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에서 철조망 치고 농사짓는 사나이

가끔 철조망을 뛰어넘어 명동의 휘황한 세계로 탈출한 사람들이 전해주는 철조망 안의 세계는 무시무시하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조갑제 기자입니다. 이제 두번째 만남입니다. 요사이 한국에서는 황우석 교수라는 사람이 줄기세포라는 것을 조작하여 세계를 속였다고 해서 말이 많습니다. 노벨상까지 받을 사람이라고 언론이 영웅처럼 대접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기꾼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도 언론이지만 그를 사기꾼으로 밝혀낸 것도 언론입니다. 국가적 영웅을 사기꾼으로 만드는 것은 독재정권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언론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언론과 정권이 실수를 해도 이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김정일이 다스리는 북한에선 김정일을 욕하면 수용소로 가지만 자유민주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에선 제가 공개적으로 대통령을 욕해도 집으로 돌아가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 김정일 정권이 여러분들을 속이고 있는 사기극에 비교하면 황우석 교수의 사기극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속고 있는지 속는 척하는지는 모르지만 가장 큰 김정일의 사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말입니다. 민주주의도 아닌 것이, 인민을 말살하는 것이, 공화국이 아니라 마피아 같은 범죄조직인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사칭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미국의 권위 있는 정책전문잡지 포린 폴리시는 붕괴직전에 몰린 60개국을 조사하여 랭킹을 매겼습니다. 북한은 가장 엉망이 된 나라 랭킹에서 13번째였습니다.

붕괴직전으로 몰린 1위 국가는 아프리카의 상아해안, 2위는 콩고민주공화국, 3위는 수단, 4위는 이라크, 5위는 소말리아, 6위는 시에라 레온, 7위는 차드, 8위는 예멘, 9위는 리베리아, 10위는 아이티, 11위는 아프가니스탄, 12위는 르완다, 13위는 북한, 14위는 콜롬비아, 15위는 짐바브웨, 16위는 기니아, 17위는 방글라데시, 18위는 부룬디, 19위는 도미니카 공화국, 20위는 나이제리아였습니다.

대부분이 아프리카, 남미, 중동 국가입니다. 북한은 유럽, 北美와 함께 세계 3대 경제중심지인 동북아시아 출신이란 점에서 특이합니다. 북한이 동북아로 쏠리고 있는 문명의 흐름을 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自主를 명분으로 삼아 폐쇄정책을 썼기 때문입니다. 외부환경은 아주 좋은데 나라 문을 꼭 닫고 있으니 수많은 기회들이 북한을 지나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프리덤 하우스가 작년말에 발표한 세계의 정치자유도 랭킹을 보면 한국은 자유국중 2등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북한은 192개국중 자유가 가장 심하게 억압당한 8개국에 들었습니다. 1970년대 이 조사가 시작된 이후 북한은 이 최악의 범주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종교을 탄압하는 면에서도 북한은 최악의 국가群에 들어 있습니다. 4년 전 뉴스위크라는 미국 잡지는 '최악의 최악' 국가를 뽑은 적이 있었습니다. 종합랭킹 1위는 북한이었습니다.

김정일은 또 개인자금의 축재액수가 가장 많은 독재자이기도 합니다. 물러난 독재자로서는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가 150억 달러 이상을 부정축재했다고 하나 현존 독재자로서는 약50억 달러의 비자금을 해외에서 관리하는 김정일이 단연 1위입니다.

20세기의 학살자수 랭킹에서도 김일성-김정일 콤비는 모택동-스탈린-히틀러에 이어 역대 4위입니다. 김일성의 6.25남침으로 300만명, 김정일의 개혁거부에 기인한 대기근과 강제수용소 운영으로 약300만 명이 죽었습니다. 살아 있는 독재자중에선 김정일이 단연 학살수 1등이란 뜻이 됩니다.

지금도 유태인수용소 같은 학살농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북한뿐입니다. 약20만 명이 강제수용소에 갇혀서 오늘도 내일도 맞아죽고 굶어죽는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

프리덤 하우스 통계에 따르면 1974년엔 세계 모든 국가중 약27%가 자유국가로 분류되었으나 작년엔 46%로 늘었다고 합니다. 1974년엔 41%가 부자유국가였으나 작년엔 26%로 줄었습니다. 인류역사상 자유가 이처럼 빨리 확산된 예는 일찍이 없었다고 합니다.

인류의 위대한 자유의 전진, 그 선두에 섰던 나라가 미국이었다습니다. 미국이 가는 곳에선 독재자가 무너지고 국민들은 자유를 얻습니다. 미국이 전쟁으로 무너뜨린 일본과 독일,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는 자유가 회복되거나 확산되었습니다. 미국이 자유의 힘으로 무너뜨린 舊소련, 동구에서도 자유가 회복되고 있습니다. 소련이 가는 길에선 있던 자유도 무너졌습니다. 체코, 폴란드, 헝가리 같은 나라들이 그런 희생물이었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독재자를 쫓아내고 국민들을 자유민으로 만들었습니다. 지난 3년간의 내전으로 약3만 명의 이라크 국민들이 희생되었으나 후세인 시대로 돌아가고싶다는 이라크인들은 소수중에 소수입니다.

미국이 선도하는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은 분명 자유의 총진군입니다. 한국인들은 이 大勢의 가장 큰 수혜자였습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군이 아니라 소련군이 남한지역까지 차지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여러분처럼 살고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친구를 잘 얻어서 성공했고, 북한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친구인 공산주의, 스탈린, 모택동과 사귀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비싼 땅이 있다면 아마도 중국 한국 일본이 있는 東北亞일 것입니다. 이 세 나라의 구매력 기준 GDP(국내총생산)는 지난 해 미국과 유럽연합을 뛰어넘어 세계1위로 올라섰습니다. 외환보유고 1~5위국은 모두 동북아시아에 몰려 있습니다. 중국은 해외 직접투자유치액에서 수년 전부터 미국을 젖히고 세계 1위입니다. 물동량 기준으로 세계 1~5위항이 모두 동북아시아에 있습니다. 돈, 사람, 물자가 몰려드는 세계의 명동이 東北亞입니다.

이런 地利를 이용하려면 이 비싼 땅에선 부가가치를 많이 생산하는 상공업과 금융업과 物流業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명동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한 정신병자가 있습니다. 명동 땅에서 철조망을 쳐놓고 그것도 손바닥 만한 땅에서, 그것도 생산성이 낮은 집단농장체제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이상하다고 기웃거려도 농민들은 무표정한 표정입니다. 가끔 철조망을 뛰어넘어 명동의 휘황한 세계로 탈출한 사람들이 전해주는 철조망 안의 세계는 무시무시합니다.


농장주 한 사람은 그 어떤 명동사람들보다도 호화롭게 사는 모양인데 농민들은 노예상태입니다. 명동사람들은 지금 음식쓰레기와 비만문제로 골치 아파하는데 농장안에선 최근 농민들의 半이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명동사람들은 근사한 상점을 열고 찾아오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아 다 부자가 되었는데, 그런 수많은 기회가 스쳐지나가는데도 오늘도 명동의 농장주는 철조망을 걷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요사이 농사만으로는 안되니 아편을 재배하여 몰래 명동으로 팔아넘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농장주가 철조망을 걷어치우지 않으면 자신이 굶어죽는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업종을 전환할터인데 농장 바로 옆에 있는 부자 2세가 계속해서 초콜리트 같은 것들을 농장주한테 던져주고 있습니다. 농장주는 공짜로 먹을 것이 생기니 농사를 그만두고 철조망을 걷어치우고 명동의 밝은 거리로 나서서 당당하게 돈을 벌면서 살아가고싶은 필요성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북한동포 여러분, 여러분들은 좋은 정부하에서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돈을 벌어 부자가 될 수 있는 좋은 세상과 시절을 만났으나 김정일이 나라의 문을 꼭 쳐닫고 있는 바람에 그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문을 바깥에서 열어드릴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해야 할 경우도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힘으로 문을 열고 광명한 세상으로 나와야 합니다.

박정희 장군은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뒤에도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 분은 특히 먹는 데 그러하였습니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2년 그의 친구인 한양대 교수 김병희씨가 박의장 방에 들렀다고 놀란 이야기를 쓴 기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김병희씨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의장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첫 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야전사령관이 있는 천막속을 방불케 하였다. 특히 그가 앉은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나무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급품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였다.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더니 마침 점심을 먹고 있는데 10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이 전부였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원짜리 고급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한국의 최고권력자가 냄비우동 한 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으로 식사를 하는 그런 정신이 오늘의 대한민국과 풍요로움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생활상태는 일제지대보다도 못하고 조선조 시절보다도 못하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몇년 전에 펴낸 '韓國經濟成長史'에서 영남대학교 차명수 교수가 쓴「제1장. 우리나라의 생활수준, 1700년에서 2000년까지」엔 재미 있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인용하겠습닌다.
<남한이 식민지 시대에 지펴진 근대적 경제성장의 불씨를 상당한 규모의 모닥불로 키워낸 데 비해 북한은 이 불씨를 비벼 끄고 飢餓(기아)와 질병의 세계로 되돌아갔다. 木村光彦(기무라)에 따르면 북한의 1인당 하루 식량소비는 2차대전 발발 직전 756g에서 1984년 약800g정도까지 증가한 뒤 1996년에는 540g으로 하락했다. 식민지 시대의 쌀임금(임금을 쌀값으로 나눈 값으로서 생활수준을 보여준다)이 하루 2.5되 수준에서 정체하고 있었는데
1인당 식량소비와 쌀임금 수준 사이에 비례관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1996년의 북한 하루 쌀 임금은 약1.8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같은 시기 남한의 10분의 1정도, 조선시대에 경제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던 19세기말의 수준과 비슷한 것이다. 남한과 식민지 과거를 공유하고 있는 북한의 경제적 후퇴는 무엇보다도 경제성장의 필요조건인 私的 소유권과 市場을 파괴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한정권은 시장을 파괴한 대신 일제가 1937년 전쟁체제로의 돌입과 함께 등장했던 통제경제체제를 계승해서 이를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포장했 다(Kimura 1999)>


차명수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생활수준은 18세기초부터 계속해서 악화되어 1900년경 고종시절에 최악의 바닥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車교수는「조선 후기 경제적 후퇴를 가져온 원인은 농업생산성의 지속적 저하였으며 농업생산성 감퇴 원인은 수리시설의 퇴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水利시설의 쇠퇴는 지배 및 행정 체제 붕괴와 관련되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즉 조선조 末期 순조 현종 철종 고종 시대에 오면 행정력이 부패하고 무능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거나 방치할 뿐만 아니라 못 제방 등 水利시설을 제대로 손보지 않아 농산물의 생산이 격감했다는 뜻입니다. 200년에 걸친 이런 下落의 끝은 일본에 의한 朝鮮倂合이었습니다. 생산력이 악화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니 강력한 군대도 유지할 수 없어 나라를 지탱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1900년 무렵부터 생활수준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車 교수는 「일본에서 새로운 볍씨가 도입되고 우리나라로 건너온 일본인들이 水利시설을 재건, 확충하면서 비로소 (생활수준의) 하강이 중단되고 상승으로의 反轉이 일어났다」고 썼습니다.

日帝에 의해 생활수준의 향상이 일어났다는 지적인제 우리로서는 인정하기 싫은 현상이지만 이는 사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북한 주민들의 생활수준은 19세기말 조선조 시절의 수준보다도 못하다고 합니다. 이 또한 맞는 말일 것입니다. 1995년부터 약5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수백만 명이 북한에서 굶어죽었으니 19세기말보다 못한 생활수준이란 말이 맞습니다. 지금 북한 주민들의 생활수준은 우리 민족사를 통틀어 최악일 것입니다. 생활수준뿐 아니라 인권탄압에서도 그러합니다. 우리 역사의 어느 왕이 김일성 김정일처럼 수용소를 만들어 수십만 명을 가두어놓고 유태인 학살 같은 인간도륙을 강행했던가 말입니다. 어느 왕이 주민들의 국내 여행을 제한했던가요. 어느 왕이 수백만 명을 굶겨죽이면서 자신과 그 측근들은 곰발바닥요리를 먹고 한 병에 수천 달러 하는 최고급 꼬냑을 마시며 즐겼던가요. 어느 왕이 주민들을 굶겨죽이면서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어 공갈을 일삼았던가요.








생활수준이 역사상 최악이었다는 것은 지배층의 능력도 최악이고 그들의 인간성도 최악이
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 결과로 북한주민들은 심하게 말하면 난쟁이들이 되어가고 있다. 북한주
민들의 키는 남한사람들보다 평균 7-10cm가 작고 몸무게는 15-20kg이 가볍다고 한다. 한 탈북 청년은 「누가 나를 난쟁이로 만들었습니까」라고 항변했다.
인간도륙에다가 인간변종까지 일으킨 김정일을 부를 때 나는 평소에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守
舊反動 세력」이라고 못박곤 한다. 이는 차명수 교수의 논문에 의해 실증된 셈이다. 인
류가 풍요와 자유를 즐기고 있는 21세기의 북한을 우리 민족사상 가장 가난했던 19세기말
보다 더 낙후된 상황으로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 놓은 者, 그가 바로 守舊반동인 것이다.
이 자에게 굴종한 자, 이 자에게 약점이 잡혀 국가이익과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팔아먹은
자, 이 자에게 군자금을 대준 자, 이 자를 진보니 민족주의 세력이니 하면서 편든 자들은
지금부터 반드시 그 代價를 치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가 권력자이든 교수이든 언론인이
든 상관해선 안된다. 그가 어느 지역 출신이냐가 아니라 그가 어느 자리에 있었느냐가 아니
라 오직 대한민국의 헌법을 위반했느냐의 여부를 기준하여 심판할 것이다. 親김정일은 親日
보다도 몇배 더한 범죄이다. 親김정일 인사들의 言動을 정리하여 단죄받도록 하는 일은 나치 戰犯者를
단죄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잔인한 자를 동정한 자는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잔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문에는 밤마다 농장주가 이 부자 2세 집으로 들어가서 못된 짓을 하고 온다고 한다. 명동에선 이 부자2세가 노예농장의 주인한테 약점이 잡혀 아내도 돈도 다 빼앗겼다는 風說이 자자한데도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으니 알 수가 없다. 명동바닥에선 농장주와 부자2세가 똑 같이 '이상한 존재'로 비쳐진다.

부자2세 때문에 철조망 농장이 계속되고 그 때문에 명동개발이 늦다고 원성이 대단하다. 명동사람들은 조만간 농장을 강제로 철거하는 방법을 강구할 태세이지만 부자2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반대하고 있다. 요사이는 이 철거 문제로 부자2세 집안에서 분란이 났다고 한다. 이러는 사이에 명동은 나날이 번창해가고 농장주와 부자2세는 나날이 '희한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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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송을 들으시는 북한동포 여러분, 특히 노동당 간부, 국가안전보위부, 그리고 인민군 군관 여러분! 저는 조갑제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혹시 저의 이름을 로동신문에서 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저를 수구반동 기자라고 소개했을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고 제가 수구반동인지 김정일이 수구반동인지는 현명하게 생각해보시면 될 것입니다. 저는 1945년생, 즉 해방둥이이고 1971년부터 기자생활을 하면서 남북관계, 국내정치, 그리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기사와 책들을 많이 써왔습니다. 오늘부터 여러분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겠지만 주로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의 남북관계와 민족의 미래를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올래 로동신문에 실린 신년사를 읽어보았습니다. 아직도 북한당국의 가장 큰 당면 문제는 먹고사는 것, 즉 식량문제이더군요. 신년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올해에도 농업전선을 경제건설의 주공전선으로 내세우고 다시 한번 농사에 모든 력량을 총동원, 총집중하여야 한다.
'쌀은 곧 사회주의다'라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유훈을 강령적 지침으로 삼고 온 나라가 농업전선에 한 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한다. 농업부문에 필요한 로력과 설비, 물자들을 최우선적으로 무조건 보장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올해에 농사를 본때있게 지어 사회주의 조선의 대지에 오곡백과 주렁지게 하고 식량문제, 먹는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는 당의 의도와 결심을 빛나게 실현하여야 한다>

이 신년사를 읽으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올해 겨울은 12월부터 강추위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서울에선 한강이 벌써 얼어붙었고, 영하 14도까지 내려갔으며 이상하게도 전라도 지방에 눈이 많이 내리고 서울보다 더 추운 이상 한파가 몰아닥쳤습니다. 남쪽도 이러한데 여러분들이 보내시는 북녘 땅 겨울은 얼마나 지독하게도 춥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춥고 배고프다는 말을 합니다만, 그 말도 다 옛날 이야기가 되었지만 북녘동포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잊었던 그 말부터 떠오릅니다. 아무쪼록 이 겨울을 잘 견디고 건강을 보존하여 오고야 말 봄, 계절로서의 봄뿐 아니라 정치적 봄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올해 로동신문 신년사를 읽으면서 저의 생각은 43년 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金日成이 1963년 10월5일에 金日成 군사대학 제7기 졸업식에서 한 연설문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는 패기 넘치는 51세의 지도자였고, 북한은 뻗어가고 있는 공화국의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지금 우리 당의 구호는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입니다」

「우리는 5∼6년 전부터 쌀을 사오지 않습니다. 남조선 군대들이 먹는 양식은 다 미국 잉여농산물입니다. 남조선 국방군이 입은 군복도 다 미국제품입니다. 신발도 미국 제품이며 총도 미국에서 대준 총이요 탄약도 다 미국놈들이 대준 탄약입니다」

「남조선에서 박정희가 중농정책을 쓰고 자립경제를 건설하자는 목소리가 울려나오는 것만 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찬성합니다. 그러나 그 자립경제는 미국과 일본의 돈을 꿔다가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식민지로 됩니다. 우리 북반부와 합작을 해야만 자립경제가 됩니다. 남조선당국이 남북합작을 하자고만 하면 우리는 『합작을 하면 우리는 당신네 군대도 먹여 살릴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조건이 있다. 미국놈들 반대하고 일본군국주의를 반대하고 오직 인민을 위하여 투쟁하는 그런 조건하에서만 합작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남조선당국은 우리에게 북조선 군대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물질적 힘, 경제적 자립이란 중요합니다」

김일성이 연설한대로 1963년 남한은 여러가지로 북한보다 뒤떨어졌습니다. 농업부문뿐 아니라 발전량, 시멘트 생산량, 철강생산량 등 중공업 부문에서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 김일성은 군사력 건설에 매진했습니다. 저는 1960년대에 공군에 입대하여 약4년간 사병으로 복무했습니다. 그때 기억나는 북한의 구호가 있습니다.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인민의 무장화 등등. 여러분들이 군사력 건설에 주력하던 1960년대에 우리는 경제력 건설에 집중했습니다. 1961년5월16일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소장은 군인으로서는 참 이상하게도 군사력 건설보다는 경제발전에 더 열심이었습니다. 1960년대에 박정희는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여 일본의 식민지 배상금으로 공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한국의 자랑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종합제철소가 되어 있는 포항종합제철소도 그때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자본으로 만든 공장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월남전선에 5만 군대를 파병하여 미군과 함께 월맹군대와 싸웠고 여기에도 한국의 건설회사 운송회사들이 많이 진출하여 외화를 많이 벌어왔습니다. 박정희는 외화를 벌어와서는, 지금 김정일처럼 인민의 생활과 관계 없는 곳에 낭비하지 않고 공장을 지어 수출을 늘리는 데 알뜰히 썼습니다.

이렇게 되어 1970년대에 들어가면 한국이 경제력에서 북한을 앞서가게 됩니다. 1968년 1월21일 추운 겨울날 일요일이었습니다. 북한인민군 124군 부대가 서울의 청와대 근방까지 침투했다가 발각되어 서울시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특수부대는 박대통령이 살고 있는 청와대를 습격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가 실패했던 것입니다.
화가 난 박대통령은 이때부터 예비군을 조직하는 등 자주국방력 건설에 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쌓이고 있었으므로 무기를 만들고 신무기를 사와서 한국군을 현대화할 수 있는 힘도 있었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 중동의 건설시장 진출, 그리고 농촌새마을운동을 힘차게 밀고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976년부터는 한국의 국방비 지출도 북한을 앞서게 됩니다. 식량문제도 해결하게 됩니다. 수출도 1977년에 100억 달러를 돌파하게 됩니다. 지금 북한의 연간 수출이 20억 달러 정도 아닙니까. 한국은 30년 전에 벌써 그 다섯 배를 수출한 겁니다.

자신감이 붙은 朴대통령은 드디어 북한을 상대로 식량원조를 해주겠다고 제의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날은 1977년 1월21일 연두 기자회견 날이었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은 이렇게 對北 식량원조를 제안합니다.

'북한의 식량사정이 매우 심각한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재작년인 1975년부터 주곡인 쌀과 보리는 자급자족합니다. 작년 우리는 쌀을 3600만석을 생산했는데 이는 1960년에 비교하면 58%를 증산한 것이며, 일제 시대의 남북한 전체생산량의 두배입니다. 금년 말에 가면 쌀이 1175만석, 보리가 1145만석 정도 남습니다. 북한측에서 받겠다고 한다면 상당량을 지원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나 이해가 안가는 것은 북한에서 식량소동이 나고 있지만 전쟁용 비축식량을 풀어 먹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1970년대부터 북한사람들의 생활이 나빠집니다. 누구 때문인지 아십니까. 바로 당중앙이라 불리던 김정일 때문입니다. 김정일은 1973년부터 후계자로 확정되자 아버지 김일성을 우상화하고 유일사상확립을 위한 10대 원칙 같은 것을 만들어 여러분들에 대한 사상통제를 강화해갑니다. 이때 여러분들이 받은 교육의 거의 전부는 김일성 주석의 혁명역사 아닙니까. 소련군이 아니라 김일성이가 북한을 해방했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거짓말을 배우는 데 시간을 너무 쓰다가 보니 정작 먹고사는 데 필요한 과학, 기술 교육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공장을 짓고 상품을 만들고 수출을 하는 일을 맡아 할 기술인력이 부족하게 되었지요. 이런 지나친 사상교육이 여러분들을 가난하게 만든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1963년에 김일성은 박정희에게 식량원조를 주겠다고 자랑스럽게 제안했으나 그 14년 뒤에는 박정희가 김일성에 대해서 식량원조를 받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완전히 한국의 우세로 상황이 역전된 것입니다.

다시 시간이 흘러 2006년 로동신문 신년사는 식량문제 해결이 아직도 가장 큰 과제라고 고백합니다. 북한의 역사는 지난 40년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뒤로 밀려갔습니다. 퇴보의 역사였습니다. 물론 김정일은 자신이 진보세력이라고 자처합니다만 실제는 어떻습니까. 박정희가 진보세력이고 김정일은 퇴보 또는 수구반동세력이 되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40년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수백만 명의 동포들이 굶어죽었고 여러분들이 이 겨울을 춥고 배고픈 상태에서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서울의 아파트나 큰길가에는 이런 이런 글이 적혀 있는 프래카드를 자주 본답니다. '한달만에 8kg 못빼면 전액 환불'. 이것이 무슨 뜻이냐구요? 요사이 한국에선 살이 너무 쪄서 고민하는 여성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한테 살빼기 치료를 하여 한달에 8kg을 줄여주겠다는 선전문구입니다. 북한에서는 살이 찌고 배가 나온 것이 자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로동당 간부밖에 없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살이 찌고 배가 나온 사람은 창피하게 생각한답니다. 그런 사람들은 출세하는 데도 지장이 있다고 합니다.

남북한이 왜 이렇게 달라졌습니까. 저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박정희와 대결하는 데서 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박정희는 무서운 면도 있었지만 본성이 원래 검소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1979년10월26일 그가 아끼던 부하인 김재규 정보부장으로부터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고 죽었을 때 병원에 실려온 그의 시체를 맨 처음 조사했던 정규형이란 군의관은 이 사람이 박대통령이란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그 의사는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감시자들이 응급 처지중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고 넥타이 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해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약간 있어 50여세로 보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세계10대 부자나라로 만든 박대통령은 오래 써서 허옇게 해진 허리띠와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핀과 흐름한 세이코 시계를 차고 있었습니다. 박대통령은 그렇게 소탈한 사람이었습니다.
박대통령이 죽은 뒤 그의 집무실을 정리할 때였습니다. 화장실 양변기의 물을 담가놓는 통의 뚜껑을 열었더니 벽돌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침실내 화장실 물통에도 벽돌이 한 장 들어 있었습니다.

벽돌 한 장만큼 물을 아껴쓰기 위해서였습니다. 朴대통령은 1970년대에 기름값이 오르니까 집무실인 청와대에서 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못하게 했습니다. 박대통령은 물을 열어놓고 부채로 더위를 식혔습니다. 이렇게 지도자는 검소하게 살았지만 나라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북한은 어떻습니까. 김일성 김정일은 부자가 되었지만 여러분들은 가난해졌습니다.

이 한겨울을 춥고 배고프게 보내야 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작년에 영국과 핀란드 학자가 조사한 세계 185개국 국민들의 평균 IQ, 즉 지능지수를 비교했더니 세계 1위는 IQ 107인 홍콩이었고, 2위는 106인 한국, 3등은 IQ가 105인 북한과 일본이었습니다. 이처럼 세계에서 머리가 가장 좋은 여러분들이 왜 굶어죽어야 합니까. 여러분 잘못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구 때문입니까. 그 누구가 누구인지는 여러분들이 잘 아십니다. 다만 입밖에 내어놓았다가는 독재대상구역으로 끌려가서 살아서는 나올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고서 가슴에만 새겨두고 있는 것이지요. 좋습니다. 그렇게 가슴에 새겨놓으십시오. 언젠가는 계산을 해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합시다. 내일 또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여러분, 절대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건강을 잃지 마십시오. 열심히 들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런 김정일과 '우리민족끼리'를 하겠다는 자들이 들어가 있는 데가 盧정권이다. 그들은 이런 김정일을 진보-민족이라 부르고, 이런 박정희를 守舊-親日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하겠다는 '우리민족끼리' 노선은 '우리민족반역자끼리의 작당'이라는 뜻이겠지?



















이래도 우리는 천벌을 받지 않을까?


미국이 주도한 자유의 총진군. 그 가장 큰 수혜자 한국인들은 어찌하여 바보짓과 배신만 골라서 했단 말인가?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너그러우며, 자유로운 미국을 친구로 만들었던 선배세대를 저주하면서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못살고 억압되었으며 절망적인 김정일 정권과는 친구가 되려고 한다. 그들은 악마와 친구가 되어 천사를 對敵하려 한다. 인류역사상 이런 바보가 일찍이 있었을까?

趙甲濟








지금 盧정권안에는 왜 소련군이 그때 남한까지 먹지 않았나, 왜 맥아더가 김일성의 남침을 저지하여 남한을 지켜냈느냐고 원통해 했던 공산주의자들이 요직에 박혀 있다. 이들이 전향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고, 이들이 펴는 정책과 언동은 아직도 그들의 사상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盧정권과 그 지지세력은 자유확산의 선도자 미국을 적대시하고, 독재의 최후 보루 김정일 정권과는 '우리민족끼리' 친구가 되자고 한다.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너그러우며, 자유로운 미국을 친구로 만들었던 선배세대를 저주하면서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못살고 억압되었으며 절망적인 김정일 정권과는 친구가 되려고 한다. 그들은 악마와 친구가 되어 천사를 對敵하려 한다. 인류역사상 이런 바보가 일찍이 있었을까. 인류역사상 이렇게 배은망덕하고 악랄한 집단이 일찍이 있었을까. 인류역사상 이런 위선자들이 일찍이 있었을까.

어느 면에선 盧정권이 김정일 정권보다도 더 부도덕하다. 김정일 정권은 그래도 살아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생존투쟁을 한다. 盧정권은 미국과 기성세대가 만들어낸 자유와 풍요의 과실을 공짜로 맛보면서 미국과 기성세대를 저주하고, 이 자유와 풍요를 빼앗아가려고 조국을 그렇게 괴롭혔던 김일성 김정일에 굴종하면서 자신들을 진보, 개혁세력이라고 자화자찬한다. 인류역사상 이렇게 부패한 정신을 가진 집단이 일찍이 있었을까.

이 집단은 사기적 숫법으로 정권을 잡았다. 1997년, 2002년, 그리고 2004년의 세 차례 선거에서 이들을 집권세력으로 만든 유권자들에게도 바보, 배은망덕, 악랄, 위선, 굴종이란 낱말들이 날아가야 할 것이다. 이런 非道하고 逆道한 집단을 대한민국호의 조종사로 뽑아준 승객들은 비행기가 추락할 때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날개를 달아주지 않은 조물주를 저주할 것인가. 아니면 이런 천벌은 달게 받아야 한다고 체념할 것인가?


[ 2006-01-06, 02:31 ]
자료1: 북한노동신문 新年辭의 놀라운 고백


'오곡백과 주렁지게 하고 식량문제, 먹는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는 당의 의도와 결심을 빛나게 실현하여야 한다'
趙甲濟

2006년1월1일자 북한 노동신문 新年辭는 아직도 '먹는 문제 해결'이 김정일 정권의 가장 큰 당면과제라고 고백하고 있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쿠데타로 집권했을 때 김일성은 對南식량무상원조를 제의한 적이 있다. 김정일은 45년 이전으로 북한을 퇴보시켰다. 그런 집단을 추종하는 남한내 정신병적 패거리들을 '진보'라고 불러주는 얼치기들이 주로 욕하는 대상이 朴正熙이다. 언론인 봉두완씨가 말했던대로 '한 석달쯤 빨갱이 세상이 되어보아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올해에도 농업전선을 경제건설의 주공전선으로 내세우고 다시한번 농사에 모든 력량을 총동원, 총집중하여야 한다.

'쌀은 곧 사회주의다'라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유훈을 강령적지침으로 삼고 온 나라가 농업전선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한다. 농업부문에 필요한 로력과 설비, 물자들을 최우선적으로 무조건 보장해주어야 한다. 인민군대처럼 혁명적으로 달라붙어 당의 종자혁명방침, 감자농사혁명방침, 두벌농사방침, 콩농사방침관철에서 새로운 전진을 가져와야 한다.

농업부문 일군들과 근로자들은 나라의 쌀독을 책임진 주인답게 농사일을 깐지게 하며 모든 지원자들은 지난해처럼 농촌을 적극 도와주어야 한다. 미루벌을 비롯한 도처에서 물길공사와 토지정리사업을 계속 힘있게 밀고나가며 토지관리를 잘하여야 한다. 기계화, 화학화를 적극 다그쳐 농업생산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올해에 농사를 본때있게 지어 사회주의조선의 대지에 오곡백과 주렁지게 하고 식량문제, 먹는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는 당의 의도와 결심을 빛나게 실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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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 세계최고-김정일의 식탁연구
dailynk(2005년6월)


6월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55년이 되는 해다. 6일은 현충일이다. 한반도에 민주주의를 지켜려다 숨진 국군, 유엔군, 민간인이 수백만명에 이른다. 6.25 전쟁 55년이 지났지만 한반도에는 평화가 정착되지 않고 있다. 북한의 2천3백만 주민들은 아직 수령독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북한에서는 제2의 식량난(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닥치고 있다. 북한 형제들이 올해를 어떻게 견뎌낼지 정말이지 걱정스럽다. 주민들이 또다시 풀죽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도 김정일은 전면적인 농업개혁을 미루고 있다. 주민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는데도 '장군님'의 식탁은 호화롭기 그지 없다.

DailyNK는 김정일의 식탁을 집중 해부했다. 김정일의 식탁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북한주민들의 비참한 삶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DailyNK는 김정일이 평소 즐기는 음식 30가지를 뽑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김정일의 개인 요리사를 지낸 후지모토 겐지의 '김정일의 요리사', 풀리코프스키가 쓴 '동방특급 열차', 그리고 김정일 주변에서 생활했던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음식의 특징과 가격산출은 <신라호텔> 조리부의 협조를 얻었다.

대아사 기간에도 희귀음식 구하려 외교관 동원

지난 2001년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로 일했던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가 북한을 탈출, 일본에서 <김정일의 요리인>(일본어판)을 출간하면서 김 위원장의 식탁에 어떤 음식이 즐겨 오르는지 처음 외부에 알려졌다.

후지모토는 김 위원장이 상어 지느러미 요리를 즐겨 먹는다고 말했다.

이 음식은 김정일 식탁 차림표에서 야자상어날개탕, 죽생상어 날개탕, 상어날개 소라탕 등 여러 가지 변형된 모습으로 식탁에 올랐다. 그가 공개한 2001년 3월 21-26일까지 김정일 식탁 차림표에서 상어 날개탕은 4차례나 메인 요리로 등장할 정도였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해산물을 즐긴다고 한다. 그렇다고 육고기 종류를 꺼리지는 않는다. 해산물을 주로 찾지만 '코야'(새끼돼지구이)나 '쌀로'(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돼지 비계) 같은 돼지고기 종류도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음식은 많이 먹지 않고 시식하듯 조금씩 즐기는 편.

김 위원장은 90년대 후반까지 파티를 자주 열고 술을 자주 마셨다. 그 당시에 가장 즐겨먹은 술은 ‘조니워커 스윙’과 ‘헤네시XO’로 알려졌다.

후지모토의 증언 중에 매우 충격적인 사실은 북한 인민들이 기아로 수 십만 명이 떼죽음을 하던 96년에도 김정일의 요리사들은 음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전세계를 누비고 다녔다는 것이다. 덴마크에서는 돼지고기, 이란에서는 캐비어, 일본에서는 주로 생선류, 동남아시아에서는 두리안, 파파야 등의 과일을 사오는 식이다.

풀리코프스키, 김정일 음식재료 비행기로 조달

김정일이 2001년 열차로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그림자 수행’을 했던 풀리코프스키 러시아 극동전권 대사는 김정일과 함께 했던 여행을 ‘동방특급열차’라는 책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 책에서는 김정일과 24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식사와 음식을 주제로 나눈 대화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도 상어 지느러미 요리는 빠지지 않는다. 그는 김정일이 먹는 음식의 재료는 북한에서 직접 비행기로 조달하고 여기서 나온 쓰레기도 밀봉하여 북한으로 보내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밝혔다.

풀리코프스키는 이 책에서 김 위원장이 자신에게 쌀로를 좋아한다고 말했으며 향이 진한 커피를 자주 마셨다고 말했다.

김정일의 주변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한 탈북자는 “김정일이 우럭으로 국물을 낸 해장국을 즐겨 먹는 것으로 들었다”면서 “이것은 그가 술을 자주 먹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프랑스 요리사, '재료주문과 동시 세계에서 속속 도착'

같은해 프랑스 출신 요리사는 자신이 직접 북한에 들어가 김정일이 연 선상(船上) 파티에서 경험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20가지가 넘는 프랑스산 치즈와 포도주를 비롯해 요리에 필요한 재료는 주문과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즉시 들어왔다고 회상했다.

신라호텔 조리부 최인수 과장은 <데일리엔케이>와의 전화통화에서 '김 위원장이 먹는 음식은 최고급 재료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상식적인 가격 산정이 어렵다'면서 '전체 음식 중에 '뱀장어 캐비어(상어알)'가 200만원을 호가할 것으로 보여 가장 비싼 음식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유엔은 2002년 북한 어린이 수 천명의 영양 상태를 조사한 결과 40%가 만성적인 영양실조 상태에 있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1998년에는 그 수치가 60%에 달했다.

북한 당국은 올해도 먹는 문제 해결에 사활을 걸고 있다. 올 1월 1일 신년공동사설에서도 '사회주의경제건설의 주공(主攻) 전선을 농업전선'이라고 규정하고 식량증산을 촉구했다. 지난 28일 베이징에서 열린 국내외 대북지원 NGO회의에서는 '북한이 매년 500만 톤의 식량이 부족하고 올해만도 200만 톤이 부족한 현실'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지도자 동지' 김정일은 인민들이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데도 여전히 측근들과 호화 연회를 열면서 ‘원 모어(One more, 초밥이 맛이 좋다며 더 만들라는 지시를 내릴 때 사용한 말∙『김정일의 요리사』55페이지)를 외쳐대고 있다.

김정일 식탁 변화없이 북한 사회 변화도 불가능

김정일이 추천하는 음식 베스트 30을 선정한 이유를 아래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도령이 작성한 시조로 대신한다. 산해진미(山海珍味)로 가득한 김정일의 식탁을 바꾸지 않고 북한의 변화를 바라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金樽美酒千人血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玉盤佳肴萬姓膏 옥소반의 맛좋은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燭淚落時民淚落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이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았더라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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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3: 아내와 아들의 죽음(월간조선 1999년7월호에 실렸던 북한주민의 수기에서 발췌)

이밥에 고깃국을 먹어보았던 자기의 짧은 일생들을 끝없이 끝없이 되풀이하며 아버지가 장거리에서 사주었던 송편에 대하여 金日成의 생일날에 맛보았던 「선물」 사탕과자에 대하여…. 언젠가 어머니가 끓여주었던 두부장과 콩나물에 대하여…. 굶주리고 헐벗었던 모든 것은 다 버리고 잘 먹고 행복했던 짧은 인생을 간추려 맥이 빠져 잠드는 순간까지 재잘거리는 것이었다. 이런 숨막히는 생활의 세파 속에서 누이 동생이 굶어죽었고 영양실조로 허덕이던 어머니마저 나의 곁을 떠나갔다.

福(복)은 쌍으로 안오고 禍(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누이동생의 죽음이 어머니를 거쳐 우리 집안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오랜 기간을 대용식품으로 이어온 이 나라의 사정은 우리 집에서 애지중지하던 나의 아들을 걷어갔다. 초인간적 힘으로 버텨오던 아내가 아들을 붙들고 통곡하다 그 자리서 숨져버렸다.

아내와 아이를 붙들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나 굶기는 피차일반이던 마을에서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묻어주려고 나서지 않았다. 묻어주는 일도 먹을 것을 주겠다고 해야 나서는 세월이 그때였다.

나는 어머니와 작별할 때도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머리를 고여 드릴 베개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는 베갯속을 꺼내 절구질을 힘겹게 하여 도토리가루 2백g, 옥수수가루 한 줌을 넣어 죽을 쑤어 잡숫다 보니 베개 하나도 남기질 못했었다. 정말 우리 집안에 지옥문이 열려도 단단히 열렸던 1994년이었다.
형님네 집에서는 군대에 갔던 조카가 영양실조에 걸려 집으로 돌아와 죽는다 산다 야단이었고, 「이 세상은 개 같은 세상」이라고 했다는 형은 군 보위부에서 덮쳐간 후 소식이 없었다.

기울어져 가는 저녁해처럼 이제 이 家門(가문)에 살아남은 자가 누구냐? 아니-이번에는 지옥에서 누굴 데려갈 거냐? 정말 시간문제였다.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두 딸애와 내가 우리 가문의 유일한 재산이었으니 그때 나의 심정은 무엇으로 표현한단 말인가?
나는 찬장 서랍에 있는 쥐약봉지를 생각했다. 평양시 용성구역에서 쥐약을 풀어 집안 식구를 먹이고 자기는 목을 매 죽은 ○○이가 떠올랐다. 그럼 나도?? 아이들과 함께 먹어버리고 다 함께 죽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파리한 얼굴에 눈확이 꺼져 들어간 흐릿한 눈길로 행여나 희망을 품고 바라보는 딸들을 보니 차마 내 손으로 죽이자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범도 제 새끼는 안잡아 먹는다는 말이 그날처럼 나에게 공감을 주어보기는 일생 처음이다.

우리 셋 중에서 죽으려면 내가 죽게 하고 저애들은 살아남게 해 주십사 하고 생각하였다. 그후 우리의 목숨은 끈질기게도 붙어 있었다. 죽을 날을 기다려도 그날까지 살아 있었으니 그날이 바로 잊혀지지 않는 1995년 11월15일이었다.
막내딸 ○○이가 비칠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변소에 가겠지 하고 혼미상태에 빠져 있었다. 얼마 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막내딸이 방긋이 웃는다.

『아버지, 아- 하세요』 하길래 멋도 모르고 입을 벌리는데 딸애의 고사리같은 작은 손이 펴지는 순간 쌀알 20 여알이 손 안에 있었다. 나는 그 쌀알을 보고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 저 건너집 돼지우리 옆에 볏짚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나서 펼쳐보니 벼알이 몇 알 있더라는 것이었다.

딸애는 그 벼알 한 알 한 알을 손톱으로 까서 모아 가지고 나를 깨운 것이었다. 아버지가 이걸 잡숫고 일어나야 우리가 산단다. 나는 딸애의 그 말에 심한 가책을 느끼며 그 귀여운 딸애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 나이의 딸애가 정말 이 미련한 아버지보다 나았다. 나는 그 쌀알을 막내가 큰딸과 함께 나누어 먹게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죽기살기로 거부하고 나섰다. 내가 먹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쌀알을 아이들에게 먹일 수가 없었으니…. 그날 이 지구촌 위에서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쌀알 나누어 먹는 신기한 장면이 우리 집에서 연출되었다.

딸애의 屍身에서 나온 비닐봉지

그날 밤. 나는 아이들을 살려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이 생겼다. 종전에 죽기만을 기다리던 방식에서 죽는 날까지 아이들을 위하여 무슨 짓인들 다 해보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곰곰 누워서 생각하니 아파트 어느 1층집에 쥐이빨 강냉이종자를 매달아 놓은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아파트 골목을 누비다가 끝내 그 집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창문을 만져보니 다행히도 유리가 아닌 비닐방막이였다. 허기에 지쳤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먹이를 구했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은 설다.
나는 준비해 가지고 갔던 칼로 비닐을 째고 옥수수종자를 움켜 쥐었다. 먹이를 눈앞에 둔 야수의 흥분으로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의 그 쾌감을 나는 적절히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艱難辛苦(간난신고) 끝에 옥수수종자를 떼내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비칠거리기는 했어도 가벼웠다. 이것이 내 일생에 처음으로 내짚은 도적생활이었다. 성공하고보니 나도 꽤 노력하면 훔쳐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그때부터 나는 어디에? 무엇을? 하며 손에 닿는 대로 가능성이 있는 대로 훔쳐내어 자식들을 먹여살리는 도적무리의 한 일원이 되어 버렸다.

이날 밤 우리 집에서는 근간에 보기 드문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눈물은 내려오고 밥술은 올라간다」는 격언이 틀리지 않았다. 연달은 초상으로 푹 꺼져 들어갔던 생기가 옥수수종자 다섯 이삭이 생기면서 집안에 和氣(화기)가 돌았다. 죽은 건 죽은 것이고 산 놈은 살아야 한다는 삶의 요구가 우리들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나는 옥수수종자 한 이삭을 아이들에게 날 것으로 먹도록 배려해 주었다. 음식이 익는 동안 아이들의 고통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였는데 두 딸애는 그 돌덩이 같은 옥수수알을 맛있게 씹어먹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아남은 긍지로 오랜만에 웃고 떠들었다.

이때부터 우리 세 식구는 빌어도 먹어 보고 훔쳐도 먹어보고 땅에서 주워도 먹어보면서 신성천~고원, 원산~단천 등지로 방랑하면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며 인민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를 직접 목격하면서 파리 목숨 같은 인생을 유지하였다.

이 길 위에 고원에서 맏딸이 숨을 거두었고 그후 순천역의 쓰레기장에서 막내딸애의 시체가 발견되어 나를 질식케 하였다. 막내딸은 마지막까지 나의 곁에 남아 아버지께 충직했던 나의 혁명동지였으며 이 세상에서 나를 고아로 만들어 버린 유일한 마지막 혈육이었다. 그의 屍身(시신)을 집에 가져다 헤쳐보니 그의 가슴속에는 깨끗한 비닐봉지에 정성 들여 골라놓은 배 껍질과 배 송치(편집자 注:씨가 들은 속), 명태껍질, 돼지뼈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아마도 나를 만나면 함께 먹으려고 그렇게 먹고 싶은 것도 참고 건사했을 딸애를 생각하여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양지바른 산기슭에 딸애를 안장하고 그 비닐봉지를 입가에 얹어 주었다. 그때 나의 막내딸의 나이가 1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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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4: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에서 발췌


반도호텔에서 최고회의 주최로 파티가 열렸을 때 당시 한양대학교 문리대학장이던 김병희도 초청을 받아 갔다. 박 의장이 부하들을 우우 거느리고 들어왔다. 박정희는 김병희를 발견하자 곧장 다가왔다. 참석 자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주목하고 있는데 박정희는 김병희와 악수를 나눈뒤 수행원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나의 대구사범 동기인데 한양대학교 문리대학장이시다. 한 사람씩 인사드려!…병희야, 나를 좀 도와줘.' '수학을 하는 내가 도울 일이 있나.'.

김교수는 사양했지만 다음 날 김용순(중앙정보부장 역임)최고위원이 찾아와 학생문제 담당 상임 자문위원 자리를 권했다. 그렇게 하여 김병 희는 최고회의로 나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박정희가 불렀다. 박의장은 김병희가 집무실로 들어오자 대뜸 한다는 말이 '이 자식아, 한 건물안 에 있으면서 왜 안왔지?'였다. 김병희는 '야, 지금 여기 들어오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어. 별로 할 말도 없는데 시간이 아까워서도 자주 올 수야 없지'라고 했다. 박 의장은 부관을 부르더니 '김병희 교수만은 무 상출입시켜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김병희는 최근에 펴낸 자신의 회 고록에서 친구 박정희를 이렇게 묘사했다.

<내가 의장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첫 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 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야전사령관이 있는 천막속 을 방불케 하였다. 특히 그가 앉은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나무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급품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였다.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더니 마침 점심을 먹고 있는데 10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이 전부였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원짜리 고급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朴正熙 이름으로 나온 여러 책들 가운데 1963년 9월1일 向文社에서 펴낸「국가와 혁명과 나」는 특별하다. 代筆者 朴相吉씨(청와대 대변인 역임)에 따르면 朴최고회의 의장(당시)이 일일이 읽고 고치고 했기 때문에 내용은 완전히 朴대통령 것으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다. 朴正熙가 5·16 군사혁명 때 가졌던 꿈을 잘 보여주는 이 책은 朴正熙의 인간성 그대로 소박하고 솔직하게 쓰여진 게 특징이다. 이 책에서 그가 반드시 이루겠다고 다짐했던 꿈들이 그의 18년 통치 기간중 그 이상으로 실천되었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흥미롭다. 인용한다.

<나의 갈 길-경상북도 선산군, 이곳이 본인이 태어난 곳이다. 20여년간의 군대 생활, 그리고 소년시절에도 본인은 自立에 가까운 생활을 배워왔다. 그만큼 가난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인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환경이 본인으로 하여금 깨우쳐 준 바 많았고, 결의를 굳게 하여 주기도 하였다. 이 같이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恩人이다.

그러기 때문에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恩人과 관련 있는 일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동시에 이것은 본인의 生理인 것이다. 본인이 특권계급,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사회를 증오하는 所以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본인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庶民의 人情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念願한다>

朴正熙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일부 상류층의 사치나 특권층의 권력남용에 대해 생래적 反感을 드러냈던 이다. 호화주택을 지어 朴 대통령에게 보여주었다가 정치생명이 끝나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의 庶民性은 의료보험 도입, 근로자 야간 학교 설립, 社員持株制 도입 등 많은 親勞정책으로 나타났다. 그의 장례식 때 보여준 서민들의 애도, 지금도 국립묘지의 그의 묘소를 찾아오는 참배객의 행렬(대부분이 서민들이다)은 「서민의 인정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염원했던」그의 꿈이 이뤄졌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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