遠交近攻-북한을 양파껍질 벗기듯 해야

당면목표는 통일이지만, 최종목표는 우리의 생활 문화권을 북방으로까지 넓힌다는 것이었다
*1999년5월호 월간조선에서.

<나는 생각했다. 7·4 공동성명, 6·23 선언이 있었지만 남북한 관계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판문점에서 양쪽 대표들이 얼굴을 맞대고 만나도 평행선만 달릴 뿐이다. 따라서 국제적인 주변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유엔에서의 표를 압도적으로 많이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애는 썼지만 이것을 못했던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제3세계 국가들, 특히 아시아·아프리카의 비동맹국들은 대부분 저개발국들이었기 때문에 물자가 풍부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진영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서방측 원조방법에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분석을 해 보니 이 사람들이 원조를 하면서 물건을 주면 상대방이 고맙다고 느ː途?마음도 줘야 하는데, 물건만 던져주고 마음은 주질 않았다. 도와주는 방법이 졸렬했던 것이다. 이 틈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사람이 金日成이었다. 金日成은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적은 비용으로 저개발국가들의 마음을 교묘하게 사로잡았다.

그러던 것이 내가 보안사령관을 맡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다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가 좋다 해서 서방을 차버리고 공산주의쪽에 접근해 한 속(屬)이 되고 보니 사회를 뒤집어놓고 국가를 전복시키고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들 제3세계의 기성세대들이 「공산주의 하면 사람도 죽고 나라도 뺏긴다」고 경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특히 남북한 대치상태에 대해서는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가 썼던 원교근공(遠交近攻) 전략을 생각했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구사했던 이 전략은 「멀리 있는 나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힘을 얻은 뒤에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해 때려 부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전략을 남북한 관계에 원용(援用)해야겠다고 작정했다. 북한의 문이 안 열리니 저 먼 데로 돌자고 판단한 것이다.

『제1차로 비동맹국, 그 다음에 북한과 관계가 있는 나라들, 즉 동구권, 소련과 중국까지 우리가 친밀해지자』고 작정했다. 어차피 남북통일이라는 것은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도 개방만 시키면 되는 것이다. 「개방=통일」이라는 것이 나의 통일에 대한 기본개념이었다.

『그러니 (북한을) 양파껍질 벗기듯이 저 둘레서부터 벗겨 나가자. 그래서 완전개방이라는 여건만 되면 통일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이 우리가 전쟁을 피하고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르고 좋은 방법이다』

나의 북방정책을 간단히 정리하면 당면목표는 통일이지만, 최종목표는 우리의 생활 문화권을 북방으로까지 넓힌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같은 구상을 내 나름대로 현실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절호의 기회가 서울올림픽이었다. 나의 전략이 맞아 떨어졌다고 해야 할지, 우리 외교관들이 비동맹국들을 열심히 껴안은 결과 金日成에게 갔던 표가 우리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것이 힘이 되어 1981년도에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6共을 출범시키면서 민족의 자존(自尊)을 특히 강조한 바 있다. 따라서 내가 강한 의지를 갖고 추진한 것이 바로 자주(自主)외교였다. 자유진영에 속한 나라들이 공산진영 나라들과 마음대로 교류하고 수교하고 다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남의 눈치보고, 추종하고, 이게 무슨 자주외교권을 가진 나라인가. 그러고도 민족의 자존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하고 자문(自問)하곤 했다. 북방외교에 내재되어 있는 나의 기본철학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우리 스스로가 자주권을 갖는 외교는 당시만 해도 하나의 획기적인 변화라고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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