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右갈등 극복에 성공한 스페인 정치의 교훈
● 프랑코 死後 左翼인 사회노동당에서는 노동변호사 출신인 곤살레스가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포기
● 右翼 국민당은 프랑코 시대의 정치인인 프라가가 老壯 정치인들의 2線 후퇴를 주도하면서 아스나르 등 젊은 後進을 양성해 정권 탈환
河 相 旭 변호사〈abogado@chol.com〉
1960년 부산 출생. 칠레大 법학과 졸업. 스페인 마드리드大 법학대학원 졸업. 칠레 및 스페인에서 변호사 자격 취득. 前 이건산업㈜ 관리본부장. 現 안데스링크㈜ 부사장. 한국외국어大 통번역대학원 겸임교수. 역서 「칠레노동혁명」, 「고양이목에 방울달기」 등.
『프랑코 장군은 반란을 일으킬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프랑코軍의 총탄에 쓰러지는 인민전선 측 병사. 스페인의 뿌리 깊은 좌우익 갈등은 內戰에서 프랑코 장군을 중심으로 뭉친 右翼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지리상의 대발견」 이후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전역에서 覇權 국가로 君臨했다. 1588년 스페인의 無敵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패배한 이후 스페인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정치·경제적으로 도약하던 18세기 말~19세기 초, 스페인은 계몽주의와 反계몽주의 간에 치열한 갈등을 겪었고, 나폴레옹의 침략까지 받았다(1808~1811).
이때 스페인 사람들의 저항은 고야의 「1808년 5월3일의 銃殺」이라는 그림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이 와중에 스페인은 中南美 식민지를 상실했다.
베네수엘라를 筆頭(필두)로 하여 거의 모든 中南美 국가들이 차례로 독립하면서, 스페인은 세계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상실했다. 19세기 후반에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쿠바와 필리핀을 잃었다.
國運이 이렇게 쇠퇴하는 가운데, 스페인에서는 王黨派와 공화파, 급진혁명파들 간의 갈등이 끝없이 이어졌다. 혁명과 反혁명, 軍部의 쿠데타가 되풀이됐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산업혁명과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던 19세기 내내, 스페인은 內訌(내홍)에 시달렸다.
19세기 말 사회주의, 無정부주의 思潮가 유입되면서 스페인의 정치적 혼란은 더욱 격화되었다. 귀족과 가톨릭 교회에 의한 前근대적 지배구조는 급진혁명 세력들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됐다. 1920년대에 이르러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군사정권이 들어서 잠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리베라 정권은 1930년 세계 대공황과 함께 퇴진했고, 이듬해에는 王政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됐다.
1931년 들어선 공화국 정부는 전면적인 사회 개혁을 추진했으나, 左右 양편 모두 만족시키지 못했다. 1933년에는 지주와 가톨릭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右翼 세력이 정권을 잡아 反動的인 정책을 폈으나, 사회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1936년 정권을 잡은 인민전선은 右翼정권下에서의 反動정책에 대한 반발에서 더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左右翼 간의 테러가 빈발했다.
1936년 7월17일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프랑코는 모로코 식민지 전쟁에서 勇名을 떨쳐 1926년 불과 34세의 나이로 장군이 된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젊은 장성이었다.
공화정이 수립된 후 과도정부 수반 알카라 자모라는 軍部의 젊은 新星이던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을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그 보고서 내용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프랑코 장군은 반란을 일으킬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 「국가의 공권력이 길바닥에 나뒹굴고, 조국이 무정부주의자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고 판단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는 칼을 뽑을 것입니다』
당시 통합사관학교 교장이던 프랑코도 생도들에게 『우리는 공화국 정부에 충성할 의무가 있다』고 훈시했다. 右翼 세력들로부터 정계 진출을 권유받아도 프랑코는 이를 거절했다. 프랑코는 흔히 말하는 「정치군인」이 아니라, 「야전군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左翼 인민전선이 집권하고 「국가의 공권력이 길바닥에 나뒹굴고, 조국이 무정부주의자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고 판단하는 상황이 오자, 그는 칼을 뽑았다.
右翼 정파 간 異見 접고 단결해 內戰 승리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 역사에 흔히 있었던 수많은 쿠데타 가운데 하나로 끝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미 나라 전체가 둘로 갈라져 있는 상황에서 이 쿠데타는 곧바로 「內戰」으로 번지고 말았다.
한쪽에서는 「反파시즘」의 기치 아래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무정부주의, 자유주의자들이 모여들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反공산주의」의 기치 아래 왕당파, 파시스트, 전통적 보수주의자, 가톨릭 교회, 軍部가 뭉쳤다.
內戰 초기에는 인민전선 정부가 그렇게 불리한 것만도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공화국 수호를 위해 모여들었고, 軍部에서도 해군이나 사병들은 정부에 충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민전선 정부가 소련의 지원을 받아들이면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면서 인민전선 정부 측의 戰列이 弱化되기 시작했다. 스탈린이 스페인 정부에 파견한 비밀경찰 요원들은 인민전선 내부의 非공산주의자들은 물론 反스탈린 공산주의자들까지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민중들의 자발적인 투쟁 역량은 弱化됐다.
右翼 세력들도 「反공산주의」라는 기치 아래 모였다뿐이지, 이질적인 정치 세력들의 결합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독일의 나치즘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추종하는 세력과 王政復古를 꾀하는 세력 간에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 右翼 세력은 內戰 상황 속에서 政派 간의 異見을 접어두고 「反공산주의」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전쟁 영웅 프랑코를 중심으로 뭉쳤다.
스페인 內戰에서 右翼 세력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나치 독일이나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프랑코를 지원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左翼 진영은 스탈린주의자들의 독재로 분열한 반면, 右翼 진영은 대동단결한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프랑코 總統(총통)은 가혹한 鐵拳(철권)통치를 했지만, 적지 않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프랑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中立정책을 고수해 戰禍를 피했다. 內戰 당시 그를 지지했던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코는 교묘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參戰을 회피했다. 그는 히틀러의 參戰 요구에 마지못해 스페인 파시스트들로 편성된 의용군(푸른 사단)을 편성해 러시아 전선에 파병했지만, 戰勢가 기울자 바로 철수시켰다. 프랑코는 다른 한편으로 영국 등 연합국에 철광석을 수출해 연합국의 환심을 샀다. 덕분에 스페인은 內戰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에 말려드는 불행을 피할 수 있었고, 프랑코 자신도 히틀러나 무솔리니처럼 非命에 가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동안 스페인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됐다. 이런 고립은 오래 가지 않았다. 冷戰이 시작되자 프랑코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1953년에는 美軍의 스페인 주둔을 허용했고, 1955년에는 유엔에 가입했다.
프랑코는, 경제적으로는 집권 초기 시행했던 자급자족경제 정책에서 탈피해 1959년 「경제안정계획」을 수립해 경제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프랑코는 1975년 11월20일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부터 자신의 死後에 철저히 대비했다. 그의 유해가 묻힌 「死者의 계곡」은 1940년 착공, 20년 만에 완공된 현대판 피라미드이다. 거대한 암반에 길이 255m, 높이 150m의 대형 터널을 뚫어서 만든 「死者의 계곡」에는 스페인 內戰에서 숨진 5만여 명의 無名용사들이 잠들어 있다.
『쿠데타를 성공시키려면 내 시체를 넘고 가라』
프랑코는 1968년에 자신의 후계자로 1931년 추방됐던 스페인 부르봉 王家의 후손 후안 카를로스 왕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모든 단도리를 다 해놓고 천수를 누린 뒤 세상을 떠난 그를 두고 어떤 역사가는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독재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프랑코가 사망한 지 29년이 지난 2004년 현재 스페인에서의 프랑코의 位相은 어떠한가. 그는 이제 스페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이미 오래 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인물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현재 스페인 전역에 프랑코 총통의 銅像(동상)이 딱 하나 남아 있다. 마드리드 市 정부 청사 뒤쪽에 위치한 청동 기마像이다. 어떤 날에는 그 앞에 꽃이 놓여 있고, 어떤 날에는 페인트를 뒤집어쓴 채 발견되기도 한다. 물론 70~80代 스페인 노인들 중에는 아직도 프랑코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진 쪽이나, 증오를 계속 간직하고 있는 쪽이 공존하지만, 이제 대다수의 스페인 국민들은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1975년 프랑코의 사망과 함께 그가 지명해 놓았던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국왕에 즉위했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프랑코 체제 유지를 요구하는 保守 세력과, 파시스트 체제의 청산을 요구하는 민주화 세력, 그리고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共和政의 부활을 요구하는 급진세력 사이에서 점진적인 민주화 작업을 시작했다.
1977년에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던 아돌포 수아레스가 中道右派 세력들의 연합정당이었던 UCD를 이끌고 1977년 첫 민주적 총선에서 승리했다.
이렇게 걸음마를 시작한 스페인의 민주주의는 1981년 2월23일 큰 시련을 겪었다. 안토니오 테헤로 중령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 시도였다. 이날 오후 6시21분 테헤로 중령은 200여 명의 보안군을 이끌고 스페인 下院 의사당을 점거했다. 이들은 위협사격을 하며 국회의원 및 각료들을 인질로 잡고, 18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일부 장성들도 쿠데타를 지지하고 나섰다. 지방에서는 일부 병력들이 쿠데타에 호응해 주요 시설들을 점거했다.
자칫 壓殺(압살)당할 뻔한 스페인 민주주의를 구한 사람은 바로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었다. 그는 쿠데타가 발발한 다음날인 2월24일 새벽, 군복 차림으로 방송에 나와 『쿠데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스페인의 민주주의 정착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왕궁으로 찾아온 쿠데타 측 장성들에게 『쿠데타를 성공시키려면 내 시체를 넘고 가라』고 일갈했다.
국왕의 단호한 결의 앞에 다음날 오후 쿠데타軍은 굴복했다. 테헤로 중령은 이후 15년간 복역한 뒤 1996년 출옥했다.
노동변호사 출신 총리 黨강령에서 마르크스주의 삭제
1982년 총선에서 펠리페 곤살레스의 사회노동당이 승리했다. 사회노동당은 1879년 마르크스주의를 標榜(표방)하는 프롤레타리아黨으로 출발한 스페인의 전통적인 左翼정당이다. 極右 파시스트 독재자였던 프랑코 총통 死後 7년 만에 左翼 정당이 집권한 것이다.
사회노동당을 승리로 이끈 펠리페 곤살레스는 노동변호사 출신으로 집권 당시 만 40세에 불과했다. 그는 프랑코 정권 말기인 1974년 10월 프랑스에서 비밀리에 개최된 사회노동당 제26차 전당대회에서 32세의 나이에 사회노동당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펠리페」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진 곤살레스는 스페인 전국노동총연합(UGT) 회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1966년 사회노동당 세비야 지구당 청년부에 가입한 그는 세비야 法大를 졸업한 뒤 노동변호사로 일하면서, 프랑코 정권下에서 탄압받던 노동운동가들의 변호에 힘썼다.
프랑코 死後, 프랑코 총통의 鐵拳정치 아래서 약 40년간의 공백기간을 거친 사회노동당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黨內 舊세대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급진 개혁을 고집했지만, 서독 사회민주당의 영향을 받은 스페인의 젊은 사회주의자들은 과거로부터의 訣別을 시도했다.
1979년 5월 곤살레스는 사회노동당의 黨憲 및 黨規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다』는 표현의 삭제를 제안했다. 黨內에서는 舊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곤살레스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나, 같은 해 9월 임시전당 대회에서 再신임됐다. 그의 뜻에 따라 사회노동당은 黨憲·黨規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삭제했다.
이로써 사회노동당은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정당, 계급 정당에서 좀더 넓은 범위의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의회주의에 입각한 유럽식 中道左翼 정당으로 다시 태어났다. 사회노동당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이었던 스페인 전국노동총연합(UGT)은 이러한 변신을 「변절」으로 간주해 등을 돌렸지만, 좀더 넓은 계층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에 힘입어 펠리페 곤살레스는 1982년 총선에서 승리한 뒤 1996년 右翼정당인 국민당에게 정권을 넘겨줄 때까지 4회 연속 집권했다. 이 기간 중 스페인은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에 정식 가입하고, 1992년에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유치했다. 스페인은 유럽의 2등 국가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해 프랑스·독일·영국 등 다른 유럽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불멸의 지도자」 마누엘 프라가
곤살레스의 집권 기간 左翼 사회노동당에게 정권을 내준 스페인 右翼 세력도 뼈를 깎는 자기 개혁에 들어갔다.
1993년 총선에서 젊은 지도자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가 이끄는 中道右翼 국민당은 35%의 지지를 얻었다. 당시 사회노동당의 지지율은 39%였다. 프랑코 死後 18년, 사회노동당 집권 11년 만에 右翼 세력이 再집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다. 이어 국민당은 1996년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에 성공했다. 다만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해 지역 정당인 「카탈루냐 동맹」과 聯政을 구성했다. 2000년에는 투표자의 44.62% 지지를 얻어 과반수 의석(총 350석 중 183석)을 확보했다.
이러한 국민당의 배후에는 마누엘 프라가라는 원로 정치인이 있다. 1922년 출생한 그는 프랑코 총통 말기에 공보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1970년대 초, 프랑코 死後에 대비하기 위해 右翼 정치인들의 규합이 시작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항상 프라가가 있었다.
1975년 프랑코가 죽은 뒤 右翼 세력은 일곱 개의 群小 정당으로 쪼개졌다. 프라가는 이들을 통합해 「국민동맹」이라는 연합체를 만들었다. 국민동맹은 1989년 黨名을 「국민당」으로 改稱, 右翼 정당들의 연합체에서 완전한 단일黨으로 변모했다.
1990년 4월 제10차 전당대회에서 국민당은 유능한 행정변호사 출신의 젊은 정치인 아스나르를 黨대표로 선출했다. 국민당은 37세의 청년 정치인을 黨의 얼굴로 내세우면서 프랑코 독재와는 완전히 단절된 세대교체의 의지를 보여 준 것이다.
「프라가의 정치적 아들」 아스나르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지도력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곤살레스가 1979년 사회노동당의 黨憲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삭제함으로써, 舊 左翼 세대와의 단절에 성공해 1982년부터 4차에 걸친 연속 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것처럼, 아스나르도 과거 프랑코 독재의 殘影(잔영)을 지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黨 지도부를 젊은 층으로 교체하고, 정당의 로고를 참신한 푸른색 바탕으로 바꾸면서, 이제는 과거에 발목 잡혀 있는 보수 右翼이 아니라, 새로운 유럽연합의 시대에 걸맞은 젊고 새로운 정당으로 탈바꿈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마누엘 프라가는 아스나르가 黨을 개혁하는 동안, 그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1922년생인 그는 1980년대에는 아직 60代로,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스페인 정치의 중심에서 활약할 수도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는 나이든 지도자들의 2線후퇴를 주도하고, 아스나르와 같은 後進을 양성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지었다. 대외적으로는 마거릿 대처 前 영국 총리, 조지 부시 前 미국 대통령과 함께 세계 보수주의 정당의 결집체인 「국제민주연합」을 설립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프라가는 현재 파킨슨씨病을 앓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갈리시아 지방정부의 수반으로, 스페인 국민당 명예총재로 활동하고 있다.
아스나르 집권 기간(1996~2004)의 스페인은 1인당 GDP 2만 달러 시대 (2002)에 돌입하고, 경제성장률도 연평균 4%대를 유지하는 등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다.
1989년 창설 당시 국민당에 드리워져 있었던 프랑코의 그림자는 이제 완전히 국민당을 떠나갔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나 프랑키즘(프랑코주의)의 敎條的인 사상논쟁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나 프랑코주의 모두 이미 역사 속으로 흘러갔고, 현재의 스페인 정치와는 더 이상 연관이 없다는 것이 일반 대중의 공통된 인식이라 하겠다.
지난 27년간 네 명의 총리 모두 40代
2001년 미국에 9·11 테러가 있었다면, 2004년 유럽에는 3·11 스페인 테러가 있었다. 나중에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밝혀진 이 테러로 인해 약 200명의 무고한 스페인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총선을 불과 사흘 앞둔 시점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국민들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派兵을 결정하였던 아스나르 총리가 3·11 사건 발생 직후부터 이 테러를 바스크분리주의자(ETA)의 소행으로 몰아가자, 야당에서는 이를 정치적 造作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알카에다의 소행임이 확실시되는 여러 가지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스페인 여론은 급격히 집권당에 등을 돌렸다. 결국 3월14일 총선에서는 사회노동당이 승리했다
左右갈등극복 성공 스페인정치의 교훈
- 월간조선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06-01-30, 0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