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청연>을 보고
역사는 일도양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의 평가는 무서운 것이다.
1.
<어느날 소녀는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본다. 그 순간부터 소녀는 자기도 하늘을 날게 되기를 꿈꾸게 된다. 그 소녀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로 알려진 박경원(장진영 분)이다.
세월은 흘러 1920년대 중반, 박경원은 일본 다치가와비행학교의 조종사 후보생이 된다. 낮에는 비행학교에서 고된 훈련을 받고, 밤에는 대리운전(그때도 대리운전이 있었나?)으로 학비를 버는 그녀 앞에 잘생기고 섬세한 부자집 아들 한지혁(김주혁 분)이 나타난다.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를 읊조리는 한지혁은 조선 제일의 부호의 아들. 나약한 식민지 지식인의 전형인 그는 야무지게 자신의 꿈을 실천해가는 박경원에게 매료되지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일본군에 입대한다.
다시 세월이 흐른다. 다치가와비행학교 내에서 손꼽히는 비행사로 성장한 박경원은 전일본비행대회 출전을 앞두게 된다.
그러나 외무대신의 애인인 기베(유민 분)라는 일본인 여류비행사가 막강한 빽을 무기로 그녀의 출전권을 가로챈다.
기베는 박경원에게 연습상대가 돼 달라고 한다. 두 여류비행사는 불꽃튀는 경쟁을 벌인다. 기베의 비행기가 추락하자 박경원은 폭박직전의 비행기에서 기베를 구해낸다. 이후 기베는 박경원의 절친한 친구이자 후원자가 된다.
박경원은 결국 전일본비행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그 사이 일본군 기상관측장교가 된 한지혁이 다시 그녀의 앞에 나타나고,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박경원은 모국방문비행을 결심하고 이를 성사시키려 재일동포 사회를 돌며 모금운동을 벌이지만,동포들의 반응은 썰렁하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 국회의원이 된 한지혁의 아버지와 친일파 박춘금이 한지혁이 근무하는 다치가와의 일본군 기지를 방문한다. 재일동포신문의 기자로 박경원을 취재하기 위해 친구 한지혁의 집에 머물고 있던 김상수는 한지혁의 아버지와 박춘금을 사살한 후 자결한다. 한지혁과 박경원은 김상수의 공범으로 몰려 헌병대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한다.
간신히 석방된 박경원은 당국으로부터 비행을 그만 둘 것을 강요받는다. 그녀가 비행을 계속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일본 외무성의 후원 아래 일본-조선-만주를 잇는 일만친선비행에 나서는 것이다.
결국 박경원은 일장기를 흔들며 애기(愛機) 청연(靑燕)에 오른다. 그의 비행기에는 처형된 한지혁의 유골함이 함께 한다. 청연은 고국비행의 꿈을 안고 푸른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르지만, 그것이 박경원의 마지막 비행이었다. 악천후를 만나 고군분투하던 박경원은 애기와 함께 산화한다>
2.
영화 <청연>을 봤다. 일제 식민지 시절, 식민지 백성이자 여성이라는 이중의 억압을 뚫고 자신의 꿈을 실천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한 선각적 여인의 삶을 다춘 이 영화를 보며, 나는 내내 ''역사'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역사는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1) 영화에서는 한지혁의 아버지나 박춘금 같은 친일파도 나오고, 그들을 사살한 후 '조선적색단 만세!''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장렬하게 자결한 김상수 같은 애국열사도 나온다. 그리고 한지혁과 박경원을 붙잡아다가 무자비하게 고문하는 일본헌병도 나온다.
그들의 모습은 어린 시절 국사교과서에서, 3-1절이나 광복절이면 어김없이 방영하던 항일 드라마나 영화, 혹은 소설에서 흔히 접해왔던, 일본제국주의자, 친일파, 항일투사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렇게 정형화된 인간군상 이외에도 다양한 인간들이 사는 것이 이 세상이고, 역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박경원은 일본 외무대신도 참석한 공식석상에서 '조국방문비행'운운하다가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히고, 박춘금 등 피살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일본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지만, 결국은 일장기를 흔들며 일본 외무성의 후원 아래 일본의 식민지배와 대륙침략을 합리화하는 일만친선비행에 나섰다가 일본의 하늘 아래 산화한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친일파인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면서 되는대로 세상을 살던 한지혁은 아버지의 강요로 일본군 장교가 되지만, 어려서부터의 꿈을 쫒아 기상관측장교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인 친구의 거사 때문에 아버지를 잃고도 그의 공범으로 몰려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리고 이 영화 속에는 민족을 떠나 비행사로서, 여자로서 우정을 보여주는 기베, 제자인 박경원을 인정하고 그녀의 마지막 비행에서 그녀와의 무선교신을 맡아 그녀를 살려보려 애쓰는 교관 도쿠보(나카무라 토오루 분) 같은 선한 일본인도 나온다.
세상은 선인(善人)과 악인(惡人)만 사는 것이 아니다.
나치 시대 독일의 역사는 히틀러나 히믈러 같은 괴물들과 무고한 유대인 희생자들과 숄 자매와 같은 용감한 저항운동가들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나치 정권이 가져온 안정과 국가적 위신의 회복과 경제적 번영에 만족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치 정권의 야비함과 잔혹성에 대해 못마땅해 했던, 그러나 결코 적극적인 저항으로 나가지는 못했던 수많은 보통 독일국민들을 빼놓고는 그 시대의 독일을 제대로 구성할 수 없다.
일제시대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제국주의자와 친일파와 항일투사들 사이에, 박경원이나 한지혁 같은 회색지대의 인간들이 수없이 많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들 회색지대의 인간들은 일도양단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극중의 한지혁을 보자. 공식적인 기록만 놓고 본다면, 그는 친일파 두 명과 몇 명의 일본군인을 사살한 김상수 의거의 공범으로 처형된 독립운동가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분류돼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전두환 정권시절부터 지하에서 은밀하게 재평가되다가 노무현 정부에 와서 정식으로 서훈을 받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그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표류하던 나약한 지식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극중의 박경원도 마찬가지다. 일장기 흔들며 일만친선비행에 오른 그녀는 친일파로 비난받기 딱 알맞다. 하지만 '조국방문비행'운운하다가 요시찰인물로 감시받고, 김상수 사건으로 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었다는 것 때문에 '그녀는 내심 민족의식이 투철했었다'거나, 더 나아가 '비밀독립군요원이었다'는 해석을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실제와는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가?
영화 속에서 일장기를 흔들고 일본 외무성이 후원하는 비행을 해야한다는 것 때문에 고민하는 박경원에게 한지혁은 이렇게 말한다.
'조선이 너한테 해 준게 뭔데?'
사실 그랬다. 나라는 그녀가 열살 때 망했으니까, 시골 소녀에게는 '나라'가 무엇인지 알 기회도 없었으니까....
영화 속 박경원에 애기에 오르며 일장기를 흔드는 장면에서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고개를 숙였던, 방송에 나와 '우리나라 일장기가...'운운했던 손기정이 떠올랐다.
박경원 같은 사람들은 일제 시대에 무수히 많았다. 어릴 때,혹은 나라가 망한 다음에 태어나, '대일본제국'을 자신의 나라로 알고 자라난 사람들, 일본인들의 차별 속에 때로는 자신이 '조선인'임을 느끼지만 결국은 그 질서 안에서 자신의 삶을 엮어가야 했던 지식인,언론인,학자,기업인,교육자,예술인,군인,관료들....
물론 사람에 따라, 시기에 따라, 체제에 순응한 정도에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의 방식이 옳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영화 <청연>을 보며 '그런 삶의 방식도 있었다는 것, 아니 오히려 그런 삶의 방식이 대부분이었다는 것, 그런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고뇌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던, 태극기 대신 일장기를 흔들 것을 강요당해보지 않은 후인들이, 우리말 대신 일본말을 쓰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당해 보지 않았던 후인들이, 겉으로 드러난 사실들만 가지고 그들을 단죄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일일까?
'나중에 태어난 행운'을 만끽하면서 먼저 태어나 진흙탕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던 선인들을 비난하고 단죄하는 것보다 더 비열하고 방자한 일이 있을까?
영화속 박경원,한지혁 같은 사람들의 삶이 일제시대 대다수 보통사람들의 삶이었다. 인정하기 싫은 일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아마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고 해도 그들의 삶과 그리 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2) 그러면서도 나는 다른 이름들을 떠올렸다.
유관순,이범석,김산,김학철,김준엽,장준하.....
10대 중반,혹은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분들이다.
비행사로는 박경원을 앞선 최초의 여류비행사로 알려진 권기옥,안창남(최초의 한국인 비행사),최용덕 같은 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 분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했던 분들이다.
어린 시절에 이 분들은 내 삶의 모범이었다. 이와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아무나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 때문에 나는 그 분들이 더욱 존경스럽다.
그리고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적어도 그 분들의 치열했던 삶을 모범으로 삼고, 그 몇십분의 일이라도 따라 배우려 노력하며 살고 싶다.
회색지대에서 살았던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에 대해 인간적인 이해를 보이는 것과, 견결한 삶을 살았던 분들을 내 삶의 모범으로 삼는 것이 모순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3) 아울러 사람은 모름지기 한순간 한순간 역사의 무서움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선각자적인 치열한 삶에도 불구하고, 일장기를 흔들며 일본 정부가 후원하는 비행에 올랐다는 것 때문에 박경원은 사후(死後) 70여년이 넘도록 '친일파'라는 시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도 5000년 이 겨레의 찌든 가난을 몰아내고 선진국으로의 발판을 닦았다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일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이 어른이 되기 전에, 혹은 태어나기도 전에 '나라'가 망했어도, 그 사실은 면죄부가 되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엄연히 존재하는 조국 '대한민국'에 등을 돌리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죄일까? (물론 '대한민국'이 자신의 조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그리고 이 나라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해, 자손들에게 다시 한번 망국민의 한스러운 삶을 되풀이하게 한다면, 그 죄는 또 얼마나 큰 것일까?
* 영화 <청연> 속에서 박경원과 한지혁의 사랑은 픽션이다. 박춘금 등 암살사건도 픽션이다. 박경원은 고이즈미 당시 체신대신(현 고이즈미 일본총리의 할아버지)과 염문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의 친일행각은 영화 속에 그려진 것보다 더 심했을 수도 있다.
역사는 일도양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의 평가는 무서운 것이다.
그런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던, 태극기 대신 일장기를 흔들 것을 강요당해보지 않은 후인들이, 우리말 대신 일본말을 쓰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당해 보지 않았던 후인들이, 겉으로 드러난 사실들만 가지고 그들을 단죄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일일까?
'나중에 태어난 행운'을 만끽하면서 먼저 태어나 진흙탕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던 선인들을 비난하고 단죄하는 것보다 더 비열하고 방자한 일이 있을까?
'나중에 태어난 행운'을 만끽하면서 먼저 태어나 진흙탕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던 선인들을 비난하고 단죄하는 것보다 더 비열하고 방자한 일이 있을까?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