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民軍의 6.25 - 지리산의 빨치산 生活
총검술로 살인… 디딜방아로 살인…
방준표 道黨위원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부대원 한 사람씩 노인에게 다가가 복부를 찔렀다. 부대원 30여 명에게 차례가 채 돌아가기도 전에 노인은 혀를 내밀고 죽었다. 방준표는 그 노인의 간을 꺼내 소주와 함께 씹었다
이 승 기 전북 남원시 노암동
山寺生活중 맞은 6·25
1950년 6월25일 그날 나는 보현사라는 작은 암자에 머물면서 직접 한약을 달여 먹고 있었다. 고급중학교를 갓 졸업하고난 뒤 폐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낮에는 산 속을 헤매면서 산채를 뜯거나 개울가에 나가 가재를 잡았고 밤에는 호롱불 아래서 소설류를 탐독하며 건강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골에서의 山寺生活(산사생활)은 사무치는 고독감 때문에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러던 중 그날 낮 우연히 켜 놓은 라디오에서 북한이 38선을 쳐내려왔다는 뉴스가 터져 나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이 주섬주섬 옷가지와 책들을 싸들고 절간을 하직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니 형님이 눈을 부릅뜨고 왜 약을 다 먹지 않고 내려왔냐며 야단하였다. 부모님 모두를 일찍 여의었기에 형님이 家長(가장)이었던 터였다. 하지만 형님의 말씀은 귓가에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인민군이 서울로 쳐들어오고 이쪽에서는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고 후퇴하기 시작하였다는 뉴스에서부터 갖가지 긴박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형님은 당시 대동청년단 남원군 지부의 간부로 있었기 때문에 인민군이 여기까지 내려오면 결코 무사할 리가 없었다.
7월27일 드디어 인민군이 남원에까지 들이닥쳤다. 그 무렵 청년단 동지들과 함께 부산 쪽으로 피난을 간다고 떠났던 형님이 함양에서 인민군 쪽 내무서원에게 잡혀 남원으로 돌아오다가 후송을 맡은 남원 인민위원회 사람들을 잘 아는지라 가족들을 만나본 후 자수하겠노라는 끈질긴 간청 끝에 풀려나왔다. 집에 돌아온 형님은 집안 어른들과 상의 끝에 이곳 저곳 친척집을 전전하며 숨어지냈다.
이렇게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들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이른바 빨치산부대라는 것이 우리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름만 부대일 뿐 10여 명이 일제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부대를 자주 들렀다.
그 당시 사범학교를 다녔던 친구가 좌익운동을 했었고 나 또한 그런 운동에 가담했던 적이 있었기에 그 친구의 소개로 빨치산 부대장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빨치산들과 함께 반동분자들을 잡을 목적으로 이 마을 저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반동분자는 전직 면장이나 구장 따위이고 경찰관은 거물급에 속하는 이들이 해당됐다.
나는 형님이 반동분자로 몰려 숨어지내는 처지여서 실로 난감하였고 그들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그 사람들과 가깝게 지냄으로써 형님에게 미칠 화를 막아보자는 것이 나의 속뜻이었다. 8월 초에 있었던 일이다.
이웃마을 「스므내」라는 곳을 수색하고 돌아온 빨치산이 반동분자를 잡아왔다고 했다. 그 반동분자는 우리 집안으로 장가든 나의 매부뻘 되는 사람이었고 당시 지하 공산당원으로 활약했던 사람이었다. 죄목은 지서 순경을 자기 집에 숨겨주고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당내의 一敵(일적)이 당외의 百敵(백적)보다 더 무서운 적이라는 공산당들의 논리로 매부는 빠져 나갈 수 없었다. 그날 밤 마을의 한 국민학교 옆 松林(송림)에서 인민재판이 열렸다. 매부는 소나무에 밧줄로 묶인 채 매달려 있었다. 부대장이 죄목을 열거하고 공개처형하자며 누군가 자진해서 총을 쏠 사람이 없느냐고 군중에게 물었다. 그때 누군가 앞으로 뛰어나왔다. 진기마을에 사는 백아무개라는 사람이었다. 총소리가 요란하였다. 나는 순간 눈을 감아버렸다.
의용군에 자원입대 후 탈락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빨치산 대장이 나에게 하는 말이 『동무 형 때문에 어려움이 많으니 이곳을 떠나달라』는 것이었다. 의용군 1기생으로 지원하라는 뜻이었다. 나도 마음속으로는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노라고 즉석에서 대답하였다.
우리 의용군 지원자 100여 명은 임실군 삼계면에 있는 국민학교에서 한 달 동안 군사훈련을 받고 나서 모두가 그때 전투가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나는 최종심사에서 탈락했다. 中農(중농) 출신인데다 가족 중에 반동분자가 있다는 이유였다.
나는 의용군 훈련소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훈련병을 교육하거나 모병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렇게 한 달이나 흘렀을까? 나는 형님이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집안 일이 몹시 궁금하였다. 그래서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귀가조치를 받아냈다. 집에 돌아와보니 형님은 잡히지 않고 모처에 숨어 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렸다. 그러는 동안 인천상륙작전에서 유엔군이 승리하고 9·28 수복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 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며칠 후 그들이 야음을 타서 후퇴한 뒤 남원읍에 국군 11사단이 진주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태극기라도 들고 남원읍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인데 의용군에 간 사람들은 색출해서 잡아들인다는 말이 들렸다. 국군이 잡으러 올지도 모르니 피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남로당 面黨(면당)의 아지트가 있는 천황봉이라는 산을 찾아가 그들이 머물고 있는 숯굴에서 함께 지냈다. 국군이 거기까지 들어오자 지리산 쪽으로 그들을 따라 도망쳤다. 이것이 본의 아니게 내가 빨치산이 된 동기가 되었다. 그곳(남원군 산내면 소재 실상사)에서 남원郡黨 무장부대에 소속되어 보초도 서고 보급 투쟁도 하다가 한 달 후에 道黨 빨치산부대로 보내지게 되어 순창군 구림면에 있는 회문산으로 갔다.
총검술로 살인
회문산에서 바로 전라북도 黨직속 특공대로 배속되었다. 한 달 동안 사상교육과 무기 조작 훈련을 받은 다음 道黨특공대로 편성되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전날 밤 정읍 산외면에 보급투쟁을 나갔던 부대가 반동분자를 잡아왔다며 이를 사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곳 면장인가 이장 노릇을 했던 사람이었다. 흰 옷을 입은 왜소한 노인이 소나무에 매달려 묶여 있었다. 道黨위원장인 방준표가 호위병을 데리고 이곳에 나타났다.
그는 소나무에 묶여 있는 노인에게 일본 말로 몇 마디 지껄이더니 이제 죽을 텐데 담배가 피우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청했다. 방준표가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려주자 노인은 맛있게 빨아댔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총검술로 찔러 죽이라는 道黨위원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부대원 한 사람씩 노인에게 다가가 복부를 찔렀다. 부대원 30여명에게 차례가 채 돌아가기도 전에 노인은 혀를 내밀고 죽었다.
묶었던 새끼줄을 풀고 시체를 땅바닥에 내린 다음 방준표는 屍身(시신)에서 간을 도려 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곳에 있는 모든 빨치산을 모이게 하고 적에 대한 적개심을 높이자는 일장연설을 한 다음 호위병이 가져온 소주를 들이켜가며 그 간을 질근질근 씹어먹는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의 간을 먹는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그 후 어느 날 밤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순창군 인계면에 있는 지서를 습격하고 보급투쟁을 하라는 것이었다. 투쟁에 함께 나갔던 나는 인계지서 뒷산에서 경찰이 쏜 기관총의 유탄을 맞고 가슴에 큰 부상을 입었다. 살얼음이 언 냇물 속을 피 흘려가며 후퇴하면서 자살할 생각으로 몇 번인가 옆구리에 있는 수류탄을 뽑아들었지만 뒤따라오던 동료대원의 제지를 받아 미수에 그쳤다.
그후 산 속에서 한 달 동안 치료를 받고 걸어다닐 정도로 회생은 되었으나 본부대로 복귀시키지 않고 부상병들과 따로 組(조)를 편성해서 격리시켰다. 우리 부상병들이 정읍 내장산에 옮겨졌을 때 경찰이 알고 쳐들어왔다. 우리는 비무장부대이기 때문에 대항을 못하고 산 위로 도망쳤다. 경찰은 우리가 비무장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아마 全員(전원) 사살하거나 생포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우리 쪽에 소총만 요란하게 난사하고 내장사에 불을 지른 다음 퇴각해 버렸다.
드디어 고향 마을로
이듬해 봄 국군 5사단의 회문산 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노동당 전북도당은 회문산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갔다. 기포병단 한 부대만 담양 땅에 있는 가마골이라는 곳에 남았다. 우리 부상부대는 한 사람당 쌀 한 되씩만 배급받고 버려졌다. 우리는 각자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밤에 몰래 산을 빠져나가 경찰에 자수하기도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곳이 생소한 곳이어서 자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가마골에 있는 빨치산 부대를 찾아갈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보초나 서게 하고 밥 지을 물을 떠오게 하는 등 잔심부름만 시켰다.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대 소집이 있었다. 계곡으로 내려가보니 거기에는 디딜방아가 있었고 그 옆에는 동료 빨치산 한 사람이 손발이 묶인 채 엎드려 있었다. 어젯밤에 경찰에 자수하려고 몰래 하산하다 들켜 붙잡혀 온 것이었다. 나는 또 한 번 잔인한 살인의 장면을 보아야 했다.
녹음이 짙어가는 7월의 어느 날 부대에서 문화보급투쟁을 떠난다며 각 중대에서 한 사람씩 차출하는 것이었다. 문화보급투쟁이란 도시지역에 진출하여 등사판, 잉크, 종이 등을 탈취해 오는 일이다. 임실을 거쳐 김제와 정읍을 다녀온다는 것이다.
나는 임실로 간다는 말에 눈이 번쩍 띄었다. 이 기회만이 고향인 남원으로 가서 자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따라가겠다고 지원했다. 내 속마음을 모르는 그들은 허락해주었다.
오후 늦게 가마골을 나선 부대는 밤에 임실군 삼계면에 도착하였고 세림리라는 마을에서 보급투쟁에 나섰다. 부대원들이 흩어져 집집에 들어가 쌀을 탈취할 때 나는 슬쩍 혼자서 어떤 집에 들어가 삼베옷 한 벌을 요구하였다. 주인이 건네준 삼베옷을 갖고 그 집 앞 삼밭에 숨었다. 컴컴한 밤이라 가능했다.
숨어서 그들이 철수하는 것을 지켜본 다음 삼베옷으로 갈아입고 고향 쪽으로 줄달음질쳤다. 그날 밤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이튿날 새벽에 고향마을에 다다랐을 때는 모가 새파랗게 자라 있었고 일년 남짓 듣지 못했던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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