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증언: "김일성의 초대 거절한 사연"

초청 시기가 金日成 생일 전후여서 아무리 정상회담이 중요하다 해도 모양새가 나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99년 5월호 월간조선에서 인용


金日成이 생일 맞춰 盧대통령 초청

盧대통령은 재임중 부단히 북한측과 特使, 밀사(密使)를 통한 對北접촉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남북 정상회담의 꿈이 무르익기도 했다. 과연 남북 정상회담은 어떻게 논의됐으며, 왜 좌절됐을까.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을 들어본다.

<남북 정상회담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북한과 중국측의 여건이 덜 갖춰졌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金日成의 입장에서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려면 뭔가 플러스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고, 자신도 서고 해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안 한다』는 말은 안하고 『하자』는 원칙에만 동의하면서 자꾸 핑계를 댄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하여 金宗輝 수석은 다음과 같이 보충증언을 했다.

『내가 북한을 여러 번 갔는데 그 가운데 강영훈(姜英勳) 총리, 정원식(鄭元植) 총리 모시고 갔을 때였다. 金日成을 만나 독대했을 때 두 번 다 내가 배석해서 기록했는데, 金日成은 꼭 「회담이 잘 되어 수표(서명)하게 되면 대통령 각하와도 만날 수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한 번은 북한측이 실제로 盧대통령을 북한에 초청했다. 1992년 봄 윤기복(尹基福)이 特使로 親書와 초청장을 갖고 서울에 와서 삼청동인가 안가(安家)에서 盧대통령이 접견했다. 그러나 盧대통령은 그 초청을 거절했다. 초청 시기가 金日成 생일 전후여서 아무리 정상회담이 중요하다 해도 모양새가 나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정상회담을 위한 몇 군데 채널이 있었고, 정상회담이 중요하긴 했지만 모양새를 구겨가면서까지 할 수는 없었다』

盧 전 대통령은 金日成이 6·25의 전범(戰犯)이란 의식을 확고히 하고 있었던 점을 육성증언을 통해 밝혔다.

<나는 북한의 연형묵(延亨默) 총리가 서울에 왔을 때 대충 이런 뜻으로 이야기를 했다. 『金日成 주석이 6·25를 일으킨 사람이다. 6·25가 민족을 그렇게 많이 죽였고, 피를 흘리게 했으니까 그만큼 그 죄의 당사자다. 나는 그 당시 학생이었다. 나 자신도 전쟁터로 나가 싸우고, 또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이 죽었다. 피해자다. 이 엄연한 비극의 역사가 앞으로 우리 역사에서 지워지겠느냐. 안 지워진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잘못을 뉘우치고 무언가 죄값을 해야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양극으로 대립하고 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런 비극이 더 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남북 협력관계가 이루어져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을 안긴다면 죄를 벗는 큰 일을 할 것이다. 앞으로 金주석이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이렇게 했을 때 큰 보상을 치르는 효과가 있는데, 나는 아직 젊다. 나는 앞으로 누구와도 만날 기회가 있다. 그런데 당신들 金日成 주석은 기회가 없지 않느냐. 노령이 됐으니까. 우선 다른 누구를 위해서보다도 정상회담은 당신들 주석을 위해서도 백번 좋은 일이다. 그러니 이 뜻을 솔직하게 그대로 전하세요』

나는 그 때 延亨默에게 이야기하면서 「6·25 전쟁에 대한 범죄자」라는 표현은 쓰지 않은 것 같다. 延총리는 아주 진지한 입장이 되어 『예 알겠습니다. 꼭 말씀을 드리겠습니다』고 했다. 내가 본 延亨默은 착하고 무던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金達鉉을 높게 평가

나는 그때 진실로 金日成을 위해 마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 엄청난 역사적 비극을 낳은 범죄자 소리는 하지 않고 「당사자」, 「장본인」, 「책임자」…라는 식의 표현을 내가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은 배석자가 감시자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못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정상회담 초청장을 들고 온 尹基福 때도 감시자 한 사람이 따라 왔는데 어쩌다 「존경하는 金日成 수령」「위대하고…」하는 수식어를 빼먹으면 자기 스스로 깜짝 놀라 그 말을 집어넣은 후에 다시 되풀이하곤 했다. 나는 그가 참으로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난 북한 사람 중 특별히 「가능성이 있겠다」고 느낀 사람이 김달현(金達鉉) 부총리였다. 金達鉉은 자기들 어려운 이야기를 솔직히 했다. 金達鉉을 보고는, 예컨대 우리가 「당근과 채찍」정책에서 당근을 많이 주면 효과가 있겠다고 느꼈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에 이어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1990년 10월에 徐東權 안기부장이 밀사로서 북한에 간 것은 무슨 목적이었습니까.

『徐東權 부장이 먼저 갔는지 尹基福이 먼저 왔는지 잘 모르겠는데…. 남북간에 정상회담을 의제로 하는 중요 현안문제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총리회담 등등을 통해 확인하는 방법이 있고, 特使를 보내 확인하는 방법들을 겸해서 쓰지요. 아마 그때도 「서로 만나자」 이런 목적이었어요. 남북간에 특별히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그럼 정상회담이 주목적이었습니까.

『통상 그렇게 되지. 정상회담에 대해 일부 얘기가 나왔지만 그 자체에 대해 金日成이 반대한 것은 아니었어요. 상당히 무르익어갔지요. 「총리회담 수표하면 합시다」그렇게 나왔는데, 한 가지 찬물을 끼얹은 것은 자기 생일 때 나를 초청했단 말이야. 이런 것이 실질적으로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되지 않았느냐 생각되어요. 자기는 무엇인가 안할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생일을 기회로 해서 초청했는지도 모르지』

―金日成의 서명이 달린 초청장을 가지고 온 겁니까.
『그렇지요. 확실한 날짜는 모르겠지만 金日成 생일 그 언저리였어요』

―오버도퍼가 쓴 「두 개의 코리아」를 보면 서동권(徐東權) 안기부장이 1990년 10월에 북한에 가서 金日成·金正日을 만난 사실은 저의 취재와 일치하는데, 1992년에 尹基福이 와서 4월15일 金日成 생일에 맞춰서 정상회담을 하자고 제의한 데 대해 (盧대통령께서) 거절하고, 대신 徐東權 안기부장을 북한에 보냈다고 되어있습니다.

『안 갔을 걸. (徐東權 안기부장을) 내대신 보낸 적은 없습니다』

―그때 尹基福 밀사가 갖고 온 것이 정상회담 제의라고 봐도 됩니까.

『초대지. 한편 생각하면 때와 장소와 조건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만나는 것이 남북한에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가졌지. 그러나 당시 초대하는 성격이 정상적인 정상회담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축제에 초대한다는 차원에서 남북관계를 억지로 만들 수는 있겠지만, 내포돼 있는 성격이 본질과는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문제

―북한측이 놀라울 정도로 양보해서 남북 기본합의서에 서명한 이유는 그것을 기초로 미국 일본과 수교하려고 한 것 아닙니까.

『그런 목적이 있었지. 내가 재임중일 때는 남북 당사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 안된다는 걸 자기들 나름대로 확인한 거지요. 우리가 요지부동한 입장이었고. 또 7·7선언을 위시해서 그 해 유엔을 방문해서 내가 국제무대에서 공산국가들, 자유진영, 非자유진영 할 것 없이 북한을 도와달라고 호소를 했다고. 「우리와 북한이 형제같이 협력관계가 되어 국제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도와주십시오」라고. 이런 분위기가 됐으니까 애당초 북한이 우리를 제끼고 뭘 어떻게 하겠다는 명분과 힘이 빠진 거지』

―그렇다면 7·7선언의 전략적 포석은 이걸 통해서 동구권, 공산권에 접근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만든 점, 그리고 남북관계에서 북한의 첨예한 공격을 둔화시키는 포용의 논리를 개발한 것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북방정책의 기본 논리가 7·7선언에 다 들어 있는 것이지요』

―그 뒤에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이 발표됐습니다. 여기서는 원칙이 천명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제2단계에 가면 국가연합을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건 너무 구체적이었지 않느냐, 그렇게 되면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각료회의도 해야하는데, 이렇게 되면 북한 정권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의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북한이 고려연방제를 내놓은 것에 대해 우리가 한걸음 나아가는 방안이에요. 물론 그 전에 협력관계, 동질성을 회복하고 교류협력을 증진해서 화해를 하는 과정에서 정상회담도 하고, 문화교류도 하는 상태에서 이제 연방제냐 국가연합이냐 하는 개념이지요. 우리가 분석한 것으로는 연방제가 맞지 않는다고 보았고, 연합이란 것은 오히려 저들을 안심시키는 뜻이 강하게 읽었다고 봐요』

―남북기본합의서 전문(前文)을 보면 「이 합의서는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잠정적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다」그러니까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가 아니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을 권력 실체로 인정하지만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盧 전 대통령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통일이 될 때까지 이처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어느 단계에 가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해서 남북관계가 아닌 국제관계로 하는 것이 좋습니까.

『이중성이 있어요. 우리도 이익이 되고 북한도 이익이 되는 것은 내부거래가 되는 것이고. 예를 들어 WTO 체제에서 국가 대 국가로 하게 되면 도와주고 싶어도 못 도와주는 상황이 됩니다. 우리가 쌀을 지원하면 이게 WTO에 위배돼요. 당장 미국에서 항의한다고. 반대로 국제사회에 국가의 형태로서, 예컨대 유엔 표결과정에서 한 표보다는 두 표가 되는 것이 유리하면 국가로 인정을 해야지. 실질적으로 인정을 안할 수가 없잖아』

孫柱煥 전 장관은 『국내법에 의하면 북한은 국가가 아니고,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대등한 주권국가』라고 설명했다.

내적으로는 2중성 유지해야

―그런데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면 대사도 교환해야 하고,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나 통일로 갈 때 우리가 독립된 주권국가에 개입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면 헌법을 개정해야 하고, 전범(戰犯)이나 범죄단체 비슷한 조직에게 국가라는 격을 갖춘 월계관을 씌워준다는, 정의(正義)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로 공인(公認)할 필요 없이 지금 식으로 실체만 인정하는 애매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것은 대내적인 문제지. 대외적으로는 실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봐요. 북한이 유엔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라면 모르지만, 가입된 상태다 이 말이야. 국내적으로는, 나쁜 말로 하면 괴뢰집단이지요. 그러나 북한은 유엔가입국이 준수해야 할 사항도 서약하고 가입한 것이거든. 이걸 가지고 대외적으로 국가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어요. 金日成이가 내한테 초청장 보냈을 때 「대한민국 대통령 盧泰愚 각하」이렇게 썼거든』

―남북기본합의서에서는 나라 이름은 안 쓰고 남측, 북측 이렇게 썼습니다. 말하자면 양국(兩國)간의 관계라는 말을 쓰지 않은 거죠. 북한은 절대 남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하면 1민족 2국가가 되어 자기 노선에 위배되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앞으로 연구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북한은 국가가 아니다」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金正日도 마찬가지지요』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면 우리의 민족사적 전통과 부딪칩니다. 우리는 통일신라 이후 1민족 1국가라는 자랑스런 전통을 지금까지 유지해 왔습니다. 만일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면 한반도에 1민족 2국가가 생기니까 북한도 인정할 수 없고, 북한이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도 인정할 수 없는 겁니다.

『反국가단체가 유엔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중적이라고 볼 수 있지. 내적으로는 2중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어요』

『남북관계 발전 위해 상호주의 원칙은 꼭 지켜져야』

―북방정책이나 남북관계에 대한 盧대통령의 설명을 들으니까 6共의 통일정책은 결국 金大中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같다고 봅니다.

『지금 정부도 전에 내가 했을 때처럼 남북관계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겠지요. 하지만 한 번 벗어난 것을 다시 잡기는 힘들지 않나 생각해요. 그게 참 안타까운 일이야. 또 한가지 있죠. 당사자 해결원칙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상호주의 원칙입니다. 북한보다 유연하게 대응하고, 더 너그러울 수는 있지만, 남북관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상호주의 원칙은 꼭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金泳三 정부의 상황이 이해되는 변수는 1993년에 들어가 북한 핵문제가 굉장한 국제문제가 되니까 「우리의 문제」라면서 남북간에 해결하려고 할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미국에 고삐를 내준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미국과 우리가 한 덩어리가 돼야지요. 미국이 우리를 제껴놓고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겁니다』

孫柱煥 전 장관은 『남북관계에서 핵문제는 두 가지 성격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핵확산 금지가 미국 대외정책의 기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국제문제입니다. 그런데 핵이 북쪽에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존에 관한 문제니까 6共에서는 핵문제까지도 남북 당사자 문제로 다루었고, 그 일환으로 비핵화선언이 나온 것이죠』

盧 전 대통령은 『6共 때도 미국이 핵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의사와는 관련없이 일방적인 조치를 취하려 했지만, 우리가 끝까지 막았다』고 설명했다.

『북한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이든 핵문제만은 미국이 강력한 주도권을 쥐는 위치에 있어요. 북한에 관해서는 그러나 「내가 당신네 힘을 실질적으로 빌리고 있지만 직접은 안된다. 나를 통해서 해야 한다」그렇게 나왔어요. 한반도 비핵화선언도 처음에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하려고 달려들었다고. 세계는 있는 전술핵(戰術核) 철수를 선언하면서 한반도에도 비핵화선언을 하려는 것을 내가 브레이크를 걸어 「안된다. 이건 내가 해야 한다」고 나온 거야. 그러니 북한도 「이거 미국과는 안되겠구나」해서 비핵화선언도 우리와 함께 한 겁니다.』
(편집자 注:1991년 11월8일 盧대통령은 부시 대통령과의 협의를 거쳐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발표했으며, 이어 1992년 2월19일 남북한 총리가 평양에서 「남북한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각각 교환, 이날로 발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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