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근대화 이룬 '평생 현역'
16일 자택에서 잠자듯 영면한 소강(小崗) 민관식 박사. 한국현대사에서 소강만큼 정치, 스포츠, 남북관계, 약사계, 과학계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도 드물다. 그의 개인사는 곧 한국현대사와 상당 부분 겹친다.
소강은 1918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개성 원정보통학교를 졸업한 소강은 1932년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했다. 경의선을 이용해 개성에서 서울로 통학하던 소강은 기차안에서 일본학생과 시비를 벌이다 일본 여학생의 머리칼을 가위로 자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소강은 1년 낙제한다. 소강은 수원고농(현 서울대 농대)를 거쳐 경도제국대학 농림화학과에 진학한다. 경도제대 1학년 때 소강은 계초 방응모 선생의 장학생에 선발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된다. 장학생이 된 이후 소강은 심기일전 무섭게 공부에 파고들어 결국 농림화학과 최우수졸업의 영예를 안게 된다. 소강은 생전에 수없이 “계초 선생이 없었으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라고 말해왔다.
소강은 귀국 후 삼공제약 연구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과학자로서 평탄한 길을 걷던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그의 형(중산 민완식)이 1947년 개성에서 공산 테러리스트에 의해 피살되면서부터.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당선된다. 이승만 대통령의 권유로 자유당에 입당했으나 영구집권 개헌에 반대, 자유당을 탈당했다. 1957년 그는 형의 유지를 받들어 중산육영회를 설립, 장학사업을 벌여 지난해까지 모두 59회 장학생을 배출했다.
1958년 4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조병옥 박사의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 조박사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다. 3선 국회의원 시절인 5ㆍ16 쿠데타로 정치규제를 당하자 그는 다시 경도대로 유학, 1963년 한국인 최초로 경도대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소강이 정치가로서 꽃을 피운 것은 박정희 대통령과 만나면서다. 민주공화당 공천으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대한체육회장을 7년여 맡았고 1965년에는 한일협정비준동의안 특별위원장을 맡아 한일 국교정상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소강은 1971년 6월부터 1974년 9월까지 문교부장관에 재직한다. 그는 문교부장관 시절 한국방송통신대학설립, 한국교육개발원 설립, 사립학교교원연금법, 고교 평준화, 한자 복권(復權) 등 많은 일을 해냈다. 이중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전용에 반대해 장관직을 걸고 한자병용 정책을 밀어붙인 것은 문교부 내에서 전설이 되었다.
문교부장관에서 물러난 뒤 소강은 주로 비정치적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아세아정책연구원을 설립해 수많은 세미나를 열어 정책 개발에 기여했다. 1977년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대리에 임명되어 남북문제에 관여하게 된다. 소강은 대한약사회장을 12년간 맡았고,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소강은 1978년 10대 총선에 출마, 5선 의원이 된다. 국회부의장이 된 소강은 1979년 10ㆍ26 사건 이후 국회의장 직무대행에 임명되어 역사적 현장의 증인이 된다. 소강은 1988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에 임명된다.
소강은 한국 스포츠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한국 스포츠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소강은 대한체육회장 시절 태릉선수촌을 건립, 엘리트 스포츠의 기틀을 마련했다. 소강은 또한 86 서울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 2002월드컵 경기력향상협의회 공동의장, 황영조 올림픽제패기념사업회 위원장 등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는 체육 행정가일 뿐 아니라 스스로 스포츠를 즐긴 마니아였다. 경성제일고보 시절엔 탁구부 주장을 맡아 조선 대표로도 뛰었고 후일엔 테니스 선수로도 활약했다. 그는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일주일에 한 차례씩 테니스 코트를 찾았으며 매일 수영과 걷기를 빼놓지 않은 ‘영원한 청년’이었다.
테니스에 대한 사랑은 특히 각별해 문교부장관 시절엔 ‘테니스 미니스터(테니스 장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지인들은 그가 양재동 실내코트에서 타계 전날에도 테니스를 즐겼다고 전하고 있다. 소강이 1973년 창설한 고교 테니스대회인 소강배는 이형택 유진선 김봉수 등 한국의 톱클래스 스타 플레이어들을 배출해 가장 권위 있는 학생대회로 성장했다. 1972년부터 모교인 경기고에서는 매년 봄 ‘민관식배 경기고 마라톤대회’를 열고 있다.
소강의 1989년 발자취에는 1941년 결혼한 부인 김영호 여사의 내조를 빼놓을 수 없다. 서대문구에서 한정식집 ‘마리’를 운영하는 김여사는 정통 개성음식을 전파시킨 주인공이다. 김여사는 소강이 초대한 수많은 손님에게 개성음식을 대접했고 ‘주방에서 역사를 만들어냈다’는 평을 듣게 되었다. 소강은 대단한 수집광이자 메모광이었다. 김여사는 약혼 시절부터 소강과 관계된 모든 물건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보관해 한남동 자택의 지하 공간을 ‘민관식 콜렉션’으로 만들었다. 이곳에는 1964년 동경올림픽부터 2004 아테네올림픽까지 각종 스포츠 대회의 기념품과 메달, 유학시절 노트, 신분증, 명함, 여권 등 5만여 점이 보관되어 있다. 지난해 ‘실물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민관식 콜렉션 탐험기’가 출간된 바 있다. 소강의 마지막 꿈은 개인 콜렉션을 박물관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소강은 지난 1월7일 기자에게 “단독 건물을 지어 소장품을 전시해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김동석기자 ds-kim@chosun.com
조성관기자 maple@chosun.com
타계한 小崗(소강) 민관식 박사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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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1-17, 1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