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혁명 방송한 朴鍾世 아나운서

회고담: "朴正熙 장군은 방송 직전까지 간곡하게 쿠데타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인터뷰] 영원한 현역 朴鍾世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




『숙면을 취해 좋은 목소리를 내려고 평생 아내와 한 이불을 덮고 자지 않았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경쾌한 美聲」


朴鍾世(박종세·69·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씨의 목소리는 박진감 넘치는 경쾌한 美聲(미성)이었다. 서울 강남의 한 스포츠센터에서 만난 朴회장은 통통한 볼에 군데군데 검버섯이 내려앉은 七旬(칠순) 노인이었다.

朴鍾世 아나운서를 아는 세대는 「386세대」 이상일 것이다. 「朴鍾世 아나운서」 하면 50代 중반 이상들은 「5·16 혁명 방송을 한 아나운서」로, 30代 후반 이상은 고교 야구중계나 「대한뉴스」를 떠올릴 것이다.

그는 1956년 12월 서울중앙방송(KBS)에 아나운서로 입사해 동양방송(TBC) 아나운서실장, 방송위원, 방송주간, KBS 방송위원실 주간을 역임했다.

1981년 12월부터 1994년까지 해태타이거즈 구단주를 거쳐 광고회사인 「코래드」 대표이사·부회장을 지냈고, 현재는 아시아컴 회장으로 있다.

朴鍾世 회장은 현역에서 40년간 활동한 최장수 아나운서 기록을 갖고 있다. 1981년 말 광고회사로 옮기면서 방송을 떠났지만, 1956~1996년 4월까지 장장 30년간 국방뉴스를 방송했다. 하지만 그를 세인들의 머리 속에 각인시킨 것은 5·16 새벽에 쿠데타軍의 혁명 공약을 읽어 내린 사건이었다.

―朴正熙 장군이 방송 직전까지 간곡하게 쿠데타의 당위성을 설명했다는데 무슨 얘기였습니까.

『軍이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였어요. 사범학교를 나오신 분이라 그런지 학생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학생들은 전부 판문점으로 가서 以北 아이들을 만나고… 나라가 어디로 가냐. 그래서 軍에서 일어났다」며 조리 있고 진지하게 설명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부분만은 지금도 귀에 쟁쟁해요. 한강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死線을 뚫고 온 분답지않게 차분했습니다. 당직자 중에 최고 선임인 내가 방송을 해야 하니까, 설득해서 자연스럽게 일을 맡기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 상황에서 군인들이 권총을 빼들고 읽으라고 했다면 아마 나는 자지러졌을 겁니다』


쿠데타 전날, 약국 가는 것까지 미행

朴鍾世 회장은 『5월15일부터 혁명군이 나를 미행했다』고 기억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나요.

『李錫濟 중령에게 들었어요. 5월15일에 야구방송 중계를 한 터라 피곤해서 비타민C를 사먹으려고 약국에 갔는데, 군인들이 나를 따라와 약국에서 주고받는 이야길 들으면서 숙직자가 朴鍾世라는 것을 확인했답니다』

―방송할 때 위압적인 분위기가 아니었습니까.

『엔지니어들이 오지 않아 군인들의 닦달을 받았을 때 천당과 지옥을 오갔죠. 방송 직전에 엔지니어들이 왔고, 방송할 때는 떨리지 않았고, 여느 때 방송하던 대로 했어요. 원고를 한번 죽 훑어보고, 쉼표를 찍어 가며 읽어 보는 작업을 했지요』

―회고록을 보니 KBS를 장악한 군인들이 방송 중계시스템을 전혀 몰랐더군요.

『金鍾泌씨에게 「송신소에서 전파를 차단할 수 있다」는 걸 알려 줬더니 깜짝 놀래요. 군인들을 연희송신소로 보냈는데, 신촌 못 미처에서 방송은 성공적으로 나갔습니다. 연희송신소의 엔지니어 鄭溶文(정용문)씨가 자키(콘센트)를 빼버렸다면 방송은 못 나갔을 겁니다』

―왜 혁명공약을 朴正熙 장군에게 읽으라고 했나요.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낭독하는 것보다 혁명의 주체가 직접하는 것도 방법이잖습니까』

―혁명공약을 받아서 문장을 검토해 보니까 느낌이 어땠나요.

『글의 첫머리와 끝머리를 훑어보는 게 아나운서의 버릇이에요. 첫머리는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이고 끝머리는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중장 張都暎」이잖아요. 북괴군이 아니니까 우선 마음이 놓이더군』

朴鍾世 아나운서는 앞에 놓인 신문의 기사 하나에 호흡조절용 쉼표와 악센트를 표시했다. 그러고 나서 기사를 볼펜으로 툭툭 쳐가며 읽는 시범을 보였다.


『한국 군부 쿠데타』라는 「미국의 소리」 방송이 전파 탔다

―공무원이었던 KBS 아나운서 신분으로 그 시점에서는 반란군에게 협조했는데 고민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지요. 머리의 피가 아래로 몰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날 얼마 동안 방송을 했습니까.

『사원들 출근 시각인 오전 9시까지 네 시간 가량 했습니다. 李錫濟 중령과 협의해 가면서 30분 간격으로 행진곡이나 「마음의 샘터」 등을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볼륨을 줄이면서 혁명공약을 읽었지요. 물론 그 사이에 정규 방송을 내보냈고요. 오전 7시가 되니까 「미국의 소리(VOA)」가 나와요. 「그것도 자연스럽게 내보내자」고 李중령이 얘기하길래 방송을 태워 보니까 「한국의 군부 쿠데타 운운」 하고 나왔어요. 바로 중단해 버렸지요』

朴鍾世 아나운서는 1935년 경기도 장단군 도라산리에서 태어났다. 朴敎駿(박교준)씨와 李金順(이금순)씨의 6남매 중 4남이다. 부친은 大韓帝國 度支部(탁지부)에서 관원을 지냈다. 朴鍾世는 1948년 서울로 유학, 경복중학교에 입학한다. 경복中 3학년 때 6·25 전쟁을 맞았고, 1955년 서울大 사대에 입학했다.

그는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던 서울大 방송국에서 교내 방송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朴鍾世는 1956년 黃祐謙(황우겸) 아나운서를 선임으로 하고 첫 숙직 방송을 했다. 밤 10시 50분부터 11시까지 10분간 진행되는 「내일의 방송순서」였다.

『100번도 넘게 읽고 또 읽었어요. 스튜디오에 들어가 목청을 가다듬자 방송 시작 불이 들어왔어요. 「내일의 방송순서를 예고해 드리겠습니다. 5시 아침음악, 5시30분 농사메모…」 막상 마이크를 잡으니 스스로에게 「내가 왜 이렇게 잘 하지?」하고 묻고 싶을 정도였어요. 시간까지 정확하게 맞췄어요.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HLKA」를 마치자 「삐삐삑」하고 時報가 울렸어요. 신이 나서 밖에 있는 엔지니어를 쳐다보자, 그는 두 손가락을 동그랗게 해보이며 성공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어깨를 으쓱대며 主조종실로 들어간 朴鍾世에게 엔지니어가 전화를 바꿔 주었다. 드라마 작가 이경제였다. 전화를 받은 朴鍾世에게 그는 『내일 밤 8시 30분에는 내가 쓴 방송극이 나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 이서구 선생 이름이 나온 것 같아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잘 확인해 보시죠. 내일이 며칠이고 무슨 요일인지』라고 했다.

朴鍾世는 다음날이 아니라 이틀 뒤의 방송 예고지를 들고 나와 읽었던 것이다. 방송사고였다.

스튜디오에서 고민을 거듭하다가 그는 사표를 쓰기로 결심했다.

『아나운서로 첫 방송을 끝내 흥분으로 잠을 못 이뤄야 할 판이었는데, 사표를 써서 가슴에 안고 누워 있으니 죽을 맛이었어요』

다음날 아침 朴鍾世는 尹吉九 과장에게 방송사고를 보고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尹과장은 『이봐 미스터 朴, 오늘의 방송순서인지 내일 것인지 그걸 누가 알 수 있겠어? 앞으로는 날짜 잘 보고 방송해!』 하더니 사표를 북북 찢어버렸다.

1958년과 1959년은 朴鍾世의 생애에 잊지 못할 해였다. 「朴鍾世 아나운서」 하면 떠올리게 되는 야구중계 방송과 대한뉴스 해설 두 가지를 이때 시작했기 때문이다.

『첫 야구방송 중계는 1958년 동대문에 있는 서울운동장 메인 스타디움에서 했어요. 張勳(장훈) 선수가 在日동포 고교 선수 대표로 우리 고교 대표와 경기를 하는 경기였어요. 메인 캐스터는 윤길구, 황우겸 아나운서였고, 저는 경기 시작 전 양쪽 선수 오더(order)를 소개하는 게 임무의 전부였어요. 어찌나 긴장이 되던지 가끔 꿈에 그 때 정경이 나타납니다』


대한뉴스 제작의 어려움: 10분 동안 읽을 원고가 100장

그 무렵, 공보처에서 연락이 왔다. 「대한뉴스」 해설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대한뉴스 해설은 康贊宣(강찬선) 아나운서가 해왔다. 국립영화제작소 관계자들이 새 해설자로 朴鍾世를 최종 선정했다고 한다.

『대한뉴스 해설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에요. 음악과 효과, 그리고 멘트가 한치의 오차 없이 화면에 맞게 10분 동안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9분이 넘어 거의 다 완성이 된 상황에서 오류가 발생하면 처음부터 작업을 다시 해야 합니다. 최종 OK 사인이 날 때까지는 全스태프들이 마음을 졸였어요』

―방송 시간과 읽는 분량은 얼마나 됐나요.

『10분 동안 읽을 원고가 100장 정도였어요. 그것을 화면에 맞게 글자 하나하나를 字高低(자고저)에 맞추어 읽어 내려가야 합니다. 거기에 화면에 맞도록 감정까지 넣어야 했으니까, 10분짜리 작업이 완성되면 녹초가 됐어요. 밤을 새워 녹음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죠』

朴鍾世 아나운서는 대한뉴스를 1958년 시작해 1968년 10월까지 10년간 했다. 그뒤 김승한 아나운서에게 바통을 넘겼다.

『대한뉴스를 진행한 10년은 정말 격동기였어요. 자유당 정권 말기, 4·19 의거, 張勉 정권의 혼란기, 5·16 군사혁명, 1964년의 6·3 사태, 새마을운동, 월남파병…. 이게 모두 제가 대한뉴스를 해설할 때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지금도 「그때를 아십니까」 등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내 방송이 소개되는 경우가 많아 감회에 젖어요』


「국방뉴스」 30년간 방송

朴鍾世씨는 대한뉴스 해설이 계기가 돼 나중에 국방부 홍보관리소에서 제작하는 「국방뉴스」, 「배달의 기수」 해설을 맡게 됐다. 「국방뉴스」 1966년 1월의 1호부터 1996년 4월의 1469호까지 장장 30년간 해설을 맡았다.

―30년간 한 프로를 계속했다는 건 찾아보기 힘든 기록 아닌가요.

『국방뉴스 때문에 그때만 해도 누구나 가고 싶어했던 해외 출장을 포기한 적이 있어요.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나중엔 생활의 일부로 여겨지더군요. 1991년 2월에 3주 정도 소련 오리올에서 열린 두루즈바컵 세계역도대회에 단장으로 다녀왔어요. 다른 사람이 대신 국방뉴스를 진행했더니, 국방부에 「朴鍾世가 어디 갔느냐」며 전화가 무더기로 걸려오는 소동이 벌어졌답니다』

―해설료는 좀 나왔습니까.

『1980년에 와서 한 편에 3만원을 받았습니다. 택시 값에 녹음이 끝나면 간단히 스태프들과 함께 하는 식사비로 다 썼어요. 결국 내가 돈을 내고, 시간을 내서 녹음을 한 셈이지요, 사명감 때문에 열심히 했고, 지금도 대단한 긍지를 느낍니다』


TBC 방송국 시절, 朴대통령 투표 소감 특종

1964년 12월 TBC-TV의 개국과 함께 朴鍾世에게 제2기 방송인생이 펼쳐졌다.

TV 아나운서실에는 미스 탐라 출신의 제주방송 고려진 아나운서, 동아방송의 金東鍵·尹美子(윤미자) 아나운서, 라디오 서울의 주수광·閔昌基·李章雨(이장우)·柳旭子(유욱자) 아나운서 등이 모여 있었다.

1967년 5월3일 공화당 朴正熙 후보와 신민당 尹潽善 후보가 출마한 가운데 6代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선거날 아침, 朴鍾世는 종로구 新橋洞에 있는 맹아학교로 갔다. 현직 대통령인 朴대통령 내외가 투표하는 모습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TBC, KBS, MBC 등 3개 방송사들이 중계를 위해 대형 중계차를 동원했다. 수많은 기자들이 朴대통령이 투표장에서 걸어나오는 장면을 중계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朴대통령이 뚜벅뚜벅 내 앞으로 걸어 왔어요. 朴대통령과 악수를 하면서 직업의식이 발동해 「투표하신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마이크를 대통령 입 가까이 갖다 댔어요. 朴대통령께서 차분하고 조리 있게 「한 말씀」 하셨어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기자들이 대통령 주변으로 몰려들었어요. 한쪽에서 「아이구!」 하는 비명이 들려요. 다른 방송의 기자가 朴대통령의 입에 마이크를 들이댔다가, 경호원들에게 옆구리를 얻어 맞은 거예요. 朴대통령이 육성 투표 소감을 제게 특종으로 선물한 셈이지요』


또 한번의 쿠데타 방송

1979년 12월12일, 또 한번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鄭昇和(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체포한 신군부는 全軍이 이번 사태를 지지한다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한 좌담을 마련했다. 동양방송이 주관한 이 좌담을 朴鍾世가 진행했다.

『중간 연락과 준비는 全斗煥 장군의 1사단장 당시 보좌관이었던 李忠錫(이충석) 중령이 맡았고, 준비모임은 20사단장인 朴俊炳(박준병) 소장 방에서 가졌습니다. 또 한 사람의 출연자는 林東源(임동원) 준장이었어요』

―녹화방송은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12·12 사태는 全軍이 지지하여 일어난 것이고,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었다는 것, 앞으로도 국민들은 軍을 믿고 전적으로 따라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朴俊炳, 林東源 장군은 하얀 장군 정장으로, 李중령은 푸른 영관 정장으로 출연했어요. 나도 모르게 軍과 관계된 두 번의 큰 사건에 연루가 됐어요. 국방뉴스, 배달의 기수 등 軍 관계 프로그램을 사명감을 갖고 해설했고, 나 스스로 軍을 좋아했으니, 惡緣인지 善緣인지 모르겠어요』

1980년 들어 朴鍾世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뉴스전망대, 정오뉴스, 야구 중계방송, 다큐멘터리 사회, TBC석간 등을 진행했다.

TBC의 라디오 보도 프로그램 중에서 매일 오전 8시에 방송되는 「뉴스 전망대」가 비중이 높았다. 초기에 金丞漢(김승한), 申相楚(신상초), 梁興模(양흥모), 趙庸中(조용중), 奉斗玩(봉두완)씨 등이 캐스터로 나섰다. 여러 사람이 맡다 보니 일관성이 떨어져 趙庸中, 奉斗玩, 朴鍾世가 맡게 됐다.

TBC 간판 뉴스 프로인 저녁 9시 뉴스 「TBC석간」에서 奉斗玩 위원은 기발하고 튀는 진행으로, 朴鍾世는 정통파 스타일로 聲價(성가)를 높였다.

朴鍾世는 1980년 9월3일 「방송의 날」을 맞아 방송대상을 수상했다.

朴鍾世가 감격스러워하고 있는 사이, 신군부는 새로운 언론풍토 조성이라는 명분 아래 언론기관을 통폐합했다. 1980년 11월30일 동양방송은 깃발을 내리고 KBS로 통합됐다. 동양방송 인원 중 가장 직급이 높았던 朴鍾世 아나운서는 망설였다.

『TBC 개국 축하쇼 사회를 보고, 막을 내리는 쇼의 사회를 보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더군요. KBS로 가기로 결정을 했어요. 11월30일, TBC의 마지막 특집방송에서 시청자들에게 「내일부터는 KBS에서 다시 뵙겠다」고 인사를 했어요. 그러고 나서 직원들과 술독에 빠졌어요.

李秉喆(이병철), 洪璡基(홍진기) 두 회장님이 떠나는 우리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 주면서 자그마한 선물을 하나씩 나누어 주셨습니다. 文鎭(문진)과 시계였는데, 거기에는 「그 위대한 17년, TBC는 영원하리!」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철저한 몸 관리

1981년 KBS 방송위원실 주간이었던 朴鍾世는 해태그룹 朴健培(박건배) 회장의 제의로 프로야구팀 창단과 운영을 맡게됐다.

―40년간 방송인으로 일하면서 몸 관리, 목 관리에 힘이 드셨겠어요.

『지나치지 않는 것, 過猶不及(과유불급)이지요. 아나운서들은 담배, 술을 먹지 말고 잠을 잘 자야 합니다. 지금도 후배들을 만나면 그런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난 담배는 안 피웠지만 술은 셌어요. 몇 번 혼이 난 후로 술을 입에도 안 대요.

집사람에게 미안한 것은, 잠을 못 자면 방송이 되지 않는 내 性味(성미) 때문에 시집 와서 지끔껏 한 이불에서 잠을 잔 적이 없어요. 아나운서직을 떠난 후에도 습관이 돼서 똑같아요. 난 옆에서 부스럭거리면 잠을 못 자요. 친구들이 그 사실을 알고 「어떻게 아들은 둘씩이나 났어?」해요』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말과 글의 오염이 심각합니다.

『우리말을 淳化(순화)해야 하는데 걱정이 돼요. 우리말이 부숴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日本이나 英國은 NHK나 BBC 방송 아나운서들의 발음을 모범으로 해서 일반인들이 따라하도록 교육을 합니다. 방송이 책임감을 갖고 종사자들 교육을 강화해서 고운말, 순우리말을 가급적 많이 사용해 우리 말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朴鍾世 회장은 자유롭게 갈 수는 없지만 일년에 서너 번은 고향 장단땅을 찾고 있다. 그는 앞으로 도까밭(묘목밭) 한 모퉁이의 地雷(지뢰)를 제거하고 잡초를 뽑아 내고 苗木(묘목)을 심을 계획이다. 나무를 심던 그의 先親의 뜻을 헤아리고, 도까밭에 엎드려 나무를 소중히 가꾸던 어머니를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