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手記/ 19연대 사병의 격전記





19연대 사병의 격전記


세 번의 죽을 고비… 傷痍記章받고 제대


가족과 함께 피난을 가던 길에서 입대, 즉석에서 군번을 받고 영천전투에 투입되었다. 그후 원산에서 평양으로 진격한 부대는 개천 북방서 중공군에 포위돼 8일 만에 死線을 뚫고 南下했다

李 範 雨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北으로부터의 피난민 행렬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半世紀가 지나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한 이때 6·25 체험을 기술하려고 펜을 잡고 보니 기억이 혼미해져 올바른 체험담이 기술되어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문장이 될지 두려움이 앞서고 마음마저 얼어붙는 듯 하다.

1950년 6월26일 아침, 필자 나이 19세. 아무 생각 없이 잠자리에서 깨어나니 북쪽의 하늘 아래에서 꽝꽝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라디오를 들어보니 지난밤 0시를 기하여 북한 괴뢰군의 남침으로 우리 국방군이 맞서 싸우고 있으니 국민 여러분은 동요하지 말고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여 주시기 바란다는 對(대) 국민 방송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따라서 휴가 및 외출 중인 국군 장병은 이 방송을 듣는 즉시 원대 복귀하라는 방송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예삿일 같지 않아 동네 이장댁과 내가 속해 있는 청년단(李範奭 將軍이 이끄는 民族靑年團) 단장 댁을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며 수소문해 보아도 그 누구도 나보다 더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3일 지나고 보니 동네 앞 일반국도(청주~영동 간)에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먼지를 일으키며 완전무장한 채 위장한 군용 지프차와 군용트럭만이 먼지 속에 라이트마저 희미하게 가리고 헌병 지프차의 뒤를 따라 분주하게 질주하고 있다.

이때부터는 서울 방면에서 보따리를 이고 지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동리 앞(報恩郡 炭釜面 高仟里) 도로를 꽉 메웠으며 발이 부르트고 기진맥진한 난민들은 하룻밤 쉬어가기를 청하며 동리로 파고들어 집집마다 난민들이 빼곡하게 차 초만원을 이루었다.

나의 집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편모를 모신 우리 4남매 등 5인 가족은 부엌 골방으로 합치고 방 3개와 마루까지 20여 명을 수용해도 모자라 헛간에 짚을 깔고 멍석을 깔아 10여 명씩 수용하는 등 법석을 떨고 정말 말 그대로 난리였다.

그럭저럭 10여 일이 지난 7월15일에는 우리 고장(報恩)에도 소개령이 내렸다.
우리 가족은 임시 입을 옷 몇 가지와 미숫가루 등을 마련하고 비축되어 있던 얼마간의 돈을 꾸렸다. 일부 돈은 어머님께 맡기고 피난길을 떠났다. 마당에 겨와 보리 등 몇 가마를 흩어놓고 돼지우리 문을 열어놓으며 마음껏 먹고 살라며 새끼 딸린 돼지 6마리를 뒤로 하고 피난길에 나섰다. 부모님 덕에 일정 시대에도 별 고생 모르고 살아온 나는 그날 그 시각부터 새로운 인생살이가 시작되었다!

8월5일 대구에 도착

45세인 어머님에게만 곡기로 끼니를 때워 드리고 우리 4남매는 과수원 옆을 지날 때면 떨어진 과일을 주워 상한 곳은 도려 내고 그것으로 끼니를 대신 해가며 많게는 하루 20㎞도 걷고 때로는 12㎞도 걸었다. 운이 좋은 날은 인심좋은 민가를 만나게 되어 편안하게 하룻밤 쉬어 가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학교 같은 곳이나 만나야 쉬었다 가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일행(외가 친척 등 5세대 30여 명)은 서로 도와가며 7월30일 경북 김천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날도 우리 일행은 어느 학교 교실 한 구석에 자리를 정했다. 젊은 사람 몇 사람은 자루를 들고 사과 밭을 찾아 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누가 다 주워간 뒤였다.

허탈한 마음으로 되돌아가려는데 저만치에서 난민 한 패거리가 다가오더니 황당한 어조로 빨리 남하하라고 독촉을 한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지금 충북 영동 쪽에서 오는 길인데 거기서 피난민들이 많이 총 맞아 죽었다고 하며 너스레를 떨어댄다.
필자가 지금 생각해 보니 요즘 문제가 일고 있는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두고 그렇게 와전되지 않았나 싶다.

하여간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우리 일행은 미숫가루 등으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대신하고 피곤한 몸을 그곳에서 쉬고, 다음날 짐을 꾸려 南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거기서부터는 피난민 수가 점점 늘어나 말 그대로 인산인해다. 어린이들이 부모를 놓치고 부모를 찾는 소리, 어른들이 어린 것들을 놓치고 아이들을 찾는 소리, 정말 아비규환이다.

우리 가족 중에는 9세짜리 막내 여동생이있었는데 잘 따라와주어 다행이었다.
이때부터 강행군을 계속하며 구미, 왜관을 거쳐 8월5일 대구에 도착하였다. 그때까지의 고생은 말로는 표현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민가를 찾아가면 되돌아 나오기가 일쑤고 밤이슬이라도 피하기 위해 다리 밑에라도 찾아가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볐다.

내가 피난 전에 집에서 난민들에게 베푼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어쩌다 마을 회관이나 학교 교실을 찾아들게 되는 날에는 밤이슬이나 비를 피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날도 이리저리 헤매다 어느 민가를 찾았다. 주인은 난색을 하며 이곳도 안전지대가 못 된다며 자기들도 내일은 떠나야 한다고 했다. 겨우 사정하여 하루저녁을 지새고 있는데 지난밤에 주인으로부터 들은 말이 맞아 떨어졌다.

어디에서 날아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구 시내 서쪽, 팔공산 밑에 포탄이 떨어지고 있다. 서둘러 미숫가루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감자 섞인 보리밥이지만 바가지에 수북이 담아주셔서 열무김치에 비벼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

그때는 담배 구하기도 어려운 때여서 어머님용으로 비축해 두었던 담배 한 갑을 주인댁에 주며 인사로 대신하고 짐을 꾸려 南쪽을 향해 떠났다. 가면서 전황을 전해들으니 대전을 거쳐 호남 지방으로 진격하던 적군은 낙동강에서 아군을 무너뜨리고 적의 주력부대 선발대는 경남 진주를 지나 마산에 진주하고 있다 한다.

이런 와중에 밀려가다 보니 8월8일에 경북 경산이란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어느 학교를 찾아가니 교문에 피난민 수용소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들어가서 교실을 들여다 보니 이미 교실은 꽉 차 있고 우리 일행은 현관에 자리를 잡고 짐을 풀었다. 이날도 우리 일행은 전과 같이 사과밭을 찾아갔다. 예상대로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앞을 가로막는 건장한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피난지에서 입대

살펴보니 현역군인은 아닌데 팔에는 모병관이란 완장을 두르고 우리 일행을 보고 따라오라고 명령조로 말한다. 따라가보니 우리 일행이 있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또다른 학교였다. 여기에는 어디에서 모아왔는지 이미 수백 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주위에는 군용트럭이 수십 대가 서 있고 현역군인과 운전병 등이 모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들이 모두 전방에서 신병 보충을 받으러 온 보충대원들이라 한다. 그러더니 소지품과 사복을 벗기고 군작업복으로 갈아 입히고 장교인 듯한 군인이 단상에 올라서 아주 평온하고 엄숙한 어조로 단독직입적으로 말했다. 『제군들은 지금 이 시각부터 우리 대한민국의 군인이다』란 서두로 일장 훈시를 하고 하단 한다. 곧바로 군인 수명이 달려오더니 즉시 군사훈련으로 돌입한다.

나는 이미 청년단원 시절 교련 등은 익혀두었기 때문에 그리 어려움은 없었다. 훈련이라야 극히 상식적인 무기 사용 방법, 자기 신변 방어하는 방법, 자기신변 위장하는 방법, 수류탄 투척방법, 개인 호 구축방법, 부상 때 응급처치 방법 등 필수적인 문제 몇 가지가 전부였다.

그러나 충분히 훈련된 병사가 없으니 어쩌랴! 모여 있는 군중 속을 헤집고 다니며 외모만 보고 차출하여 주소 성명만 기록하고 즉석에서 군번을 수여하여 승차시켜 전장으로 보내고 하였다. 이렇게 차출해 보내고 나면 모병관들은 또 젊은이들을 모아오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하기를 10여 일, 나라고 언제까지 그곳에 남아 있게 하진 않았다.
8월20일 예외없이 트럭 몇 대가 달려오더니 50여 명에게 군번을 지급하더니 승차시킨다. 나도 군번(0130761)을 지급받고 승차하였다. 차는 곧바로 달려 경북 영천에 닿았다. 그곳이 국군 제6사단(2연대, 7연대, 19연대)의 최전방 방어진지였다.
내가 배속된 곳이 19연대 2대대 5중대 3소대였다. 이 무슨 행운인가!

소대장에게 신고를 마치고 소대 선임하사와 인사를 나누다 보니 경비대 시절 입대한 대전 출신 이규순(당시 이등중사)씨라고 우리 李씨 문중의 大夫항렬인 宗親(종친)이었다.

당시 전황은 적의 주력이 영천에 집중하였던 것이다. 영천만 터지면 대구는 자동적으로 함락되고, 포항에 진을 치고 있던 적이 경주를 거쳐 울산으로 진격할 것이고 마산에 있는 적은 진해 방면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내일이면 영천을 함락한 적 주력부대는 경산 청도 밀양을 거쳐 부산으로 진격하게 되면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각국 병사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것이지만 대한민국 국민과 장병들 그리고 정부는 어디로 갈 것인가. 갈 곳은 저 무도한 적의 총칼 아래 쓰러져야 하고 아니면 남해바다 속으로 들어가야 할밖에 더 있겠는가. 이때 괴뢰군들은 다섯 손가락을 꼽기 전에 전쟁은 끝이 나고 적화통일된다며 떠들고 다니며 광기 어린 동작으로 최후 발악을 했다.

이런 상황 속에 내가 속해 있는 제6사단은 현 전선에서 死守(사수)하라는 상부명령과 함께 分隊長(분대장)급 이상에게는 卽決處分(즉결처분)권을 부여해 一步(1보)라도 후퇴하는 자는 즉결처분하라는 指令(지령)까지 하달되었다. 영천 시내 어느 사과밭은 내년엔 퇴비 한 주먹 안 주어도 사과농사가 잘 되겠다는 怪談(괴담)이 날 정도로 쌍방 전사자의 屍身(시신)이 많았다. 사단 의무대에서는 전상사 후송에 차가 부족해 응급조치만 하는 대로 중환자 우선 순위로 수송하는 형편이었다.

이즈음 부대 안에서 퍼진 유행어가 있었다. 육군 小尉(소위)를 「하루살이 소위」, 下士官(하사관)을 「반짝 하사」라 稱(칭)했다. 하사관이 너무 부족하여 나 역시 이등병 신분인데도 중대 선임하사로부터 분대장 직책을 명 받아 분대를 통솔하기도 했다.

敵兵을 덮쳐 포로로 잡다

이런 상황으로 전선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 속에 美 공군 정찰기만 한 바퀴 순회하고 가면 괴뢰군은 어느 곳으로 간 곳 없이 사라진다. 곧 이어서 폭격기가 와서 뿌려대니까 말이다.

그래서 영천은 낮에는 아군 진지고 밤에는 적군 진지가 된다.
이런 와중에 나의 생애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그날도 예외없이 어둠이 깔리는 시각, 분대원들을 각자 개인호에 배치하고 난 뒤에 나는 전방을 살펴보고 있는데 불과 4~5m 옆에서 까만 물체가 나타나더니 총검을 한 괴뢰군이 필사적으로 돌진해 오는 것이 아닌가. 황당한 마음에 나는 네가 먼저 죽느냐 내가 먼저 죽느냐라는 생각으로 몸을 날려 상대의 총검을 잡아 낚아 덮쳐 어깨에 메고 있던 탄띠 끈으로 상대의 손을 뒤로 제쳐서 묶고 생포하여 중대본부로 데려가 중대장 崔源斗(최원두) 대위에게 인계하였다. 중대장은 수고했다 며 화랑담배 한 갑과 건빵 한 봉을 상을 대신하여 나에게 주었다. 내가 軍에 들어와 거둔 첫 전과였고 내 생전엔 영원이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 되었다.

다음날 나는 그 생포한 괴뢰군을 심문했다. 그 괴뢰군은 그날 밤 전투를 위해 척후정찰 임무를 띠고 정찰나왔다가 내가 전방을 살피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의 임무를 원만히 수행치 못할 것 같으니까 나를 해치울 목적으로 택한 행위였다는 것이다. 낮에 그 괴뢰군을 살펴보니 홍안으로 중학교 2~3학년 정도밖에 안되어 보인다.

이 급박한 와중에 우리를 구해준 救世主(구세주)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UN군 최고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었다.

9월15일부터 美해병과 전투사단을 인천에 상륙시켜 수도권으로 파고들기 시작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괴뢰군 주력부대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적은 만사를 포기한 듯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美 공군전투기는 퇴각하는 괴뢰군을 강타하여 괴뢰군이 타고온 말과 시체가 영천 북부 들판과 계곡에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영천 시내는 적이 최후 발악을 하여 아군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부대는 퇴각하는 적을 뒤쫓아 패잔병을 소탕하며, 동부전선으로 北進하기 시작하였다.

후퇴

10월15일 우리 부대는 함경남도 원산을 점령하였다. 北進하면서 패잔병들의 기습으로 아군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원산에서 보충도 받고 再정비하여 작전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

10월18일 원산 북부 함흥방면은 UN군에 맡기고 우리 소속부대 6사단은 전투지역이 바뀌어 원산에서 떠나 황해도 곡산을 거처 10월29일 북한의 수도 평양에 입성하였다.

나는 이 평양에서 추억에 남을 에피소드가 있다. 평양 어느 곳을 지나다 보니 목재로 지은 큰 창고 건물이 있는데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큰 단지가 수십 개가 널려 있는데 단지마다 벌꿀이 가득가득 들어 있었다. 부근에 사는 지방민을 불러 알아보니 북한 농민들로부터 공출받아놓은 것이란다. 우리는 우선 그 민간인에게 試食(시식)을 시켜보고는 아무 이상이 보이지 않아 마냥 퍼먹었고 수통마다 그득히 챙겼다.
잠시 지나고 있으니 속이 메슥거리고 정신이 아물아물해지며 쓰러졌는데 정신이 들어 깨어보니 사단 의무대였다. 2일 만에 깨어났다고 한다. 어리둥절하고 있으니 잠시 후 사단장이 밖에 있다 들어오더니 시치미를 딱 떼고 『야! 너 전사보고했는데, 이거 어쩐다?』하며 고개를 돌리고 웃고 있는 모습이 완연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수통 속 꿀은 누구인가 다 먹어 치우고 없었다.

다시 北進을 계속하는데 우리 6사단 예하부대 2연대, 7연대는 전초부대로서 압록강까지 진출하여, 그당시 평양에까지 진주해 있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압록강물을 떠다 바쳤다는 이야기는 당시 全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 19연대는 예비 부대로서 사단CP를 옹호하며 평양을 출발하여 순천 개천을 거쳐 평안북도 묘향산을 뒤로 하고 희천을 거쳐 12월10일 개고라는 깊은 산중 험한 계곡에 들어섰다. 사단CP를 중심으로 각 大隊별로 四方(사방)을 경계하며 야근을 하는데 밤 자정까지 쥐죽은 듯이 숨을 죽이고 있던 적군은 양쪽 산 능선으로부터 꽹과리 소리를 신호로 북을 치며 피리를 불면서 알아 듣지도 못하는 중국말을 쑤알거리며 집중 포화를 퍼붓는다.

그제야 중공군이 이 전쟁에 참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단예하 부대엔 통신망도 두절되고 우리 부대는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남북 통일을 목전에 두고 이제 전쟁도 끝이 났다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중공군의 개입으로 그런 꿈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6사단장 張都暎(장도영) 장군은 황당하여 19연대 全장병과 사단 본부 全장병을 집합시켜 놓고 『현재 우리는 엄청난 중공군 大部隊(대부대)에 二重三重 포위되어 있다. 따라서 압록강 전선에 진격한 2연대와 7연대도 중공군으로부터 완전히 무너진 상태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이 불리한 위치에서 중공군과 맞서 싸울 능력마저 상실하고 말았다』고 하며 『여기에 있는 사단 장비와 보급품 일체는 적이 사용치 못하게 불태워 버리고 지금 이 시간부터 10일간의 여유를 줄 테니 어떤 방법으로라도 이 포위망을 뚫고 나가 평양에서 집결하도록 하라』하며 당신의 철모에 은박지로 오려붙인 별을 떼어 버리고 권총은 빼서 품에 쑤셔 넣고 행동을 개시했다.

우리도 각 소대별로 조를 편성하여 간편한 차림으로 1,000여 m가 넘는 고지를 오르기 시작했다. 밤을 새워 오르며 여기만 오르면 포위망은 벗어나겠지 하고 기대하며 거의 정상에 오를 무렵 그때까지 가만히 숨 죽이고 있던 중공군은 또 피리소리를 신호로 발동하기 시작하여 따발총을 드르륵 거리며 수류탄 등을 굴려버린다. 여기에 또 많은 전우들을 잃고, 부상한 전우들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뒤로하고 도로 내리 뛰었다.

2주 교육 후 하사관으로 배치

산중허리까지 내려가니 날이 밝기 시작하며 풀숲에 숨어 밤이 되길 기다렸다. 이렇게 해서 밤이 된 뒤에 행동을 시작, 산중허리 능선을 향해 밑으로 내려 뛰었다. 여기서 포위망은 벗어난 셈이다. 다른 주력부대는 계곡 골짜기를 통하여 포위망을 벗어나려 하다 들켜 양쪽 능선에 배치된 적이 집중포화를 퍼부어 많은 희생자만 생기고 무너졌다.

밤을 새워 남쪽을 향하여 뛰다 보니 새벽녘에 희천에 당도하게 되었다.
계급장은 모두 떼어버린 복장이라 누가 하사관이고 누가 장교인지 분별이 되지 않는다. 몇명씩 만나는 대로 모여 조를 짜서 낮에는 숲속에 숨었다. 밤에만 활동하다 보니 개천까지 가는 데만 5일이 걸렸다. 그 이남에는 적이 보이지 않아 강행군을 하다 보니 포위망을 벗어난 지 8일 만에 평양에 닿았다.

예정한 10일간에 평양에 집결한 장병은 불과 몇명 되지 않았다. 이무렵 사단장 장도영 장군도 포위망을 탈출하여 우리들과 합세하게 되었다.

인명은 在天(재천)이라 했나. 개고에서 헤어졌던 소대 선임하사 이규순 중사도 이 평양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제2死線(사선)이었다. 이때 중공군은 계속 우리를 쫓고 있고 우리는 닥치는 대로 차량을 징발하여 남하했다. 이것이 그 악명 높은 1·4 후퇴란 것이었다.

우리는 또 수도 서울을 뒤로 하고 남하하여 경기도 여주 이천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사단CP가 죽산에 진을 쳤다. 신병을 보충받아 부대를 정비하는 데 하사관이 너무 부족하여 再정비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때까지 살아남은 각 중대의 사병 이등병 일등병을 차출하여 충북 진천에 어느 학교를 이용하여 2주간 하사관 교육을 시켰다. 나도 이때 차출되어 교육을 받고 하사로 진급되는 동시 분대장 직책을 명받고 원대복귀하게 되었다.

나는 충북 진천에서 하사관 교육을 마치고 소속부대에 원대 복귀하니 그곳이 경기도 용문산이었다.

이곳이 필자의 제3死線의 문턱이었다. 소속중대 제3소대를 찾아가니 앞에 소개한 李씨 종친 이규순 중사가 반갑게 맞아준다. 밤을 지새며 李중사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동안 수명의 소대장을 배속받았으나 전사 또는 부상으로 후송되고, 아직 배속을 받지 못하여 자기가 3소대장 직무를 대리하고 있다 했다.

李소대장(여기서부터 소대장으로 칭한다)으로부터 제2분대장직을 보직받고 밤을 새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새벽에 소대장은 중대본부에 부름을 받고 가더니 중대장으로부터 그날의 작전명령을 하달받고 돌아와 각 분대별 작전을 하명한다. 우리 소대의 작전은 지난밤에 적에게 빼앗겼던 고지를 再탈환하라는 명령이었다.

새벽에 사단 취사장에서 인부들이 지고온 주먹밥으로 조반을 대신하고 전투대형에 돌입했다. 나는 분대원을 인솔하여 목적지 계곡으로 들어가 평평한 곳에 자리잡고 앉아 화랑담배 한 대씩을 나눠 피우며 필승을 다짐했다.

그로부터 약10분 동안 아군 포부대의 지원을 받고 공격을 감행했다. 목표지점에 거의 도달했을 때 포사격으로 퇴각했을 것으로 믿었던 적은 기관총을 난사하며 방망이 수류탄이 나의 머리맡에 떨어지며 폭발된다. 여기서 나는 팔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고 전우들의 도움으로 중대 위생병의 응급조치를 받고 사단의무대를 거쳐 경주 18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육군병원의 군의관은 상처를 보더니 동맥과 혈관을 안 다치고는 파편수술하기가 곤란하니 팔목을 잘라야 빠른 기간에 완치가 될 수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내렸다. 나는 하다 안되면 다음에 자르더라도 그냥 치료해 달라고 애원했다. 神의 영험인지 치료가 원활하게 잘되어 회복 기미를 보였다.

원호대상에서 제외된 사연

이 또한 무슨 운명인가. 소대장 직무대리였던 이규순 중사도 내가 부상당하던 날 팔에 관통총상을 입고 후송되어 경주 18육군병원에서 치료 중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치료가 원활하여 같이 대구 839원호대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당시 육군참모총장 丁一權(정일권) 대장으로부터 名譽除隊證(명예제대증)과 傷痍記章(상이기장) 한 개만 손에 든 채 제대라는 비운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후 청주 靜養院(정양원)이란 곳으로 이송되어 요양을 하고 있었다. 이때 청주신외과의 원장 申必秀(신필수)씨가 정양원 의무과장직을 겸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신체검사를 한다며 군의관 몇 사람이 왔었다. 아무 생각없이 신체검사에 응했더니 급수미달이란 판정을 받아 원호대상에서 제외되어 이날까지 아픈 상처만 씹으며 남은 여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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