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독일, 영국과 인접한 네덜란드는 1차 세계대전 때는 중립을 지킬 수 있었으나 2차 세계 대전 때는 독일군이 프랑스로 쳐들어가는 길목으로 삼았다. 5년간 계속된 나치 독일의 점령기간에 네덜란드의 저항은 미미했다. 네덜란드에 많이 와서 살던 유태인들은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큰 피해를 입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나치의 유태인 사냥에 협조한 탓이라고도 한다. 독일에서 살다가 나치의 탄압을 피해 암스테르담에 와서 숨어 살던 안네 프랑크 가족도 희생자들 중 일부였다.
戰前에 네덜란드에서는 14만 명의 유태인들이 살았다. 그 가운데 약9만 명이 암스테르담에서 살았다. 유태인들은 이 도시 인구의 약13%나 되었다. 독일에서 박해가 심해지자 유태인들은 옛날부터 종교자유가 널리 보장되었던 네덜란드로 피해왔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14만 명의 유태인들 중 戰後에 알아보니 2만5000명만이 살아남아 있더라고 한다.
네덜란드의 국토면적은 약4만 평방 킬로미터인데 24%는 海水面보다 낮다. 堤防의 길이는 약2400 킬로미터이다. 인구는 1560만 명인데 인구밀도가 유럽에서 1등이다. 네덜란드의 독립이 종교의 자유, 상공업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결과여서 그러한지 네덜란드 사람들은 제도와 법률면에서 개인적 자유를 최대한도로 보장한다. 안락사, 동성애, 일부 마약, 매춘이 허용되고 있다. 국제법의 창시자 그로티우스가 네덜란드 사람이고 헤이그에 국제사법재판소가 있다. 네덜란드는 또 國富에 비해서 국제적인 기여를 가장 많이 한다고 한다.
개인적 자유를 거의 신성시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행동이 매우 실용적이다. 허례허식을 최대한 생략한다. 네덜란드 왕도 공식석상에 넥타이를 풀고 나타난다고 한다. 2년 전 네덜란드를 여행했다. 암스테르담을 종일 차로 둘러보는 가운데 넥타이를 맨 사람을 세 명 보았을 뿐이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또 뚱보가 드물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남녀 공히 세계에서 평균 키가 가장 크다. 남자는 182cm, 여자는 170cm이다. 그런 사람들이 날씬하기까지 하니 도시 풍경이 활기차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건장한 체격은 일상화되어 있는 자전거 출퇴근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성의 화장도 매우 옅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개인으로서, 또 국가로서 해볼 만한 성취와 실수를 다 해보았기 때문에 위선과 假飾과 부자유를 이런 식으로 벗어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곳이야말로 가장 성숙된 인격과 國格이 있는 나라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히딩크의 지도력에 감동하는 것은 쉽지만 그런 히딩크를 만들어낸 네덜란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필자가 소속된 尙美會여행단(02-734-1245)은 2004년 3월말 전자회사 필립스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공업도시 아인트호벤에 가서 이 도시 축구팀 감독인 히딩크 부부를 만나 점심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우리 일행중 20명 정도가 미리 갖고 다니던 축구 공과 티 셔츠 등에 히딩크의 사인을 받았다. 일행중 한 분은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기념관에서 산 책을 내밀면서 사인을 부탁했다.
나의 맞은 편 자리에 있던 히딩크 감독은 책을 펴놓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만년필로 문장을 써서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귀하가 이 책을 통해서 우리 역사의 아주 심각한 부분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입니다」였다. 안네 프랑크 가족 등 많은 유태인들이 네덜란드 사람들의 密告 또는 협조에 의해 나치에 끌려가 희생되었다는 점에 대한 이 나라 사람으로서의 반성이 담긴 글이었다. 그냥 습관적으로 사인을 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깊이 한 다음 의미 있는 글을 써놓는 히딩크 감독의 人格에 새삼 느끼는 바가 있었다.
히딩크 감독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다. 표현이 절제되고 정확하다. 이것은 그의 정신력과 가치관을 반영한다. 네덜란드사람처럼 속이기 어려운 민족도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 한국사람처럼 속이기 쉬운 민족도 드물 것이다. 이성적인 민족과 감성적인 민족의 차이라고나 할까.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단을 맡아보니 한국 사람들의 본성을 알 수 있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잘할 때와 못할 때의 격차가 매우 커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이날 히딩크 감독은 우리 여행단을 아인트호벤 축구장으로 안내해주고 다음날 경기에 초대까지 해주었다. 그는 '내일 게임엔 여러분을 위해서 박지성과 이영표를 출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스 팀과 한 경기였는데 두 한국 선수가 맹활약한 이유도 있고 해서 아인트호벤이 3-0으로 이겼다. 히딩크 감독의 배려가 고마왔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세기' 때 네덜란드의 선원 박연, 하멜 등이 한국에 표착하여 한민족과 처음 접촉한 서양인이 되었다. 이런 좋은 인연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마침 히딩크 감독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아인트호벤을 떠난다는 뉴스가 떴다.
아인트호벤에서 만난 히딩크 추억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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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3-25, 17: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