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의 김대중 연구(16)
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⑤-5;
6·15선언 제2항은 무허가 통일방안에 의한 「국가 정체성의 변조」 기도?;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국가와 헌법에 대한 확신의 부족: 『통일이념은 그때 가봐서 결정할 일』
연방제를 비롯한 金大中씨의 對北觀 및 통일관 가운데 북한 정권 측 주장과 중요한 점에서 일치를 보인 것은 위에서 소개한 유엔 동시 가입 반대만이 아니다. 통일된 조국의 理念像에 대한 모호한 태도가 그것이다.
1980년 10월에 발표된 金日成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은 통일된 국가의 이념은 지금의 남북한 그대로 둔다고 되어 있다. 남북통일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이념으로 분단된 조국을 이념이 단일화된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인데도 金日成은 통일의 본질을 피해가는 애매모호한 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노동당 규약이나 내부 지령을 통해서는 赤化통일을 강조했다.
金大中씨는 1993년까지 자신의 통일방안이 어떤 정치 이념을 가진 통일국가를 만들려고 하고 있느냐에 대하여 『그것은 그 세대가 결정할 일이다』는 식으로 모호한 대답을 해왔다.
1991년 7월호 月刊朝鮮에 실린 趙成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金大中 총재의) 공화국연합제 역시 궁극적으로 1국가 1체제인 단일국가를 지향하고 있는데 통일국가의 이념적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金大中:우리로서는 자유민주주의를 희망하고 있지만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통일의 제1단계입니다. 21세기에는 無이념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공산권 국가들이 시장경제원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 국가 역시 사회 복지 등 좀더 많은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현재의 추세로 미뤄보면 틀림없이 無이념시대가 도래하리라고 봐요. 예컨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正·反의 대결을 하다가 이제 合의 단계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변증법적 통일이지요. 어떤 체제를 선택할지는 그때 사람들에게 달려 있지요. 바꿀 권리도 다음 세대 몫이라고 봐요. 다만 책임 있는 지도자로서 완전통일 때까지 비전이 없을 수는 없지요. 방향은 정해 놓아야 합니다>
이 말에서 드러나듯이 金大中씨 또한 자신의 통일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통일조국의 이념적 정체성을 밝히지 않았다(1993년부터는 자유민주주의라고 밝혔다). 이런 식의 통일방안은 열차의 종착역이 어딘지 말하지 않고 승객을 모집하는 것과 같다. 金大中씨의 위의 발언을 분석해 보면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사회주의에 대한 우월성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이런 생각의 소유자는 대한민국의 북한에 대한 우월성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는 세계사 속에서 실패한 사회주의와 성공한 자본주의를 同格으로 보는 것 같기도 하다.
21세기가 無이념시대가 될 것이란 그의 주장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이념으로 보지 않는 시각이 아니라면 사리에 맞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가 더욱 성숙되는 세기가 될지언정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이념이 나올 전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同格으로 놓는 그 특유의 논리를 또 구사하면서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를 통일조국의 이념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하였다. 金大中 총재의 이야기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체제 보완적이고, 사회주의가 시장경제원리를 받아들인 것은 체제 대체적이란 본질적인 차이를 무시한 형식논리이다.
공산권의 붕괴에 대해 그는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일방적 승리로 보지 않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合」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젊었을 때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던 그는 사회주의의 용도 폐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어떤 이념으로 통일할 것인가는 그때 가서 결정할 일이라는 그의 말에서는 대한민국의 기본 가치관인 헌법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애써 수호할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의 이런 뿌리 깊은 생각 때문에 6·15 선언 2항의 합의가 가능했고 북한도 그러한 金大中 대통령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합의에 응한 것이 아닐까.
중립화 방안과 外軍 철수
金大中씨가 일본에서 주도적으로 만든 韓民統의 1973년 8월13일자 발기문에는 「한반도를 중립화하고 남북연방제에 의한 점진적 통일을 실현한다」고 적혀 있다. 1980년 10월10일 金日成도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 발표 연설에서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를 가지고 있는 북과 남의 두 지역을 하나의 연방국가로 통일하는 조건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 중립국가로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또 현실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것입니다」고 밝혔다.
중립국가가 된다는 것은 韓美 동맹 관계를 폐기,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金大中 평민당 총재는 1989년 6월3일 광주 교육대학의 시국 강연회에 참석하여 『장차 이 나라가 통일이 되면 오스트리아식 영세중립국가로 가게 될 것으로 본다』고 밝힌 적이 있다. 1991년 7월호 月刊朝鮮 인터뷰에서 이 점을 지적받은 金大中 총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말이죠. 멀리 내다보는 데도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재작년 얘긴데요. 소련과 동구라파가 저렇게 달라졌어요. 중립이라는 용어도 냉전체제를 想定해서 쓴 용어인데 이제는 냉전이 없어졌다 이겁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니까 그때 한 말이 변할 수밖에 없죠. 세계에서 미·일·중·소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입니다. 제가 볼 때는 통일이 되고 난 후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냉전시대의 중립은 일종의 경제적, 보호요청적 중립이라면 이제는 친선적·협력적 중립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냉전시대의 대한민국을 6·25 남침 등 북한의 도발로부터 지켜낸 것은 중립화가 아니라 韓美동맹 관계였다. 냉전 체제下일수록 중립보다 동맹이 더 중요했고,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한반도에서는 동맹이 중립보다 더 중요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이 존속하여야 한다는 것은 金大中 대통령뿐 아니라 金正日의 견해(金正日이 지금 상태의 주한미군이 통일 이후까지 있어도 좋다고 했다는 金대통령의 주장에 대해서는 큰 의문이 있다)라고 한다.
金大中씨는 1980년에 군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한국에서 유엔군 등 外軍 철수를 주장한 사실」에 대하여 추궁하자 이렇게 말했었다.
『제가 외군 철수를 주장한 것은 남북간에 전쟁억제협정을 체결하고 미·소·일·중 4대국의 지원 협력 결의 후 철수하라는 것이었지 현시점에서 철수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위의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주한미군의 주둔 여부는 한국과 미국 사이의 쌍무 관계에서 결정될 일이지 국제적인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1948년에 일단 철수했던 주한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것은 金日成의 남침이었고, 주한미군의 유일한 주둔 목적은 북한군의 再남침을 사전에 억제한다는 것이다.
주한미군 문제는 미군의 주둔 이유를 제공한 북한과 논의할 성질이 아니다. 이것은 강도 피해자가 강도에게 경비원의 增員에 대해서 양해를 구하는 것과 같다. 그 강도가 경비원이 많아져도 좋다고 했다는 말을 피해자가 듣고 와서 가족들에게 자랑한다면 이건 코미디이다.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더라도 주한미군 문제는 북한과 논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韓美 양국의 일관된 자세였다. 따라서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북한 및 주변국가와 이야기가 잘 되면 미군을 철수한다는 金大中씨의 생각은 연방제와 맥락을 같이 하는 위험천만한 발상이었다.
徐東權 증언: 북한 측이 연합제와 연방제는 다르다고 했는데…
1990년 가을에 평양에 가서 金日成·金正日과 회담했던 徐東權 당시 안기부장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와 만났을 때 金日成이가 말하기를, 盧泰愚 대통령과의 頂上회담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데,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남측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써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통일방안에 남북연합제 단계가 있는데 북측의 연방제와 비슷한 점이 있다. 이 공통점을 살려 서로 논의해 보면 어떨까 한다』
金日成은 배석한 對南 전문가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는 나의 제안을 정면에서 반박했다. 북측의 연방제와 남측의 연합제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설명을 다 듣고 난 金日成은 『그러면 안 되겠구먼』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徐東權씨는 2000년 평양 頂上회담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우리가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어떤 식으로든지 받아들이기로 약속한 때문에 成事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金日成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한 연합제와 연방제가 어떻게 金正日·金大中 사이에선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합의되었는가. 평양 선언문에서 나온 연합제는 우리 정부의 공식 통일방안(盧泰愚 시절 국회 동의를 받은 것)에 나오는 그 연합제가 아니라 金大中 대통령 개인의 연합제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이제 거의 완벽한 설득력을 가진다.
金大中 대통령은 1991년 4월에 발표한 「3단계 통일론」이란 글에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제창하는 공화국 연합제의 기반 위에서 1990년대에는 제1단계의 통일이 성취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 있다」
그 뒤 金大中씨는 1단계 통일로의 進入은 남북 정치지도자의 결단만으로써 가능하다는 논리를 폈다. 1995년에 나온 「金大中의 3단계 통일론」은 林東源씨(현재 대통령 특보)가 사무총장으로 있던 아태평화 재단에서 펴냈다.
이런 대목이 있다.
「남북간 정치적 신뢰 조성·군사적 긴장완화·주변 4강의 남북한 교차 승인 등…이러한 상황변화는 남북연합 진입에 요구되는 전제조건이라기보다는 촉진 요인이며, 따라서 남북연합으로 들어갈 것이냐, 들어간다면 언제 들어갈 것이냐 하는 문제는 양측 당국의 판단과 결단에 달려 있다」
1980년 5월25일자 자술서에서도 金大中씨는 이렇게 적었다.
「나의 통일론은 1972년 이래 국내에서부터 주장해 온 3단계 통일론이다. 즉,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이다. 그 중에서 먼저 평화공존부터 시작해야 한다. 남북은 전쟁억지, 동시 유엔가입, 동시 외교를 당면 목표로 英연방제와 같은 느슨한 연방제 아래 상징적 통일의 제1보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17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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