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⑨-1;
일본인 납치범 신광수를 북송시킨 노벨 수상자의 인간관;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 人間觀의 대결
安保라는 낱말만큼 아무런 感興을 일으키지 않는 것도 드물다. 누구를 安全하게 保護하겠다는 것인가. 국가인가, 대통령인가, 집권층인가.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한다면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는가. 安保는 중요하지만 사람들을 잠들게 하는 단어이다.
安保의 핵심적 의미는 무엇인가. 안보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것이 아닌가. 국가가 유지되어야 사회와 가정이 온전하고 국민 개개인의 생명이 안전한 것이다. 인간은 한 번뿐인 인생과 하나뿐인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 가는 범위 안에서 후손을 생산하여 생명의 代를 잇고 생활을 통해서 예술과 문화를 만들어내고 또한 그 生을 즐긴다.
安保의 바탕은 생명관·인간관이다. 기독교적 인간관을 가진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인간의 생명을 지구보다도 더 무겁게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유물론에 입각한 金正日 체제下의 人間觀은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인간을 물질로 본다. 그들은 또 계급투쟁설에 근거하여 계급의 의미를 절대화함으로써 계급의 이름으로 국가와 인간을 파괴한다. 국제적인 계급투쟁을 위해서는 조국을 반역하고, 계급해방을 위해서는 인간말살을 美化한다.
인간이 미꾸라지의 정신을 무시하기 때문에 추어탕을 양심의 가책 없이 먹을 수 있듯이 金正日 세력은 계급의 원수들이 가진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함으로써 살육을 거리낌 없이 일삼는다.
북한의 金正日 세력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이런 인간관에 기초하여 북한판 유대인 수용소를 만들어 수십만 명을 가두어 놓고 도륙하고 있으며 수백만 명을 사실상 굶겨 죽이면서도 호화의 극치를 달리는 생활을 즐기고 있다. 남한의 金正日(추종·굴종) 세력은 권력을 잡지 못했거나 잡아도 헌법의 제약으로 해서 그런 살육을 못 하는 대신에 기만, 선동, 위선, 사기술을 동원하고 있다. 이들이 金正日처럼 폭력수단을 쥐게 된다면 金正日과 같은 살육자가 될 것이다.
金大中 정권下에서 남한의 金正日 추종·굴종 세력이 보여준 기만, 선동, 위선, 억지, 사기적 행태는 공산주의적 인간관의 한 표현이다. 다른 계급을 말살하고 특정계급의 인권만 존중하겠다는 것은 사기이다. 한 개인의 인권을 예사로 무시하는 인간이 외치는 계급적 正義나 민족의 평화라는 말은 위선일 뿐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金大中 대통령이 그 受賞의 해에 보여준 한 행태는 그가 말하는 평화와 민족과 통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가늠하게 해줄 것이다.
■ 金賢姬와 이은혜
이은혜. 일본명은 다구치야에코(田口八重子)로서 대한항공 858편 폭파공범 金賢姬가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 일본어 선생이었다. 1989년 봄 기자는 서울 강남의 안기부 시설에서 金賢姬를 내리 5일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기자는 이 인터뷰를 중심으로 하여 金賢姬의 증언과 대한항공 폭파 과정을 그해 月刊朝鮮에 석 달간 연재했다.
金賢姬는 나에게 이은혜와 관련된 이야기를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의 기억력이 상당히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 3월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金賢姬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사부 공작원으로 소환된다.
그녀는 묘향산 골짜기 2지구 2호 초대소에 밀봉수용되어 교육을 받게 되었다. 金賢姬는 1981년 7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는 평양시 용성구역內 동북리 2층 3호 초대소에서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여기서 그녀는 이은혜라고 불리는 일본인 여자와 2년간 기거하면서 일본어 및 풍습 등을 익히는 일본인化 교육을 받았다. 金賢姬는 이은혜로부터 일본 노래도 배우고 일본식 손님대접법과 예절을 익힌다. 金賢姬는 자신이 교육을 받을 당시 이은혜가 25세 가량이었다고 말했다.
1991년에 이은혜의 정체가 일본인 다구치야에코로 밝혀졌을 때 그녀가 1955년 8월생임이 확인됨으로써 金賢姬 기억의 정확성이 입증되었다.
金賢姬가 2년간 함께 생활하면서 지켜본 이은혜는 이런 모습이었다.
<키 165cm에 몸무게는 56kg 정도. 이은혜는 이혼녀인데 해변을 산책하다가 납치되어 끌려와서 공작원 교육기관에서 일본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음. 그녀는 술을 자주 마시고 술을 따르는 데 익숙하여 일본에서 그런 업소에 종사하지 않았나 추정. 밥은 공기를 들고 젓가락만을 사용하여 먹었다. 그녀는 『조선사람은 食後에 입가심을 한 물을 마신다』고 흉을 보기도 했다. 1982년 2월 어느 날 이은혜는 이런 푸념도 했다.
『金正日 동지의 생일 만찬에 일본인 여자로서 특별히 초대되어 갔었다. 나처럼 납치돼 온 것 같은 일본인 부부를 만났는데 이 사실을 절대로 알려선 안 된다』
이은혜는 술에 취하면 멍하니 앉아서 끌려온 신세타령을 하며 자식들이 보고 싶고 일본에 가고 싶다면서 울기를 잘 했다>
■ 다구치야에코와 하라타다아키의 죽음
일본 경찰은 金賢姬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이은혜로 돌변한 피랍 일본 여성을 찾기 위해 몽타주를 만들어 전국에 돌렸다. 몇몇 유력한 실종자의 사진을 가져와 金賢姬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金賢姬가 『바로 이 여자이다』라고 찍어 준 사람이 다구치였다.
도쿄 가까이에 있는 사이타마縣 출신인 다구치는 金賢姬의 추측대로 음식점에 종사한 적이 있는 여성이었다. 북한 측이 최근 일본 정부 조사단에 밝힌 바에 따르면 다구치는 후쿠오카 미야자키의 아오지마 해안에서 1978년 6월29일에 납치되었다고 한다.
북한 측은 「본인이 공화국에 3일 정도 관광을 갔다 오고 싶다고 말하여 특수공작원이 신분을 위장하는 데 이용할 목적으로 그녀를 데리고 왔다」고 일본 측에 알렸다.
다구치는 1978년 6월부터 1984년 10월까지 초대소(공작원 교육시설)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현실체험을 했다는 것이 북한 측의 설명이다. 金賢姬가 이은혜를 만났다는 장소와 시점이 일치한다.
다구치는 납치될 때가 23세였다. 그녀는 6남매 중 막내딸이었고 납치될 때 도쿄 이케부쿠로 지역 음식점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이혼한 상태였다. 세 살배기 사내아이와 한 살짜리 딸을 두었다.
이번에 金正日 정권이 訪北한 고이즈미 수상 측에게 다구치야에코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사실상 金賢姬의 존재와 대한항공 폭파를 自認한 셈이다.
북한 정권은 다구치야에코가 이은혜가 아니라고 변명하고 있으나 이것이 거짓말임은 사태전개의 논리상 누구나 알 수 있다.
북한 정권이 일본 측에 통보한 자료에 따르면 다구치는 1984년 10월에 다른 피랍 일본인 하라타다아키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 하라타다아키는 포항 출신 거물간첩 辛光洙가 납치했다. 납치장소도 다구치의 경우와 같은 규슈 미야자키 아오지마 海岸이고 음식점에서 근무한 경력도 같다.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하라타다아키는 1986년 7월19일에 肝硬變으로 죽었고 다구치는 7월30일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북한 측은 그녀가 남편의 사망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뒤 회복단계에 있던 중 황해도 麟山郡의 고갯길에서 타고 있던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하여 사망했다는 것이다.
북한 측은 승용차에 타고 있던 세 명이 죽고 트럭에 타고 있던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무덤은 麟山郡에 있었는데, 1995년 7월의 홍수로 上月里 댐이 무너지면서 유실되었다는 것이다.
북한 측이 죽었다고 발표한 여덟 명의 피랍 일본인 가운데 여섯 명의 유골이 1995년 홍수로 유실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언론은 이런 북한 측의 발표를 믿지 않고 있다.
북한 측은 다구치를 납치한 이유를 신분위장용이라 주장했으나 신분위장이 되려면 연고자나 직계가족이 없어야 하는데 다구치는 6남매 중 막내였고 이혼한 상태에서 두 자녀를 두고 있었다.
무덤이 유실되어 유골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북측 주장에 대해서도 일본 언론과 對南 공작원 출신 탈북자 安明進씨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공작기관이 피랍 일본인에 대한 관리를 엄격하게 하는데 그런 식으로 죽도록 방치할 이유가 없다면서 살아 있든지 죽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 정부 측에서는 「다구치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곳은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곳인데 충돌사고라니?」라면서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金正日이 일본인 납치 책임을 물어 처형했다는 장봉림 장군은 李韓永 암살 실패로 숙청되었다」
金正日 정권은 일본인 납치를 지휘한 책임자로서 장봉림(사형)과 김성철(15년형)을 처벌했다고 밝혔는데 이 주장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하라타다아키를 납치해 간 辛光洙는 안기부에 붙들렸을 때 『金正日의 직접 지시를 받아 납치했다』고 자백했다. 일본인 납치 같은 중대사를 결정하고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金正日뿐이란 것은 북한 상식에 속한다. 더구나 지난 9월 초 辛光洙는 판문점 북쪽 지역에 나타나 북한 귀환 2주년 행사에서 金正日에 아부하는 발언을 했었다.
장봉림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정보가 있다. 지난해 초 月刊朝鮮 앞으로 北京에서 팩시밀리 다섯 장이 도착했다. 月刊朝鮮 禹鍾昌 기자는 「탈북한 북한 로열 패밀리의 최측근」이란 사람이 보낸 이 정보를 확인하여 2001년 2월호에 「李韓永(金正日의 처조카) 살해는 김정남(金正日의 장남) 지시를 받은 李昌善(사회문화부장)이 지휘했다」는 題下의 추적 기사를 썼다. 취재과정에서 이 팩시밀리 내용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提報임이 밝혀졌다.
팩스엔 이런 대목이 있었다.
<金正日의 처조카인 李韓永이 手記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을 펴냈을 때 김정남은 자기의 해외 채널을 이용하여 金正日보다 먼저 책을 입수하였다고 한다. 김정남은 그 후 인민무력부 문화연락실(북한군부內의 對南공작 부서) 장봉림 장군을 만나 李韓永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준다. 그 후 장봉림이 김정남의 명령을 집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김정남은 아버지 몰래 같은 지시를 중앙당 사회문화부 李昌善에게 주었으며, 그 결과 사회문화부에서 「새끼 장군님」의 명령을 집행한 것이다. 장봉림은, 김정남이 인민군 보위사령부 김장성 부사령관에게 지시하여 간첩혐의로 체포, 숙청해 버렸다는 說이 있다>
<33편에 계속>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32)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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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2-05, 17: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