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개교 60주년 행사 유감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군(軍)이 얼마나 홀대받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듯 했다. "우리가 이 나라를 지키고, 우리가 이 나라를 일구어왔노라"고 자랑스럽게 외치지 못하는 군도 안스러웠지만, 의붓자식 생일날 마지 못해 축하전화 한 통화 하듯 형식적인 축전을 보내온 최고통수권자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의 행태를 보면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6.25전쟁 때 나라를 지켰던 어르신들 앞에 서니 몹시 떨립니다. 아까 기념식장에서 '이 분들이 없었으면,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하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육사의 60주년 기념행사가 너무 작게 치러지는 것 같아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어제 5월1일은 육군사관학교 개교 60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요즘 들어 환갑의 의미가 많이 퇴색했다고는 하지만, 국방의 중핵(中核)인 육군장교단의 요람 육군사관학교가 환갑을 맞는 의미 있는 날이었다. 더욱이 대한민국 육사(陸士)가 보통 학교인가?

지금까지 육사가 배출한 1만7700여명의 장교들 가운데 10% 가까운 1620여명이 6.25,월남전,대간첩작전 등에서 전사했다. 특히 6.25 때는 그때까지 배출된 장교단 5700명 가운데 1300여명이 전사했고, 30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6.25 당시 육사에 재학 중이던 생도 1,2기생들은 생도의 몸으로 전선으로 달려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 육사 졸업생들은 호국의 영웅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육사 졸업생들은 이 나라에서 5000년 찌든 가난을 몰아낸 근대화의 기수들이었다. 육사 2기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이 근대화의 횃불을 올린 이래 30년간 육사 졸업생들은 정치가,행정가,CEO로 이 나라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노동절이라고 남들이 쉬는 날, 육사 졸업생도 아닌 나는 육사 개교 60주년 기념식을 참관하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지난 60년간, 피와 땀으로 이 나라의 역사를 일구었던 육사 졸업생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환갑을 맞은 육사를 축하해 주기 위해서였다. '아마 대통령과 여야 주요 정치인들, 군 고위장성들, 전직 육사 교장들을 비롯한 퇴역 장성들로 행사장이 꽤나 붐빌 것'이라는 우려(?)가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하지만 예상 외로 육사 기념식장은 한산했다. 대통령이나 여야 정치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군(軍) 관계자로는 백선엽,김점곤,채명신,이대용 장군 등 약간의 노병들, 육사 각 기수 동문회 대표들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그 밖에는 약간의 생도 가족, 행사에 초대받은 울릉도 어린이들, 육사에 유학 중이거나 육사를 친선방문한 프랑스,독일,스페인,호주,일본,태국의 사관생도들이 눈에 띄었다.



식전(式前) 행사는 근사했다. 태권도 시범을 보인 1공수특전여단 장병들의 기예는 가히 예술이라 할 만 했고, 그들의 함성은 불암산을 삼킬 듯 했다. 고공낙하 시범을 보인 707특임대대 장병들은 자유자재로 푸른 하늘에 그림을 그리다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표 지점에 착지했다. 국방부 고전의장대 장병들이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본국검법, 18기 등을 선보일 때마다 검광(劍光)이 하늘을 갈랐다.



본 기념식이 시작됐다. 먼저 '자랑스런 육사인상' 수상이 있었다. 6.25전쟁의 영웅이자 참군인의 표상이었던 고(故) 한신 합참의장(2기), 월남전의 영웅 채명신 전 주월한국군사령관(5기), 월남 패망 당시 교민철수 작전을 지휘하다가 공산월남정권에 체포돼 5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이대용 전 주월공사(7기)가 상을 받았다. '상을 받을만한 분들이 받았다'는 생각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이어 육사 기획처장이 육사 약사(略史)를 낭독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는 육사 졸업생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치른 희생과 헌신과 봉사에 대한 자부심이 보이지 않았다. 3명의 대통령과 3명의 국무총리, 112명의 국회의원, 159명의 장-차관급이 육사에서 배출됐다는 사실, 한 세대 동안 이 나라를 육사 졸업생들이 이끌었다는 사실은 언급되지 않았다.육사 졸업생들이 6.25 등 호국전선에서 치른 희생도 '가슴 아픈 비극'이라는 표현으로 넘어갔다.

육사교장 김선홍 중장의 기념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위국헌신하는 정예장교의 육성'을 되풀이 해서 강조했다. 솔직히 통상적인 부대장 훈시와 크게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사 교장의 기념사 뒤에는 이정린 육사총동창회장의 기념사가 이어졌고, 이어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총장이 보내 온 축전이 낭독되었다. 축전들은 굳이 그 내용을 기억하고 소개할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내용들이었다.



착잡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군(軍)이 얼마나 홀대받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듯 했다. '우리가 이 나라를 지키고, 우리가 이 나라를 일구어왔노라'고 자랑스럽게 외치지 못하는 군도 안스러웠지만, 의붓자식 생일날 마지 못해 축하전화 한 통화 하듯 형식적인 축전을 보내온 최고통수권자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의 행태를 보면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혹자는 대통령이 국사(國事)에 바쁘다 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또 혹자는 육사 개교 기념식에 대통령이 참석한 전례가 없다고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통령은 5.18 행사는 해마다 지극정성으로 챙기지 않았던가? 전례 없이, 툭하면 '검사와의 대화'니 '국민과의 대화'니, '네티즌들과의 대화'니 하는 '대화 아닌 대화'판을 벌이거나,신임 사무관들이나 장-차관들, 대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나가곤 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군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역대 대통령들이 매년 참석하던 육사 졸업식은 격년으로 참석한다고 하더니, 육사 개교 60주년 행사에도 덜렁 축전 하나 보내고 말았다.



하기야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좌익분자들이 미군기지이전예정지를 불법점거해도 군(軍)은 손 하나 못쓰고, 현역 대령이 좌익분자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해도 국방부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구는 세상이니, 육사 개교기념행사가 기대에 못 미친다고 아쉬워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기념식전이 끝날 무렵,육사 교장, 원로 장성들을 비롯한 내외 귀빈들의 열병(閱兵)이 있었다. 도보 열병이었다. 아쉬웠다. 왜 차량열병이 아니었을까?

물론 병력 수가 그리 많지 않고, 행사장이 작았던 데다가, 연병장의 잔디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80세를 훨씬 넘긴 백선엽 장군, 며칠 전 수술을 받았다는 채명신 장군, 다리를 저는 이대용 장군 같은 분들이 도보 열병을 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그 분들이야 6.26전쟁을 치른 노병(老兵)들 답게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거수 경례를 하면서 생도들 앞을 걸어갔지만, 그래도 무개(無蓋) 군용지프로 모시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열병에 이어 생도들의 화려하고 위풍당당한 분열을 끝으로 기념식이 끝났다.



기념식이 끝난 후 심일 소령(육사 8기 출신 6.25전쟁 영웅)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심소령의 동상을 제작한 중년의 여성 조각가 이모씨가 인삿말을 했다.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6.25전쟁 때 나라를 지켰던 어르신들 앞에 서니 몹시 떨립니다. 아까 기념식장에서 '이 분들이 없었으면,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하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육사의 60주년 기념행사가 너무 작게 치러지는 것 같아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육사가 우리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물론, 군대가 어떤 곳인지, 전쟁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이였다. 하지만 그의 말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가슴이 짠했다. 그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었다.



그나마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은 육사 교장의 기념사에 이어 있었던 이정린 육사 총동창회장(17기, 전 국방부 차관)의 축사였다. 그의 축사에는 지난 60년간 조국과 육사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과 오늘날 조국의 현실에 대한 충정어린 우려가 녹아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지만, 이제 그런 이야기도 군 안에서 공개적으로 얘기하기는 점점 힘들어지는 세상에 후배들을 향해 '할 애기를 한' 이정린 육사총동창회장의 용기와 충정에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축사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前略)국가가 어려운 현장에 우리 육사인은 항상 그곳에 있었으며 국가번영의 현장에도 우리 육사인은 항상 그곳에 있었습니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전선이나 뙤약볕 내려쬐는 열사의 나라, 어느 곳 무슨 일이 있더라도 생명을 무릅쓰고 조국이 시키는 대로 임무를 수행해 왔습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후배들도 의당 그렇게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대한민국은 육사인의 피와 땀으로 지켜졌고 현재의 번영을 이루게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후배 사관생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과거를 돌아보고 머뭇거리거나, 혹은 우리 육사를 폄하하는 세력에 괘념할 겨를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닥쳐오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내외의 위협에 대처해야 하고 국가안보의 선봉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근간에 들어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이념적 갈등을 겪고 있으며 국가안보도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미 붕괴되어 사라졌어야 할 북한 김정일 정권은 반인륜적인 전제폭압정치를 자행하면서 핵무기를 개발하고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수많은 북한 동포들이 고통을 받고 있고,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북한정권은 김정일 수령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조금도 변함없이 대남적화전략을 추진하면서 남남갈등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통일을 논의하는 대화의 상대라기보다는 사라져야 할 집단입니다.

우리에게 통일은 그 자체보다 어떤 식으로 통일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 육사인은 이 한반도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 그리고 누구나 인권이 존중되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한이 보장되는 대한민국으로 통일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선배들이 지키고 가꾸어 놓은 이 찬란한 조국, 대한민국을 이 한반도에 확고하게 안착시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소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상과제이며, 사명이며, 자랑입니다.

우리 육사인은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현역에 있을 때나 퇴역을 하여서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겠다'는 사관생도 신조를 되뇌이면서 이 생명 다할 때까지 우리가 가꾸어온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이 한반도에 통일 조국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분투노력할 것입니다.(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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