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보다도 희망을 못주는 민주투사

여론조사로 본 1980~2006년 '새해 살림살이 전망'. 전두환 시절보다 노무현 시절에 희망이 약해졌다.
1.

모 여론조사연구소에서 연하장을 보내왔다. 그 연하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2006년 새해에 우리의 살림살이가 ‘더 좋아질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26%, ‘나빠질 것’이라는 사람은 25%,‘비슷할 것’이라는 사람은 47%로 간발의 차이로나마 낙관론이 앞서가는 poll을 전해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나도 기뻤다. ‘이 고약한 세상, 그래도 우리 국민들이 앞날에 대해 낙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 연하장에는 <1979년 이래 해마다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왔습니까?>라는 제목 아래 1979년 이후 매년 이듬해 살림살이,경기전망,실업자,노사분쟁,국제분쟁 등에 대한 국민들의 전망을 조사한 결과가 함께 실려 있었다 (정말 대단한 연하장 아닌가?).
만일 누군가가 당신에게 ‘댁의 살림살이가 내년에 올해보다 더 좋아질 것으로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아마도 지난 한 해 동안 수입과 지출, 자기가 다니는 회사나 자신이 운영하는 업체의 금년 한 해 수입 및 최근의 실적, 친한 친구와의 술자리나 주변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나오는 이런 저런 얘기들을 종합하고(그것이 과학적인 엄밀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다가 ‘내년에는 좀 잘 풀렸으면...’하는 기대를 얹어 답변할 것이다. 물론 언론 등을 통해 접한 지난 한해 동안의 각종 경제관련 지표들이나 경제연구소들의 경제전망도 참고할 것이다.

‘댁의 살림살이’라고 하는 질문은 기본적으로 극히 사사로운 것이지만, 그에 대한 답변 안에는 나라 전체의 정치-경제-사회 상황에 대한 판단이나 기대치도 어느 정도는 녹아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질문은 미래에 대해 얼마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느냐를 묻는 것이다. 그에 대한 국민들의 대답은 ‘(단기)희망지수’라고나 할까?

2.

연하장의 표는 지난 27년, 거의 한 세대 동안 이 문제에 대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해 왔느냐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저 좌파 지식인들과 언론들이 입버릇처럼 ‘저 암울했던 군사독재정권 시절’이라고 말하는 1980년대, 그 ‘희망지수’는 보통 50%를 웃돌았다.

1979년말 국민들이 본 1980년의 기대치가 극히 높게(60%) 나타난 것은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 사후 민주주의의 도래에 대한 기대치가 ‘댁의 살림살이’에 대한 기대에도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하지만 그 기대치는 광주사태를 겪으며 ‘서울의 봄’이 무산된 1980년에도 50%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1982,83년을 제외하면 이 기대치는 1980년대 내내 50%를 웃돌았다.

그러나 ‘댁의 살림살이’에 대한 기대치는 1991년 50% 아래로 떨어진 후, 단 한 번도 50%를 넘지 못했다. 1998년 16%, 2001년 17%, 2005년 14%라는 수치는 참담함의 극치이다.

그저 세상을 '민주 vs 반(反)민주'라는 잣대만으로 보는 인간들은 몰라도, 대다수 국민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살림살이와 관련되는 한, '저 암울했던 군사독재정권시절'보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 아래서 살아가는 것을 더 암울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3.

맹자(孟子)는 ' 항산(恒産)이면 항심(恒心)'이라고 말했다.
<안정된 생업(恒産)이 없으면서도 안정된 마음(恒心)을 품는 것은 오직 선비에게만 가능한 일이고, 백성으로 말하자면 안정된 생업이 없으면 안정된 마음도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안정된 마음이 없으면 방탕하고(放), 편벽되고(僻), 사악하고(邪), 사치한(侈) 짓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마침내 죄를 저지르게 한 다음 좇아서 처벌한다면 이것은 백성을 그물로 긁어서 투옥시키는 짓[罔(=網)民]입니다. 어찌 어진 사람이 군주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을 그물질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밝은 군주는 백성의 생업을 제정해 주되,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족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건사하기에 족하게 하여, 풍년에는 1년 내내 배부르게 하고 흉년에는 사망을 면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백성들을 선하게 만들엇으니, 그런 까닭에 백성들이 따르기 쉬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백성의 생업을 제정해 줘도,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건사하기에 부족하여 풍년에도 1년 내내 고생만 하고 흉년에는 사망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부족하여 걱정하니 어느 겨를에 예의를 차리겠습니까

...늙은이가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젊은이가 굶주리지 않고 춥지 않을 수 있는 정치, 이렇게 하고서도 왕도를 펴지 못하는 자는 아직 없었습니다.'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上)]-책세상 문고 '맹자' 안외순 옮김>


맹자의 말은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우리의 오랜 속담을 떠오르게 한다. 아울러 어느 시대나 위정자의 첫째가는 과제는 '국민들을 먹고 살게 해 주는 것'임을 다시금 확인케 해 준다.
맹자는 '안정된 생업(恒産)이 없으면서도 안정된 마음(恒心)을 품는 것은 오직 선비에게만 가능한 일'이라고 했지만, 선비들도 '항산(恒産)이라야 항심(恒心)'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만 해도 최소한 중소지주들이 아니었던가?

또 지난날 경제적 유혹에 자신의 뜻을 꺾은 정치인, 지식인, 관료들도 없지 않다.

정말 '군자(君子)'라고 칭할 수 있는 고결한 인격자가 아닌 한에는 백성이건, 선비이건,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일 것이다.

위의 여론조사결과는 노무현 정권이, 아니 역대 문민민주정권이 국민들에게 ‘항산(恒産)’, 즉 경제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고, ‘항심(恒心)’을 북돋워주는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혹자는 이런 소리를 하면 '그럼 군사정권 시절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냐'고 따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군사정권에 대한 호(好) 불호(不好)를 떠나, 소위 ‘문민정권’이니 ‘국민의 정권’이니,‘참여정권’이니 하는 화려한 타이틀을 단 문민민주정권들이 그들이 비판해마지 않는 ‘군사독재정권’보다도 국민들에게 '내일에 대한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을 부끄러워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