. 내 돌발적인 행동에 주위 사람들의 놀람은 물론 손과 발이 덜덜 떨리며 어쩔 바를 몰랐다. 빼앗은 담배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바치며 밝은 밖에서 갑자기 어두운 방에 들어오며 빛이 분간이 안되어 큰 실례를 하였다며 무릎을 꿇었다. 그 고위층은 중앙당 노동부 부부장이었다. 사업 실적이 부진하다며 간부들을 불러모아 기합을 주는 중이었다.

역시 높은 놈은 달랐다. 『동무, 그렇게도 담배가 피우고 싶소』하며 담배갑을 꺼내더니 십여 개피를 내손에 쥐어 주었다. 덜덜 떨면서 두 손으로 공손히 받고 밖으로 뛰어 나왔다. 진땀이 온몸을 적시었다. 그런데 언제 알았는지 수십명이 내게로 달려왔다. 받은 담배를 한 사람이 서너 모금씩 빨며 흐뭇해 했다.

停戰이 되었다. 어둡고 침침한 평양거리에 군데군데 전등불이 켜졌다. 주민들은 파괴된 도시복구에 총동원이 되었다.

1953년 8월 중순으로 기억된다. 그해 말에 최고 인민회의가 열리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평양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각 직장의 종업원은 누구나 쓰러진 건물더미에서 벽돌 300장씩을 망치로 시멘트를 깨고 다듬어서 再사용이 가능하도록 말끔히 다듬어서 바쳐야 책임량이 완성되었다. 그 벽돌로 연말까지 驛舍(역사)를 복구하여 대의원들이 역사를 통해 걸어 나오자는 것이었다. 평양역 주변에는 남녀 노동자 수천명이 작업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停戰 직후에는 대동강 철교가 파괴되어 기차는 본 평양역이 끝이고 임시가설 목교를 건너서 대동강역에서 다시 사리원을 거쳐 개성으로 철도가 연결되었다.
포로교환이 시작되었다. 주로 UN군 포로들은 중국이나 압록강 근방에 수용하였다가 기차로 평양역까지 운반했고 도보로 대동강을 건너 대동강역에서 다시 철도로 판문점까지 이동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가관인 일이 벌어졌다. UN군 포로들은 푸른바지에 푸른 파자마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데 웃옷을 벗어 벽돌 채취 노동자들에게 던졌다. 노동자들은 일하다 말고 던진 옷 줍기에 혈안이 되었다.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포로들이 입었던 옷마저 귀한 세상이었으니….

주위 경비병들이 공포를 쏘며 저지하였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포로 가운데 한 명이 작은 물건 하나를 내 근처에 던졌다. 날아오는 폼이 담배 비슷했다. 기를 쓰고 달려가 주웠다. 가운데 빨강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데 분명히 양담배였다.

그런데 금세 30~40명이 내 주위를 에워쌌다. 담배는 주웠으나 뜯을 수가 없었다. 이빨로 물고 뜯어도 그 셀로판지는 좀체로 벗겨지지 않았다. 빨간띠를 당기면 되는 것을 알 리 없었다.

4. 4·15 大사면과 올가미

4월15일은 金日成의 생신일이다. 그네들에겐 최대의 국경일이다.
1954년 4월15일. 戰後 처음 맞는 국경일이다. 이날까지 자수한 자는 죄의 輕重(경중)을 안 가리고 전원 사면하여 용서한다는 것이다. 용서뿐 아니라 선물도 주었다. 고무신 한 켤레씩….

대상자는 너무도 많았다. 국군 入城(입성)시 치안대나, 경찰 종사자, 연합군이나 국군에 동조 협조한 자, 그네들의 본인이나 가족을 살해하거나 괴롭힌 자. 그들의 군사목표물을 야간 폭격기에 알리다 미처 철수하지 못한 아군 공작원 등….
미처 월남 못하고 북에 갇히고 고립된 젊은이만도 수십만명을 헤아렸다. 이들 대부분은 깊은 산속이나 마을 근처 땅굴 속 또는 신원을 감추고 위장생활을 했으며 또는 불구자 등의 행색을 하며 收復(수복)만을 고대하고 살았다. 초근목피로 3년이란 긴 세월을 근근이 버티다 停戰이 되고 보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한숨과 함께 더러는 자결하고 대다수가 이 대사면 앞에 무릎을 꿇었고 결국 올가미를 뒤집어 썼다.

초기에는 대다수가 연고가 있는 인근 산 속에서 땅굴을 파고 은신해 있었다. 가족들로부터 식량을 조달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토벌이 심해졌고 마을마다 중공군의 주둔으로 불순한 가족들은 전부 축출당했다.
대대적인 토벌로 한 번에 수십명씩 붙들렸고 잡힌 청년들은 그들 가족과 마을사람이 보는 앞에서 전신주나 가설 단두대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일주일쯤 후에 내다 버려졌다.

그럴수록 그들은 깊은 산 속으로 은신했고 이들을 「도토리 판정꾼」이라 불렀다.
혹자는 대동강 하류 갈대밭에서 연명 했다. 토벌대가 오면 물 속에 몸을 숨기고 갈대를 꺾어 입에 물고 감탕 속에서 호흡하며 살았다. 은신자들은 주로 야간에 곡식을 구하다 매복한 토벌대에 붙잡히거나 사살된 자들이 많았다.

동절기에는 산열매를 미리 준비하여 폐광된 동굴 속에서 월동을 했으며 병들고 굶주려 죽은 자들도 수없이 많았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停戰이 되었다. 그나마도 폭격소리와 멀리 남쪽에서 들리는 포성도 멎었다. 절망이었다. 등화관제로 천지가 어둡던 도시, 마을마다 전등불이 켜졌다.
전쟁이 끝나가기 무섭게 보위부원, 내무서원 수사팀은 산 속 수색은 물론 개개인의 신분과 과거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해가 바뀌고 4월15일을 기점으로 자수한 자는 어떤 죄건 관용과 일자리를 주고 은신하다 붙잡히면 그대로 교수형이다.
하나씩 손을 들고 수사기관에 자수를 해 들어왔다. 간단한 조사 후 고무신 한 켤레씩 들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해골상태로).

어떤 농가에는 일손이 없었다. 어느 날 벙어리 청년 하나가 남루한 거지꼴로 동냥을 하러 왔다.
손짓 발짓하며 그 벙어리 청년의 공복을 채워주고 집에서 같이 살며 일하자고 하였다. 벙어리 청년도 응하고 그날부터 땔감을 구해오고 농사를 짓고 비록 병신이지만 가족같이 지냈다. 그런데 사면령이 내린 어느 날 주인 앞에 무릎을 꿇은 벙어리는 『아버님 그간 돌보아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저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벙어리로 행세하며 3년을 지냈지만 이젠 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했다.

주인 내외와 마을사람들의 놀라움은 말 할 수 없었다. 자수한 그네들은 겉으론 평민이었으나 그중에서 여러 부류로 분류되었고 초기에는 복구사업 등에 참여시켰으나 곧 집단 노역으로 끌려 갔고 어떤 사고가 나면 혐의자로 인민재판에 회부해 극형에 처하곤 했다.

4월15일까지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자수했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자수 안한 자나 그중 만의 하나 死線(사선)을 뚫고, 월남자를 제외하고는 지금 몇 명이나 어디에 살아남아 있을지 의심스럽다.

5. 중공 의용군과 미혼모

6·25 동란 중 참전한 중공군을 의용군이라 했다. 그 숫자는 엄청났다. 최전선 전투지역에서 최후방 압록강 연안까지 어느 시골 구석에도 중공군이 없는 곳이 없었다. 최일선이 무너지면 (전멸하면) 제2선이 투입되고 제3선, 제4선….

이것이 압록강 연안까지 연결되었다. 그러니까 부상자들을 제외하고는 교체란 법이 없었다.

중공군의 군수품 운송수단이란 말 다섯필이 끄는 마차가 대부분이고 개인 장구는 광주리 두 개를 앞뒤로 메고 행군했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면서 전진 이동 속도가 느리고 정체되기 시작하였다. 대동강을 기점으로 각 마을마다 주둔한 부대가 장기 체류하기 시작했으며 청천강 이북은 停戰시까지 한 마을에 주둔하였다가 그대로 퇴각한 부대도 많았었다.

그리고 그들은 폭격을 피하기 위하여 행군시나 주둔부대도 진지를 구축하지 않고 전원 민가에 투숙하여 폭격을 교묘히 피했다.

모택동의 군율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했다. 민간인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은 그대로 죽음이었다. 야간을 통해 南進(남진)하다 날이 밝으면 그 부대장이 근방 마을의 里위원장이나 마을 책임자에게 주둔 동의를 구하고 가가호호 집 크기에 따라 인원배정을 한다.

한 가정에 배정된 4~5명 단위의 군인들은 우선 휴식을 취하기 전 그집 물독에 물을 가득 채워주고 인근 산에서 땔감나무를 부엌 가득히 채워준다. 그리고나서 그들 나름대로 식사하고 취침했다. 인민군이 한 마을을 주둔하고 지나면 된장·소금마저 바닥이 나지만 중공군이 지나가면 마실 물과 땔감이 그득했고 그들이 먹다남은 빵부스러기도 떨어뜨리고 갔으므로 중공군의 주둔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 전쟁 중 이북의 어느 마을에도 젊은이란 구경할 수 없었고 노인과 부녀자들뿐이었으므로 일손이 매우 귀할 때였다. 그리고 중공군은 언제 어디든 간에 민간인의 음식을 얻어 먹을 수 없게 하였고 불가피할 경우(경조사)는 먹은 만큼 적으나마 대금을 꼭 지불했다. 이것이 그들의 군율이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서면서 후방에는 한 마을에 주둔한 부대가 몇 개월에서 몇년을 그 마을을 떠나지 않고 주둔해 있었다. 자연히 간단한 대화가 통했고 서로 情이 통했다.

특히 마을마다 젊은 부녀자들은 남자란 마을에 주둔한 젊은 중공군밖에 없었으므로 자연히 그들과 가깝게 되었고 특히 야간에 밀회가 많았다.

내가 보통강 제방에 반움막(경사진 땅을 파서 뒷벽은 반공호, 반은 움막으로 지은 집)을 짓고 지내던 중 눈비가 내리면 춥고 빗물이 새어서 볏짚이 몇단 필요할 때였다.

서평양에서 밤 늦게 일을 보고 귀가하던 중 철도길을 건너 보통벌에 이르렀을 때 길가에 큰 짚단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운반하다가 흘린 것으로 생각되어 둘러메고 가려고 들어보니 이상하게 좀 무거웠다. 젖어서 그러려니 하고 한참을 가다 보니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볏짚단을 내려놓고 매듭을 풀어보니 볏짚 속에서 커다란 헝겊뭉치가 나왔다. 헝겊 속을 헤치니 핏덩이 갓난아이가 나왔고 너무 놀라 자세히 보니 그 갓난아이는 이미 얼어 죽어 있었다.

묻어주자니 연장도 없거니와 언 땅이라 어쩔 수 없어 원상태로 볏짚에 묶어 논두렁에 내려놓고 발길을 돌리자니 그것도 못할 짓이었다.

중공군이 주둔했던 모든 마을에서는 이런 사건이 줄을 이었다. 버려진 핏덩이의 에미가 뉘집 처녀라느니, 유부녀라느니… 말들이 많았다.

停戰 직후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황해도 어느 곳에서는 미혼모가 버린 아이들을 키우는 곳이 생겼다고 한다.

황해도 사리원에서 평양으로 오는 객차안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젊은 여인이 진통이 시작되었고 차 안에 의사가 있을 리 없고 어느 경험 많은 할머니가 애기를 받았는데 사내아이를 분만한 산모에게 『왜 막달이 된 여인이 외지에 나왔느냐』고 그 할머니가 물으니 미혼모로써 집에서는 분만할 수 없어 아기 키우는 곳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귀가하려 하였는데 그런 아이가 너무 많아 돌보아줄 보모가 태부족이라 하였다.

병자호란 등 비슷한 병란으로 우리네 여인들이 호족들의 수난을 수없이 겪었으나 이번 전쟁은 자기네 사내들은 모두 전장에 내어보내고 외국 젊은 병정들이 온 마을에서 거들먹거리며 먹을 것 몇 되박, 향내 풍기는 비누 몇 장으로 마을 여인들을 품에 안았다.

원치 않는 씨앗이 얼마나 생겨났을까? 아마 그 씨앗들도 무슨 姓씨로써 이땅에서 성장하였는지 모르지만 금년으로 치면 47~48세는 되었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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