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大中이 프롤레타리아 혁명하자고 설득』

李哲 진술조서: "나를 공산주의자로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 유리하면 레닌도 히틀러도 될 수 있는 인물"
요사이 김대중씨가 하는 言動을 보면 해방직후 좌익행동대원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는 대통령직을 그만두고도 김정일에겐 굴종하고 미국에는 반대하며 대한민국에 대하여서는 손해를 끼치는 행동만 골라서 한다. 그가 과연 사상적 전향을 했는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아래 李哲 진술서를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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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金大中 연구⑦
*注-이 글은 월간조선 2002년 11월호에 게재되었던 연재기사중 일부이다.


李哲 자필 진술서
『金大中은 나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하자고 설득했다』

金大中 대통령 측근:『대통령은 李哲씨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씀했다』



「집권하면 대중민주체제 실현」

金大中씨가 1973년 8월 도쿄에서 납치되어 올 때 남겨두고 온 수첩에는 이런 메모가 적혀 있었다.
<나의 이미지를 ① 신념에 차고 ② 관대하고 ③ 멋이 있게. 나의 장래는 ① 믿고 행동하면 그렇게 된다(神의 도움) ②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③ 나는 집권하면 대중민주체제를 실현하고, 나는 남북의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을 실현하고, 나는 통일조국을 세계대국의 列에 끌어올리며, 나는 세계의 새로운 내일의 방향을 위하여 미래상을 제시하며, 나는 약소국과 불행한 인류의 권리를 위한 선도자가 된다. 나를 위하여 매일 祈求하는 가족과 나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국민을 잊지말자!>
<우주의 모든 것은 電磁氣를 가지고 있다. 흡인과 反○(판독불능)의 법칙은 전자기와 같은 작용을 한다. 적극적인 생각에는 적극적인 결과가 나타나고 소극적인 생각에는 소극적인 결과가 나타난다. 이 세상에는 우연은 없으며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뤄진다>
집권하면 「대중민주체제」를 실현하겠다고 한 그의 꿈은 어떻게 구현되었는가, 아니면 구현되지 않았는가.

高永復의 提報

1997년 9월쯤 정신문화연구원內 팔각정에서 高永復 연구원이 객원연구원인 예비역 장성 權모씨 등 4명과 함께 大選과 관련하여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안기부 문서에 따르면 高씨는 이 자리에서 『김대중씨는 공산주의자이다』라고 말하면서 『연도미상경 모 정치인과 동교동 DJ 자택 지하실에서 단독 면담시, 그에게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함께 해보자고 언동하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일주일 뒤 연구원內를 산책하던 중 權모 예비역 장성이 高씨에게 모 정치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高씨는 『이철이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權씨는 이 대화를 잊고 있다가 高永復씨가 그해 11월 안기부에 구속되어 고정간첩이라고 발표되자 이 대화내용을 權寧海 당시 안기부장에게 알렸다고 한다. 안기부는 남해안을 거쳐 잠입한 최정남-강연정(수사를 받던중 자살) 부부 간첩을 붙들어 조사하는 과정에서 高씨의 정체를 알아냈었다.
權부장은 대공수사실장을 불러 提報 내용을 조사해 보도록 지시했다. 수사관들은 먼저 수감 중인 高永復씨를 신문했다.
高씨는 1991년 무렵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제자이며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이던 李哲씨의 자서전을 출간할 경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자신이 운영하던 사회문화연구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제자 金모씨(1997년 당시 독일 거주)를 李의원에게 전화로 소개했다고 진술했다. 金씨는 李哲 의원을 인터뷰했는데 李의원이 이때 金大中씨와 나눈 인상적인 대화를 털어 놓았다는 것이다. 高씨는 그 내용을 전해 듣고 기억하고 있다가 權씨 등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1997년 12월13일 對共수사실장은 李哲씨를 조사하기 위하여 수사관들을 부산으로 보냈다. 李씨는 그때 李會昌 한나라당 후보를 위한 지원유세차 부산에 내려가 있었다. 호텔에서 수사관들을 만난 李씨는 다음과 같은 자필진술서를 안기부 직원이 가져간 진술서 용지에 썼다. 그 全文을 입수하여 소개한다.

「나를 공산주의자로 착각하고 있구나」

진술서
성명 이철
주민등록번호 : ******-*******
주거 ***********************************
본적 ******************

위 본인은 1997년 12월13일 주소지에서 아래와 같이 임의 진술합니다.
1. 저는 1948년 3월18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망부 이근진(82)과 정경조(74)의 1남4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여 1967년 2월 경기고등학교, 1985년 8월 서울대 사회학과를 각각 졸업하고 제12대, 제13대, 제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현재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정당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1. 제가 고영복 선생을 알게 된 경위와 접촉 상황에 대해 말하면, 제가 1969년 3월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했을 때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고영복 선생을 처음 알게 되었으며 그후 저의 결혼식 때 고영복 선생이 주례를 서준 사실은 있으나 제가 정치 활동을 하면서 바빴던 관계로 거의 만나지 못 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또다른 이유는 고영복 선생은 유신정권을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옹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나 저의 친구들이 고영복 선생을 「정권의 눈치 보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이유도 자주 만나지 못 했던 이유가 될 것입니다.
정확한 일자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1991년경 사회문화연구소를 운영하던 고영복 선생으로부터 전화를 통해 『정치인이니까 전기나 이철 평전 같은 책자를 출간하면 정치활동이나 선거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내가 뭘 돕고 싶은데… 이것밖에 방법이 없네』 하면서 자서전 형식의 책 출간을 제의받았습니다.
고영복 선생의 제의에 관련하여 며칠 후 당시 사회문화연구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서울대 사회학과 후배 김종채(40세 가량)를 만나 저의 전기 출간과 관련 인터뷰를 한 사실은 있으나 저의 전기가 출간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1. 제가 고영복 선생으로부터 같이 일해 보라는 제의를 받거나 북한 사람을 소개 받은 사실에 대해 말하면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저는 고영복 선생은 「정권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영복 선생으로부터 제게 도움이 되니 전기를 출판해 주겠다고 제의를 받고 사회학과 후배 김종채를 소개받고 인터뷰한 사실은 있으나 고영복 선생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은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북한 사람을 소개받았거나 제가 북한 사람을 만난 사실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1985년경 김대중 총재로부터 『우리나라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말은 들었던 바 있습니다.
1. 제가 1985년 2월12일 총선에서 당선된 직후 1985년 3월경 당시 연금에서 해제된 김대중씨로부터 만나자는 전화 연락을 받고 그날 오후 5시경 동교동 김대중씨 자택을 방문하여 김대중씨의 안내로 지하실로 내려가 단둘이 면담하는 자리에서 김대중씨가 저를 보고,
―현재 우리나라는 극심한 계급적 갈등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권력은 군사정권에 독점되어 있고 부는 재벌이 독점하고 있는 등 너무나 상황이 악화되어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필요하다,
라는 요지로 한 시간 정도 제게 설명했습니다. 저는 그때 김대중 총재가 「나를 공산혁명주의자로 착각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으며 나를 자기의 심정적 동조자, 정치적 계보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말하는 김대중씨는 자신에게 유리하면 레닌도 될 수 있고 히틀러도 될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후 1988년 5월경 밤 11시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만나자는 전화 연락을 받고 동교동 자택을 방문하여 식당에서 단둘이 면담하면서 당시 김대중 총재로부터,
―정치자금 10억원과 부총재 자리를 줄테니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저는 아직 젊은 탓인지 당직이나 정치자금은 별로 뜻이 없습니다. 제가 바라는 야권 통합이 이루어진다면 군사정권 종식을 위해서 중앙당의 수위라도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거절한 바 있습니다.
1. 이상 진술한 내용은 사실과 틀림이 없습니다.
1997년 12월13일 위 진술인
이철(李哲)

더 깊게 조사 안 한 이유

對共수사실장은 이 진술서 내용을 국내담당 차장과 權寧海 안기부장에게만 보고하고 일체 비밀에 부치도록 조치했다고 한다. 추가 수사는 大選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한 것은 우선 金大中 국민회의 총재에 대한 수사를 시작할 경우 며칠 뒤로 다가온 선거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 政爭의 초점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대화 내용을 달리 증거해 줄 목격자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金大中 총재가 부인하면 그만인 상황이란 점도 고려되었다.
權寧海 안기부장은 金大中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안기부가 大選 기간 중 중립을 지켰다는 것을 金대통령 측근에 설명하기 위한 자료로서 이 사안을 요약한 「간첩 고영복 대통령 당선자 관련 불순 언동 내용」이란 제목의 세 페이지짜리 문건을 만들어 돌린 적이 있었다.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실장은 李哲씨의 진술서를 高永復씨 사건 담당 검사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 진술서가 高永復 간첩 사건 수사·재판자료에 첨부되어 있는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건을 취급했던 안기부 對共수사간부는 이런 私見을 밝혔다.
『金大中 정부 출범 이후에 국정원이 이 사건을 해명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국군통수권자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하자는 발언을 했다는 진술의 眞僞를 확인하지 않은 것은 국가정보수사기관으로서는 직무유기이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기자는 李哲씨를 만나 몇 가지를 물어본 적이 있다.
―1985년 면담 당시 金大中 총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같이 하자」란 말을 과연 썼나, 썼다면 몇 번 썼나.
『여러 번 썼다. 서재 책상에서 앉아서 거의 한 시간 혼자서 이야기했다. 한국 사회를 보는 자신의 시각을 드러낸 내용이었다. 한국 사회를 가진 자 對 안 가진 자, 군부 對 민중의 갈등 구조로 보고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밖에 없지 않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 황당했다. 나를 공산주의자로 착각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金正日도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아니지 않는가. DJ는 기회주의자이다』
―金大中씨는 여러 가지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이념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는 이념문제에서만은 기회주의자가 아니다.
『그가 상황에 맞추어 극우적인 발언을 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닌가』
―金大中씨가 우익적인 발언을 했다면 그것은 좌파정책을 호도하기 위한 위장용이지 진심이 실린 것은 아닐 것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그런 말 한 적이 없다고 했다』

2000년 1월호 月刊朝鮮에 李哲씨의 진술 내용이 일부 보도된 직후 기자를 만난 金大中 대통령의 한 측근은 『대통령께서 李哲 의원에게 그런 말을 하신 적이 없다고 저한테 직접 말했습니다』라고 전했다. 金大中 총재가 그런 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를 객관적으로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황 전개로 보아서는 李哲씨가 고의로 거짓 증언을 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李哲씨는 ’97 大選 때 李會昌 후보를 지원하고 있었으나 자신의 비밀을 선거에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李哲씨는 金大中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 측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걱정을 하기에 『나는 어떤 경우에도 金大中씨가 공산주의자란 증언을 하지는 않는다. 그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증언이면 몰라도…』라고 말하여 안심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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