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注> 얼마 전 대한언론인회는 한국 언론과 정치권력의 갈등을 주제로 대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에서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김우룡 교수는 ‘언론과 권력과의 갈등, 이대로 좋은가’란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했다. 대한언론인 제237호(12월 1일자)에 실린 주제 발표의 全文을 옮긴다.
정부와 언론의 갈등이 끝없이 되풀이 되고 있다. 고위 공직자들은 입만 열면 비정(批政)을 언론 탓으로 돌리고 있으며 ‘특정 신문 죽이기’에 혈안이 돼 온갖 수법을 다 동원하고 있다. 참여정부는 선정을 베풀고 있는데 일부 비판언론이 이를 왜곡하고 축소 보도하고 있는데서 국정의 혼란과 정책의 난맥이 비롯된다는 신념을 가진 권력자가 적지 않다.
우선 지금 정부는 홍보(弘報․Public relations)라는 말을 매우 좋아한다. 청와대의 직책도 ‘홍보수석실’로 바뀌었고 ‘국정홍보처’에 ‘해외홍보원’ ‘국방홍보원’ 또는 정부 각 부처의 ‘정책홍보관리관’ 등에서 보듯이 기관과 직책의 이름이 모두 홍보로 바뀌었다. 과연 정부의 대 국민 정보서비스를 홍보라고 불러도 좋을까?
홍보에는 사기업적 성격이 내포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부와 공공기관의 홍보활동은 행정기관이 담당하고 있는 정책과 업무의 목표, 운영 및 시설이나 프로그램을 국민에게 올바로 널리 알려서 국민의 편익을 도모하고 특정 정책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국민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홍보라기보다는 공보(公報․Public information)라고 불러야 한다.
정부의 홍보는 정부․여당이나 특정인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되고 국민을 위한 활동이어야 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행정홍보를 공보라고 부르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정부의 공보활동을 Public affairs라고도 부르는 데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지금 정부의 대 언론활동은 홍보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선전(宣傳․Propaganda)의 수준에 머물고 있지 않나 의구심이 생긴다.
두 번째, 기사내용 역시 기상천외하다. 고위 공직자가 특정 신문에 기고를 하든가, 그 신문의 기자와 인터뷰했다고 해서 경위를 조사하고 인사상 문책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예는 동서고금 언론통제의 역사에도 유례가 없을 것이다.
세 번째, 위와 같은 취재 소스에 대한 근본적인 차단 외에도 참여정부는 조직적으로 비판언론에 대한 다양한 대응책을 강구해 왔다. 기사와 칼럼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 분류하고 청와대 브리핑, 국정 인터넷신문을 통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보도에 대해 사사건건 반박하고 있으며, 동시에 언론중재위에 제소한다든가 걸핏하면 법적 대응까지도 불사해 오고 있다. 국민 모두가 공감하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당국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일종의 실적쌓기라고 알려져 있다.
네 번째, 정권홍보와 공보, 선전선동과 미디어의 고유 기능을 혼동하고 있다. 특히 국가예산이 홍보 명목으로 낭비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러한 홍보 활동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위한 것인지 구별되지 않고 있으며 대안 매체라는 이름의 관변 미디어가 국고를 축내고 있다. 사실 우리는 지금 국영 미디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다섯째, 미디어에 대한 편애주의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정권의 버팀목 역할을 해온 KBS, MBC의 경영난 타개를 위해서는 국민의 희생도 감수하고 있다. 낮방송 허용은 곧 철야방송, 중간CM방송, 협찬노출, 가상광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낮방송 허용이 왜 문제가 되는가. 원칙적으로 편성의 자유는 방송시간의 자유를 포함한다. 지상파 TV의 시간은 가장 값싸고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상파방송사는 방송제작에 있어서 노하우와 좋은 인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왜 이 시점에 낮방송 허용인가. 첫째, 이 조치는 지상파 방송의 경영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일시적 미봉책이 될 수 있지만 근본적인 해법은 아니다. 둘째, 매체의 균형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는데 케이블과 지상파 TV, 방송과 신문의 불균형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셋째, 그렇지 않아도 지상파 TV의 프로그램 질이 문제되고 있다. 청소년들의 가치관 형성에 나쁜 영향을 주고 국민의 정신건강을 해치는 내용이 적지 않은데 질 향상을 전제하지 않은 시간의 확충은 숨 쉬는 공기를 더욱 오염시키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발전적 변화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언론계에 몇 가지 발전적 변화가 있었다. 예컨대 출입처의 문호개방이 그 중 하나다. ‘기자단’이라고 하는 카르텔을 깨고 브리핑제도를 도입한 점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나 신문고시를 강화, 거래질서를 개선하려고 노력한 점 역시 긍정적인 면을 갖고 있다. 또 언론사 스스로 오보예방을 위해서 한층 노력하게 된 것도 지금 정부가 가져다 준 부산물이 아니겠는가. 속보 못지않게 정확한 보도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은 성과 아닌 성과라 하겠다.
그 밖에 국민의 엑세스권을 확대하고 언론 중재위원회의 기능을 강화시킨 점이나 언론관련 시민단체의 활동을 촉진시킨 것도 참여정부가 한 플러스적인 업적이라고 하겠다. 물론 모든 정책이나 조치에는 마이너스적 측면도 함께 있기 때문에 그 ‘공’과 ‘과’는 추후 면밀히 평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콩쥐팥쥐 전법
노무현 정부의 언론정책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정책 같지 않은 정책이 쏟아져 나오는데다 스스로 처한 입장과 시각에 따라 사람들의 평가와 견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콩쥐팥쥐 전법’을 구사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작자․연대 미상의 조선시대 고소설인 ‘콩쥐팥쥐 전’의 설화적 내용이 노정권의 언론관․언론정책에 꼭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옛 소설을 지금의 언론정책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다.
콩쥐 = 비판언론, 메이저 신문
팥쥐 = 방송, 마이너 신문
계모 = 정부와 일부 관변학자, 노조, 시민단체
어떻게 보면 참여정부는 언론을 親盧(친노)미디어와 反盧(반노)미디어로 나누어 친정부적인 매체에는 적극 지원하고 비판적인 신문에 대해서는 전방위 압박을 가하는 수법을 써 왔다. 철두철미 차별화된 정책을 구사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과거 언론정책이 권언유착이나 제도언론이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콩쥐 팥쥐처럼 편가르기를 하지는 않았고 언론계 전체에 적용되는 공통적인 방침을 갖고 있었다. 프레스 카드 도입, 갑근세 탕감, 저리융자와 외자도입 등 모든 ‘당근과 채찍’에 예외가 없었다. 여기서 참여정부는 아무리 흉계(자유언론의 억압과 박해)를 꾸며도 콩쥐(비판언론)는 선녀(정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도움으로 환생하게 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뉴스소스 원천 봉쇄작전
참여정부의 대 언론정책의 특성은 뉴스소스의 원천봉쇄라고 할 수 있다. 한때 기자들은 관련 부처의 공무원을 그들의 근무시간 중에 일절 접촉할 수 없도록 하였다. 기자들이 무엇을 물어보면 공무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래서일까? 아마도 정부의 비밀주의 때문일 것이다. 유리한 기사는 내보내고 불리한 기사는 새나가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하겠다는 취지가 아니겠는가. 취재당하는 쪽에서 보면 억울한 기사도 있을 것이고 또 인터뷰이(Interviewee)가 의도하지 않은 내용이, 말하자면 진의가 왜곡된 보도 역시 없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취재는 시간에 쫓긴다. 기자마다 나름의 가치와 시각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모든 뉴스 보도에는 데드라인이 있을 뿐 아니라 지면과 시간의 제약이 있고 언론사에는 독자적인 社是(사시)와 편집방침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같은 사건 사고를 두고도 다른 기사가 생산될 수밖에 없다. 언론이 갖는 한계이고 극복해야 할 숙제일 것이다.
청와대는 열린 우리당 10․26재선거 패배 직후 노무현 정부를 비난하는 칼럼을 게재한 데일리안에 대해 공식브리핑 이외의 모든 취재지원을 불허하기로 하였다.
11월 3일 노대통령은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등산길에 올랐다. 단 한 사람, 데일리안 기자 동행은 청와대 측의 제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뉴스 소스인 청와대가 뉴스보도에 불만을 품고 특정매체에 대해 ‘무기한 취재 불허 조치’를 내리는 것이 옳은 태도인가.
옛날의 언론통제는 보도지침에 의해서 확대, 축소, 탈락, 왜곡을 조종했던 데 비해 참여정부는 아예 고위인사는 ‘함구’로 일관하도록 벙어리 작전을 쓰고 있고, 문제의 기자에게는 ‘족쇄’를 채우는 원천 봉쇄로 나아가고 있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정홍보처 등 관련 기관과 공무원들은 ‘정권홍보’의 전위대로 전락한 듯 싶다.
나치 선전술 차용전략
참여정부의 홍보정책은 선전의 기법에 기초하고 있다. 과거 나치나 공산당 그리고 많은 독재정권이 정권의 유지를 위해 선전에 주력하면서 다양한 기법들을 발전시켰다. 선전은 쌍방향이 아니라 일방적인 데다 진실에 기초하기보다는 세뇌와 주입을 무기로 대중조작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인류가 개발한 온갖 선전수단은 모두 나치시대에 활용된 것들이다. 아군과 적군, 정(正)과 반(反), 흑과 백, 진실과 거짓 등 공존을 부인하고 정이면 정, 반이면 반과 같이 일방적 선택을 강요하는 수법 역시 괴벨스의 선전술이었다.
일찍이 미국 선전분석연구소는 나치의 선전기법을 분석하여 다음 일곱 가지로 정리하였다.
1) Name calling (낙인찍기, 나쁜 이름 부르기)
2) Glittering generality (화려한 추상어)
3) Transfer (전이, 위장수법, 뒤집어 씌우기)
4) Testimonial (증언기법)
5) Plain folks (서민기법)
6) Card staking (왜곡기법)
7) Bandwagon (바람잡기 기법, 부화뇌동)
몇 가지 사례를 살펴 보자. 정부당국자나 일부 학자 등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말할 때 언제나 나쁜 이름을 부른다. 예컨대 족벌언론, 친일언론, 수구언론, 조폭언론이 그것이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이러한 낙인은 시간이 흐르고 되풀이되면서 특정 신문의 권위와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심지어 뉴스보도에서조차 편견을 가진 이런 나쁜 이름으로 기사를 씀으로써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轉嫁(전가)수법도 그 중 하나다. 정부가 잘 못한 것조차 신문 탓으로 돌린다. 언론에 책임을 전가하는 예는 수없이 많았다. 용어의 선택도 언론이나 국민이 할 법한 것을 정부와 고위인사가 먼저 갖다 써버린다. ‘건강한 긴장관계’도 그런 예이다. ‘외교는 성공적이다’ ‘국정운영도 이만큼 안정화된 적이 없었다’ ‘여론은 못 믿는다’ 등 정부가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 이를 비판하면 언론이 혹세무민하고 있다고 역공을 편다.
서민기법도 교묘하게 동원된다. 여론시장의 독과점을 막겠다고 마이너신문을 위한 ‘유통원’을 만드는 선심을 베풀고, 지역균형 발전을 꾀한다는 명분으로 난립한 지역신문에 국민의 혈세를 지원한다. 얼핏 보기에 서민을 위한 정책인 듯 싶지만 비판언론에 대한 대항마 육성책이자 정론을 담보로 한 바터정책이란 비판도 일고 있다.
여론에 무슨 독과점이 있는가. 지배적 여론이 있을 뿐이다. 중론을 중시하고 따르면 그것이 바로 민주정치 아닌가.
참여정부의 화려한 추상어는 무엇인가? ‘참여’ ‘과거사 정리’ ‘언론개혁’ ‘혁신’ ‘친일청산’ 따위다. 어떤 것을 좋은 말로 미화시키는 기법이 화려한 추상어인데 목표와 증거, 방법은 애매하든가 두루뭉수리 아니면 추상적이다. 이러한 개념을 내세워 적을 공격하든가 국민들의 반발을 막고, 지지기반을 확충하는데 도움을 얻으려고 한다.
속죄양 전법
한동안 학원가의 ‘이지메’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적이 있다. 몸이 약하든가 시골에서 온 아이를 지목하여 괴롭히고 놀려주는 집단적 행위를 이름하여 이지메라고 말한다. 언론을 공격하고 비판하는데 이와 비슷한 기법이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원래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때부터 ‘조․중․동’이라고 하여 메이저 3신문에 대하여 집중 세무조사를 하고 세금의 중과, 社主(사주)의 법적처리 등 비판언론에 일격을 가하였다. 그 뒤 참여정부 들어서 한 신문의 사주가 주미대사로 발탁되자, 정권의 ‘주적’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양강구도로 좁혀졌다. 그러나 적이 많으면 중과부적, 속죄양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전략상 효과적이다.
안티조선 운동이 벌어지고 ‘조아세’인지 희한한 단체도 생겨나더니 한때 조선일보와 인터뷰하거나 기고하지 말자는 교수와 식자그룹도 나타났다. 심지어 조선일보에 글쓰는 사람과 사돈을 맺지 말라는 기발한(?) 제안도 있었다. 북한 역시 조선일보에 대해서 특별나게 적대적 감정을 드러냈다. 일련의 사태가 사전의 치밀한 각본에 의한 것인지 여부는 알 길 없으나, 공격목표를 하나로 삼은 것은 선전선동 기법으로서는 성공적이었다고 하겠다.
이것은 상대방을 고립시키고 주적을 뚜렷이 하며 공격목표가 일사불란해지는 효과가 있다. 덧붙여 조직적으로 그리고 단순화시킨 메시지를 갖고 반복적으로 공격해 나가면 일반 대중은 이성과 판단을 잃고 조작된 선전에 넘어가게 마련이다.
以夷制夷 전법
이것은 일종의 ‘편가르기’이다. 크게 신문과 방송이 대립하고 메이저 신문과 마이너 신문이 피아(彼我)로 갈린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역균형 발전을 명목으로 지역신문을 지원함으로써 중앙지와 지방지가 대립각을 세우도록 만들었다. 탄핵정국을 벗어나는데 수훈감이라고 할 수 있는 KBS와 MBC 등 지상파 방송에는 ‘꿀과 우유’를 보장하고, ‘싫은 소리’하는 자에게는 청와대 출입조차 하지 못하도록 ‘금족령’을 내리고 있다.
일제하에서 혹은 계엄령 하에서는 사전검열이나 기사 삭제, 배포금지가 통제의 수단이었으나 제5공화국 시절에는 ‘보도지침’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편집을 좌지우지하였다. 물론 제3공화국 18년은 언론이 정부의 하부구조(Subset)로서 기능하던 제도언론 시대였고 통제의 무기는 당근과 채찍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세무조사를 통제의 칼로 썼다면 지금의 참여정부는 나치의 선전술을 동원하고, 적군과 아군으로 편을 갈라서 미디어끼리 ‘서로 치고 받게’ 만드는 以夷制夷(이이제이) 전법을 구사하고 있다.
당선자가 특정 신문사를 전격 방문해서 개인을 만난다든가, 대통령이 이름 없는 인터넷 매체와 단독 인터뷰하여 음양으로 영향력을 키워주고, 특정 방송사의 스튜디오를 방문, 직접 출연하는 등 대통령으로서는 ‘삼가야’ 할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그뿐만 아니다. 특정 신문의 경영이 어렵다고 하자 대통령이 사재를 털어 1000만 원을 쾌척하는 등 매체에 대한 편애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언론 자유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은 정치권력이다. 언론에 대한 부당한 권력의 간섭이나 미비민주적인 정책이 나오면 과거에는 언론계가 힘을 합쳐 분연히 일어서 대응하였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는 데는 매체의 종류와 노선의 차이가 문제되지 않았다. 윤리위 파동이나 프레스카드 도입반대 투쟁 등이 좋은 예이다. 지금은 친여 매체일수록 ‘모르쇠’로 일관한다.
총리는 지난 가을 조선․동아는 반역자라고 했고 자기 손안에 있으니 까불지 말라고까지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총리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왕조시대의 발상이 아니고서는 주요 신문에 대해서 이렇게 폭언을 할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이런 오만방자스런 권력자의 독단 독선에 대해서 함구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언론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필자는 어떤 글에서 참여정부의 언론정책을 언론말살정책이라고 지적하였다. 비판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비민주적, 반시장적인 그리고 위헌적인 규제안을 정부는 쏟아내고 있다. 노무현정부의 언론정책은 ‘언론자유 억압정책의 백화점’이라고 할 만하다.
사랑하도록 만들어야
20대 여성은 화장을 하지 않아도 젊고 건강하다는 그 자체로서 아름답다. 늙고 추할수록 짙은 화장을 하고 원색의 옷을 입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두고 우리는 천박하고 상스럽다고 말한다. 홍보라는 것은 광고와 크게 구별된다. 유료냐 무료냐 하는 차원이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크게 다르다. 광고는 분칠과 화려한 치장을 하고 ‘날 좀 보소’하고 외치는 일이라면, 홍보는 교양을 갖추고 아름다운 태도를 보임으로써 남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하겠다.
대통령 홍보수석비서관이라는 분이 자신의 방미활동을 비판한 한 신문의 기자 칼럼을 ‘소설’이라고 비난하는 글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리고, 이를 본 대통령이 “잘했어요. 그 소설 가만둘 건가요?”라는 댓글을 붙이자, 수석비서관 왈,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방법으로 대응할 것입니다” 라는 답글을 썼다고 한다.
이를 두고 한 사설은 이렇게 비판하였다.
‘...그 대통령에 그 참모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노 대통령의 비판언론과의 전쟁 독전이 과연 민주국가 지도자다운 행동인가.’
청와대는 자신들의 ‘코드’에 맞지 않는 언론을 아예 축출하기로 작심한 것 같다. 정권을 비난하는 신문에 인터뷰하거나 기고하는 정부 인사들에 대한 경위조사에 핏발이 서있는 청와대다. 이도 모자라 조 수석은 최근 “정무직 공무원이 정부홍보기준을 따르지 않으면 나가면 된다”고 위협까지 했다. 반면 정부는 KBS의 경영적자를 국민세금에서 메워주는 등 친노매체에 대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또 노 대통령은 대안매체의 필요성까지 거론했다. 비판언론에 대항할 매체를 뜻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답은 간단하다. 언론이 잘못 보도해서 정책이 잘못되는 것은 아니다. 정책이 제대로 입안되지 않고 집행되지 못하고 국민세금이 낭비되고 있기 때문에 언론은 이를 비판할 뿐이다.
야당의 존재 이유가 ‘반대’라면 언론의 존재 이유는 ‘비판’이다. 홍보의 요체는 좋은 옷을 입고 향수를 뿌리는 데 있지 않다. 정부 홍보의 첫걸음은 좋은 정책, 좋은 정치 곧 선정(善政․Good things)에서 시작된다. 정부는 나라 살림을 제대로 하고 언론은 정부와 국민 사이에 가교역할을 충실히 할 때 민주주의는 꽃피게 된다.
정부는 언론을 장악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또 장악할 수도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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