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의 세계'라는 제목의 영국 이코노미스트誌 연감에는 세계 주요국가에 대한 내년 전망이 적혀 있다. 한국에 대해선 이런 요지이다.
<2007년 선거를 겨냥하여 여러 정당들이 작전을 쓰는 한 해가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권위는 서서히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다. 충성분자들이 盧를 대체할 유력한 大選후보쪽으로 쏠릴 것이기 때문에. 이런 쇠락은 열린당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이 당은 노무현을 당선시키기 위한 유일한 목적으로 뭉쳐진 각양각색의 파벌 집합체이므로 시간이 갈수록 추진력을 상실하여 의미 있는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경제는 2005년보다 더 성장하겠지만 놀랄 만한 것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연감은 내년도 한국의 경제성장률 예측치를 4%, 물가상승률을 2.4%, 국내총생산(GDP)을 8990억 달러(구매력 기준으론 1조13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1만8450 달러로 추정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대만의 1만5970 달러보다 많다. 한국, 대만과 함께 선진국 진입을 다투고 있는 이스라엘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8680달러이다.
국가 안보 문제란 장벽을 다 가진 이 세 나라중 어느 나라가 이를 먼저 돌파하고 일본에 이어 非서구 국가로서는 두번째로 선진국 클럽에 들어갈 수 있을지 내년도 競走가 주목된다.
金載圭 정보부장 임명
金大中납치사건이 李厚洛씨의 실각을 가져왔듯 1976년 미국에서 터진 朴東宣 로비사건으로 이해 12월4일 申稙秀 정보부장이 개각 때 물러나고 후임에 金載圭 건설부장관이 임명되었다. 朴대통령이 3년 뒤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인사를 한 것인데, 그 인사의 요인이 韓美갈등이었다는 것이 매우 상징적이다.
朴東宣 사건 자체는 金炯旭과 李厚洛부장 시절에 그 씨가 뿌려졌으므로 申부장의 책임이라 할 수 없었다. 朴東宣씨의 신분이 미국의 언론에 의해 노출되자 우리 정부에선 김한조란 재미동포를 새로운 로비스트로 기용했다. 그는 수십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받아 미국내의 여론을 친정부적으로 돌려놓는 일을 맡게 됐던 것이다. 「백설작전」으로 불려진 이 공작에서 돈의 사용처에 따른 여러 가지 말썽이 생겼다. 金씨와 서울 사이의 연락을 책임지고 그를 감독한 사람이 駐美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인 정보부 요원 金相根씨였다.
그는 1976년 11월에 즉시 서울 본부로 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1월23일, 그는 27일의 대한항공기 편으로 서울로 가겠다고 보고하고 다음날 뉴욕으로 갔다. 거기서 金相根씨는 옛 상사인 金炯旭을 만났다. 金炯旭은 金相根씨에게 망명을 권했다. 돌아가면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이틀 뒤인 11월26일 金炯旭은 뉴욕 라구아디아 공항 근처에 있는 홀리데이인의 커피숍에서 金相根씨를 만났다. 곧 FBI요원 3명이 나타났다. 金炯旭이 미리 연락을 해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金相根씨의 미국망명이 이뤄졌다. 그 뒤 金씨는 미국 의회에 나가서 한국기관의 對美공작 등에 대해 많은 말을 하게 된다. 金炯旭은 뉴욕타임스에 金相根씨의 망명을 귀뜸해주어 이 사건을 시끄럽게 보도하도록 만들었다.
金載圭의 간곡한 귀국종용 私信
申稙秀씨가 해임된 것은 이 망명사건 직후였다. 자신을 냉대한 朴대통령에 대해 복수를 다짐하고 있던 金炯旭은 강타를 먹인 셈이 됐다. 신임부장 金載圭의 눈에는 73년 4월부터 미국에서 사실상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金炯旭이 시한폭탄처럼 보였을 것이다. 6년간이나 정보책임자로 있으면서 朴대통령과 朴정권의 어두운 면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金炯旭. 그가 한국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외국에서 성난 늑대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이 金載圭로서는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보부장 취임 한 달 만인 1977년 1월17일 金載圭는 金炯旭에게 자필편지를 보냈다.
<…각하께서는 그 친구가 돌아온다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자유롭게 왕복한다면 남이 보아도 좋고 본인은 얼마나 떳떳하겠는가, 또 돌아와 일하겠다고 하면 원하는 중책도 맡기지, 하시더군요. 金相根 망명이란 불상사에도 불구하고 金부장께선 다시 조국에 돌아온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의의 깊은 일이겠습니까. 모든 걸 훨훨 뿌리치시고 고국에 돌아오셔서 다시 예와 같이 손과 손을 맞잡고 나라와 겨레를 위한, 더욱 보람되고 값진 일을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다시 만날 그날이 멀지 않기를 기대하면서, 새해에는 더욱 건승하시고 댁내에 보다 많은 행복과 기쁨이 충만하시길 빕니다>
2월14일에도 金載圭는 사신을 보냈다.
<백의종군한 충무공은 지금은 민족의 성웅으로서 全동포의 추앙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사필귀정을 신념으로 삼고 지금까지 지켜온 金부장의 침묵을 귀국이라는 행동으로서 깰 때가 됐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싱긋이 웃으며 김포공항의 트랩을 내리는 金부장의 그리운 모습을 생각하면서….>
金載圭가 손에 넣고 싶어 한 것은 金炯旭의 침묵이었다. 이즈음 金炯旭도 조국에의 향수에 시달리고 있었다. 「무자비하게 고국에의 향수를 자극하는」 뉴욕시내의 술집에서 金炯旭은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를 부르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피곤과 비탄이 뒤범벅된 외로운 밤길」이라고 그는 술회한 적도 있다. 국내에서 거금을 빼돌린 덕분에 유유자적할 수 있는 金炯旭이었다. 그 많은 여가가 그의 고민이기도 했다.
朴대통령도 미국에 들리는 고관들을 통해 여러 번 金炯旭의 귀국을 종용했다. 金炯旭은 미 의회에서 白斗鎭 전 국무총리, 丁一權 전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張坰淳, 洪鍾哲, 金東祚씨 등이 金炯旭을 만나 귀국을 권유했고 멕시코 대사까지 제의했었다고 폭로했다. 金載圭의 私信이 온 직후인 1977년 3월엔 金鍾泌 전 총리가 샌프란시스코 근방에서 3일간 육사 동기생인 金炯旭과 같이 골프를 치며 귀국을 종용했다. 이런 시도는 다 수포로 돌아갔다. 그 사이 金炯旭은 비수를 갈고 있었다.
뉴욕의 金在炫변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그는 기자회견 문안을 작성했다. 金변호사는 영문번역을 맡았다. 1977년 6월2일 金炯旭은 뉴저지의 어느 모텔에서 뉴욕타임스의 아시아 문제 전문기자인 리차드 헬로란과 단독회견을 가졌다. 金변호사가 통역을 맡았다. 金炯旭은 이 회견에서 자기가 중정부장 시절 기용했던 朴東宣씨의 과거에 대해서 언급하고, 朴정권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철수 계획엔 반대한다고 했다.
이 회견내용은 6월8일자 신문에 1면기사로 그 다음날엔 속보형식으로 크게 보도됐다. 아마도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은 金載圭였을 것이다. 金載圭는 金炯旭이 내친 김에 6월22일에 미 하원 국제문제 위원회, 즉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증언하기로 했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다.
『증언에서 독을 빼도록 하라』
1977년 6월8일 정보부 뉴욕분실장 孫호영씨는 정보부 본부로부터 긴급전문을 한 통 받았다(이하 인용하는 電文은 미 의회에 제출된 증거물임).
<6월5일자 뉴욕 타임즈 헬로란 기자와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金炯旭은 朴東宣이 KCIA의 정보원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대통령 각하에 대한 비난도 서슴치 않았음. 金炯旭의 발언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발생했음.
① 국내언론이 6월7일자로 이를(선택적으로)보도
②문공부 대변인이 부인성명 발표
③丁一權국회의장도 부인성명 발표. 귀관은 문제된 기사의 내용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앞일에 대처하도록 할 것>
그때 孫씨는 상부로부터 金炯旭과 직접 접촉은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孫씨는 金炯旭과 가까운 白泰夏씨를 통해 金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白씨는 5·16주체세력 출신으로서 金炯旭 정보부장 밑에서 지방분실의 지부장을 지냈고, 미국에 건너와 살고 있었다. 白씨는 孫호영씨에게 자신이 지금 金炯旭에게 귀국을 종용하고 있는 중이며 金이 미 의회에 나가 증언할 것 같다는 정보도 제공했다.
6월11일 孫호영씨는 또 한 통의 전문을 서울로부터 받았다. 그 요지는 「金炯旭과 그의 법률고문인 金在炫과의 관계를 파악할 것. 金在炫이 미국 CIA나 FBI와 협조관계인지를 알아 볼 것. 金炯旭이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것. 金炯旭이 오는 22일의 의회 증언에서 말할 내용을 입수한 즉시 金在炫에게 反정부적인 부분을 제거하도록 설득할 것」등이었다.
6월11일에 孫씨는 그날의 두 번째 전문을 받았다.
<白泰夏를 통해 金炯旭을 설득, 증언에서 독(毒)을 빼도록 할 것. 이것이 실패하면 白泰夏로 하여금 金炯旭의 약점을 미국언론에 폭로케 한 뒤 즉시 귀국토록 할 것. 폭로 내용은, 白이 金의 오랜 친구였는데, 金이 조국을 배신한 믿을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결별한다는 요지일 것. 白泰夏를 신경 써서 관리할 것. 즉, 지금이야말로 한국인으로서의 용기를 보일 때라고 독려할 것>
閔丙權·金炯旭 밀담의 내용
그 6일 뒤인 6월17일에 孫호영씨는 서울 정보부 본부로부터 중요한 연락을 받았다. 電文은 閔丙權 무임소장관이 6월17일 TWA 904편으로 서울을 출발, 뉴욕 케네디 공항에 다음날 도착할 것이라고 전했다. 閔장관의 방미 목적은 「金炯旭에게 정부의 입장을 알림으로써 그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것」이라 했다.
1977년 6월19일 오전 閔丙權 장관은 뉴욕에서 金炯旭에게 세 차례 직접 전화를 걸었다. 白泰夏씨도 중간에서 열심히 뛰어 그날 오후5시 閔장관이 金炯旭의 집을 찾아가 고향 및 군의 후배인 金을 만나기로 약속이 되었다. 미 의회 증언이 3일 뒤로 다가와 있을 무렵이었다. 朴대통령의 특별부탁을 받고 간 閔장관으로서는 다급했을 것이다.
6월20일 오후에 孫씨는 서울 본부로 장문의 긴급보고를 했다. 그 요지는 이러하다.
<閔장관은 19일 오후 4∼9시 30분 사이에 알파인 골프 하우스에서 金炯旭을 만났음. 참석자는 7명:閔장관, 金炯旭부부, 柳永洙(金炯旭의 보좌역)부부, 白泰夏 부부.
1, 金炯旭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 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음.
㉮ 한국에 있을 동안 朴정권 측에서 나를 아주 냉대했다. 집을 수색했고 나를 체포하려는 기미가 보여서 미국으로 달아난 것이다.
㉯ 미국에서도 모두가 나를 멀리했다.
㉰ 처와 아들의 여권을 신청했더니 거절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귀국하라는 것은 잡아 넣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 미국의 기관들은 나로부터 정보를 빼내려고 애썼고, 프레이저는 2년 전부터 청문회에 나오도록 계속 요청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었다.
㉲ 그들(한국 언론)은 확인도 하지 않고 나를 반역자라고 매도하고 있다. 이것이 나의 결심을 촉발시켰다.
2, 金炯旭은 이어서 고향선배인 閔장관이 일부러 미국까지 온 데 대해 감사했음. 그리고 두 가지 질문을 했음.
㉮ 나에 대한 대통령 각하의 감정은 어떠한가?
㉯ 나에 대한 요구사항은?
3, 閔장관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음.
㉮ 대통령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과연 그가 이럴 수가 있을까?』라면서 지금도 당신이 그런 일을 했다고는 믿으려 하지 않고 있고 유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감정을 감안할 때 만약 당신이 대통령 각하께 편지를 써서, 과거의 행동을 사과하고 앞으로는 反국가적인 언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각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이다.
㉯ 이런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거북하다면 첫째 청문회에 나가지 말 것, 둘째, 제 3국으로 가서 당분간 살아 주었으면 좋겠다. 첫째 요구를 들어주기 어렵다면 출석을 2주간만 연기해 달라. 청문회에 다시 나가더라도 국가원수에 대한 언급만은 일체 피해 달라. 그렇게 하면 미국 수사기관의 기분도 크게 상하게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4, 金炯旭은 위와 같은 선에 따라 다음과 같은 문답을 주고 받았다.
金 : 그렇게 하면 나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閔 : 조국을 배반하는 것보다는 낫지. 당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의 제의대로 증언한다면 당신이 전에 말한 내용과는 다르지 않나 하는 질문이 나올 거야. 그때는 이렇게 말하면 되지 않을까.
『사석에서 술에 취해서 그런 소리를 했는데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그러나 지금은 선서를 하고 증언을 해야 하는 입장이니 증거가 확실한 것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당신이 이야기한 내용 중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을 언급할 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어떨까.
金 : 閔선배께서 오늘 나와 만나 이야기한 결과를 보고할 때는 이렇게 해주세요.(金炯旭은 전보내용을 스스로 초안 잡아 閔장관에게 읽어 주었음.) 「그가 고의적으로 나를 피하는 바람에 어제는 면담이 되지 않았음. 그러나 오늘 선후배 관계로서 면담이 이뤄짐. 金炯旭은 자신에 대한 비방에 굉장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음. 그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으나 계속 노력하겠음」
閔 :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야. 자 이제 어떻게 할까. 金 다시 만나죠(金炯旭은 閔장관을 20일이나 21일에 집을 초대하여 아내가 장만한 냉면을 대접하겠다고 했음).
5, 閔장관의 소감
㉮ 면담의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 金炯旭은 청문회에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출석을 연기하는 방법은 있다.
㉰ 자기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묻고, 선배인 나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구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기분이 가라앉은 것 같다.
6, 白泰夏는 閔장관을 호텔로 모신 뒤 金炯旭의 집으로 다시 가서 청문회에서 읽을 성명서 가운데서 독소조항을 빼도록 설득했음.
7, 마지막에 金炯旭은 자신이 朴대통령 각하를 비난한 것은 자신이 카터 대통령을 비난했으므로 朴대통령도 비난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라고 말했음. 6월18일, 閔丙權 장관이 도착 즉시 金炯旭에게 전화를 하니, 金炯旭은 한국정부가 가장 적당한 분을 보낸 것 같다고 말하면서 밤늦게 호텔로 찾아 가겠다고 했음. 만약 閔장관이 집으로 찾아오면 경비원들에 의해 신분이 노출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음. 그러나 金은 호텔에 나타나지 않았음>
『제3국으로는 못 갑니다』
두번째 면담은 6월20일 오후 6∼10시 사이 뉴저지주에 있는 金炯旭의 집에서 이뤄졌다. 孫호영씨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두번째 면담엔 閔장관, 金炯旭, 白泰夏, 柳永洙(PR회사 경영) 등 4명이 참석했음. 閔장관은 제 3국으로 갈 것, 청문회 출석을 연기할 것, 증언 내용 중 「독소조항」을 제거할 것 등을 요청했음. 金은 이 요구사항을 전부 거절했음. 다만 선배인 閔장관의 입장을 생각하여 「독소조항」의 제거문제는 신중하게 고려하겠다고 약속함.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음.
金 한국 정부는 한미 관계가 어렵게 된 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정부의 고관들조차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정보를 보고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파티를 열면 미국인들은 오지도 않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면 카드만 받고 선물은 돌려줄 정도입니다. 한국 외교관들은 이런 사실을 보고하지 않음으로써 정부의 정책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군철수 문제에 대해 朴대통령은 『철수하고 싶으면 하라』고 큰 소리치고 있습니다.
1975년에 나는 朴東宣 사건을 수사하는 미국 정부기관에 가서 증언한 적이 있습니다. 왜 미국인들이 文鮮明이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아십니까. 워터게이트 사건 때 닉슨 지지 데모를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 PR회사 사장인 柳永洙씨와 함께 22일로 예정된 의회증언의 초고를 준비했습니다. 아직 끝이 나지 않았어요(柳씨는 고의로 일을 늦추려고 애쓰고 있음. 그렇게 되면 청문회 출석이 자동연기 됨).
閔 : 어제의 이야기를 계속 하겠는데, 제3국으로 갈 수 없나?
金 : 갈 수 없습니다.
閔 : 그러면 증언을 해야 할 텐데 좀더 신중한 준비를 하기 위해 출석을 연기 할 수 없나?
金 : 나 스스로 연기하기는 어려워요.
閔 : 그러면 증언하더라도, 국가원수에 관련된 부분은 빼고 하도록 하지.
金 : 선배님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하지요.
閔 : 그렇게 결심했다면 대통령 각하께 편지를 써야 하네.
金 : 뭐라고 쓰죠?
閔 : 이런 취지로 쓰도록. 「제가 신문에 말한 것으로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조국과 각하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金 : 대통령이 나를 박대한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를 추가하지요.
閔 : 자네가 그런 걸 안 쓰더라도 사과하는 내용의 편지만 쓰면 지나간 오해는 만족스럽게 풀릴 거야.
金 : 내가 의회에 나가서 읽을 내용을 柳永洙씨와 함께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내일(21일) 정오에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함께 할 때 편지를 드리죠.
柳永洙 : 출석 연기문제가 편지보다 더 시급하지 않으세요.
金 : 연기를 해야 하나?
柳永洙 : 閔장관에게 선물을 하나 드려야죠.
金 : (갑자기 외면하면서) 대통령이 편지를 안 보냈는데, 왜 내가 편지를 써야 합니까. 왜 정부대변인을 시켜 나를 용공분자라고 부릅니까? 나를 반역자라고까지 했어요. 반역자가 도대체 뭡니까(그는 입에 거품을 품었으며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음). 청문회에서 발표할 성명서 작성을 아직 끝내지 못했으니 그일부터 해야겠어요.
2, 白泰夏가 (김형욱이) 제3국으로 갈 경우의 경비문제를 꺼냈더니 閔장관은 金炯旭의 의견을 물었음. 金은 제3국행을 거절했음.
3, 柳永洙는 金의 성명서에서 독을 많이 뺐으나 아직도 각하와의 관계에 금이 갈 정도의 내용이 더러 남아 있다고 함. 閔장관이 강력하게 金이 대통령께 편지를 쓰도록 요구하자 金은 계속 그러면 미국 의회에 나가 閔장관이 자신을 달래로 온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말했음. 21일 오전 7시에 閔장관 白泰夏 柳永洙와 다시 만나기로 했음. 그러나 절망적임>
도화선에 불붙은 시한폭탄
6월21일 아침 閔丙權 장관 일행은 약속대로 金炯旭 집에 갔다. 그러나 그 15분 전 金炯旭은 워싱턴으로 출발해 버렸다. 金炯旭은 『만나보았자 서로가 괴롭고, 나의 결심은 이미 확고부동할 뿐만 아니라 閔丙權씨는 갖은 방법으로 나를 설득할 것이 예상되므로 일찍이 집을 떠났다』고 20여일 뒤의 성명에서 밝혔다.
그는 또 『閔씨를 탓하기에 앞서 무지무지한 독재사회에서는 순수한 인간관계마저 이다지도 무참하게 유린되고 그저 모두가 믿지 않고 증오하는 만인 對 만인의 불신사회가 돼버리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고 덧붙였다. 21일을 워싱턴 교외의 모텔에서 지내면서 증언에 대비하여 원고를 검토한 그는 22일 미 하원 국제기구 소위원회에 증인으로 나타났다.
그는 의원들과의 문답에 앞서 성명서를 낭독했다. 그는 『朴正熙씨 개인에게 설사 인간적인 배신자가 되는 것을 감수한다 하더라도 국민과 역사 앞에 배신자가 될 수는 없다고 믿기에 이르렀다』면서 자신이 증언대에 선 입장을 밝혔다. 묘하게도 金炯旭의 이 말과 꼭 같은 말을 2년 뒤 金載圭가 하게 된다. 10·26 뒤 시해사건 군사법정에서였다.
金炯旭은 공화당정권의 실상, 유신체제 설립과정과 그 영향, 金大中납치사건과 朴東宣사건 등의 소제목에 따라 성명문을 낭독해 갔다. 전직 정보책임자로서 신랄하면서도 권위있는 폭로였다. 그는 朴대통령의 개인적 스캔들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에도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는 한반도로 핵무기를 철수하는 것에 대해선 찬성한다고 했다. 金炯旭은 朴대통령이 고관들을 보내 자신의 귀국을 종용한 사실도 밝혔다. 이어서 장시간 문답이 진행됐다. 이 자리는 金炯旭의 가장 화려한 무대인 것 같았다. 5·16 이후 어느 누구도 이처럼 지독하게, 또 증거를 들이대면서 朴대통령에게 도전한 사람은 없었다. 권좌에서 밀려난 이후 朴대통령과 그 측근으로부터 받았던 냉대로 응어리진 원한을 그는 다 쏟아놓는 것 같았다.
金炯旭은 협박, 金載圭는 전전긍긍
이틀간의 증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金炯旭은 『할 말을 다 하지 못한 아쉬움과 깊은 인간적 고독을 절감하였다』고 한다. 제한된 시간의 청문회에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속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새벽녘에 집에 도착하여 『커피 한 잔을 들고 서재에 들어가 창밖의 여명을 바라보면서 회고록의 첫머리를 쓰기 시작했다』고 뒤에 말했다. 거의 광적으로, 그의 별명인 멧돼지처럼 원고작성 작업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6월22일의 증언은 시한폭탄 金炯旭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정도였고 대폭발은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폭발이 자폭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金炯旭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金炯旭의 증언으로 金載圭의 입장이 곤혼스럽게 됐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金載圭는 부장에 취임한 직후 朴東宣사건을 한달간 면밀히 검토한 끝에 이것은 유신체제에 대해서 미국정부가 우회적인 방법으로 압력을 넣는 것이란 판단을 했다고 한다(10·26재판 증언).
그래서 1977년 2월 朴대통령에게 체제의 완화를 건의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金載圭는 친미적 성향을 띠기 시작한다. 그러나 金炯旭을 이해해 줄 수는 없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당시 金炯旭은 자신을 매도하는 국내 언론에 대해 굉장히 감정이 상해 있었다. 77년 7월15일 그는 「내외국민에게 드리는 특별성명서」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朴대통령을 협박했다.
<나는 정보전문가로서 朴正熙씨에 대하여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朴正熙씨가 유치한 방법으로 나를 계속 중상한다면 이를 천하에 폭로할 작정입니다. 한 가지만 언급한다면 나는 朴正熙씨를 참된 반공주의자로 믿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朴대통령의 사상문제를 암시한 것으로 金載圭를 더욱 전전긍긍케 만들었다.
1977년 8월23일 정보부 뉴욕 분실장 孫호영씨는 업무를 인수인계하고 9월25일까지 서울 본부로 귀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孫씨는 자신의 金炯旭 설득공작이 실패한 데 대하여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겁을 먹었던 것 같다. 그도 귀임하는 대신 미국망명의 길을 택했다.
그는 77년 11월29일 프레이저 청문위에 나와 증언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귀임명령을 받았을 때 나는 위협을 느꼈습니다. 金炯旭과 교섭이 실패한 책임을 내가 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가족은 8월16일부터 미국 연방정부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됐습니다』
孫호영씨의 망명은 76년 11월말에 있었던 駐美한국대사관 1등서기관 金相根씨의 망명에 이어 정보부 간부로서는 두번째였다. 金씨의 망명이 申稙秀 부장의 해임을 가져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金載圭로서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의 私信까지 공개해버린 金炯旭을 그래도 회유해보려고 정성을 다해 관용으로 대했는데도 실패한 데다가, 그 비밀교섭의 현지 책임자가 관계문서까지 들고 미국에 망명했으니말이다.
金載圭는 부장 재직시 대체로 온건론자였다. 金炯旭에의 대응에서도 그랬다. 孫호영씨의 망명으로 그의 온건한 입장은 권력층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돼버렸다. 사나이의 위신을 귀중하게 여기는 金載圭로서는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더구나 金炯旭의 미 의회 증언 뒤 柳永洙씨를 통해 그에게 보낸 金載圭의 세번째 편지도 金炯旭은 11월 29일 미 의회에 제출, 폭로해버렸다. 孫호영씨도 교섭관계 전문들을 모조리 가져 가 폭로해버렸다. 金載圭가 갖게 됐던 인간적 배신감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었다.
金炯旭, 김대중씨에 선거자금 대
金炯旭의 미 의회 증언 가운데 朴正熙대통령과 金載圭를 가장 화나게 했던 대목은 金大中씨 납치사건에 대한 언급이었다. 朴東宣사건 등에 대한 증언은 金炯旭이 평소에 알고 있던 것을 말한 정도였다. 金大中씨 사건에 대해선 金炯旭자신이 직접 탐정으로 변해 이리저리 수집한 자료를 털어 놓았다.
그는 자신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의 이름도 사정없이 공개했다. 그들은 모두 과거 자기의 부하였던 전, 현직 간부들로서, 옛 상사에게 사석에서 몇 가지 이야기를 했었던 것이다. 金炯旭은 1974년 2월24일과 4월16일 두 차례 일본에 가서 「金大中씨 사건을 취재」를 했다.
그는 金大中씨를 태우고 떠났다는 혐의를 받은 공작선 용금호의 선원들이 묵었다는 호텔에 투숙, 종업원들을 상대로 정보를 캘 만큼 극성이었다. 이렇게 하여 수집한 정보를 재구성하고 그 나름의 해석도 붙여 그럴 듯하게 증언했다.
金炯旭은 金大中씨 납치사건 증언을 통해 金大中씨를 영웅적으로 부각시키려 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朴대통령이나 金載圭쪽에선 이것이 또 기분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金大中씨는 1985년에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金炯旭과의 특별한 인간관계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었다.
『저와 金炯旭씨의 관계만 다루어도 좋은 기사가 될 거예요. 그 사람 참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야당의원이 일단 매수되면 욕을 하고 멸시해요. 반대로 자기한테 달려들면 존경하는, 그런 스타일의 사람이에요. 목포선거가 끝나고 같은 재경위원회에 있었던 金炯旭씨가 김성곤(金成坤)씨에게 「형님! 金大中이한테 지금 돈이 하나도 안 들어가는데 돈 좀 들어가게 해주시오. 저래 가지고 선거 어떻게 치르겠습니까.
朴대통령이 괜히 좋은 사람을 방해하고 있습니다」고 그러더래요. 金成坤씨가 경제인에게 이야기하면 나에게 선거자금을 좀 줄 것이 아니냐는 말투였다는데 金成坤씨는 金炯旭씨가 자기를 떠보는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가만히 있었다고 그래요. 金炯旭씨가 미국 가서 나에게 대해 좋은 말을 많이 했는데, 그런 관계가 있는 겁니다』
―어떤 계기로 친해졌읍니까?
『국회 예결위에서 趙尹衡 의원이 金炯旭 당시 정보부장에게 「왜 동백림 사건을 처리하면서 국제적인 말썽을 일으켰느냐」고 따진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金炯旭부장은, 「반공이 국시인데 빨갱이 잡아오는 것도 죄냐」고 길길이 뛰는 거예요. 여당 의원들도 가세하고. 그래서 제가 일어났어요. 「趙의원 이야기는 빨갱이 잡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잡더라도 법을 지켜서 해야 한다는 뜻인데, 金부장, 당신 그 태도가 뭐요. 국민들의 대표가 모인 의사당에서 그따위 버릇이 어디 있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나―」하며 호통을 쳤어요.
그랬더니 金炯旭씨가 어정어정 걸어 나오더니 깍듯이 절을 하고는 「金大中의원님, 그리고 여기 계시는 의원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그 사건으로 신경과민이 돼서 말을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고 깨끗이 사과를 했어요. 그러고 나서 친해졌는데 71년 대통령선거 때는 저의 비서실장이던 金相賢씨를 통해서 선거자금으로 보태 쓰라고 5백만 원을 주었어요. 金炯旭씨는 당시엔 권좌에서 물러나 있을 땝니다. 액수도 액수지만 그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었겠읍니까.
그 뒤에 金씨는 공화당 전국구 의원이 됐는데 남의 눈이 두려워 자주는 못 만났지만, 마주치면 아주 반갑게 호의를 표시했어요'
金炯旭은 자신이 73년 봄에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 동기중의 하나도 이 정치자금 문제가 알려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동네북이 된 한국정부
1976년2월13일 워싱턴 포스트의 맹렬 여기자 맥신 체사이어가 한국측 對美 로비스트 朴東宣의 활동을 폭로하기 시작한 이후 약3년간 한국 정부는 미국 언론과 의회와 수사기관의 동네북이었다. 한국 공화당에 대한 걸프(대한석유공사와 합작한 회사)의 정치헌금, 朴東宣사건, 金大中씨 납치사건, 金炯旭의 폭로, 통일교문제, 在美교포에 대한 한국정보기관의 협박, 정보부 간부들의 잇단 망명사건에다가 카터 대통령이 제기한 駐韓미군철수 문제와 한국내 인권문제에 대한 카터 행정부의 압력 등이 엎치고 겹쳐 한국은 샌드백이 되어갔다.
미국 의회 안에서도 여러 소위원회가 한국을 상대로 제각기의 방향에서 조사를 하는 바람에 망명객 金炯旭, 金相根씨 등은 이리 저리 불려가 겹치기 증언을 하는 등 탤런트가 되고 있었다. 이런 청문회에서 드러난 것은 대부분이 한미관계의 그늘이고, 얼룩이었다. 범죄는 범죄대로, 비극은 비극대로 미학이 있는 법인데 이 조사에서는 치졸한 한국인의 모습만 부각됐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써 닉슨을 내쫓았던 미국 언론은 朴정권을 하이에나처럼 물고늘어졌다.
金炯旭 金相根씨처럼 朴정권에서 고관을 지낸 한국인이 하루아침에 변신하여 온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같은 한국인을 상대로 손가락질을 하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駐美대사관의 전직 공보관은 金東祚대사가 1백 달러짜리 지폐를 20여 개의 봉투에 갈라넣고 미국 의원들에게 나눠주려고 나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미국 쌀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생긴 커미션을 한국의 실력자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암투하는 사정도 무자비하게 폭로됐다.
對美로비가 한국의 안보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은 무시됐다. 미 하원 보고서는 朴東宣씨가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돈을 준 것은 '한국을 돕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에서라기보다는 朴씨 자신을 돕도록 만드는 데 진짜 목적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무렵 한국정부의 이미지에 특히 나쁜 영향을 주고 金載圭 정보부장의 신경을 건드린 폭로로서는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을 지낸 존 니데커의 의회증언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74년 5월에 한국을 방문, 뇌물을 받은 이야기를 실감나게, 또 비아냥거리는 투로 털어 놓았다. 그의 증언은 치졸한 한국의 對美공작과 이런 동양식 접근에 대한 미국 정부 고위층의 대응관습을 엿보게 하는 흥미깊은 자료다. 1978년 6월 1일 니데커가 미하원국제관계위원회의 국제기구 소위원회에서 한 증언의 요지는 이러했다.
닉슨 보좌관의 뇌물작전 폭로
더윈스키 의원 : 한국 방문 때 선물을 받았나요?
니데커 : 예. 몇 장의 그림과 작은 골동품들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돌을 파서 만든 술쟁반이었습니다. 2400년 된 것이라더군요. 나는 그 선물을 우송해달라고 했죠. 잘 아시다시피 50달러짜리 이상의 선물은 모두 국무성에 넘겨야 합니다. 그 뒤에 워싱턴 포스트의 체사이어 기자에게 들었는데, 내가 인계한 선물 가운데 하나는 경매에 붙여져 일리노이주의 어느 박물관에 1만 달러의 값으로 팔렸답니다.
더윈스키 : 한국 방문의 마지막 날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할 수 있나요?
니데커 : 비행기 탈 시간에 임박해서 盧진환 의원(유정회)일행이 저를 찾아와 朴正熙 대통령에게 작별인사를 하자고 했습니다. 대통령의 사저에 갔는데, 대통령은 朴鐘圭 경호실장과 골프를 치러 나가고 없었어요. 나는 비행장으로 나가야겠다고 했더니, 盧의원이 문제가 없다고 해요. 내가 예약한 JAL기를 붙들어 놓도록 했다는 겁니다. 내가 탈 때까지 말입니다. 기다리다가 끝내 대통령은 만나지 못하고 나오게 됐는데, 젊은이가 오더니 봉투를 하나 주어요.
朴鐘圭씨의 사인이 쓰인 봉투였죠. 젊은이는 비행기에 타기 전에는 뜯어보지 말라고 합디다. 그말에 의심이 버럭 났어요. 김포공항으로 가는 차중에서 봉투의 귀퉁이를 뜯어보니 달러 현찰이에요. 나는 공항에 도착하자 수행한 주한미국대사관의 크라우즈씨에게 봉투를 건네주면서 히비브 대사에게 전해주라고 했습니다. 제가 비행기에 탔더니, 저 때문에 1시간이나 기다린 승객들이 화가 나 있더군요. 미국에 돌아와서 알아보았죠. 그 봉투에는 현금 1만 달러가 들어 있었답니다. 나는 또 하비브 대사로부터 현금 봉투를 朴鐘圭씨에게 돌려준 사실을 통보 받았습니다.
더윈스키 : 당신은 이 사건을 보고했나요?
니데커 : 나는 즉시 국무성의 한국과장 레이너드씨와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 그리고 헤이그 비서실장에게 보고했습니다.
프레이저 : 당신이 귀국한 뒤 盧진환 의원과 다시 접촉한 사실이 있나요?
니데커 : 두세번 만났죠. 어느 날 그는 많은 선물을 갖고 왔습니다. 헤이그 실장에겐 그림, 헤이그 부인에겐 진주목걸이, 닉슨 대통령 부인과 로즈매리 우드 여비서에겐 진주귀걸이, 그리고 나의 아내게게 줄 향수 등등을 가져 왔어요. 나는 그 선물들을 받을 사람에게 보인 뒤 다시 끌어모아 포장하여 한국 국회의사당의 盧진환 의원 앞으로 발송해 버렸죠. 盧씨는 朴鐘圭씨가 미국을 방문할 때 내가 그를 접대해 주었으면 한다고 했지만 나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盧의원과 만날 땐 꼭 제3자를 입회시켜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프레이저 : 盧씨는 선물 말고는 다른 부탁을 하진 않았읍니까?
니데커 : 그는 상하원 의원들에게 1인당 5000∼3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대고 싶은데, 누구에게 주었으면 좋을지 이름을 뽑아 달라고 했고 저는 거절했습니다.
이 청문회에는 니데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서류들도 제출됐다. 히비브 대사가 박종규(朴鐘圭)실장에게 1만 달러가 든 봉투를 반환할 때 같이 보냈던 편지, 니데커가 한국 방문중 朴鐘圭씨의 경호를 받으며 여행한 사실과 金壽煥 추기경과의 면담이 방해된 사실 등을 헤이그 비서실장에게 보고한 문서도 제출됐다. 朴鐘圭씨는 워싱턴 포스트에 반박문을 기고하여 자신의 관련설을 부정했다. 盧의원은 한국을 방문한 미 의회조사관을 만나 니데커 보좌관에 대한 험담을 털어 놓았으나 객관적 자료를 제시한 니데커의 증언이 설득력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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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대책회의
1977년 3월 31일.
청와대에서 정부 정책의 홍보 문제에 대한 대책회의가 있었다. 이 회의는 대통령이 주재하며, 청와대 주요 비서관 및 중앙정보부장, 관계 장관 등이 만나서 그때 그때의 현안에 따라 토론도 하고, 대통령이 의견도 말하는 부정기적인 모임이다.
회의 마지막에 대통령이 결론을 지으며 지시했다.
“가끔 밖에 나가 보면 새 공장들이 우뚝우뚝 세워지는 걸 보게 되는데 왜 이런 것을 국민에게 알려 주지 못합니까? 장관들은 이런 것을 허술하게 보지 말고 부처 대변인을 시켜 홍보할 수도 있고, 대변인은 홍보 자료를 장관에게 물어서 해도 좋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변인이 자료를 만들어서 장관에게 요점만 간단히 보고하고 홍보한 후에 그 전문을 장관에게 갖다 줘도 무방하지 않겠어요?
홍보 자료를 일반 행정 서류와 마찬가지로 대변인이 만들어서 장관의 결재를 정식으로 받아서 홍보하게 되면, 이미 때를 놓치거나 늦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 대변인은 장관에게 간단히 보고하고 발표하는 버릇을 키우도록 하시오.”
이때 金載圭 정보부장이 각 부처 대변인 제도의 문제점을 보고했다.
“지난번 각 부처 대변인 문제에 대해 신문에 가십이 나왔을 때 정보부에서 검토한 일이 있습니다. 당초 부처 대변인 제도를 채택할 때는 지금 각하께서 말씀하신 의도와 같이 그렇게 하기로 했으나, 그 후 시일이 흐르면서 대변인 자리를 부처 인사 적체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언론인 출신 대변인은 8명밖에 없는 것으로 압니다. 언론계에는 머리 좋고 재치 있고, 또 애국적인 사람들이 많은데 말입니다.”
대통령은 대변인 제도가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다는 보고에 언성을 높였다.
“장관들이 대변인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 아닙니까? 언론계 기자들의 활약이 크다고 들었는데, 특히 駐日 특파원은 현지 공관원이나 공보관 못지않게 애국심을 가지고 열심히 뛰어다닌다는 말을 들었어요. 문공부 장관! 당신은 언론계 출신이니까 누가 애국심이 많고 일을 잘하는지 알 텐데, 다른 장관들에게 그런 언론인을 대변인으로 천거해 주는 것이 좋겠구먼.”
朴대통령은 집권 초반기에는 기자들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것에 반해 이 무렵엔 그들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1977년 4월 20일. 이날 저녁 본관 식당에서 朴대통령이 비서관들과 식사를 함께 했다. 朴 대통령은 비서관들과 둘러서서 칵테일을 한 잔씩 들면서 청와대 물맛 자랑을 했다.
“여러분들 집에서는 수돗물을 먹을 테니 청와대에서 나오는 지하수는 별맛일 거야. 여기 있다가 국방과학연구소로 간 金大欽이 말했는데, 청와대의 공해를 측정해 보니 제로라는 거야.”
술을 들면서 경제 비서관들은 주로 경제 문제를 간단히 보고하고, 간간이 金正濂 비서실장이 보충했다.
“우리 수출이 너무 확대되는 데 대해 미국이 별로 신통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제가 늘고 수출이 확대되면 미국이 우리를 멀리하지 못해요. 이번 미군철수 문제만 하더라도 철수 반대 궐기대회도 하고 했으니 내가 미국측에 철군을 만류하기를 은근히 기다린 흔적이 보이는데. 우리 경제와 국방력이 이만한데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소'
대통령은 이 말을 하면서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평소에 보기 드문 파안대소를 했다.
“카터는 땅콩 장사나 해서 경륜이 없다”
잠시 후 식탁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대통령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의 경력에 관해 언급한 뉴질랜드 수상의 말을 인용했다.
“뉴질랜드의 멀둔 수상도 기자회견에서 ‘카터는 땅콩 장사나 해서 그런지 경륜이 없다. 카터 정책을 좋아할 사람은 크렘린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비꼬더군.”
대통령은 이 말을 하면서 빙긋이 웃었다. 그의 카터 대통령에 대한 생각도 꼭 같다는 표정이었다. 한 비서관이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 관해 한 일본 언론인이 쓴 글을 읽었다.
“각하께서도 아실 줄 압니다만, 일본 시사통신 사장을 지내다가 노조에 의해 쫓겨나 내외뉴스라는 주간을 내고 있는 일본 언론계의 원로 하세가와 사이지(長谷川才次)가 쓴 글을 보았습니다.
글의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언론인 중에 최석채씨란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한국군의 월남파병 때 일본에 와서 강연을 했습니다. 그 강연 내용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한국이 월남에 파병한 것은 미군이 6·25 동란에 참전하여 많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낸 데 대대 보답을 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야의 구별이 없다. 그것은 한국이 유교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는 은혜로 갚고, 원한은 원한으로 갚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세가와씨는 최석채씨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미국이 국제적으로 고아가 되었을 때 한국이 도왔는데, 이제 카터가 주한 미군을 감축한다는 것은 의리 없는 짓이다. 하긴 카터는 유교를 배우지 않았으니까. 또한 일본도 생각할 문제가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깊은 은의를 입은 장개석 총통을 버리고 단숨에 중공과 손을 잡은 정부에 과연 의리라는 단어가 있을까’라는 요지의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래, 나도 어느 책에서 그것을 본 것 같아. 개인간에도 신의가 필요한데 국가간에 신의가 없으면 안 되지.”
柳赫仁 비서관이 언론계 간부들의 전방 시찰 결과를 보고하면서 화제가 바뀌었다.
“여기 있는 鮮于 비서관의 백씨(伯氏) 선우 주필이 이번 토요일 전방에 갔다 온 것을 주제로 시론(時論)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시론을 쓰겠다고? 가슴이 답답하다가도 鮮于 주필의 사설이나 시론을 보면 시원하고 후련해져. 鮮于 주필이 때로 정부 시책을 공격해서 아프기는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 사람 얘기가 거의 다 맞아요.”
대통령은 최근 방위산업 특집 프로에서 MBC는 잘한 반면 KBS는 부족했다고 지적하면서, “사진기자들이 대통령만 찍고 전체를 찍지 않아요. 나는 두세 컷만 찍으면 되는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동아일보 사설도 미군 철수에 대해서 쓸 것을 썼더군. 어떤 때는 사설을 읽고 나서 ‘이것이 진짜 동아일보인가’ 하고 표제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볼 때가 있어요. 과거에는 같은 반공 사설을 써도 꼭 ‘그러나’ 하고 꼬리표를 달아서 정부를 비난하기에 나는 한때 ‘반공의 방법이 우리와 다른가’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하긴 지금 반공과 미군 철수 문제에 대해 우리 정부와 의견이 다른 언론기관이 있겠소?”
“미 8군 장성들은 미군 철수 반대”
1977년 5월 20일. 대통령은 朴槿惠씨와 비서관과 기자단을 불러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오늘도 대통령은 미군 철수 문제를 장시간 거론했다.
“동맹이란 것은 한 나라만의 이익을 위해서 맺는 것이 아니라, 당사국의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세가 변화되면 서로 의논해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그 사람들(미국)은 그렇지 않더군요.
지난 1년 동안 주한 미군 철수 문제가 라디오나 신문에 등장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 스나이더를 만났을 때 식상(食傷)하다고 했지. 가든 안 가든 결정은 지어야겠어. 그런데 8군 장성들은 모두 철수를 반대하더군. 골프를 초대받은 적이 있어서 경기 끝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모두들 하나같이 반대야. 내가 ‘카터 대통령이 군 출신이니까 잘할 것 아니냐’고 했더니 미군 장성들이 ‘그 사람, 잠수함을 석 달 탔습니다. 그것도 군 경력에 들겠지요’라고 대답하더군.
미국 대통령 선거 때 카터 참모들이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해야 표가 많이 나온다고 건의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대통령이 되고 나면 국방성도 있고, CIA도 있고, 국무부도 있어서 이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서 해야 하는데. 하긴 선거 공약이니 안 할 수도 없겠지. 그들끼리도 의견 대립이 있는 모양이야.
조지아 사단(카터 행정부의 별명)과 다른 사람들이 서로 의견이 다른 모양입니다. 미군이 철수한다니까 우리나라에서도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우리의 방어력은 6·25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달라졌어요. 중동에서는 우리를 대단히 환영한다더군. 그들이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저들을 돕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야.”
이어 조선일보 安秉勳 기자가 고전 문제를 제기하자, 대통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전학자들이 나이가 많아요. 살아 계시는 동안에 國譯을 해주면 좋겠고, 젊은이들에게도 가르쳐 주면 좋겠어. 趙光祖도 30대에 文名을 떨치지 않았소. 우리 고전은 우선 번역을 해놓고, 그 다음에 분류 작업을 하면 될 겁니다. 劉鳳榮 선생(전 조선일보 부사장) 같은 분을 좋은 사무실에 모시고 살림살이도 걱정 없이 해드리면 좋은 사업을 많이 하실 텐데…. 우리가 흔히 퇴계 선생이 훌륭하다고 하면서도 무엇이 어떻게 훌륭한지 잘 모르고 있어요. 고전을 쉽게 풀이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당시에는 동해의 석유 시추 지역의 개발 권리를 일본이 갖고 있다고 주장해서 말썽이 되고 있었다. 대통령은 석유 개발의 확고한 의지를 재확인했다.
“7광구는 단독 개발도 가능해. 일본이 하도 못되게 놀아서 단독 개발도 생각해 보았소. 만일 외국의 압력 때문에 시추 작업을 포기해야 한다면, 우리도 배를 만들고 외국 기술자를 고용하면 됩니다. 2000∼3000달러를 받는 기술자들에게 1∼2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면 올 것 아니오.”
한 비서관이 對美무역에서 우리가 흑자를 많이 내자 미국에서 우리 나라의 수입 자유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수입 자유화? 음, 좀 풀어 줄까? 우리의 수출이 늘어나니까 그쪽 것도 좀 사줘야겠지. 풀어 주면 국산 제품에 영향이 있을 거라고 얘기들을 하지만 슬슬 풀어 주면 잘될 거요. 국산품이 자극을 받아서 오히려 질이 향상될 수도 있지. 우리 기술도 향상되고.
지난번 미국과의 신발류 문제만 해도 수출 신발의 수는 제한되었어도 값은 제한된 것이 아니니까, 질을 높이면 비싼 값으로 팔게 되어 이익을 더 볼 수 있지 않겠소.”
“미국이 핵 가져가면 우리가 개발할 것”
1977년 5월 22일. 대통령은 평소에 장시간 얘기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나 비서진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는 마치 교사가 학생에게 훈시하듯 국정에 관계된 것뿐만 아니라 느낀 점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말했다. 이날도 대통령은 비서관들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첫 화제로 우리의 충효사상에 관해 언급했다.
“충효사상의 보급은 좋은 일입니다. 다른 나라에는 이런 정신이 없을 겁니다. 우리만이 제대로 할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식사를 끝내고 나서 대통령은 계속해서 미국이 제기하는 한국의 인권문제와 미군철수 논의에 대해서 불쾌한 심정을 표출했다.
“한국에 어떤 인권 문제가 있는가, 하고 미국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물으면 그들도 대답을 못합니다. 인권 침해란 법에도 의하지 않고 재판도 하지 않고 탄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헌법에 따라 3심을 거치고 그것도 공개리에 외국 기자들한테까지 방청을 시키면서 법으로 확정해서 처벌하는 것을 어떻게 인권 침해라고 할 수 있는가 말이오.
요즈음은 인권 문제 이야기가 적어졌지만…. 지난번 울프 의원도, 또 스나이더 대사도 ‘카터가 한 얘기이니까 미국의 체면을 봐서 제스처라도 써달라’고 내게 말했는데, 내가 제스처를 할 것이 있어야지. 지금 잠깐 들어가 있는 사람도 전에 민청학련 사건과 같이 개과천선하면 사면될 수도 있는 것이오.
反체제 사람들이 콧대를 높이는 것은 바로 미국 사람들 때문이야. 미국도 소용없다고 느낄 때라야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생각이 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놓아줄 수 있지. 이 기회에 그 사람들의 사대근성을 뿌리뽑아야 됩니다. 외세에 의존하는 근성을 버리지 않고는 진정한 자주독립 국민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 동안 미국에서 反정부 운동하는 사람들, 李龍雲 전 해군참모총장이나 文明子씨 등이 한 근거 없는 말들을 미국은 그대로 언론에다 실었단 말이야. 주한미군이 동북아 평화를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직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 평화가 정착되거나 적어도 우리 힘이 북괴를 확실히 능가할 힘이 생길 때까지 주한미군이 있는 것이 좋지. 그러나 그들이 일방적으로 간다고 했소. 한반도의 안보는 한국만의 책임인가? 한미 양국의 공동 책임입니다. 그들이 떠나가더라도 장비를 넘겨 주고 공군력만 증강한다면, 유사시에 우리 힘으로도 능히 적을 막을 수 있어요.
미 국무부 차관보 홀부르크가 학자 그룹과 만났을 때, 참석한 학자들은 모두 조건 없는 주한미군의 철수는 반대한다고 말했답니다. 나는 월남사태 때 이미 주한미군 철수를 예상했어요. 모든 정세로 보아 북괴가 남침해도 중국·소련이 병력 지원을 안 할 것으로 봅니다. 우리의 힘이 강해지면 오히려 중국·소련이 북괴의 남침을 견제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산당의 전술이지.”
대통령은 이날 각오한 듯 말을 이어갔다.
“내년에 프랑스에서 장갑차 150대를 도입하고, 가을에는 서해에서 미사일 시험 발사도 할 것입니다. 이번에 하비브 미 국무차관이 오면 핵을 가져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텐데, 가져가겠다면 가져가라지. 그들이 철수하고 나면 우리가 개발할 생각이오.”
이미 4월부터, 한국에 있던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서전트 地對地 미사일을 미국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비브 차관이 들고 올 미국의 주한 미군 철수 계획안에는 공군이 보유한 핵무기를 제외한, 지상군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는 모두 철수시킨다는 계획이 포함된 것으로 朴대통령은 내다보았다. 그 며칠 전 카터 행정부의 주한 미군 철수 방침에 반대 의견을 표명한 싱글러브 주한미군 참모장을 즉각 소환하여 해직한 것으로 보아, 미국의 핵무기 철수도 기정방침인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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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테면 가라”
여러 모로 朴대통령과 악연을 갖게 되는 지미 카터는 1977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대통령 검토각서'(Presidential Review Memorandum) 13호로 各軍에 철군 문제 검토를 지시했다. 그는 아직 군부의 검토 결과 보고가 있기 전인 3월9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선거공약인 주한미군 철군을 추진하겠다고 공표했다(이하 기사는 李東馥 당시 정보부장 특별보좌관이 월간조선에 기고한 글을 참고 또는 인용한 것이다).
3월17일 미 합참은 「1982년 9월까지 3만2000여 명의 주한 美 지상군 병력 중 우선 7000명 정도를 철수시키자」는 내용의 건의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으나 카터는 5월5일 『4∼5년 안에 全주한 美 지상군을 철수한다』고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 지시각서」12호에 담아 미 합참에 내려보냈다.
카터는 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7년 4월부터 일방적으로 한국 내에 배비되어 있던 전술 핵탄두와 미사일 부대를 철수하거나 후방지역으로 再배치하기 시작했다.
이에 朴대통령은 강경하게 나왔다. 그것은『갈테면 가라. 구걸하지 않겠다』는 태도에다가 자주국방 노선의 채택과 이를 위한 방위산업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주한 美 지상군 철수 문제를 싸고 미국의 카터 행정부와 한국의 朴正熙 정권 사이에 지루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이 줄다리기는 미국의 군부가 거의 擧軍的으로 공공연하게 카터의 철군 계획에 반발, 저항하기 시작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카터의 철군 계획에 대한 행정부의 반대는 주무장관들 전원을 포함하여 사실상 汎정부적인 것이었다.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과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은 「대통령의 지시에는 일단 순종하면서 이의 철회를 모색한다」는 입장이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 보좌관은 「모든 회의에서 대통령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동시에 카터의 생각을 바꾸려 하는 행정부 다른 동료들의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1977년 5월19일자 워싱턴 포스트紙는 주한 美8군 참모장 존 싱글러브 소장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이 회견에서 싱글러브 소장은 『만약 (카터의) 철군 계획대로 4∼년 동안에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12개월 간의 정보수집 결과 북한 戰力(전력)은 계속 증강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은 3년 전의 낡은 정보 속에 묻혀 있다』고 비난했다. 카터는 싱글러브 소장을 워싱턴으로 소환하여 질책하고 다른 자리로 보직을 이동시켰다.
카터의 철군정책을 불발탄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 가운데는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유엔군 사령관, 美 제8군 사령관을 겸하고 있던 존 베시 대장이 있었다.
하우스먼의 전화
1977년 5월17일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 李東馥씨는 오랫동안 가까이 알고 지내던 주한미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인 제임스 하우스먼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긴급한 용무가 있으니 가급적 가까운 시간 안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하우스먼은 韓美 군사협력 분야에서 전설적 인물이었다. 그는 1945년 9월 대위 계급의 美 육군 정보장교로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하여 남한지역에 진주한 美 육군 제24군단의 요원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그뒤 그는 대한민국 국군 建軍史에서 지워질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그는 건국 초기 국군 조직에 관여했고, 1949년 주한미군 철수 후에는 美 군사고문단(KMAG)의 일원으로 남한에 잔류했으며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주한미군 소속으로 한국군과 주한미군 사이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1953년의 휴전 이후에는 주한미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양군 간의 관계를 조율하는 윤활유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1979년 朴正熙 대통령이 암살될 때까지 한국軍의 인사·조직·운영·작전 등 모든 영역에 하우스먼의 지문이 남겨지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1977년에도 그는 여전히 베시 주한미군 사령관의 특별보좌관이었다.)
李보좌관과 하우스먼은 다음 날 서울시청 맞은편 프라자 호텔의 한 객실에서 마주 앉았다. 여기서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李특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에게 보고했다.
<주한 유엔군사령관 특별보좌관 짐 하우스먼은 5.18 12:15∼13:30 當部 부장 특별보좌관을 접촉하고 베시 유엔군사령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전제하에 다음 사항을 부장에게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음.
1. 5월24일에 내한하는 하비브 국무차관과 브라운 합참의장을 맞이하여 베시 사령관은 주한 美 지상군 철수문제에 관하여 현지 사령관으로서의 기본입장을 다음과 같이 보고할 계획임.
가. 베시 사령관은 1차적으로는 주한 美 지상군을 현재의 상태에서 동결, 어떠한 규모의 감축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백히 할 것임. 베시 사령관의 논거는 6·25 때 주한미군이 철수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한 반면 휴전 이후에는 전쟁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주한미군이라는 전쟁 억지력이 엄존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할 것임.
베시 사령관의 견해로서는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金日成은 남한에 대한 우세를 맹신하고 있었으나 최근 수년 동안은 특히 경제발전면에서 자신감을 잃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보복응징에 대한 염려만 과소평가하게 되면 남북한 간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한국의 산업시설 파괴를 큰 목적으로 하는 단기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고할 것임.
나. 만약 하비브 차관과 브라운 의장을 통해 美 행정부의 주한 美 지상군의 감축이 기정 방침으로 확인될 경우 베시 사령관은 차선의 방안으로 다음 사항을 건의할 방침임.
1) 주한 美 지상군의 감축은 상징적인 규모로 국한할 것. 美 육군 제2사단의 3개 여단 중 1개 여단에서 여단 建制는 그대로 둔 채 2개 대대만을 1979년 6월 이후에 철수하고 나머지 부대는 무기한(최소한 5년 간) 한국에 잔류시키도록 결정할 것.
2) 철수하는 2개 대대의 각종 화기와 장비는 한국에 남겨두어 한국軍에게 인계할 것.
3) 현재 2개 대대 弱의 규모인 주한 美 공군은 완전규모의 3개 대대를 각기 거느리는 2개 비행단으로 증강시키되 증강되는 항공기는 태평양 공군으로부터가 아니라 본토의 공군으로부터 가져올 것(태평양 공군은 주한 美 공군의 후비로 이미 사실상 한반도에 들어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태평양 공군으로부터의 증강은 실질적으로는 증강이라고 볼 수 없음).
4) 한국軍 현대화를 위해 다음 조치들을 강구할 것.
▶한국軍에 이양하는 화기 및 장비에 대해서는 저렴한 특별가격을 부여할 것.
▶한국軍에 제공하는 각종 기술정보에 대한 美 의회의 제한을 철폐할 것
▶철수하는 주한미군이 한국軍에 이양하는 화기와 장비는 무상공여로 처리할 것.
▶한국軍에 대해서도 미군의 편제상 T/E와 동수의 헬리콥터를 제공할 것.
▶한국軍이 보유하는 TOW의 수를 세 배로 늘려 500개로 만들 것.
▶한국의 방위산업에 부과하는 5%의 로열티를 철폐할 것.
▶한국軍이 미군으로부터 획득하는 화기·장비 기술이관 과정을 단축하기 위하여 훈련을 제공할 것.
2. 베시 사령관은 앞으로 있을 韓美 협의 때 대통령 각하께서는 물론 고도의 정치적 차원에서 말씀을 하셔야 하겠으나 관계장관 이하의 실무자는 이상 베시 사령관의 기본입장을 감안하여 그보다 더 강경한 주장을 할지언정 더 온건한 주장을 하지는 말아 줄 것을 요망함.
3. 베시 사령관은 하비브와 브라운 來韓 이전에 극비리(주한 美 대사관에 대해서도 비밀로) 韓美 양국군 간에 사전 의견조정을 가질 것을 희망함. 그 방식은 1단계로 합참의 孫章來 장군이나 柳炳賢 장군과 유엔군사령부의 번스 부사령관, 싱글러브 참모장 또는 콜러 작전참모 간에 협의를 갖고 2단계로 베시 사령관과 국방부 장관이 만나기를 희망함(단 이러한 접촉은 베시 사령관의 입장에서는 美 행정부에 대한 일종의 항명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극도의 보안을 요망함).
4. 베시 사령관은 지난번 渡美, 카터 대통령을 만났을 때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절대로 졸속한 결정을 회피할 것』을 건의했고 이에 대해 카터 대통령도 『장군과 먼저 협의하지 않고는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어떠한 결정도 단독으로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으므로 미국이 일방적으로 감축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고 만약 카터 대통령이 이러한 약속을 저버릴 때는 『군복을 벗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우스먼은 말하고 있었음.>
金載圭-베시 비밀 요담
李특보가 듣고 보니, 하우스먼이 전하는 내용은 실로 중대한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金載圭 부장에게 베시 사령관을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金부장이 베시 사령관의 8군 영내 숙소로 가기로 했다. 다음 날인 5월19일 오후 3시15분부터 4시30분까지 카터의 철군계획을 저지하려는 두 사람의 밀담이 이뤄졌다. 李특보가 통역을 위해 배석했다.
이 자리에서, 베시 사령관은 그가 金부장을 만나자고 한 진짜 이유를 털어놓았다. 그는 우선 철군 문제에 관한 카터 대통령의 옹고집에 분노를 터뜨렸다. 그리고, 카터의 철군 공약은 결국은 이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왜냐하면 이 공약은 『너무나도 현실과 괴리된 것이고 잘못하면 전쟁을 유발할 수도 있는 그릇된 정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터의 철군 공약이 이행될 경우에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철군은 보완조치 없이는 진행될 수 없다』면서 韓美 양국 간에 즉각 「철군 보완조치」에 관한 협상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철군 보완조치'가 비용 면에서 주한미군을 계속 유지하는 것보다 비싼 것으로 만들어서 「비용 對 효과」의 차원에서 미국 내, 특히 美 의회 안에서,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찬반 토론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 베시의 본심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완조치」로 인하여 주한 美 지상군의 철군을 강행하는 것이 계속 유지하는 것보다 비용 면에서 비싼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경우 거의 틀림없이 의회가 나서서 철군 강행을 저지하게 되리라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한국 정부 안의 그의 대화 상대는 徐鐘喆 국방장관과 柳炳賢 합참본부장이었다. 이 무렵 朴正熙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에게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외교경로를 통해 카터 대통령에게 주한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거듭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터가 한국 정부에 「事後통보」 위주의 일방통행 방식으로 일 처리를 강행하자 감정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베시의 충정에 감동한 金부장
『그렇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우리는 구걸하지 않겠다. 우리는 우리 길을 간다』고 자주국방을 외치면서 오히려 「주한미군 철수 不반대」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카터의 오만에 맞서서 주권국가의 대통령으로 국민이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朴대통령의 대응은 「과연 대통령다운 행동」(Presidential Politics)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에게 해당되는 것」이었고 그를 보좌하는 주무장관이나 참모들의 경우는 그와는 다른 것이었다.
베시는 『대통령이 그렇게 할수록 정부 관계자들은 실무적 차원에서 가령 철군이 이루어지더라도 그로 인한 위험부담이 최소화되도록 미국을 물고 늘어져 최선의 보완조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문제는 한국 정부의 주무장관 등 관계 참모들에게 있었다. 베시가 그들을 접촉해 보니 그들은 『대통령보다 한 술 더 떠서 더 격앙되어 있었고 더 강경해서 도저히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우스먼은 베시 사령관이 徐鐘喆 국방장관 등 한국군 고위층으로부터 『미군이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아연 실색했다고 전했다.
카터 대통령은 철군 문제와 인권 문제를 가지고 한국 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1977년 5월24일 필립 하비브 국무차관과 조지 브라운 합참의장을 서울에 보내기로 했다. 베시 사령관의 생각으로는 하비브와 브라운의 訪韓이야말로 이들 앞에 「철군강행」보다 훨씬 高價의 「보완조치」 보따리를 풀어놓아 이들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물실호기의 기회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베시 자신이 한국 정부 국방 관계자들을 만나 그의 생각을 귀띔해 줄 절대적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길이 없었다. 베시는 金부장에게 중앙정보부장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직접 보고 라인을 통해 그의 충정을 朴대통령에게 전달하여, 朴대통령으로 하여금 徐鐘喆 국방장관 등이 즉각 베시 사령관과 협의하여 「철군 보완조치」를 마련하는 등 하비브 차관 및 브라운 의장의 訪韓 때를 기점으로 韓美 간에 「철군 보완조치」 협상을 본격화시킬 채비를 차리도록 지시해 주기를 희망했다.
金부장은 눈에 띄게 감동했다. 필동 중앙정보부 분실 6층의 부장실로 돌아온 金부장은 李특보에게 베시 사령관과 나눈 대화를 對談 형태로 정리하여 부장이 대통령에게만 올리는 보고 형식인 「特上보고」(일명 빨간 딱지 보고)로 작성해 달라고 주문했다.
金부장은 다음 날인 5월20일 이 보고서를 갖고 청와대로 올라가 朴대통령 앞에서 이 보고서를 낭독했다. 필자가 작성하여 1977년 5월20일 金載圭 부장을 통해 朴正熙 대통령에게 보고된 문제의 「특상 보고서」에는 흥미 있는 대목이 있다.
“우리 모두는 언론독재의 희생자”
<베시: 본인은 朴대통령 각하가 현재 처해 있는 미묘한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다. 충분한 보완조치가 수반되지 않는 주한미군의 철수는 한국으로 볼 때 분명히 작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朴대통령 각하의 입장에서는 국민들의 사기나 對外(대외)위신, 그리고 金日成의 존재 때문에 공개적으로는 이것을 큰 일이라고 말씀할 수가 없을 것이다.
분명히 朴대통령 각하는 카터 대통령이 깊은 생각 없이 뱉어 놓은 선거공약 발언 때문에 진퇴가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본인은 길게 볼 때는 비관하지 않는다. 양국이 현명하게 지혜를 가지고 사태에 대처해 나간다면 앞으로 10년 후면 金日成이 청와대 문을 두드리면서 대통령 각하께 살려달라고 애원해 오게 될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고 있다.
다만 본인이 이번 하비브·브라운 일행의 訪韓에 즈음하여 바라고 싶은 것은 이들과 협상에 임하는 한국 정부 대표들이 솔직하고 정직하게 흉금을 툭 터놓는 자세로 모든 문제를 얘기해 달라는 것이다. 지금 상황은 카터 대통령이나 朴대통령이 다같이 국내정치에서 오는 부담과 압력 때문에 본의 아니게 행동의 일부 제약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보좌하는 실무자들이 상호 솔직하고 정직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긴요하며 그렇게만 한다면 韓美 양국처럼 특수한 유대를 가지고 있는 국가 간에 해결 안 될 문제가 없다고 본다.
金載圭 아마 우리 정부측 대표는 朴東鎭 외무장관과 徐鐘喆 국방장관이 될 것이다.
베시 徐국방과는 그동안 여러 차례 의견교환을 가졌었다.
金載圭 지금 들려 준 당신의 판단과 견해는 매우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질 수 있는 정치와는 달리 전쟁은 매우 정직한 것이다. 총 한 방을 쏘아서 맞추면 사람이 죽고 대포알 한 방이 터지면 파괴가 생기는 것인 만큼 전쟁은 정직하고 또 정확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사항을 감안해 볼 때 지금의 시점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들고 나온 정치인의 소행은 분명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韓美 관계의 모든 문제를 놓고 볼 때 가장 고약한 문제는 한국에서의 이른바 인권에 대한 시비인 것 같다. 실은 인권 문제란 매우 간단하면서도 미묘하다. 朴대통령과 카터 대통령 입장에서는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아직 해결이 되고 있지 않다는 데 문제의 미묘성이 있다.
이른바 한국에서의 인권 문제는 카터 대통령이 우리 대통령에게 요구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닐 뿐 아니라 우리 대통령께서 카터 대통령의 요구에 반대한다는 차원에서 얘기될 수 있는 성격의 문제도 아님이 명백하다.
실제로 우리 나라에 있는 소위 인권 문제란 오직 명동사건에 관련되어 刑(형)을 살고 있는 9명에 국한된 문제이다. 이들 9명의 문제도 해결 방안은 간단하다. 문제는 이들 9명과 그들의 가족 및 추종세력들이 범법사실에 대하여 개전의 정을 보여 주느냐의 여부에 있다. 그들이 개전의 정을 보여 주고 다시 세상에 나갔을 때 다시는 범법행위를 하지 않겠다고만 확실히 서약하기만 하면 이들에 관한 문제는 그 순간에 해결될 수 있다. 실제로 과거 민청학련 사건에 관계되어 15∼20년의 실형을 언도받았던 자들도 그들이 개전의 정을 보였기 때문에 지금은 모두 방면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인은 이번에 하비브 차관과 브라운 의장이 방한할 때 이같은 한국의 실정을 깊이 인식하여 소위 인권 문제와 안보 문제를 엄격히 구별하는 지혜를 가져 주었으면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는 실제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문제로 전쟁이냐 평화냐를 가름하는 중요한 문제에 관한 논의가 자칫 그릇된 방향으로 유도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베시 金부장의 견해에 본인은 100% 동감한다. 그 두 개의 문제는 서로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본인은 지난번 귀국해서 카터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그 점을 특히 강조한 바 있다. 유감스러운 문제는 미국 내에 투영된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한 오도된 인식이다. 본인은 지금 부장이 한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金載圭 장군은 하비브 차관이 이곳에 와서 인권 문제를 거론하리라고 보는가?
베시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하비브의 사람됨을 아는 본인으로서는 그가 이곳에 와서 인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러나 카터의 정치적 입장을 이해해 줄 필요는 있다. 카터는 분명히 한국을 돕고 싶어한다. 그런데 한국을 돕기 위해서는 美 의회와 여론의 지지가 필요한 데 美 의회와 여론사회에서는 한국의 인권 문제에 관하여 카터에게 모종의 행동을 취하라는 강력한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카터로서는 이같은 압력 때문에 비단 한국관계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정책에 관해서도 美 의회의 협조를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아마도 카터는 이번 방한하는 특사 편에 이같은 정치적 고충을 朴대통령께 말씀드리고 이에 대한 朴대통령의 말씀을 들려 달라고 요청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본인의 판단으로는 카터 대통령이 인권 문제와 안보 문제를 결부시키는 일만은 결코 안 할 것이라고 본다. 지난번 만났을 때 카터 자신이 본인에게도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金載圭 그 문제는 실은 우리 사이에서도 많이 논의되어 왔고 또 카터 대통령의 입장은 우리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좀 안된 얘기지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국내적으로 朴대통령께서 처해 있는 입장은 미국에서 카터 대통령이 처해 있는 입장과 정반대라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가 이룩한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은 대통령 각하의 강력하고 현명한 영도력이 국민을 조직하고 이끌어 온 데서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여기에 어떤 이상이 생기면 한국은 귀하도 잘 아는 옛날의 한국으로 환원되고 말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만약 본인이 지금 카터 대통령을 만난다면 이러한 얘기를 들려 주고 싶다. 새를 울려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새더러 울라고 요구했다고 울지 않으면 새를 죽인다. 어떤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어코 새를 울리고야 만다. 또 어떤 사람은 새가 스스로 울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린다. 나는 카터 대통령이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유형 중 세 번째 유형의 정치가가 되었으면 한다.
베시 아주 좋은 말씀을 해 주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朴대통령의 입장과 진의가 미국에서는 부당하게 오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호사가들은 朴대통령의 강력한 영도력 행사는 불안정한 국내 政情(정정)을 안정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악선전하고 있다. 2주일 전에 朴대통령께서 8군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시고 본인의 숙소에 들르셔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신 일이 있다. 그 때 대통령께서 아주 편안한 기분으로 하루 저녁을 지내시는 것을 보고 본인도 무척 기뻤었다. 본인은 장기적으로는 한국도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믿는다. 본인은 부족한 정치적 식견이기는 하지만 본인의 생각으로는 朴대통령은 이미 국내에서 강력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쌓아 올리셨고 그렇기 때문에 선거를 지금 당장 실시한다고 해도 아마 80∼90%의 지지를 얻어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시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본인이 보기에 朴대통령께서는 국민의 복지증진과 안보, 그리고 경제건설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정치작태를 낭비적이고 非생산적인 것으로 보아 정치를 멸시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반면, 카터 대통령 같은 사람은 좀 시끄럽기는 하더라도 선거를 통해 다수의 지지를 얻어 국가를 이끄는 것이 보다 좋은 방법이라고 보는 데서 차이점이 생기는 것 같다.
金載圭 당신의 관찰은 매우 정확하다. 분명히 우리도 궁극적으로는 보다 완벽한 민주주의 사회를 지향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앞으로 6개월, 1년, 1년 반 뒤에 가서 보면 우리가 보다 더 민주주의 쪽으로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예로 작년 12월4일 본인이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부임한 이래 정치적 이유로 법에 도전하는 사건이 무수하게 있어 왔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도 형을 언도받은 사람이 없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관련자들을 불러다가 설득하고, 경고하고, 그리고 각서를 받은 뒤 다시 내보내고 있다.
명동 사건(필자 注: 이 사건으로 김대중씨가 구속됨)은 이미 3심을 거쳐 판정이 확정되어 있는 기결수라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도 刑이 확정된 18 명 중 9명의 노약자 및 부녀자는 刑집행을 정지시켰고 수감중인 9명에 대해서도 건강관리, 식사, 서적 차입, 면회 등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의 특혜적 처우를 베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신들과 일부 무책임한 미국 정치인들은 이들의 상태에 대해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을 유포시키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의 개전을 방해하고 문제의 조기 해결을 가로막고 있다.
베시 그렇다. 최근 한국 정부의 국내정책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매우 반갑고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군인이고 오직 안보에만 관심이 있으며 정치나 인권은 관심사가 아니다. 또 일부 여론의 오도 현상은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金載圭 요즘은 신문이 횡포 정도가 아니라 독재라 해야 할 정도인 것 같다.
베시 그렇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신문 독재의 제물들이다>.
카터의 발목을 잡은 ‘철군보완조치’
이 보고서는 朴대통령의 마음도 감동시켰다. 朴대통령은 즉각 徐鐘喆 국방장관에게 베시 사령관과의 협의를 통해 「철군 보완조치」를 마련하여 하비브 차관과 브라운 의장의 來韓에 대비하도록 지시했다. 이같은 경위로 하여 한국 정부는 「철군 보완조치」 패키지를 마련하고 이를 토대로 카터 행정부와 「철군 보완조치」 협상을 본격화하여 결국 「철군 개시 이전 또는 철군과 병행하여 제공될」 총액 15억 달러의 「보완조치」 패키지를 타결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카터의 철군 정책이 실천에 옮겨진 규모는 674명의 1개 전투부대 철수였다. 카터의 철군 공약이 결국 불발탄이 되고 만 데는 베시 같은 정부내 인사들의 저항에 세 개의 다른 이유가 보태졌다. 美 의회의 반대, 철군을 정당화시켜 주기 위한 측면 노력으로 카터 행정부가 벌였던 외교 노력의 실패, NSA·CIA·DIA 등 美 행정부의 정보기관들이 총동원되어 벌인 북한 군사력에 대한 再평가 작업의 결과로 드러난 북한군의 증강실태도 철군 공약 번복을 불가피하게 한 요인이었다.
베시 장군이 예견했던 대로 韓美간에 합의된 15억 달러 상당의 「철군 보완조치」 패키지는 미 의회의 반대를 불러 카터의 철군계획에 장애물이 되었다. 추가 軍援(군원)의 차원에서 예산조치가 필요한 이 패키지는 당연히 美 의회의 동의가 필요한 사항이었다. 당시 美 의회는 朴正熙 정권에 의한 정치적 탄압과 인권유린 사태 때문에 反韓 감정이 격화되고 있었다. 특히 朴東宣 사건으로 美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프레이저 청문회가 본격화되면서 美 의회의 反韓 감정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 정부에 15억 달러의 추가 軍援을 제공한다는 것은 美 의회의 입장에서는 어불성설이었으나 카터 행정부는 이미 朴대통령의 한국 정부에 15억 달러의 「철군 보완조치」를 약속한 뒤였다. 따라서 이 「철군 보완조치」의 「선행」이나 「병행」이 없이는 철군은 불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철군은 그 자체로 한반도 전쟁 再發을 유발할 가능성이 없지 않은 데다가 15억 달러의 「추가 軍援」은 한국의 朴正熙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로 해석될 소지가 있었다. 카터의 「철군 보완조치」에 대한 美 의회의 승인은 무망해졌다.
“카터 체면 생각해서 제스처 써 주십시오”
1977년 5월 26일. 미군 철수 문제에 관한 韓美협의 두번째 회담이 끝난 후, 하비브 국무차관과 스나이더 대사가 청와대를 방문하여 朴대통령을 만났다. 면담 후 朴대통령은 이들을 접견한 내용을 기록해 두어야 할 것이라면서 鮮于煉 공보비서관에게 이렇게 구술했다.
<먼저 하비브 미국무차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고 한다.
“대통령께 이제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카터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카터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입장이 어렵다는 것을 각하께서 잘 좀 이해해 주십시오. 카터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입장이나 얼굴,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간청합니다만 뭔가 제스처를 좀 써 주십시오.”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스나이더 대사에게는 이미 이야기했지만 한국에 소위 인권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카터 대통령의 입장을 고려하고 이해해 달라는 이야기는 같은 정치인으로서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 내에 소위 인권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대통령에게 사면권은 있습니다. 나 자신 대통령으로서 사면권을 과거 몇 차례 행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민청학련 사건 때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 여부는 본인들, 즉 복역자들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개과천선하고 개전의 정을 보이고 또 복역 자세가 좋을 경우에는 내가 사면을 해왔고, 또 사면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복역자들의 자세가 마치 영웅이나 된 것처럼 경거망동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특히 귀하들이 온다니까 구세주나 오는 것처럼 기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면을 하겠소? 사면은 못 합니다. 그들이 왜 그런 자세를 갖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미국에서 소위 한국의 인권문제가 거론되고 제기될 때마다 미국정부가 ‘관심을 표명한다’는 식의 논평을 내니까 그들이 자세를 안 바꾸는 것 아닙니까?
국무부 같은 책임 있는 기관이 그 문제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알아보고, 그들이 법에 의해 재판을 받고 복역 중에 있다고 딱 부러지게 얘기를 했으면 이런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을 게 아닙니까.”>
미 대통령 중 존슨을 가장 좋아해
朴대통령은 평소 6·25 전쟁 때 파병을 결정한 트루먼 대통령과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맥아더 장군에 대해서는 “큰 은혜를 입었다”라고 말했다.
트루먼 死後에 미국의 트루먼 기념관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기념하는 글' 요청해 온 적이 있었다. 朴대통령은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 파병을 결정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중심으로 원고지 열 장 정도 분량의 글을 韓紙에다 직접 붓글씨로 써서 보냈다.
그는 자신의 재임시 거쳐간 미국의 대통령에 대해서도 카터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존슨 대통령을 좋아했다. 존슨 재직시 양국간의 관계가 원만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1968년 존슨 대통령이 재선 포기를 선언하던 날, 대통령은 대전에서 예비군 창설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가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몹시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포드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 재임시에도 양국은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두 대통령과 박 대통령과의 인간적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것은 카터 행정부가 들어선 뒤 취해진 미국의 對韓정책에서 비롯되었다. 朴대통령은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지금까지 미국이 우리 나라에 대해 일관된 지지 내지는 지원을 보내온 것은 한국을 동북아 지역에서 반공의 교두보 및 일본 수호의 전초 기지로 삼으려는 기본적인 전략에서였다”
카터 행정부는 냉전이 완화되고 소련이 유화적인 전략을 취하면서부터 한국의 그런 역할은 점점 줄어들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미국은 한국이 더 이상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은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朴 대통령을 접견한 미 외교관들은 한국의 국방력이 더 강해지면 北進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자주 언급했다.
朴 대통령의 카터에 대한 평가도 좋을 수가 없었다.
“카터는 세계 전략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미국 대통령이면 세계의 움직임을 바로 보아서 서로 조화시켜야 하는데, 카터는 선거 공약에서 이야기한 몇 가지 문제가 세계 전략에 어긋나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강행하려는 사람이다.”
“충효사상 실현은 우리만이”
1977년 7월6일. 큰 영애로 불리던 朴槿惠씨가 전국 도청 소재지를 순회하며 벌여 왔던 새마음 갖기 운동 및 자연보호 캠페인 공로자에 대한 감사장 수여식이 낮 12시 청와대 소접견실에서 있었다.
대통령은 근혜양과 함께 감사장을 받은 세 방송국 사장들과 간부들을 식당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하면서 환담했다. 이 자리에는 洪景模 KBS 사장, 金德寶 TBC 사장, 李桓儀 MBC 사장, 그리고 崔瑞泳(KBS), 洪斗杓(TBC), 朴槿淑 방송담당 이사 등이 배석했다. 환담은 약 1시간 50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대통령은 충효사상은 동양의 유교문화권 국가 중에서도 우리 나라만이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언론사 간부들에게 계속적인 협조를 당부했다.
“충효사상을 고취하는 새마음 갖기 캠페인과 자연 보존을 위한 캠페인은 참 고마운 일입니다. 부모에 대한 효심은 천륜이 아닙니까. 우리들 몸에 배어 있는 것입니다.‘충은 군주에 대한 무조건 복종이다’라는 것이 과거에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개념이고, 또 요즘 사람들도 그렇게 이해하는 모양인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각자 자기가 할 일을 다하는 것입니다.
조선일보 宋志英 씨가 언젠가 그의 글에서 ‘충(忠)이란 아랫사람이 군주에게 할 일을 다하고, 또한 군주는 아랫사람에게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했던데 옳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충효사상은 원래 동양 3국에 있던 것인데 중국은 중공이 들어앉아 이제는 틀렸고, 일본도 경제가 너무 발전한 데 반해 도덕률이 많이 타락했어요.
일전에 金永善 주일 대사가 전하는 말을 들으니 자기 아들이 다니고 있는 일본 게이오(慶應)대학 학생들이 ‘오늘의 경제 발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졌기 때문이며, 앞으로 또 전쟁이 나면 항복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는 나무로 치면 뿌리와 같은 것입니다. 뿌리만 있으면 기회가 올 때 다시 자라서 줄기도 나오고, 잎도 돋아나는 것 아닙니까.”
李桓儀 MBC 사장이 물었다.
“언제부터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허가하시겠습니까?”
“국민 1인당 소득이 2000달러가 넘으면 가능한 문제입니다. 지금 풀면 아이들 성화 때문에 가정마다 컬러 텔레비전을 사려고 할 것 아닙니까. 내년만 지나면 될 수 있을지 모르지, 1인당 GNP가 2000달러는 될 것 같으니까.
행복이란 경제적으로 어느 수준에 오르면 주위의 기풍과 본인의 바탕에 좌우된다고 합니다. 마음가짐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겁니다. 너무 화려한 것을 좇아서 사회 기풍을 흔들어 놓으면 안 됩니다.”
대통령家 족보에서 딸 이름 삭제
1977년 8월 12일. 朴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 추모 영화를 본 다음 관계 비서관에게 몇 가지 수정할 부분을 적은 메모지를 전하면서 말했다.
“참 수고가 많았네. 그리고 내가 메모한 이 내용을 참고하라고 문공장관에게 전해요. 지만이 어머니를 숭상한다고 해서 사실을 과대하지도 말고, 또 있는 것을 빼지 말도록 해요. 생전에 찍어 놓은 필름을 그대로 편집하는 것이 오히려 정직하고 좋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어때?”
1977년 8월 20일. 육 여사의 모교인 배화여고에서는 육영수 여사 기념관을 세우고 개관식을 가졌다. 대통령은 외부에 알리지 않고 비공식으로 이 행사에 참관했다.
저녁에 관계 비서관이 대통령 집안인 고령 박씨 족보를 초안하여 보고했다. 그는 일반 사회에서 바뀐 관례대로 딸들 이름까지 넣어서 대통령에게 올렸다. 대통령은 딸 이름은 연필로 지우고, 사위인 한병기씨 이름을 삽입해서 내려보냈다.
“전국이 제주도 생활 수준 같으면”
1977년 8월 23일. 대통령이 청와대 식당에서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들에게 저녁을 냈다.
식사가 끝나고 칵테일이 시작되면서 대통령은 화제를 바꾸었다.
“오늘 내가 국립박물관에 들렀더니 미국 CBS 기자들이 와 있더군. 의전수석이 소개를 해서 내가 ‘하우 두 유두’ 하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친구들은 한국에 와서 취재며 사진 촬영을 할 때는 좋은 것도 많이 찍어가면서, 돌아가서는 나쁜 장면만 보도한단 말이야.
근혜가 일본 TBS 텔레비전과 만난다고 하기에 내가 사전에 단단히 따지고 하라고 했어. 어떤 장면을 내고 안 낸다는 약속을 받은 다음에 만나라고 그랬지. 그 약속을 할 수 없다면 그만두라고 했어.
홍보라는 것은 잘해야지, 그렇지 않고 엉뚱한 장면만 내보내면 다음부터 누구와도 인터뷰를 안 할 생각이야.
참, 신문을 보니까 김 문공장관이 내년에는 문화 관계를 중점 홍보하겠다고 했다던데, 우리 홍보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역시 경제 발전을 홍보하고, 그런 다음에 다른 부문을 홍보해야지.”
이때 吳源哲 경제2비서관이 미국 CBS 기자들의 촬영 관계를 보고했다.
“CBS 기자들이 방위산업체를 찍겠다고 해서 M16 공장만 촬영을 허락했습니다.”
“M16만? 못 찍게 하려거든 하나도 못 찍게 하고, 찍게 할 바에는 극비 부분만 제외하고는 다 찍게 하지 그랬어. M16 공장만 찍어서 보도하면 한국은 겨우 소총이나 만든다고 할 게 아닌가.”
朴대통령은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요. 우선 미국과 일본 언론에 대해서 내 소감을 말하겠는데, 그들이 본국에 돌아가서는 한국에 관해 좋은 면은 보도하질 않고, 나쁜 것만 골라서 보도한단 말이야.
지난번 일본 텔레비전에서 한국을 무대로 드라마를 제작해 방영한 것을 보았는데, 고속도로나 공장 지대 등 한국의 발전상을 소개해야 할 부분은 잠깐 내보내고, 주로 남대문시장이나 뒷골목을 촬영한 것을 내보내더군.
국내 언론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겠네. 긴급조치만 해제되면 또 마음대로 쓸 걸.
辛道煥 의원이 샌프란시스코에 들렀을 때 우리 유학생 7명이 ‘조국이 곤경에 처해지면 우리 7명은 귀국하기로 결의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감명을 받아, 지난 20일 귀국하는 즉시 김포공항에서 우리 기자들에게 제일 먼저 이 말을 전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신문에는 일절 반영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오늘 산타클라라대학 파견 유학생들이 왔기에 그 이야기를 해 주었소. 같이 따라온 기자들이 내 말을 내는지 안 내는지 알아보려고 그 한국 학생들 얘기를 해 주었지, 내가 말하는 데야 안 낼까 하고 말이야.'
“우리 나라 그림 값이 너무 비싸다”
대통령은 화제를 그림으로 옮겼다. 식당 한쪽 벽에 걸려 있는 陸여사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대통령은 그 그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우리 나라 그림 값이 너무 비싼 것 같아. 집사람 그림을 정 교수란 분한테 부탁해서 그렸는데, 별로 유명한 분은 아닌가 봐요. 저 정도 그림도 1호에 2만 원 내지 3만 원은 줘야 하겠지?
추상화를 그려야 大家라고 하는 모양인데, 그 그림이야 내가 알 수가 있어야지. 언젠가 국전에서 추상화를 보고 설명하라고 했더니, 심사위원이 설명은 하지 못하면서 좋다고 느끼면 된다고 하더군. 피카소도 그림 그리다가 지쳐서 붓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추상화를 그렸을 거야, 하하하.”
대통령의 담화 가운데는 언제나 농촌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참새들이 농사에 해를 끼친다는 소리를 듣고 아침에 내무장관에게 전화로 그 이야기를 전했더니, 이미 공기총은 다 허가했다고 하더군.
그것만 가지고 되겠소. 엽총도 허가해 주도록 하시오. 그러면 꿩도 잡을 수 있지 않겠소.”
비서관들과 오랜만에 심각한 정국에 관한 얘기 없이 환담을 나누던 대통령은 동석했던 큰 영애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표정을 부드럽게 하며 말했다.
“보면 볼수록 제 어머니를 쏙 빼놓았어. 요즈음은 무슨 주제를 갖고 이야기하다가 내가 질 때가 많단 말이야. 시간만 있으면 독서하는 것 같고.”
비서관들과의 환담은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어졌다. 경제가 나아지니까 생활에 여유가 생긴다는 등의 이야기 가운데 고교 야구가 화제로 올려졌다.
“고교 야구가 대단하더군. 출전 횟수를 제한했더니 이름 없는 고교들이 마구 나타난단 말이야. 지난번에는 공주 촌놈들이 우승을 했어. 전혀 기대도 안 했는데 말이야.”
그러자 좌중에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충암이라는 처음 듣는 학교가 우승을 했고, 광주진흥이 결승까지 올라왔습니다.”
“광주진흥은 처음 듣는 학교야. 이러한 고교 야구를 통해서 영호남의 지방 대립이 완화되었으면 좋겠어.”
화제는 연극 이야기로 흘러갔다.
“연극도 많이 한다면서?”
그러자 비서실장이 몇 가지 예를 들어 말씀드렸다.
“연극 운동이 늘어났다는 것이야말로 좋은 일이지. 연극 운동이 늘어나는 것이야말로 경제가 좋아졌다는 증거입니다.
그 이유는 연극 운동이 수입이 되는 것보다 연극하는 사람들이 돈을 쓰는 편이기 때문에 사회 형편이 좋아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지.”
야구와 연극 얘기로 화기애애하게 진행되던 대화는 다시 정치 문제로 넘어가면서 조금 딱딱해졌다.
“신민당에서는 성명을 통해 8·15 사면 때 구속자를 석방하고, 또 對美 관계 등에 대해 대통령보고 책임지라고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책임지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대통령은 상당히 불쾌한 듯했다.
한 참석자가 “야당 성명에서는 으레 그런 것 아닙니까” 하고 말했더니 힐끗 그를 보면서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야당에서 지금 주장하는 대로, 오는 선거에서 보이콧한다고 안나오면 무소속이 많이 당선될 거야. 안 나오겠으면 그만두라고 하지. 공화당과 무소속이 합치면 국회 운영에는 별 차질이 없잖아.”
대통령의 이 말에 비서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신민당이 절대 보이콧할 리 없습니다” 하고 말해도 대통령의 기분은 끝내 풀어지지 않았다.
이날 朴대통령이 거명한 야당 정치인은 趙炳玉, 柳珍山, 李哲承, 金泳三 등이었다. 朴대통령은 金泳三씨는 “어리고 까분다”고 아주 틀려먹었다는 평이었다. 1975년에 자신이 金泳三씨를 만났을 때 “金泳三 총재가 金大中은 사기꾼”이라고 하더라면서 金大中씨에 대한 평을 대신했다.
李哲承씨를 좋아한 이유
1977년 8월 26일. 일본 민사당 가스가 고이치(春日辛一) 의원이 신민당 김수한 의원의 초청으로 방한하여 대통령을 만나 면담했다. 두 사람은 주고받은 내용을 서로 발표 안 하기로 약속했었는데, 다음날 가스가 의원은 귀국하면서 대통령이 자기에게 한 말을 기자들에게 발표해 버렸다. 그 내용이 실린 신문을 보고 대통령은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 사람, 신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구먼. 저러면 다음에는 만나 주지도 않고, 약속도 안 하겠어.”
야당 인사들에 대한 대통령의 평 가운데 李哲承씨에게 점수가 후했던 것은 회담 내용을 비공개하기로 한 약속을 李哲承씨가 가장 잘 지킨 이유도 있었다.
朴대통령이 사람을 평가하는 데는 예절을 제대로 지키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는 단정하고 정중한 몸가짐을 가진 사람을 좋아했다. 대통령 스스로도 예절을 철저히 지키고, 또 인사할 곳은 분명히 챙겼다.
1977년 11월 12일. 어제 전북 이리에서 열차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대통령은 오늘 직접 참사 현장을 둘러보았다.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이 원인 제공 책임자로서 함께 수행했다. 현장은 이미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대통령은 복구 작업을 둘러본 뒤 이 사고를 계기로 이리 지역의 개발에 힘쓸 것을 지시했다.
“김 회장이 내게 말한 대로 사건 전과 같은 복구를 할 것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이리 시민을 위해서 좀더 나은 작업을 하시오. 예를 들어 부서진 아파트를 지을 경우에는 전보다 더 편하게 짓고, 역 근처에 있는 파괴된 집을 고쳐 줄 때는 전보다 낫게 고쳐 주시오.
사건 때 시민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시민들을 안심시키고, 또 한국화약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훌륭한 이리시를 만들어야 합니다.”
“제 재산을 털어서라도 이리시 복구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김 회장은 마치 죄인이 된 심정으로 최대한의 복구를 약속했다.
독점과 경쟁의 배합전략
1977년 11월30일 수출의 날 기념식은 축제였다. 예상보다 3년을 당겨 100억 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朴 대통령은 이즈음부터 1980년대를 내다보는 구상을 하기 시작한다. 1970년대를 중화학공업 건설의 연대로 설정했던 목표를 달성해가고 있었으므로 다음 국가목표를 탐색하고 있었다. 행정수도를 공주 부근에 건설하여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완충하면서 국토이용의 효율성, 특히 物流의 편의를 극대화하는 국토재조 구상을 하는 과정에서 '가로림 프로젝트'(공식명칭 '중부종합공업기지기본구상')라는 거대한 계획이 마련된다.
朴正熙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은 독점과 경쟁을 적절하게 배합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모든 성공조직과 인간은 상반되는 요소와 성격을 균형있게 통합, 활용, 조정하는 능력을 가진다. 朴대통령의 인간됨 자체가 수줍음과 강인함, 엄정과 관용, 理와 氣의 양면성을 균형감각으로 통합한 모습이었다. 그는 전략과 정책에서도 그러했다. 1970년대 朴대통령의 중화학공업건설과 방위산업건설을 실무적으로 보좌하면서 이 사업들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던 吳源哲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박정희식 '독점과 경쟁의 배합 전략' 을 이렇게 정리했다.
<1960∼70년대에는 수요가 부족해서, 국제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국제규모에 미달하는 공장이라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국제경쟁력이 없는 공장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생산 제품은 국제 가격보다 비쌀 수밖에 없고, 따라서 수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럴 때는 하루 속히 국제 규모의 공장으로 키워나가는 것이 우선적 과제였다. 즉 독점은 국제경쟁력이 생기고 난 후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 독점 공장이 일단 국제규모화가 된 후에는 즉시 또 하나의 회사를 설립해서, 경쟁체제로 가야 한다는 것이 朴대통령의 방침이었다. 그래야만 善意의 경쟁이 일어나서, 품질향상과 가격引下가 이뤄지고, 국제경쟁력 강화가 계속된다는 이론이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석유화학과 종합제철」이었다>.
국토개편 작업
1973년1월12일 朴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 선언을 할 때 「제2의 석유화학과 제2의 종합제철」을 건설한다고 했다. 朴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에서 석유화학과 종합제철을 2대 기본공장으로 설정했다. 여기서 생산되어 나오는 제품이 한국 공업구조 전체의 기본 소재로 제공되기 때문이었다.
제2 석유화학 단지는 麗川에 건설되어 민간업체간 경쟁체제로 들어갔다. 종합제철만큼은 포항종합제철 하나만 존속되어, 독점체제로 남게 되었다. 포항 제철소가 확장을 계속하다 보니 입지여건상, 포항에서는 증설이 어렵게 되었다. 종합제철을 건설할 만한 다른 입지를 선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석탄과 철광석을 호주나 캐나다에서 수입하자면 20만톤급의 화물선을 이용해야 수송비가 낮아져서 생산원가가 내려간다. 20만톤급 화물선이 출입할 수 있는 항구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連關團地(연관단지)까지를 생각하면 1000만평의 공장용지가 필요하다.
이런 작업을 하고 있을 때, 吳源哲 수석은 국토개편계획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1976년부터 그는 「행정수도 건설계획과 이에 따른 국토개편 계획」을 수립중이었다. 이때 전국 인구의 재배치 문제가 큰 과제로 등장했다. 농촌으로부터는 계속 인구가 빠져 나오는데, 2000년대 초까지 1500만 명이 될 것이란 계산이 나왔다. 이중 기존 공업 기지 즉 포항, 울산, 창원, 巨濟, 구미, 여천, 溫山의 7대 공업 기지에서(한 기지(基地)당 앞으로 50만 명의 인구를 흡수한다고 계산하더라도) 이런 공업기지로 이주하게 될 총인구는 35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약 1000만 명에게는 새로운 공업지구를 건설해서 일자리를 마련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농촌에서 이주하는 인구는 서울 등 대도시로 모여들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加露林灣(가로림만)의 발견
吳源哲 수석은 국토개편작업을 하면서 획기적 개념의 공업지구를 구상하게 된다. 「새로운 개념의 중부공업지구」가 그것이었다. 吳 수석이 산파 역할을 한 것이 한국 기계공업의 메카로 불리는 창원공업기지 건설이었다. 吳 수석은 창원공업기지 규모의 공업기지를 10개 이상, 한 지구내에 건설하는 거대한 계획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지구엔 초기 400만 명, 최종적으론 8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아야 할 것이고 그러자면 약3억 평이라는 토지가 필요하게 된다. 20만톤급 대형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끼고 있어야 한다.
吳 수석은 그런 조건 조건의 땅이 있으리라고는 크게 기대도 하지 않은 채, 행운만 바라며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大항만을 건설할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는 海圖를 구해서 전국의 해안지대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환성이 터져 나왔다. 이상적인 장소를 발견한 것이다. 黃海바다에는 큰 항구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는데, 이렇게 이상적인 장소가 있다니, 이런 것을 天運이라고 하나 보다. 20만톤급 배 여러 척이 정박하는 데 문제가 없고, 배후에는 넓은 野山지대가 있었다.
필자는 全엔지니어링의 鄭鎭行씨로 하여금 곧 현지답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鄭씨는 창원공업기지, 구미공업기지의 토지계획안을 수립했고, 그땐 행정수도 계획안을 작성중이었다>
현지답사 후 확신을 갖게 된 吳수석은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각하! 오늘은 참으로 좋은 소식을 보고 올리겠습니다. 서해안에서 20만톤급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항만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朴대통령은 금새 그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어디야?”라고 되물었다.
“가로림(可露林) 만(灣)입니다. 가로림 만은 그 넓이가 바다와 같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만(灣) 안으로 막대한 양의 조수가 매일 드나들다 보니, 그 입구가 패여서 수심(水深)이 20미터가 넘습니다. 20미터의 수심이라면, 20만 톤의 화물선이 출입 가능합니다. 방파제도 필요가 없습니다. 부두안벽(岸壁)만 건설하면 되는데, 안벽을 만들 수 있는 길이도 9000미터나 됩니다. 실로 보기 드문 이상적인 항만자리입니다. 그 외에 10만톤급 선박이 정박 가능한 항만을 건설 할 수 있는 장소도 그 주위에 있는데, 이곳도 안벽 길이가 2000미터나 됩니다. 이것만 해도 대단히 큰 항만이 됩니다”
吳수석은 도면들을 펼쳤다. 도면에는 5개의 항만이 표시돼 있었다. 朴대통령은 이 도면들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각하! 이만하면 동양 최대의 항구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황해에서 가장 큰 항구가 상하이(上海)인데 그 수심은 10미터에도 못 미칩니다. 대대적인 준설 공사를 하더라도 5만 톤급 화물선 정도가 겨우 출입 가능합니다. 그 외에 항해에 있는 칭다오(靑島)나 텐진(天津)이나 다이렌(大連), 북한의 남포(南浦)항 등은 2∼3만톤급 항만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가로림만 주변에는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야산지대가 많습니다. 약 3억평 정도는 됩니다. 이곳을 정리하면 공장대지 또는 주택용지로 사용할 수가 있는데, 약 400만 명 내지 8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가 됩니다”
설명의 내용이 중대해 지자, 朴대통령은 얼굴을 들고 그를 직시한다. 吳 수석은 계속해 나갔다.
“각하, 싱가포르도 이만한 항구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싱가포르의 국토 면적은 685.4평방㎞로서, 약2억평 정도입니다. 이 안에서 약 300만∼4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경제 번영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로림만을 개발한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싱가포르의 1.5배 내지 2배가 되는 공업지대를 국토 안에 새로 건설한다는 결론이 됩니다. 환언하면 싱가포르의 두배가 되는 항만과 공업지구가 우리나라에 예속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국토 종합 개발 계획상의 효과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산업지구는 浦項, 蔚山, 釜山 창원 여수灣 등 東南海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이들 산업 벨트에서 생산되는 鐵鋼材, 석유화학제품 등의 소재나 원료 등은 긴 거리를 수송해서 서울이나 수도권 및 기타 전국에 산재하는 공장에서 가공한 후 또 다시 부산港 등으로 수송해서 수출하고 있습니다.
특히 철강재는 重量物이라서 수송비가 많이 듭니다. 이에 반해 앞으로 건설될 중부공업기지는 수도권이라는 대규모 消費地와 인접해 있음으로, 공업의 효율화를 가일층 촉진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현재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가장 큰 규모의 노동력 공급원은 호남권과 중부지방입니다. 중부공업기지는 이들 지방의 유휴 노동력을 흡수하는 데도 크게 작용할 것이며, 아울러 호남권과 충청권의 공업발전 및 지역개발에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중부공업기지를 중심으로 해서 북쪽은 수도권까지, 남쪽은 호남지방까지의 거대한 서부공업지대가 새로 구축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가로림 港灣을 중심으로 해서, 仁川항 아산만 비인만 長項항 群山항 木浦항 麗水항 등을 연결하는 경제적이고 편리한 해상교통망이 짜임새 있게 구성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나라의 공업지구는 서부공업벨트와 동남공업벨트로 양분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호남이나 충청도의 소외감도 완전히 소멸될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이 보고를 다 듣고도, 아무 질문이나 의견을 달지 않았다. “한번 가보도록 하지”라고 딱 한 마디 했다.
“과연 넓긴 넓구먼”
며칠 후 朴대통령 일행은 헬기를 탔다. 일행중에는 현대의 鄭周永 회장도 끼어 있었다. 도착지는 가로림만 북쪽 입구 모래둑. 허허벌판에 집 한 채 없고 사람의 발길조차 뜸한 곳인데 바람이 셌다. 가로림만의 물은 푸르다 못해 검정색이 돌고 있었는데, 물결치는 파도가 요란해서 넓은 바다 그대로였다. 넓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가로림만 입구의 남쪽에 돌산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朴대통령은 빙 둘러보고는 “과연 넓긴 넓구먼.”이라고 했다. 동쪽 멀리 끝자락에 높게 보이는 산이 있었는데, 산꼭대기에는 공군의 레이더 기지인 듯 둥근 안테나가 보였다. 朴대통령은 “레이더 기지가 있구먼.”이라고 했다. 일행은 바람을 피해, 모래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여기에는 몇 사람의 일꾼들이 메주덩어리 만한 돌들을 파내고 있었다. 朴대통령이 “무엇에 쓰려고 하오?”라고 묻자, 이들은 하도 깡 시골에 사는지라 박 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한 듯 일을 계속하면서 “규석(硅石)입니다. 품질이 세계 최상이지요. 몽땅 수출합니다”라고 대답했다.
朴대통령은 다시 헬기를 타고 가로림만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공군 레이더 기지에 착륙했다. 거기서 가로림만을 바라보니, 얕은 야산들이 해변까지 계속 이어 나갔는데, 가로림만의 윤곽은 너무 멀고 커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대통령은 ‘꼭 조선시대의 봉수대(烽燧臺)에 올라온 것 같구먼’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기지 내를 돌아보고 장병들을 위로했다. 대통령은 돌아오는 헬기내에서 金正濂 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건설부에 지시해서 우선 산업도로부터 건설토록 하지.”
이것이 이 날의 시찰 결과였다.
며칠 지나서 현대의 鄭周永 회장이 吳源哲 수석을 찾아와서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했다.
“내 나이 70인데 이제부터 큰 일을 또 한번 시작해 봐?”
吳수석이 “무슨 뜻이요?”라고 하니 鄭회장은 “종합제철을 내가 해볼까 해”라고 했다. 吳수석이“대통령의 내락은 얻은 것이요?” 하니 鄭회장은 빙그레 웃고는 답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검토는 해보지’라는 정도의 뜻은 받은 것 같았다. 당시 현대에서는 각종 대형 토목 공사, 많은 아파트 공사, 플란트 건설, 선박건조, 자동차 생산 등으로 철강재 수요가 많았는데, 앞으로도 수요가 급증할 것이다. 자금력도 있다. 이런 이유로 현대는 종합제철을 갖기 원했고, 그 뜻을 대통령에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吳수석은 그래서 朴대통령이 가로림만을 시찰할 때 鄭회장을 동행시켰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보았다. 여하간 鄭회장은 가로림만에 대해서 그 가치를 직감적으로 파악 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吳수석이 나중에 들으니 鄭회장은 지난번 시찰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로림만 입구에 있는 돌산(石山)을 구매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가로림만을 개발하자면 앞으로 많은 암석이 필요하게 될 터인데, 암석을 구하는 길은 그 돌산에서 얻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 후의 가로림 만
산업도로는 곧 착수돼서 완공을 보았다. 중부공업기지에 공업용수를 공급 하게 될, 삽교천의 담수호 저수지도 완공을 했다. 바로 그날 朴대통령은 세상을 떠난다. 그 후, 제2종합제철은 현대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포항제철 소속의 제2期 제철소는 중부공업기지에 입주하지 않았다. 포항제철의 제2공장은 「중화학공업육성계획」에서 여천 석유화학공업基地의 확장 예정지로 잡아놓았던 光陽에 건설되었다. 그 대신 加露林灣에는 현대정유와 현대석유화학, 그리고 삼성석유화학이 들어섰다. 종합제철과 석유화학의 입지가 서로 바뀌어진 것이다.
2004년 9월. 吳源哲 수석은 加露林灣으로 가서, 朴 대통령이 시찰했던 바로 그 장소를 다시 찾아가 보았다. 그곳 바닷가, 종합제철소 예정지였던 곳에는 현대와 삼성의 석유화학공장들이 널찍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작은 항만 하나가 건설되어 있었다. 그리고 항만 입구에는 해안 경비용 탱크 한 대가 加露林灣을 혼자서 지키듯, 포신을 높이 들고 버티고 있었는데, 光化門 앞 해태像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2004년 11월 호주 월렁궁 대학에서 개최된 『朴 대통령 서거 25주년을 기념하는 포럼』때의 일이다. 회의는 朴대통령이 한 30∼40년 전의 일에 대해 贊否가 엇갈리는 논쟁을 계속했다. 吳源哲씨는 “미래에 대한 朴대통령의 이야기도 나와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최측에 부탁을 해서 회의종료 전 30분의 시간을 얻어 즉석 강연을 했다. 제목은 「가로림 프로젝트」였다.
2030년의 가로림만 特區
吳源哲씨는 최근에 ‘가로림만 프로젝트’에 애착을 보인다. 그는 1978년12월에 만들어졌던 ‘중부종합공업기지기본구상’이란 보고서(중화학기획단 작성)를 자주 펼쳐 보면서 朴대통령이 10.26 사건을 맞지 않고 이 거창한 계획을 밀어붙였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본다. 그는 아래와 같은 가상 시나리오를 만들어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지금 실천에 들어갔을 때의 미래상을 실감 있게 그렸다.
<우선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한다. 중부공업지기가 완성되어, 가로림 自由經濟特區, 즉 가로림 FTS (Free Trade State )라는 행정구역이 신설되었다. 여기에는 州정부가 있어 국방과 외교는 本國 정부에서 맡고 나머지 행정은 州정부 장관이 통괄하는 체제가 수립되었다. 2030년 가로림 FTS 장관은 현황 브리핑을 이렇게 시작한다.
『가로림 FTS 의 기획은 1978년에 작성된 「중부종합 공업기지 기본구상」 이라는 것입니다. 朴正熙 대통령 시대에 작성된 것인데 당시 행정수도 이전 기획과 맞물려 거대한 공업지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朴대통령 서거 후 25년간 방치돼오다가, 행정수도 移轉 문제가 2004년에 되살아남으로써 이 문제도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1990년대부터 중국에서는 鄧小平이 집권하고 개방정책을 개시한 후부터 중국의 경제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해나갔습니다. 황해연안 즉 大連, 天津, 靑島 특히 上海를 중심으로 한 양자강 연안은 일진월보(日進月步), 즉 하루가 다르게 공업화되어 갔습니다. 그 결과 막대한 수출, 수입 물량이 발생해서 머지 않은 장래에 황해바다는 세계 굴지의 물량 집산지(集散地)가 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확실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지는 上海港으로 변해갔습니다. 특히 중국이 10만톤급의 컨테이너선이 정박 가능한 上海 洋山港을 건설하고 난 후로부터, 그 양상은 뚜렷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만회하고자 부산항 확장 등을 시도했지만, 황해연안의 중국항구와는 거리가 멀어서 중국에서 발생하는 물량을 처리하는 데서 차차로 上海港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2005년입니다.
원유값이 배럴당 60달러 선으로 급등을 했습니다. 원유값이 올라가면 갈수록 수송비가 올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수송선박을 대형화하는 것뿐입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上海港보다 규모가 한 단계 더 큰, 20만톤급 대형 선박이 정박 가능한 대규모 항만을 개발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항만 근처에 대규모 공업지구도 설치해야 되겠다”는 데로 의견이 접근해갔습니다.
가로림 FTS의 기본 이념
세계는 계속 국제화가 이뤄지고 있는데, 당시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이 발생했는데도, 적절한 대응을 못하는 상태가 계속돼 나갔습니다. 그 결과 경제사정이 악화 돼서, 국민생활이 어려워지고 국민들은 장래에 대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국가 발전 방안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럴 때 주목을 받은 것이 싱가포르의 발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만 제거만 한다면 싱가포르와 똑같이 발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방안으로 「싱가포르와 똑같은 성격의 자유경제특구를 시범적으로 만들어 실시해보자」 라는 안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는 가로림 FTS 건설에 총력을 경주해 났습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나가고 현재는 2030년이 됐습니다. 현 단계는 가로림 FTS의 건설 공사는 모두 끝내고, 그 여건을 싱가포르化하는 작업이 진행중입니다. FTS 에서는 금융, 무역, 상거래, 제조업, 병원, 학교, 종교, 심지어 토지취득, 이주, 출입국 모든 분야가 싱가포르와 똑같이 자유입니다. 사업도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면 됩니다. 그 결과 세계 각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교, 병원, 은행, 기업 등이 속속 입주해오고 있습니다.
이 가로림 FTS에서는 공용어로 영어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우게 된, 주민 모두가 영어로 통화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은 완전히 국제화된 선진국 수준이며, 능률면 에서나 서비스면에서 세계 최상급입니다. 경험이 많거나 기술을 갖고 있는 고급 인력도 세계 각지로부터 여기에 와서 일하고 있는데, 단순기능밖에 능력이 없는 노무자도 여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들 노무자의 노임은 각자의 出身國보다 많이 받으면, 더는 바라지 않기 때문에, 가로림 FTS에서는 비교적 값싸고 능력 있는 외국 노무자를 필요한 만큼 고용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노사문제도 없습니다. 불평이 있는 직원은 그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옮기면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불법행위와 질서유지는 주정부가 책임지고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싱가포르와 꼭 같습니다』
상해항을 압도한 이유
한 사람이 “가로림 FTS가 上海港과 비교해서 유리한 점이 무엇이라고 봅니까?”라고
질문하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중국과 인도 등 개발도상국에서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고,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지자, 석유의 수급문제가 세계적으로 심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2005년도에 원유값이 배럴당 60달러선이었던 것이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현재 에너지 문제와 수송비 문제는 국제 경제면에 큰 영향과 변화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로림 FTS 는 싱가포르나 上海 등 다른 항만도시와 비교해서 아주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돼 있습니다. 우선 가로림 FTS에서는 본토(本土: 대한민국 전체)로부터 전기를 공급받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전기는 석유에 거의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전기값은 아주 저렴하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있습니다. 그 외에 LNG나 석탄 등 각종 에너지나 용수도 싱가포르나 상해 홍콩보다 싸게 공급됩니다. 특기할 사항은 그간 수에즈 運河가 확장이 돼서, 이제는 20만톤급의 컨테이너선도 수에즈 운하를 사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上海港은 10만톤급이 상한선입니다. 가로림 FTS의 경쟁港인 상해의 洋山부두에는 방파제가 없습니다. 풍랑에 대처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上海는 태풍이 자주 통과 하는 곳에 위치합니다. 태풍이 오는 계절이 되면 항상 비상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장관은 항만 쪽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저기 컨테이너港의 작업광경을 보십시오. 크레인이 바삐 움직이면서, 배에서 컨테이너를 들어 올려서 行先地 별로 분류를 해서, 야적장에 옮겨놓고 있습니다. 과거보다는 처리능력이 몇 배로 빨라졌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20만톤 배는 떠나고, 다음에는 2~3만 톤의 소형선박 여러 척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크레인이 알아서, 야적장에 내려놓은 컨테이너를 행선지 별로 실어줍니다. 소형 선박들은 제각기 목적지를 향해 운항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2~3만톤 배들은 주로 중국선박인데 중국의 각 지방에서 컨테이너를 모아 싣고 가로림 만으로 들어옵니다. 컨테이너를 내려 놓고는, (20만톤의 대형 컨테이너선이 세계 각국에서 운반해온) 컨테이너를 바꿔 싣고는, 중국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20만톤 컨테이너선은 母船격이고, 2~3만 선박은 子船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가로림 항구는 이러한 중계작업으로써 허브(Hub) 역할을 하는 母港인 것입니다. 이것이 東北亞의 허브(Hub) 의 진면목입니다.”
그 외에 몇 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본토에서 취업하기 힘든 노무자도 FTS에 오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가령 본토에서 정년 퇴직한 사람도 여기에 오면 - 급료만 좀 적게 받는데 동의한다면 - 일자리는 구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이치로 본토에서 취업하기 힘든 노무자도 여기서는 급료만 해결되면 취업은 가능합니다. 이것이 FTS에서의 고용과 취업의 權利입니다. 그리고 외국 노무자도 자유롭게 고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 가로림 FTS에서는 국제적인 노임이 유지될 수 있어, 본토보다는 임금이 낮아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근로자의 생활이 본토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로림 FTS 주민의 생활 여건은 - 본토보다 좀 적은 급료를 받더라도 - 안정되고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주정부(州政府)는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FTS에서 생산이 안 되는 생필품 일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데- 장기적으로 그리고 대량 공급받는 방식의 계약으로 구입하기 때문에- 가격이 싸지게 되며, 더욱이 관세율도 낮고, 농민들의 저항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이들이 가능해 집니다.
『예술분야, 운동분야, 그리고 각종 직업분야의 교육도 기술교육과 같은 개념, 즉 시민으로서의 “일반 교양 교육”은 중등교육으로 끝내고, 그 후 각종 직업(職業) 고등학교 또는 특기(特技)고등학교에서 각자의 능력을 개발하는 교육을 받고 난 후, 이를 통해 사회에 공헌한다는 개념하에 교육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학, 대학원까지 공부를 하고자 하는 학생은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어느 면에서는 독일과 유사합니다.』
가로림 FTS 주민은 물론이지만 본토에 있는 학생들까지도 가로림 FTS에서 교육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영어는 자연적으로 배우게 될 것이고, 국제 수준의 교육을 받게 되고, 취업도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本土의 교육방법이나 학교의 수준도 자연히 변해서, 국제수준화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로림 FTS」가 本土에 주는 영향
『가로림 FTS가 본토에 주는 영향도 막대합니다. 본토에 위치하는 공장들은 천연원료로부터 기초소재, 중간소재, 중간부품, 부속품 그리고 최종제품까지 필요한 물건을 가장 싼 값으로 가로림 FTS에서 구입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영토내에 위치하는 곳에서 구매하게 되니 운송비도 크게 절약이 됩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工業들은 과거에는 주로 東南海 지방에 편중돼 있었는데 가로림 FTS가 가동하고부터는 경기지방(首都圈)부터 호남지방까지, FTS를 母港으로 해서 완전히 海上으로 연계화 돼서 西海岸일대의 공업화와 지방발전에 큰 활력을 불러 넣고 있습니다. 특히 FTS에 새로운 종합제철회사가 설립됨으로써, 제철사업도 경쟁체제로 들어갔으며, 이에 따라 重量物인 각종 철강재가 浦項이나 光陽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공급 받을 수 있게 되어서 수송비가 인하되고, 철재값도 싸 졌습니다.
「기능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고등학교」가 직종별(職種別)로 완비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연간 1만 명 이상의 새로운 기능사가 양성돼서 현장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가로림 FTS의 인적, 기술적 대들보입니다. 이들은 현장에 투입되자마자 즉시 제 구실을 하게 되는데, 계속 근무하다보면 名人이 될 것입니다. 뜻있는 기능사는 창업을 해서 경영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 중소기업체 사장들은 자기 회사가 생산하는 제품의 품질을 필사적으로 향상시켜 나갈 것이고, 新제품도 개발해서 생산할 것입니다. 가로림 FTS에는 기능사 출신이, 기업가로서 성공한 예가 여러 곳 있습니다. 기능사 일부는, 취업도중 “2년제 전문 공과대학”으로 진학하기도 하고, “4년제 특성화(特性化) 공과대학”에 입학해서 이론 교육을 더 받기도 합니다. 「특성화 공대」에는 전공분야가 한 종류뿐입니다. 電子工業이 전문인 「특성화 공대」의 예를 들자면, 대학의 모든 학생은 전자공학을 배우는 학생뿐이고, 교수도 전원이 전자공학에 관계되는 분야를 전공했으며, 시설은 최신 연구 장비가 완비된, 전자공학 계통의 각종 분야별 연구실들입니다. 이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專攻과목이, 전자공업의 여러 분야별로 세분되어 있는데, 이 점이 “일반 공과대학의 전자공학과”와 다릅니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특성화 공대”는 시설이나 교수면에서, 電子分野에 관해서는 최고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이러한 여건하에서 최고 最新의 교육을 받고, 충분한 실습 硏磨를 마치고 난 후 현장으로 진출해서 “생산되는 제품의 품질 향상”과 “공장 운영의 합리화”에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이상이 가로림 FTS의 기술자 양성에 대한 시스템인데, 주 정부는 이들 양성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기술 고등학교의 학비는 無料이고, 특성화 대학의 학비는 “정부 대여금(貸與金)제도”를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 기술계통에 진학하는 학생은 학비걱정은 할 필요가 없고, “과외공부”도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졸업 후, 취업은 보장됩니다. 이들 기술 인력은 가로림 FTS에서는 존경을 받는 대상입니다』
장관은 가로림 프로젝트의 확대판 청사진을 제시하고 설명을 마무리했다.
“가로림 FTS의 “모델”이 성공을 하고, 계속 발전해 나간다면, 다음 순서로눈 가로림 FTS의 면적을 점차로 확대해 나갈 것이며, 종국에 가서는 본토 전부에게 적용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FTS 國家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난 후, 북한 땅에도 적용하는 것이 「21세기에 사는 우리민족이 꼭 이룩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1970년대에 수립된 朴대통령의 계획이 21세기 중반에서 이렇게 성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복지국가 건설의 꿈은 이뤄진 것 아닙니까“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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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2000년에 노동당 비서 김용순에게 지시하여 김일성-김정일 家門의 역사를 ‘金朝實錄’이란 이름으로 기록하도록 명령했다. 김정일은 “형편 없는 조선조 시절에도 李朝實錄을 편찬하였는데 위대한 김일성 시대에 金朝實錄이 없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면서 통전부에 편찬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김용순은 통일전선부에서 10여명의 필진을 편성하여 실록편찬 작업을 시작했는데, 집필진에는 1980년에 월북한 이광호도 포함되어 있다. 사회과학원에서 편찬을 맡지 않고 통전부에서 하는 것은 實錄 자료에 비밀이 많기 때문이다. 金朝實錄 집필진은 2년이 걸려 김일성 실록을, 그 뒤 다시 2년간 김정일 실록을 만들었는데 아직 출판은 하지 않고 있다.
김정일이 金朝實錄이란 왕조시대의 용어를 쓴 것은 북한정권이 朝鮮朝의 봉건잔재를 온존해가고 있는 守舊세력이라는 한 증거이다. 김정일은 조선조의 왕이고 주체사상은 조선조의 주학의 명분론은 다 같이 현실을 떠난 도그마로서 공통점이 많다. 경제에 무능한 점에서도 그렇다. 조선조적 후진성은 북한에서 아직 살아 있다. 김정일 집단이란 역사의 후진세력은 남한의 守舊세력인 사이비 좌파와 손잡고 선진국 클럽을 향해 뛰고 있는 대한민국을 압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에선 후진세력과 선진세력이 左右대결이란 형식을 빌어 결투하고 자학 이데올로기이며 노동당 간부는 조선조의 양반계급인 셈이다. 김정일의 명분론과 주자있는 셈이다. 黃長燁 씨는 김정일 정권을 수령독재정권이라고 표현한다. 수령 한 사람을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金朝實錄이란 후안무치한 冊名은 김정일이 북한을 개인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잘 나타낸 셈이다.
이코노미스트誌의 2006 한국 전망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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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2-19, 21: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