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사병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주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군대에서는 '아저씨'란 말이 통용되고 있다고 한다. 자기 중대원이 아닌 다른 부대의 사병들을 만나면 계급에 관계 없이 '아저씨'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김길동 병장'식으로 부르면 좋을텐데 '아저씨 왜 그래요?'식의 대화가 오고간다는 것이다. 왜 계급을 굳이 부르지 않고 격에도 맞지 않는 '아저씨'라고 불러 계급사회인 군대의 본질을 무슨 私兵집단이나 私的 조직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인지? '동무'라고 부르지 않아 안심은 되지만 군인이 군인한테 '아저씨'라고 부르는 조직이 과연 군인정신으로 싸울 수 있을까?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명사를 잘못 지으면 魂과 정신이 나가고 소매치기당한다.
朴正熙 傳記 10권2장
가로림만(加露林灣) 프로젝트의 대야망-이슬숲에서 선진국으로 만나자
-20만t 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아시아 최고의 항만조건, 3억 평의 평지, 여기에다가 400만 명이 입주하는 세계최대의 산업기지를 만들어 ‘제2의 싱가포르’를 세운다는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은 ‘2000년대의 국토구상’ ‘임시행정수도 건설계획’과 함께 역사 속에서 묻혀버렸다. 이슬숲(加露林)의 꿈을 이어받을 대통령 후보는 없는가?
수출 백억 불!
1977년 12월22일, 드디어 한국은 연간 100억불 수출 목표를 달성했다. 목표연도는 1980년이었는데 3년을 앞당겼다. 朴正熙 대통령은 이날자 일기를 기사처럼 적었다.
<백억 불 수출의 날. 백억 불 수출목표 달성 기념행사 거행. 오전 10시 장충체육관에서 각계인사 7000여명이 참석, 성대한 행사를 거행하였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던 해 연간 수출액이 5000여만 불이었다. 그 후 1964년 11월말에 1억불이 달성되었다고 거국적인 축제가 있었고 11월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했다. 1970년에는 10억불, 7년 후인 금년에 드디어 백억 불 목표를 달성했다. 서독은 1961년에, 일본과 프랑스는 1967년에, 네덜란드는 1970년에 백억 불을 돌파했다고 한다.
10억불에서 100억불이 되는 데 서독은 11년, 일본은 16년(1951-1967)이 걸렸다. 우리 한국은 불과 7년이 걸렸다. 1981년에 가면 200억불이 훨씬 넘을 것이다. 1986년경에 가면 500~600백억 불이 될 것이다. 백억 불,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자. 새로운 각오와 의욕과 자신을 가지고 힘차게 새 전진을 다짐하자>
朴대통령은 이날 무엇보다도 100억 달러 수출전선에서 일한 한국 근로자들의 勞苦에 감사했다. 그는 이해 4월13일 일기에서 창원공단을 시찰한 소감을 썼는데 이런 대목이 보인다.
<모든 산업전사들이 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 모습이 거룩하게만 보였다. 눈에서 사라지지를 않는다>
“임자, 100억 달러를 수출하자면 무슨 공업을 육성하지?”
1970년대 한국의 국가적 목표는 ‘10월 유신,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이란 구호로 표현되었다. 국민들의 개인적 목표는 ‘마이 카‘와 ’아파트 입주’로 상징되었다. 朴 대통령은 목표를 수치로 정해야 안심하는 사람이었다. 관념적 말장난보다는 누구도 속일 수 없는 수치를 그는 신봉했다. 100억 불이란 수치를 맨 먼저 꺼낸 것도 朴대통령이었다.
1972년 5월30일 중앙청 홀에서 무역진흥확대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끝난 뒤 朴대통령은 전시된 수출상품들을 둘러보았다. 이날 오후 朴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로 吳源哲 제2경제수석비서관을 불렀다. 대통령은 집무용 의자에 앉아 있다가 “오 수석, 차 한 잔 들지”하면서 방 한 가운데에 있는 소파 쪽으로 가 앉았다. 보통은 회의용 탁자 쪽 의자에 가서 앉는데 소파에 앉는 일은 드물었다. 吳수석은 긴장했다.
“임자, 100억 달러 수출을 하자면 무슨 공업을 육성하지?”
吳수석은 “지난 2월에 1980년도 수출목표를 50억 달러로 확정지었는데 왜 갑자기 100억 불 이야기를 할까”하고 의아해했다. 吳수석은 이런 때를 대비한 복안은 갖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한 뒤 외치듯 말했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 일본정부는 2차세계대전 후 폐허가 되다시피한 경제를 소생시키기 위한 첫 단계로 경공업 위주의 수출산업에 치중했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사정과 같습니다. 그 후 일본의 수출액이 20억 달러에 달할 때 중화학공업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때가 1957년입니다. 그 후 10년이 지난 67년에 일본은 100억 달러의 수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기계제품과 철강제품이 일본 수출의 주력상품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은 생각에 잠기더니 “자료를 갖고 와서 다시 설명해”라고 말했다.
吳수석은 사무실로 돌아와 우선 대통령의 국가운영에 대한 철학과 전략을 먼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朴대통령의 저서와 연설문을 다시 읽어보고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朴대통령은 우리의 역사적 과업을 민족의 중흥과 평화통일로 설정하고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은 富國强兵, 즉 국력증강이다. 국력의 바로미터는 수출이다>
유신은 수단, 목표는 중화학건설
吳수석은 며칠 뒤 金正濂 비서실장과 함께 朴대통령에게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보고했다. “일본은 1957년 중화학공업 선언을 하고 10년 만에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습니다. 1957년에 일본은 산업구조상 중화학공업 비율이 지금의 우리나라와 같은 43%였습니다만 10년 뒤엔 78%가 되었습니다. 수출품목에서 차지한 중화학공업제품의 비중도 1955년엔 41%였는데, 67년엔 67%로 늘었습니다. 중화학공업 유치에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동남아 국가들보다 먼저 출발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현시점이 중화학공업 진입의 마지막 버스를 탈 수 있는 기회입니다. 단순 조립 공업은 임금이 올라가면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한국의 임금상승률은 대만을 앞지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만보다도 더 빨리 중화학공업을 이룩해야 합니다”
옆에서 金正濂 실장은 “각하, 자금 문제는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내자동원은 별 문제가 없고 외자는 수출이 증가하는 한 차관이 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심각하게 듣고 있던 朴대통령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吳 수석, 우선 중화학기획단 같은 것을 구성해서 계획을 짜도록 해보지”
대통령은 金실장을 보고는 이렇게 지시했다.
“기획단 구성에 대해서 내각에 지시하시오”
朴 대통령은 초인종을 누르더니 비로소 커피를 시켰다. 기분이 대단히 좋을 때 하는 행동이다. 吳 수석은 설명을 덧붙였다.
“중화학공업을 건설하게 되면 남성기능공이 주역이 됩니다. 일자리가 많아지고 급료도 여성기능공보다 많아집니다. 그래서 국민생활이 윤택해지고 국민소득도 급상승합니다”
吳 수석의 이날 보고가 1970년대 한국의 가장 중요한 발전 테마가 되는 중화학공업 건설의 시작이었다. 이 대사업이 朴대통령이 던진 ‘수출 100억 달러’라는 화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1972년 상반기 朴대통령은 남북대회를 준비하면서 동시에 방위산업건설계획, 100억불 수출 계획, 그리고 중화학공업건설계획을 준비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朴대통령이 그해 10월17일 유신조치를 통해서 헌법기능을 정지시키고 국회를 해산한 뒤 유신체제를 발족시킨 배경을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된다. 朴 대통령은 유신체제 수립의 당위성을 7.4남북공동 성명을 만들어낸 남북회담과 국제정세 변화에 대응한 체제정비에 두었으나, 유신체제의 실질적 목표는 중화학공업을 건설하여 한국을 선진국 문턱으로 밀어 올린다는 것이었다. 吳 수석 같은 이는 “중화학공업 건설을 위해서 유신체제를 선포하여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金鍾泌 전 총리도 朴대통령으로부터 “삼선개헌과 유신체제의 목적은 중화학공업 건설에 있다”는 취지의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즉 권력의 집중은 수단이고 목표는 중화학공업 건설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유신의 중간평가
吳源哲 수석은 혁신적 발상을 잘 하는 엔지니어 출신으로서 독창적인 방법으로 중화학공업 건설을 밀고 나갔다. 그 핵심은 이러했다.
<朴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받은 ‘방위산업건설 계획’ ‘100억 달러 수출계획’ ‘중화학공업건설 계획’의 3개 과제를 한 시스템으로 통합한다. 즉 兵器를 생산하는 중화학공업, 수출을 하는 중화학공업을 건설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복투자 방지, 건설비 감축, 작업량 확보와 가동량 증가, 평시 防産시설 활용과 戰時 병기 증산, 그리고 수출이 가능해진다>(吳源哲, 한국형경제건설 제7권).
유신선포 직후인 1972년 12월28일에 상공부는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100억 달러 수출계획을 보고했다. 1980년에 100억 달러를 수출한다는 계획이었다. 朴대통령은 이 보고를 듣고는 “10월 유신에 대한 중간평가는 수출 100억 달러를 기한내에 달성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행정, 생산양식, 농민생활, 국민의 사고방식, 외교, 문교, 과학기술 등 정부의 모든 정책초점을 100억 달러 수출목표에 맞추어 총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스템 운영의 鬼才’라고 불리는 朴대통령은 국정운영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수치화하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각 부서의 역할을 명백히 한 다음에 適材適所의 인사를 통해서 각각의 역량을 이 방향으로 집중시켜놓고는 그 집행과정을 제도적으로 확인하고 점검하여 수정과 독려를 되풀이하였다.
朴대통령은 100억 달러 수출목표를 3년이나 단축하여 1977년에 달성함으로써 이제는 1980년대의 國政목표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 무렵 朴대통령은 80년대의 비전으로서 國土改造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수도를 공주 부근으로 옮겨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완충하면서 국토이용의 효율성, 특히 物流의 편의를 극대화하는 국토개조를 생각하다가 '가로림 프로젝트'(공식명칭 '중부종합공업기지기본구상')라는 큰 그림을 그리게 된다.
“임시행정수도를 만들자”
1977년 2월10일 朴 대통령은 서울시청을 연두 순시하여 市政을 보고받고 나서 몇 가지 지시를 한 뒤 약간 뜸을 들인 후 조용한 말투로 폭탄발언을 했다.
“서울의 근본문제는 인구가 느는 것을 어떻게 억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잡음이 생길까봐 이야기를 안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통일이 될 때까지 임시행정수도를 만들어 옮겨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구체화된 것도 아니고, 위치가 결정된 것도 아닙니다. 서울에서 한 시간, 길어도 한 시간 반 정도면 오고가고 할 수 있는 그러한 범위 내에서 인구 몇 십만 되는 새로운 수도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인구 700만 명이 넘는 수도 서울이 휴전선에서 너무 가깝게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통일이 될 때까지 임시행정수도로서 독일의 본 같은 그런 수도를 만드는 것이 좋다는 구상을 한 것입니다. 수도 서울을 死守한다는 개념은 추호도 변함이 없습니다. 전쟁이 나면 대통령과 중요한 기관은 즉시 서울로 다시 올라와서 전쟁을 지도한다는 것만 국민들이 확실히 알면 심리적 동요는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朴대통령이 행정수도 건설을 이야기한 것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1975년 8월2일 진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대통령은 기자들과 이야기하면서 보도금지를 전제로 말했다.
“수도권 인구 분산 정책의 획기적인 방안은 수도를 옮기는 것밖에 없다. 정치, 경제, 문화는 서울에 두고 행정만 옮기는 것이다”
그해 12월 朴 대통령은 李經植 경제1수석에게 ‘수도권 인구 억제정책’ 수립을 지시했다. 이 업무는 1976년 초 申炯植 무임소장관에게 넘어갔다. 申장관은 朴鳳煥 재무부 이재국장을 기획실장으로 영입하여 이 업무를 맡겼다. 朴실장은 그해 3월 金秉麟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불러 의견을 들었다. 金 과장은 李經植 수석팀 밑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임시행정수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소신 있는 경제엘리트관료로 정평이 나 있던 朴 실장은 그해 5월에 끝낸 ‘수도권인구 재배치 기본구상’에 임시행정수도안을 집어넣었다.
한편 朴대통령은 1976년 6월 그 전해에 총리직을 그만두고 쉬고 있던 金鍾泌씨를 불러 임시행정수도 계획을 세워보도록 지시했다. 대통령은 ‘서울에서 두 시간 이내로, 가급적 금강변이며, 인구가 5만 정도인 행정수도 건설 계획을 짜보라’고 지침을 주었다. 金씨는 6월2일 서울대학교의 최상철, 주종원 교수를 청구동 자택으로 초대했다. 金 전 총리는 지도 한 장을 주면서 임시행정수도의 입지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崔 교수팀은 서울 타워호텔에서 3주간 비밀작업을 하여 미니 차트를 만들어 金 전 총리를 통해서 6월22일 朴 대통령에게 올렸다. 차트의 명칭은 ‘N.C(New Capital)’였다.
“백지계획을 짜라”
1976년 7월22일 申炯植 무임소 장관은 朴실장과 함께 대통령과 총리(崔圭夏) 이하 관계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도권인구 재배치 구상’을 보고했다. 이 보고에 임시행정수도 건설안이 들어 있었다. 대전, 청주, 조치원 삼각지대 인근에 인구 50만 규모의 행정수도를 만들되 통일 후에는 서울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朴대통령은 이 보고를 듣고 대단히 만족했다.
“이렇게 많은 대학과 대학생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것 아닌가. 실은 나도 2,3년 전부터 저 문제를 생각했어요. 6.25가 끝난 뒤 저 정도의 자리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어야 했어. 서울로 되돌아와 이제는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저 방법 외에 무슨 방법이 있어?”
그 한 달 뒤인 8월18일 朴대통령은 金載圭 건설부장관과 김의원 국토계획국장을 불러 관련자료를 넘겨주고 입지기준을 제시하면서 행정수도건설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朴대통령이 직접 메모하여 불러준 임시행정수도 입지기준은 이러했다.
<휴전선을 고려할 것,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일 것, 경부선 주변 도로망이 좋은 곳일 것, 水源 확보가 용이할 것, 30분 내지 1시간 내에 기존 중심도시로 접근이 용이할 것, 優良농지가 적을 것, 排水가 좋고 낮은 구릉 야산지대일 것, 20~30분 거리에 비행장 건설이 가능할 것, 50만 명 정도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을 것, 문화재 등 기존 특수시설이 철거되지 아니할 것>
건설부는 보고서를 올리면서 대통령에게 “범국가적인 사업이니 만큼 새로운 임시기구를 만들어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이상이 朴대통령의 연두 순시 공개 발언이 있기 전 진행상황이었다. 朴 대통령의 발언으로 행정수도 건설 계획이 공개된 직후인 1977년 3월7일 朴鳳煥 실장은 대통령에게 ‘수도권인구 재배치 기본계획안’을 올려 결재를 받음으로써 임시행정수도 건설은 국가기본계획으로 확정되었다. 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행정수도 건설에 관한 지침을 구체적으로 내렸다.
<첫째, 행정수도 건설은 아무리 빨라도 앞으로 10년, 혹은 그 이상이 걸릴 것이다. 국방력 증강 등 다른 중요사업 수행에 지장이 없도록 무리 없이 추진해나가겠다.
둘째, 백지계획부터 수립한다. 작성기간은 2년 정도로 하되 청와대가 직접 담당한다.
셋째, 수도의 이전은 예산 범위 안에서 하나씩 하나씩 수행한다.
넷째, 백지계획 업무는 중화학공업기획단장 책임 하에 추진토록 하며 오늘 수도권인구계획을 성안 보고한 朴실장이 기획단으로 옮겨 吳 수석을 보좌하도록 한다>
방위산업 건설, 중화학 공업 건설을 책임 진 吳源哲 제2경제수석은 또 일복이 터진 것이었다. 그는 朴鳳煥씨를 중화학공업기획단 부단장으로 임명하고 그 밑에 10명의 실무기획팀을 구성했다.
결단 망설이는 대통령
백지계획이란 立地를 생각하지 않고 이상적인 도시계획을 한 뒤에 행정도시가 들어설 곳이 확정되면 거기에 맞게 수정하여 확정계획을 세우는 방식이다. 기획팀에 참여했던 金秉麟씨에 따르면 1977년 5월경에 吳源哲 수석이 충남 공주군 長崎面(장기면) 일대를 想定(상정)한 백지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장기면의 남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북쪽에서 남동쪽으로 이 지역을 가르는 대교천이 금강으로 들어간다. 북쪽엔 국사봉, 남쪽엔 장군산이 있다. 서울의 북한산 남산 한강축과 비슷한 지형이다.
吳 수석은 장기면의 동서 12km 구간을 행정도시 축으로 설정했는데, 이곳은 청량리-신촌의 12km 축과 비슷했다. 언덕이 많고 농지는 적으며 저지대가 아니라서 適地란 것이었다. 金씨는 “이 지역의 남북 간격이 좁고 구릉지가 완만하지 않아 공사비가 많이 들며 북쪽이 낮고 남쪽이 높아 문제가 있다”고 반대했으나 吳수석은 “많은 곳을 조사했으나 그만한 지역이 없다”고 했다. 盧武鉉 정부가 확정한 행정복합도시 입지는 吳源哲 팀이 想定(상정)했던 장기면과 일부 겹치되 동쪽으로 약5km 밀려난 곳이다.
吳씨는 “풍수지리적으로도 우리가 정했던 곳이 낫다. 이번에 정한 곳은 저지대이고 지하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걱정이다”고 했다. 吳씨는 朴 대통령이 임시행정수도 건설이라고 했지만 청와대도 옮기는 사실상의 遷都였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들어갈 자리에는 경회루와 똑 같은 연못도 마련했다고 한다.
-전쟁이 났을 때 먼 곳에서 지휘를 할 수 있습니까?
“전쟁 지휘소는 일선에서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합니다. 서울이나 사령부가 일선 가까이 있으면 적을 유혹합니다. 서울을 기습하여 포위한 다음 정전하자고 제안하면 큰일 아닙니까. 땅굴도 서울이 가까우니까 뚫는 것이고. 수도가 대전이라면 뚫겠습니까”
吳 수석에 따르면 朴 대통령은 백지계획이 거의 마무리될 때쯤 1996년에 올림픽을 유치하기로 하고 경기장을 계획도면에 집어넣도록 지시했었다고 한다. 吳源哲씨는 통일 이후에도 신행정수도가 통일한국의 수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획을 짰다고 말했다.
“북한이 적화통일 하면 평양이 수도가 되는 것이고 자유통일을 하면 그대로 가는 거지요. 이유는 간단해요. 이북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게 그쪽은 동해안도 서해안도 좋은 항구 자리가 없어요. 동해안은 수심이 너무 갑자기 깊어져서, 서해안은 얕아서 그렇죠. 북한은 통일이 되어도 좋은 항구가 있는 남한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쪽은 물건을 만들고 남한을 통해서 수출해야 할 운명이지요. 한국은 해양국가라는 원칙이 지리적으로 이미 나와 있습니다. 한반도는 어디까지나 남한이 중심입니다. 장기면이 내륙이라도 가로림만이 서울에 대한 인천 역할을 하는 거지요”
吳源哲씨는 신행정수도 건설은 국민투표로 결정할 문제라 생각하고 그 준비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朴대통령이 결정을 미루는 것이었다. 장기면을 朴 대통령이 시찰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입지를 공식적으로 결정하려 했는데 대통령은 움직이지 않았다. 朴 대통령은 헬기로 국토개발 현장을 시찰하고 와선 “꼭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할 만큼 건설과 토목에 취미가 있었다. 吳 수석은 대통령이 유신체제와 1970년대의 宿願이던 중화학공업 건설을 궤도에 올려놓은 다음엔 국토개조와 그 핵심인 遷都에 착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吳씨는 ‘대통령을 했다는 것과 천도를 했다는 것은 역사에 어느 쪽이 더 높게 평가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그래서 朴 대통령이 결정을 못내리고 있다가 10.26 사건을 맞았다고 보고 있다.
“수도분할은 후진의 길”
하나 흥미로운 것은 吳源哲 전 수석을 비롯하여 행정수도 백지계획에 참여했던 사람들일수록 盧武鉉 정부의 遷都 계획과 그 뒤의 이른바 수도분할식 행정복합도시 건설에 부정적이란 점이다. 吳씨는 이렇게 말했다.
“행정기능을 분할하여 일부만 옮긴다는 건 말이 안돼요. 연방국가인 미국이 만약 행정부처를 각주에 나눠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행정기능 분할은 효율성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킵니다. 행정이란 것은 지휘소가 분명해야 카리스마가 생기고 명령에 따라 딱 딱 움직입니다. 나눠놓고 싸움만 한다면 일이 됩니까”
임시행정수도 실무팀에 근무했던 유원규씨(우정건설 부회장)는 이렇게 썼다.
<혹자는 행정수도는 충청권으로 옮기고 경제중심지로 계속 키워나간다고 주장하지만 미국과 같은 나라는 연방형 국가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주정부가 자치권을 명실공히 행사하고 있어 政經분리가 잘 기능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연방제도 아니고 地自體의 分權도 여의치 못하기 때문에 政經일치로 움직이고 있어 행정수도가 새로이 건설되면 경제도 옮겨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도 서울은 최악의 상태로 되어버릴 것이고, 신행정수도에 정부기능과 민간기능이 이전하면서 政經일치로 체계를 갖추는 상당기간은 혼돈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 이 기간 우리나라는 국제경쟁대열에서 뒤처지리라 예상된다>(‘임시행정수도 백지계획은 살아 있다’. 해토 출판).
균형감각
朴正熙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은 독점과 경쟁을 적절하게 배합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모든 성공조직과 인간은 상반되는 요소와 성격을 균형 있게 통합, 활용, 조정하여 시너지 효과를 올리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朴대통령의 인간됨 자체가 수줍음과 강인함, 엄정과 관용, 理와 氣의 양면성을 균형 있게 통합한 모습이었다. 그는 전략과 정책에서도 그러했다. 1970년대 朴대통령의 중화학공업건설과 방위산업건설을 실무적으로 보좌하면서 이 사업들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던 吳源哲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박정희식 ‘독점과 경쟁의 배합 전략' 을 이렇게 정리했다.
<1960∼70년대에는 수요가 부족해서, 국제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국제규모에 미달하는 공장이라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국제경쟁력이 없는 공장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생산 제품은 국제 가격보다 비쌀 수밖에 없고, 따라서 수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럴 때는 하루 속히 국제 규모의 공장으로 키워나가는 것이 우선적 과제였다. 즉 독점은 국제경쟁력이 생기고 난 후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 독점 공장이 일단 국제규모화가 된 후에는 즉시 또 하나의 회사를 설립해서, 경쟁체제로 가야 한다는 것이 朴대통령의 방침이었다. 그래야만 善意의 경쟁이 일어나서, 품질향상과 가격引下가 이뤄지고, 국제경쟁력 강화가 계속된다는 이론이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석유화학과 종합제철」이었다>.
1973년 1월12일 朴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 선언을 할 때 「제2의 석유화학과 제2의 종합제철」을 건설한다고 했다. 朴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에서 석유화학과 종합제철을 2대 기본공장으로 설정했다. 여기서 생산된 제품이 한국 공업구조 전체의 기본 소재로 제공되기 때문이었다.
제2 석유화학 단지는 麗川에 건설되어 민간업체간 경쟁체제로 들어갔다. 종합제철만큼은 포항종합제철 하나만 존속되어, 독점체제로 남게 되었다. 포항 제철소가 확장을 계속하다 보니 입지여건상, 포항에서는 증설이 어렵게 되었다. 종합제철을 건설할 만한 다른 입지를 선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석탄과 철광석을 호주나 캐나다에서 수입하자면 20만t급의 화물선을 이용해야 수송비가 낮아져서 생산원가가 내려간다. 20만t급 화물선이 출입할 수 있는 항구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連關團地(연관단지)까지를 생각하면 1000만평의 공장용지가 필요하다.
제2종합제철 입지선정 작업을 하고 있을 때, 吳源哲 수석은 국토개편계획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1976년부터 그는 「행정수도 건설계획과 이에 따른 국토개편 계획」을 수립중이었다. 이때 전국 인구의 재배치 문제가 큰 과제로 등장했다. 농촌으로부터는 계속 인구가 빠져 나오는데, 2000년대 초까지 1500만 명이 될 것이란 계산이 나왔다. 이중 기존 공업 기지 즉 포항, 울산, 창원, 巨濟, 구미, 여천, 溫山의 7대 기지에서 한 기지(基地)당 50만 명의 인구를 흡수한다고 계산하더라도 흡수 가능 인구는 35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약 1000만 명에게는 새로운 공업지구를 건설해서 일자리를 마련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농촌에서 빠져나오는 인구는 서울 등 대도시로 모여들 것이다.
加露林灣(가로림만)의 발견
吳源哲 수석은 국토개편작업을 하면서 획기적 개념의 공업지구를 구상하게 된다. 그 전에 吳 수석이 산파 역할을 한 것은 한국 기계공업의 메카로 불리는 창원공업기지였다. 吳 수석은 창원공업기지 만한 공업기지를 10개 이상, 한 지구 내에 건설하는 거대한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 지구엔 초기 400만 명, 최종적으론 8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아야 할 것이고 그러자면 약3억 평이라는 토지가 필요하게 된다. 물론 20만t급 대형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끼고 있어야 한다.
1978년 어느 날 吳 수석은 그런 조건의 땅이 있으리라고는 크게 기대도 하지 않은 채, 행운만 바라며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大항만을 건설할 자리를 보려고 海圖를 구해서 전국의 해안지대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환성이 터져 나왔다. 이상적인 장소를 발견한 것이다. 黃海에는 큰 항구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는데, 이렇게 이상적인 장소가 있다니, 이런 것을 天運이라고 하나 보다. 20만t급 배 여러 척이 정박하는 데 문제가 없고, 배후에는 넓은 野山지대가 있었다.
필자는 全엔지니어링의 鄭鎭行씨로 하여금 곧 현지답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鄭씨는 창원공업기지, 구미공업기지의 토지계획안을 수립했고, 그땐 행정수도 계획안을 작성중이었다>(吳源哲씨의 최근 메모)
현지답사 후 확신을 갖게 된 吳수석은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각하! 오늘은 참으로 좋은 소식을 보고 올리겠습니다. 서해안에서 20만t급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항만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朴대통령은 금새 그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어디야?”라고 되물었다.
“가로림(可露林) 만(灣)입니다. 가로림 만은 그 넓이가 바다와 같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만(灣) 안으로 막대한 양의 潮水(조수)가 매일 드나들다 보니, 입구가 패여서 수심(水深)이 20m가 넘습니다. 20m의 수심이라면, 20만t급 화물선이 출입 가능합니다. 방파제도 필요가 없습니다. 부두안벽(岸壁)만 건설하면 되는데, 안벽을 만들 수 있는 길이도 9000m나 됩니다. 실로 보기 드문 이상적인 항만자리입니다. 그 외에 10만t급 선박이 정박 가능한 항만을 건설 할 수 있는 장소도 그 주위에 있는데, 이곳도 안벽 길이가 2000m나 됩니다. 이것만 해도 대단히 큰 항만이 됩니다”
'싱가포르를 능가합니다“
吳수석은 도면들을 펼쳤다. 도면에는 5개의 항만 자리가 표시돼 있었다. 朴대통령은 이 도면들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각하! 이만하면 동양 최대의 항구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황해에서 가장 큰 항구가 상하이(上海)인데 그 수심은 10m에도 못 미칩니다. 대대적인 준설 공사를 하더라도 5만t급 화물선 정도가 겨우 출입 가능합니다. 그 외에 황해에 있는 靑島나 天津이나 大連, 북한의 남포항 등은 2∼3만t급 항만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가로림만 주변에는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야산지대가 많습니다. 약 3억평 정도는 됩니다. 이곳을 정리하면 공장대지 또는 주택용지로 사용할 수가 있는데, 약 400만 명 내지 8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가 됩니다”
설명의 내용이 중대해지자, 朴대통령은 얼굴을 들고 그를 직시했다. 吳 수석은 계속해 나갔다.
“각하, 싱가포르도 이만한 항구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싱가포르의 국토 면적은 685.4평방㎞로서, 약2억 평 정도입니다. 이 안에서 약 300만∼4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경제 번영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로림만을 개발한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싱가포르의 1.5배 내지 2배가 되는 공업지대를 국토 안에 새로 건설한다는 결론이 됩니다. 환언하면 싱가포르의 두배가 되는 항만과 공업지구가 우리나라에 예속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국토 종합 개발 계획상의 효과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산업지구는 浦項, 蔚山, 釜山 창원 여수灣 등 동남해안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이들 산업 벨트에서 생산되는 鐵鋼材(철강재), 석유화학제품 등의 소재나 원료 등은 긴 거리를 수송해서 서울이나 수도권 및 기타 전국에 산재하는 공장에서 가공한 후 또 다시 부산港 등으로 수송해서 수출하고 있습니다.
특히 철강재는 重量物(중량물)이라서 수송비가 많이 듭니다. 이에 반해 앞으로 건설될 중부공업기지는 수도권이라는 대규모 消費地와 인접해 있음으로, 공업의 효율화를 가일층 촉진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현재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가장 큰 규모의 노동력 공급원은 호남권과 중부지방입니다. 중부공업기지는 이들 지방의 遊休(유휴) 노동력을 흡수하는 데도 크게 작용할 것이며, 아울러 호남권과 충청권의 공업발전 및 지역개발에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중부공업기지를 중심으로 해서 북쪽은 수도권까지, 남쪽은 호남지방까지의 거대한 서부공업지대가 새로 구축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가로림 港灣을 중심으로 해서, 仁川항 아산만 비인만 長項항 群山항 木浦항 麗水항 등을 연결하는 경제적이고 편리한 해상교통망이 짜임새 있게 구성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나라의 공업지구는 서부공업벨트와 동남공업벨트로 양분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호남이나 충청도의 소외감도 완전히 소멸될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이 보고를 다 듣고도, 아무 질문이나 의견을 달지 않았다. “한번 가보도록 하지”라고 딱 한 마디 했다.
가로림만 시찰
며칠 후 朴대통령 일행은 헬기를 탔다. 일행중에는 현대의 鄭周永 회장도 끼어 있었다. 도착지는 가로림만 북쪽 입구 모래둑. 허허벌판에 집 한 채 없고 사람의 발길조차 뜸한 곳인데 바람이 셌다. 가로림만의 물은 푸르다 못해 검정색이 돌고 있었는데, 물결치는 파도가 요란해서 넓은 바다 그대로였다. 넓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가로림만 입구의 남쪽에 돌산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朴대통령은 빙 둘러보고는 “과연 넓긴 넓구먼.”이라고 했다. 동쪽 멀리 끝자락에 높게 보이는 산이 있었는데, 산꼭대기에는 공군 레이더 기지의 둥근 안테나가 보였다. 일행은 바람을 피해, 모래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여기에서는 몇 사람의 일꾼들이 메주덩어리 만한 돌들을 파내고 있었다. 朴대통령이 “무엇에 쓰려고 하오?”라고 묻자, 이들은 하도 깡 시골에 사는지라 박 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한 듯 일을 계속하면서 “규석(硅石)입니다. 품질이 세계 최상이지요. 몽땅 수출합니다”라고 대답했다.
朴대통령은 다시 헬기를 타고 가로림만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공군 레이더 기지에 착륙했다. 거기서 가로림만을 바라보니, 얕은 야산들이 해변까지 계속 이어 나갔는데, 가로림만의 윤곽은 너무 멀고 커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대통령은 ‘꼭 조선시대의 봉수대(烽燧臺)에 올라온 것 같구먼’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기지 내를 돌아보고 장병들을 위로했다. 대통령은 돌아오는 헬기 내에서 金正濂 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건설부에 지시해서 우선 산업도로부터 건설토록 하지.”
이것이 이 날의 시찰 결과였다.
며칠 지나서 현대의 鄭周永 회장이 吳源哲 수석을 찾아와서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했다.
“내 나이 70인데 이제부터 큰일을 또 한번 시작해 봐?”
吳수석이 “무슨 뜻이요?”라고 하니 鄭회장은 “종합제철을 내가 해볼까 해”라고 했다. 吳수석이“대통령의 내락은 얻은 것이요?” 하니 鄭회장은 빙그레 웃고는 답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검토는 해보지’라는 정도의 뜻은 받은 것 같았다. 당시 현대그룹에서는 각종 대형 토목 공사, 많은 아파트 공사, 플란트 건설, 선박건조, 자동차 생산 등으로 철강재 수요가 많았다. 현대그룹은 자금력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현대는 종합제철을 원했고, 그 뜻을 대통령에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吳수석은 그래서 朴대통령이 가로림만을 시찰할 때 鄭회장을 동행시켰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보았다. 여하간 鄭회장은 가로림만에 대해서 그 가치를 직감적으로 파악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吳수석이 나중에 들으니 鄭회장은 지난번 시찰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로림만 입구에 있는 돌산(石山)을 구매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가로림만을 개발하자면 앞으로 많은 암석이 필요하게 될 터인데, 암석을 구하는 길은 그 돌산에서 얻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1978년 12월 吳 수석은 중화학기획단을 시켜 ‘중부종합공업기지기본구상’이란 125페이지 보고서를 만들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신행정수도의 關門
산업도로는 곧 착수돼서 완공을 보았다. 중부공업기지에 공업용수를 공급하게 될, 삽교천의 담수호도 완공했다. 바로 그날 朴대통령은 세상을 떠난다. 그 후, 제2종합제철은 현대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포항제철 소속의 제2期 제철소는 중부공업기지에 입주하지 않았다. 포항제철의 제2공장은 「중화학공업육성계획」에서 여천 석유화학공업基地의 확장 예정지로 잡아놓았던 光陽에 건설되었다. 그 대신 加露林灣에는 현대정유와 현대석유화학, 그리고 삼성석유화학이 들어섰다. 종합제철과 석유화학의 입지가 서로 바뀐 것이다.
2004년 9월, 吳源哲 전 수석은 加露林灣으로 가서, 朴 대통령이 시찰했던 바로 그 장소를 다시 찾아가 보았다. 그곳 바닷가, 종합제철소 예정지였던 곳에는 현대와 삼성의 석유화학공장들이 널찍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작은 항만 하나가 건설되어 있었다. 그리고 항만 입구에는 해안 경비용 탱크 한 대가 加露林灣을 혼자서 지키듯, 포신을 높이 들고 버티고 있었는데, 光化門 앞 해태像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2004년 11월 호주에서 개최된 『朴 대통령 서거 25주년을 기념하는 포럼』때의 일이다. 회의는 朴대통령이 벌였던 30∼40년 전의 일에 대해 贊否가 엇갈리는 논쟁을 계속했다. 吳源哲씨는 “미래에 대한 朴대통령의 이야기도 나와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최측에 부탁을 해서 회의종료 전 30분의 시간을 얻어 즉석 강연을 했다. 제목은 「가로림 프로젝트」였다.
吳 전 수석이 새삼 加露林灣(가로림만) 프로젝트에 대해서 애착을 갖게 된 것은 최근 발생한 새로운 국면 때문이다. 盧정권이 공주 연기 지방에 행정복합도시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일과 중국 상해항의 개발로 부산항의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吳源哲 씨는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이 두 가지 요소를 한꺼번에 해결하고 보완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重化學기획단에서 만든 ‘중부종합공업기지기본구상’ 보고서도 그때 朴대통령이 추진했던 행정수도 건설과 이 계획을 연결시키고 있다.
<대전 부근에 위치하게 될 2000년대 신행정수도의 형성에 따라 本종합공업기지는 신수도와 강력한 張力(장력)을 유지할 것이다. 본 계획지에서 신수도에 이르는 간선 도로망이 구축되어 도시간 소통이 원활하게 될 것이며, 본 계획지는 경제적 측면에서 신수도로, 신수도는 문화적 측면에서 계획지로 상호 상승효과를 부여함으로써 중부권은 국토의 중심적 기능을 발휘하며, 이에 따라 본 계획지는 바람직한 국가기간산업의 中核기지가 될 것이다>
이 논리를 진행중인 공주 연기 행정복합도시 건설에 적용한다면 가로림만 기지는 이 도시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공업특구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세계최대의 산업기지
이 보고서에 따르면, 가로림만에 대규모 공업특구가 들어설 경우 몇 가지 점에서 결정적 優位(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첫째, 이 공업특구에서 생산되는 물건의 상당량은 수도권에 공급되거나 수출될 것인데, 서울과 가깝고 항만이 좋아 물류비가 아주 적게 먹힌다.
둘째, 노동력도 호남권과 충청권에서 확보할 수 있다.
셋째, 깊은 바다에 면하면서 넓은 평야지대를 갖고 있어 400만 명이 수용될 수 있다(지금은 800만 명 가능). 개발지역을 표고 80m 이하, 경사도 30% 이하로 한정해도 공업지 약 5800만 평, 주거지 약 6360만 평, 상업 업무용지 약 610만 평, 공원녹지 약4030만평, 기반시설 약2100만 평이 나오고 자연녹지 등으로 약1억1000만 평이 남는다. 吳 전 수석은 “현재 한국에서 남아 있는 마지막 要地이기 때문에 이를 소중하게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8년 吳 수석 팀이 만든 보고서에는 이 산업기지에 유치할 업종을 이렇게 설명했다.
*자원을 많이 필요로 하는 공업
*해외 원료 의존도가 높은 공업
*원자재 및 제품수송에 항만시설을 요하는 공업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높은 공업
*대규모 공업용수를 필요로 하되 회수율이 높은 공업
이런 기준에 따라 이 산업기지에 유치하기로 한 공장은 세계적인 규모로서 이슬숲이란 뜻을 가진 加露林灣이 세계에서 가장 큰 중화학 산업기지가 되도록 계획했다. 종합제철소는 연간 2000만t 생산 능력을 가진 부지 500만평, 철강관련산업 부지는 360만평, 기계공업은 국내 총수요의 37%를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하고 부지는 820만평, 자동차공장은 年産 50만대로서 부지는 120만평, 非鐵금속 공장 부지는 240만평, 석유정제업종의 부지는 300만평, 석유화학공업 시설은 에틸렌 기준 年産 200만t 규모로 하여 부지가 300만평, 전기전자 공업은 전국 수요의 15%를 감당할 것으로 계산하여 300만평, 기타 화학공업은 전국 수요의 10%로 잡고 부지가 210만평이었다.
이 보고서는 ‘개발전략’ 항목에서 가로림만 일대를 ‘새로운 지역사회를 창조한다’는 개념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계층, 연령별 주민 대다수가 지역의 산업구조에 유기적인 결합을 갖고 적극적인 형태로서 관여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사회를 건설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가로림만 기지의 핵심은 항만이다. 이 거대한 기지에서 연간 발생하는 물동량은 5408만t으로 예상되었다. 이를 처리할 항만은 다섯 개 만든다. 가장 큰 것은 안벽의 길이가 9000m이고 20만t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수심 20m 항만이다.
이 기지가 필요한 電力은 400만~500만kw로 추정되었다. 현재 한국 전체 전력생산량의 약10%에 해당한다.
독립국 수준의 자유지역으로
지금 가로림만 일대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1978년 이후 상황은 吳源哲 수석이 예상했던 방향으로 크게 변했다. 중국의 경제성장, 韓中무역의 급증, 서해안 고속도로 완공, 공주 연기 지역의 행정중심복합도시 추진 등으로 충남 서산시를 중심으로 하는 가로림만 일대로 공장들이 몰리고 항만이 확장되고 있다. 28년 전 吳源哲 수석 팀이 가로림 지역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예측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현재 가로림 지역 개발이 道와 市, 그리고 기업 단위에서 단편적으로 이뤄지고 있을 뿐이란 점이다. 吳씨가 안타까워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한국에서 마지막 남은 要地인데 이곳을 귀하게 써야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국내의 停滯性을 돌파하여 21세기의 선진화 비전을 담는 기념비적 프로젝트로 만들어야 할 아까운 공간을 너무 작게, 잘게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산시는 작년 행정도시특별법이 통과되자 서산 일대를 ‘임해관문도시’로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가로림만권, 아산만권, 평택 지역에 경제자유지역을 만들고 건설중인 대산항(2011년 완공 때 23만 평, 8선석, 연간 약590만t 처리)에 이어 가로림만에 25선석 규모의 항구를 만든다는 것이다.
가로림만권의 대산항은 1991년에 무역항으로 지정되어 현대석유화학 등 油化 3社가 民資로 개발하여 유류전용 부두로 쓰고 있다. 가까운 곳에 자동차 산업지대가 들어서고 서해안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정부는 2002년부터 4374억원을 들여 2011년에 완공할 목표로 컨테이너 처리능력을 가진 항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올해 들어 한화그룹이 瑞山市와 함께 100만 평 규모의 서산 테크노폴리스를 조성하여 550개 자동차 산업관련 첨단기술기업을 유치함으로써 2만5000명분의 일자리를 만들고 연간 2조800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여기엔 3조2000억원이 들어간다. 서산시에 따르면 앞으로 5년 동안 기존공장의 증설과 새로운 공장의 입주 등으로 10조원이 이곳에 투자될 것이라고 한다.
吳源哲씨는 최근에 ‘중부종합공업기지기본구상’을 자주 펼쳐 보면서 朴대통령이 10.26 사건을 맞지 않고 이 거창한 계획을 밀어붙였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본다고 한다. 그는 지금 이 프로젝트를 실천에 옮긴다면 1978년에 계획했던 ‘산업기지’ 개념을 더 발전시켜 거의 독립국 수준의 ‘자유경제특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加露林灣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20만t 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항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20만t급 선박으로 외국에서 원자재를 들여올 수 있는 산업은 여기서 하라는 겁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 원료공급지가 됩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으로 소재를 만들고, 그것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여기서 또 다음 단계 소재를 만들고 하자는 것입니다. 거의 독립국 수준의 자유경제지역으로 만들어놓고 생필품은 수입 자유화하여 생활비, 교육비를 싸게 해줍니다. 외국노동자들을 데려다 써 노임을 싸게 만들면 경쟁력이 최고가 됩니다. 이렇게 잘 돌아가면 자연히 국제금융이 들어와 싱가포르처럼 센터가 되고요. 정부는 데모만 막아주면 됩니다. 이렇게 해주면 여기에 800만명이 입주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본토보다도 높아집니다. 3만 달러는 되어야지요. 한국 전체의 GDP 중 30%를 전국토 면적의 1%가 만들어내는 거지요”
2030년의 가로림 FTS
吳源哲씨는 지금 이 계획이 실천에 옮겨질 경우 25년 뒤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실감을 갖도록 하고 있다.
<우선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한다. 중부공업지기가 완성되어, 가로림 自由經濟特區, 즉 가로림 FTS (Free Trade State )라는 행정구역이 신설되었다. 여기에는 州정부가 있어 국방과 외교는 本國 정부에서 맡고 나머지 행정은 州정부 장관이 통괄하는 체제가 수립되었다. 2030년 가로림 FTS 장관은 현황 브리핑을 이렇게 시작한다.
『가로림 FTS 의 기획은 1978년에 작성된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 이라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朴正熙 대통령 시대에 작성된 것인데 당시 행정수도 계획과 맞물려 거대한 공업지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朴대통령 서거 후 25년간 방치돼오다가, 행정수도 문제가 되살아남으로써 이 문제도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1990년대부터 중국에서는 鄧小平이 집권하고 개방정책을 개시한 후부터 중국의 경제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해나갔습니다. 황해연안 즉 大連, 天津, 靑島 특히 上海를 중심으로 한 양자강 연안은 일진월보(日進月步), 즉 하루가 다르게 공업화되어 갔습니다. 그 결과 막대한 수출, 수입 물량이 발생해서 머지 않은 장래에 황해바다는 세계 굴지의 물량 집산지(集散地)가 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확실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지는 上海港으로 변해갔습니다. 특히 중국이 10만t급 컨테이너선이 정박 가능한 上海 洋山港을 건설하고 난 후로부터, 그 양상은 뚜렷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만회하고자 부산항 확장 등을 시도했지만, 황해연안의 중국항구와는 거리가 멀어서 중국에서 발생하는 물량을 처리하는 데서 차차로 上海港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2005년입니다.
원유값이 배럴당 60달러 선으로 급등했습니다. 원유값이 올라가면 갈수록 수송비가 올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수송선박을 대형화하는 것뿐입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上海港보다 규모가 한 단계 더 큰, 20만t급 대형 선박이 정박 가능한 대규모 항만을 개발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항만 근처에 대규모 공업지구도 설치해야 되겠다”는 데로 의견이 접근해갔습니다.
제2의 싱가포르
세계는 계속 국제화가 이뤄지고 있는데, 당시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이 발생했는데도, 적절한 대응을 못하는 상태가 계속돼 나갔습니다. 그 결과 경제사정이 악화돼서, 국민생활이 어려워지고 국민들은 장래에 대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국가 발전 방안을 찾아야 했습니다.
한 방안으로서 「싱가포르와 똑같은 성격의 자유경제특구를 시범적으로 만들어 실시해보자」 라는 안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는 가로림 FTS 건설에 총력을 경주해 났습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나가고 현재는 2030년이 됐습니다. 현 단계는 가로림 FTS의 건설 공사는 모두 끝내고, 그 여건을 싱가포르化하는 작업이 진행중입니다. FTS 에서는 금융, 무역, 상거래, 제조업, 병원, 학교, 종교, 심지어 토지취득, 이주, 출입국 모든 분야가 싱가포르와 똑같이 자유입니다. 사업도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면 됩니다. 그 결과 세계 각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교, 병원, 은행, 기업 등이 속속 입주해오고 있습니다.
이 가로림 FTS에서는 공용어로 영어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공무원은 완전히 국제화된 선진국 수준이며, 능률면에서나 서비스면에서 세계 최상급입니다. 경험이 많거나 기술을 갖고 있는 고급 인력도 세계 각지로부터 여기에 와서 일하고 있는데, 단순기능밖에 능력이 없는 노무자도 여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들 노무자의 노임은 각자의 出身國보다 많이 받으면, 더는 바라지 않기 때문에, 가로림 FTS에서는 비교적 값싸고 능력 있는 외국 노무자를 필요한 만큼 고용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노사문제도 없습니다. 불법행위와 질서유지는 주정부가 책임지고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싱가포르와 꼭 같습니다』
상해항을 압도한 이유
한 사람이 “가로림 FTS가 上海港과 비교해서 유리한 점이 무엇이라고 봅니까?”라고 질문하자, 장관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가로림 FTS에서는 본토(本土: 대한민국 전체)로부터 전기를 공급받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전기는 석유에 거의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전기값은 아주 저렴하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있습니다. 그 외에 LNG나 석탄 등 각종 에너지나 용수도 싱가포르나 상해 홍콩보다 싸게 공급됩니다. 특기할 사항은 그간 수에즈 運河가 확장이 돼서, 이제는 20만t급 컨테이너선도 수에즈 운하를 사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上海港은 10만t급이 상한선입니다. 가로림 FTS의 경쟁港인 상해의 洋山부두에는 방파제가 없습니다. 풍랑에 대처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上海는 태풍이 자주 통과 하는 곳에 위치합니다. 태풍이 오는 계절이 되면 항상 비상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장관은 항만 쪽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저기 컨테이너港의 작업광경을 보십시오. 처리능력이 몇 배로 빨라졌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20만t 배는 떠나고, 다음에는 2~3만t의 소형선박 여러 척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크레인이 알아서, 야적장에 내려놓은 컨테이너를 행선지 별로 실어줍니다. 소형 선박들은 제각기 목적지를 향해 운항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2~3만t 배들은 주로 중국선박인데 중국의 각 지방에서 컨테이너를 모아 싣고 가로림만으로 들어옵니다. 컨테이너를 내려 놓고는, (20만t의 대형 컨테이너선이 세계 각국에서 운반해온) 컨테이너를 바꿔 싣고 중국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20만t 컨테이너선은 母船격이고, 2~3만t 선박은 子船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가로림 항구는 이러한 중계작업으로써 허브(Hub) 역할을 하는 母港인 것입니다. 이것이 東北亞 허브(Hub) 의 진면목입니다.”
OSP 개념
장관은 말을 이어갔다.
“가로림 FTS에서는, 원tm톱 생산, 즉 OSP(One Stop Production)라는 개념의 체제를 갖춰놓고 있는 곳입니다. 우선 천연원료는 20만t이라는 초대형 화물선에 의해 가장 싼 금액으로 수송되어 옵니다. 거대한 면적의 야적장이 있으며, 원료나 소재나 부품 등을 저장하는 거대한 창고群도 마련 되어 있습니다. 모두 세계최대급이며 FTS의 자랑입니다. 그래서 선물거래(先物去來)도 여기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원료를 가공하는 공장들도 바로 이 가로림 FTS 내에 위치합니다. 필요하다면 “컨베이어 벨트”로 수송이 가능합니다. 수송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생산되는 소재나 半제품을 가지고, 다음 단계의 작업을 하는 공장도 바로 근처에 위치하게 됩니다. 가로림 FTS는 23개의 공업단지가 있고, 18개의 주민주거용 도시가 있는 공업지구입니다. 모든 작업이 그리고 주민들의 생활이 이곳, 가로림 FTS 내에서 이뤄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수송비가 싸지고 작업기간이 단축되어서, 생산비를 가장 싸게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전기 등 동력비나 노동력의 임금이 다른 곳보다 저렴하다는 것이, 가로림 FTS의 큰 장점이라고는 이미 설명을 한바 있습니다“
한국 전체가 자유특구화해야
장관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가로림 FTS가 본토에 주는 영향도 막대합니다. 본토 공장들은 천연원료로부터 기초소재, 중간소재, 중간부품, 부속품 그리고 최종제품까지 필요한 물건을 가장 싼 값으로 가로림 FTS에서 구입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工業들은 과거에는 주로 東南海 지방에 편중돼 있었는데 가로림 FTS가 가동하고부터는 경기지방(首都圈)부터 호남지방까지, FTS를 母港으로 해서 海上으로 연계화 되어 西海岸일대의 공업화와 지방발전에 큰 활력을 불러 넣고 있습니다. 특히 FTS에 새로운 종합제철회사가 설립됨으로써, 제철사업도 경쟁체제로 들어갔으며, 이에 따라 重量物인 각종 철강재를 浦項이나 光陽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공급 받을 수 있게 돼서 수송비가 인하되고, 철재 값도 싸졌습니다.
다음 순서로는 가로림 FTS의 면적을 점차로 확대해 나갈 것이며, 종국에 가서는 본토 전부에 적용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환언(換言)하면 大韓民國 전체가 FTS 國家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난 후, 북한 땅에도 작용하는 것이 「21세기에 사는 우리 민족이 꼭 이룩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대의 국토구상
1978년부터 吳源哲 수석은 행정수도 건설 백지계획과 가로림만의 중부공업기지 계획을 세우면서 자연스럽게 1980년대 朴正熙 대통령이 중점적으로 추진할 국토개조 사업의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국토개조 계획은 ‘2000년대의 국토구상’이라는 보고서로 만들어져 朴 대통령이 죽기 직전에 보고되었다.
朴 대통령 국장을 마친 하루 뒤인 1979년 11월4일 吳源哲을 비롯한 수석 비서관들이 대통령 유품 정리를 하려고 집무실에 들어갔을 때 전에 없던 간이책상이 눈에 뜨였다. 그 책상 위엔 두툼한 보고서 두 권이 놓여 있었다. 표지엔 각각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백지계획’ ‘2000년대의 국토구상’이라고 쓰여 있었다. 보고서 옆엔 전기 스탠드가 있었고, 보고서 위엔 돋보기가 놓여 있었다. 대통령은 10.26 사건 전날에도 이 보고서를 들여다 본 듯했다. 朴 대통령이 서거하고 吳源哲 수석이 물러남으로써 국토개조를 위한 세 개의 계획(행정수도 건설, 가로림만 계획, 2000년대의 국토구상)도 잊혀졌다.
朴 대통령이 피살되지 않았더라면 1980년 연구기자회견에서 발표했을 가능성이 높은 ‘2000년대의 국토구상’은 행정수도 건설을 계기로 하여 한국의 국토이용 체계를 재편성하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이 보고서는 ‘고도산업사회를 구축하고 국민총생산의 확대를 위해서는 유한한 국토공간, 국토자원을 합리적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하여야 한다’고 전제하고 ‘임시 행정수도 건설과 병행하여 국토 재편성 작업을 추진함이 요구된다’고 했다.
이 구상의 핵심은, 서울이 남한의 서북단에 치우쳐 있어 생긴 교통망의 편중 현상을 새 행정수도 중심으로 재편함으로써 物流와 교통의 효율성을 높이고, 가로림만 일대를 행정수도의 관문항과 산업기지로 육성함으로써 수도권, 부산권에 맞먹는 제3의 경제중심지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기본방향: 첫째, 국토활용의 극대화를 이룩하여 국토 공간질서의 체계화를 기한다.
둘째, 신행정수도 형성에 따라 국토권역을 재편성한다.
셋째, 물동량의 신속한 처리를 기하여 국토의 교통상 동맥경화증을 사전에 예방함과 아울러 수송에너지 절약을 도모한다.
넷째, 생산 및 항만기지를 개발하여 산업의 확대에 대비한다.
다섯째, 국토動線을 구상하여 국토 간선체계를 형성한다.
여섯째, 자연환경의 보존을 이룩하여 맑은 물, 푸른 하늘,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
이 보고서는 국토의 한가운데로 옮긴 신행정수도를 중심으로 도로망과 산업기지를 재편성하면 효율적인 국토이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즉, 서울을 중심으로 한 전국 350km 반경권이 신행정수도 중심 150km 반경권으로 좁혀지고, 이에 따라 수도와 전국의 통달 소요시간이 3분의 2로 단축된다.
이 단축 시간을 생산에 활용하면 산업활동이 활발하여지고 소득증대에 기여하게 된다. 이 보고서는 또 국토공간을 5대권으로 나눴다. 영남권, 호남권, 영동권, 경기권(서울)에다가 수도권(충청권)을 추가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신행정수도의 관문인 가로림만 일대에 중부종합기지라고 불리는 최대의 산업기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 규모는 창원 기계공단의 8배이다.
이슬숲에서 선진국으로 만나자
朴 대통령의 遺作이 된 ‘임시행정수도 건설 계획’, ‘가로림만 프로젝트’ ‘2000년대의 국토구상’ 중 이 시점에서 살려낼 수 있는 것은 加露林灣 프로젝트일 것이다. 인구 800만 명이 입주하여 國富의 약30%를 창출하는 선진 자유경제지구를 準독립국 개념으로 만들 수 있는 지리적 조건과 국제적 조건이 무르익은 정도가 아니라 그 길밖에 없다고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문제는 그 방향으로 국가적 의지를 결집시킬 수 있는 정치적 결단의 有無일 것이다. ‘우선 이슬숲에서나마 선진국을 만들어보자’는 방향으로 국민들의 뜻을 모아 3억 평을 자율적인 행정조직에 떼주는 결단을 내릴 국가 지도자 待望論이다. 대통령 후보들은 이런 야망을 차기 大選 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받아볼 만하지 않는가? 朴 대통령이 남긴 꿈을 21세기에 이루는 지도자가 나타나면 한국은 자유통일의 관문을 지나 선진국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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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전 朴 대통령은 金載圭 정보부장, 具滋春 내무장관, 金桂元 비서실장, 柳赫仁 정무1수석, 高建 정무2수석 비서관들을 불러 어제 있었던 부산 시위에 대해 보고를 들었다. 오후엔 부산에 갔다가 온 朴瓚鉉 문교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들었다. 대통령은 시위 사태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보고를 받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크게 걱정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具滋春 내무장관이 오전에 비행기로 부산에 내려와 시청·시경을 둘러보았다. 그는 오후에 부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장관은 '2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됐는데 100여명이 불량배였다'면서 '지각없는 행위엔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했다. 한 기자가 '이 회견 내용을 보도하는 것은 긴급조치 9호에 위반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具장관은 '괜찮다'고 했다.
具장관의 경고를 보도하는 형식으로 부산사태는 알려졌다.
이날 朴 대통령은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던 車智澈 경호실장과 세 번을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통령은 오후 2시40분부터 4시5분까지는 이발을 했다.
저녁 6시 청와대 영빈관에선 유신선포 7주년 기념 만찬이 열렸다. 모든 장관들과 유정·공화당 의원 등 여당권 인사들이 모두 참석했다. KBS 전속악단도 나와 있었다.
朴대통령은 만찬장에서 주요인사들을 접견한 뒤 만찬회장을 돌며 의원들과 어울려 각 지방의 농사 作況, 大田의 전국體典, 의원 외교 등을 화제로 삼아 환담했다. '해외여행을 해보니 우리나라의 빈부 격차는 극히 적은 편'이라는 어느 의원의 얘기를 들은 朴대통령은 '세계은행 통계에도 우리나라는 빈부격차가 적은 나라로 기록돼 있더라'고 응답했다. 朴대통령은 학계와 언론계 출신 초선 의원들에게 '밖에서 보던 국회와 직접 들어와서 본 국회는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다.
鄭在虎 유정회 대변인은 한산도 담배를 피우고 있던 崔圭夏 총리를 만나자 '부산사태가 어떻게 돼 가느냐'고 물었다. 崔총리는 '잘 진압이 되어 평온을 찾았다'고 했다. 헤드 테이블엔 朴대통령을 비롯, 金鍾泌, 白斗鎭, 丁一權, 太完善, 李孝祥, 朴浚圭 등이 자리잡았다. 식사는 뷔페식이었다. 식사 뒤의 여흥 시간엔 위키 리가 사회를 보았다. 가수 현인·백설희·김정구가 나와 ‘신라의 달밤’ 등 흘러간 옛 노래를 불렀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참석자들의 뇌리에서는 전날 밤의 부산데모가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朴문교부장관은 부산 서구가 선거구인 공화당 朴燦鍾의원을 만나자 '부산에 가보니 신민당 의원사직서를 선별수리한다는 말이 기름을 부었어'라고 했다. 다른 의원들도 朴장관과 朴의원에게 다가와 부산사태에 대해 물었다. 이들의 걱정과는 별도로 스테이지는 흥겹게 돌아가고 있었다.
공화당 崔영철 의원이 사회를 맡더니 '공화·유정 노래시합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공화당 대표선수는 최재구였다. 당시 국회에는 3대가수로 꼽히는 의원이 있었는데 그 3인은 최재구(崔載九)·정재호(鄭在虎)·김수한(金守漢·신민당)이었다. 崔의원은
'나는 최소한 열 곡은 불러야 마이크를 넘기는 버릇이 있다'고 한마디를 하더니 옛 노래를 불러 젖히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애창곡인 ‘짝사랑’도 불렀다. 崔의원의 독무대가 너무 길어지자 공화당 신형식 사무총장이 독특한 손짓으로 사인을 보냈다. 崔의원은 '강요에 못 이겨 하단한다'면서 물러났다. 마이크를 받은 사람은 '유정회의 입' 정재호였다. 그는 '노래를 부르기 전에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릴 것이 있다'고 운을 떼더니 시를 낭송하듯 읊어 나갔다.
'조국 근대화를 향한 각하의 뜨거운 눈동자 가장자리에는 항상 눈물이 괴어 있습니다. 눈물의 그림자가 보입니다. 이렇게 풍만한 인정과 뜨거운 집념의 영도자를 받들어 모신다는 것은 나의 행복입니다. 우리 오늘 유신 7주년을 맞아 신명을 바쳐 일할 것을 함께 다짐합시다.'
鄭의원은 이어서 ‘삼각지 로터리에……’ ‘나그네 설움’, 그리고 묘하게도 ‘바보 같은 사나이’를 부르고 내려갔다. 朴대통령은 '정의원은 가수로 轉業하지'라고 평했다. 사회자 최영철이 ‘엽전 열닷냥’을 부르고 노래 시합을 끝냈다.
이때쯤 朴대통령 주변에선 찬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만찬 도중 具滋春 내무장관은 몇 차례 朴대통령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무슨 보고인가를 했다. 대통령은 그때마다 '뭣들 하고 있는 거야'라고 역정을 내고 안색이 바뀌더니 노래시합이 끝났을 땐 표정이 아주 굳어 있었다. 申炯植은 청와대 비서진들이 빨리 끝내주었으면 하는 사인을 보내는 걸 받아 밤 9시쯤 만찬을 끝내도록 했다.
이날부터 서울에서는 제 12차 연례 한미안보협의회가 열리고 있었다. 3일간 열린 이 협의회에서는 해럴드 브라운 미 국방장관이 참석했다. 李光耀 싱가포르 수상도 한국을 방문하고 있을 때였다. 朴대통령으로선 부산사태가 이래저래 체면이 서지 않은 사건이 돼버렸다. 만찬이 끝나자 총리와 내무장관 등 각료들이 한구석에 모여 뭔가 수근거리고 있었다. 鄭在虎는 부산사태가 진정되었으니 그 후속 조처를 상의하는 모양이라고 추측하고 별 생각 없이 다른 의원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나와 2차를 하러 갔다.
이 만찬장에서 박대통령 옆자리에 앉아 있었던 金鍾泌은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합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 내가 영감(필자 주:박대통령)과 한 테이블에 앉았는데, 구자춘 내무장관이 들락거리면서 영감 귀에 대고 뭐라고 그러니까 영감 표정이 굳어집디다. 내가 그때 부산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듣고 들어갔는데, 속으로 정말 큰일이다 싶어서 걱정이 되더군요. 말기가 왔구나 하는 게 피부로 느껴졌어요. 나는 그 자리에서 영 흥도 안 나고 밥도 안 먹혔습니다. 그냥 먹는 시늉만 하고 있는데 영감도 나를 쳐다보고 계셨던지 이러시데요.
'왜 그렇게 식사를 안 해?'
'먹고 있습니다'
'에이, 안 먹는데. 청와대 밥이 맛이 없나?'
내가 식사를 하지 않는 게 못마땅하셨던 겁니다. 그날 밤 헤어지는데 영감이
'어디 안 가지?' 그러세요.
'예. 갈데 없습니다. 서울에 있겠습니다.'
'내 곧 부를 테니까 연락하거든 들어와,' 그러구 헤어졌어요. 이게 영감을 마지막 뵌 겁니다.'
17일 밤9시 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은 공관에 머물고 있었다.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김계원, 차지철 실장, 김재규 정보부장이 보였다. 具滋春 내무장관, 盧載鉉 국방장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도 있었다. 위기일수록 침착한 朴 대통령은 鄭 총장에게 자리를 권하더니 金載圭 부장에게는 부산사태를 설명해주라고 지시했다. 설명이 끝나자 朴 대통령은 鄭 총장을 향해서 말했다.
“정장군, 현행법에는 육군참모총장이 치안유지를 경찰이 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는 직접 계엄선포를 한 뒤 국무회의의 추인을 받을 수 있다고 되어 있어요. 지금 각의를 소집하자니 너무 늦을 것 같아. 그러니 정총장이 부산지역에 계엄을 선포하고 추인을 요청해주시오”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으로는 누가 좋으냐고 물었다. 鄭 총장은 朴贊兢 군수사령관을 추천하여 허락을 받았다. 車 실장이 그 자리에서 전화로 朴 장군을 불러내더니 전화기를 鄭 총장에게 건네주었다. 鄭 총장이 朴 사령관에게 계엄선포 사실을 알리고 병력배치를 지시하려고 하는데, 대통령이 갑자기 “정장군, 잠깐 기다려요”라고 했다. 대통령은 시계를 보더니 “11시에 국무회의를 할 수 있겠는데...정장군 계엄준비만 해두시오”라고 했다.
朴 사령관은 부산에는 실병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鄭총장에게 보고했다. 朴 대통령은 어느 부대를 신속히 투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鄭 총장은 공수여단이 좋겠다고 말했다. 대뜸 朴 대통령이 車 실장을 향해서 “차실장, 1개 여단을 동원해!”라고 했다. 깜짝 놀란 鄭 총장이 “각하, 공수단은 실장이 동원을 명령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은 '그런가?“하고 씩 웃었다.
金聖鎭 문공부장관은 崔圭夏 총리의 지시를 받아 총무처에 임시국무회의 소집을 위한 연락을 취할 것을 통보했다. 이때가 밤10시 30분. 비상연락을 받은 장관들은 중앙청 3층의 국무회의실로 모여들었다. 이희일 농수산부장관 같은 이는 잠바 차림에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 11시 30분에 총리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렸다. 具내무장관이 부산사태를 보고한 후, 盧載鉉 국방장관이 비상계엄 선포를 제안했다. 金致烈 법무장관이 이견을 제기했다.
'부산 지방에서 데모가 난 것은 金泳三 의원 제명의 후휴증이며, 민주주의가 짓밟혔다고 생각한 시민 감정의 폭발이라고 봅니다. 이런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게 되면 정부가 마지막 비상수단을 행사하지 않고서는 통치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을까 두렵습니다. 관광·무역·경제에 미치는 악영향도 생각해야 합니다. 비상계엄령이 아니더라도 시장·도지사는 경찰력으로 수습을 못할 경우, 인근 군부대의 지원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각하께선 올바른 정책 건의는 받아들일 분이니 崔총리께서는 비상계엄령 선포의 유보를 진언해주셨으면 합니다.'
金장관의 말에 동조한 것은 申鉉碻 부총리뿐이었다. 토의 10여 분만에 崔총리는 부산 지역에 대한 비상계엄령 선포안을 의결했다. 회의가 끝난 뒤 몇몇 국무위원들이 金致烈 장관에게 '잘했다'고 했으나 金장관은 '그런 말은 회의 때 해야지……'라면서 화를 냈다. 이날 총무처장관 沈宜煥은 병석에 있어 차관 崔澤元이 대신 참석했다. 그는 의결이 끝난 뒤 국무위원들의 서명을 받았다. 李用熙 통일원장관이 '나는 서명을 못하겠다'고 버티어 崔차관이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강박심리가 부른 과잉 대응
비상계엄령은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사변에 있어서 적의 포위 공격으로 인해 사회 질서가 교란된 지역에 선포한다'(계엄법)고 돼 있었다. 부산의 사태는 크게 잡아도 위수령 대상밖에 되진 않는 것이었다. 관계 장관인 具滋春 내무, 盧載鉉 국방, 朴瓚鉉 문교 장관도 개인적으로는 '비상 계엄을 펼 만한 사태는 아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들은 그러나 박대통령의 뜻을 바꿀 수가 없었다. 대통령의 뜻이 그만큼 굳었거나 의사결정체계가 경직돼 있었기 때문이리라.
朴대통령의 속셈은 부산사태의 불티가 다른 지역으로 튀기 전에 신속히 진화한다는 것이었다. 病勢의 초기에 고단위 투약을 한다는 전략이었다. 이런 신속·과잉 대응의 기층심리엔 강박관념이 자리잡고 있는 법이다. 겉으로는 朴대통령이 확고부동한 통치력을 행사, 국내 치안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심리적으로는 오히려 쫓기고 몰리는 기분에 빠져 있었다.
데모가 金泳三의 본거지에서 일어났다는 점도 그의 결단에 영향을 주었다. 겉으론 강하지만 속으로는 약하고, 물리적으로는 막강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취약한 유신정권의 모순이 부산사태를 통해 노출된 것이다.
부산지역 2관구 사령부 소속 병력이 사태 악화에 대비하여 17일 밤 부산시내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계엄령 선포 세 시간 전인 밤 8시 30분쯤이었다. 밤8시34분 부산진서 상황실엔 '무장 군인들을 가득 태운 군 트럭들이 서면 지하도 근방을 지나 시내로 들어가고 있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그때만 해도 부산 경찰은 아무리 강경책을 쓴다 해도 위수령 정도가 선포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시내로 들어간 2관구 소속 군 병력은 일단 부산역에 집결하여 상부로부터 명령을 기다렸다. 시민들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낌새를 차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비상계엄령이 17일밤 11시를 기해 부산에 선포될 것이란 통보가 부산의 경찰·정보부·군 부대에 떨어진 것은 밤10시30분이었다.
'밤 11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선포됐고 통행금지 시간이 한 시간 당겨져 밤11시부터 시행되니 선량한 시민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경찰은 이런 안내방송을 11시 이전에 하고 다녔다. 임시국무회의가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키로 의결한 것은 17일 밤 11시 30분께였고 이 사실이 방송국 임시뉴스로 보도된 것도 그때였기 때문에 혼선이 빚어졌다. 일부 경찰서에선
밤 11시부터 통행금지 위반자 단속을 실시하여 멋도 모르는 시민들을 잡아가기도 했다. 밤11시 이후에도 데모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파출소를 습격하고 유리창을 깨고 오토바이를 불태웠다. 서부서 구덕파출소는 18일 0시에 습격을 받았다. 400명쯤 되는 군중은 유리창·자전거·오토바이를 닥치는 대로 파괴한 뒤 두 갈래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때 마침 군 병력이 대신동으로 배치돼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데모 군중 2000명쯤은 법원 앞과 옛 영남극장 앞에 다시 모여 구호를 외쳤다. 서부서가 전 병력을 동원, 이들을 쫓아버린 것은 18일 새벽 2시였다.
육군 군수사령관 朴贊兢 중장은 이날 한국을 방문한 대만의 3성장군을 해운대비치호텔에서 접대했다. 술도 좀 마셨다. 그는 밤 9시30분쯤 숙소에 돌아왔다. 그는 전날의 시위사태를 알고 있었으나 큰 위기감은 느끼지 않았다. 朴중장이 숙소에 돌아온 직후 청와대 車智澈 경호실장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청와대에서 부산사태에 대해 협의중에 있으니 계엄령 선포에 대비해달라는 메시지였다. 朴중장은 부산시장, 2관구 사령관, 군수기지사령부 참모장 등을 사령부로 불러 1차적인 지침을 시달했다.
김재규의 운명적인 부산 출장
10 월 18 일 새벽 : 부산
金載圭는 18일 새벽 2시쯤 부산의 계엄사령부(군수기지사령부)에 나타났다. 야간 비행으로 급히 내려온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金載圭는 朴興柱 대령(수행 비서관)등 참모들을 데리고 왔다. 그는 부산지역계엄사령관 朴贊兢 중장에게 朴대통령의 지시를 구두로 전달했다. 지시의 골자는 '데모의 징후가 여러 타 지역에서도 엿보이니까 빨리 사태를 진정 시키라'는 것이었다.
朴중장은 김재규가 3군단장일 때 그 휘하에서 사단장으로 1년 정도 근무해서 친면이 있었다. 金載圭는 18일 아침 계엄사령부에서 열린 계엄위원회의에 참석했다. 崔錫元 부산시장을 비롯, 부산 지검장, 시경국장, 교육감, 관구 사령관, 법원장 등 계엄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金載圭는 이렇게 말했다.
'4·19는 우리군의 수치였다. 계엄군이 본분을 이탈, 시민과 합세한 것을 잘못된 일이었다. 이번에는 군의 본분에 충실하라.'
金 부장은 또 1964년의 6·3사태 때 6사단장으로서 서울지구 계엄 업무를 맡았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金載圭의 이 부산 출장은 그와 朴대통령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하나의 요인이 됐다. 부산에서 그가 보고 듣고 판단하고, 또 이용하려고 한 것이 10·26의 중요한 동기가 됐기 때문이다. 부산사태는 金載圭의 마음을 통해 계산되고, 과장되고, 왜곡되기도 하면서 커가고 있었다.
18일 새벽 4시 서울 용산
金載圭가 밤중에 부산사태의 현장을 살피고 있던 바로 그 순간 丁一權 전 총리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朴대통령의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습니다. 눈꺼풀에도 피가 엉겨붙어 있었어요. 그런 얼굴로 대통령은 '정형!'이라고 부르며 저를 껴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이놈들, 이놈들' 하며 쓰려졌습니다. 이 순간 나는 깨어났는데, 집사람을 깨워 꿈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는 '꿈에 피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저를 안심을 시킵디다. 전에도 큰 사건 전에 들어맞는 꿈을 몇 번 꾼 적이 있어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발포는 사령관의 육성 명령으로
18일 오전 부산 계엄사령부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군수사령관 朴贊兢 중장(뒤에 총무처 장관)은 '발포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간밤에 들이닥친 김재규는 '사태를 빨리 수습하고, 연행자들을 서둘러 선별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침만 전달했을 뿐 발포문제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계엄사령관이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경찰이 시위 군중에 밀려서 군이 나서게 된 것이니까 군까지 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朴장군은 그러나 발포를 최악의 순간까지 억제하는 지침을 휘하 부대에 내렸다.
<첫째, 사령관의 직접 명령에 의해서만 발포를 할 수 있다.
둘째, 이 직접 명령은 문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면담을 통해서 받아야 한다. 급박한 상황에서 전화로 발포 지시를 받아야 할 땐 먼저 사령관의 육성을 확인해야 한다>
정부는 계엄 선포 첫날 신속하게 병력을 투입했다. 18일 새벽에 서울로부터 1개 공수특전 여단이 날아왔고, 아침에는 포항으로부터 1개 해병연대가 부산으로 이동됐다. 부산의 현지 군 병력과 합쳐서 계엄군의 규모는 5,500명에 달했다.
19일에 다시 2개 공수여단 병력 3,600명이 추가로 투입되었다. 약 9,100명으로 불어난 군 병력에다가 약 1,800명의 경찰 병력을 더해 총 1만 900명의 계엄군이 편성되었다. 이들 중 1,500명 가량은 휴교에 들어간 10개 대학에 배치되었다. 부산 시청, 방송국 등 주요 공공건물 26개소에서 약 6000 명이 경비에 임했고, 나머지 3,400명은 기동 부대로서 시내를 순찰하는 등의 임무를 받았다.
朴장군은 계엄군에게 실탄을 지급하지 않도록 했다. 최루탄도 소·중대장에게만 주었다. 데모대는 개머리판으로 진압토록 했다. 1개 소대에 경찰관 1∼2명을 배치시켰다. 현지 사정에 밝은 경찰관이 데모 군중 속에서 불량배를 지적해주면 그들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朴장군은 또 이번 데모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여론조사를 실시하도록 합동수사단에 명령했다.
지게꾼에서 대학교수까지 각계각층의 여론을 정확히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며칠 뒤 집계 분석된 여론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부산 시위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 침체에 의한 서민·상인층의 불만으로 나타났다. 다음이 金泳三 의원 제명 뒤 야당 의원들이 낸 의원직 사퇴서에 대해서 여당측이 선별수리한다는 보도였다. 석유 파동에 의한 경기침체와 金泳三 제명이 2대 요인이었다는 얘기다.
18일 오전 10시 부산대학교
간밤에 부산에 온 金載圭는 부산대학교에 나타났다. 본관 현관에서 박기채 총장이 그를 맞았다. 金載圭는 의례적인 말투로 '학생들은 어떻습니까?'고 물었다. 朴총장이 총장실로 안내하려니까 金부장은 '사실은 우리 부대가 여기 주둔하게 돼서 한번 찾아보고 싶어 왔다'면서 '수고하십시오'라고 말하곤 군부대의 지휘부가 들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金부장은 침착했고 잔말이 통 없었다.
휴강령이 마산사태 불러
18일 마산 경남대학교. 점심 때 도서관 앞 잔디밭에선 이야기꽃이 피고 있었다. 경제과 3학년엔 부산에서 통학하던 학생이 둘 있었다. 이 두 학생이 부산 데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른 대학생들은 귀를 쫑긋하여 듣고 있었다. 이날 아침 학생들은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등교했다. 학교 게시판에는 '박정희 파쇼정권 타도'라고 쓰인 격문이 붙어 있었다. 술렁대는 분위기 속에서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는데, 이때 느닷없이 교내 스피커에서
'오늘은 휴강을 실시하니 학생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 주기 바랍니다'
는 방송이 흘러 나왔다. 학생들은 웅성웅성했다.
'우리는 데모도 안 했는데…….'
학생들은 납득할 수 없는 휴강령에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부산데모가 경찰의 개입으로 확대된 것과 꼭 같이 마산 데모에 기름을 부은 것을 이 휴강 조처였다.
귀가하는 학생들은 저절로 길목인 도서관 앞으로 모여들었다. 군중이 되면 용기도 전염된다. 누가 나서주기를 바라는 분위기가 됐다. 말하자면 인화물질에 기름은 끼얹어졌는데 성냥을 그어댈 사람이 아직 안 나타난 상황이었다.
부산이나 마산사태의 발단은 모두 우발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因果관계가 분명하다. 부산에서 鄭光敏이 한 역할을 마산에서 한 것이 국제개발학과 2학년 정인권(당시 22세)이었다. 두 鄭군은 울컥하는 충동적 심정으로 성냥을 그어댄 것이 아니라 오랜 고민과 결심의 결과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다.
정인권은 며칠 전부터 일곱 명의 학생들과 데모 계획을 짜놓고 있었다. 중간시험이 시작되는 10월 21일을 D데이로 잡고 있었다. 휴업이 길어지면 D데이를 지킬 수 없게 된다. 당황한 정인권은 대책을 의논하려고 동료들을 찾아 우왕좌왕하다가 스스로 결단을 내렸다. 그는 학생들 앞으로 나섰다.
'부산 학생들과 같이 싸우자.'
'3·15정신을 되살리자.'
'부모들이 피땀 흘려 공부를 시킨 것을 이럴 때 바보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한 줄 아느냐.'
정군의 일장 연설은 그 자리의 학생들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는 뇌관을 터뜨렸고, 그 다음부터는 학생과 시민의 자체 추진력에 의해 무서운 파괴력을 발휘하면서 저절로 굴러갈 것이었다. 그 뒤로는 정군이 다시 지도자로 나설 필요조차 없었다.
그 뒤의 경과는 부산과 거의 같이 진행됐다.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치며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정문 앞을 경찰이 막자 '3·15 의거탑에서 만나자' '불종거리(의거탑에서 가까움)에서 만나자'고 속삭였다. 일부는 담을 뛰어넘어, 일부는 얼마 뒤에 집으로 가는 체 정문을 통해 노동자와 시민들이 기다리는 시내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4·19는 시작됐습니다'
金載圭는 18일 오후 항공편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갔다. 金은 10·26사건의 재판과정에서 이날의 일을 이렇게 진술했다.
<부산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공하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 대의 경찰차와 수십 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부산을 다녀오면서 바로 朴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김계원, 차지철 실장이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습니다. 부산사태는 체제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民亂이라는 것과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및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라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더니 朴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더니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車실장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백만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朴대통령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절대로 말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었습니다.
朴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 그는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 더구나 10월 유신 이후 집권욕이 애국심보다 훨씬 강해져서, 심지어 국가의 안보조차도 집권욕의 아래에 두고 있던 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여러 모로 비교도 하여보았지만 朴대통령은 李박사와는 달라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필코 방어해내고 말 분입니다.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습니다……>(항소이유 보충서의 일부 발췌).
이 대목은 김재규가 자신의 범행을 설명하기 위해 두고두고 써먹은 논리의 핵이다. 김재규의 논리에는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박대통령과 차지철이 과연 그런 말을 했는가, 했다 하더라도 진실된 의도에서 한 말인가, 아니면 사석에서의 단순한 과격 발언인가. 부산과 같은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그의 판단은 과연 옳았는가. 박대통령의 인격이 권력 유지를 위해 발포를 사양하지 않을 그런 수준인가. 이런 의문들은 이 글을 통해 앞으로 검증될 것이다.
金載圭는 1979년초에 일어난 이란 혁명에 대해 연구를 시킨 적이 있었다. 일반 시민의 봉기를 제압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얘기를 평소에 자주 했다. 그는 부산사태의 현장 시찰을 하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부산에 연고가 있는 간부들을 현지로 내려보내 사태의 원인 분석을 하도록 지시했다.
계엄령에 도전하다
부산 데모의 한 가지 특징은 의외성이었다. 학생이나 정부가 예상하지도 않은 뜻밖의 사건들이 잇따라 터져 나가면서 역사적 대사건으로 이어졌다. 우연적인 것 같은 사건들은 한 줄로 꿰어져 뚜렷한 방향성을 지닌 큰 흐름을 갖게 되었다. 참여자들은 '그 순간에 저절로 그렇게 행동하게 되더라'고 얘기했다. 역사에 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민중의 무의식을 통해 역사한 것이었다. 사람들을 또 놀라게 한 것은 18일의 밤 데모였다.
정예 공수부대 군인들이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M16총을 겨눈 채 시내 요소요소를 경비하고 있는 속에서 또다시 데모가 터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날은 궂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시민들은 두 시간이나 앞당겨진 통금시간에 맞추어 귀가하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버스 및 택시 정류장이 몰려 있는 동명극장 부근 인도엔 수천명의 시민들이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 7시 55분쯤 누군가가 '야!' 하는 고함을 지르며 찻길로 나섰다. 순식간에 300명쯤 되는 시민들이 그를 따라나섰다.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그들은 '왓샤!' '왓샤!' 남포파출소 쪽으로 행진했다. 그들은 파출소에다가 돌세례를 퍼부어 유리창을 박살냈다. 그들은 시청 쪽으로 치달렸다. 시청 주변엔 200명쯤의 공수부대 병력이 배치돼 있었다. 그들은 파출소가 부서지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데모대와 공수부대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공수부대 군인들은 데모대를 향해 차렷 자세로 돌격했다. 사과탄이 데모대를 겨냥하여 날아갔다. 공수부대는 찻길로 나와 있던 데모 구경꾼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한 청년이 쓰러지자 그의 연인인 것 같은 아가씨가 '이 사람은 학생이 아니예요'라고 소리치며 그를 부둥켜안았다.
부산시위 현장에 다녀온 직후의 金載圭를 가장 가까이 에서 관찰했던 사람은 김봉태였다. 金載圭 부인의 여동생 남편으로서 의사인 김봉태씨는 퇴근 뒤엔 거의 매일 남산 기슭의 정보부장 공관으로 손윗 동서를 찾아갔다. 金載圭 부부와 저녁을 먹으면서 가끔 충고를 하기도 했다. 金씨는 이렇게 말했다.
“부산사태 시찰에서 돌아온 다음날인가, 저녁식사 때 이런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납니다. 제가 ‘民亂이라면 반란 아닙니까‘라고 되물었더니 그분은 ‘자네가 그런 말을 하나’고 하더니 ‘그렇지, 그건 민중봉기야, 민중봉기’라고 말하더군요”
이날부터 金載圭의 분위기는 싹 달라졌다고 한다. 식탁에서도 말이 없었고 굳은 표정으로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람도 피했다. 저녁식사 뒤에는 여느 때처럼 잡담도 하지 않고 바로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金載圭는 군단장 시절부터 일기를 쓰고 있었다. 일기장이 수십 권이나 됐다. 이 일기장이 남아 있었다면 그의 이즈음 심경이 밝혀질 터인데, 10·26 다음날 가족들이 그걸 태워버렸다고 한다.
金載圭는 10월 24일 당시 공화당 의원 李厚洛을 만났을 때 지나치는 말처럼 '제가 싹 해치우겠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李厚洛은 그때는 '신민당을 해치우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金載圭가 존경했던 李鍾贊 장군(당시 유정회 의원)도 이 무렵 金을 찾아가 '유정회 의원을 더 이상 못해먹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金載圭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사정하더란 것이다.
朴 대통령은 19일 오후 싱가포르 李光耀 수상의 예방을 받았다. 李 수상은 16일에 來韓했었다. 朴대통령은 李수상에게 우리 농촌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李수상은 '농민의 생활 수준이 대단히 높은 데 놀랐다'고 답했다. 대접견실에서 훈장 수여와 기념 촬영이 끝나자 두 사람은 서재로 옮겨 요담에 들어갔다. 창가에는 가을 양광이 따스하게 비치고 있었다. 이날 朴대통령은 대단히 만족해하였다. 李수상과 뜻이 통했던 것이다. 그해 6월말에 있었던 카터 대통령과의 거북한 만남과는 대조적인 대면이었다. 朴正熙, 李光耀 두 사람 다 공산주의자와 싸워가면서 아시아의 후진국을 개발도상국으로 도약시키는 데 성공한 국가 지도자인만큼 서로의 고뇌를 同病相憐의 마음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이날 저녁에 베풀어진 만찬에서 李光耀 수상은 답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의 성공과 경제 번영은 대한민국 국민과 그 지도자들의 자질이 어떠한가를 가장 잘 나타내는 징표이며 한국이 공업·농업 분야에서 이룩한 발전은 다양하고 뚜렷하다. 이와 같은 발전은 첫째, 능력 있고 추진력이 강한 국민과 둘째, 확고한 지도력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지도자들은 그들의 관심과 정력을 대중매체로부터 각광을 받고 여론조사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 데 소모하고, 다른 지도자들은 일에 모든 정력을 집중하고 자신들의 평가를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 朴대통령 각하가 바로 눈앞의 현실에 집착하는 분이였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 밤에도 마산시내에선 격렬한 폭동이 이틀째 계속됐다. 朴대통령은 이 위기를 회피하지 않았다. 6·3사태, 1·21사태, 3선개헌,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신 선포, 김대중 납치사건, 1·2차 오일쇼크, 문세광 저격 사건, 박동선 사건 등 파란만장한 위기의 산맥들을 강철같은 의지력으로 넘어온 그였다. 朴대통령은 두 번이나 직접 부산지구 계엄사령관 朴贊兢 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은 '마산은 당신의 책임 구역이 아니지만, 현지 부대장과 의논하여, 자네의 책임 지역으로 생각하고 도와주라'고 말했다. 朴장군은 부산에 내려온 공수특전사 2개 여단중 1개 여단을 마산으로 급파했다. 마산에 위수령이 발동된 것은 20일 정오였다.
마산지역 사단장 조옥식 소장은 '경남지사의 요청에 의해 국방장관의 승인을 얻어 마산시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한다'고 했다. 위수령은 그 지역 행정책임자의 요청에 의해서 내려지게 돼 있지만, 金聖柱 당시 경남지사는 병력을 요청한 사실이 없었다. 모든 실제 행동은 청와대 주변의 권력 핵심에서 이뤄졌고, 발표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朴대통령은 신속한 강경 진압책과 함께 시국수습 방안의 연구를 직접지시 했다.
20일쯤 朴 대통령은 공화당 申炯植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시국수습에 관한 당 의원들의 의견을 수집 보고하라. 발언 내용에 대한 일체의 책임은 내가 질테니 정확한 보고를 올려라'고 명령했다. 정보부뿐만 아니라 경찰, 검찰, 행정 조직, 그리고 車智澈의 사적인 정보기관까지 정권의 모든 촉각은 釜馬사태의 원인 규명과 그 대응책 수립 쪽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10월 21일은 일요일이었다. 유정회 趙一濟 의원은 金桂元 비서실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정보부에서 국내 정치담당 과장·국장·차장보를 오래 지낸 趙의원은 과거 상관인 金실장 집으로 찾아갔다. 金실장은 시국수습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유신선포 무렵에 국내 정치를 총괄했던 趙의원은 이틀 전 부산·마산을 다녀와 그 전날 太完善 유정회 의장에게 현지 실정을 보고한 적이 있었다. 趙의원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유신헌법의 정신이 지금 왜곡되고 있습니다. 당초의 헌법 정신은 대통령이 黨籍을 갖지 않고 초당적 차원에서 국정을 통괄하고, 국무총리는 야당도 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2원집정제적인 요소가 있는 헌법입니다. 그래야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지명 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朴대통령께서 공화당 총재직을 맡아 여당의 당수가 되셨습니다.
야당 입장에서 보면 정권장악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극한투쟁이 안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우리나라의 체구도 커졌으니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대통령이 공화당 총재직을 내어놓고 국방, 통일문제 등 큰 줄기만 붙들고 자질구레한 건 민주화시켜야 합니다.'
金실장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 며칠 전 대통령이 '김실장,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공화당 총재를 맡은 건 잘못된 것 같아'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10년간 대만에서 대사 생활을 하는 바람에 국내 정치정세에 어두워진 金실장은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다. 金실장은 '그런 질문을 다시 할지 모르니 건의서를 하나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날짜 내외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20일에 이른바 조국전선중앙위 긴급확대회의를 소집한 데 이어 21일에는 평양시 군중대회라는 걸 열고, 부산사태의 전국적인 확산을 겨냥하여 한국 대학생 및 시민들의 反정부 투쟁을 극렬하게 선동했다는 것이다.
22∼23일 공화당 의원회의
朴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공화당은 이틀간 무역회관 식당에서 상임위원회별로 모여 의원들의 시국수습책을 들었다. 식당 문을 닫아걸고 기자들의 출입도 막았다. 申炯植 사무총장은 '발언내용은 내가 책임진다'는 대통령의 말을 전하고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오랜만에 언론자유를 얻은 여당 의원들은 솔직한 이야기들을 쏟아놓았다.
'정보부장을 바꾸라'
'청와대 비서실을 개편해야 한다'
'후계자를 빨리 부상시켜야 한다'는 이야기에 이어 '각하께서 한번 쉬시는 게 좋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申총장은 이 발언들은 첨삭하지 않고 충실히 기록하여 두툼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청와대로 이 보고서를 가져가기 직전인 24일 대통령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각하께서 그 보고를 안 듣겠다고 하십니다.'
申炯植은 맥이 탁 풀렸다. 그는 '그때 안 듣겠다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귀를 가리는 자들의 소행이었을 것이다'고 생각했다.
白斗鎭 당시 국회의장은 이 무렵 金載圭의 직접 전화를 받았다.
'釜馬사태를 조종한 것은 공산계열인 南民戰 조직이라는 증거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金 부장의 이 통보는 부산 수사진의 보고를 그대로 전한 것으로 보인다. 金正燮 제2차장보도 10·26 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부마사태의 배후 조직을 ①남민전 ②기독교 계통 ③불평불만분자라고 진술한 것으로 미루어 '南民戰 조종' 쪽으로 수사 방향이 기울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부산의 수사진은 서울에서 내려온 황모씨를 남민전이라고 착각하여 조사를 벌이고 있었는데 이것이 과장되게 보고된 듯하다.
10월 18∼25일 사이 金載圭는 釜馬사태에 대해 매우 엇갈리는 말을 했다. 측근들이나 知人들에겐 사석에서 釜馬사태가 장기집권에 대한 염증에서 비롯됐고 배후는 없다고 말하곤 했지만 공식회의에선 상투적인 원인 분석을 보고하곤 했다.
林芳鉉 당시 청와대 대변인(뒤에 민정당 의원)은 이렇게 기억했다.
'관계자 회의에서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주모자를 첫째 신민당, 둘째 학생, 셋째 제 5열의 개입 등 세 갈래로 추정, 조사를 하고 있다고 보고하는 것을 들었다. 朴대통령을 마주보지도 못하고 아래로 시선을 비켜 던진 채 풀죽은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정보부장이 저런 애매한 보고를 해선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金致烈 법무장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안보회의에서 김재규의 보고사항 중엣 신민당이 조종했다는 내용이 분명히 들어 있었다. 나는 다른 계통으로 부산사태에 대한 정보를 받고 있었으므로 '저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다.'
金載圭는 부산사태를 현지시찰하고 돌아온 직후 정보부 간부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했다(제2차장보 金正燮 진술)
“부산에 가보니 300만 시민중 70% 이상이 유신체제를 지지하고 30% 이하가 반대하는 정도의 민심이다. 부산시가나 항만은 유신 후에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어 일부 시민이 호응했다고 해도 행정관청에서 과감한 시정만 하면 곧 회복될 것이다”
1979년 10월22일 金致烈 법무장관은 朴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밤에 청와대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장시간 釜馬사태 등 시국문제를 이야기했다. 다음날도 金致烈 장관은 두 번째의 단독 면담을 했다. 金장관은 난국을 타개하는 근본적인 대책으로서 유신헌법의 개정을 건의했다. 개헌의 골자는 유정회 제도를 없애고 統代(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를 바꾸자는 것이었다.
朴대통령은 '나도 같은 의견이다'는 태도를 보였다. 김장관은 '개헌 문제를 연구해 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첫날 면담 도중 朴대통령은 '정보부에서 몇 년 근무했지'하고 물었다. 金장관은 1970∼73년 사이 金桂元·李厚洛 부장 아래에서 차장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朴대통령의 물음에서 金장관은 대통령이 자신을 정보부장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朴대통령과 金장관의 면담 직후 권력층 주변에선 '후임 정보부장에 金致烈'이란 얘기가 돌았다. 당시 공화당 의원이었던 李厚洛은 10월24일에 같은 선거구 출신인 신민당 의원 崔炯佑를 만나 당직 사퇴를 권유하면서 그런 귀띔을 했다.
金장관은 신민당 金泳三 총재에 대한 의원직 제명 직전엔 '강경책이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면 팔레비나 소모사의 말로가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라는 일종의 '상소문'을 개인적으로 朴대통령에게 올린 적도 있었다. 그는 열흘 전의 임시 국무회의에선 부산 지역에 대한 비상계엄령 선포에도 이견을 제시했었다. 이러한 金장관에게 朴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맡기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은 정국의 근본적인 전환뿐만 아니라 유신체제의 進路의 대한 재검토를 뜻하는 것이었으리라.
朴대통령은 釜馬사태를 계기로 두달 밖에 안 남은 80년대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釜馬사태 이전부터 임방현 청와대 대변인은 1980년도 기자회견 내용의 준비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줄거리는 80년대에 우리 사회를 '자율과 개방'으로 성숙시켜나가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청와대의 정치담당 수석비서관이었던 柳赫仁씨는 생전에 나에게, “요즈음 발표되는 회고물 기사에 보면 朴대통령이 10·26직전에 자신의 거취에 관한 구상을 하고 있었고, 누가 대통령에게 물러날 것을 권했다는 증언이 나오는데, 나는 두 가지 점을 확언할 수 있다. 대통령 면전에서 그만두라고 한 사람도 없고, 대통령이 장기집권 체제 자체를 양보하려고 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玄鴻柱 국장은 10월22일 오후 2시부터 청와대에서 부마사태에 대한 종합보고를 올렸다. 朴 대통령, 金載圭 정보부장, 金桂元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내무, 국방, 법무, 문교, 문공장관 등 이 참석한 자리였다. 玄 국장은 정보부가 종합작성한 보고서의 제목을 ‘부산 마산 소요사건의 실태와 대책’이라고 붙였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학생데모가 아니라 시민 일부가 가담한 폭동에 가까운 소요였다. 시민들이 가세한 이유는 각계층별로 차이는 있으나 租稅저항, 일선 경찰관 등 행정기관의 부조리에 대한 불만, 貧富격차에 따른 위화감, 변화에 대한 기대감 등이다. 대책으로서는 민심수습을 위한 각종대책과 함께 현 정부가 안정되어 있으나 정체함이 없이 항상 쇄신하는 정부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정부 각 부처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원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항상 새로운 면모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구체적으로는 부산 마산 사건 수사결과를 빨리 발표할 것, 지방도시의 소요진압능력을 강화할 것, 관계기관의 예방정보활동을 강화할 것, 서민생활 안정대책을 세울 것 등이다>
朴 대통령은 이 보고에 대단히 만족했다. 그는 “이 보고서를 국무위원들에게 읽어주고 총리 책임하에 대책을 시행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은 또 “이번 사태는 충분히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 내무부 등 정보기관의 활동이 미흡하였다”고 지적했다. 이날 오후 5시 긴급국무회의가 소집되었다. 대통령 대신 崔圭夏 국무총리가 주재했다.
10월23일 오전 金載圭 정보부장은 부장실에서 간부들을 불러놓고 어제 청와대에서 있었던 대책회의 결과를 설명했다. 그는 “각하께서 中情은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학원내의 정보망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크게 꾸중을 하셨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金 부장은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지적사항은 그대로 전달하는 성격이었다.
10월24일 정보부 기정국장 玄鴻柱씨는 상부로부터 “내일 청와대에서 안보대책회의가 열린다. 보고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22일 보고문서를 토대로 새로운 보고서를 작성했다.
신민당 黃珞周 총무는 23일 정보부 金正燮 차장보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黃의원은 24일 오전 약속된 장소인 백남빌딩의 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金正燮 차장보의 부하가 불쑥 전화기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았다. 金載圭였다.
'아이구, 황총무님 오랜만입니다. 중대한 문제가 있으니 지금 이리로 와주십시오, 안내는 金차장보가 할겁니다.'
이렇게 해서 황낙주는 생각도 못했던 장소로 가게 됐다. 그는 백남빌딩 사무실에서 집으로 전화를 걸어 '지금 정보부로 가는데 저녁까지 안 돌아오면 金泳三 총재에게 연락하라'고 당부를 해놓았다.
黃총무를 태운 뉴 코로나가 당도한 곳은 궁정동의 정보부장 사무실이었다. 문 앞에서 낯익은 金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로 黃珞周를 안내한 김재규는 30분 동안 딴소리를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야기를 하더니 '지도자는 후퇴를 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대통령의 위대성에 대해서는 열을 내 말했다. 이윽고 釜馬사태 이야기가 나왔다.
'신문에선 양아치와 불량배가 데모했다고 하지만 실은 선량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난국을 수습 못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이걸 수습할 분은 나와 黃총무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본론이 시작됐다. 金載圭는 '난국 수습을 위해선 김영삼 총재가 당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하며, 黃총무도 원내총무직을 사퇴해주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김영삼 총재는 나와는 같은 피가 섞인 一家가 아닌가. 내가 그분이 망할 일을 하겠는가. 黃총무도 사퇴하면 경영하고 있는 진해여상의 확장을 도와주겠고 2∼3년 뒤에는 롤백할 수 있도록 밀어 주겠다'고 미끼를 던졌다.
黃총무는 김재규가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데 놀랐다. 金載圭는 계속해서 '만약 황총무가 불응하면, 감옥에 안 보낼 수가 없다. 총무에 대한 모든 비위조사는 다 돼 있다'고 위협했다. 黃총무는 '당신과 나의 의견은 하늘과 지하실만큼의 차이다. 차라리 서대문형무소로 가겠다'고 했다. 평행선만 긋는 이야기는 무려 네 시간이나 계속됐다. 釜馬사태가 진정 기미를 보이자 金載圭는 중단된 신민당 당직자 사퇴 공작을 再開했다. 그는 李厚洛 공화당 의원에게 부탁하여, 崔炯佑 의원이 당기위원장에서 사퇴하도록 설득하도록 했다. 金載圭의 의도는 黃총무 등 당직자들을 사퇴시키고 鄭運甲 代行체제를 출범시키려는 것이었다.
黃의원은 오후 4시쯤 '선약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뒤 궁정동 사무실을 나왔다. 金載圭는 문밖까지 따라 나오면서 부탁했다.
'내일 기자회견을 통해 사퇴를 발표해주세요. 일을 잘 처리하고 함께 진해의 맑은 공기나 마시러갑시다'
黃의원은 그 길로 같은 선거구의 공화당 의원 朴鐘圭를 찾아갔다. 朴의원은 黃의원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바로 청와대에 대통령 면담 신청을 했다. 오후 5시 30분쯤 崔侊洙 의전수석비서관이 '지금 바로 들어오시랍니다'라고 연락을 해왔다.
10월24일 朴正熙 대통령은 車智澈 경호실장을 오전 9시53분부터 10시55분까지 만나는 것으로 日課를 시작했다. 그 직후 金載圭 부장을 불러 32분간 보고를 받았다. 金부장은 어제 있었던 황낙주 총무와의 대화를 보고했다. 대통령은 오후 2시엔 조지 볼 전 미 국무차관의 예방을 받고 ‘한국미술5천년전’ 圖錄을 선물했다. 대통령은 오후 4시50분부터 6시까지 金桂元 비서실장, 柳赫仁 정무1수석, 申稙秀 특보, 金淇春 검사를 불러 시국대책에 대해서 논의했다. 이들은 6시부터는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6시10분에는 공화당 의원인 전 경호실장 朴鐘圭가 합류했다. 朴 의원이 집무실 옆 식당으로 들어가니 대통령과 측근들이 칵테일을 들고 있었다.
『馬山은 어땠어? 자네 집은 피해 없었나?』
朴鐘圭는 보고 들은 釜馬사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온건한 대책을 건의했다. 7시반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일어서는데 朴대통령은 『자네는 남게』라고 했다. 두 사람만 남자 朴鐘圭는 “각하, 오늘 낮에 黃락주 총무가 찾아왔습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김재규를 만났대?』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만났더라도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겠죠』
『알아. 아까 다 보고받았어』
朴鐘圭는 金泳三 의원직 제명과 선별수리론의 부당성을 험구까지 섞어가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공화당의 경직성도 비판했다. 朴대통령은 『당에서 金泳三이를 제명해야 한다길래 나도 처음엔 반대했는데 계속 제명을 주장하더니 이렇게까지 몰고 갔어』라고 했다. 두 시간쯤 이야기를 했는데 대통령은 “그렇다면 자네가 나서서 일단 金泳三과 의견을 나누어 보게”라고 했다.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25일 오후 포고문 제2호를 발표, 통금시간을 종전대로 환원한다고 발표했다. 일단 사태는 수습된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10월25일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1시30분 사이 수도경비사령부에서는 공안관계 각 시도기관장들을 소집하여 시국문제에 대한 설명회를 가졌다. 李在田 경호실 차장과 청와대 김기춘 검사가 나와서 서울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날 경우의 대비책을 설명하고 부대에선 시위 진압을 시범했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정보부의 6개 지부장들이 부장을 만나기 위하여 본부에 갔더니 김재규는 황급히 외출하면서 악수만 했다.
金載圭 정보부장은 10월25일 오전 11시20분부터 30분간 안전국장 金瑾洙씨로부터 부마사태에 대한 수사상황을 보고받았다. 金 국장은 反유신 및 총화저해 사범에 대한 수사를 맡고 있었으므로 부마사태가 터지자 부하 30명을 현지에 내려보내 수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날 그는 釜馬사태에 대한 신민당의 개입 여부에 대한 수사 상황을 보고했다. 신민당 지구당의 선전, 총무, 부위원장급들을 검거하여 조사하라는 청와대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金載圭 부장은 “청와대가 입수한 첩보라는데, 오는 29일 전국적으로 대학가에서 시위가 벌어질 것이라 하니 정보 수집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부마사태 이후 사무실에서 자고 있었던 金 국장은 이날 오후 ‘29일 시위설 첩보’를 확인하게 위해 전국의 조직을 점검했다.
金桂元 비서실장은 10.26 사건 뒤 군검찰 신문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부산사태에 대하여 차지철은 각하에게 신민당이 배후 조종한 폭동이라고 해서 선입견을 갖게 하고 중앙정보부는 조사결과 신민당이 아니고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등 불온단체가 일부 反정부학생들이 가담했다고 보고했으나 각하로부터 거절당하고 오히려 야단을 맞게 되자 김재규는 그 원인이 차지철의 농간에 의한 것이라고 눈치 채고 분노가 극도에 달한 바 있습니다'
釜馬사태는 이처럼 金載圭와 車智澈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특히 朴 대통령이 車 실장의 엉터리 정보보고에 넘어가 부산사태를 金泳三 총재의 신민당원들이 사주한 것이란 선입견을 갖게 되고, 그런 조작된 결론이 나오도록 金載圭의 정보부를 압박해간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生을 단축시키고만다.
1979년 10월25일은 목요일이었는데 맑았다. 이날 朴 대통령은 으레 그러하듯이 車智澈 경호실장을 만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9시40분부터 10시15분 사이 약35분간 車 실장은 시국 및 야당동향에 대해서 보고했다. 朴 대통령은 그 직후 朴鐘圭 공화당 의원을 집무실로 불러 23분간 대화했다.
朴鐘圭는 이날 아침 신민당 황낙주 총무와 아침을 먹으면서 전날 밤 朴대통령과 나눴던 대화내용을 알려주었다. 朴 의원은 “김영삼 총재의 태도를 빨리 알려달라”고 했다. 金총재를 만나고 나온 黃의원은 朴의원에게 『金총재도 난국수습엔 동감이다. 긴급조치 9호의 철폐와 민주화 추진은 선행돼야 한다. 야당분열공작도 중단돼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朴鐘圭는 朴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金泳三의 뜻을 전했다. 朴鐘圭는 생전에 『朴대통령께선 金총재가 제시한 조건을 거의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한 바 있다. 朴 대통령은 「단, 앞으로도 질서파괴와 폭력을 수반하는 불법행위는 없어야 한다」고 친필로 메모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朴鐘圭가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오는데 입구에 車智澈 경호실장의 보좌관이 기다리고 있다가 『실장님이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고 했다. 朴 의원은『시간이 없으니 차나 한 잔 들고가자』면서 경호실장실로 들어갔다. 車실장은 朴의원을 「실장님」이라고 부르면서 깍듯이 대했다.
『이틀 동안 각하와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어』
朴의원은 퉁명스럽게 하대하는 말을 했다.
『혹시 김재규 정보부장을 바꾸겠다는 말씀은 안하셨습니까』
朴鐘圭는 金과 車의 불화가 이 정도로 깊은가 하고 속으로 탄식했다고 한다. 박종규는 車를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그를 부하로 데리고 있을 때 그의 성품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우쭐해 하지만 소심하고 겁이 많은 것이 차지철이었다. 그래서 1974년에 후임을 천거할 때도 朴鐘圭는 吳定根을 밀어 대통령의 내락까지 받았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나중에 태도를 바꿔 車를 선택했다.
오전 11시 金溶植 주미대사가 출국인사차 대통령을 방문했다. 대통령은 金 대사를 위해서 점심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엔 金桂元 비서실장, 崔侊洙 의전수석, 柳赫仁 정무수석, 그리고 朴振煥 특별보좌관이 참석했다.
朴振煥 농촌 담당특보는 여느 때처럼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때 본관에서 그를 찾는 전화가 왔다. 朴대통령이 부른다는 것이었다. 『좀처럼 낮에 부르는 일이 없는 분인데…』하면서 朴특보는 혹시 개각을 하는데 뭘 맡으라고 하는 게 아닌가 상상했다. 朴대통령은 식당에서 측근들과 함께 스테이크를 들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朴특보에게 스테이크 한 덩어리를 건네주면서 더 먹으라고 권하곤 다른 동석자들과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朴박사 고향이 마산인데, 이번 사태를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다. 朴특보는 며칠 전 마산에 사는 친척들을 만나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민심이 떠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국민들이 새마을운동에도 옛날처럼 열을 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방관리들이 올리는 새마을 관계 보고나 통계도 과장된 것이 많습니다. 정부와 국민이 뭔가 헛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고약한 일인데』
『12월초에 장충체육관에서 열 새마을지도자대회도 박수만 요란하지 김이 빠질 것 같습니다』
朴특보의 말을 한참 듣고 있던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것 참. 부산 광복동에서 파출소에 불을 질렀는데, 옆에 있던 방티장수들이 손뼉을 쳤다는 거야. 그렇다고 그 아줌마들을 좌익이라고 할 수 있어? 평소에 그 파출소에서 노점 아주머니들을 얼마나 괴롭혔으면 그랬겠어. 역시 이것은 정당에 맡겨야 할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야』
말을 끝맺자 朴대통령은 벌떡 일어섰는데, 朴특보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의 표시 같았다. 비서관이 오더니『회의 시간이 다 됐다』고 대통령에게 알렸다.
소접견실에서 열린 안보대책회의 主題는 아흐레 전에 터졌던 釜馬사태에 관한 대책이었다. 崔圭夏 총리, 金載圭 정보부장, 具滋春 내무장관 등 안보관련 책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玄鴻柱 정보부 企政국장이 종합보고를 했다. 玄 국장의 보고 중에 사태의 원인으로서 '장기집권'을 지적하는 내용이 나오자 대통령은 '정부의 失政보다는 金泳三이의 영향이 더 크다'고 논평했다. 보고를 다 들은 朴 대통령은 이런 요지의 지시를 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정보부 내무부 등 정부기관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 사전 정보활동이 부족했고 初動대응이 잘못되어 큰 소요로 확대되었다. 일선공무원들의 對民자세가 불손, 불친절, 불성실하여 국민들의 불만이 크다. 이런 對民자세를 바로잡기 위하여 노력하라. 한국에서 데모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朴 대통령이 '데모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고 말한 것이 흥미롭다. 朴 대통령은 5.16 혁명 직후에 쓴 글이나 책에서부터 '한국인의 사대주의 근성'을 근대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조 당파싸움의 원인도 事大主義 정책에 따라 국방조차도 중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반들은 사소한 데 목숨을 거는 권력투쟁에만 전념한 결과라고 보았다. 해방후에도 이런 전통이 이어져 학생들과 정치인 및 지식인들은, 국방에 대해서는 미군이 알아서 해줄 것이니 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밀어놓고 사회혼란만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었다.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 학생 등은 안보를 자신들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끊임없이 무책임한 행동을 계속할 것이다'는 평소의 생각을 그는 죽기 하루 전에 피력한 것이다. 그는 '자주국방을 할 수 없는 나라는 진정한 독립국가라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죽기 하루 전까지도 한국인의 사대성을 개탄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근대화가 물질적으로는 성공했으나 국민정신면에서는 미완성이었음을 보여준다. 인간이든 국가이든 자신의 생존을 남에게 맡겨놓는 것은 성숙된 人格이나 國格을 갖추는 데 결정적 장애요인이 된다는 문제의식을 죽을 때까지 견지했던 것이 朴 대통령이었다.
4시13분에 회의는 끝나고 대통령은 참석자들과 함께 대접견실로 옮겨 ‘나라 잃은 사람들’이라는 20분짜리 월남패망 관련 영화를 보았다. 대통령은 4시50분부터 5시38분까지 金載圭 정보부장의 보고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알 수 없으나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공식 만남이 되었다. 대통령은 5시38분부터 6시12분까지 崔圭夏 총리의 보고를 받았다.
26일 새벽 2시 잠자리에서 朴鐘圭는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시계를 봤다. 새벽 2시였다. 수화기를 드니 朴 대통령이었다.
'자네 어제 낮에 나한테 한 말이 틀림없지? 아침에 삽교천에 가는데 돌아와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도록 하세.'
朴 대통령은 상당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10월26일 정보부 企政국장 玄鴻柱씨는 오전 11시쯤 예산관계 문서의 결재를 받기 위해서 金載圭 부장 비서실로 올라갔다. 결재를 대기하는 다른 국장들이 많았다. 비서실 직원에게 ‘결재를 받을 수 있을 때 알려달라’고 한 뒤 내려왔다. 오후 2시쯤 비서실로부터 연락이 와서 金부장에게 다섯 건의 서류 결재를 받았다. 약5분이 걸렸다. 玄 국장은 특이사항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국장들도 결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0940 車智澈 警護室長 書齋 報告次
1015
1015 朴鐘圭 國會議員 書齋 招致
1038
1100 金溶植 駐美大使 書齋 出國申告
1155
1155 午餐(秘書室長, 儀典, 政務1, 朴振煥 特補 追加)
1315
1358 安保對策會議(小接見室)
1613
1615 映畵觀覽(大接見室) “나라를 잃은 사람들”
1633
1633 崔圭夏 國務總理 複道 報告次
1635
1635 盧載鉉 國防長官 書齋 報告次
1650
1650 金載圭 中情部長 書齋 報告次
1738
1738 崔圭夏 國務總理 書齋 報告次
1812
1979년 朴대통령 업무 일지
1979년 10월 2일 火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0940 車智澈 警護室長 書齋 報告次
1020
1220 午餐(中情部長, 秘書室長)
1325
1530 배드민턴 運動(水泳場)
1725 兩室長, 儀典首席
1755 晩餐
1950
1979년 10월 3일 (水) 晴 (開天節)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1335 出邸
1979년 10월 4일 木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0940 車智澈 警護室長 書齋 報告次
1957
1045 理髮
1203
1435 三軍士官學校 體育大會 參觀(서울運動場)
1555
1555 車智澈 警護室長 書齋 招致
1645 金桂元 秘書室長
柳赫仁 政務1首席(16:30入)
1979년 10월 5일 (金) 晴 (仲秋節)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1150 中情部長, 警護室長(午餐)
1320
1430 배드민턴(작은 令愛, 韓丙起 大使 子弟 2, 朴鶴峰, 미쓰 李), 晩餐
1600
1979년 10월 6일 土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0950 金載圭 中情部長 書齋 報告次
1010 金桂元 秘書室長
柳赫仁 政務1首席
1015 先山省墓(志晩生徒 - 自動車便)
1979년 10월 7일 (日)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1100 出邸
1979년 10월 11일 木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0930 金載圭 中情部長 書齋 報告次
0945 金桂元 秘書室長
車智澈 警護室長
0955 靑瓦臺 出發(自動車便 - 큰 令愛)
1210 秋風嶺 到着, 午餐
1300
1830 駐韓外交團을 위한 리셉션. 晩餐(公演)(慶州觀光센타)
2130
慶州朝鮮호텔 1泊
1979년 10월 12일 金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1100 Golf
1420 以後 統一殿 巡視
慶州朝鮮호텔 2泊
1979년 10월 8일 月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0950 金載圭 中情部長 書齋 報告次
1025 車智澈 警護室長(10:45出)
金桂元 秘書室長
1100 朴東鎭 外務長官 書齋 歸國報告
1215 金桂元 秘書室長 書齋 報告次
1215 具滋春 內務長官 書齋 報告次
1230 金桂元 秘書室長 書齋 報告次
1400 自然保護運動(三角山 구기동 一帶)
1750 晩餐(兩室長, 政務1, 中情部長)
1979년 10월 9일 (火)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1105 出邸
1800
1979년 10월 10일 水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1023 車智澈 警護室長 書齋 報告次
1130
1315 小接見室 展示膳物 觀覽
1320
1320 車智澈 警護室長 書齋 報告次
1328
1338 理髮
1500
1640 배드민턴 運動(水泳場)
1740 附屬室職員
1979년 10월 13일 土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1015 慶州朝鮮호텔 出發(自動車便)
1200 秋風嶺 到着, 午餐
1250
1510 靑瓦臺 到着
1979년 10월 14일 (日)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1979년 10월 15일 月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0930 理髮
0948
1010 金載圭 中情部長 書齋 報告次
1055
1057 金致烈 法務長官 書齋 報告次
1125
1130 HRH 'Henri' 룩셈부르크 王世子 禮訪(修交 光化大章)
1205 隨行: Konsbruck 待從長
陪席: 總理, 秘書室長, 儀典首席, 總務處次官(敍勳時)
1205 午餐(外務長官, 商工長官. “자크” 벨지움 大使, “반덴버그” 和蘭大使) 膳物: 쟁반
1345
1345 崔圭夏 國務總理 書齋 報告次
1435
1500 J.D.Anthony 濠洲副首相 兼 通商資源長官 禮訪
1545 隨行: Scully 通商資源省 次官
陪席: 商工長官, Miller 駐韓大使, 儀典首席
1545 待機室(崔珏圭 商工長官)
1610
1979년 10월 16일 火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0940 車智澈 警護室長 書齋 報告次
1000
1002 理髮
1015
1047 靑瓦臺 出發
1100 聖水大橋 竣工行事
歸路에 機械交易展(汝矣島) 參觀
1220 歸邸
1400 金溶植 駐美大使 書齋 歸國報告
1535 金桂元 秘書室長
1755 晩餐(首席秘書官)
2020
1979년 10월 17일 水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0935 具滋春 內務長官 書齋 報告次
1038 金載圭 中情部長
金桂元 秘書室長
柳赫仁 政務1首席
高建 政務2首席
1130 車智澈 警護室長 書齋 報告次
1200
1400 李載卨 遞信長官 書齋 報告次
1420 金桂元 秘書室長 書齋 報告次
1727 車智澈 警護室長 書齋 報告次
2115 共和·維政 所屬 國會議員을 위한 晩餐(迎賓舘)
陪席: 全 國務委員
2115 書齋會議(兩 室長, 內務, 中情, 國防, 政務1, 儀典, 公報, 文公, 各軍總長)
<釜山地區 非常戒嚴宣布>
1979년 10월 18일 木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1010 車智澈 警護室長 書齋 報告次
1027 咸秉春 外交特補 書齋 歸國報告
1400 Harold 'Brown' 美國防長官 禮訪
1500 隨行: Jones 合參議長, Weisner 太平洋地區 司令官, Armacost 國家安保會議要員
陪席: 國防長官, 合參議長, 金溶植 駐美大使, 儀典首席, Gleysteen 駐韓大使,
Wickham駐韓UN軍司令官
1500 Brown 長官 單獨接見
1540
1540 金溶植 駐美大使 書齋 報告次
1552 對策會議(小接見室)
副總理, 內務, 法務, 文敎長官, 國防長官, 文公次官, 全在德 中情 1次長, 陸海空軍總長
1900 報告(兩室長, 政務1, 金淇春 法律特補補左官)
1979년 10월 19일 金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1332 盧載鉉 國防長官 書齋 報告次
1418 孫章來 合參 5局長
金桂元 秘書室長
1500 “리관유”(李光耀) 싱가폴 首相 夫妻禮訪
1647 大接見室 - 敍勳(修交, 光化大章), 記念撮影, 隨行員 紹介
書齋 - 會談(림김산 環境相, 고촉동 貿易工業相, 다냐바란 外務擔當 國務相,
위동쳉 駐韓大使, 總理, 外務長官, 李相玉 大使, 室長, 儀典首席
膳物 - 자개서류함, 紅蔘
1647 複道에서 總理報告
1650
1650 車智澈 警護室長 書齋 報告次
1725
1830 “리관유”싱가폴 首相夫妻를 위한 晩餐, 民俗公演(迎賓舘, 큰 令愛)
2140
2140 報告(兩室長, 政務1, 儀典) - 儀典首席室
1979년 10월 20일 土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1018 車智澈 警護室長 書齋 報告次
1050
1215 具滋春 內務長官 書齋 報告次
1230 盧載鉉 國防長官
金載圭 中情部長
金桂元 秘書室長
車智澈 警護室長
柳赫仁 政務1首席
1230 午餐
1330
1330 金載圭 中情部長 書齋 報告次
1405
1420 배드민턴 運動
1615
1979년 10월 21일 (日)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1215 午餐(警護室長)
1330
1330 出邸
1640
1979년 10월 22일 月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1030 O.G.'Lambsdorff' 獨逸 經濟省 長官 禮訪
1125 隨行: Steeq 經濟省 對外貿易次官補
陪席: 副總理, Leuteritz 駐韓大使(膳物: 韓國美術 5千年)
1402 對策會議(小接見室)
1530 內務, 法務, 國防, 文敎, 文公, 中情, 室長, 政務1, 政務2)
1530 崔圭夏 國務總理 小接見室 報告次
1635 金致烈 法務長官
金載圭 中頂部長 (16:28 出)
1635 車智撤 警護室長 書齋 報告次
1715 柳赫仁 政務1首席
1979년 10월 23일 火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1027 金載圭 中情部長 書齋 報告次
1050
1052 申鉉碻 副總理 書齋 報告次
1227 李熺逸 農水産長官(11:58 出) 書齋 報告次(秋穀收買價)
金桂元 秘書室長
徐錫俊 經濟1首席
1525 曺相鎬 國會議員 書齋 招致
1745 文亨泰 國會議員(15:50 入)
1750 晩餐(兩室長 追加)
1930
1979년 10월 24일 水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0953 車智澈 警護室長 書齋 報告次
1055
1115 金載圭 中情部長 書齋 招致
1147
1400 George Ball 前 美國務次官 禮訪
陪席: 儀典首席, 膳物: 韓國美術 5千年
1530
1650 申稙秀 法律特補 書齋 報告次
1800 金淇椿 法律補佐官
金桂元 秘書室長
柳赫仁 政務1首席
1800 晩餐(18:10 朴鐘圭 議員 追加)
2015
2015 朴鐘圭 國會議員 食堂 報告次
1979년 10월 25일 木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0940 車智澈 警護室長 書齋 報告次
1015
1015 朴鐘圭 國會議員 書齋 招致
1038
1100 金溶植 駐美大使 書齋 出國申告
1155
1155 午餐(秘書室長, 儀典, 政務1, 朴振煥 特補 追加)
1315
1358 安保對策會議(小接見室)
1613
1615 映畵觀覽(大接見室) “나라를 잃은 사람들”
1633
1633 崔圭夏 國務總理 複道 報告次
1635
1635 盧載鉉 國防長官 書齋 報告次
1650
1650 金載圭 中情部長 書齋 報告次
1738
1738 崔圭夏 國務總理 書齋 報告次
1812
1979년 10월 26일 金요일 일기 晴
시간 성명 직명 구분 장소 적요
0940 理髮
0953
0955 車智澈 警護室長 書齋 招致
1025
1027 靑瓦臺 出發(專用 헬機便) 隨行: 農水産長官
1100 揷橋湖 竣工行事
1210 唐津 送信所 開所行事
1245 道高호텔 到着, 午餐
1353 道高호텔 出發(專用 헬機便)
1432 歸邸
1800 出邸
1950 宮井洞 晩餐中 逝去
金瑾洙 안전국장은 합동수사본부에서 한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범행(대통령 시해) 전에는 생각지 못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첫째는 김재규의 강경일변도의 성격 및 과대망상적인 자만심에서 온 것이고, 둘째로는 중앙정보부장이라는 막강한 위치에 있으면서 자기 명령에 따라 부하나 평소에 친분관계를 유지해왔던 군부가 자기 뜻대로 움직일 것이라는 誤判을 했으며, 셋째 최근 일련의 사태와 국내정국 혼란에 대한 무능한 수습능력에 대하여 각하로부터 불신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범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보부의 李炳豪 기획판단국장은 金載圭의 범행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추측했다.
<최근에 돌았던 정보부장 해임설 등으로 인하여 김재규가 자기의 지위가 위태롭다고 생각한 것 같으며 정보부장의 막중한 위치로 보아 감히 정권을 차지할 수도 있다고 망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보부 총무국장 朱鎭均씨는 金載圭의 범행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했다.
<첫째는 김재규의 무능력으로 인한 각하의 불신임이고 둘째는 최근에 있었던 요직 개편설과 더불어 정보부장 경질설이 나돌았기 때문입니다. 후임으로는 金致烈 법무장관이나 具滋春 내무장관이 될 것이라는 말이 돌고 있어 본인이 불안하게 느꼈을 것이고, 셋째는 정권야욕에 대한 망상이라고 생각됩니다.
1. 3년 동안 재직하면서 권력의 맛을 보았으며
2. 정보부장은 사실장 정계 제2인자로 취급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 다음 자리는 대통령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특히 대통령 선출방법에 있어서는 대의원의 소집과 투표에 정보부 각지부가 작용하면 자기도 대통령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 같으며
3. 釜馬사태시 일부 시민들이 가세한 것을 보고 자신이 시해하면 시민들의 지지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4. 김재규가 부임한 후 2차장 산하 2국 군사과를 대폭 강화하여 운영하였습니다. 과장을 장군으로 하고 각군 담당관을 전에는 대위, 소령, 일반직으로 하였으나 여기에 대령 한 명씩을 추가하여 보강하고 북괴정보 해외 정보 등 각종정보를 함으로써 각군총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시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론 인해 군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으며, 특히 자신이 육군 중장 출신이므로 군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5. 사후 수습에 있어서도 중정부장이 일반 행정기관이나 수사기관에도 영향을 미쳐 무난히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김재규의 가장 중요한 정치참모로서 국내정치를 조정하는 일을 했고 10.26 사건 때 옆집에서 鄭昇和 장군을 접대했던 제2차장보 金正燮씨는 이렇게 진술했다.
<김재규는 조직적으로 목숨을 바치고 충성을 맹세할 인물이 있을 만한 위인이 되지 못합니다. 혼자서 과대망상을 그려본 것이지 그것을 입밖에 내어 세력을 규합할 만한 대담한 인물이 되지 못하므로 배후세력도 있을 수 없다고 판단됩니다. 원래 머리가 그리 명석한 편이 못되고 말이 비교적 적으나 자존심을 상했을 때 반발하는 반사작용이 강한 편이라고 보아왔습니다. 일종의 소영웅주의적인 발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玄鴻柱 기정국장은 이렇게 진술했다.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는 일이나 이제 외서 생각해보면 국내정치 상황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데다가 정보부장으로서 이를 수습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따른 업무의 중압감 때문에 엉뚱한 성격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짐작될 뿐입니다>
측근들의 눈에 비친 金載圭의 거사 직전 모습은 분명히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이었지만 그 갈등은 민주냐 독재냐의 양심상 갈등이라기보다는 無能과 책임추궁, 자존심과 열등감 따위를 둘러싼 감정적 갈등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왜 무너졌는가?
5공세력들의 진단: 측근들의 무능, 부패, 알력이 대통령을 함정에 빠뜨렸다.
趙甲濟
제5공화국의 탄생에 母胎 역할을 했던 국군보안사령부가 중심이 되어 만든 '第5共和國前史'라는 책이 있다. 10.26 사건과 12.12 사건을 아주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어 좋은 史料(사료)이기도 하다. 이 책은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부른 10.26 사건을 측근들의 갈등과 부패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유신체제가 막을 연 후 모든 권력이 대통령 1인에게 백지위임된 이후 이들 측근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커졌고, 이를 이용한 그들의 非理와 越權행위 등 폐습은 점점 深化되어갔다.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부정부패로 만연되어 있었지만, 권력의 핵심기관으로서 이런 악습의 온상은 주로 청와대 비서실, 경호실, 그리고 정보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권력기관들을 거쳐간 수뇌들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무엇보다도 朴대통령 개인에 대한 충성심과 권력의 核에 있다는 사실을 이용한 私利私慾(사리사욕)이었다. 권력이 1인에 집중된 체제 자체의 모순에 의한 부작용이었으며, 측근의 고질적 非理는 시중에 유언비어를 나돌게 하였고, 경우에 따라 비난의 화살은 朴 대통령에게 돌려지는 自繩自縛(자승자박)의 결과를 연출하기도 했다.
체제가 硬化될수록 측근들의 비리는 심화되어 가는 경향이었다. 이제는 그들의 비리가 축재 이상의 다른 방향으로까지 비화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측근들끼리의 越權행위에 의한 알력이었으며, 차지철과 김재규의 알력은 극에 달해 마침내 대통령을 시해하는 10.26 사건으로까지 몰고 갔다.
朴 대통령의 차지철에 대한 지나친 신임은 각종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방대한 조직을 바탕으로 수집, 종합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정보나 건의보다도 경호실장 차지철의 단편적이고 편견 섞인 건의를 받아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중앙정보부장이 對신민당공작을 해서 대통령께 보고하러 가면 경호실장이 미리 보고를 해서 대통령의 결심이 끝난 후가 허다했다. 이런 경우는 통상 강경한 방향으로 결심한 연후가 되어 중앙정보부장이 비교적 온건한 방향의 건의를 해도 허사가 되기 일쑤였다. 차지철은 학원 데모설 등에 관해서도 단편적인 첩보를 사실인양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왜 정보부는 이것도 모르고 있는가'라고 대통령이 정보부장을 힐책하곤 했으나 차지철이 보고한 날짜에 소요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차지철은 朴 대통령을 독재자이며, 강경하고 자비심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경호방법에 있어서도 시내 고층건물의 청와대로 향한 문의 폐쇄를 강요하여 국민과 대통령의 거리를 점점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는 死後 조사에서도 밝혀진 바와 같이 蓄財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경호실장의 본연의 임무를 넘어서 정치문제에 개입하여 헌정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점은 蓄財 이상의 非理임에 틀림 없다.
車실장은 10.26 사건 이전 한달 여 전부터 권총을 부관에게 맡기고 다님으로써 김재규가 대통령에게 총을 겨누었을 때 응사 한번 해보지 못하고 자신은 물론이고 대통령까지 不歸의 客이 되도록 했다. 한 마디로 1979년의 경호실은 밖에서 보기에는 위풍이 당당하고 화려했지만 내실을 기하지 못했다. 外華內貧이 적절한 표현일지 모른다.
1970년대말 朴 대통령 측근들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그들이 힘을 합하여 대통령을 보좌하여 어려운 사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부서장이 그 일의 해결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는가, 누가 대통령의 칭찬을 받는가 하는 삼척동자들의 놀음과 같은 충성심 경쟁 현상이었다.
10.26 사건 이후 合搜本部의 권력형 부정축재자 수사에서 밝혀진 내용들은 권력의 측근과 그 주위가 얼마나 부패했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한 마디로 장기집권은 새로운 특권층을 만들어냈고, 특권층은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임무를 도외시한 축재와 이권개입은 他부서의 업무를 침범했고, 급기야는 권력층간의 알력이 생겼다. 기관간의 알력은 국론통일을 저해하였으며 국민들의 對정부신뢰도를 저하시켜 이 땅의 불신풍조를 싹트게 했고, 갖가지 사회적 돌풍을 몰고왔다. 이런 일련의 사태는 1979년의 잇단 정치파동, 사회소요 등과 복합되어 측근들간의 알력을 더욱 가속화하여 끝내는 자기들이 모시던 대통텽을 시해할 수 있는 분위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게 준열하게 朴 정권의 말로를 진단하고 문제점을 지적했던 5공화국 세력들은 약10년간 집권하면 그 朴정권보다도 더한 부패상을 보여주었다. 역시 한국에서 권력은 부패와 손을 끊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모양이다. 5공화국을 단죄했던 소위 민주투사들마저 집권한 뒤에는 군인출신자들의 정권에 못지 않은 부패상을 보여주었다. 정치부패를 근절하려면 또 한번의 혁명이 필요한데 문제는 그 혁명의 주체세력도 부패하고 말 것이란 예감이다.
서로 '아저씨'라고 부르는 군대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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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4-09, 19: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