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刊 "曠野(광야)의 외침"의 감동

국민행동본부의 "南北 좌파정권과 맞선 6년 애국투쟁史" 발간:"간첩을 골기퍼로 세워놓고는 축구를 할 수 없다"


대표적 자유진영 단체인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의 그동안 활동을 담은 책이 나왔다.

´조갑제닷컴´에서 출간한 <광야의 외침>란 제목의 이 책은, '간첩을 골기퍼로 세워놓고는 축구를 할 수 없습니다'라는 부제목으로 '南北 좌파정권과 맞선 6년 애국투쟁史'를 전했다.

지난 2000년 2월1일 '국가안보가 불안하다'로 시작, 2006년 1월15일 '『아 X발, 대한민국』이 전교조가 외치는 참교육인가?'로 맺고 있다.

´조갑제 닷컴´의 조갑제 대표(월간조선 편집위원)는 이 책에 대해 '한 시대의 풍경일 뿐 아니라 시대정신의 직설적 표현이고 광야의 외침이며 국민들의 한숨이고 울분이며 다짐'이라고 소개했다.

아울러 '역사의 기록이고 용기의 기록이며 양심의 기록'이라며, '이 기록은 과거의 기록인 동시에 미래를 개척하는 예언'이라고 강조했다.

´국민행동본부´ 서정갑 본부장은 '맥아더 동상철거를 주장하는 김정일 하수인들에 의해 고발되어 인천지검 공안부(908호)검사실에서 조사를 받고 지금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참담한 심정을 억누르며 썼다'는 發刊辭(발간사)에서,

'김대중·노무현 좌파정권이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애국세력이 어떻게 좌파정권과 맞서 투쟁했는지를 기록했다'며 '2007년 좌파정권 종식 지침서로 활용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병술년 올해에는 남북한의 악당을 물리치고 연방제 적화음모를 저지하는 데 앞장서 싸우겠다'고 다짐한 ´국민행동본부´는, 삼일절인 1일(수) 오후2시 서울역 광장에서 「연방제 赤化음모 저지 3·1절 국민대회」를 진행한다.

'김정일·김대중·노무현 세력의 「反대한민국 赤化공조」를 분쇄하자'는 주제로 열리는 이날 대회는 참가자들의 ´시가행진´으로 마무리될 예정이다.<전화 주문:02-527-4514>


[인터넷 독립신문]http://www.independen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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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9월17일 낮12시 부산공업전문대학 게시판 슬라브 지붕위에 올라간 한 학생이 휴대용 메가폰으로 “모입시다”라고 외쳐댔다. 학생들 500명이 게시판 앞으로 몰려갔다. 기계과 2학년생 신홍석으로 밝혀진 이 학생은 선언문을 읽다가 뛰어올라온 체육교사한테 병아리가 솔개한테 채여가듯 붙들려갔다. 이 선언문 사건의 주모자는 세 학생으로 밝혀졌다. 그 중 한 명인 김맹규는 서울대학교 자연계열에 합격하여 다니다가 反독재유인물을 돌렸다고 출학을 당한 뒤 전문대학에 입학한 학생이었다. 세 사람은 열다섯 명의 학생들을 모아 이념서클을 만들었다. 이들의 교재는 ‘역사란 무엇인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 같은 책이었다.
학교에선 세 학생을 적발하여 경찰에 넘겼다. 경찰은 세 학생을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신홍석의 고등학교 친구가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2학년생 鄭光敏이었다. 이 학생이 부마사태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역사적 사건의 겉모습은 우발적으로 보이지만 인과관계를 따지기 시작하면 다 이유가 있다. 時局과 인간의 상호작용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부마사태와 10.26 사건처럼 명확히 밝혀진 예도 드물 것이다. 그 상당한 이유는 기자의 부마사태와 10.26 사건 취재기록에 의한 것이다.
신홍석은 선언문 사건을 계획할 때 부산역에서 우연히 정광민을 만났다.
“광민아, 부산대학은 너가 책임져라. 같이 일어나자”
“우리 학교는 아직 멀었다. 분위기가 충분히 익지 않아 자신이 없다”
신홍석은 헤어지면서 “유신대학 놈들아!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중얼거렸다.
신홍석이 구속된 며칠 뒤 정광민은 동래경찰서에 불려갔다. 신홍석이 鄭군과 상의한 사실을 진술한 모양이었다. 정광민은 진술서를 하나 쓰고 나왔다. 정광민의 아버지는 월남한 사람이었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화물자동차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다. 1978년에 대학생이 된 鄭光敏은 시험공부에서 해방된 에너지를 책읽기에 돌렸다. ‘백범일지’ ‘소유의 역사’ ‘뜻으로 본 한국역사’ ‘변혁시대의 한국사’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등 그는 매주 한 권꼴로 읽었다. 서서히 그는 朴正熙 정권을 권력과 재벌의 결탁체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도시공업경제에 희생된 농촌경제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鄭光敏이 속했던 경제학과 2학년생은 76명이었다. 학비감면 대상자가 40명쯤 될 정도로 집안은 풍족하지 못했다. 이들은 한국 경제의 어두운 면에 관심이 많았다. 좌파 경제학자들이 쓴 책들을 많이 읽었다. 이 과의 지도교수는 학생들이 교수들도 읽어본 적이 없는 좌파서적들을 읽고 있는 데 놀랐다. 그 교수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마르크스 계통 이론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고 판단했다. 학생들의 심리는 이해할 수 있었으나 위태위태하게 보였다.
1979년 4월19일 鄭光敏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4.19 의거날을 그냥 보내는 학생들의 모습에 울분을 느꼈다. 종이에다가 ‘4.19-19주년’이라고 매직펜으로 써 들고 도서관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다음날 鄭光敏은 학생 상담관실에 불려가 경위서를 썼다.
1979년 9월 학교가 개학 되었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캠퍼스로 돌아온 학생들은 분위기가 술렁거리면서도 긴장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사복형사들이 할 일 없이 校庭(교정)을 서성대고 있었다. 방학중에 있었던 YH사건이 경제학을 전공한 학생들에게 특히 큰 자극이 되었음도 알 수 있었다. YH 사건은 한국 경제구조를 정권과 재벌의 결탁이란 도식으로 파악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이 옮았음을 증명한 것이기도 했다.
경제학과 2학년생들이 여학생들과 미팅을 하는 문제를 놓고 회의를 했는데 한 학생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그런 착상을 하는 사람은 학원가의 범법자”라고 소리쳤다. 鄭光敏이 일어나더니 “그러면 무슨 대책이라도 있습니까”라고 소리쳤다. 鄭군은 그 말만 하고 앉아버렸지만 다른 학생들은 “나는 과연 행동할 수 있나”하는 自問自答을 했다고 한다.

부산공대 기계과 3학년생인 李鎭傑(이진걸)은 동고등학교 남학생들과 동여고 출신 여학생들이 만든 ‘동녘회’라는 모임에 속했다. 이 모임은 회원의 친목을 위한 활동을 주로 했으나 1978년 4.19 선언문 사건으로 회원 이성동이 구속되면서 이념서클로 바뀌었다. 이진걸은 노동자와 농민의 주제로 등장하는 토론에 참여하면서 의식화의 과정을 밟았다. 그는 서점 점원인 황선용, 황의 친구인 남성철과 친해졌다. 이 세 사람은 독서를 통해서 유신체제를 독점매판자본과 독재권력의 결합체로 인식해가기 시작했다. 1979년 9월 개학이 되자 이진걸은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단계로까지 울분이 高潮(고조)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10월 초순 세 음모자는 결행날짜를 10월15일로 잡았다. 세 사람이 선언문 등사기를 가지고 황선용이 일하는 서점에 모인 것은 10월13일 밤10시였다. 황선용은 왼쪽 허벅지의 골수염 수술 자리가 도져서 재수술 날짜를 받아두었다. 그는,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면 틀림없이 감옥에 갈텐데 이런 몸으로는 견디기 어렵다고 걱정했다. 이진걸, 남성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한 뒤 열병을 앓고 있던 남군은 집에 가고 이, 황 두 청년은 한 여관에 들어갔다. 900장의 선언문 등사가 끝난 것은 14일 새벽 4시쯤이었다. 10월15일 오전 이진걸과 남성철은 선언문을 부산대학교 본관과 도서관에 뿌렸다. 선언문에는 도서관 앞에 오전 10시에 집결하자고 적혀 있었다. 선언문을 뿌리고 도서관 앞에 와서 학생들이 모이기를 기다리던 두 사람은 터벅터벅 걸어서 학교 밖으로 나왔다. 술집에 가서 소주 한 병을 다 마신 이진걸과 남성철은 남은 선언문을 뭉텅이로 변소에 쳐넣었다.


1979년 11월17일자 육군본부 검찰 진술에서 金桂元 비서실장은 車智澈의 오만방자한 행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사례를 소개했다.
<1979년 6월 초순경 뉴관악 골프장에서 각하를 모시고 白斗鎭 국회의장, 車智澈 실장, 본인, 후쿠다 전 일본수상 등이 환영골포 대회를 가졌는 바, 당시 白 의장이 먼저 샤워장에 들어가 늦게 나오자 차지철이가 샤워장 문을 발로 차면서 “영감, 뭘해 빨리 나오시오” “그저 늙으면 죽어야 된다”고 독촉을 하므로 白 의장이 서둘러 나오면서 “미안 하외다”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차지철 실장이 아버지빨 되는 白 의장에게 오만불손하게 방자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분격한 사실이 있습니다.
업무상 보고관계에 있어서도 본인은 직무상 각하가 매일 출근하시면 바로 결재서류를 가지고 결재를 받는 것이 통례이나 간혹 차지철은 각하 출근 전에 집무실에서 대기하다가 먼저 들어가 보고함으로써 본인이 결재를 받는 데 지장이 있거나 또한 본인이나 장관이 결재를 받으려고 대기하고 있는데 차지철이 각하 집무실 입구 경호원에게 연락하여 자기가 각하를 뵈올 일이 있으니 못들어가게 하라고 지시하여 기다리게 한 후 자기가 먼저 보고한 후 다른 사람들이 결재는 받는 일이 간혹 있었습니다.

차지철의 월권행위 및 강경발언에 관하여 말씀드리면, 차지철은 자기 업무도 아닌 정치공작문제까지도 관여하고 첩보를 수집하여 각하에게 보고하는 등 월권행위를 자주 하고 軍內 중요 지휘관 및 장성급을 수시로 불러다가 술도 사주고 돈도 뿌리는 일이 있고 또한 항간에는 군인이 경호실을 다녀와야 진급 및 보직면에서도 혜택을 본다고 하므로 이는 군의 통수계통을 문란시키는 일이라고 한탄하였으며 특히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세호 대장을 매주 1~2회 정도씩 사무실에 불러 환심을 사는 것 같았습니다.
차지철의 강경발언에 관하여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만, 기억나는 것으로는 각하를 모시고 유정회 의장, 공화당 의장, 경호실장, 본인 등이 金泳三 당수를 국회에서 제명하는 문제를 논의할 때, 차지철이 “사대주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 김영삼이 하나를 제명치 못하는 국회라면 뭣하겠는가. 안되면 내가 탱크로 밀어버리겠습니다”라고 하는 등 상식 이하의 강경 발언을 자주 하고 그 외에도 연장자인 본인이나 장관, 국회의장 또는 군의 선배인사들에게까지도 “님‘자를 붙여 호칭하는 일이 없이 오만불손하며 각하가 어디로 행차하시기라고 하면 영접나온 손님들에게 경호원들을 시켜 무례하게 다루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볼 때 차지철과는 氷炭不相容의 관계이고 언젠가는 각하에게 건의하여 물러나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金桂元 비서실장은 金載圭 車智澈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 때였다고 진술했다.
<중앙정보부는 이철승을 총재로 당선시키고자 공작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차지철이 별도로 신민당 신도환 의원을 통해 이철승 당선 공작을 벌이게 되었으므로 중앙정보부는 각하의 지시로 중도에서 공작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신도환의 이철승 지지가 지연되므로 총재선거에서 탈락되어으니 차지철이 비난을 받아야 할터인데 모든 비난이 중앙정보부에 집중되었으므로 차지철과 김재규는 서로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또한 신민당 총재 김영삼에 대한 법원의 가처분 결정으로 정운갑이 총재권한대행이 되자 車智澈은 정운갑이가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했고 김재규는 좀 약하다고 생각되어 별도의 지원공작을 벌였습니다.
특히 지난 10.16 부산에서 발생한 소요사태에 관하여 차지철은 각하에게 신민당이 배후조종한 폭동이라고 해서 先入見을 갖게 하고 중앙정보부는 조사결과 신민당이 아니고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등 불온단체와 일부 反정부 학생들이 가담했다고 보고했으나 각하로부터 거절당하고 오히려 야단을 맞게 되자 김재규는 그 원인이 차지철의 농간에 의한 것이라고 눈치채고 분노가 극도에 달한 바 있습니다>

차지철이란 공동의 敵을 둔 金載圭 金桂元 두 사람은 金 비서실장 부임 두 달 후부터 만나기만 하면 車智澈을 비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난의 내용은) 주로 차지철의 오만불손한 언동과 강경일변도의 주장과 건의, 그로 인해 각하를 일변도로 몰아 결심을 흐리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재규는 차지철을 지칭하면서 “저 자식을 해치워버려야지. 저 놈을 그냥 두었다가는 각하 결심만 흐려놓고 안될텐데” “각하께서 나 보고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좋지만 지가 뭔데 각하보다 한 수 더 떠서 이러쿵저러쿵 나에게 이야기하는지 짜식” 등 수없이 차지철에게 증오를 터트리거나 욕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금년 5월경 이후부터 김재규가 자기의 지위에 불안을 느껴서 그런지는 몰라도 본인에게 “사람은 자리를 뜰 때는 깨끗이 떠야 하니까 형님이 제일 잘 아시니까 제가 자리를 떠야 한다거나 각하께서 못마땅한 눈치가 보이거든 제게 이야기하여 주시면 깨끗이 사표를 내겠습니다”라고 한 사실이 있습니다>

정광민, 등사에 열중하다

1979년 10월15일 정오 부산대학생 鄭光敏은 학교에 당도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뿌려진 격문을 읽고 도서관 앞에 모였던 학생들은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자 흩어지고 있었다. 경제학과 2학년생인 정광민은 친구 둘을 만났다. 세 학생은 학교 매점으로 갔다. 정광민은 “이젠 우리가 나설 때다”고 말을 꺼냈다. 두 친구도 찬동하는 듯했다. 그들은 등사판을 살 돈이 없었다. 그날 오후 겨우 다른 친구 집에서 줄판 롤러 따위를 빌 수 있었다.
15일 밤·16일 새벽 정광민의 다락방. 그는 엿새 전에 써둔 선언문 초안을 찾아내 원지에 옮겨 썼다. 정광민은 등사판을 밀어본 경험이 없었다. 잉크가 골고루 묻지 않은데다가 롤러를 서툴게 밀어 등사는 엉망이 됐다. 글자를 해독할 수 있는 것은 전체가 5분의 1도 안됐다. 태반은 글자모양도 알 수 없었다. 정광민은 나중에 수사를 받을 때 이 엉망진창의 선언문을 보고 원안을 기억으로 되살려 새로 써내야 했다. 새벽 4시까지 정광민은 롤러를 밀고 친구는 종이를 끄집어내면서 선언문 200장을 등사했다. 정광민의 교련복 바지는 시커면 등사잉크투성이가 됐다. 둘은 다락방에서 잠시나마 눈을 붙이려고 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두 시간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일어났다. 정광민은 가방에 선언문 300장을 접어넣고 집을 나와 아침 8시에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그는 역사와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정광민이 쓴 선언문의 全文은 이러했다.

<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조국은 심술궂은 독재자에 의해 고문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의 위정자들은 흔히 민족을 외치고 한국의 장래 운운 하지만 진실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신명을 바칠 이 누구란 말인가. 청년학도여!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돌이켜보게나. 특히 고도성장정책의 추진으로 빚어진 수없는 부조리, 그중에서도 재벌그룹에 대한 특혜금융이 그들의 기업을 확대하고 발전시키기보다는 기업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특수 권력층과 결탁하여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시장질서를 교란시켜 막대한 독점이윤을 거두어 다수의 서민대중의 가계를 핍박케 했던 것도 사실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정부나 기업은 보다 많은 수출을 위하여는 저임금 외의 값싼 상품 공급은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터무니없이 낮은 생계비 미달의 저임금을 지불하고서도 그것이 과연 전체 국민의 후생을 증대시켰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극심한 소득 분배의 불균형 때문에 야기된 사회적 부조리를 상기해 보라! 그 부조리는 영세한 서민층에게 물질적 빈곤만을 강요하였을 뿐 아니라 따사로운 일요일 한낮에 화목하게 모여 담소할 만한 시간도 없이 그들을 돈의 노예로 만들어버림으로써 全가족이 마치 전쟁을 하듯이 공사장을 전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가정이 있으며 무슨 윤리가 깃들 수 있겠는가! 이러고도 정권의 아부배들은 현실을 왜곡한 채 독재자의 통치력을 입이 닳도록 찬양할 수 있겠는가! 눈앞의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는 자, 공리를 앞세우는 사회풍토보다는 오직 자신만의 이익을 내세우는 졸렬한 사회상, 이런 불합리하고 불건전한 사회에서 예술이며 전반적 문화수준이 향상될 리 없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물질 정신 양면으로 낙후된 후진국이라는 누명을 덮어쓴 채 강대국에 질질 끌려다니는 초라한 민족의 모습. 그러나 우리는 좌절할 수는 없다. 점진적으로 이런 문제를 개선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비단 문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소위 유신헌법을 보라! 그것은 법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무모한 정치욕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소위 급변하는 현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 만든 법이라고 하지만 교묘한 미명하에 가면을 덮어쓰고 국민을 능욕하는 술책이며 다수 선량한 지식인 내지 모든 우국지사에게는 유사시 총이며 칼인 것이다.
모든 정당한 비판과 오류의 시정을 요구하는 순수한 의지를 反민족적 행위 운운하면서 무참히 탄압하는 현정권의 유례없는 독재, 이러고도 우리 젊은 학도들은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사회 문제에 방관만하고 있을 것인가!
너희들의 정열은 어디에 있는가.
비록 이성이 진리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 너와 내가 추구하는 진리와 자유는 이성적 결단에 의해서만 획득되어지는 것이며 이성은 현존재로 하여금 모험을 하게 하지만 투기를 시키지 않으며 현존재로 하여금 소모시킬지언정 낭비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청년학도여!
부디 식어가는 정열, 잊혀져가는 희미한 진실, 그리고 이성을 다시 한번 뜨겁게 정말 뜨거웁게 불태우세! 혼탁한 시대를 사는 젊은 지성인으로서의 사명감, 그리고 책임감으로 우리 모두 분연히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밝혀야만 하네!
*폐정 개혁안
1. 유신헌법 철폐
2. 안정성장정책과 공평한 소득 분배
3. 학원사찰 중지
4. 학도호국단 폐지
5. 언론 집회 결사의 완전한 자유 보장
6. YH사건에서와 같은 완전한 자유 보장
7. 전국민에 대한 정치적 보복 중지
모든 효원인이여, 드디어 오늘이 왔네!
1979년 10월 16일 10시 도서관으로!>
이 선언문을 읽어보면 당시 대학생들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정광민은 이 선언문에서 정권타도나 朴正熙 하야와 같은 요구를 직설적으로 하지 않았고, 부산출신 金泳三 의원 제명에 대한 항의도 하지 않았다. 그의 문제의식은 다분히 사회경제적인 틀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1980년대에 스며드는 주사파류의 극좌이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나 朴정권의 개발정책을 계급적 착취구조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뛰어든 불덩어리

1979년 10월16일 오전 9시10분쯤 정광민은 상대 앞 벤치에 앉았다. 벤치 앞으로 두 동급생이 지나가고 있었다. 정광민은 그들을 불러세워 “조금 있다가 교실로 뛰어들 테니 분위기를 좀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9시30분 정광민은 먼저 상대 206호 강의실로 뛰어올라갔다. 첫째 시간 수업이 끝나 둘째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 가운데 그는 낯익은 얼굴을 찾아냈다. 1학년 때 친하게 지냈던 엄태언에게 정광민은 선언문 마흔 장쯤을 슬며시 건네주면서 빨리 나눠주라고 눈짓을 했다. 복도에서 정광민은 또 친구 이성식을 만나 선언문 석 장을 주었다.
“무역과를 부탁한다.”
“한번 해볼께.”
정광민의 목표는 306호 강의실이었다. 경제과 2학년생 마흔 명쯤이 첫째 시간인 화폐금융론 강의가 일찍 끝나 앉은 채 중간시험에 대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정광민은 뒷문을 통해 뛰어들어왔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광민이 들어오는 것과 때맞춰 몇 학생이 미리 알고 “우―”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다른 학생들도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다. 정광민은 가방에서 선언문을 꺼내 책상들을 돌면서 나눠주었다.
그는 이제 흥분상태에 빠졌다. 나중에 자신이 교실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내지를 못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러분! 때가 왔습니다. 다른 곳과 연락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뛰어나갑시다.”
“나가자!”
마흔 명의 학생들은 우루루 몰려나갔다. 주저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왜 이 젊은이들이 조건반사적으로 집단행동에 나섰던가. 여기에 하나의 시대정신의 압축된 모습을 본다. 1970년대의 학원사찰 시대를 살아온 젊은이들의 가슴마다에 쌓여 있었던 분노와 정의감, 1970년대 말에 집중적으로 터친 朴정권의 갖가지 부패상, 특히 언론이 연일 보도해온 YH 여공 사건과 金泳三 의원직 제명사건, 그런 것들이 조성한 發火 환경, 여기에다가 하루 전에 있었던 선언문 살포 사건이 조성한 기대감, 이런 것들이 뒤엉켜 인화물질을 이루었고, 그 한복판으로 정광민이란 불덩어리가 뛰어든 셈이었다. 사명감, 정의감, 울분으로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에 정광민은 바늘을 찌른 셈이었다. 그 에너지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사태는 자연법칙에 따라 큰 물리적 운동으로 전개될 것이었다.



경제과 2학년 학생들은 경영과 206호실을 지나가며 합류를 호소했다. 경영과 학생들도 엄태언으로부터 선언문을 받아 책상 위에 놓고 지휘자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뛰쳐나왔다. 무역과, 회계학과 학생들도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바깥으로 나왔다가 한덩어리가 됐다. 이들이 인문사회학관 건물 앞으로 나왔을 때는 100명쯤의 덩어리가 생겼다. 정광민은 선언문 뒷면에 검은 사인펜으로 ‘자유’라고 휘갈겨 썼다. 그는 이 ‘자유’를 두 손으로 높이 쳐들고 앞장을 섰다. 흥에 겨워 어깨까지 흔들어가면서 정광민은 빠른 걸음으로 학생들을 상대 앞까지 이끌어갔다. 이곳에서 노래가 터져나왔다. 부산 데모의 주제가가 된 「우리의 소원은 자유」를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에서 ‘통일’을 ‘자유’로 바꾸어 부른 노래였다. 중간시험을 앞두고 도서관 안엔 천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앞뜰의 잔디와 벤치에도 200명쯤이 흩어져 있었다. 데모대는 도서관 잔디밭에 들어갔다.
“모두 일어나자.”
간간히 이런 고함소리가 데모대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선구자」, 교가, 애국가를 계속 불렀다.

금정산 기슭에 새벽별 닦아노니
하늘도 넓어지고 포부도 높아져라
진리와 이상으로 불타는 젊은 학도
외치노니 학문의 자유, 이곳이
우리들의 부산대학교, 부산대학교


박기채 총장, 이충걸 학생처장, 신태곤 상대 학장, 오종석 상대 교무과장이 학생들을 제지하려고 달려온 것은 이때였다. 총장은 정광민의 어깨를 툭툭 치며 타이르듯 “이제 그만 내려가라”고 했다. 오교수는 광민의 허리띠를 붙들고 뒤로 끌어냈다. 큰 나무 밑으로 끌고 간 오교수는 “이것까지는 내가 책임진다. 학장실로 가자.”
광민은 말을 바로 받았다.
“이젠 어쩔 수 없습니다. 2, 3년 살 각오를 하겠습니다. 끝까지 하겠습니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대열로 돌아왔다. 상대 앞에서 100명으로 시작됐던 데모대는 잔디밭에서 300명쯤으로 불었다. 도서관 안에 있던 학생들도 성탄절 아침의 성가대처럼 「봉선화」 「선구자」를 우렁차게 불러대는 동료들을 찾아 한두 명씩 뛰어나오고 있었다. 주저하면서 구경만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도서관 앞에 있는 공대 교실 옥상과 베란다엔 학생 수백 명이 올라가 구경했다.
스무 명의 잠복형사들은 사태가 너무 빠르게 전개돼가는 바람에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르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학생데모는 초동 단계에서 깬다는 것이 원칙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깨고 들어갈 만한 틈이 보이지 않았다. 몇몇 형사들은 학생들의 팔을 잡아당기며 “학생! 이러면 안돼!”라고 말려보았으나 막무가내였다. 서면 근방의 소매치기 소탕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30세의 이성희 형사는 김성수 형사의 팔을 툭 치며 “이제 깨어버리자”고 속삭였다.
그때 정광민은 친구로부터 선언문을 한 장 받아들고 도서관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열람실을 돌아다니며 아직도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우리 일어납시다”고 소리쳤다. 정광민이 다시 잔디밭으로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두 형사는 학생들을 헤집고 그를 향해 뛰어들어갔다. 李형사가 광민의 멱살을 잡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은 학생들에게 둘러싸였다. 김창수는 한 형사의 뒷덜미를 붙들고 늘어졌다. 누군가가 면도칼이 아니면 만년필촉 같은 날카로운 쇠붙이로 李형사의 손바닥을 그었다.
학생들은 우루루 달려들어 욕설을 퍼부으며 두 형사를 차고 밟고 했다. 잔디밭 가장자리로 몰린 두 형사는 그만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두 형사가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자 한 이 체포 시도는 노래만 부르고 있던 학생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꺼져가던 열기에 휘발유를 부은 꼴이 됐다. 두 형사의 행동으로 자극받은 구경꾼 학생들도 한꺼번에 데모대열에 끼여들었다. 도서관 안에서도 학생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왔다. 형사의 기습은 시위대열을 300에서 1000명으로 불어나게 했다. 저절로 다섯 줄의 어깨동무 대열이 이뤄졌다.
대열은 계단을 내려가 상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꿈틀꿈틀하는 용의 몸뚱아리처럼 대열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뒤늦게 달려온 학생들이 잇따라 이 흐름에 말려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학생들도 끼여들었다. 데모엔 소극적이게 마련인 복학생과 4학년 학생, 심지어 대학원생들까지 합류했다. 몇몇 교수들은 대열과 같이 뛰면서 학생들을 잡아당겼으나 오히려 학생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대열은 아스팔트 산책로를 따라 상대를 지나 신관을 한 바퀴 돌고 스탠드를 가로질러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데모대열은 이젠 2000명쯤으로 불었다.
“유신”
“철폐”
처음으로 구호가 터져나왔다. 시위 대열은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교련 수업을 받고 있던 ROTC 학생들이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데모 대열은 新정문으로 향해 나갔다.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철문 바깥엔 스파르타 병정들처럼 방패와 방석모로 무장한 경찰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학생들은 농구골대를 밀고 와 新정문에 이르는 비탈길로 굴렸으나 쇠문은 끄떡도 안했다. 보도에 깔린 붉은 보판을 깨어 경찰대열에 집어던지는 학생들도 있었다.
사진 서클 소속의 한 학생은 데모 광경을 찍으려다가 봉변을 당했다. 학생들은 정보 형사로 착각하여 카메라를 빼앗아 필름을 빼버렸다. 도서관 앞에서 진압에 실패한 사복형사대 100명은 이때 신정문과 구정문에 다시 집결, 학생들의 외부 진출을 막으려는 제1차 저지선을 폈다.

블랙 마리아의 추격

16일 오전 10시15분 부산대 新정문.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학생들이 데모에 끼여든 것은 아니었다. 운동장에서 스크럼을 짜고 돌고 있는 2, 3000 명의 학생들을 스탠드나 교실에서 구경하고 있는 학생들도 많았다. 이런 수많은 방관자들을 참여자로 몰아세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오전 10시15분 신정문 바깥에서 동래경찰서장은 진압부대의 캠퍼스 돌격을 명령했다. 이 명령은 관할서장의 재량권에 속하는 것이었다. 정부의 학생데모 진압 제 1원칙은 데모를 그 발생의 첫 단계에서 원천적으로 분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장은 거의 자동적으로 이 결정을 내렸다. 맨 앞장을 선 것은 페퍼포그를 뿌리는 지프차였다. ‘블랙 마리아’란 별명이 붙은 이 차는 하얀 개스를 내뿜으면서 교정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그 뒤로 얼굴을 방석철망으로 가린 초록빛의 대열이 발맞춰 따라들어왔다. 탱크 뒤를 따르는 보병들처럼.
학생 대열은 매운 개스 앞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콜록콜록 재채기를 터뜨리고 눈물을 찔끔찔끔 짜면서 그들은 우루루 물러났다. 운동장으로, 교내 도로로.
그러나 일부 학생들은 대항했다. 시계탑 밑의 보도에 깔린 보판을 빼내 가스차에 던졌다. 유리창에 철망이 쳐져 있어 보판을 맞고도 끄떡도 않자 보판을 깨어 조각으로 만들어 던지기도 했다. 잘못 던져 앞의 학생이 얻어맞는 수도 생겼다.
학생들이 대항하자 경찰은 MPG 최루탄 발사기를 쏘고 사과탄을 던졌다. 이때 캠퍼스로 들어온 경찰은 585명이었다. 데모대를 완전히 해산시키기엔 모자라는 병력이었지만, 학생들을 자극하여 거대한 분노의 덩어리로 만들기엔 충분했다.
블랙 마리아는 운동장으로 들어가 달아나는 학생들을 뒤쫓았다. 너무나 집요하게 추격하는 바람에 구경하고 있던 지질학과 이만규는 “저러다간 학생들이 차에 깔려 죽겠다”고 소리치며 데모 대열로 뛰어들었다. 달아나는 어느 학생이 갈 지자를 그리며 블랙 마리아의 추적을 뿌리치려고 해도 지프차는 스탠드 바로 밑까지 깔아 죽일 듯 그 학생을 몰아갔고 학생들은 야유를 보냈다. 사학과 졸업반인 최현주는 “이럴 수가 없다”고 치를 떨었다. 그의 학급은 운동장에서 우우 하는 함성이 터져나올 때까지 수업을 받고 있었다. 교수가 바깥에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하자고 했으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매운 최루개스는 학생들을 행동으로 몰아세웠다.
“지금이 공부할 때냐?”
학생들은 교수의 눈치도 보지 않고 몰려나갔다.
16일 오전 10시30분 부산대 본관. 校內 步道를 통해 본관 정문쪽으로 경찰들이 쳐들어오고 있었다. 뒷걸음쳐 온 학생들은 본관 1층 주변에 몰려섰다.
“모두 본관으로 들어가라!”
경찰은 경고방송과 동시에 최루탄을 쏘았다. 2, 3층의 유리창이 최루탄을 맞고 박살이 났다. 유리조각이 좌르르 우박처럼 떨어졌다. 학생들은 본관으로 피해 들어가 창문을 통해 경찰에 욕을 퍼부었다.
“창가에 서지 말라.”
경찰의 두번째 최루탄 세례가 유리창으로 날아왔다. 와장창 와장창, 곳곳에서 창문이 깨지고 복도는 최루개스로 뒤덮였다. 최현주는 캠퍼스란 성역이 겁탈당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결혼을 두 달 앞둔 사학과 졸업반 김원산은 데모엔 애당초 별 관심이 없었다. 군대에 갔다 왔고 나이도 스물여덟이라 학원 자유의 문제보다는 졸업 후의 취직 문제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할 입장이었다. 그도 캠퍼스가 초록빛깔의 집단에게 짓밟히고 있는 것을 보고는 참을 수 없었다. 많은 교수들도 모멸감을 느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너희들이 무얼 아느냐”고 데모하는 제자들을 꾸짖고 있었던 교수들은 이젠 학생들과 마음속에서 같은 편이 되고 있었다. 한패의 학생들은 구경하고 서 있던 음악과의 어느 교수를 끌어들였다. 같이 팔짱을 낀 한 학생은 “선생님, 같이 데모합시다”면서 끌고 갔다. 이 교수는 “이거 왜 이래”라고 소리쳤지만 학생들과 같이 뛰는 꼴이 됐다. 얼마쯤 끌고 가던 학생들은 교수를 풀어주면서 야유를 퍼부었다. 공대의 어느 교수는 신정문을 가로막고 서서 학생들에게 해산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얼굴을 잘 아는 학생이 데모대 속에 보이자 그를 잡으러 들어갔다. 학생들은 욕설을 하면서 교수를 밀어내버렸다.
경찰의 캠퍼스 돌격은 방관하던 학생들을 참여자로, 참여자를 더 용기 있는 시위자들로 만들었다. 이 교정 진압작전 이후엔 막는 쪽과 외치는 쪽이 있을 뿐이었다. 방관자의 설 땅을 없애버린 것은 바로 경찰이었다.

무너진 블록담을 뚫고

경찰의 진압작전은 잠시 성공하는 듯했다. 정문까지 진출했던 데모 학생들은 본관 쪽으로 패주했다. 경찰 진압부대는 보도를 따라 캠퍼스를 한 바퀴 돌면서 학생들을 뿔뿔이 흩어버렸다. 경찰은 운동장에 재집결했다.
학생들은 경찰이 일단 운동장으로 물러나자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문창회관 앞에선 700명 남짓한 무리가 모였다. 이 무리는 舊정문 쪽으로 행진했다. 舊정문은 新정문에서 남쪽으로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치며 나갔다. 체육관·도서관·본관에 몸을 피했던 학생들이 다시 쏟아져나와 이 대열에 합세했다.
이때 경제과의 어느 학생은 본관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데모 대열을 구경하고 있는 마지막 방관자들에게 외쳤다.
“역사를 두려워하라!”
이 구호는 아마 부산 데모를 통해 나온 모든 구호 가운데 가장 수준 높고 준엄한 것이었으리라. 대열이 舊정문으로 꺾이는 모퉁이를 돌 때 옆에 붙은 공대 강의실에서 공대생들이 무더기로 뛰어나와 합류했다. 이제 천 명이 넘게 불어난 사람의 무리는 비탈길을 무서운 관성으로 휩쓸며 내려갔다. 경찰은 부산대학교의 지형이 데모 진압에 크게 불리하다는 점을 이번에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 캠퍼스는 산기슭을 깎아 만든 것이었다. 따라서 학생들이 위쪽에서 모였다가 아래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것을 막기가 힘들었다.
舊정문을 향해 쏟아져내려간 학생들은 철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수위실에 돌을 던져 박살을 내고 그 옆에 붙은 블록담을 공격했다. 블록담에 쳐진 철망을 걷어내고 수백 명이 한꺼번에 발길질을 하자 담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드디어 학교 밖으로 나온 학생들은 100명쯤의 기동경찰대와 맞닥뜨렸다. 舊정문 앞에는 가게가 있고 이 가게 앞엔 빈 음료수병이 쌓여 있었다. 학생들은 너도 나도 이 빈 병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경찰 버스의 앞창문이 산산조각 났다. 경찰은 이 기세에 눌려 주춤했다. 학생들은 무너진 舊정문 쪽 블록담 사이로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300명 남짓한 학생들이 주택가 골목 사이로 빠져 온천장 쪽으로 뛰어갔다.
舊정문 바깥에 있던 경찰이 정신을 차리고 갈라진 틈을 메꾸어 학생들을 다시 학교 안으로 밀어붙이는 사이 新정문 바깥으로 일단 물러났던 다른 진압 병력은 다시 본관 쪽으로 쳐들어갔다. 舊정문 쪽으로 몰리는 학생 대열의 꼬리를 끊어버리려는 작전이었다. MPG최루탄과 사과탄이 학생들 머리 위에서 폭음과 함께 터졌다. 전투경찰의 돌격 함성소리와 가을의 높푸른 하늘을 가르는 곤봉질이 한 차례 지나갔다.

16일 오전 11시 부대 도서관 앞. 도서관 앞엔 2000 명 가량의 학생들이 모였다. 수백 명의 사복 형사와 교수들, 그리고 정보 형사들의 카메라 렌즈 앞에서 무역과 김창수가 학생들을 모두 앉도록 했다. 선언문 낭독이 있어야 할 차례였다. 정광민은 자기가 쓴 선언문을 꺼내 읽으려 했다. 그러나 희미하게 등사돼 아예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광민이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친구가 전날 받았던 이진걸의 선언문을 건네주었다.
정광민은 “우리는 학원내 일체의 외부세력을 배격한다……”는 선언문을 우렁찬 목소리로 읽어내려갔다. 그럴 때 상대 학생 10명쯤이 일어나 그를 둘러쌌다. 정광민에게 고개를 막아주기 위해서였다. 광민이 선언문의 첫 단락을 다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속으로 들어온 것은 도서관 옥상에서 그를 겨냥하고 있는 카메라 렌즈였다. 광민의 뒤를 이어 김창수가 선언문을 받아 계속 읽어내려갔다. 낭독이 끝난 뒤 잠시 휴식. 이때 한 학생이 앞으로 나와 데모할 때 주의할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자.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나. 상점이나 학교 기물을 부수지 말자. 모두 우리가 낸 세금이다. 행인에게 방해가 안 되도록 질서를 지켜 시위를 하자.”
정광민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앞에 나섰다. 구호를 선창했다. 수천 명이 이를 받아 복창했다. 금정산의 암벽에 함성이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유신헌법을 철폐하라!”
“학원사찰을 중지하라!”
“구속학생 석방하라!”
“긴급조치 위반자를 석방하라!”
“YH와 같은 반윤리적 기업을 엄단하라!”
“국민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중지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
구호 제창이 끝나자 학생들은 데모의 목표 지점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온천장으로 가자, 아니 부산역까지 나가야 한다,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이 정광민은 같은 학과 친구들에게 끌리다시피 하여 도서관 뒤쪽으로 빠져나왔다. 한 친구는 3000 원을 주면서 “이제 너 할 일은 끝났다. 친구집에 가서 숨어 있으라”고 했다. 네 친구는 광민이를 번쩍 들어 뒷담으로 넘겨 보냈다.

농구골대로 빗장 걸고

학생들은 목적지를 놓고 도서관 앞에서 토론을 벌였으나 결정하지 못했다. 우선 학교를 뚫고 나가기로 했다. 여덟 줄로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곤 비탈길을 따라 무너져내리듯 운동장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많은 학생들이 가방을 든 채 뛰었다. 여학생들은 콜라와 사이다를 한아름 사 가지고 와 대열과 나란히 뛰면서 남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경찰은 이제 이번 데모가 옛날의 그 어떤 학생 데모와도 다른 성격을 띠어가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채기 시작했다. 가장 큰 특징은 놀라운 자발성이었다. 졸업반 학생과 여학생까지 스스로 끼여들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체면치레로 행동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학생들과 교수들이 실랑이를 벌여 自中之亂이 생기고 여기에서 데모의 김이 새버리는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캠퍼스에 있었던 학생들 가운데 90퍼센트 이상이 대열에 끼여 들었다. 전에 없던 높은 참여율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두 번이나 깨어져 흩어졌다가도 세 번이나 다시 뭉쳐 더 거센 도전을 해왔다. 학생들의 상기된 얼굴은 신념으로 빛났고 장난삼아 데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시위 대열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운동장 북쪽의 사대부속고등학교 담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 담엔 셔터식 철문이 달려 있었다. 학생들이 밀어붙이자 문이 떨어져나갔다. 이곳으로 서로 먼저 나가려고 학생들이 엉겨붙었다. 이때 누군가가 “질서 유지”라고 구호를 선창했다. “질서” “유지” 어느새 합창으로 변했고 학생들은 질서를 되찾았다. 부속고등학교는 대학 운동장보다 낮은 곳에 있었다.
교사 2층 복도를 우루루 지나간 데모 학생들은 1층으로 내려와 고등학교 운동장으로 쏟아져나왔다. 고등학교 정문 너머로 경찰이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학생 수십 명은 이때 농구골대를 밀고 나가 쇠문 안쪽에 밀어붙여 놓았다. 경찰은 차를 몰아 정문을 돌파해 들어오려 했다. 그러나 지프차에 밀려 쇠빗장은 휘어졌지만 농구골대는 끄떡도 않아 잠시 경찰 진입을 늦출 수 있었다. 귀중한 시간을 번 학생들은 사대부고의 북쪽담을 넘고 사잇문을 지나 주택가로 몰려나갔다. 천 명쯤이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부곡동 산업도로 쪽으로 질주해갔다.

16일 정오 부산대학. 한편 경찰이 뒤늦게 사대부고 담을 봉쇄하자 미처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학생들 2천 명 가량은 어깨동무를 한 채 대학 운동장을 계속 맴돌았다.
정오 박기채 총장이 스탠드 본부석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차분한 음성으로 학생들에게 호소했다.
“여러분이 오늘 아침에 일으킨 일은 매우 유감스러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실정은 북괴의 위협이 드세어지고 국제 정세는 매우 어려운 때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이 이런 일을 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것입니다. 오늘의 일은 학생 모두의 뜻이 아닙니다. 일부 학생들의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사태는 사회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자제해주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인류 공영에 이바지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학교와 달리 우리 학교가 이렇게 한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심히 유감스러운 것입니다. 지금 곧 교실로 돌아가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연설을 끝내자 총장은 사무실로 돌아갔다. 교수들도 학생들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더 이상 데모를 지켜볼 필요가 없다고 깨달았는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하나둘씩 사라졌다. 경찰도 교내 시위대에 더 이상 자극을 주면 바깥으로 진출하도록 부추기는 결과를 몰고 올 것 같아 진압부대를 일단 정문 밖으로 물렸다.
낮 1시쯤부터 학생들은 교정을 떠나기 시작했다.
경찰은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는구나”고 생각했다. 학생들이 정문을 나서는 데는 굳이 말릴 까닭을 찾을 수 없었다. 학교당국에서도 오후에는 수업을 하지 않기로 했으니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경찰의 행동에 큰 모순점이 숨어 있음을 그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경찰은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오는 것을 기를 쓰고 막아보려 했었다. 지금은 수천 명의 학생들이 당당하게 교문을 나서고 있었고 이를 막을 생각도 않고 있었다.

경찰은 자기들에게 도발을 하지 않고 교문을 지나가는 학생들에게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경찰은 곧 학생들이 가는 곳이 부산역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성희 형사는 학생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부산역에서 만나자”는 얘기를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다. 공중전화 박스 옆에선 어떤 학생이 “우리는 했다. 너희들은 무엇 하느냐”고 소리치는 것도 엿들었다. 이 정보는 부산시경에 즉시 보고됐다. 동아대학교를 비롯한 다른 대학에도 경찰의 비상망이 쳐졌다. 학생들이 캠퍼스를 빠져나간 뒤에 박기채 총장은 교수들을 강당에 모았다.
“인류 역사 시작 이래로 젊은이들은 항상 과격한 행동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면학 분위기를 되살리는 데 최선을 다합시다.”
그는 짤막한 당부의 말을 던지고 강당을 나가버렸다. 박총장은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고 뒤에 말했다.













학생 숨겨주는 시민들

16일 오전 서울. 부산대학교가 최루가스와 함성으로 휩쓸리고 있던 이날 오전 국회 본회의는 휴회 기간중에 사망한 유정희 金聖煥 의원에 대한 묵념을 올리고 의원직을 승계한 고귀남 의원 선서를 듣고 5분 만에 끝났다. 金泳三 총재 제명 이후 처음 열린 본회의장에서 여당 의원들은 텅 빈 야당 의석을 의식해서인지 좌석에 앉아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는 등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공화당 의장서리 朴浚圭는 기자들과 만나 신민당 의원들의 의원직 사퇴 문제에 대해 “야당 의원들이 자살한다고 해도 곡할 사람이 있는 줄 아느냐”고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정회는 이날 유신 7주년 기념 강연회를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졌다. ‘80년대를 위한 유신체제’라는 강연에서 유정회 갈봉근 의원은 “유신체제의 궁극적 과제는 안정 속의 번영에 있는 것이며, 이는 국민총화와 능률의 극대화 없이는 이룩할 수 없다”고 전제, “이런 뜻에서는 국민총화를 깨뜨리는 요인은 그 구실이 어디에 있든지간에 국가적 차원에서 용납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朴대통령은 한강을 가로지르는 열한번째의 다리 성수대교 개통식에 참석하여 테이프를 끊은 뒤 강남쪽으로 걸어서 건넜다. 이어서 여의도에 있는 한국기계공업진흥회관을 방문하여 한국기계 교역전을 둘러보았다. 대통령은 전시장에 온 일반 시민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대통령이 전시장을 떠날 때 관람객들이 바깥으로 나와 박수를 치자, 손을 들어 답례했다.

16일 오전 경찰이 부산대학교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 학생들을 스탠드나 교실 안으로 몰아넣고 있을 때 부산 시경 밑에 있는 아홉 개 경찰서엔 비상이 걸렸다. 이때가 오전 10시45분쯤, 동래경찰서 관할 지역과 붙어 있는 부산진 경찰서 다중진압부대 150명은 15분만에 뒷마당에 집결했다. 방석모와 방석복을 입고 곤봉을 찬 그들은 야구의 포수들 같았다. 5년 만에 처음으로 그들은 학생 데모 진압의 현장으로 출동했다. 그때는 아무도 그들이 정작 중요한 장비를 빠뜨리고 간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방패를 두고 갔던 것이다.
오전 10시 50분께 부산대학교 구정문의 담을 무너뜨리고 바깥으로 나온 300명 가량의 학생들은 골목을 따라 금강공원 쪽으로 달렸다. 금강공원에서 온천장까지 구호를 외쳐대면서 시위를 벌였다. 행인들은 눈이 휘둥그래져 쳐다보기만 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행인들과 가게 주인들 가운데 “잘한다!”면서 손뼉을 치는 사람들이 한두 사람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데모대는 사직동 원예고등학교까지 나아갔다. 이 학교 앞에서 비로소 경찰 진압부대를 만나 흩어졌다. 사대부고 담을 뛰어넘고 이웃 주택가로 쏟아진 천 명 가량의 주력은 부곡동 산업도로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곧장 길 한복판을 차지했다. “유신 철폐”를 외치며 온천장 쪽으로 당당하게 나아갔다. 뛰다간 걷고 또 뛰다간 걷곤 했다. 구호와 ‘우리의 소원은 자유’를 부르며 그들은 앞뒤도 없이 무리 지어 나갔다. 데모대의 뒤를 따라 제 1기동대 병력 50명이 트럭을 타고 서서히 뒤쫓아 왔다. 데모대가 온천장 네거리 입구에 이르렀을 때 트럭이 갑자기 데모 군중 속으로 치달아 들어왔다. 이진걸은 그때 대열 앞쪽에 있었다. 트럭이 미친 듯 돌진해오자 받힐 것 같아 오른쪽으로 피했다. 대열은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전투 경찰관들이 뛰어내려 곤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화학과 2학년 박문태는 경찰을 피해 길보다 낮은 주택가로 뛰어내렸다. 뛰어내린 곳은 허술한 블록담이었다. 이 담이 무너져내렸다.
집을 지키고 있던 주부가 놀란 눈으로 뛰어나왔다. 박문태는 계면쩍은 얼굴로 블록 더미 속에서 일어나 그 여자에게 사과를 하려는 순간 허리가 뜨끔하는 것을 느끼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이웃 주민들의 도움으로 부산시 중구 중앙동 고려신경외과로 옮겨졌다. 엑스선 진단 결과 허리뼈가 부러졌음이 밝혀졌다.

이때 주민들이 비로소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한 할머니는 샛길로 다니는 이진걸 일행에게 앞에 경찰 부대가 진치고 있다고 일러주었다. 집으로 무작정 뛰어들어 몸을 숨기는 학생들을 측은한 눈초리로 맞아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주부는 경찰이 지나간 뒤 다시 피신처를 뛰쳐나가려는 학생을 붙들어두고 바깥으로 정찰을 나가 경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내보내주었다.
시내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응원을 보내는 시민들도 많았다. 학생들은 큰 용기를 얻었다. 결코 외로운 싸움이 아니란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꽉 채운 투석

‘부산일보’ 사진부 김승준 기자는 다른 취재를 마치고 영업용 택시를 타고 가다가 온천장에서 데모대를 봤다. 택시를 세우고 카메라를 차창 밖으로 내밀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데모 학생들에게 둘러싸였다. 사진 기자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사진기가 든 가방을 빼앗아갔다. 김기자는 카메라를 돌려달라고 사정했다. 한 학생이 필름통을 꺼내 햇빛 앞에서 쭉 뽑아보인 뒤 돌려주었다.
‘국제신문’의 사진부 기자 김탁돈은 낮 11시쯤 회사에 있다가 데모 소식을 사회부로부터 전해들었다. 찍어보았자 신문에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뛰어나가는데 편집국장이 “어딜 가느냐”고 소리쳐 물었다. 데모 취재를 간다고 했더니 국장은 짜증 섞인 투로 “그런 데는 가지 말라”고 잘라 말했다. 김기자는 무안 당한 꼴이 되어 시무룩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부산진경찰서 진압 부대는 SSB무전기를 통해 시경 경비과장의 작전 지시를 들었다. 학생들 수백 명이 미남로터리 쪽으로 향하고 있으니 로터리로 가서 이를 막으라는 명령이었다.
로터리에 도착한 서장은 자기 차를 달아나기 쉽게 머리를 남쪽으로 하여 세워두었다. 그리곤 데모진압 부대를 가로로 배열시켰다. 학생들은 경찰을 보자 멈칫했다. 그들 앞에는 목욕탕이 있었고 그 옆엔 하수도 공사장이 있었다. 시멘트 하수관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자갈더미도 있었다. 학생들은 직감적으로 이곳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먼저 하수도관을 굴려 경찰차가 못 넘어오게끔 바리케이드처럼 만들었다. 그리곤 너도 나도 자갈더미에서 돌멩이를 한웅큼씩 잡았다. 경찰 부대를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양쪽은 100미터쯤 거리를 두고 있었다. 돌은 그 완충 지대에 떨어졌다. 몇몇 학생들은 앞으로 우루루 달려나가 돌을 던지고는 물러나는 일을 되풀이했다. 부산진서 서동백 수사과장은 그러는 학생들이 권투 시합을 앞두고 몸을 풀고 있는 선수 같아 보였다.

기세를 돋우기 위해 일부러 학생들이 나왔다가 들어갔다 하면서 산발적으로 “우―”하는 함성을 지르며 경찰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괴성을 지르며 백인들에게 달려드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경찰 진압부대에 30미터쯤 접근했을 때 학생들은 한꺼번에 돌을 던졌다. 500개가 넘는 돌이 뒤엉켜 날아왔다. 서동백은 하늘이 갑자기 새까맣게 되는 것을 보았다. 철새나 메뚜기떼가 덮쳐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했다. 우두둑 여기저기서 돌덩어리가 경찰 부대 속으로 떨어졌다. “어!” “아!” “아야!” 돌을 맞은 경찰관들이 비명을 질렀다. 두 번째 일제 투석이 우박처럼 또 쏟아져내렸다. 경찰 대열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찰관들은 이때야 방패를 들고 오지 않은 실수의 대가를 값비싸게 치르고 있음을 깨닫게 했다.
맨몸으로 주먹만한 돌을 얻어맞게 된 경찰관들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맨 먼저 서장의 승용차가 달아났다. 작전차 운전사는 차를 호위하던 경찰관들이 달아나 차만 덩그렇게 남은 것을 알아차리자 운전석에 뛰어나와 도망갔다. 서장이 달아나자 간부들도 지휘를 포기했다. 서동백 수사과장은 학생들이 몰려오자 모자를 벗어버리고 길가 집으로 뛰쳐들어가 몸을 피했다. 집 문밖으로 학생들이 몰려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이번 학생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경찰관 생활 스물 몇 해 동안 수십 차례 데모를 막아본 적이 있지만 저 학생들처럼 기세가 등등했던 무리는 없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학생들은 승승장구했다. 로터리에 외롭게 서 있는 작전 트럭을 돌멩이로 두들겨패 학생들의 표현을 빌자면 떡을 만들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계속 뛰어갔다. 골목, 집안으로 몸을 피했던 경찰관들은 곧 정신을 차렸다.
이때 경찰 기동순찰차인 검은 포니가 학생들을 향해 독불장군처럼 질주해왔다. 돌을 들고 있었던 학생들은 엉겁결에 조건반사적으로 집중투석을 했다. 김창수는 돌무더기가 포니의 앞창문을 부수고 차 속으로 확 빨려들어가는 것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운전사가 옆자리로 쓰러졌다. 차가 급하게 멈춰 섰다. 이어서 작전 트럭이 데모 대열을 양쪽으로 가르며 군중 속으로 치고 들어왔다. 학생들은 주택가 골목으로 피해 들어갔다. 이것은 경찰의 노리는 바였다. 막다른 골목에 봉착하여 다시 돌아 나오던 학생들은 출구를 지키던 경찰관에게 걷어채이고 몽둥이로 얻어 맞은 뒤 끌려가 경찰버스에 실려졌다.
경찰관들도 이때는 흥분 상태에 있었다. 미남로터리에서 동료들이 돌에 얻어맞고 퍽퍽 쓰러지는 것을 보았던 그들은 동물적 복수심을 불태우게 됐다.
김창수는 돌에 맞은 한 경찰관이 뒤쫓아오면서 학생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봤는데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취재 포기한 기자들

16일 오전 부산진서 상황실. 이날은 샘이 날 만큼 훌륭한 가을날이었다. 구름은 한 점도 없었다. 햇빛은 눈부시게 빛났다. 조금 더운 가을날 같았지만 바람결은 서늘하게 살갗을 스쳐갔다. 이날 오전 부산의 사회부 기자들은 사상 괘법동에서 일어난 정병주씨 부부 실종사건의 수사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출입처를 지키고 있었다. ‘국제신문’ 사회부 趙甲濟 기자는 10시45분쯤 부산진경찰서 다중진압부대에 비상이 걸리는 것을 보고 상황실로 뛰어올라갔다. 무전기가 숨가쁘게 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참새 200마리 舊정문 돌파하여 식물원 쪽으로 진출하고 있음.”
“참새들 금강공원 통과.”
“참새 네 마리 연행중.”
데모 상황을 보고하는 음성과 병력 배치를 지휘하는 음성이 뒤섞여 무전기는 데모 중계방송을 하는 듯했다. 趙기자의 충격은 컸다. 부산대학교에서 데모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어난다 해도 우리나라의 모든 대학 가운데 맨 나중에 일어날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趙 기자는 사회부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그는 “취재하러 갈까요”라는 어리석은 물음은 던지지 않았다. 그것은 신문에 날 수 없는 사건, 따라서 취재할 필요도 없는 사건이라는 것을 유신체제에 길들여진 趙 기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기자를 만나자 “우리 데모 구경 갈까요”라고 농담조로 얘기한 것이 고작이었다. 상황실의 무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불티나게 왕왕댔다. 경찰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경찰은 상황실에서 기자들이 나가줄 것을 요구했다. 趙기자는 며칠 전 사회부의 후배기자가 동아대학교의 간부 직원을 만나러 갔다가 오해를 당한 것을 기억해냈다. 그날은 동아대학교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다고 해서 정보기관 사람들이 캠퍼스에 깔려 있던 때였다. 후배 기자가 회사로 돌아가자마자 이 대학교의 간부 직원은 정보부 부산지부에 ‘기자의 수상쩍은 방문’을 알려주었던 모양이었다. 정보부의 언론담당조정관이 편집국장에게 이 건에 대해 주의를 주었다. 편집국장은 사회부 기자들에게 “앞으로는 그런 장소엔 가지 말라”고 짜증 섞인 투로 말했던 것이다.
“쓰지도 못할 것 알아선 뭘해.”
그는 상황실에서 밀려나 점심 먹으로 갔다. 趙기자는 언제나 하는 버릇대로 점심 뒤 숙직실에 들어가 냄새가 나고 땟국이 흐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낮잠을 잤다. 얼마쯤 잤을까? 바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숙직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형사 둘은 국방색 전투복 차림이었다. 지친 표정이었다. 구두끈을 풀고 털썩 드러눕더니 “야!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하는 것이었다.

운명의 손길, 부산역에서 광복동으로

趙기자가 형사계에 들어가 보니 대학생들 열서넛이 책가방을 든 채 잡혀와 있었다. 서면로터리에서 타고 가던 시내버스로부터 끌려내려진 것이었다.
그들은 오늘 한 일을 시간별로 쓰라는 지시를 받았다. 趙기자는 도수 높은 안경을 낀 한 의예과 학생이 쓴 자술서를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았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울분에서 데모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趙기자는 가슴이 섬뜩해옴을 느꼈다. 살벌한 경찰서에서 형사들로부터 귀싸대기를 얻어맞으면서도 이처럼 소신을 주장하는 학생이 부럽게 느껴졌다.

16일 오후 서면·부산역

경찰은 학생들이 시내버스를 타고 시 중심부로 몰려가는 것을 막아보려 했다. 자동차로 시내버스를 뒤쫓았다. 학생들이 주로 많이 탄 것은 부산대학교 근처에 시발점이 있는 18, 19번 버스였다. 많은 버스가 학생들로 꽉 채워졌다. 학생들은 승강구 문을 걸어잠그게 했다. 그리곤 정류소에 멈추지 말고 광복동 쪽으로 계속 달리도록 운전사에게 부탁했다. 경찰차가 뒤따라오자 “아저씨, 자동차 경주엔 이겨야 해요!”라고 운전사에게 응원을 보냈다. 멋모르고 신바람이 난 시내버스 운전사는 차를 내쳐 몰았다.
경찰은 서면로터리에서 일단 학생들이 탄 시내버스를 검문하여 그들을 끌어내리려 했다. 몇 번 이 짓을 해보고 경찰은 손을 들어버렸다. 서면로터리는 하루에 10만 대의 차들이 오가는, 부산에서 가장 번잡한 교통 중심지다. 심할 땐 2, 30분쯤 차들이 톱니처럼 서로 물려 꼼짝을 못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시내버스를 하나씩 세운다면 차량 교통은 완전히 마비될 터였다. 워낙 학생 버스가 많아 모든 학생들을 끌어 내린다는 것도 될 일이 아니었다.
“집에도 못 갑니까?”
이런 말엔 경찰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학생 버스는 서면로터리를 지나 일로 부산역 쪽으로 내달렸다. 학생들이 부산역에 다시 모인다는 정보에 따라 부산시경은 역 광장과 지하도 주변에 병력을 깔았다. 맨첨 부산역 정류장에 도착, 버스에서 내린 4, 50명의 학생들이 이들 경찰관에게 몽땅 붙들려갔다.
김창수 일행은 부산역에서 내리자 “이곳은 틀렸다”고 느꼈다. 전투복 경찰관들이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잘못하다간 잡혀갈 것 같아서 그들은 다시 시내버스를 잡아타고 시청 쪽으로 향했다. 경찰은 학생들을 가득태운 시내버스가 잇따라 부산역 지하도 근방 정류소에 닿자 승강구 문을 열지 못하게 하고 시청 쪽으로 계속 가도록 했다. 나중엔 아예 정류장에 멈추지도 못하게 하고 그냥 통과하도록 했다.
경제과 2년 여성모가 탄 시내버스도 부산역에 멈추지 못하고 지나가야 했다.
“시청으로 갑시다.”
한 학생이 부르짖었다.
“와!”
다른 학생들은 발을 구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학생들의 집결지 목표는 타의에 의해서 시청 부근으로 바뀐 것이었다. 이것도 釜馬사태를 폭발시킨 많은 우연들 가운데 하나였다. 시청 부근인 광복동 남포동 거리가 데모에 있어서는 부산역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은 몇 시간 안되어 밝혀질 것이었다. 운명의 손길은 경찰을 통해서 朴정권의 종말을 재촉하는 방향으로 중단 없이 작용하고 있었다.

광복동 사람들의 불만

광복동 일대는 바로 데모꾼들을 위해 만들어진 거리였다. 부마사태의 확대는 광복동 일대의 지리와 풍토 및 이곳 주민들의 기질에 힘입은 바가 컸다. 2평방킬로미터 정도의 이 시가지에는 수천 개의 술집과 점포가 있었다. 주인들의 의지에 따라서는 시위자들의 피난처로 변할 수 있었다. 이곳은 밤낮으로 인파가 붐비는 거리였다. 650미터의 광복동 거리를 하루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30만 명이다. 길이 500미터 가량의 남포동 거리의 하루 통행 인구는 50만 명, 특히 야간 통행 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런 인파의 바다에 데모대라는 물고기가 뛰어들었던 것이다. 수많은 인파는 언제나 데모대로 변할 수 있는 잠재력을 안고 있었다. 경찰은 일반 시민과 데모대를 구별하기가 어렵게 됐다. 찻길로 나오면 데모대고 인도로 달아나면 선량한 시민이었다.
이곳의 야간 인파는 거의가 2, 3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혈기 왕성한 그들은 데모라는 표현 방법으로 에너지를 방출할 태세가 돼 있었다. 이곳은 또 불쏘시개였다. 학생들이 불씨를 안고 뛰어들 때 확 번질 수 있을 만큼 그들은 바짝 말라 있었다.
광복동 일대가 그 중심인 부산시 중구 주민들의 1인당 세금 부담액은 1979년엔 27만 6천 원이었다. 이것은 부산시민 평균의 네 곱이나 됐고 서울 시민 평균의 두 곱이었다. 이런 무거운 세금에 불만을 갖지 않은 상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 불만은 부가가치세 실시 뒤에 더욱 놓아졌다. 이곳에서 자리를 뜨는 상인들의 거의 전부가 무거운 세금에 견딜 수 없어서라고 푸념했다. 釜馬사태가 터진 날, 이곳 상인들은 9일 앞으로 다가온 부가세 확정 신고일을 놓고 더욱 불평불만에 차 있었다. 제 2차 석유파동에 기인한 1979년의 경기 침체는 이들의 조세저항 심리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광복동 상인들은 너무 이해타산에 밝아 우직한 행동을 할 유형의 사람들이 아니라고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과 이해가 얽힌 문제에 대해서는 끈질기고 조직적인 저항을 하는 일면도 갖고 있었다. 어느 은행 지점이 광복동의 어느 데파트에 입주하려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상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은행은 오후 4시만 되면 셔터를 내리고 밤에는 전등도 켜지 않기 때문에 상가의 흥청거리는 분위기를 잡치게 한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이 은행은 결국 데파트에 들어오지 못했다.
이들 상인은 또 관청에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다. 광복동에서 ㄱ다방을 경영하던 조창열씨는 그때 말했다.
“우리 다방은 전세 1,700만 원, 월세 70만 원으로 움직이고 있었읍니다. 변두리보다 다섯 곱이 넘게 비싼 것이지요. 그런데도 관청에선 커피값을 변두리와 똑같이 받으라고 합디다. 웬 단속을 또 그렇게 자주 합니까. 경찰 구청 보건소 세무서 전화국 소방서……. 우리는 뭐 동네북입니까. 물론 단속에 걸려도 돈을 주고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때마다 더러워 못 해먹겠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돈을 벌어 꼭 만들고 싶은 게 있어요. 뭔지 압니까. 그것은 흥신솝니다. 보기 싫을 만큼 자주 찾아와 돈을 뜯어가는 사람들을 뒷조사하여 혼을 내주고 싶단 말입니다!”

업소 종업원들의 불만

남포동 거리엔 233곳의 술집이 있었다. 이들 술집 주인이 장사를 하면서 겪어야 하는 수모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시청과 구청 직원, 파출소 순경, 관할 경찰서 수사과 형사, 보안과 경찰관, 보건소 직원, 세무서원, 소방서원, 전화국 직원, 구청 건축과 직원들은 모두 그들이 상전처럼 떠받들고 모셔야 할 사람들이었다.
가짓수도 많은 단속법―식품위생법, 아동복리법, 소방법, 건축법, 미성년자 보호법, 공연법, 경범죄 처벌법, 광고물 단속법 등등. 이들 규제법의 올가미를 덮어씌었을 때 “나는 결백하다”면서 빠져나올 수 있는 업주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공무원들에게 겉으로 억지 아양을 떨어야했던 만큼 가슴속 깊이로는 울분을 쌓아가고 있었다.
넓이로 쳐서 중구(광복동 부근이 그 중심지)는 부산시 전체의 0.6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2.8평방킬로미터다. 그러나 이곳엔 부산시 전체 접객업소의 16퍼센트인 2,980개가 몰려 있었다. 술집, 음식점, 숙박업소 등 이들 업소의 종업원들은 그들의 주인보다도 더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의 불만은 관청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관청과 업주를 포함한 사회 전체를 향한 불만이었다. 낮은 임금과 형편없는 생활 환경 이상으로 그들을 사회의 불만층으로 만든 것은 인간답지 못한 대우였다. 손님들과 업주로부터 받는 경멸과 손찌검은 거의가 청소년들인 이들의 가슴에 원한을 심어놓기가 일쑤였다.

데모가 터졌을 때 이들이 가세하여 파출소에 돌을 던지고 경찰차에 불을 지른 것도 이런 원한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그들은 어떤 사회 변혁도 그들의 처지를 더 나쁘게는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釜馬사태 이전부터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데모대에 뛰어들 준비 자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광복동 일대에는 또 우리 겨레가 겪었던 치욕과 좌절, 혼란과 낭비의 상징물들이 많았다. 용두산 기슭에 있었던 왜관, 강요된 개항 뒤 일본인이 벌인 매축공사로 생겨난 땅. 그 땅에 일본인들은 주택지와 거리를 만들고 ‘나가데도오리’라고 이름지었다. ‘니시마치’ ‘사이와이마치’가 들어섰던 이 거리는 해방 뒤 광복동으로 이름을 갈았으나 주민들의 의식은 그 이름처럼 천지개벽하지는 못했다.
밀수꾼과 밀항 조직의 집합소. 깡패들의 칼부림과 술, 값싼 여자 북새통을 이루던 남포동. 6.25 사변중 임시수도 시절 이 나라의 창백한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밀다원’ ‘실로암’에 모여들어 전란 속의 현실도피를 한때나마 즐기던 곳이기도 했다.
월남전쟁의 특수경기로 광복동의 야시장은 현란하게 불타올랐으나 이곳에 즐비한 양복점, 전자상점, 카메라점, 안경점 들은 그 상품만큼 빛나는 정신을 팔지는 못했다. 그런 곳에서 朴정권에 저항하는 시민정신이 民亂의 양상으로 폭발하게 된 것이었다.

광복동의 오후: 태풍 전야의 정적

오후 3시. 趙甲濟 기자는 늘 하듯 사회부 데스크로 연락 전화를 걸었다. “광복동에 데모가 터져 굉장하다”는 부장의 목소리는 유쾌한 듯했다. 趙기자는 또 놀랐다. 이날 세 번째의 충격이었다. 유신체제의 절대적인 통제력을 체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잇따라 터지는 뜻밖의 일들에 접하자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꼈다.
오후 2시 10분 중부경찰서 상황실.
“부산데파트 앞에 참새 200마리. 부영극장 앞에 300마리, 국제시장에 300마리, 춘해병원 앞에 200마리…….”
학생들의 물결은 서서히 광복동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오후 1시쯤부터 광복동 다방은 대학생 손님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모두 책가방을 든 채였다. 골목마다 학생들이 건물 앞에 웅크리거나 퍼질러 앉아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묵묵히 남포동과 광복동 쪽으로 걷고 있었다. 광복동 일대는 학생들로 뒤덮였다. 잠시 태풍전야와 같은 정적이 흘렀다. 이 데모엔 주동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단계의 행동이 시작되기 직전엔 꼭 이런 기다림의 시간이 있어야 했다. 이것은 자연 발화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광복동 일대에 몰린 수천 명의 학생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수만 명의 시민들은 누군가가 나서 주기를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초조 안타까움 조바심 기대감으로 숨막히는 공기였다.

터진 데모, 쏟아지는 응원

오후 4시 광복동. 이 건조한 공기에 불을 당긴 것은 미화당백화점 앞에 있던 학생들이었다. 상대생과 공대생 10명이 “가자!”라고 부르짖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곤 국제시장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김창수는 인도에 있다가 조건반사적으로 후닥닥 이들 뒤에 붙었다. 긴장된 분위기에 구멍이 뚫려 그 긴장이 풀어지면서 학생들의 에너지는 이제 돌파구를 찾는 것이었다.
“유신 철폐”
시민들에겐 듣기조차 두려운 구호가 튀어나왔다. 많은 시민들이 부르짖고 싶어한 구호였다. 학생들이 우루루 다투어 몰려나가 국제시장으로 뛰고 있는 것과 동시에 “잘한다!”는 격려의 함성들이 시민들 속에서 울려나왔다. 고층건물의 사무실과 다방에선 시민들이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박수를 보냈다. 성미 급한 시민들은 벌써 담배개비를 학생 대열을 향해 확 뿌리고 있었다. 눈송이처럼 담배개비가 학생들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미화당백화점 앞에서 일이 터진 한 5분 뒤 보수동파출소 앞에 있던 100명쯤의 학생들도 흑교파출소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10분 뒤엔 동아데파트 앞에서 네 줄의 어깨동무 대열이 만들어지더니 국제시장 쪽으로 몰려갔다. 15분 뒤엔 창선파출소 앞에 2000명 가량의 학생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어 스크럼을 짰다. 이들은 북쪽의 미국문화원 건물 쪽으로 질주했다.
한번 당겨진 불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경찰은 데모대를 뒤쫓았다. 학생들이 요리조리 골목을 빠져나가면 그 꼬리엔 경찰이 물려 다녔다. 창수는 경찰도 데모에 합세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웃음이 터져나왔다. 한 경찰관은 개스분사기를 지고 숨을 헉헉거리며 데모대를 뒤쫓다가 고층건물에서 내려다보면서 학생들을 응원하는 시민들을 발견하자 신경질이 난 듯 최루개스를 위로 쏘아올렸다. 그 경찰관을 향해 욕설과 야유가 사방 건물에서 쏟아져나왔다.
몰리는 쪽은 이젠 학생이 아니었다. 경찰이 몰리고 있었다. 시민들의 학생 응원은 쫓는 자와 쫓기는 자를 바꿔놓았다. 행동면에선 학생들이 쫓기고 있었지만 심리적으로는 경찰이 몰리고 있었다. 한 경찰 간부는 뒤에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죄 짓는 기분이 들었어요. 시민들까지 학생편을 드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잘못된 짓인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소수인 경찰입니다. 경찰에게 쏟아지는 야유와 욕지거리. 앞뒤에서, 양쪽에서, 그리고 위쪽에서 소나기처럼 퍼붓고 있었으니까 무력감과 함께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래서 진압 작전을 과감하게 수행할 수 없었어요. 시민들이 무슨 감시자처럼 지켜보는 가운데서 학생들을 마구 다룰 수도 없었고요.”


진압 작전은 술래잡기가 돼버렸다. 술래잡기엔 잘 뛰는 편이 이기는 법이다. 뛰는 데는 젊은 학생들을 경찰이 당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경찰은 무거운 장비를 갖고 있어 몸놀림이 둔했다. 학생들은 시민들의 응원으로 신들린 것처럼 뛰어다녔고 경찰은 소극적이 됐다.
오후 4시에서 5시까지 한 시간 동안 중부경찰서 상황실에 보고된 큰 시위대만 해도 8개였다. 상황 일지를 인용해본다.
○ 4시. 용두산공원에 학생들과 섞여 불량배로 보이는 청소년 4명이 2홉짜리 초산병을 들고 서성대고 있음.
○ 4시 5분. 제 1대청파출소 앞에서 300명, 부산우체국 앞에선 100명이 데모.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름. 동아데파트 앞에서도 시민 응원 속에 데모.
○ 4시 20분. 옛 시민관 자리에서 중앙동사무소 쪽으로 데모대 진행. 그곳에서 용두산공원으로 오르려다가 밀려남. 다시 사무소 앞에 집결. 500명이 어깨동무하여 부산우체국 쪽으로 행진.
○ 4시 25분. 우체국에서 제 1대청파출소 쪽으로 데모. 그 가운데 300명은 용두산공원으로.
○ 4시 30분. 창선동 국민은행 앞에 50명 집결중.
○ 4시 35분. 옛 남포극장 앞에 300명 모임.
○ 4시 50분. 동아아케이드 앞에서 200명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시위.
○ 5시. 서구 동대신동 쪽에서 동아대생들이 5~10명씩 흩어져 흑교파출소 앞 지나 시내 쪽으로 가고 있음.

“자네도 수고하네”
오후 6시 먹자골목
경제과 2년 여성모가 낀 데모대는 국제시장 골목에서 경찰의 협공을 받았다. 학생들은 길 양쪽 점포로 뛰어들었다. 엎치락뒤치락 진열장이 부서지고 걸어둔 옷들이 무너져내렸다. 상인들은 학생들을 모두 받아주었다. 그리곤 셔터를 내려버렸다. 경찰은 벽으로 변한 상가 앞에서 계면쩍게 서 있다가 돌아갔다. 고려신학대 학보사 여기자 김정미는 국제시장의 이름난 ‘먹자골목’에서 노점 아줌마로부터 김밥을 공짜로 얻어먹었다. 이 골목에는 스무 명 가량의 아낙네들이 벌여놓은 노점이 길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었다. 김밥, 잡채, 오뎅, 통국수, 인절미, 찹쌀떡, 국밥 등등 그 자리에서 퍼질러 앉아 먹을 수 있는 갖가지 음식물이 판대기 위나 함지 안에 놓여 있고, 주로 젊은 여자들이 핸드백을 깔고 앉아 스스럼없이 먹어치우는 곳이었다.
이날 아줌마들은 데모 학생이라면 무조건 공짜로 음식을 주었다. 김밥을 신문지에 싸서 던져주기도 했다. 하루 14시간씩 장사를 해도, 하루에도 몇 번씩 노랑차의 단속을 피해 함지를 이고 숨어다녀도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한 불만만이 그들을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것은 아니었다. 자식 같은 학생들이 쫓겨다니는 것이 측은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고신대 교육학과 학생 일곱 명은 데모대를 쫓아다니다가 배가 고파왔다. 남포동의 어느 식당에 들어가 우동 한 그릇씩을 먹고 돈을 내니 주인이 한사코 받질 않았다. 한 손님은 담배를 사가지고 와 나눠주기도 했다. 남포동의 어느 칼국수집에선 학생들에게 반액으로 국수값을 깎아주었다. 세운상가에선 한 시민이 종이를 잘게 잘라 밑으로 확 뿌렸다. 눈송이처럼 종이조각이 흩날리는 그 아래로 학생들은 뛰어다녔다.
김창수는 국제시장에서 손수레 과일 장수가 던진 감귤을 받아 먹었다. 타는 목을 적셔준 그 시원한 맛! 쫓긴 학생들은 다방으로 몰려들어가기도 했다. 이들은 마담의 환영을 받고 공짜 커피 대접을 받기도 했다. 경찰이 물러날 때까지 마음 놓고 쉬었다 가라는 말도 들었다. 시민들이 청량음료와 맥주를 상자째 사주는 것은 이날의 흔한 장면이었다.
한 여대생은 약방에 드링크류를 사먹으러 갔다가 땀투성이가 된 전투복 차림의 경찰관과 맞닥뜨렸다. 경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네도 수고하네!”
그때까지만 해도 경찰과 학생들 사이엔 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학생들도 돌이나 병을 던지질 않았고 경찰관들도 도가 지나치는 구타는 하지 않고 있었다.

“독재 타도!”의 충격
“독재 타도!”
이 구호가 처음으로 나온 것은 오후 3시 30분쯤 새부산예식장 앞길에서였다. 이때까지 학생들이 가장 많이 부르짖은 구호는 “유신 철폐” “언론 자유”였다. 이 구호의 호소력은 “독재 타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많은 부산시민들은 이 직설적 구호를 19년 전 4?19 이후 처음 들었다. 입으로 내뱉기조차 두려웠던 “독재 타도!”를 수천 명이 합창하고 있었다. 그것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스스로 마음속에 쳐두었던 넘지 못할 철조망을 확 걷어버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독재 타도”를 되풀이하여 외칠 때마다 학생들은 용기를 더해갔고 그것을 들을 때마다 시민들은 주저와 공포의 껍질에서 한 걸음씩 탈출하고 있었다. 그 구호는 시민들의 마음속에 있던 유신이란 껍질을 부수는 해머 소리였다.
“독재 타도”란 구호를 확산시킨 것은 외대생 황성권이었다. 그는 김종철과 함께 오후 3시쯤 남포동 레코드점 골목에 나타났다. 최루탄 개스로 눈에서 금새 눈물이 쏟아졌다. 둘은 흥분했다. 황성권은 말했다.
“야, 우리도 한판 하자!”
운동화 끈을 졸라맨 두 사람은 어느 의상실에 가방을 맡겼다. 미화당 백화점 앞에서 펼쳐지는 데모는 데모꾼 황성권의 눈엔 열기만 넘쳤지 너무 조직이 안돼 있는 것같이 보였다. 두 학생은 미화당에서 대청로 쪽으로 치닫는 300명 가량의 데모대 중간에 뛰어들었다.
황성권은 기회를 잡자 “독재 타도!”라고 냅다 소리쳤다. 성권은 자연스럽게 이 대열의 지휘자가 됐다. 그는 선두로 자리를 옮겼다. 대열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그는 구호의 호흡을 맞추고 대열을 정돈했다. 대청로에서 성권의 대열은 너비 25미터의 찻길 한복판을 차지했다. 시내버스 안에 탄 승객들은 창밖으로 박수를 보냈다. 경찰이 뒤따라오자 이들 승객은 손을 무릎 밑으로 내려 숨긴 채 손뼉을 쳤다. 데모 대열은 어느새 2천 명쯤으로 불었다. 이날 광복동 일대에서는 황성권의 이 대열이 가장 컸다. 여덟 줄의 어깨동무 대열은 연거푸 “독재 타도”를 외치며 부산우체국 앞에서 우회전하여 시청으로 뛰었다.
경찰은 꽁무니를 바짝 추격, 뒤에서 한두 명씩 처지는 학생들을 몽둥이로 두들겨 뻗게 한 뒤 끌고 갔다. 뒤에 처지면 위험하다는 생각에서 학생들의 뛰는 걸음은 거의 줄달음으로 바뀌었다.
시청 앞엔 바리케이드를 친 경찰관들이 버티고 있었다. 이날 데모대의 목적은 마음껏 부르짖는 것이었지 어떤 시설물을 점령한다든지 어느선을 돌파하는 것은 아니었다. 데모대는 경찰 저지선을 애써 돌파할 필요가 없었다. 돌아서면 그만이었다. 황성권의 대열도 왔던 길로 방향을 되돌렸다. 이때부터 성권은 자신이 사복 경찰관들로부터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차렸다. 데모 학생을 가장한 형사들이 대열 속에 끼여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황성권은 “설마 저들이 데모대 속에서 나는 잡겠느냐”고 안심했다. 성권은 어둠이 까리면 달아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성권의 대열은 미국문화원과 미화당 사이를 몇 차례나 오락가락하면서 계속 뛰어다녔다. 성권은 차츰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성권의 대열이 미화당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동아데파트 쪽으로 방향을 틀 때였다. 경찰 진압부대가 가스를 내뿜으며 달려드는 것과 타이밍을 맞춘 듯 대열 속에 끼여 있던 형사 넷이 황성권을 뒤에서 확 떼밀었다. 성권은 대열 밖으로 밀려나 쓰러지고 말았다. 네 형사는 성권을 그대로 질질 끌고 갔다. 바지의 무릎이 찢어지면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창선파출소로 성권을 끌고 간 네 형사는 전화로 경찰서 간부에게 보고했다.
“거물 주동자를 잡았읍니다.”




















“경찰 참여!”
오후 6시 광복동
오후 5시를 넘자 데모의 열기는 잠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영업용 택시를 세워두고 차의 지붕에 올라가 데모를 구경하던 운전사도 이제 끝나는가 보다고 생각하여 가버리고 구두통을 딛고 데모 구경을 하던 구두닦기 소년들도 제 할 일을 다시 시작했다. 학생들의 체력이 한계에 이른 것 같았다. 부산대학생 거의 전부가 이날 점심을 굶었다.
창수는 적어도 20킬로미터는 뛰었다고 생각했다. 술래잡기식의 데모였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컸다. 배고픔과 피로로 학생들은 길가 아무데나 주저앉아 쉬었다. 이럴 때는 경찰도 쉬었다. 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이 마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은 한가롭기조차 했다. 이들 경찰 진압 부대를 향해 학생들은 “경찰 참여!”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양쪽에서 다 같이 폭소가 터졌다.
창수는 국제시장 포목상 거리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그때 위에서 갑자기 귤이 떨어졌다. 호떡도 어디에선가 날아왔다. 경제과 2년 이덕만은 남포동 다방 앞에 앉아 있었는데 한 행인이 콜라 두 상자를 날라다 주었다. 학생들은 이를 ‘시민 하사품’이라 불렀다. 사학과 최현주양은 그날 2만 원을 갖고 있었다. 이 돈으로 최양은 낯모르는 학생들에게 저녁을 사주었다. 최양은 친구 여학생 집에 전화를 걸어 데모 현장으로 불러 내기도 한 극성파였다.
안경잡이인 김정미양은 최루가스에 쏘인 눈물을 연방 닦기도 귀찮아 안경알 밑에 흐르는 눈물을 흡수하도록 휴지를 끼워두었다. 지나가는 시민마다 김양을 쳐다보고 웃었다. 김양은 커피값도 없어 다방 앞에서 남학생들이 맡긴 가방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내가 뭐 원숭이인가“라고 생각했으나 시민들의 웃음이 싫지는 않았다.
경찰은 오후 6시까지 서른한 명을 경찰서로 붙들어갔다. 스물아홉 명은 학생이었고 나머지는 일반 시민이었다. 경찰은 오후 5시부터 광복동 일대가 잠잠해지자 처음엔 데모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거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모두 길가나 골목에 웅크리고 있든지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고 힘이 넘치는 학생들은 계속 뛰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 문교부장관 부산으로
16일 오후 서울 중앙청·유정회
신민당 김영삼 총재가 부산에서 걸려온 전화로 부산사태를 안 것은 16일 오후였다. 상도동 집에서 UPI 도쿄 지국장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선거구에서 일어난 이번사태가 “간단하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는 예감이 들더라고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부산 데모’를 UPI 기자에게 알려, 이 기자는 특종을 했다.
부산 출신인 박찬현 문교부장관은 김총재보다 더 빨리 데모 보고를 부산대학교로부터 받았다. 박장관은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몇 달 전 친구인 박기채 고려대 교수를 부산대 총장으로 임명케 했었다. 박장관은 보고를 받자마자 김포공항으로 달려갔다. 잔뜩 긴장되어 있는 시국에 하필 부산에서 일이 터졌다는 것이 불길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친구가 수습을 잘해야 할 텐데 하는 걱정도 생겨 현장으로 내려간 것이었다. 구자춘 내무장관은 오전의 경찰 보고를 접하고 신속하게 대응했다. 김영삼 총재의 근거지인 부산에서, 그것도 평소엔 가장 얌전한 학교로 꼽히던 부산대학교에서 데모가 났다는 것이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구장관은 이란 오후 송제근 치안본부 제 2부장을 불러 “즉시 부산으로 내려가 시위를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송치안감은 육사 8기 출신으로서 치안국 정보, 작전과장으로 지냈다.
데모 진압에는 권위자로 알려져 있었다. 구장관은 이때 이미 이수영 부산 시경국장을 해임, 송치안감을 후임으로 발령하기로 마음을 굳혀놓고 있었다. 구장관은 이날 남민전(南民戰) 사건에 대한 추가 수사 결과를 발표, 이 조직은 북괴와 관련 있는 간첩단이라고 밝혔다.
유정회 사무실에 부산 사태의 정보 보고가 들어온 것은 16일 오후 3시께였다. 태완선 의장 등 당직자들은 그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후 5시쯤 청와대 김계원 비서실장이 태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저녁 6시부터 청와대 영빈관에서 유신선포 기념일 만찬이 있으니 유정회 의원들은 모두 참석하라”고 전달하면서 “KBS 김강섭 악단도 참석하며 가수들도 나온다”고 덧붙였다. 태의장은 “부산에서 저런 일도 났는데 악단과 가수까지 부르는 것은 뭣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김실장은 “나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사태 발생 전에 각하께서 잡아놓으신 스케줄이다”면서 “조정하는 방향으로 노력해보겠다”고 했다. 옆에 있던 모 유정회 의원은 “이후락 실장 같았으면 각하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조정했을 텐데……”라고 혀를 끌끌 찼다.
이날 오후 6시 30분 싱가포르의 이광요 수상 내외가 6일간의 공식방문을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최규하 총리, 박동진 외무부장관이 영접했다. 박장관은 그 보름 전에 UN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에 갔다가 밴스 미 국무장관 등을 만나 한국 사태에 대한 우려를 듣고는 박대통령에게 김영삼 총재의 제명을 재고해달라는 전문을 쳤었다.

애국가 합창의 전율
16일 저녁 부영극장 앞
날이 어둑해지면서 동아대학생들이 밤에 데모하러 올 것이라는 소문이 부산대학생들 사이에 쫙 퍼졌다. 광복동일대에서 잠시 쉬고 있던 학생들로서는 자리를 뜰 수가 없게 되었다. 어둑해질 무렵, 부영극장 앞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이때가 오후 5시 40분께. 하기식에 맞추어 부른 애국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학생들은 모두 일어나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애국가를 뜨겁게 불러본 경험을 가진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이날만은 달랐다. 모두가 일찍이 불러본 적이 없는 그런 애국가를 불렀다.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도 많았다. 애국가는 부영극장에서 시작하여 남포동으로, 광복동으로 퍼져갔다. 지나가던 시민들도 멈춰서 이 장엄한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 했다. 애국가에 이어 부산대학교 교가를 불렀다. 학생들에게 이 노래는 애국가보다도 더한 감동을 주었다. 특히 “……학문의 자유, 이것이 우리들의 부산대학교”란 대목에선 그날 오전 학교 안에서 느꼈던 전율의 감동이 몇배나 증폭되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온몸을 찌릿하게 울려왔다. 부산대학을 졸업한 시민들도 귀에 익은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기도 했다.
창수는 한번도 부산대학이나 학생들에게 애착이나 자랑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문제의식이 없는 대학 풍토를 개탄하면서 그는 3년 동안 대학을 다녔다. 교가를 부를 때 김창수는 그런 불만이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자랑스런 부산대학생이다”고 누구한테나 외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덕만이도 현호도 성모도 똑같은 감동을 경험했다. 그들은 처음으로 떳떳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목소리로 부른 애국가와 교가는 그때까지 사방으로 흩어져 뛰었던 데모대의 의지와 결의를 확인하고 다지며 그 열기를 한곳에 모으는 기능을 다했다. 노래로 서로를 점호한 셈이었다. 데모대는 새로운 활력으로 거리로 다시 뛰어나갈 수 있었다. 애국가와 교가를 부름으로써 동지의식을 확인한 학생들은 모두가 친구였다. 고신대의 김정미양은 부산대학 남학생들과 손잡고 뛰었다. 김양이 뒤로 처지면 남학생들은 끌어당겨주었고 쉴 때는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데이트하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 노점에서 또뽑기를 사먹기도 했다. ‘데모 미팅’으로 이름붙여진 행동이었다. 학교차, 성별, 출신지 등등에서 생기는 어색함과 머뭇거림은 사라지고 있었다. 낯선 젊음들은 한데 어울려 뛰었고 두들겨 맞았으며 눈물을 흘렸고 눈웃음으로 인사했고 지껄였다. 고신대의 여학생은 이름도 모르는 부산대학교 남학생들이 경찰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 간선도로 변에서 엉엉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들은 심각하지 않았고 행복했다. 한 덩어리였기에 모두가 평소 혼자서는 가져보지 못했던 용기를 보여주었다. 집단 히로이즘의 현장이었다. 학생들은 가슴에 응어리진 당혹?갈등?열등감?분노의 덩어리를 실컷 토해냈다.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풀렸다. 그래서 그들은 유쾌한 청소년들이었다. 그 유쾌함은 용기 있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보람으로 더욱 고양되었다. 많은 취재 기자들은 그때의 분위기를 ‘축제’로 표현했다.
이 축제는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그 순수성이 조금 손상되는 것 같았으나 끝까지 그 바탕을 잃지 않았다. 이 축제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영원히 그 감격을 잊지 못할 것이었다. 부산의 대학생들이 사회참여 문제에서 다른 대학생들에 대해서 항상 갖고 있던 콤플렉스도 이날 밤에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부산을 문화와 전통의 불모지라고 욕하면서 도가 지나친 상업적 분위기를 경멸해왔던 이곳의 지식인들도 이날 밤의 감동으로 부산에 대한 의식을 새로이 하게 된다. 박찬현 문교부장관이 부산대학교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였다. 데모는 이미 끝나 캠퍼스는 조용했다. 제헌국회의원 출신에다가 대사, 신문사 사장 경력도 가진 박장관은 강당에 전체 교수들을 불러모아 열변을 토했다.
“여러분, 학생들로부터 어용교수란 소리 듣기를 두려워하십니까. 우리는 자랑스런 어용이 돼야 하겠읍니다. 경제발전은 사회안정을 바탕으로 하여서만 이룩될 수 있읍니다. 여러분은 위대한 영도자를 밀어주셔야 합니다.”
연설을 끝낸 뒤 박장관은 총장과 함께 숙소인 해운대 동백섬의 조선비치호텔로 갔다. 두 사말은 저녁까지 같이 있었다. “시내 한복판에서 야간 데모가 터져 경찰차에 불을 지르고 야단이다”는 급보가 호텔로 들어온 것은 밤 8시께였다. 경악한 박장관은 비서를 데리고 택시를 이용, 광복동으로 달려갔다. 박찬현 문교부장관은 16일 밤 시민들과 섞여 데모 구경을 했다. 그는 1960년 3?15마산의거 때 국회 조사단의 한 사람으로 현장에 내려갔던 일이 언상됐다. 그때 마산에선 “이게 바로 혁명이다”는 생각을 했으나 이날 밤 광복동 거리에선 그런 위기의식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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