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6·29 선언이나 5共청산에 대한 글들을 보면 사실이 아니면서 사실인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밝히는 것도 구차스런 변명 같아 그 동안 침묵을 해 왔다. 13대 국회의원 선거는 개정 법률에 의해 소선거구제로 실시하게 되었다. 선거일은 4월26일로 확정되었는데, 우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한 여세를 몰아 總選(총선)에서도 압승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당에서는 蔡汶植(채문식) 대표와 沈明輔(심명보) 사무총장이, 청와대에서는 崔秉烈(최병렬) 정무수석이 선거를 관장했다. 선거기간 중 간간이 당선 예상자 수를 보고 받았는데, 언제나 3분의 2 내외의 압승을 거둔다는 자신에 차 있었다. 아무리 못해도 과반수는 넘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너무나 의외였다. 총 2백24석 중에서 민정당이 87석, 평민당 54석, 민주당 46석, 공화당 27석, 무소속 10석으로 여당이 과반수에 훨씬 못 미치는 與小野大(여소야대)의 어려움이 연출된 것이다.
우리 쪽은 말 할 것도 없고 언론과 국민들조차도 의아해 할 정도의 참패였다. 참으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원인 없는 결과 없다」면서 여당이 너무 과신하고 교만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국민들은 그런 여당을 보면서 6共이 독재체제로 회귀할 수 있다고 우려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선거 결과를 하늘의 뜻으로 알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내가 1987년 대통령 선거에 임하면서 선언한 「3金시대의 종말」을 아직은 하늘이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金泳三씨와 金大中씨는 수십 년간의 민주화 투쟁을 통해 그 세력이 전국 도처에 깊게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그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흘려 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렇게 시도한다면 엄청난 저항이 일어나 국가적인 불행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잘되든 못되든 그들에게 한 시대를 맡겨야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요, 역사의 가야 할 길이라는 인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집권당 일변도의 정치 시대는 지나가고 여야 동반자 시대가 도래했으므로, 여야 협조체제가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부단히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인내와 관용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이런 기본 자세를 갖지 않고서는 역사를 전진시킬 수 없다」고 마음을 정리했다. 與小野大 정국에서 野 3당은 「5共청산」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경쟁이나 하듯이 5共 정권을 두들겨 패고, 언론은 이를 받아, 불만을 토로하는 국민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어느 시대건 잘한 것과 못한 것이 함께 있기 마련인데 明(명)과 功(공)을 내세우는 자는 아무도 없고, 잘못된 暗(암)과 過(과)만을 들추어 냈다. 욕하고 두들기고 단죄하는 것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다는 식이었다. 우리 민족의 슬픈 특성이기도 했다.
與小野大가 「5共청산」 불러
5共 시절 어느 저명한 識者가 신문에 기고하기를 『全斗煥 대통령이 單任(단임)을 지킨다면 그 자체가 민주주의에 큰 발전을 뜻하는 것』이라고 논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국가가 내포하고 있는 현실은 여러 가지 형태로 역사 발전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인데 우리의 정치 현실은 그러하지 못했다. 全斗煥 전 대통령 내외와 친인척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 측근에 있었던 사람들, 5共과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까지 총체적으로 죄인으로 전제해 놓고 잘못을 찾아내는 식이었다. 결국 사태는 새마을회장을 지낸 全敬煥(전경환)씨를 도화선으로 삼아 불붙기 시작했다.
與小野大의 국회는 「5共特委」(5공특위)를 구성하고 청문회를 가동시켰다. 청문회를 통해 5共 비리를 낱낱이 추궁하여 단죄함으로써 5共을 청산하겠다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 권위주의 배격과 민주 자율의 바람이 휩쓰는 속에서 사람들의 변화 기대가 부풀다 보니 상류층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는 것을 속시원하게 생각하는 경향마저 나타났다. 때문에 정확한 사실을 입증하기보다 소문만 듣고 근거도 없는 것을 고발하거나 무고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5共 청문회에서도 이런 양상이 그대로 나타나 정치재판, 여론재판, 사법재판이 마구 뒤섞여 벌어졌다. 정부로서도 홍수처럼 흐르는 물줄기를 다스리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이같은 현상이 그 동안 규제에 묶여 있던 여러 분야가 민주화라는 역사적 명제 속에서 일시에 해방됨으로써 용수철 처럼 튀어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안되겠다고 해서 다시 누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그냥 가만히 두게 되면 격렬한 왕복작용을 하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동적으로 멈추어져 자율이라는 규범 속으로 가라앉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爲政者(위정자)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을 떠올리며 용수철이 서서히 멈추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고발 사태는 全敬煥씨의 비리를 다스리라는 빗발치는 여론을 바탕으로 시작되어 全 전 대통령 주위의 모든 친인척들에게 이어졌다. 나는 민정수석을 불러 『여론에 밀려 무고한 사람을 해치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나의 뜻을 司正(사정)기관에 전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국회에서까지 고발을 해대니 수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사를 하면 죄는 튀어 나오게 되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全斗煥 전 대통령은 친인척 관리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관계수석들에게 엄중히 관리하라고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났는가.
나는 첫째 한국적인 풍토가 그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情(정)이라는 것이 알맞으면 인정이 넘치는 훈훈한 사회를 만들지만, 지나치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되어 있지 않은가. 둘째는 권력지향적인 한국의 사회 분위기를 들 수 있다. 권력이 있는 쪽으로 사람들이 몰리다보니 권력의 혜택을 보려는 사람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친인척들을 찾아 다니며 그럴 듯한 명분을 갖다 붙여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셋째는 대통령 친인척들에게 공직을 맡기는 데 문제가 있었다.
友情의 한계
어쨌든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 일어나는 험악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친인척과 측근들을 비난하다가, 급기야는 포위망을 압축시켜 비난의 화살이 全 전 대통령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全斗煥 대통령 시대를 5共이라 하고 나의 시대를 6共이라고 한다. 그런데 全 전 대통령과의 인간관계는 내 개인에게는 무척 중요한 것이다. 사관학교 생도시절부터 시작해 全대통령과 내가 國政(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나서게 될 때까지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다. 우리 두 사람은 우정과 동지애가 유난히 강했는데 公人(공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특수한 관계였다. 그러나 그것이 한 시대를 책임져야 하는 국가 차원에 올라서서는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다. 국가보다 더 상위에 놓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어 나가는 흐름은 인간관계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때문에 나는 5共청산 전 과정을 통해 엄청난 고민을 해야 했다.
6共이 출범할 때 前(전) 정권이 내게 남겨둔 짐은 크게 두 가지 였다. 권위주의와 친인척 비리가 그것이었다. 국민들, 특히 識者들은 권위주의 청산을 열망했다. 또 전임 대통령 친인척들의 부조리를 다스려야 한다고 엄청난 압력을 가하며 나를 괴롭혔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언론 등에 의해 과장된 부분이 적지 않아 처리를 더욱 힘들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與小野大라는 국면에 처해 끈질긴 정치공세를 받았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서도 「인간적인 관계의 원칙을 깨지 않겠다」고 작정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全 전 대통령을 고생을 덜 하게 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도 많이 했다.
이렇듯 1989년까지는 5共청산의 고통에 많이 시달렸다. 그러다가 1990년에 들어와 3당 통합이 이루어짐으로써 어느 정도 난관을 극복하게 되었다. 5共청산은 누가 직접적으로 내게 건의해서 하게 된 것은 아니다. 국회와 언론, 학생들을 비롯해 국민들의 뜻이 너무나도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은 스스로 판단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에서는 「5共청산도 완벽하게 마무리짓지 못한 채 全 전 대통령과의 인간관계만 앙금을 남기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하기도 하는데, 그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5共청산을 완벽하게 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5共청산 대차대조표는 역사가 만들어 줄 것
분명한 것은 대통령이자 한 인간인 내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5共청산에 대한 대차대조표는 역사가 만들어 줄 것이다. 다만 6共에 들어와 권위주위가 어느 정도 청산되고, 그만큼 민주화가 진전된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나와 전임 대통령은 국가를 통치하는 개념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전임 대통령은 「통치하는 데 어느 정도의 권위주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 데 비해 나는 「권위주의로 다스려서는 안된다」고 봤다. 권위주의가 심하면 독재가 된다고 여겼다>
盧 전 대통령은 5共청산과 관련된 증언을 해나가면서 내내 표정이 어두웠다. 준비된 자료를 읽어나가던 盧 전 대통령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全 전 대통령 친인척 비리에서부터 새마을운동본부, 새세대육영회, 일해재단 등등 잇따라 문제가 터져 나왔지만, 6共 정부가 먼저 나서서 조사하고 처벌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언론 등에서 먼저 제기돼 어쩔 수 없이 손대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요…』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청산」이란 용어가 언론이나 野圈(야권)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정부나 여당에서 한 것으로는 기억되지 않는다. 그것은 청산이라기보다 역사의 진전이라고 해야 한다. 李丙琪 수석은 『全 전 대통령측 사람들은 지금도 6共 정부가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죽이려 한 것이라는 오해를 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5共청산이라고 하면 말 자체로서는 5共을 청산해 버린다는 뜻이므로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全斗煥 대통령 시절 사람들은 『全대통령이 7년 단임만 지켜줘도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영웅이 될 것』이라고들 했다. 그런데 全대통령이 그것을 지켰는데도 이것 저것 들추어 구속시키라고 했다. 全대통령에 이어 한 시대를 책임진 나로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나는 「역사가 부정 일색으로 나가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그런 의지에 대해 내 참모들 가운데 『그게 아닙니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워낙 야당과 언론 등의 요구가 강했기 때문에 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5共 사람들은 『대통령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思考(사고)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대통령이 마음만 있으면 못할 게 없다. 전임 대통령이 왜 백담사에 가야 하느냐』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기대를 이해는 했지만 내 자신은 다른 입장이었다. 대통령이 국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독재자라는 것이 나의 통치 철학이었다. 그런 인식의 차이로 인해서 나의 전임자가 섭섭해 하고, 나는 나대로 미안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徐義玄 스님이 칩거지로 백담사 선정
이른바 5共청산의 전 과정을 통해 나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나는 원래 감성적이어서 눈물도 많이 흘리는 편이다. 그런데 全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가서 『우리 집안에 제사 지낼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갇혀 버렸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몹시 괴로웠다. 칩거지를 백담사로 정한 것은 全 전 대통령 측근들이 조계종 총무원장인 徐義玄(서의현) 스님과 상의해서였다고 들었다. 徐義玄 스님이 내게 직접 들려준 얘기로는 후보지로 월정사 등 몇 군데가 논의되었는데, 徐義玄 스님은 『기자들이나 사람들이 찾아가 전기, 수도 등의 환경이 좋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그런 비난을 받지 않고 국민들의 동정을 살 수 있도록 서울에서 거리가 멀면서 환경이 나쁜 곳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백담사로 결정했다고 들었다. 徐義玄 스님은 후에 백담사를 자주 찾아간 것으로 안다.
결국 全 전 대통령이 그 의견을 받아들인 후 백담사로 떠나기 직전에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부에서는 내가 그 때 『얼마만 고생하면 어떻게 하겠다』고 보장했다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참으로 미안하다. 지금 상황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니 원상복구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의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랬더니 全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잘 돼 나가도록 하기 위해 희생을 십분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1988년 4월 공천 당시 5共 세력들이 배제되었다고 해서 말이 난 일이 있다. 그것을 놓고 나나 내 참모들이 감정적으로 처리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 것 같았다. 공천은 광범위한 여론을 토대로 하는 것이었다. 당의 의견이었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5共청산 문제에 대해 盧 전 대통령은 개인적인 감회를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에 5共청산이 개략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내 심정을 1백% 전달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全대통령과 나와 思考(사고)의 차이가 있었어요. 그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면 5共청산 과정에서 나에 대해 한없는 배신감을 느끼고 서운할 수 있는 거지요. 또 나의 철학과 권력의 잣대로 생각하면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5共청산과 관련하여 두 분이 서로 통화를 한 것은 (백담사로) 떠나기 전에 전화 온 것이 처음입니까. 혹시 두 분간의 통화에서 서로 섭섭한 감정을 교환하지는 않았습니까.
『백담사에 가서도 몇 번 통화했고, 섭섭한 감정표현도 없잖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결론은 全대통령은 「내가 한 시대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나는 고생해도 좋으니 당신들은 잘 되시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참으로 미안하게 됐소. 어쨌든 조금만 더 건강하게 참으시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만 살기 위해 저쪽을 희생시킨 것이아니다』
―저는 그 때 盧 전 대통령께서 국민들을 직접 설득했다면 우리 국민들이 끝까지 全대통령에 대한 처벌을 원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도 수십 번 생각했지요. 내가 나서서 진정시킬 방법이 있었다면 왜 안 나섰겠어요. 與小野大 상황에서 내가 앞장서서 설득하러 나섰을 때 정치권과 국민들은 「둘이서 야합했다」고 나올 것이 뻔했어요. 야합의 소릴 듣건 뭐하건 全대통령을 보호할 수만 있으면 괜찮은데, 당시 상황은 아닌 말로 폭동 날 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참모들과 여러 가지 논의를 했지만 참모들 의견이 「우리만 살기 위해 저쪽을 희생시키자」는 심정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당시 민정당 정세분석실장으로 당쪽에서 5共청산의 실무를 담당했던 孫柱煥 전 장관은 이런 의견을 제시했다.
『5共청산에 대해 청와대에서는 崔秉烈 정무수석이 담당했고, 당에서는 국책조정위원들이 담당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5共 핵심의 한 분이었던 李鶴捧(이학봉) 의원도 국책조정위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李의원이 그 일을 맡았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국책조정위원회는 週(주) 2∼3회 모여서 5共청산을 어느 수준으로 할 것이냐를 논의했고, 5共청산의 기본 골격을 종합해서 정무수석에게 전달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국민들의 뜻을 집약한 것이라는 설명이 될 겁니다』
―6共 출범 초기에 全斗煥 전 대통령이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고 사무기구가 커지니까 6共의 참모진들이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그것을 기자들에게 흘려서 문제가 불거진 것 아닙니까. 따라서 5共청산은 언론이나 야당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었고, 6共 정부는 따라가기만 했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봅니다.
이 질문에 孫柱煥 전 장관이 답했다.
『당시 5共청산은 국민의 뜻이었고, 우리가 추진했던 5共 인사들에 대한 일련의 조치는 국민의 요구를 최소화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5共청산을 우리 참모진이 꾸며서 시작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국민의 뜻과는 달리 그런 계획을 의도적으로 꾸미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끝까지 구속되는 것은 막았다
―5共청산 과정에서 「레만호 작전」이라 하여 全대통령을 스위스로 망명시킨다는 그런 계획이 정말 있었습니까.
『그것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얘기할 가치가 없다고 봐요. 그런데도 이런 유언비어가 많이 떠도는 것은 얘기 퍼뜨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무슨 망명설이다 뭐다 이렇게 만들어낸 것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孫柱煥 전 장관이 덧붙였다.
『全대통령과 盧대통령 두 분의 인간관계가 아직 완전히 회복된 단계는 아니라고 봅니다. 전직 대통령도 이제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친구관계의 복원에 언론도 一助(일조)를 해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립니다』
―과거에 全대통령과 盧대통령 두 분이 만나서 화해했다는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그 후에도 앙금이 가시지 않았습니까.
『가슴에 남아 있는, 씻을 수 없는 사연이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지요. 그런 상처를 인위적으로 말끔히 없앤다는 것은 힘들지만 극복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全대통령도 충분히 하고 있다고 봐요. 또 한 가지, 우리 두 사람의 화합하는 모습이 주위 사람들이나 국민들을 편안하게 해 줄 수도 있지만 반대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어요. 지난 95년에 국립묘지를 참배한 후 둘이 만나서 서로 불행했던 일은 다 잊고 새롭게 나가자며 서로 안았습니다. 그 연장으로 그 해 가을에 陸士(육사) 입교 40주년 기념일 행사에 참석해서 다시 만나 다정하게 안았는데, 그 후에 우리가 어떻게 되었지요? 참 이상한 일이지요』
―5共청산 당시 어떤 경우라도, 여론이 全斗煥 전 대통령을 구속하라고 했지만 구속만은 안된다는 기본선은 가지고 계셨습니까.
『그렇지』
―全斗煥 전 대통령에 대해서 한쪽은 청산해라, 구속하라는 쪽이었고, 다른 쪽은 盧 전 대통령께서 전임자를 보호해야 된다는 두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백담사行으로 타협한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됩니다.
『당시 분위기는 구속하라, 심지어 망명이나 해외도피 얘기도 나오고. 저쪽(全대통령)에서는 「죽으면 죽었지 해외는 안나간다」 이런 의사표시도 하고. 그래서 전임자를 보호하려면 잠시 피해 있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었지요』
―여야 정치권이 全斗煥 전 대통령의 국회증언으로 5共청산을 마무리한다고 합의했습니다. 저는 1989년 12월31일에 국회 방청석에 앉아 全斗煥 전 대통령의 국회증언 현장을 취재하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全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집어던지는 등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고 말았지요.
『그 때 내가 여당 원내총무를 불러서 혼을 냈어요. 저건 내가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이야. 당시에는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全斗煥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갈 때 1백39억원을 헌납했습니다. 그런데 액수를 정하는 과정에서 全대통령측은 89억원밖에 없었고, 청와대에서 『1백억원 이상은 되어야 국민이 납득한다』 해서 50억원을 보태주는 식으로 1백39억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내가 헌납 과정과 액수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은 못 들었구만』
―全斗煥 전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5백50억원을 넘겨주어서 그것을 4·26 총선에 사용한 것은 사실입니까.
『여러분이 추측하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지만 내 입으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1988년에 들어 노사분규 현장과 학원시위 현장에 공권력 투입 지침이 바뀌었습니다. 대학에서 총장이 부를 때만 경찰이 투입된다든지, 가능하면 자율로 해결하라는 원칙이 분규 현장에 적용되다 보니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현행법규를 어기며 행패를 부리는 일들이 방치됐습니다. 이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노동자가 요구하는 대로 임금 인상을 할 수밖에 없는 역학관계가 조성됐습니다. 公權力(공권력)은 일종의 법이고, 법은 엄중하게 적용되어야 하는데, 犯法(범법)현장을 방치했고, 그 결과 임금이 상승하여 高비용 低효율의 사회구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 아니냐 하는 의견이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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