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의 김대중 연구(15)
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⑤-4;
6·15선언 제2항은 무허가 통일방안에 의한 「국가 정체성의 변조」 기도?;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검찰 공소장 및 논고문
1980년 7월31일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金大中씨에 대한 공소를 제기했는데 이런 대목이 있다.
<『金大中은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해서는 연방제를 만들어야 하며 북한이 종래부터 주장해 온 남북 평화공존과 교류, 그리고 민족화해 주장 등은 나의 통일관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하는 등 각종 기자회견, 時局강연, 책자 출판 등을 통하여 북괴의 통일전선과 선전 선동에 同調, 찬양하는 주장을 하는 등 反國家 활동을 하여 오다가(下略)>
金大中씨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그에 따른 그의 對北 언동은 북한의 對南 적화통일에 동조하는 주장이란 공소사실은 그 뒤에 법원 판결에 의해서도 유죄사유로 유지된 우리 법원의 확정된 판단이 되었다.
1심 재판 때의 검찰 논고문은 이렇게 주장했다.
<피고인은 金日成의 同(편집자 注-1960년 제안) 연방제 주장을 몰랐다고 하나, 피고인은 당시 민주당 강원도당 부위원장으로 있었으며, 위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당시 민주당 대변인 曺在千이 위 金日成의 연방제 제의를 상투적인 파괴공작이라고 일축한 점으로 보아 피고인의 이 주장은 경험칙상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중앙정보부의 「金大中의 남북연방제 통일주장 내용평가」 및 金大中, 金日成의 연설내용 全文(남북연방제 관계)에 의하면 金大中의 연방제 주장은 내용 면에 있어서 북괴의 고려연방공화국제와 동일함은 물론 피고인 스스로 『북한의 통일 주장은 나의 통일관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한국은 북한의 연방제를 받아들여야 하고 북한은 한국의 유엔 동시 가입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여 북괴의 통일노선에 동조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피고인의 위 변소는 이유 없습니다>
중앙정보부의 판단
위의 논고문 내용은 그 이후의 재판과정에서 받아들여져 유죄 선고에 있어서 근거가 된 것이다. 위의 논고문에 등장하는 중앙정보부의 金大中 연방제 판단 보고서 요지는 이러했다.
<북괴의 「남북연방제」안은 4·19 직후인 1960년 8월 당시 我國의 불안한 정국과 국내 혁신 정당 및 학생층의 비등한 통일논의에 편승, 최초로 제의한 이래 현재까지도 그들의 핵심적 통일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북괴는 이를 통해 한반도 현상을 인정하는 듯한 공존 인상을 부각시켜 통일문제의 민족 내부화와 주한 미군의 철수를 촉진시키고 한국內 각계 각층 대중과의 광범한 통일 전선을 형성, 聯共 합작 여건을 조성하는 등 對南 폭력 적화혁명 기반을 강화하고자 적극 획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북괴 연방제안과 金大中의 주장을 비교해 보면, 표현상 차이를 제외하고는 同 연방제안의 성격, 활동(기능) 및 기구 구성면 등에서 쌍방이 일치하고 있다.
金大中의 연방제 통일주장은 북괴의 주장과 동일함은 물론 金大中도 이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연방제와 함께 「한반도의 外軍 철수」를 주장함으로써 同 연방제를 내세워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하려는 북괴의 전략적 기도에 영합하였다. 북괴는 그의 이같은 태도를 중시, 그를 「민주 인사」로 규정하였고, 『민주 인사 집권時 연방제로 통일을 실현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金大中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면 평화적 통일이 실현되었을 것』(1975년 5월17일 金日成·日 마이니치신문 기자회견)이라고 피력하였다. 1973년 8월28일에는 「金大中 사건」을 들어 남북대화의 일방적 파탄을 선언(남북조절위 북측 공동위원장 김영주 성명)하는 등 그의 활동을 적극 비호한 바 있다.
이로 볼 때 金大中은 북괴가 對南적화 전략 추진의 여건 조성책으로 제시해 온 「남북연방제」안에 사실상 동조함으로써 북괴를 고무시킴은 물론 나아가 주한미군 철수 주장으로 적을 이롭게 한 것으로 평가된다>
黃長燁·정보부 對北전문가·검찰 및 법원의 판단은 북한 측 연방제가 對南 공작용이며 金大中의 연방제는 거기에 동조하고 있다는 데 일치하고 있다.
연방제는 왜 자주 바뀌는가
金大中씨는 1980년에 조사를 받을 때 자신의 연방제안이 金日成의 연방제안과 일맥상통한다고 했다가 어떤 경우에는 다르다고 주장하곤 했다.
金日成의 연방제는 남북한의 유엔 개별 동시 가입을 반대하는 데 대하여 자신의 연방제는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주장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金日成의 연방제는 연방공화국이 남북한의 지역정부에 대해 우월적 지배권을 갖는 데 반해 자신의 연방제는 남북 정부가 독자적 지배권을 갖는 공화국 연방제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1975년 10월10일에 북한 사회과학출판사에서 펴낸 「주체사상에 기초한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 리론」이란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고려련방공화국의 특징은 그것이 중앙정부의 기능을 수행하는 주권기구가 아니며 주권행사는 의연 련방을 이루고 있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이른바 「대한민국」이 한다는 데 있다.
고려련방공화국은 중앙주권적 권력기구로서의 련합(련방) 정부가 아니며 그 최고 민족회의는 다만 전민족적 리해와 관련된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 문제들을 협의하며 북과 남의 합작과 교류를 협조하고 보장하는 임무를 수행할 따름이다. 주권적 기능은 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남조선 당국이 하게 된다>
북한의 연방제는 진정한 통일방안이 아니라 對南 적화 전술이므로 그 내용이 수시로 바뀐다. 1960년 8월에 金日成이 제안한 연방제는 「남북 정부의 독자적 활동을 보장하면서 두 정부의 대표부로 구성되는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의 경제·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자」는 것이었다.
4·19 학생 혁명으로 張勉 정권이 탄생한 뒤 한국內 좌파의 목소리가 커질 때 對南공세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제안한 것이다.
金日成은 제안 연설에서 「비록 통일적인 련합정부가 못 되어서 통일적인 국가적 지도는 못 하더라도…」라고 하여 이 연방제가 협의체 정도의 성격임을 밝혔다. 1973년 3월에 金日成은 연방제下의 국호를 고려연방공화국으로 하자면서 이 단계를 완전한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의 잠정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 전해 7·4 남북공동 성명을 계기로 하여 남북간에 대화가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1980년 10월 金日成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으로 명칭을 다시 바꾼 뒤에 이 연방국가가 완성된 통일국가라고 규정한 바탕에서 정치·군사적 동맹이나 블럭에 가입하지 않는 중립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해 5월 全斗煥의 신군부가 집권하여 남북관계가 새로운 무대를 맞았을 때 나왔다.
이념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적대적 이념을 남북에 그대로 두고 통일국가를 완성한다는 북한 정권의 속임수는 1991년 1월1일의 金日成 신년사에서 다시 한 번 수정된다. 소련-동구 공산권의 붕괴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金日成의 허약한 처지를 반영한 修正이었다.
<우리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좀더 쉽게 이루기 위하여 잠정적으로는 연방공화국의 지역자치 정부에 좀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여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더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연방제 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하는 문제도 협의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다.
6·15 선언의 제2항으로 남북간의 통일전선 형성에 성공?
남북관계의 환경이 바뀔 때마다 북한 정권은 연방제안을 신축적으로 수정하고 있는데 그 일관된 목표는 연방제 제안으로써 남한內의 친북세력을 고무·강화하여 통일전선 구축(金日成·金正日 세력이 남한內의 친북세력과 손잡고 남한內의 애국세력을 고립시키겠다는 전략)을 용이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북의 연방제와 우리의 연합제가 부분적으로 같으니 통일의 지표로 삼자는 6·15 선언 2항의 합의는 코끼리의 코를 만진 장님이 고무 호스와 같으니 물을 받는 데 쓰자고 하는 것과 같다. 북한의 연방제는 전면 부정해야지 부분적으로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전면 긍정으로 빠져들게 돼 있다.
金正日 정권은 2000년 6·15 선언의 제2항 합의야말로 1960년 이후 계속된 연방제 공세가 金大中 대통령에 의해 받아들여진 획기적인 성과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 선언을 계기로 하여 그 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親北 좌파 세력의 躍進(약진)은 연방제 전술이 북한 정권 측의 예상대로 상당히 먹혀들고 있음을 실증하였다. 金正日·金大中 정권과 한국內 친북세력은 6·15 선언 제2항의 의미를 통일 열기로 확장시키면서 때 아닌 親北 바람이 일어나게 했다.
對北 지원문제, 이념갈등, 언론사 세무 사찰 문제, 2002년 대통령 선거, 부시의 「악의 축」 발언, 主敵 개념 논란 등 중대한 國事를 놓고 벌어진 갈등의 구조를 보면 대한민국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의 윤곽을 알 수 있다. 金大中 세력의 일부와 친북세력은 金正日 세력과 같은 편에 서서 한국사회의 主流인 애국·보수·반공 세력 및 동맹국인 미국과 대한민국의 핵심 가치관을 공격하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6·15 선언 제2항 합의는 한국內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큰 변화를 줌으로써 한반도의 역학관계, 나아가서 동북아의 전략적 힘의 관계에도 큰 변화를 주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對北 강경 정책을 쓰려고 해도 남북한에 걸쳐서 형성된 일종의 통일전선 세력의 거센 반발이 브레이크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한 교환 제안
1980년 현재로 金日成과 金大中 연방제의 핵심적 차이점은 유엔 가입 문제뿐이었다. 이 차이점도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달리 보인다. 金大中씨는 피의자 신문 때 남북한의 유엔 개별 동시 가입을 지지한다면서도 이런 단서를 달았다.
『연방제 지지를 전제로 하지 않은 유엔 동시 가입은 동서독처럼 남북분단을 영구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朴正熙 대통령의) 6·23 선언을 반대한다』
金大中씨는 한국이 남북한 연방제를 지지한다고 선언한 뒤에 유엔에 남북한이 따로 동시 가입하는 것은 지지하지만 그런 지지 없이 따로 가입하는 것은 남북한의 분단을 영구화시키는 것이므로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북한의 연방제를 한국의 국가정책(유엔 가입)보다 더 우선시키는 태도이다. 이런 맥락에서 金大中씨는 『한국은 북한의 연방제 주장을 받아들이고 북한은 유엔 동시가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같다. 이 말을 잘 분석해 보면 金大中씨의 對北觀, 그 본질이 보인다.
그의 話法의 입각점은 한국이 아니라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의 중립지대이다. 그는 제3자 입장에서 남북한 양측에 충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실속을 들여다보면 북한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의 권유대로 한국이 북한의 연방제를 받아들인다면 남북한이 단일 國號 아래서 대외적으로는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게 되므로 유엔에 따로 따로 동시 가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유엔 동시 가입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金大中씨는 맞바꿀 수 없는 두 조건을 교환하라고 한 것이다.
그 교환이 이뤄지면 한국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어 있는 그런 거래를 제안한 것이다. 가장 큰 차이점으로 보이던 유엔 가입 문제도 이러하다면 결국 金日成과 金大中 연방제 사이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6·15 선언 2항의 합의 같은 것도 원래 비슷했던 두 방안이 만나서 이룬 자연스런 결과가 아니겠는가.
金大中씨는 정치적인 약속을 자주 바꾸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통일문제에 관해서만은 세월이 지났을 때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실천적인 의미를 지닌 것임을 알 수 있다.
金大中 평민당 총재는 1990년 7월6일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남북한이 유엔에 단일 의석으로 가입하자는 북한의 안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튿날 그는 또 『남한의 유엔 단독 가입에 반대한다』라고 했다. 그는 10년 전에 말한 바 그대로 「연방제 지지를 전제로 하지 않는 한국의 유엔 단독 가입」에 반대하고 나섰을 뿐만 아니라 북한 측의 주장에 찬동한 것이다.
국가의 대외적 정통성과 관계되는 유엔 가입문제에 있어서 金大中 총재는 자기 나라 정부의 입장에 반대하고 헌법상 반란집단인 북한의 주장에 찬동한 것이다. 그는 1991년 5월 우리 정부가 유엔 단독 가입 방침을 밀어붙이자 유엔의 케야르 사무총장에게 私信을 보내 「대한민국의 유엔 단독 가입은 한민족으로서는 불완전한 의사표시」라면서 사실상 반대의사를 전했다.
金大中 총재의 이런 개인 외교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유엔 단독 가입이 중국의 찬성으로 성사될 지경에 이르자 북한 정권도 동시 가입에 찬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金大中 총재도 태도를 바꿔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에 찬성하는 쪽으로 돌았다. 그의 行跡은 북한 정권의 궤도 수정을 따라갔다.
黃長燁씨의 증언 그대로 북한 정권이 단일 국호下의 유엔 가입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이것이 연방제와 表裏不同(표리부동)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단일 국호下의 유엔 동시 가입이 이뤄지면 통일문제는 국내 문제로 되어 북한이 무력으로 남한에 개입하더라도 국제간섭을 받지 않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對南 적화 전략에 있어서 남한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고 북한에 유리한 연방제와 유엔 단일 의석 가입 문제에 있어서 金大中씨가 북한 편에 섰다는 것, 그런 자세의 연장선상에서 6·15 선언 제2항이 탄생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뒤 金大中 총재는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유엔 동시 가입의 입장을 포기한 일이 없었으나 북한의 주장인 단일의석 공동 가입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지만 심정적으로는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래 통일을 촉진하는 의미에서도 동시 가입보다 더 좋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요약하면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유엔 가입 방안을 지지했으나 속마음으로는 북한측 단일의석 가입안을 지지했다는 이야기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곡예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북한 측 주장에 현실적으로는 반대해야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지지하는」, 즉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이런 모순상태의 그 가슴, 심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金大中씨의 젊었을 때 추억-좌익 행동대원 시절의 경험에서 생긴, 하나의 정서로 굳어진 이념-국가-역사관과 유관하지 않을까. 현실적인 제약이 있더라도 돌파가 가능하게 된 1998년 이후의 집권 시절 金大中 대통령은 그 가슴과 심정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對北 사업을 밀고나간 것이 아닐까.
<1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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