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는 당시의 시대정신
'근대회는 당시의 '시대정신', 5.16은 ‘성공한 혁명’
<5.16혁명과 민족의 진로>
<1년 전 우리나라의 젊은 학도들은 그 꿈 많은 청춘을 바쳐, 부패와 탐욕과 수탈과 부정에 도취한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사경에서 회생시켰다.
그러나 정치생리와 정치적 행상과 사고방식에 있어서 자유당 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민주당 정부는 혁명 직후의 정치적 공백기를 기화로 지나치게 비대해진 나머지 스스로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혀 정권을 마치 전리품처럼 착각하고, 혁명과업의 수행은커녕 추잡하고 비열한 파쟁과 이권운동에 몰두하여 그 바쁘고 귀중한 시간을 부질없이 낭비해 왔음은 우리들이 바로 며칠 전까지 목격해 온 바이다.
그러는 동안 국민경제는 황폐화하고 대중의 물질생활은 더 한층 악화되고 사회적 부(富)는 소수자의 수중으로만 집중하였다. 그 결과로 절망, 사치, 퇴폐, 패배주의의 풍조가 이 강산을 풍미하고 있었으며 이를 틈타서 북한의 공산도당들은 내부적 혼란의 조성과 붕괴를 백방으로 획책하여 왔다.
절정에 달한 국정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 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군사혁명이다.
4.19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開花)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군사혁명은 정치권력이 단지 국민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 데서 그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혁명공약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무능하고 고식적인 집권당과 정치가 수행하지 못한 4.19혁명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5.16혁명의 적극적 의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는 5.16혁명은 4.19혁명의 부정이 아니라, 그의 계승, 연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냉철히 생각할 때 4.19 1년 만에 다시 정변을 보지 않으면 안 된 이 땅의 비상하고 절박한 사태에 대한 책임을 우리는 어느 한 정당이나 개인에다만 전적으로 뒤집어씌움으로써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 배후에서 또는 주변에서 사회적 혼란을 선동한 방종무쌍한 언론, 타락한 망국적 금력(金力)선거, 이미 도박장으로 화(化)한 국회, 시세에 끌려 파쟁에만 눈이 어두웠던 소위 정객들에게도 책임이 적지 않으며,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국민 각자에도 다소를 막론하고 간접적 책임이 있음을 우리들은 준렬하게 자아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5.16군사혁명으로 우리들이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자기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의 뿌리를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는 마련된 것이다. 혁명정권은 지금 법질서의 존중, 강건한 생활기풍의 확립, 불량도당의 소탕, 부정축재자의 처리, 농어촌의 고리채 정리, 국토건설 사업 등에서 괄목할 만한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수 백 년의 사회악과 퇴폐한 습성, 원시적 빈곤이 엉크러져 있는 이 어려운 조건 밑에서, 정치혁명 사회혁명 도덕혁명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정권이 치밀한 과학적 계획과 불타는 실천력을 가지고 모든 과제를 해결해 나갈 것을 간곡히 기대하는 동시에 동포들의 자각 있는 지지를 다시금 요청해 마지 않는 바이다.
불리한 지정학적 위치와 막다른 정치적 한계상황에서, 국제공산주의와 대결하면서 자유와 복지와 문화의 방향으로 국가를 재건하여야 할 우리들의 민족적 과업은 크고도 어렵다. 이제 모든 정치권력은 혁명정권에 집중되었고, 혁명정권은 민족백년의 운명을 그 쌍견에 짊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혁명정부는 우리 사회를 첩첩히 얽매고 있는 악순환의 사슬을 대담하게 끊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민정(民政) 아닌 군정(軍政)의 의미가 있는 것이요, 혁명의 가치가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일체의 권력이 혁명정권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권력이 남용되지 않도록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에 만전의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본래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 함은 하나의 정치적 법칙이다.
이러한 권력의 자기부식작용에 걸리지 않고 오늘의 청신한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시급히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최단시일 내에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 후 쾌히 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엄숙한 혁명공약을 깨끗이, 군인답게 실천하는 길 이외의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국군의 위대한 공적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사상에 영원히 빛날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군사혁명은 압정과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후진국 국민들의 길잡이요 모범으로 될 것이다>
다시 생각하는 5.16
오늘은 5월16일, 5.16군사혁명이 일어난 지 만 45주년이 되는 날이다. 아마 5.16군사혁명 당시의 상황과 군사혁명의 의미에 대해 쓴다고 할 때, 누가 쓴다고 해도 위의 글보다 더 잘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민주당 정권의 실정(失政)과 당시의 간난한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 혁명 정권에 대한 넘치는 기대와 우정어린 충고로 가득한 위의 글은 누가, 어디에 쓴 것일까?
위의 글은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思想界)> 1961년 6월호에 실린 권두언(卷頭言) <5.16혁명과 민족의 진로>이다. 위 글을 누가 썼는지는 분명치 않다. 당시 사상계에 몸담았던 분의 말씀으로는 <사상계>의 권두언은 장준하 선생이 직접 쓰거나, 신문사 논설위원 격인 몇몇 분들이 썼다고 한다.
신문이 사설과 마찬가지로, 잡지의 권두언은 현안에 대한 해당 잡지의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는 글이다. 위의 글은 5.16 혁명에 대해 당시 우리나라 지성을 대표하던 <사상계>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혹시 위의 글이 군사정권의 강압에 의해 실린 것은 아니었을까?
글에서 느껴지는 열정, 당시 <사상계>의 위상이나 장준하 선생의 성품, 그리고 한 달 후 <사상계>가 장준하 선생 명의의 <긴급을 요하는 혁명과업의 완수와 민주정치에로의 복귀>라는 글을 권두언으로 게재해 민주주의로의 조속한 복귀를 촉구했고, 다시 함석헌 선생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통해 군사정권에게 고언(苦言)을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볼 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사상계>에 근무했던 한 언론계 원로의 증언에 의하면 '1961년 5월16일 아침, <사상계> 편집실은 '아, 우리나라도 이제 이렇게 해서 근대화 혁명이 시작되는구나!'하는 느낌에 휩싸였다' 고 한다. “4.19로 소생한 민주주의가 군홧발에 짓밟혔다”든가, “일본 육사를 나온 친일파가 정권을 잡았다”는 식의 인식은 적어도 그날 <사상계> 안에 없었다는 것이다. '근대화'는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사실 <사상계>는 5.16군사혁명의 나침반이나 다름없었다. 1950년대 말 이래 <사상계>는 낫세르(이집트), 아유브 칸(파키스탄), 네윈(버마. 현재의 미얀마)의 군사혁명을 열심히 소개했다. 앞의 언론계 원로는 ''아, 우리는 언제나 이런 근대화 혁명에 들어갈 수 있을까?'하는 선망의 심정으로 그런 글들을 실었다'고 말했다.
1961년 초 <사상계>는 “한국군은 당분간 군사혁명을 일으킬 능력이 없다”는 내용의 <콜론보고서>를 소개했다. 나중에 혁명군의 주력부대가 된 해병1여단을 이끌고 혁명에 참여했던 김윤근 장군은 “사상계에 <콜론보고서>가 실리자 부하장교들이 여단장실로 찾아와 ‘<콜론보고서>가 한국군 장교들이 기개가 없다고 비웃었다’며 흥분했었다”고 회고했다.
5.16주체인 김종필, 이석제(후에 감사원장 역임)씨 등도 <사상계>에 실린 글들이 5.16주체들의 정신적 자양분이 됐다는 증언을 남겼다.
잘 알려진 것처럼 후일 한일회담, 3선 개헌 등을 거치면서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게 되고, 사상적으로도 철저한 반공민주주의에서 통일지상주의적인 쪽으로 변모한다.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의 ‘친일 전력(前歷)’을 문제 삼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하지만 적어도 5.16군사혁명 초기, 장준하 선생은 '근대화'에 관한 한, 5.16혁명주체들과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위에 소개한 <5.16혁명과 민족의 진로>가 바로 그 좋은 예이다.
위의 글에 나타난 정서는 단지 지식인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5.16 당시 공수부대 대대장으로 혁명에 참여했던 김제민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1961년 초 혁명에 가담키로 한 후 주말이면 사복을 입고 서울을 드나들며 혁명을 모의하고 사전 정찰을 했다. 어느날 아내가 말했다.
'당신, 지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모양인데, 아마 하면 국민들이 좋아할 겁니다.'
나는 '내가 혁명을 모의하고 있는 걸 들켰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이건 되는 일이구나!'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45년이 지났다. 30대 초-중반의 팔팔한 청년이었던 5.16 주체들은 이제 80대에 접어들었다. ‘혁명과업이 완수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그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것’을 다짐했던 박정희 장군은 18년간 장기집권을 했고, 혁명 주체 가운데 상당수는 초심(初心)을 잃고 부패하기도 했다. 친북용공세력들이 날뛰는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는다’던 혁명공약도 빛이 바랬다.
그래도 5.16은 기억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
파키스탄을 찾는 한국인들은 나이 지긋한 현지인들로부터 “40여년 전에는 당신네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경제개발에 대해 배워갔는데.....”라는 얘기를 듣는다고 한다. 10년 전 파키스탄의 샤리프 총리는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에게 “한국을 봐라. 한국도 고속도로를 놓고 나서 선진국이 됐다”고 외쳤다.
박정희 대통령 등 5.16주체들이 ‘군사혁명의 모범적 사례’로 선망했던 버마의 네윈 장군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고집하다가, 자원의 보고이고 아시아의 선두주자권에 속해 있었던 버마(현 미얀마)를 세계 최빈국의 하나로 추락시켰다. “장기 독재하면 누군들 경제발전 못 시키느냐”는 인간이 있는데, 그런 주장이 말짱 헛소리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가 바로 버마의 네윈이다.
청년장교들이 혁명을 일으켜 부패하고 무능한 왕정을 타도하고,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근대화의 상징인 애스완댐을 건설하면서, 한때 아랍권은 물론이고 근대화를 열망하는 모든 후진국가들의 빛이었던 이집트 - 얼마 전 그 이집트를 방문했던 노무현은 한국의 경제발전 노하우를 전수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렇듯 45년 전, 5.16주체들이 모델로 삼았던 이집트, 파키스탄, 미얀마 등이 아직도 가난과 독재에 시달리면서 한국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5.16은 ‘성공한 혁명’으로 기억될 것이다.
5.16주체들이 모델로 삼았던 이집트, 파키스탄, 미얀마 등이 아직도 가난과 독재에 시달리면서 한국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5.16은 ‘성공한 혁명’으로 기억될 것이다.
'근대회는 당시의 '시대정신', 5.16은 ‘성공한 혁명’
<5.16혁명과 민족의 진로>
<1년 전 우리나라의 젊은 학도들은 그 꿈 많은 청춘을 바쳐, 부패와 탐욕과 수탈과 부정에 도취한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사경에서 회생시켰다.
그러나 정치생리와 정치적 행상과 사고방식에 있어서 자유당 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민주당 정부는 혁명 직후의 정치적 공백기를 기화로 지나치게 비대해진 나머지 스스로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혀 정권을 마치 전리품처럼 착각하고, 혁명과업의 수행은커녕 추잡하고 비열한 파쟁과 이권운동에 몰두하여 그 바쁘고 귀중한 시간을 부질없이 낭비해 왔음은 우리들이 바로 며칠 전까지 목격해 온 바이다.
그러는 동안 국민경제는 황폐화하고 대중의 물질생활은 더 한층 악화되고 사회적 부(富)는 소수자의 수중으로만 집중하였다. 그 결과로 절망, 사치, 퇴폐, 패배주의의 풍조가 이 강산을 풍미하고 있었으며 이를 틈타서 북한의 공산도당들은 내부적 혼란의 조성과 붕괴를 백방으로 획책하여 왔다.
절정에 달한 국정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 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군사혁명이다.
4.19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開花)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군사혁명은 정치권력이 단지 국민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 데서 그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혁명공약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무능하고 고식적인 집권당과 정치가 수행하지 못한 4.19혁명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5.16혁명의 적극적 의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는 5.16혁명은 4.19혁명의 부정이 아니라, 그의 계승, 연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냉철히 생각할 때 4.19 1년 만에 다시 정변을 보지 않으면 안 된 이 땅의 비상하고 절박한 사태에 대한 책임을 우리는 어느 한 정당이나 개인에다만 전적으로 뒤집어씌움으로써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 배후에서 또는 주변에서 사회적 혼란을 선동한 방종무쌍한 언론, 타락한 망국적 금력(金力)선거, 이미 도박장으로 화(化)한 국회, 시세에 끌려 파쟁에만 눈이 어두웠던 소위 정객들에게도 책임이 적지 않으며,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국민 각자에도 다소를 막론하고 간접적 책임이 있음을 우리들은 준렬하게 자아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5.16군사혁명으로 우리들이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자기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의 뿌리를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는 마련된 것이다. 혁명정권은 지금 법질서의 존중, 강건한 생활기풍의 확립, 불량도당의 소탕, 부정축재자의 처리, 농어촌의 고리채 정리, 국토건설 사업 등에서 괄목할 만한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수 백 년의 사회악과 퇴폐한 습성, 원시적 빈곤이 엉크러져 있는 이 어려운 조건 밑에서, 정치혁명 사회혁명 도덕혁명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정권이 치밀한 과학적 계획과 불타는 실천력을 가지고 모든 과제를 해결해 나갈 것을 간곡히 기대하는 동시에 동포들의 자각 있는 지지를 다시금 요청해 마지 않는 바이다.
불리한 지정학적 위치와 막다른 정치적 한계상황에서, 국제공산주의와 대결하면서 자유와 복지와 문화의 방향으로 국가를 재건하여야 할 우리들의 민족적 과업은 크고도 어렵다. 이제 모든 정치권력은 혁명정권에 집중되었고, 혁명정권은 민족백년의 운명을 그 쌍견에 짊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혁명정부는 우리 사회를 첩첩히 얽매고 있는 악순환의 사슬을 대담하게 끊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민정(民政) 아닌 군정(軍政)의 의미가 있는 것이요, 혁명의 가치가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일체의 권력이 혁명정권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권력이 남용되지 않도록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에 만전의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본래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 함은 하나의 정치적 법칙이다.
이러한 권력의 자기부식작용에 걸리지 않고 오늘의 청신한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시급히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최단시일 내에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 후 쾌히 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엄숙한 혁명공약을 깨끗이, 군인답게 실천하는 길 이외의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국군의 위대한 공적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사상에 영원히 빛날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군사혁명은 압정과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후진국 국민들의 길잡이요 모범으로 될 것이다>
다시 생각하는 5.16
오늘은 5월16일, 5.16군사혁명이 일어난 지 만 45주년이 되는 날이다. 아마 5.16군사혁명 당시의 상황과 군사혁명의 의미에 대해 쓴다고 할 때, 누가 쓴다고 해도 위의 글보다 더 잘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민주당 정권의 실정(失政)과 당시의 간난한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 혁명 정권에 대한 넘치는 기대와 우정어린 충고로 가득한 위의 글은 누가, 어디에 쓴 것일까?
위의 글은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思想界)> 1961년 6월호에 실린 권두언(卷頭言) <5.16혁명과 민족의 진로>이다. 위 글을 누가 썼는지는 분명치 않다. 당시 사상계에 몸담았던 분의 말씀으로는 <사상계>의 권두언은 장준하 선생이 직접 쓰거나, 신문사 논설위원 격인 몇몇 분들이 썼다고 한다.
신문이 사설과 마찬가지로, 잡지의 권두언은 현안에 대한 해당 잡지의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는 글이다. 위의 글은 5.16 혁명에 대해 당시 우리나라 지성을 대표하던 <사상계>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혹시 위의 글이 군사정권의 강압에 의해 실린 것은 아니었을까?
글에서 느껴지는 열정, 당시 <사상계>의 위상이나 장준하 선생의 성품, 그리고 한 달 후 <사상계>가 장준하 선생 명의의 <긴급을 요하는 혁명과업의 완수와 민주정치에로의 복귀>라는 글을 권두언으로 게재해 민주주의로의 조속한 복귀를 촉구했고, 다시 함석헌 선생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통해 군사정권에게 고언(苦言)을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볼 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사상계>에 근무했던 한 언론계 원로의 증언에 의하면 '1961년 5월16일 아침, <사상계> 편집실은 '아, 우리나라도 이제 이렇게 해서 근대화 혁명이 시작되는구나!'하는 느낌에 휩싸였다' 고 한다. “4.19로 소생한 민주주의가 군홧발에 짓밟혔다”든가, “일본 육사를 나온 친일파가 정권을 잡았다”는 식의 인식은 적어도 그날 <사상계> 안에 없었다는 것이다. '근대화'는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사실 <사상계>는 5.16군사혁명의 나침반이나 다름없었다. 1950년대 말 이래 <사상계>는 낫세르(이집트), 아유브 칸(파키스탄), 네윈(버마. 현재의 미얀마)의 군사혁명을 열심히 소개했다. 앞의 언론계 원로는 ''아, 우리는 언제나 이런 근대화 혁명에 들어갈 수 있을까?'하는 선망의 심정으로 그런 글들을 실었다'고 말했다.
1961년 초 <사상계>는 “한국군은 당분간 군사혁명을 일으킬 능력이 없다”는 내용의 <콜론보고서>를 소개했다. 나중에 혁명군의 주력부대가 된 해병1여단을 이끌고 혁명에 참여했던 김윤근 장군은 “사상계에 <콜론보고서>가 실리자 부하장교들이 여단장실로 찾아와 ‘<콜론보고서>가 한국군 장교들이 기개가 없다고 비웃었다’며 흥분했었다”고 회고했다.
5.16주체인 김종필, 이석제(후에 감사원장 역임)씨 등도 <사상계>에 실린 글들이 5.16주체들의 정신적 자양분이 됐다는 증언을 남겼다.
잘 알려진 것처럼 후일 한일회담, 3선 개헌 등을 거치면서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게 되고, 사상적으로도 철저한 반공민주주의에서 통일지상주의적인 쪽으로 변모한다.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의 ‘친일 전력(前歷)’을 문제 삼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하지만 적어도 5.16군사혁명 초기, 장준하 선생은 '근대화'에 관한 한, 5.16혁명주체들과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위에 소개한 <5.16혁명과 민족의 진로>가 바로 그 좋은 예이다.
위의 글에 나타난 정서는 단지 지식인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5.16 당시 공수부대 대대장으로 혁명에 참여했던 김제민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1961년 초 혁명에 가담키로 한 후 주말이면 사복을 입고 서울을 드나들며 혁명을 모의하고 사전 정찰을 했다. 어느날 아내가 말했다.
'당신, 지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모양인데, 아마 하면 국민들이 좋아할 겁니다.'
나는 '내가 혁명을 모의하고 있는 걸 들켰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이건 되는 일이구나!'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45년이 지났다. 30대 초-중반의 팔팔한 청년이었던 5.16 주체들은 이제 80대에 접어들었다. ‘혁명과업이 완수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그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것’을 다짐했던 박정희 장군은 18년간 장기집권을 했고, 혁명 주체 가운데 상당수는 초심(初心)을 잃고 부패하기도 했다. 친북용공세력들이 날뛰는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는다’던 혁명공약도 빛이 바랬다.
그래도 5.16은 기억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
파키스탄을 찾는 한국인들은 나이 지긋한 현지인들로부터 “40여년 전에는 당신네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경제개발에 대해 배워갔는데.....”라는 얘기를 듣는다고 한다. 10년 전 파키스탄의 샤리프 총리는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에게 “한국을 봐라. 한국도 고속도로를 놓고 나서 선진국이 됐다”고 외쳤다.
박정희 대통령 등 5.16주체들이 ‘군사혁명의 모범적 사례’로 선망했던 버마의 네윈 장군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고집하다가, 자원의 보고이고 아시아의 선두주자권에 속해 있었던 버마(현 미얀마)를 세계 최빈국의 하나로 추락시켰다. “장기 독재하면 누군들 경제발전 못 시키느냐”는 인간이 있는데, 그런 주장이 말짱 헛소리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가 바로 버마의 네윈이다.
청년장교들이 혁명을 일으켜 부패하고 무능한 왕정을 타도하고,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근대화의 상징인 애스완댐을 건설하면서, 한때 아랍권은 물론이고 근대화를 열망하는 모든 후진국가들의 빛이었던 이집트 - 얼마 전 그 이집트를 방문했던 노무현은 한국의 경제발전 노하우를 전수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렇듯 45년 전, 5.16주체들이 모델로 삼았던 이집트, 파키스탄, 미얀마 등이 아직도 가난과 독재에 시달리면서 한국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5.16은 ‘성공한 혁명’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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