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 얹힌 고래
韓國史上 최초의 고래는 부산시 영도구(影島區) 동삼동(東三洞) 패총에서 발굴된 것이다. 1931년 경성제대(京城帝大)의 요코야마(橫山將三郞) 교수는 바닷가의 이 빗살무늬토기 패총에서 고래뼈를 캐냈다. 고래뼈로 만든 방망이와 두께 1.5㎝, 지름 30㎝의 접시들도 발견됐다. 이 고래뼈가 발굴된 층위(層位)는 탄소연대측정 결과 약 5천년 전으로 추정됐다. 이 패총의 대안(對岸)인 아치섬 패총에서도 지난 73년 8월2일 지름 20㎝, 길이 1m 가량의 고래 등뼈가 나왔다. 해방 뒤 북한에서 발굴된 함북(咸北) 웅기(雄基)의 굴포리(屈浦里)패총에서도 고래뼈가 출토됐다고 전한다.
그러면 우리 조상들은 신석기시대부터 고래를 잡았단 말인가. 捕鯨학자 전찬일 교수(62. 부산水大)는 고개를 가로 젖는다. 패총의 고래는 잡은 고래가 아니라 줏은 고래, 즉 습득경(拾得鯨)이란 주장이다. 고래를 잡아먹는 이빨고래인 솔피(Killer Whale) 떼에 쫓긴 고래가 바닷가로 기어올라 좌초하는 일이 있다. 특히 해안선에 바짝 붙어 다니는 귀신고래(Gray Whale)는 겁이 많다. 솔피떼의 공격을 받고 기절한 귀신고래를 잡은 얘기가 長生浦에서 전해지고 있다. 귀신고래는 또 바닷가 얕은 곳에서 노닥거리다가 갑자기 물이 빠지면 모래바닥에 덜렁 얹혀버리기도 하는 순진하고 멍청한 친구다.
이렇게 좌초한 고래들을 신석기인들은 몰려가서 때려 죽였을 것이다. 東三동패총과 아치섬패총의 앞바다는 지금도 수심 1∼2m로 얕아 고래가 좌초하기 쉬운 곳이다. 경비정에 쫓긴 소형 밀수선이 이곳으로 도망왔다가 좌초된 적도 있다. 바닷가에 얹힌 고래를 죽여 선사인(先史人)들은 불고기 「파티」를 벌였다는 증거가 있다. 국립박물관이 발굴한 아치섬패총(B.C 3세기경)의 고래 등뼈는 시커멓게 불타 있었다. 『구워먹고 버린 고래뼈 같다』고 발굴단장 韓병삼씨(그 뒤 국립박물관장)는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었다.
지난 72년 봄 가뭄으로 물이 빠지는 바람에 드러난 慶南蔚州군 太和江 상류의 반용대(盤龍臺) 암각화(岩刻畵)에도 고래가 새겨져 있다. 청동기시대초기 또는 신석기시대 말기, 그러니까 약 3천년 전의 유적인 이 그림은 고래에 대한 꽤 정확한 관찰력을 보여준다. 이 고래그림은 양쪽의 앞지느러미와 꼬리를 비교적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고래는 새끼를 배고 있다. 큰 고래속에 새끼고래의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다. 사실적인 이 화가(畵家)는 적어도 고래가 알을 낳는 물고기가 아니라 새끼를 낳는 젖먹이 동물임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고고학자들은 새끼 밴 고래그림은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적인 그림이라고 설명한다. 先史人들은 임신한 고래를 두들겨 패죽이고 배를 갈랐다면 고래가 물고기 아닌 포유동물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지식을 체계화하지 못해 19세기까지 우리 민족은 고래를 고래어(古來魚) 또는 경어(鯨魚)로 표기, 물고기취급을 했다.
세계최초로 고래를 포유동물로 분류한 사람은 「알렉산더」大王의 가정교사이기도 했던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였다. 그의 저서 『動物誌』(Historia Animalium)에 고래는 태생동물로 적혀 있다. 세계에서 누가 먼저 捕鯨을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유럽」의 신석기시대 동물벽화에선 고래잡는 그림이 더러 발견된다. 육상에서 단백질源을 구할 수 없었던 「에스키모」들도 일찍부터 고래를 잡았다.
17세기 「유럽」인들이 「에스키모」들과 접촉했을 때 그들은 첨단이 가위처럼 생겨 한번 박히면 빠지지 않도록 만든 작살로 고래들을 잡고 있었다. 「에스키모」들은 동물가죽으로 만든 작은 배를 저어 고래를 발견하면 밧줄 달린 작살을 수십개 던져 잡곤했다. 「알류샨」, 「쿠릴」열도의 원주민들은 밧줄 달지 않은 작살을 던져 고래를 잡았다. 이 작살끝에는 독이 묻어 있었다. 독기운이 퍼져 고래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끌고 오는 수법이었다(계속).
한국인과 고래(2)/바닷가에 좌초하다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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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3-15, 02: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