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이나 기다렸습니다' [2006-01-18 ]
다음은 17일 국가를 상대로 소송한 사단법인 '6.25전쟁납북인사협의회'이 공개한 납북인사 가족들의 사연이다.
<일반 가족 사연>
1. 안청자 (피납치자 안호철의 여동생)
납북자 성명 : 안호철 (1934년생)
납북 일자 : 1950년 8월 17일 (당시 춘천중학교 4학년생)
납북 사연 : 6.25전쟁 남침 소식을 듣고 피난길에 나섰으나 이미 북한군이 점령하여 포위망에 걸려 집으로 돌아 왔다. 8월 15일 북한 내무서원들이 국민회장인 안호철의 아버지 안상몽을 체포하러 왔는데 뒷문으로 도주하고 없자 아들 안호철을 연행해갔다. 안호철을 석방하여 귀가시킴으로 아버지 안상몽을 체포하려 했지만 또 실패하였고 다시 8월 17일 안호철을 연행해 간 후 소식 모름.
2. 이태영 (피납북자 이길용 언론인의 3남)
납북자 성명 : 이길용 (1899년생)
납북일자 : 1950년 7월 10일 (당시 언론인)
납북사연 : 동아일보사 기자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 당시 손기정마라톤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동아일보 기사)을 주도한 애국 언론인임. 6.25전쟁 직후 연행되었다가 석방 후 다시 보름뒤 2차 연행됨. 납북 동행 언론인의 증언에 의하면 평양에 도착 후 행방을 모름.
3. 김지혜 (피납북자 김점석의 장녀)
납북자 성명 : 김점석 (1913년생)
납북일자 : 1950년 7월 8일 (당시 변호사)
납북사연 : 붉은 완장을 찬 동네청년과 또 한사람이 잠시 조사할 것이 있다며 용산경찰서로 데리고 간 후 소식모름.
4. 이성의 (피납북자 이종령변호사의 5녀)
납북자 성명 : 이종령 (1909년생)
납북일자 : 1950년 5월 30일(음력) (당시 변호사)
납북사연 : 6.25전쟁이 나자 가족(자녀 7남매와 아내)에 대한 염려로 피난을 미처 못하고 있다가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하였다. 가족이 염려되어 가끔 들리곤 하셨는데 하루는 길에 사람도 없고 조사가 심하다고 하시면서 못 올지도 모른다고 하신 후 소식 두절됨.
5. 이길용(피납북자 이재관의 2남)
납북자 성명 : 이재관 (1915년생)
납북일자 : 1950년 7월 초순경 (당시 경성전기 주식회사 민주계열 노동조합 총무국장)
납북사연 : 6ㆍ25전쟁직후 피신 중 출근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출근하였다가 내무서원에게 연행된 후 소식두절. 같이 연행되었다가 탈출한 직장동료에 의해 납북된 것을 알았음.
6. 이미일 (피납북자 이성환의 2녀)- 가족회 대표
납북자 성명 : 이성환 (1920년생)
납북일자 : 1950년 9월 4일 (당시 유기공장 경영)
납북사연 : 납북 당일 오후 3시경 정치보위부 유소좌라는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 서북청년단에 금일봉을 기부한 것에 대하여 잠시 조사할 것이 있다며 집근처 지서로 연행됨. 곧 돌려 보낸다고 했는데 돌아 오지 않아 확인하려고 어머니는 지서로 갔는데 지서에서 나와서 전차를 타러 가기에 가까이 가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정치보위부에서 더 조사할 것이 있다고 내일은 나올 수 있을 거라는 답이 마지막이 됨. 그 후 동대문 경찰서에서 죄가 없어 1주일 후에 보내 준다고 하더니 다시 북한에서 지령이 내려와 못 내주고 안전지대로 대피시킨다고 한 후 소식 없음.
7. 최도완 (피납북자 최용주의 아들)
납북자 성명 : 최용주 (1920년생)
납북일자 : 1950년 8월 상순 오전 (당시 양곡배급소, 대한청년단 미아리동단 총무부장)
납북사연 : 경기도 광주군 일대와 서울 등 지에서 피신생활을 하던 중 내무서원에게 연행된 후 소식 모름.
8. 하영남 (피납북자 하격홍의 3녀)
납북자 성명 : 하격홍 (1921년생)
납북일자 : 1950년 8월 2일 (당시 하지제분공장 경영)
납북사연 : 6.25전쟁 발발 후 어머니와 저희 3자매를 데리고 시골로 피난을 갔다가 공장과 기계들이 염려되어 공장에 들렸다가 피납됨.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연행해 갔다고 함.
9. 김용준 (피납북자 김병기의 3남)
납북자 성명 : 김병기 (1894년생)
납북일자 : 1950년 8월 30일 (당시 상회 운영)
납북사연 : 납북 발생 당일 오후1시경 아버지가 큰매부의 피납소식을 듣고 알아보려고 종로4가 보령약국 근처에 갔는데 노사에서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정치보위부원에게 ‘저 사람이 장면박사 선거사무장을 한 사람’이라고 고발하여 연행당함. 이 사실을 아버지 친구가 알려 주었고 그 후 서대문형무소에 같은 방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이 탈출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있었던 사실을 알려줌. 효제동 대한청년단 단장이었던 사람이 38선 근처에서 도주하여 저희집에 같이 북소된 사실을 알려 주었고 또 이어서 평양에서 탈출해 나온 사람이 1950년 10월 15일경 저희 아버지는 신의주의 동측 탄광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마지막.
10. 김영범 (피납북자 김근호의 7남매 중 3남)
납북자 성명 : 김근호 (1907년생)
납북일자 : 1950년 7월 26일 (당시 동양기선주식회사 전무 취체역, 배재학당 이사장)
납북사연 : 종로구 가회동 자택에서 숨어 지내던 중 북한내무서원 3명과 동네 주민 4명에게 발각되어 종로구 내무서로 연행되어 갔다가 정치보위부로 간 후 소식 모름.
<공무원 가족 사연>
1. 이경찬 (피납북자 이주신의 3남)
납북자 성명 : 이주신 (1910년생)
납북일자 : 1950년 7월 7~8일경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
납북사연 : 6.25전쟁이 나고 미처 피신을 못한 아버지 이주신은 당시 검사 신분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껴 은신하였고 남은 가족들(어머니와 6남매)은 친척집에 흩어져 피신하였다. 은신중에도 가족이 걱정이 되어 7월 초순 인현동 친척집에 맡겼던 장남을 만나고 어머니와 막내가 있던 종로 3가로 가던 도중 길에서 납치되어 정치보위부로 압송된 것을 목격자가 알려주었다. 정치보위부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수감된 후 1950년 9월 야간에 전차로 청량리로 압송도중 신설동에서 탈출에 성공한 당시 연합신문 편집국장 배상하씨(1955년3월~5월“희망”에 납치인사 생환기 계제)가 소식을 알려 주어 납북된 사실을 알게 됨. 그 후부친은 도보로 우이동→동두천→한탄강을 거처 평양까지 끌려가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음을 탈출한 동료 납북자가 알려주어 납북되었음을 확인하였음.
2. 권영환 (피납북자 권태술의 아들)
납북자 성명 : 권태술 (1903년생)
납북일자 : 1950년 8월 8일 오전8시경 (당시 서울시 중구청장)
납북사연 : 1950년 6월 27일 북한군의 서울진입 전날 밤에 근무지인 중구청에서 철야 근무한 후 막내의 출산(1950년 6월 27일생)으로 귀가함. 정부가 서울이 안전하다는 방송을 믿고 피난하지 않음. 납북 당일 오전 8시경 고위직 공무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북한 정치보위부요원에게 자택에서 연행된 후 소식 두절.
3. 이상일 (피납북자 이봉우의 아들)
납북자 성명 : 이봉우 (1924년생)
납북일자 : 1950년 8월 21일경 (당시 농촌진흥청 곤충계장)
납북사연 : 당시 곤충표본 제작의 1인자로 직장 출근시 안면이 있는 사람이 와서 고발소(경찰서)에서 확인할 사항이 있으니 가자하여 함께 온 내무서원 3명에게 연행된 후 소식모름.
4. 오세영 (피납북자 오헌식의 아들)
납북자 성명 : 오헌식 (1899년생)
납북일자 : 1950년 8월 1일 (당시 치안관)
납북사연 : 6.25전쟁 남침을 한 북한은 서울을 점령하자 내무서원들이 대한민국 정부 공무원을 찾아 다니며 살해하거나 색출 연행하였다. 당시 영등포서의 치안관으로 근무하던 아버지는 친척집으로 피신하여 있던 중 누군가에 밀고에 의하여 내무서원들이 집으로 들어와 권총으로 위협, 강제 납치하여 간 후 소식 두절됨.
5. 서정식 (피납북자 서승근의 아들)
납북자 성명 : 서승근 (1907년생)
납북일자 : 1950년 7월초 (당시 대법원 행정처 경리과장)
납북사연 : 가족과 함께 피난가는 것이 여의치 않아 근무처에서 일을 보던 중 동료들과 함께 피납됨.
[자유북한방송]
국가 상대 소송한 납북인사 가족들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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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1-18, 16: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