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과 고래(3)/고래를 살려준 어민들

어민들은 바닷가에 표착한 고래들을 바다로 몰래 밀어넣어 버리곤 했다. 관리들이 알면 일만 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幕내린 北氷洋 고래어장

세계 最古의 상업적 포경은 12세기 경 「프랑스」의 「비스케」만에서 일어났다. 「피레네」산맥속에 살고 있던 「바스크」族은 해안에 붙는 긴 수염고래(Black Right Whale)를 상업적으로 잡기 시작했다. 최초의 국제포경어장이 된 곳은 北氷洋. 1583년 英國의 탐험가 「풀」, 1596년엔 「네델란드」人 「바렌츠」가 北氷洋을 지나 동인도(東印度)제도에 이르는 항로를 발견하려고 북빙양 횡단을 시도했다. 이 계획은 실패했으나 두 탐험가는 北氷洋에 고래떼가 득실거리는 것을 목격했다. 「바렌츠」는 또 「스피츠베르겐」섬을 발견했다.

북빙양엔 당시 온순하기 짝이 없는 북극(北極)고래(Greenland Right Whale)가 많이 살고 있었다. 이 고래는 느림보인데다가 죽은 뒤에도 바다에 뜨며 1마리당 고래 기름을 12∼15t이나 빼낼 수 있다는 숙명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다. 쾌속선과 압축공기가 없었던 당시엔 죽은 뒤 뜨고, 느린 고래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17세기초부터 英國을 선두로 「네덜란드」,「덴마크」, 독일, 「포르투갈」등이 북빙양에 포경선단을 내기 시작했다. 「古代捕鯨시대」로 불리는 북빙양 포경은 17, 18세기에 절정을 이뤘다. 1719∼1779년 사이 「네덜란드」는 이 해역에 延3천1백61척의 범선을 보내 6천9백86마리의 고래를 살육했다. 전성기엔 매년 1천5백∼2천 마리의 고래가 이곳에서 잡혔는데 「네덜란드」가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3백여 척의 포경선과 1만8천여 명의 선원들을 「스피츠베르겐」섬의 기지에 파견해 놓고 있었다. 「스피츠베르겐」섬의 「스메르베르그」는 『고래기름의 도시』로 불렸다. 북위 79도에 위치한 세계최북단의 도시며 최대의 포경근거지였다.

당시의 포경선은 2백∼4백t(현재의 韓國포경선은 평균 50t), 1척의 선원수는 25∼50명에 달했다. 北極鯨의 무자비한 학살은 19세기초부터 北氷洋의 고래자원을 황폐시키기 시작했다. 북빙양에서 살육된 북극고래의 수는 10만 마리 이상일 것이다. 동물학자들은 이 고래가 지금은 멸종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래는 11∼12 개월의 임신기간을 거쳐 2년에 한번 새끼를 낳는다. 多産을 못하는 북극고래, 대왕고래, 참고래 등 수염고래종류는 1부1처의 가족제도를 지키기 때문에 자원회복이 극히 느리다. 더구나 인간은 자기 몸의 수 백배나 되는 동물을 학살하는데 가학취미까지 얻어 고래를 단기간에 집중학살, 씨를 말려 버리는 성질을 갖고 있다.

북빙양의 고래어장은 1887년 英國이 포경선단의 파견을 중지한 것을 마지막으로 막을 닫았다. 이것은 古代포경시대의 폐막이기도 했다. 이 시대의 포경법은 포경정 1척에 6∼7명씩 분승, 길이 2m가량의 「로프」달린 작살을 고래에게 던져 고래를 죽이는 방법이었다. 작살 10∼20개쯤을 꽂아야 고래의 숨통을 끊을 수 있었다.

1864년 「노르웨이」에서 포경포가 발견되기 이전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작살이 포경도구로 사용됐다. 우리 나라의 선사시대 패총에선 작살이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 드물게 발굴된 것도 너무 작아 고래잡이엔 사용할 수 없었을 것들이다. 高麗大學校 박물관이 慶南 昌原군 熊川패총에서 발굴한 쇠작살은 길이 9.9㎝에 불과했다. 우리 나라의 先史人들은 고래를 잡을 필요성을 그렇게 느끼지 않아 일찍부터 고래자원엔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고래를 밀어 넣는 어민들

8·15해방 전까지 韓國인이 주체적으로 捕鯨業을 일으키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官의 수탈이었다. 李朝말 우리 나라 어촌에선 해괴한 일들이 가끔 벌어졌다. 굶주려 영양실조상태에 빠진 어민들은 죽은 고래가 바닷가에 표착(漂着)해도 이를 잡아 기름을 뽑아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규경(李圭景)이 1835∼45년에 쓴 『오주행문장전산고(五洲行文長箋散稿)』에 따르면 이들 어민들은 표착한 고래들을 바다로 몰래 밀어넣어 버리곤 했다는 것이다. 고래 한 마리의 기름을 짜면 기천냥을 벌 수 있는데 이 무슨 짓인가. 고래가 바닷가에 얹히면 지방 관아(官衙)에선 어민들을 혹사하여 기름을 뽑게 하곤 막대한 이익을 독차지했다. 그래서 어민들은 고래가 표착하면 『눈깔 빠지게 일이나 하게 생겼다』면서 고래를 밀어넣어 버렸던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지배세력은 捕鯨을 포함한 어업을 장려하긴 커녕 그 발전을 틀어막는 데 힘써왔다. 서기 372년 불교가 이 땅에 전해졌다. 불교에 연유하는 살생금단의 풍조는 어업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599년 백제법왕(百濟法王)은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렸다. 민가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고 어구를 불태워 어업을 금지시켰다. 新羅에선 서기 529년(法興王 16년)과 705년(聖德王 4년)에 살생금지령을 내린 바 있다. 이런 명령은 일시적이긴 하였지만 어업천시사상을 조장, 우리 민족의 해양지향성을 꺾는 역할을 했다.

삼국시대와 高麗시대에도 해안엔 고래가 좌초 또는 표착하는 일이 잦았던 것 같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엔 고구려(高句麗) 민중왕(閔中王) 4년(AD 47년), 東海人 고주리(高朱利)가 고래눈을 왕에게 바쳤는데 밤에도 빛이 났다고 쓰고 있다. 『三國史記』엔 이밖에도 고래로 보이는 大魚의 출현을 여러 번 기록하고 있어 당시 고래자원이 풍성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년(AD 679년)엔 강에 길이 1백尺의 죽은 물고기가 나타났는데 이것을 먹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쓰고 있다.

고래는 죽은 뒤 12시간이 지나면 살이 썩기 시작한다. 고래는 두꺼운 지방층으로 감싸져 있다. 죽은 고래의 내부열이 밖으로 발산되지 않아 부패가 빨리 일어나는 것이다. 국제포경조약은 고래를 죽인 뒤 33시간 이내에 공모선(工母船)에 옮겨싣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三國史記』의 이 기록은 죽은 고래고기를 먹고 집단식중독을 일으킨 사건을 적고 있는 듯하다. 高麗시대엔 등화(燈火)용의 경유(鯨油)가 등장했다. 元宗 14년(AD 1273년) 元의 「다루하치」가 함경도(咸鏡道)와 경상도(慶尙道)에서 고래기름을 구했다는 것이다.

高麗시대엔 왜구의 잇단 습격과 官의 수탈이 捕鯨의 발달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나타났다. 高宗 때는 어떤 병마사가 당대의 실력자 최이(崔怡)에게 아첨하기 위해 살조개를 잡게한 적이 있었다. 명령을 받은 이 어촌(德源都護府龍津縣)에선 할당량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50여호는 마을을 떠나 달아나고 말았다(『(高麗史)』.

日本어부들의 수탈 심해

어민에 대한 수탈은 李朝시대에 들어가선 단말마적인 가혹상을 드러낸다. 종실(宗室)과 귀족들은 정치망어장(漁箭)을 사점(私占), 터무니 없는 세율(稅率)로 어민들을 착취했다. 이에 덩달아 지방관리들은 상하계급에 따라서 어민들을 줄줄이 수탈, 한 어민이 5∼6회의 중세(重稅)를 지불해야 했다. 어민을 보호해야 할 병수사(兵水使)무리는 어획물을 약탈하는 데 앞장서, 어민들은 울면서 공수환가(空手還家)해야 했다.

정치망어장 아닌 일반어장의 경우, 관아(官衙)에선 어장부근의 활리배(滑吏輩)에게 漁稅징수를 맡겼다. 이것은 어선들이 고기를 잡은 뒤엔 흩어져 버려 징수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청어잡이 큰배 1척이 청어稅로 8만 마리의 청어를 수탈당하는 형편이 됐다. 아전배들의 수탈에 주눅이 든 朝鮮어민들은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게 잡은 고기를 내주는 것이 습관화 됐다.

19세기말 韓國에 진출한 日本 어민들은 이점을 이용, 어획물을 강탈해 갔다. 『…같이 고기를 잡아도 朝鮮어민들은 기술이 부족하여 어획량이 적다. 이 적은 어획량조차 日本 어부들이 선상에서 폭력으로 위협, 빼앗는 일이 잦다. 그저 위협만 해도 순순히 내놓는다. 日本 어부들은 日本에 돌아가면 韓國에 처음으로 출어하는 어부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이들은 당연하다는 듯 또 朝鮮人들로부터 고기를 약탈해 간다』(羽原叉吉著『日本近代漁業經濟史』)

李朝시대 어민들이 당한 수탈은 농민보다도 더욱 심했다. 현물에 대한 약탈의 용이성, 수탈자의 중첩, 어민천시사조 등 어업의 특수성이 수탈을 가중시켰던 것이다. 철종(哲宗)때 고군산(古群山)열도의 어민들은 청어자원의 감소로 생업을 잃다시피했다. 그래도 漁稅는 여전하여 어민 1천여호중 8백여호는 세금을 피해 도망치고 말았다. 蔚山에선 상어연승 어민들에게 군리(郡吏)들이 학교자금(學校資金)이란 명목으로 상어 한 마리당 1백文을 거둬들였다. 어민들은 폐업으로 이 수탈에 대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산업을 진흥시켜야 할 관리들이 산업발전의 가장 큰 저해요인이 됐던 것이다.

『해변무포어지인(海邊無捕魚之人)』―왕조실록(王朝實錄)은 피폐한 농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19세기말 韓國여행기를 쓴 美國의 「비숍」여사는―『어민들은 돈을 벌 생각을 않는다. 모조리 관리들에게 빼앗겨버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빈곤 속에 남아있기를 바란다. 빈곤만이 그들을 보호해 주는 것이다』(Korea and Her Neighbours, 1897 New York) 『가난의 보호』를 구하는 어민들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捕鯨業에 진출할 리는 만무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慶南 고성(固城)과 진주(晋州) 등지의 어민들은 왜병(倭兵)으로 변장, 동족을 약탈했다. 무지막지한 官의 수탈은 어민들로부터 동족의식마저 빼앗아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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