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⑨-4; 마지막 편
일본인 납치범 신광수를 북송시킨 노벨 수상자의 인간관;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9) 국내 침투활동 중 피검
○1985년 2월8일 方元正으로부터
―『李成洙가 지득하고 있는 각종 군사자료 등 군사기밀을 계속 수집 보고하라』는 북괴의 독촉지시를 받은 사실과
―李成洙에게 「85 팀스피리트」 훈련사항을 수집한 노고를 치하하라는 북괴의 전문지령이 있었던 사실
―위장거점인 뉴코리안 주점에 와 있던 한국 연예인들이 귀국한 바, 이들과 친히 지내던 일본인들이 남한에 가려고 하니 이들과 함께 입국하면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라는 對南침투계획 등의 보고를 받고 자신도 간첩 方과 함께 한국에 침투해 在南조직망을 확인 검열하겠다고 북괴에 보고한 후
○1985년 2월24일 方元正을 대동하고 대한항공편으로 나리타(成田) 공항을 출발, 김포공항으로 침투하여 李成洙와 만나 북괴의 통일 3大 원칙, 5大 방침, 고려연방제 시정방침 10大 항목 등을 선전 교양하는 등 암약하다가 피검.
■ 노벨상 수상자의 人間觀
朴春仙씨는 1985년 6월28일 辛光洙가 체포되었다는 기사를 일본 신문에서 보고 비로소 자신과 동거한 사람의 本名이 辛光洙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 두 달 뒤 평양에서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던 자신의 오빠가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朴씨는 오빠의 죽음과 辛光洙의 체포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朴씨는 辛光洙가 2000년 9월에 북한으로 송환되기 직전에 서울로 와서 만나려고 했으나 辛光洙가 달아나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았다. 辛光洙는 1심에선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수사에 협조한 것이 감안되어 그 뒤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고 刑이 확정되었다.
1999년 12월 金大中 정부에 의해 석방된 그는 북한으로 살아서 돌아갔다. 그가 납치한 일본인 하라타다아키는 시체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북한 측의 주장이다.
위의 안기부 발표 자료에서 유의해 볼 대목은 辛光洙가 구체적인 일본인 납치 지령을, 金正日이 자신을 만난 자리에서 직접 내렸다고 진술한 점이다.
金正日은 이 점 때문에도 辛光洙를 한국에서 데려오고 싶었을 것이다. 金正日은, 언젠가 日北 수교 회담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때 일본이 한국 정부에 납치 자백범 辛의 신병 인도를 요구할 것을 想定하여 이 物證을 金大中 대통령의 양해下에 데리고 간 것인가. 만약 辛光洙가 한국에 살고 있었더라면 납치된 일본인 여덟 명의 사망건(북측 주장)으로 격앙된 일본 여론과 정부는 辛光洙의 신병인도를 우리 정부에 요구했을 것이고 이는 金正日을 곤경에 빠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일본인 납치자들의 존재가 金正日에 의하여 확인되고 생존자들이 귀국하여 그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일본 국민들은 自責과 분노에 휩싸였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일본 여론의 이런 격앙은 日北 수교 회담에 제동을 걸고 있고 「악마적 金正日 정권」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방향으로 돌고 있다. 辛光洙의 예에서 보듯이 조총련은 북한 공작원과 협력하여 일본인을 납치하는 데 助演을 했다. 이런 조총련을 수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고 조총련에 대한 비판과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對北·對日 공작기지였던 조총련은 1년에 수억 달러를 金正日 정권에 제공하는 현금기지이기도 했다. 작년 조총련의 자금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수사에 이어 납치자 문제가 확인됨으로써 조총련은 더욱 고립되어 갈 것이다. 한때 최대의 외화조달 창구였던 조총련을 잃는다는 것은 金正日 정권이 한 팔을 잃는 것과 같은 전략적 충격이다.
냉정하던 일본 언론도 요사이는 金正日 정권을 「악마적」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전쟁, 테러, 암살, 폭파, 대량살상 무기 개발, 학살을 서슴지 않아 온 金日成·金正日의 정체를 일본인들도 알게 된 것이다. 지금과 같은 추세대로 가면 곧 세계의 여론이 金正日을 「죽일 놈」으로 단정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가면 누가 金正日의 눈치를 보면서 아부하고 굴종하면서 조국을 반역했는지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끝>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마지막 편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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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2-07, 1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