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찰스 강변의 크레믈린」하버드大의 保革 투쟁
(월간조선 4월호)
위선적 진보주의자들의 마지막 거점 하버드…
서머스 총장은 이들과 싸우다 戰死했다
尹禎皓 자유기고가·美 예일大 정치학과 박사과정 재학中
서머스 사퇴에 대한 두 가지 오해
지난 2월23일, 올해 6월 총장직에서 물러날 하버드大의 로렌스 서머스 총장이 학생과 교수 앞에 섰다.
『제 임기가 유독 짧기는 했습니다만 그래서 좋은 점도 있었죠. 하버드 역사 상 유일하게 임기 동안 열린 하버드 對 예일 정기전에서 예일이 이기는 꼴을 보지 않고 임기를 마친 총장이 됐으니까요』
학생들은 큰 웃음으로 총장의 농담에 화답했다. 불과 하루 前 자진 사퇴를 발표한 사람 같지 않게 서머스는 여유 있어 보였다. 더욱 이채로웠던 것은 연설이 있었던 던스터 하우스의 모습이었다. 『서머스 물러가라』는 구호와 야유를 들을 수 없었다. 그 흔한 침묵 시위를 벌이는 이들도 찾기 어려웠다.
서머스 총장의 사퇴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는 두 가지다.
첫째, 서머스가 「대학 구성원들의 극렬한 반대에 못 이겨 옷을 벗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총장 사퇴를 요구하는 서명운동도, 농성도 없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夜半逃走(야반도주)하듯 황급히 캠퍼스를 등지는 모습도 연출되지 않았다.
둘째, 서머스의 경력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의 사임이 「재능은 있되 德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기 쉽다. 틀린 말은 아니다.
1954년 코네티컷州 뉴헤이븐에서 태어나서 28세에 하버드大 정교수가 된 서머스는 미국경제학협회가 수여하는 존 베이츠 클라크 賞을 비롯한 각종 학술상을 휩쓸고 정부 요직을 두루 거쳐 1999년에는 재무부 장관 자리에까지 오른,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였다. 하지만 말이나 행동이 안하무인격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2001년 총장으로 임명된 뒤에도 그는 종종 구설수에 올랐다. 그러나 德이 원만하지 못하다는 이유만으로는 그의 사임을 설명할 수 없다.
FAS 교수단과의 마찰
절대 다수의 하버드 구성원들이 서머스의 사임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校紙(교지)인 「하버드 크림슨」의 조사에 따르면 학부 학생들 중 압도적인 다수는 서머스 사임을 반대했다.
지난 2월21일 840명의 학생을 무작위로 뽑아서 이메일을 통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57%의 학부 학생들은 사퇴에 반대했고, 19%만이 찬성했다.
전문 대학원장들은 사퇴 요구 움직임에 조금도 동조하지 않았다. 존 F 케네디 행정대학원 데이빗 엘우드 학장이나, 엘레나 캐이건 로스쿨 학장, 제이 라이트 비즈니스 스쿨 학장은 침묵을 지켰다. 앨런 알츠슐러 디자인 대학원 학장은 서머스를 지지했다.
하버드大의 9개 학부 교수들 중에서 서머스의 사임을 찬성한 교수들은 「인문계와 이과계 학부」(FAS: Faculty of Arts and Sciences) 교수들뿐이었다. 사임의 직접적인 원인은, 가장 많은 교수들이 속해 있고 대학內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FAS 교수단과의 마찰이었다.
지난해 3월15일 FAS 교수들은 로랜드 마토리 교수의 주도로 총장 불신임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대학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올해에도 FAS 교수들은 2월28일 전체 교수 회의를 개최해서 두 번째 불신임 결의안을 의결하려고 했다.
서머스가 FAS 학장인 윌리엄 커비를 부당하게 사임시켰고, 1990년대 러시아 경제 민영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범법 혐의로 벌금형을 받은 경제학과 교수 안드레이 슐레이퍼를 옹호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서머스를 두둔했던 재단 측은 이번에는 입장을 바꿨다. 두 번째 결의안 역시 통과가 확실시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FAS 교수들은 그의 사임을 그토록 강하게 요구했던 것이었을까? 그 원인으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서머스 총장의 학부 개혁에 대한 반발
먼저, FAS 교수들은 서머스가 주도한 학부 교육 개혁안에 반대했다. 서머스의 개혁안 중 대표적인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성적 인플레이션을 막고자 했다. 하버드 학부 교육 담당 학생처장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1학년도의 경우 하버드 학부생들 중 A 또는 A-를 받은 학생은 거의 50%였다. 성적 우수 학생으로 졸업을 한 졸업생은 전체 졸업생의 90%에 육박했다.
성적을 준 교수나 성적을 받은 학생들은 『그럴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외부에서 하버드를 보는 눈길은 따갑기만 하다. 학교 역사를 통틀어서 이토록 학점이 후했던 적은 없었다.
성적 인플레이션의 가장 큰 이유는 교수들의 재량권이 커졌기 때문이다. 정교수들에 대한 학교본부의 간섭이 줄어들고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학생들이 공공연히 교수의 권위에 도전하자 교수들은 학점을 후하게 주기 시작했다.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인심을 잃기 싫은 이유도 있었지만, 학부 학생들과 학점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느라 연구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성적표上의 성적만으로는 학생의 능력을 가릴 수 없게 됐다. 정말 우수한 학생도 하버드 졸업생이라는 이유로 능력을 의심받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졌다.
둘째, 서머스 총장은 학부 교과과정을 대폭 개정하려고 했다. 흔히 코어 커리큘럼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교과과정은 1970년대 후반 완성된 것이다.
1971년 총장이 된 「데릭 복」은 1940년대 제임스 코난트 총장 임기 중 실시한 교과과정에 변화를 꾀했다.
코난트 총장이 주도한 교과과정 개정의 초점은 다수의 학생들에게 많은 개설 과목들을 수강하도록 해서 일정 수준의 교양을 갖춰 주자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데릭 복 총장은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걸 목표로 했다.
당시 유행하던 진보주의적 교육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교수들은 새로운 교과과정을 자신들의 知的(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학문적 성과를 올리는 기회로 삼았다.
교수들은 자신들이 연구하고 있거나 관심 있는 세부 주제에 초점을 맞춰서 강의를 개설했다. 예를 들어 「미국 혁명」과 같은 일반 주제를 가르치기보다는 「미국 혁명과 하이티 반란의 관계」 와 같은 주제를 선호했다.
그러다 보니 학부생들에게 많은 강의들이 생경하기만 했다. 기초적인 교양도 없이 대학을 졸업하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서머스는 이같은 관행에 제동을 걸고자 했다. 학부생들에게 방법뿐 아니라 내용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
셋째, 생명공학을 중심으로 한 과학교육을 대폭 강화하고자 했다. 서머스는 『하버드에는 과학의 無知(무지)에 대해 관대한 문화가 있다』고 지적하곤 했다. 학생들이 『햄릿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유전자와 염색체가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재임 기간에 이같은 문화를 바꾸겠다고 다짐했다. 아울러 서머스는 「생명공학 혁명이 눈앞에 있다」고 확신하고 하버드를 BT 혁명을 이끄는 학교로 만들고자 했다.
스탠포드와 MIT가 IT 혁명을 이끌었다면, BT 혁명은 하버드가 이끌겠다는 생각이었다. 취임 첫해에 그는 학내에 화학 및 세포 생물학 연구소와 단백질 연구소를 창설했다. 하버드 줄기세포 연구소도 곧 설립할 계획이었다.
중장기적으로는 찰스江 건너편에 위치한 「알스톤」 지역의 약 100에이커의 부지에 대규모 캠퍼스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현재의 협소한 캠퍼스를 확장해서 이공계 연구동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서 생명공학을 중심으로 한 産學(산학) 협동 단지를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학부 학생들은 서머스의 개혁 환영
학부 학생들은 「학부 교육의 질을 높이겠다」는 서머스의 야심찬 개혁을 환영했다. 하지만 FAS 교수들의 시각은 달랐다. 신임 총장이 학생 평가나 교과과정 개정 등 자신들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려 한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서머스는 교수들의 불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개혁을 빠른 시일 안에 성공시키기 위해 분권화된 의사결정 구조를 중앙집중식으로 바꿔 나갔다.
교수를 증원하거나 또는 정교수를 임명하는 과정을 교수들이 아니라 총장실이 주관하도록 했다. 개별 학부들이 관리해 온 기부금이나 기금 관리 역시 총장실이 전담하도록 했다. 박사 과정에 대한 관리도 대학본부에 위치한 교무총장실 이 맡도록 했다.
서머스는 『총장은 외부에서 대학발전기금만 걷어 오고, 나머지는 정교수들이 알아서 하는 관행』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하버드의 진보적 정치관에 맞섰던 서머스
FAS 교수들이 서머스를 적대시하게 된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서머스는 교수들과 이른바 「코드」가 맞지 않았다. 미국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를 빌리자면 그는 많은 「진보」 또는 「리버럴」 성향의 인문 사회계 교수들이 신봉하는 「진보적 정치관」(PC: Political Correctness)을 갖고 있지 않았다.
PC주의자들이 보는 미국의 역사는 「수탈과 착취의 역사」다. 백인 남성들이 나라 안에서는 여성과 유색인종 그리고 동성연애자들을, 나라 밖에서는 제3세계 국민들을 수탈해 온 역사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애국심은 탄압과 억압의 역사를 정당화하는 허위의식이고, 軍은 제3세계를 유린하는 제국주의 외교정책을 집행하는 극소수 백인 남성 특권층의 「도구」일 뿐이다.
나아가서 PC주의자들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습관과 제도들에도 불평등을 영구화시킬 수 있는 요소들이 가득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체어맨 (Chairman)」이라는 단어는 「회장은 남성만 될 수 있다」는 암묵적인 시사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각급 학교와 회사의 입학 및 입사, 승진 제도에는 소수 인종과 여성을 차별하는 요소가 곳곳에 숨어 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미국 사회가 좀더 평등하게 되려면 단어와 표현들은 모두 「체어퍼슨 (Chairperson)」과 같이 「中性的(중성적)」으로 바꾸는 한편 입학이나 입사, 승진 과정에서 일정수는 소수 인종 및 여성을 뽑도록 하는 「어퍼머티브 액션」과 같은 제도들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한다.
일견 타당한 주장들이다. 문제는 부작용이 크다는 데 있다. 이런 제도는 때로 「역차별」을 일으킨다. 소수 인종과 여성을 배려하는 과정에서 단지 백인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대학입학이 어려워지고 직업을 갖기 어려워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PC 신봉자들이 자신들의 주장과 다른 주장들은 전부 매도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주장은 비록 소수 의견일지라도 사회의 다원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자신들의 주장과 다른 주장들은 모두 一考(일고)의 가치도 없는 「남성우월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헛소리라고 몰아붙인다.
하버드는 이런 PC의 本山(본산) 중 한 곳이었다. 급진적인 PC주의가 판을 친다는 이유에서 한때 「찰스 강변의 크레믈린」이라고까지 불렸던 곳이었다. 그런 하버드에서 서머스는 PC를 무시했다. 그리고 그 代價(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FAS 교수들이 지난해 통과시킨 불신임 결의안 문안의 초안에는 서머스가 PC에 어긋나는 인물이라는 언급이 있었다고 한다. 서머스 총장이 여성 및 흑인, 제3세계 출신, 동성연애자, 그리고 피식민지 국가들의 국민 知的 능력을 문제 삼아 왔다고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서머스 총장, 학군단 활동 옹호
서머스는 임기 중 적어도 네 번에 걸쳐 PC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발언을 했다.
첫째, 학교內 학군단 활동을 옹호했다. 미국의 유명 대학들에서는 ROTC를 찾아볼 수 없다. 지원병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지만 모병관들이 공개적으로 학내에서 모병 활동을 하는 모습도 눈에 띄지 않는다. 정부에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PC주의자들이 『추악한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규정한 베트남戰 이후 軍을 적대시하는 문화가 대학가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대학 캠퍼스는 1960년대와 1970년대 反戰운동의 메카였다. 그 이후 反戰운동에 참가했던 세대들은 대학교수가 되어 다시 캠퍼스로 돌아와 反戰·反軍 정서를 이어 갔다.
하버드의 경우, FAS 교수들이 1969년에 학군단을 교내에서 추방했다. 학군단 활동을 하고 싶은 학생들은 인근에 위치한 메사추세츠 공과대학(MIT)까지 가야만 했다. 하버드는 장소와 시설을 대여하는 代價로 MIT에 사용료만을 지불했다. 1993년에는 그나마의 지원금도 중단해 버렸다. 軍이 사회의 약자인 동성연애자들을 차별한다는 이유였다.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지만 서머스는 학군단 활동을 옹호했다. 특히 9·11 테러 이후에는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학군단에 소속되어 국방의 의무에 종사하고자 하는 동료학생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며 대학의 反ROTC 정서를 꼬집었다.
2002년부터는 아예 매년 6월에 열리는 학군단 임관식에 직접 참석해서 축사를 해왔다.
둘째, 反이스라엘 정서를 공격했다. 미국 정치권과 교육계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이스라엘을 보는 관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 정치인들의 절대 다수는 이스라엘에 대해 극도로 우호적이다. 이에 반해 학계에서는 정반대의 견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팔레스타인을 두둔해야 「의식 있는 지식인」으로 대접받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이같은 정서의 연장선에서 2000년 美 전역에서 「대학발전기금을 이스라엘 국적의 회사에 투자하는 관행을 멈추자」는 캠페인이 시작됐다.
서머스는 투자중지운동에 정면으로 맞섰다. 하버드가 앞장서서 출자를 중지하라는, 69명의 평교수들이 서명한 탄원서를 매몰차게 기각했다. 2002년 9월 17일에는 교내 메모리얼 교회에서 열린 아침 예배에 참석해서 투자중지운동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캠페인은 학계에 퍼져 있는 反유대주의가 반영된 것이라는 것이었다. 서머스는 『과거에는 反유대주의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극소수 우익들의 전유물이었다면, 오늘날에는 左派(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셋째, 2001년에는 하버드를 통틀어 17명밖에 없는 「유니버시티 석좌교수」 중 한 사람이자 아프리카 및 아프리칸 어메리칸 스터디즈 학부의 스타 교수 코넬 웨스트 교수와 충돌했다. 사건의 발단은 서머스와 웨스트 사이의 私的(사적)인 대화에서 비롯됐다.
서머스가 『왜 심도 있는 학술적 연구 활동을 게을리 하느냐』, 『왜 이렇게 학점이 후하냐』며 웨스트에게 핀잔을 준 것이다. 백인 서머스가 「감히」 흑인인 웨스트를 비판한 것이었다. FAS의 동료 교수들은 일제히 총장의 언행을 비판하고 웨스트를 옹호하고 나섰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흑인인권운동가인 제시 잭슨과 알 샤프튼 목사까지 캠퍼스에 모습을 나타났다. 잭슨은 『서머스는 박해받는 소수의 권리를 옹호해야한다는 인식이 없는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사태는 결국 웨스트가 이듬해 프린스턴 大로 이직하는 것으로 일단락됐지만 앙금은 남았다. 웨스트는 프린스턴大에 가서도 각종 언론매체에 출연할 때마다 서머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남성우월주의자」로 낙인 찍힌 서머스
넷째, 여성의 知的(지적) 능력과 관련해서 PC에 어긋나는 발언을 했다. 2005년 4월14일 「理工 계통 종사 인력의 다변화」라는 주제로 비공개로 개최된 학술 회의에서 서머스는 엄청난 논란을 일으킨 문제제기를 했다.
理工 계통에서 여성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첫째, 즉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고, 여성들은 자신의 전공을 선택하는 데 있어 남성들과는 다른 고려를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의 장애물은 전적으로 남성들의 차별 때문」이라는 PC의 모범 답안을 무시한 발언이었다.
서머스는 구제불능의 「남성우월주의자」로 낙인 찍혔다.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부랴부랴 사태 수습에 나섰다. 거듭해서 자신의 발언이 경솔했음을 밝혔다. 드류 파우스트 교수에게 대학內에서 여성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도록 하고 무려 5000만 달러의 기금을 출연해서 여성 학자들의 수를 대폭 늘리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서머스의 가슴에 쓰인 「남성우월주의자」라는 주홍글씨는 지워지지 않았다. FAS 교수들은 자신들과 판이하게 다른 코드를 지닌 총장에게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서머스는 하버드 역사에서 1862년 이래 最短任(최단임) 총장이라는 오명을 쓰고 사직서를 제출해야 했다.
左派의 마지막 거점 대학 캠퍼스
그렇다면 서머스 사임 이후 하버드의 진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학내 갈등은 일단 물 밑으로 가라앉은 상태다. 만약 서머스가 FAS 교수들과 공개적인 언쟁을 벌였거나 재단 측의 유형무형의 사퇴 압력에 대해서 법정 투쟁을 했다면 사태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보수 우익 진영은 발벗고 나서서 서머스 지지 캠페인을 펼쳤을 것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들어 행정부와 입법부는 물론이고 사법부까지 장악을 눈앞에 두고 있는 보수진영의 입장에서는 대학 캠퍼스는 몇 남지 않은 左派의 거점이기 때문이다. 하버드 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서도 격한 논쟁이 벌어졌을 수 있다.
대학원생들은 지난해 교수들의 서머스 불신임 결의안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표한 바 있다. 학부생들은 어떤가? 대부분은 학업 이외의 이슈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기는 하지만 학부의 보수 진영 학생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조직이 잘 되어 있다.
공화당 성향 학생들의 모임인 「하버드 리퍼블리컨 클럽」은 900명에 달하는 이메일 리스트를 자랑한다. 2001년에는 「전국 공화당 대학생 위원회」가 선정한 최우수 대학 지부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서머스는 담담하게 사임을 받아들였다. 지난해 FAS의 교수 중 한 사람인 영문학과 교수를 부인으로 맞은 그는 『FAS 교수들에 대해서 惡감정이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내년 한 해 안식년을 가진 뒤 경제학부의 평교수로 돌아가 교편을 잡을 예정이라고 미래 계획을 밝혔다.
한편 재단 측은 이미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데릭 복 前 총장을 임시 총장으로 임명해 놓았다. 사임으로 인해 행정의 공백이 생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머스 총장의 사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미국 언론의 관심이 식을 줄 모른다. 보수 언론은 물론이고 중도 언론들조차도 사태의 책임을 서머스 개인에게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親민주당 주간지인 「뉴 리퍼블릭」은 『이번 사태를 서머스의 학교 운영 스타일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문제는 서머스가 주도한 개혁 비전이 교수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뉴 리퍼블릭」 前 편집장인 피터 바인아트는 『교수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기 위해 서머스를 내쫓았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중도파 내지는 중도左派 성향의 「워싱턴 포스트」紙조차도 하버드內의 PC주의를 개탄했다.
포스트紙는 사설을 통해 「대학의 존재 이유는 상이한 입장들을 가진 이들이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비판적인 사고 능력을 키워 나가는 것」이라고 전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교수들은 자신들과 다른 견해의 존재 자체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개탄했다. 미국 사회를 가르고 있는 左와 右의 이분법이 이번 사태에서만큼은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둘째, 우리들에게 흥미로운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선 우리 대학들이 「대학원 중심 대학」으로 리모델링하는 데 좀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세계 최고의 대학 중 하나인 하버드도 학부 교육을 소홀히 했다는 반성을 하고 있다.
이런 판국에 학부 교육의 질적 개선을 소홀히 한 채 로스쿨이나 의학 대학원 같은 전문 대학원들의 신설에만 매달리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양질의 변호사나 의사 양성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일반 대학 졸업생들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제공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마땅하다.
한국판 PC는 없는가?
PC 논쟁 역시 남의 얘기일 수만은 없다. 우리 주변에서도 사상과 견해의 다원성을 중시하는 대학 사회의 작동 원리를 악용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자신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박해받는 소수의 견해』라면서 관용을 요구하면서 상대편의 견해는 듣기조차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매도해 버리는 한국판 PC가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상이한 주장과 시각들에 대해 냉철한 논리와 사실에 입각해서 비판과 토론을 하기보다는 일단 색깔론부터 덧씌우는 신종 「마녀 사냥」이 눈에 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서머스의 비극이 우리 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하버드大의 保革 투쟁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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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4-03, 0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