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가 나라를 사랑하는 한조각의 마음이 있다면 방북포기를 선언하여야 합니다
이 글은 5월17일 자유시민연대 주최로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있은 DJ 방북 관련 국민대토론회에서 명지대 북한학과 송종환 교수의 발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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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남북공동선언」 평가와 DJ의 선택
- DJ는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인하여 국가에 환란을 조성한 만큼 부끄럽게 생각하고 2000년 6월 방북 시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기록하여 후대가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 DJ가 할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송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재방북 추진으로 우리사회에서 다시 갈등 현상이 증폭되고 가운데, DJ 방북 실무대표단은 5월17일 금강산에서 북측 대표단과 이틀째 협의에서 DJ가 6월 하순 3박4일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하는데 합의를 하였습니다.
DJ의 재방북은 「6·15 남북공동선언」의 제반 문제점과 그 이후 우리 사회에 조성된 안보불감증과 우리나라의 정체성에 일대 위기를 가져온 혼란과 관련하여 검토되어져야 합니다.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일방적 지원으로 갈등 조성
2000년 6월13일부터 15일까지 남북한 정상들이 평양에서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 의의는 김일성 사후 북한 측이 거부해온 한국 당국과의 대화가 6년 만에 복원되고 그것도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정상들이 대화를 통하여 민족의 장래와 운명을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갈 것을 합의하여 한반도문제의 당사자 해결원칙을 구현하고 당국 간 대화를 제도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 선언은 남북한 간의 대화와 통일을 위한 이정표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항목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 선언 제1항과 제2항을 둘러싼 남북한 간의 중대한 해석상의 차이로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첫째, 동 선언에는 군사적 긴장완화와 한반도의 평화구축에 관한 항목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의 7개항 중 제2항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고 규정하고, 1991년 남북한 양측 총리 간에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의 제2장 제9조부터 제14조는 무력 불사용, 분쟁의 평화적 해결 및 우발적 무력충돌 방지, 불가침 경계선 및 구역 설정, 군사직통전화의 설치운영, 이를 위한 협의이행 기구 등을 합의하였으나 「6·15 남북공동선언」은 군사적 긴장완화에 관한 합의를 결여하고 있습니다.
둘째, 「6·15 남북공동선언」 제1항 자주원칙에 관하여 중대한 해석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동 선언에 명기된 자주원칙이 그 동안 북한 측이 주한 미군철수 주장의 근거로 원용해 왔던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로 표기되지 않고 한국 측이 주장해온 통일문제의 민족당사자 해결원칙을 의미하는 문구, 즉 “통일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일견 김일성의 자주통일원칙에 대한 북한 측의 중대한 수정이며 일대양보로 평가될 수 있었습니다.
6월15일 서울로 귀환 후 국무회의에서 한 김 전 대통령의 설명은 이러한 평가를 더욱 강하게 가지게 하였습니다. 그는 “과거에는 자주를 외세를 배격하는 의미로 해석되었는데 이것은 이제 그렇게 좁게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국과 잘 지내며 우리 문제를 남북이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는 의미라고 하면서 자주원칙과 국제협력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김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소련 붕괴 후 NATO가 그대로 남아 유럽의 안정을 이루듯 한반도 긴장완화, 동북아 세력균형을 위해서도 미군주둔은 필요하다”는 요지로 설득하자 김 위원장은 “휴전선의 비상사태 때 주한미군이 조정자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답변하였다고 덧붙여 설명하였습니다. 또 다른 한국 정부 관계자는 더 나아가 동 선언의 제1항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공동선언은 북한 측이 미군의 존재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 측은 동 선언을 발표한 바로 다음 날부터 평양방송을 통하여 주한미군 철수를 계속 주장하고 김정일 위원장은 러시아 방문에 앞서 2001년 7월24일 이타르타스 통신과 가진 서면 인터뷰에서 “미국이 우리나라의 절반 땅을 무력으로 강점하고 있다”고 답변하고 동년 8월4일 러시아 푸틴대통령과 합의한 「북·러 모스크바 선언」의 제7항에서 “주한미군 철수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보장에서 미룰 수 없는 초미의 문제”라는 입장을 발표하였습니다.
심지어 2002년 10월 북한 측의 우라늄 농축 발언으로 미·북한간 긴장이 조성된 제2의 북한 핵 위기 이후 북한 측은 주한미군철수 주장을 넘어 남한이 북한과 힘을 합쳐 미국에 대항하여야 한다는 ‘북한식 민족공조론’으로 발전시켜 주한미군철수를 거듭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한미군철수가 한반도 공산화 통일을 위한 북한의 대남전략의 첫 번째 핵심이고 또 한국 측은 군사안보측면에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이 구현되기 전에는 현실적으로 용납할 수 없으므로 북한이 제1항을 주한미군 철수로 해석하는 한 제1항은 공문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합의한 동 선언 제2항에 대한 남북한 간의 해석 차이도 심대합니다.
2000년 10월9일 김 대통령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영수회담에서 “연방제는 외교, 군사권을 중앙정부에 일임하는 것인데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북한 측이 연방제를 포기한 것으로 본다”고 말하고, 당시 통일부장관도 11월6일 통일부에 대한 국정감사장에서의 야당의원 질의에 대하여 “북한 스스로 연방제가 실효성이 없다고 보고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고 답변하였습니다.
그러나 2000년 10월 6일 북한의 주요 요인들이 참석한 김일성의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방안 제시 20돌 기념 평양시 보고회’에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 안경호의 보고 내용을 보면 북한이 연방제를 사실상 포기하였다는 심증을 주는 부분은 전무합니다. 그는 김일성의 “뜻이고 유훈인 련방국가 창립방안을 기어이 실현해 나갈 굳은 결의를 다진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동년 10월9일 김일성의 ‘고려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제시 20주년’을 기념하여 「로동신문」에 실은 글에서 북한 측은 ‘련방제 통일방안은 가장 정당하고 현실적인 통일방도’임을 강조하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연방제 통일로 가기 위한 과도적 조치임을 밝혔습니다. 북한측은 김 전 대통령이 평양에 와서 연방제를 합의해주고 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재야시절에 제시한 연합제(남북연합→남북연방제→완전통일)와 와 김일성이 1991년 신년사에서 제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완전통일을 이루기 전까지의 과도적 형태라는 점과 2국가, 2체제, 2지역자치정부를 인정하고 지역자치정부에 외교권과 국방권을 위임하는 형식상 공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조선해방론’에서 고안된 북한 연방제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하의 1국가 1체제를 추구하는 김 전 대통령의 제2단계 연방제 간에는 어느 쪽도 자기 안을 포기할 수 없는 근본적 입장 차이가 있어 처음부터 제2항은 합의할 수도 없고 또 합의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의하였으므로 이행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특히 대다수 한국 국민들은 아래 이유로 소련 연방의 공산화를 위하여 1920년 대 초 레닌이 제시한 과도적 형태의 연방제를 추종한 북한의 ‘낮은 단계 연방제’ 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한국의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와 사적 소유에 기초하는 자본주의를 구현하는 단일국가를 지향하므로 공산당 일당독재의 인민민주주의 체제와의 연방 구성 합의는 헌법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위헌입니다.
둘째, 신뢰구축 과정 없이, 민족동질성이 전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상회담과 정치적 결단으로 국가권력을 안배하여 통합을 하였던 남북예멘이 4년 만에 내전에 돌입한 것처럼 사회, 경제, 문화 분야에서의 민족통합 없이 국가연합 같은 것을 먼저 실시해보는 것은 내전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셋째, 지금까지 연방제를 실시하여 성공한 나라들의 사례를 보면,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州)의 정부들은 모두 동일한 정치 이데올로기와 하나의 경제 제도이며 서로 공존과 공영을 추구하기 때문에 남한에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인민정권’이 들어서거나 북한에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지 않는 한 연방제는 구성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2~30년 간 남북한이 국가연합 형태로 지내면 연방제로 갈 수 있다는 DJ의 주장은 이론적으로 무식의 소치이거나 북한이 남한의 체제를 전복하여 공산화 통일을 추구하는 대남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일 뿐이며 자칫 잘못하면 공산화 연방제를 초래할 위험이 있습니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이상과 같이 해석을 달리 하고 서로의 체제상 이행할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적 문제 이외에 지적되어져야 하는 것은 2003년 6월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이 동 정상회담 성사를 위하여 김대중 정부의 인지 하에 정상회담 개최를 위하여 현금 4억5000만 달러와 평양체육관 건설 자재, 트럭 등 5000만 달러를 비밀리에 제공한 것을 밝힘으로써 그동안 김대중 정부 측이 강력히 부정해온 「6·15 남북공동선언」의 태생에 대한 의혹이 확인된 것입니다.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북측 주장과 태도에 대한 DJ의 동향
DJ는 북측과 이행할 수도 없는 합의를 한 후 그럴듯하게 국민을 설득하고 다음 세 가지 가정 하에 대북포용정책을 추진하였고 노무현 정부는 이를 계승하였습니다.
(1) 북한이 군사적 도발을 하더라도 먼저 북한을 따뜻하게 포용하면서 교류·협력을 활성화하면 남북한 관계를 정상화시키고 한반도에서 냉전구조를 해체시켜 사실상의 통일을 실현할 수 있다.
(2) 북한지도자 김정일이 판단력과 지도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개방적이며 실용적인 인물인 동시에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신사적이며 예의바르며 유머 감각이 있는 지도자로 매우 긍정적인 인물이다.
(3) 대북포용정책이 단기적으로는 북한 정권의 위기 해소에 도움을 주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북한체제를 변화시켜 한국의 체제와 이념 속에 통합시킬 수 있다.
대북포용정책에 입각하여 DJ를 비롯하여 정부 인사들은 「6·15 남북공동선언」의 1~2항에 대한 북한 측의 일방적 해석과 주장에 대하여 강력히 반박을 하지 않고 교류·협력을 증가시키면서 경제적 지원을 확대하고 북한 측의 각종 도발과 합의사항 불이행을 문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 측에 의한 동해 잠수정 침투사건(1998년 6월22일), 대포동미사일 발사 시험(1998년 8월31일), 두 차례의 서해교전(1999년 6월15일과 2002년 6월29일), 「6·15 남북공동선언」이후 북한 상선의 영해침범, 핵개발 의혹 증폭 등 도발행위와 김정일 답방 등 합의사항 불이행에도 불구하고 남남갈등을 야기하면서도 시종일관 화해·협력정책을 견지해왔습니다. 서해 교전에서 북한 측의 공격으로 수많은 우리 장병들이 죽고 다치고 하였지만 동해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금강산관광을 가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DJ는 2000년 6월18일 LA Times에 기고한 글에서 “남북정상회담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더 이상 한반도에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북한이 더 이상 무력통일을 기도하지 않을 것이며 남한도 북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국민을 안심시켰습니다.
북한 측이 「6·15 남북공동선언」을 그들 방식대로 해석하고 DJ 정부와 이를 계승한 현 정부가 북측 주장을 반박하지 않고 자주와 동맹을 대립 개념으로 보는 사이에 친북반미세력들은 맥아더 동상 철거, 최근 평택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한미군기지 이전반대투쟁에서 보듯이 백주대로에서 반미친북활동을 떼를 지어 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공권력이 흔들리고 있고 국가위기의 순간입니다.
DJ가 해야 할 선택
자신이 설명한 것과 달리 북한이 해석을 하고 또 실제로 이행될 수도 없는 합의를 함에 따라 합의사항이 무효가 되고 그로 인하여 나라의 정체성과 체제안보에 위기상황을 초래하였다면 그 합의를 한 당사자가 할 일은 매우 자명합니다.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에서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구하는데 이순신 장군과 함께 큰 공을 세웠지만 “나같이 모자라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중책을 맡아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 잡지 못하고 기울어지는 형편을 붙들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지난 날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둘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에 환란이 없도록 삼간다고 하면서 징비록을 저술하였습니다.
모름지기 정치인들은 서애가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이 있는데도 황송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임진왜란에서 경험한 일들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하기 위하여 책을 쓴 것을 귀감삼아야 합니다. 공은커녕 국가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한 DJ가 할 일은 부끄러워하면서 조용히 2000년 6월 평양방문 시에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기록하여 다시는 후대가 실수를 재발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6월 13일 순안공항에서 평양 시내까지 가는 사이에 DJ와 김정일 위원장이 단둘이 나눈 이야기도 당연히 포함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DJ는 지난 해 12월15일 「월간 중앙」과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방북 시 미국에 대한 대응, 일본 문제 해결, 6자회담 상설화 문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 비판에 대한 대응, 21세기 한민족의 위상과 목표를 정하기 위한 전제로서 남북의 평화적 협력 방안과 평화적 통일방안 등 5가지가 북측과 논의할 구체적 사항이라고 밝혔습니다.
현직 대통령으로 가서 합의한 것도 이행되지 않는 처지에 DJ는 이번 6월 방북 시 이와 같이 또 다른 이슈를 논의하겠다고 합니다. 북한과 몇 번 대화를 나누어 보면 북한이 남한과 공존·공영하려 하지 않고 그들의 노동당 규약에 적시한대로 남한 내 공산인민정권 수립이라는 당면목적을 거쳐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현직 대통령일 당시에도 성과가 없었는데, 이번에 간다면 그것은 정상간 대화의 제도화에 좋지 않은 전례를 남기고 북측의 통일전선전술에 이용당할 뿐입니다.
DJ가 「6·15 남북공동선언」이후 일어난 일을 황송하고 부끄럽게 생각하고 또 나라를 사랑하는 한조각의 마음이 있다면 방북포기를 선언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재방북한다면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2006년 6월 방북 시 김정일 위원장과 합의한 일과 관련하여 할 일이 몇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6·15 남북공동선언」제1~2항과 관련하여 자신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말하였다고 서울 귀환 후 국무회의에서 설명한 것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즉, 제1항은 주한미군 철수가 아니라 주한미군이 주둔한 상황에서 통일문제를 민족당사자 간에 해결한다는 원칙임울, 제2항은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합의가 아님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둘째는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성사시키는 것입니다. 김 위원장은 절대로 세 가지, 즉 서울 답방을 하지 않고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고 북한 사회를 개방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만일 DJ가 그의 서울 답방을 실현시킬 경우 크게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셋째,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결단 촉구, 위폐·마약문제의 해결, 국군포로와 납북자와 송환 설득 등 당면 문제도 제기하여야 합니다.
넷째, DJ가 북한에 가서 최악의 상태에 있는 북한 인권을 거론하여 북한 민주화 운동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DJ가 80 평생을 살아온 일과 일치하기에 본인의 정체성에도 맞고 대통령을 지낸 국가원로가 전체 국민에게 마지막으로 봉사하는 일도 될 것이기에 권할 만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걱정하는 연방제 관련 통일방안 논의, 김일성 시신을 안치한 금수산 기념궁전 참배문제, 달러화 휴대 지원 등은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DJ는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인하여 공이 적고 국가에 환란을 조성한 만큼 부끄럽게 생각하고 2000년 6월 방북 시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기록하여 후대가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 DJ가 할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대다수 국민들이 환영하고 후대를 위하여 유익할 것입니다.
공명심에서 또는 상황을 잘 못 판단하여 다시 간다면 「6·15 남북공동선언」제1~2항에 대하여 자신이 국민에게 설명한 것을 다시 확인하여 명예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동 선언의 제 1항이 주한미군철수가 아니라 민족당사자 해결 원칙을 의미함을 확인한다면 혈맹 미국과의 관계도 회복될 것입니다. 제2항이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합의가 아님을 분명히 하면 남남갈등도 완화될 것입니다.
오늘 국민대토론에서 DJ의 방북만 성토할 것이 아니라 저는 여기모인 우리 모두가 해방 후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우리나라를 선진국의 문턱에 까지 이르게 한 우리나라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재확인하고 이를 지키고 발전시켜 선진 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하여 결의를 다질 것을 제의합니다.
필자 소개
경남 마산 출생
경복고 졸, 서울대 문리대·대학원 외교학과,
Tufts대 플레처 국제법·외교대학원 졸
한양대 정치학박사
1970년대 초 남북대화 참가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실 외무부·통일원 담당관
유엔총회 대표, 주유엔 대표부·주미대사관 정무공사
충북대 초빙교수 역임
대한상공회의소 주관 초·중·고 경제교육 강사
저서로는 『북한 협상행태의 이해』, 『북한총람: 1993-2002』,
『남북회담: 7·4에서 6·15까지』가 있으며
남북한 관계, 국제관계와 국가정보기관 개혁에 관한 논문이 다수 있다.
이 글은 5월17일 자유시민연대 주최로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있은 DJ 방북 관련 국민대토론회에서 명지대 북한학과 송종환 교수의 발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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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남북공동선언」 평가와 DJ의 선택
- DJ는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인하여 국가에 환란을 조성한 만큼 부끄럽게 생각하고 2000년 6월 방북 시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기록하여 후대가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 DJ가 할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송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재방북 추진으로 우리사회에서 다시 갈등 현상이 증폭되고 가운데, DJ 방북 실무대표단은 5월17일 금강산에서 북측 대표단과 이틀째 협의에서 DJ가 6월 하순 3박4일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하는데 합의를 하였습니다.
DJ의 재방북은 「6·15 남북공동선언」의 제반 문제점과 그 이후 우리 사회에 조성된 안보불감증과 우리나라의 정체성에 일대 위기를 가져온 혼란과 관련하여 검토되어져야 합니다.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일방적 지원으로 갈등 조성
2000년 6월13일부터 15일까지 남북한 정상들이 평양에서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 의의는 김일성 사후 북한 측이 거부해온 한국 당국과의 대화가 6년 만에 복원되고 그것도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정상들이 대화를 통하여 민족의 장래와 운명을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갈 것을 합의하여 한반도문제의 당사자 해결원칙을 구현하고 당국 간 대화를 제도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 선언은 남북한 간의 대화와 통일을 위한 이정표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항목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 선언 제1항과 제2항을 둘러싼 남북한 간의 중대한 해석상의 차이로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첫째, 동 선언에는 군사적 긴장완화와 한반도의 평화구축에 관한 항목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의 7개항 중 제2항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고 규정하고, 1991년 남북한 양측 총리 간에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의 제2장 제9조부터 제14조는 무력 불사용, 분쟁의 평화적 해결 및 우발적 무력충돌 방지, 불가침 경계선 및 구역 설정, 군사직통전화의 설치운영, 이를 위한 협의이행 기구 등을 합의하였으나 「6·15 남북공동선언」은 군사적 긴장완화에 관한 합의를 결여하고 있습니다.
둘째, 「6·15 남북공동선언」 제1항 자주원칙에 관하여 중대한 해석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동 선언에 명기된 자주원칙이 그 동안 북한 측이 주한 미군철수 주장의 근거로 원용해 왔던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로 표기되지 않고 한국 측이 주장해온 통일문제의 민족당사자 해결원칙을 의미하는 문구, 즉 “통일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일견 김일성의 자주통일원칙에 대한 북한 측의 중대한 수정이며 일대양보로 평가될 수 있었습니다.
6월15일 서울로 귀환 후 국무회의에서 한 김 전 대통령의 설명은 이러한 평가를 더욱 강하게 가지게 하였습니다. 그는 “과거에는 자주를 외세를 배격하는 의미로 해석되었는데 이것은 이제 그렇게 좁게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국과 잘 지내며 우리 문제를 남북이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는 의미라고 하면서 자주원칙과 국제협력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김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소련 붕괴 후 NATO가 그대로 남아 유럽의 안정을 이루듯 한반도 긴장완화, 동북아 세력균형을 위해서도 미군주둔은 필요하다”는 요지로 설득하자 김 위원장은 “휴전선의 비상사태 때 주한미군이 조정자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답변하였다고 덧붙여 설명하였습니다. 또 다른 한국 정부 관계자는 더 나아가 동 선언의 제1항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공동선언은 북한 측이 미군의 존재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 측은 동 선언을 발표한 바로 다음 날부터 평양방송을 통하여 주한미군 철수를 계속 주장하고 김정일 위원장은 러시아 방문에 앞서 2001년 7월24일 이타르타스 통신과 가진 서면 인터뷰에서 “미국이 우리나라의 절반 땅을 무력으로 강점하고 있다”고 답변하고 동년 8월4일 러시아 푸틴대통령과 합의한 「북·러 모스크바 선언」의 제7항에서 “주한미군 철수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보장에서 미룰 수 없는 초미의 문제”라는 입장을 발표하였습니다.
심지어 2002년 10월 북한 측의 우라늄 농축 발언으로 미·북한간 긴장이 조성된 제2의 북한 핵 위기 이후 북한 측은 주한미군철수 주장을 넘어 남한이 북한과 힘을 합쳐 미국에 대항하여야 한다는 ‘북한식 민족공조론’으로 발전시켜 주한미군철수를 거듭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한미군철수가 한반도 공산화 통일을 위한 북한의 대남전략의 첫 번째 핵심이고 또 한국 측은 군사안보측면에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이 구현되기 전에는 현실적으로 용납할 수 없으므로 북한이 제1항을 주한미군 철수로 해석하는 한 제1항은 공문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합의한 동 선언 제2항에 대한 남북한 간의 해석 차이도 심대합니다.
2000년 10월9일 김 대통령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영수회담에서 “연방제는 외교, 군사권을 중앙정부에 일임하는 것인데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북한 측이 연방제를 포기한 것으로 본다”고 말하고, 당시 통일부장관도 11월6일 통일부에 대한 국정감사장에서의 야당의원 질의에 대하여 “북한 스스로 연방제가 실효성이 없다고 보고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고 답변하였습니다.
그러나 2000년 10월 6일 북한의 주요 요인들이 참석한 김일성의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방안 제시 20돌 기념 평양시 보고회’에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 안경호의 보고 내용을 보면 북한이 연방제를 사실상 포기하였다는 심증을 주는 부분은 전무합니다. 그는 김일성의 “뜻이고 유훈인 련방국가 창립방안을 기어이 실현해 나갈 굳은 결의를 다진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동년 10월9일 김일성의 ‘고려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제시 20주년’을 기념하여 「로동신문」에 실은 글에서 북한 측은 ‘련방제 통일방안은 가장 정당하고 현실적인 통일방도’임을 강조하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연방제 통일로 가기 위한 과도적 조치임을 밝혔습니다. 북한측은 김 전 대통령이 평양에 와서 연방제를 합의해주고 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재야시절에 제시한 연합제(남북연합→남북연방제→완전통일)와 와 김일성이 1991년 신년사에서 제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완전통일을 이루기 전까지의 과도적 형태라는 점과 2국가, 2체제, 2지역자치정부를 인정하고 지역자치정부에 외교권과 국방권을 위임하는 형식상 공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조선해방론’에서 고안된 북한 연방제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하의 1국가 1체제를 추구하는 김 전 대통령의 제2단계 연방제 간에는 어느 쪽도 자기 안을 포기할 수 없는 근본적 입장 차이가 있어 처음부터 제2항은 합의할 수도 없고 또 합의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의하였으므로 이행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특히 대다수 한국 국민들은 아래 이유로 소련 연방의 공산화를 위하여 1920년 대 초 레닌이 제시한 과도적 형태의 연방제를 추종한 북한의 ‘낮은 단계 연방제’ 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한국의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와 사적 소유에 기초하는 자본주의를 구현하는 단일국가를 지향하므로 공산당 일당독재의 인민민주주의 체제와의 연방 구성 합의는 헌법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위헌입니다.
둘째, 신뢰구축 과정 없이, 민족동질성이 전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상회담과 정치적 결단으로 국가권력을 안배하여 통합을 하였던 남북예멘이 4년 만에 내전에 돌입한 것처럼 사회, 경제, 문화 분야에서의 민족통합 없이 국가연합 같은 것을 먼저 실시해보는 것은 내전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셋째, 지금까지 연방제를 실시하여 성공한 나라들의 사례를 보면,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州)의 정부들은 모두 동일한 정치 이데올로기와 하나의 경제 제도이며 서로 공존과 공영을 추구하기 때문에 남한에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인민정권’이 들어서거나 북한에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지 않는 한 연방제는 구성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2~30년 간 남북한이 국가연합 형태로 지내면 연방제로 갈 수 있다는 DJ의 주장은 이론적으로 무식의 소치이거나 북한이 남한의 체제를 전복하여 공산화 통일을 추구하는 대남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일 뿐이며 자칫 잘못하면 공산화 연방제를 초래할 위험이 있습니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이상과 같이 해석을 달리 하고 서로의 체제상 이행할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적 문제 이외에 지적되어져야 하는 것은 2003년 6월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이 동 정상회담 성사를 위하여 김대중 정부의 인지 하에 정상회담 개최를 위하여 현금 4억5000만 달러와 평양체육관 건설 자재, 트럭 등 5000만 달러를 비밀리에 제공한 것을 밝힘으로써 그동안 김대중 정부 측이 강력히 부정해온 「6·15 남북공동선언」의 태생에 대한 의혹이 확인된 것입니다.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북측 주장과 태도에 대한 DJ의 동향
DJ는 북측과 이행할 수도 없는 합의를 한 후 그럴듯하게 국민을 설득하고 다음 세 가지 가정 하에 대북포용정책을 추진하였고 노무현 정부는 이를 계승하였습니다.
(1) 북한이 군사적 도발을 하더라도 먼저 북한을 따뜻하게 포용하면서 교류·협력을 활성화하면 남북한 관계를 정상화시키고 한반도에서 냉전구조를 해체시켜 사실상의 통일을 실현할 수 있다.
(2) 북한지도자 김정일이 판단력과 지도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개방적이며 실용적인 인물인 동시에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신사적이며 예의바르며 유머 감각이 있는 지도자로 매우 긍정적인 인물이다.
(3) 대북포용정책이 단기적으로는 북한 정권의 위기 해소에 도움을 주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북한체제를 변화시켜 한국의 체제와 이념 속에 통합시킬 수 있다.
대북포용정책에 입각하여 DJ를 비롯하여 정부 인사들은 「6·15 남북공동선언」의 1~2항에 대한 북한 측의 일방적 해석과 주장에 대하여 강력히 반박을 하지 않고 교류·협력을 증가시키면서 경제적 지원을 확대하고 북한 측의 각종 도발과 합의사항 불이행을 문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 측에 의한 동해 잠수정 침투사건(1998년 6월22일), 대포동미사일 발사 시험(1998년 8월31일), 두 차례의 서해교전(1999년 6월15일과 2002년 6월29일), 「6·15 남북공동선언」이후 북한 상선의 영해침범, 핵개발 의혹 증폭 등 도발행위와 김정일 답방 등 합의사항 불이행에도 불구하고 남남갈등을 야기하면서도 시종일관 화해·협력정책을 견지해왔습니다. 서해 교전에서 북한 측의 공격으로 수많은 우리 장병들이 죽고 다치고 하였지만 동해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금강산관광을 가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DJ는 2000년 6월18일 LA Times에 기고한 글에서 “남북정상회담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더 이상 한반도에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북한이 더 이상 무력통일을 기도하지 않을 것이며 남한도 북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국민을 안심시켰습니다.
북한 측이 「6·15 남북공동선언」을 그들 방식대로 해석하고 DJ 정부와 이를 계승한 현 정부가 북측 주장을 반박하지 않고 자주와 동맹을 대립 개념으로 보는 사이에 친북반미세력들은 맥아더 동상 철거, 최근 평택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한미군기지 이전반대투쟁에서 보듯이 백주대로에서 반미친북활동을 떼를 지어 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공권력이 흔들리고 있고 국가위기의 순간입니다.
DJ가 해야 할 선택
자신이 설명한 것과 달리 북한이 해석을 하고 또 실제로 이행될 수도 없는 합의를 함에 따라 합의사항이 무효가 되고 그로 인하여 나라의 정체성과 체제안보에 위기상황을 초래하였다면 그 합의를 한 당사자가 할 일은 매우 자명합니다.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에서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구하는데 이순신 장군과 함께 큰 공을 세웠지만 “나같이 모자라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중책을 맡아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 잡지 못하고 기울어지는 형편을 붙들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지난 날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둘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에 환란이 없도록 삼간다고 하면서 징비록을 저술하였습니다.
모름지기 정치인들은 서애가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이 있는데도 황송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임진왜란에서 경험한 일들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하기 위하여 책을 쓴 것을 귀감삼아야 합니다. 공은커녕 국가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한 DJ가 할 일은 부끄러워하면서 조용히 2000년 6월 평양방문 시에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기록하여 다시는 후대가 실수를 재발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6월 13일 순안공항에서 평양 시내까지 가는 사이에 DJ와 김정일 위원장이 단둘이 나눈 이야기도 당연히 포함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DJ는 지난 해 12월15일 「월간 중앙」과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방북 시 미국에 대한 대응, 일본 문제 해결, 6자회담 상설화 문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 비판에 대한 대응, 21세기 한민족의 위상과 목표를 정하기 위한 전제로서 남북의 평화적 협력 방안과 평화적 통일방안 등 5가지가 북측과 논의할 구체적 사항이라고 밝혔습니다.
현직 대통령으로 가서 합의한 것도 이행되지 않는 처지에 DJ는 이번 6월 방북 시 이와 같이 또 다른 이슈를 논의하겠다고 합니다. 북한과 몇 번 대화를 나누어 보면 북한이 남한과 공존·공영하려 하지 않고 그들의 노동당 규약에 적시한대로 남한 내 공산인민정권 수립이라는 당면목적을 거쳐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현직 대통령일 당시에도 성과가 없었는데, 이번에 간다면 그것은 정상간 대화의 제도화에 좋지 않은 전례를 남기고 북측의 통일전선전술에 이용당할 뿐입니다.
DJ가 「6·15 남북공동선언」이후 일어난 일을 황송하고 부끄럽게 생각하고 또 나라를 사랑하는 한조각의 마음이 있다면 방북포기를 선언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재방북한다면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2006년 6월 방북 시 김정일 위원장과 합의한 일과 관련하여 할 일이 몇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6·15 남북공동선언」제1~2항과 관련하여 자신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말하였다고 서울 귀환 후 국무회의에서 설명한 것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즉, 제1항은 주한미군 철수가 아니라 주한미군이 주둔한 상황에서 통일문제를 민족당사자 간에 해결한다는 원칙임울, 제2항은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합의가 아님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둘째는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성사시키는 것입니다. 김 위원장은 절대로 세 가지, 즉 서울 답방을 하지 않고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고 북한 사회를 개방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만일 DJ가 그의 서울 답방을 실현시킬 경우 크게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셋째,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결단 촉구, 위폐·마약문제의 해결, 국군포로와 납북자와 송환 설득 등 당면 문제도 제기하여야 합니다.
넷째, DJ가 북한에 가서 최악의 상태에 있는 북한 인권을 거론하여 북한 민주화 운동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DJ가 80 평생을 살아온 일과 일치하기에 본인의 정체성에도 맞고 대통령을 지낸 국가원로가 전체 국민에게 마지막으로 봉사하는 일도 될 것이기에 권할 만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걱정하는 연방제 관련 통일방안 논의, 김일성 시신을 안치한 금수산 기념궁전 참배문제, 달러화 휴대 지원 등은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DJ는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인하여 공이 적고 국가에 환란을 조성한 만큼 부끄럽게 생각하고 2000년 6월 방북 시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기록하여 후대가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 DJ가 할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대다수 국민들이 환영하고 후대를 위하여 유익할 것입니다.
공명심에서 또는 상황을 잘 못 판단하여 다시 간다면 「6·15 남북공동선언」제1~2항에 대하여 자신이 국민에게 설명한 것을 다시 확인하여 명예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동 선언의 제 1항이 주한미군철수가 아니라 민족당사자 해결 원칙을 의미함을 확인한다면 혈맹 미국과의 관계도 회복될 것입니다. 제2항이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합의가 아님을 분명히 하면 남남갈등도 완화될 것입니다.
오늘 국민대토론에서 DJ의 방북만 성토할 것이 아니라 저는 여기모인 우리 모두가 해방 후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우리나라를 선진국의 문턱에 까지 이르게 한 우리나라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재확인하고 이를 지키고 발전시켜 선진 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하여 결의를 다질 것을 제의합니다.
필자 소개
경남 마산 출생
경복고 졸, 서울대 문리대·대학원 외교학과,
Tufts대 플레처 국제법·외교대학원 졸
한양대 정치학박사
1970년대 초 남북대화 참가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실 외무부·통일원 담당관
유엔총회 대표, 주유엔 대표부·주미대사관 정무공사
충북대 초빙교수 역임
대한상공회의소 주관 초·중·고 경제교육 강사
저서로는 『북한 협상행태의 이해』, 『북한총람: 1993-2002』,
『남북회담: 7·4에서 6·15까지』가 있으며
남북한 관계, 국제관계와 국가정보기관 개혁에 관한 논문이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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