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5월22일 타계했다. 월간조선 2003년 4월호에 실린 이종욱 사무총장의 인터뷰 기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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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5월22일 타계했다. 월간조선 2003년 4월호에 실린 이종욱 사무총장의 인터뷰 기사를 소개한다.
『사명감 같은 것 믿지 않는다. 살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것일 뿐…』
● 7차 투표까지 가서 당선
● 인류가 직면한 최대 현안은 에이즈 퇴치
● 국제사회에서 UN 사무총장과 儀典 등에서 같은 대우
●『국익 위해 국제기구에 인재들을 많이 보내야 한다』
● WHO 정기분담금을 많이 내는 나라는 미국, 일본順
● 소아마비 有病率을 全세계 인구 1만 명당 1人 이하로 낮춰
● 年예산 11억 달러, 직원 8000명, 제네바에 본부
李 鍾 郁
1945년 서울 출생. 경복高ㆍ서울大 의대 졸업. 미국 하와이大 대학원 전염병학 석사. WHO 南태평양 나병퇴치팀장ㆍ전염병 담당 국장ㆍ백신면역국장ㆍ결핵관리국장.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월간조선
『WHO가 뭐하는 뎁니까』
지난 2월 초 李鍾郁(이종욱·58) WHO (World Health Organization·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당선자(이하 사무총장)는 당시 당선자 신분이던 盧武鉉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 盧대통령은 李사무총장에게 『WHO가 뭐하는 뎁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盧대통령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에게 WHO라는 국제기구의 이름은 낯익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WHO는 보건 위생 분야에 국제적인 협력을 위해 1948년에 설립된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전문기구다. 예산과 인사에서 UN으로부터 독립적이다. 결핵, 소아마비, 에이즈 등의 질병퇴치 운동을 벌여 오고 있다. 1950, 60년대에는 우리나라도 WHO의 지원을 받아 결핵퇴치 사업 등을 벌였다.
질병퇴치 운동과 함께 다이옥신의 1일 섭취 허용치 등 건강 관련 각종 기준치를 정하는 곳이 WHO다. 한마디로 全세계 질병퇴치 총사령부다.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고 세계 192개국에 대표부를 두고 있다. 2년 주기인 예산은 22억 달러다. 질병 퇴치를 위해 연간 11억 달러의 예산을 집행하고 있는 것이다. 직원은 全세계에 걸쳐 8000명이 일하고 있다.
선거로 선출되는 WHO 사무총장은 국제사회에서 UN 사무총장과 儀典(의전) 등에서 같은 대우를 받는다. 全세계 질병퇴치 총사령관이 WHO 사무총장이다. 국제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 직책이기 때문에 각국의 수상을 지냈거나 장관을 지낸 인물들이 그 자리에 도전한다. 현재의 브룬틀란트 사무총장도 노르웨이 총리를 역임했다.
지난 1월28일 WHO 사무총장에 한국인인 李鍾郁 WHO 결핵관리국장이 당선되었을 때 우리 언론이 그 사실을 대서특필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게다가 그의 당선은 「한국인 최초 선출직 국제기구 首長 탄생」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낯설다. 그는 1983년에 WHO에 들어간 후 줄곧 해외에서 생활을 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에게는 낯선 이름이었지만 이번 사무총장 선거에서 경쟁한 5명의 후보 대부분은 前職(전직) 수상과 장관을 지낸 사람들이었다. 마구엘 모쿰비 모잠비크 수상, 훌리오 프랭크 前 멕시코 보건부 장관, 살람 이집트 보건 장관 등이 경쟁자들이었다.
국빈 자격으로 대통령 취임식 참석
李鍾郁 사무총장을 처음 만난 날은 대통령 취임식 다음날인 2월26일이었다.
盧武鉉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을 받아 입국한 李鍾郁 사무총장은 신라호텔에 묵고 있었다. 그는 국빈 자격으로 취임식에 초청을 받았다. 그가 한국을 찾는 날은 1년에 두세 차례다. 체류 기간은 대개 1주일이 채 안 된다고 한다.
李鍾郁 사무총장과 인터뷰를 해본 기자들의 불만은 그의 私生活(사생활)과 관련된 부분이다. 그는 좀체 자신의 입으로는 「私的 영역」에 대해 말을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公人의 「公的 영역」뿐만 아니라 「私的 영역」에도 관심이 많은 우리 언론의 취향과 마찰을 빚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李鍾郁 사무총장에게는 라디오 생방송 전화 인터뷰 도중 사생활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전화를 끊어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까다롭다고 알려진 인터뷰이(interviewee)를 인터뷰하러 가는 길은 즐겁지 않았다. 게다가 WHO 한국 지부의 실무자로부터 2시간30분으로 예정된 인터뷰 시간이 너무 길다며 시간을 줄였으면 한다는 요청을 몇 차례 받은 터였다. 기자는 李鍾郁 사무총장이 인터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지레짐작했다.
「부담스러운」 그가 호텔 프런트 데스크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기자 일행 앞으로 다가왔다. 키 165cm, 몸무게 65kg. 작고 단단해 보였다.
「작지만 단단한」 그는 기자 일행을 자신이 묵고 있는 숙소로 안내했다. 그가 묵고 있는 신라호텔 1620호실은 미처 정리가 안 된 상태였다. 정리 안 된 숙소의 분위기가 오히려 기자를 편하게 했다. 책상 위에는 각종 메모지와 명함, 서류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지난 밤에도 숙소에서 일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는 표시가 역력했다.
1970年代의 순수함 견지
부담부터 털어버리겠다는 요량으로 생방송 도중 사생활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전화를 끊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부터 물었다. 李사무총장은 목젖이 얼핏 보일 만큼 크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실이 아닌가요?
『(웃음) 주간지에 그렇게 실렸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내가 전화를 탁 끊었다고 하는데 끊지는 않았어요. 집안 얘기를 물어봐서 사생활이라 얘기 안 하겠다고 대답은 했죠.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는 싫고 해서 대답을 그렇게 했는데 그게 우리 한국에서 볼 때는 드문 일이고 하니까 조금 와전됐던 것 같아요. 끊지는 않았어요. 끊었으면 생방송인데 방송 담당자가 얼마나 섭섭했겠어요. 나중에 들으니까 그 프로그램 PD가 당황했다고는 하데요』
―그럼 이번 기회에 그 얘기는 수정을 시켜드려야겠네요.
『(웃음) 괜찮아요. 수정은 무슨, 관계없어요. 대세에 지장 없는데, 뭐 (웃음)』
―총장님과 관련된 자료를 보니까 사생활과 관련된 이야기는 본인의 입으로는 절대 한 적이 없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이게 「인간탐험」이죠? 내가 제네바에 있으면서 月刊朝鮮을 읽어요. 나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져다 주고 해서 읽게 되는데, 그래서 인간탐험이라는 란도 알아요. 사적인 얘기가 좀 들어가더군요. 사적인 이야기가 들어가면 재미는 더 있겠지요. 그런데 내가 언론과 인터뷰하는 것은 공인이기 때문에 하는 거지 개인으로서 하는 건 아니잖아요. 솔직히 내가 사생활 얘기를 안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제 자랑」하는 게 싫기 때문이기도 해요.
사람들은 어떤 경향이 있느냐 하면은 자기를 깎아내리는 척하면서도 결국은 자기 자랑을 하더라구요. 개인적으로 무슨 숨길 게 있어서 그런 거는 아니죠』
인터뷰 중 李鍾郁 사무총장은 자주 웃었다. 과장의 몸짓으로 느껴지지 않는 그의 웃음에서는 여유가 묻어 나왔다. 깐깐하리라는 지레짐작과 달리 그는 솔직담백했고 상대방을 편하게 했다.
어쩌면 진한 紺色(감색) 양복 상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붉은색 바탕에 흰 물방울 무늬가 있는 넥타이의 촌스러움(기자만의 시각일 수도 있다)이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지도 몰랐다.
李사무총장의 「정리가 덜 된 듯한」 헤어 스타일이나 복장은 1970년대 末을 떠올리게 했다. 李사무총장은 서울大 의대를 졸업한 후 1979년에 미국 하와이大로 유학을 떠났고, 그 이후 줄곧 해외에서 생활했다. 「한국 사회 속에서 李사무총장의 心性(심성)은 1970년대의 순수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기자는 갖게 되었고 두 번에 걸쳐 7시간 동안 만나는 동안 그 생각은 굳어졌다.
7차 투표까지 간 사무총장 선거
WHO 사무총장은 32개 집행이사국 회의에서 선출된다. 오는 5월에 열리는 총회에서는 선출결과를 그대로 인준한다. 사무총장 취임식은 7월에 열린다. 임기는 5년이다. 이번 사무총장 선거는 7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다. 과반수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최하위 득표자를 탈락시키는 방법으로 진행되는 선거에서 李鍾郁 사무총장과 끝까지 경쟁을 벌인 후보는 벨기에 출신의 피터 피오트 UN 에이즈 프로그램 사무국장이었다.
5차, 6차 투표에서 16 대 16 同數(동수)가 나온 후 7차 투표에서 17 대 15로 李鍾郁 사무총장이 당선됐다. 7차 투표에서도 동률이 나오면 총장 선거는 앞서 탈락한 후보들까지 참여한 가운데 처음부터 다시 하게 돼 있었다.
―7차 투표까지 가서 17 대 15로 당선이 확정될 때까지 피를 말리는 심정이었겠습니다.
『피를 말리지는 않았고, 사실 나는 그때 투표가 진행될 때 WHO 본부에 있는 내 사무실에 있었어요. 직접 보지 않으니까 피를 말리는 심정은 아니었죠. 1차 투표에서 내가 12표를 얻고 그 다음 후보들이 6표, 6표, 5표, 3표를 얻어서 나는 예상대로 된다고 생각했죠』
―예상대로라면?
『아, 당선된다는 거죠. 우리는 투표 전에 당선될 거라고 확신했거든요. 그래서 1차 투표가 끝나고 나서 당선소감까지 준비했었어요(웃음). 사실 예상과 어긋나기는 했어요. 1차 투표에서 우리가 예상한 것은 32개 집행이사국 중 14표였거든요. 그래도 된다는 확신은 여전히 있었죠. 그런데 3차, 4차 투표를 거치고 두 사람만 남은 가운데 치러진 5차, 6차 투표에서 16 대 16, 16 대 16으로 나오는데 「아, 이거 방정맞게 너무 일찍 당선 소감을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들더라구요』
―16 대 16에서 막판에 한 표가 우리 쪽으로 온 건데 그 나라는 어느 나라입니까.
『모르겠는데, 지금 여러 가지 설이 있어요. 큰 나라가 했다는 설도 있고, 작은 나라가 했다는 설도 있고 그런데 주장하는 나라가(표를 주었다고) 여러 나라가 있어요(웃음). 우리가 판단하기에는 큰 나라가 한 것 같은데』
당당한 스웨덴 대표
―큰 나라라면 어떤 나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영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들인데, 영국은 절대 자기네가 어떤 표를 찍었다는 걸 얘기를 안 한다구요. 선거를 앞두고 많은 나라들이 「나는 너를 요번 선거에 지지한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영국은 외교 전통상 얘기를 안 해준다구요. 영국이냐, 미국이냐, 그런 얘기가 나온 거는 16 대 16 이렇게 계속 결과가 나오니까 7차 투표를 앞두고 미국 대표가 일어나더니 한국 쪽으로 와서는 「다시 투표를 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렇게 한마디를 하면서 영국 쪽으로 가서 얘기를 나누더랍니다. 우리로서는 그렇게 (상황이) 급하게 되면 미국을 쳐다보게 되니까(웃음). 그리고 나서 17 대 15로 나오니까 그런 판단을 하게 된 거죠』
―투표 후 다른 집행이사국 대표단은 저마다 李사무총장을 찍었다고 말했지만 스웨덴 같은 경우는 스스로 안 찍었다고 밝혔다면서요.
『당선된 날 저녁에 우리 대사관에서 리셉션을 열었어요. 鄭義溶(정의용) 제네바 대표부 대사가 준비를 했어요. 스웨덴 대표단도 리셉션에 왔는데 스웨덴 대표만이 나한테 와서 「우리는 당신을 안 찍었지만 앞으로 잘 해보자」 그러더라구요. 다른 나라 대표단은 사실 찍었는지 안 찍었는지 아리송한데도 나를 지지했다고 그러는 상태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아주 신선하게 들리더라구. 얼마나 당당해. 오히려 고맙더라구요』
―5년 전에도 사무총장에 도전하시려고 했었죠?
『네, 그랬어요』
―그때 못한 이유는 뭡니까.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사무총장인 브룬틀란트가 출마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이번에도 수상 출신이 후보로 나오기는 했지만 그때는 미국도 브룬틀란트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어요. 또 하나는 전임 사무총장이 일본인인 나카지마 히로시였다는 점이었어요. 같은 아시아에서 연속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게 우리 정부의 판단이었죠. WHO 사무총장 선거는 한 개인의 선거가 아니라 정부의 외교력이 필요한, 국가를 대표하는 선거라고 볼 수 있어요』
―당시에는 우리 정부에서 어렵다는 판단을 했었군요.
『그랬어요』
―이번에는 정부에서 된다고 판단했구요?
『(웃음) 처음부터 지지하는 입장은 아니었죠』
朴智元 실장의 도움
―정부에서는 이번에도 가능성이 없다고 본 겁니까.
『당선 가능성이 있다 없다보다는 처음에 정부 자체內에서 이번 선거에 우리가 나간다,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다는 거죠. 그런데 누구든지 국제기구 선거에 나갈 때 제일 어려운 것이 자기 정부의 표를 얻는 거라고 그래요. 자기 정부의 지지를 얻으면 그 다음에는 정부한테 공이 넘어가게 되고 외교력을 총동원하게 돼요. 국가가 개입하는 선거이기 때문에 해당 부처는 신중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출마 준비를 한 작년 여름 당시에는 외교부가 세계해양박람회 유치를 위해 전력할 때였으니까 우리 외교부로서는 여력도 없었어요』
―정부가 처음에 반대한 이유는 무업니까.
『5년 전에 아시아 사람인 나카지마가 사무총장을 했다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다음은 아프리카의 수상 출신이 후보로 나왔는데 그 사람이 국제적으로 지명도도 높고 다음 사무총장은 「아프리카 차례」라는 공감대도 형성돼 있다는 것이었어요. 해양박람회 유치 때문에 여력이 없다는 것도 한 이유였고요. 또 하나는 이번에 후보로 나온 사람들이 전부 총리나 장관들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장관이나 한번 한 다음에 할 생각을 하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더라구요』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지금은 결과적으로 맞았지만 그때 내 생각은 거의 모든 후보가 수상, 장관 이런 사람이니까 전문관료 출신이 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도 차별화되는 거 아니냐, 그렇게 나는 상품 차별화가 된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믿은 사람은 없고 그 당시에 내가 나가서 된다고 생각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 제일 큰 이유가 수상이다, 장관이다 하는 큰 직책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출마 결정 후 朴智元(박지원) 前 비서실장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면서요.
『힘썼죠. 당선되고 나서 아직 朴智元 실장을 만나지는 못했어요. 사무총장에 당선 후 라디오 인터뷰에서도 내가 「朴智元 실장이 많이 도와주셨다」 그렇게 얘기했는데, 나는 그때 朴실장하고는 생면부지였어요. 제네바에 있는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인연으로 잘 알고 지내던 朴庚緖(박경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한테 부탁을 했는데 그분이 朴실장을 만났을 때 「한번 힘을 써달라」 그렇게 부탁을 했다고 해요. 朴실장이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챙겼죠』
―文喜相(문희상) 대통령 비서실장은 경복高 동기동창인데 도움을 많이 주지 않았습니까.
『동기동창인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자기 코가 석 자였잖습니까. 盧대통령 당선 후에는 관심을 가지고 추이를 봤겠죠. 아무래도 그게 도움이 됐겠죠. 그런데 요새 그것도 오히려 그렇게 학연이 있고 그러니까 오히려 드러내 놓고 얘기하기도 그렇고, 부담스럽죠』
―WHO의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발표하셨는데요.
『지금 본부가 비대해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지난 5년 동안 본부에 임시직원까지 합쳐서 1000명이 늘었어요. 全세계적으로 임시직까지 합쳐서 8000명이에요. 몸이 비대해지면 새 양복을 맞추거나 몸을 줄이는 방법이 있잖아요? WHO는 몸무게를 줄이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양복을 새로 자꾸만 맞추는 형국이에요』
『나는 「사명감」을 믿지 않는다』
李鍾郁 사무총장은 말을 에둘러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눙치지도 않았다. 솔직담백한 스타일이었다. 꾸밈과 숨김없이 대답했다.
―1983년에 WHO에 들어갈 때부터 사무총장이 되겠다는 포부가 있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웃음) 솔직히 얘기해서 WHO에 들어갈 때는 취직 차원에서 들어갔는데 포부는 무슨 포부… 들어가고 나서 한 달 후에 제일 위의 사무총장이 내가 근무하는 곳을 방문했는데 굉장히 크고 하느님같이 보이더라구. 그러니까 그때 나도 저 사람같이 됐으면 좋겠다, 그런 정도였지』
―WHO로 가실 때 하와이大에 남아 달라는 권유를 받으셨죠.
『하와이大의 한 교수가 자기가 거기를 떠나니까 후임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라구요. 조교수를 하라고 했는데 WHO로 가는 게 더 수지가 맞았어. 봉급이 훨씬 더 많았고(웃음)…. 또 하나는 미국에서 대학 교수라는 직업은 굉장히 불안정해요. 처음에는 WHO에 들어와서 몇 년 있으면서 「어디 좋은 직장이 없는지 기회를 보자」 그런 생각으로 들어간 거죠』
―全세계를 질병으로부터 구하겠다는 사명감으로 WHO에 간 것은 아니었군요?
李鍾郁 사무총장은 호쾌하게 웃었다.
『나는 사명감을 갖고 뭐했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은 의심이 가요.(웃음) 나는 사명감 어쩌구하는 말들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인데, 살다 보니까 WHO 사무총장까지 됐지, 무슨 사명감은… (웃음) 나는 봉급도 더 좋았고, 다른 선택이 없었어요』
―사무총장에 당선된 후 불편한 건 없습니까.
『해외출장을 다니다 보면 여러 가지 儀典(의전)이 있는데 사무총장을 따라다닐 때 보면 내가 보기에는 儀典이 귀찮더라구요. 그런데 실제로 내가 되고 보니까 더 귀찮아요. 짐을 찾을 때도 내가 직접 찾으면 금방이면 되는데 儀典 때문에 시간이 더 걸려요. 아주 불편해요. 프라이버시가 없고 그러니까. 공항에 들어가고 나올 때 상점도 기웃거려 보고, 재미있는 것도 보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대단히 불편해요』
―그런 번거로움이 지금은 싫으시겠지만 점차 익숙해지겠죠.
李사무총장은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나는 익숙해지지는 않을 거예요. 여태까지도 여러 가지 그런 것을 엔조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냥 쓸데없이 위선적으로 겸손해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싫더라구요. 儀典 때문에 사무총장을 맞으러 온 공무원들을 보면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철저한 국익 추구
―李사무총장님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기구에 진출하는 게 국익에 어떤 도움이 됩니까.
『내가 20년 동안 국제기구에 있으면서 보면 모든 나라들이 국제기관에 자국민이 고위직에 올라가도록 굉장히 로비를 해요. 미국, 영국, 일본 할 거 없이 다 그래요. 국제기구에 자국인이 들어감으로써 여러 가지 국가 이익이 있다구요. 안에 자기네 사람이 있어야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알 수 있는 거고』
―선진국의 경우는 국제기구에 자국인을 보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합니까.
『일본의 예를 들어볼까요. 일본은 지금 공무원 해외파견법이라고 있어요. 교사든 의사든 외무부 공무원이든 국제기구에 들어가면 자기네 나라에서 받던 월급의 일정 퍼센트를 그 사람한테 계속 줍니다. 그렇게 생활보전을 해 줘요』
―우리는 그런 제도가 없습니까.
『우리는 없죠. 그래서 내가 우리도 공무원 해외파견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어요. 일본은 WHO에 취직을 시키고 돈을 더 주는 데 그치지 않아요. 자기네가 자발적 기여금 같은 걸 WHO에 내잖아요. 거기에는 조건이 따라요. 「이 돈은 이런 사업에 써 주었으면 좋겠다」는 식이죠. 그 사업의 책임자는 일본 사람이에요』
―인재든 돈이든 철저하게 국익을 위해 활용하는군요.
『철저해요. 돈을 국제기구에 내는 나라들은 국제기구에 돈을 내면서 自國의 이익도 동시에 추구하는 거죠. 물론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국익에 도움이 될 수밖에 없어요. 아프리카에서 전염병이 유행하고 미국이 그 전염병 퇴치를 위해 WHO에 돈을 냈다고 칩시다. 그렇게 돈을 냄으로써 전염병의 확산이 막아지면 미국도 이익이에요.
국제 간 왕래가 빈번한 상황에서 그 전염병이 미국까지 전염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거 아니에요? 자기 집 앞마당에서 벌어질 일을 미리 막으니까 국익에 도움이 되는 거지요. 가난한 나라의 필요와 부자 나라의 공포심을 연결하면 부자 나라로부터 돈이 나오게 돼 있지요』
WHO의 2년 예산 22억 달러 중에 절반은 자발적 기여금으로 채워진다. 기여금 가장 많이 내는 나라는 WHO 전체 예산의 25%를 분담하고 있는 미국이다. 재단으로는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출연해 만든 「빌 게이츠 재단」이 가장 많은 기여금을 내고 있다.
미국 과학잡지가 명명한 「백신의 황제」
李鍾郁 사무총장이 1983년에 WHO와 처음 인연을 맺었을 때의 직책은 WHO 남태평양 사무처 癩病(나병·한센병)퇴치팀장이었다. 1994년에는 백신면역국장을, 사무총장 당선자 신분인 지금까지는 결핵관리국장을 맡고 있다.
李사무총장은 백신면역국장 재직時인 1995년 소아마비 有病率(유병률)을 세계인구 1만 명당 1人 이하로 떨어뜨렸다. 이런 공적으로 그는 미국의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으로부터 「백신의 황제(Vaccine Czar)」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최전선에서 질병과의 전쟁을 직접 지휘한 경험을 갖고 있는 것이다.
―질병과 관련해 全세계가 당면한 현안은 무엇입니까.
『제일 큰 문제는 뭐니뭐니 해도 에이즈죠. 아프리카에만 2700만 명이 에이즈에 걸려 있고 어떤 나라는 인구의 半이 에이즈에 걸려 있다구요. 그러면 인구 전체가 걸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 나라 사람들이 性生活(성생활)하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문제지 언젠가는 다 걸리는 거 아니겠어요? 에이즈 때문에 인구가 줄어들고 있고 평균수명이 줄어들고 있어요.
내가 WHO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20여 년간 한 일이 질병관리예요. 나병, 소아마비, 결핵 그런 것들만 했기 때문에 내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하고 있어요. 소아마비 퇴치도 2005년으로 잡고 있지만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질병이 인위적으로 퇴치된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천연두 박멸이 그것이죠. 1978년에 그게 全세계에서 없어졌다고 해서 우리도 우두를 안 맞았어요. 그런 상태로 돼 있었는데, 지금 여러 나라에서 천연두균을 바이오테러리즘(Bioterrorism·세균전)에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다시 예방 주사도 맞고 그러는 일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그만큼 인위적으로 질병을 퇴치한다는 게 어려운 거예요』
―소아마비가 2005년이면 완전히 사라지는 겁니까.
『장담하기는 어렵죠. 소아마비는 지금 인도에 많이 남아 있어요. 全세계적으로 발생 케이스가 2700건 정도 남았어요. 퇴치를 했다고 하더라도 변종균이 남아 있을 수도 있고…』
북한에 결핵이 창궐
―결핵도 완전 퇴치가 어렵습니까.
『결핵은 퇴치될 수가 없죠. 전염병이거든요. 우리는 옛날에 결핵을 못살 때의 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지금 全세계적으로는 1년에 200만 명이 결핵으로 죽고 있다구요. 한 해에 800만 명의 新환자가 생기고 있고. 결핵균은 全세계 60억 인구 중에서 20억 인구가 보균을 하고 있다구요. 만성균을 항상 가지고 있는 거예요. 해마다 결핵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남한에만 4만 명이에요. 지금도 단일 전염병 중에는 제일 큰 병이에요』
李鍾郁 사무총장은 결핵국장 재직時 북한에 6만 명분의 결핵약을 공급했다. 결핵약 공급과 말라리아 퇴치를 위해 북한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북한 주민들에게 주로 많은 질병이 무엇입니까.
『결핵이 큰 문제예요. 결핵이나 말라리아 치료 같은 인도주의적인 문제는 가능하면 우리가 도와주어야 해요. 통일 이후를 대비해서도 남한이 도와주어야 해요. 북한 지역에 결핵이 창궐하면 남한에는 전염이 안 되겠어요?』
―의료 시설은 어떻습니까.
『우선 기초의약품 생산 시설이 열악하고 약이 없어요. 거기에 의사는 많아요. 의사는 많은데 약은 없으니까 의사가 많아도 소용이 없지요』
―북한의 결핵 등 질병 퇴치가 WHO의 지원만으로 충분합니까.
『결핵은 충분히 지원하고 있는데 다른 질병까지는 안 되죠』
―우리 사회는 의료 수준의 문제보다는 제도 문제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지역과 직장 의보의 통합, 의약 분업 등 제도를 놓고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데 바깥에서 볼 때 어떻습니까.
『나는 그런 논란은 좋은 거라고 봐요. 그게 다 내가 보기에는 합의를 도출해 내는 과정으로 보이죠』
―개인적으로 어느 쪽이 옳다는 의견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가지고 있죠. 큰 틀에서는 있는데, 의약분업 문제에서는 의약분업으로 가는 게 옳죠』
李鍾郁 사무총장과의 인터뷰는 어느새 약속된 시간인 2시간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시간이 없으신 것 같은데 빨리 하겠습니다.
李총장으로부터는 기대하지 못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다음에 한 번 더 하죠. 이왕 하면은 확실하게 해야지, 나는 성격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건 싫어요. 한 번 더 합시다』
한 번 더 시간을 내주겠다는 말을 마치고 몸을 뒤로 젖히는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혹시 앞으로 국내에서 정치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편안한 자세로 빙긋 웃으며 李사무총장이 대답했다.
『없어요. 만약 있다고 해도 희망은 다 없어졌지, 뭐. 앞으로 5년 임기를 잘 해서 또 사무총장에 연임된다면 10년인데, 그때는 나이도 있고 무슨 가능성이 있겠어요?』
―혹시 압니까. 앞으로 나이 드신 분의 지혜를 국가가 필요로 하는 시기가 오게 될지.
『아냐, 내가 이번 WHO 사무총장 선거에서 성공한 거는 20년 동안 한 분야에서 움직이지 않고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경력이 인정을 받은 것이고 다른 후보와 차별화가 됐기 때문에 당선된 거라고 생각해요. 정치도 20년 이상 한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어떻게 그 사람들을 이기겠어요』
가장 익숙한 말은 「한국어」
두 번째 만남은 3월1일에 코리아나 호텔 커피숍에서 이루어졌다. 짧은 국내 체류 기간을 이용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는 여장을 코리아나 호텔에 풀었다. 하루만 묵고 제네바로 돌아가는 그에게는 미국 등 WHO 회원국들을 순방해야 하는 고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약간 늦게 나타난 李사무총장에게는 일행이 있었다. 친동생들이었다. 李鍾旿(이종오·55) 前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민참여센터 본부장(계명大 교수)과 李鍾久(이종구·49) 성공회大 교수였다. 李총장은 동생들과의 점심 식사 때문에 시간이 좀 늦어졌다고 했다. 때마침 李총장의 바로 밑의 동생인 李鍾旿 교수는 당시 교육 부총리 후보로 언론에 거론되고 있었다.
―한 분은 WHO의 사무총장이시고 한 분은 교육부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걸 보면 李사무총장 집안을 신흥 名門家(명문가)라고 할 수 있겠네요.
李사무총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형제들이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어렵게 자랐지만 우리 집안은 신흥 名門家가 아니라 옛날부터 名門家예요.(웃음) 一石(일석) 李熙昇(이희승) 선생도 우리 집안이고』
李사무총장의 아버지(李明世·이명세)는 4·19 때 종로구청장을 지냈다.
李鍾郁 사무총장은 4남1녀 중 셋째로 위로 누님과 형님이 계시다. 고향이 서울인 그는 지금도 그가 자란 집의 주소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선 후 李총장은 편안하게 인터뷰하자며 자신의 숙소로 기자를 안내했다. 숙소에 들어서며 구두를 벗은 李사무총장은 슬리퍼를 신지 않았다. 양말만 신은 채 방을 오갔다. 그는 구두를 벗는 동시에 격식도 벗어 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몇 개 국어를 합니까.
『불어, 영어, 일본, 한국 말을 하죠』
―그 중에서 가장 익숙한 말은요.
『역시 한국 말이죠』
집 없는 사람
―퇴임 후에는 한국으로 오실 생각이십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도 모르겠어요. 나는 그런 공상도 해 봤어요. 우리나라 국민정서에 안 맞는 소리인지도 모르는데, 안 맞더라도 해야지 뭐(웃음). 나는 스위스에 10년 살면서 불란서에 밤낮 왔다 갔다 하고 그래서인지 은퇴하면 불란서에다 오래된 집을 구해서 유유자적하면서 책도 좀 보고, 하고 싶은 일도 하고, 겨울이면 스키타고 그러고 싶어요. 고국에 와서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겠다, 그런 거는 별로 생각 없고(웃음)』
―그래도 립서비스 차원에서라도 남은 여생은 국가에 대한 봉사로 보내고 싶다, 그런 말씀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웃음) 아니 그것뿐 아니라 후학을 기르고 어쩌고 그런 말을 하면 좋겠지만 그런 생각은 없어요. 나는 소시민적으로 아기자기한 삶을 살고 싶어요』
사회에 대한 봉사는 접고 소시민적으로 살고 싶다고는 하지만 젊은 시절 李鍾郁 사무총장은 많은 봉사활동을 했다. 대학 시절에는 경기도 안양의 나환자촌 마을인 「나자로 마을」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활동을 벌였고, 하와이大 대학원에서 전염병학 석사를 받은 후에는 南태평양 오지에서 의료봉사를 했다. WHO에 들어간 후에도 1994년에 제네바 본부로 갈 때까지 南태평양 나병퇴치팀장 등의 직함에서 알 수 있듯이 오지에서 진료활동을 벌였다.
―나자로 마을은 특수한 곳 아닙니까.
『문둥병이라면 무서운 병이었죠. 그런데 그게 의학적으로 알고 보면 그게 다른 거나 마찬가지의 전염병이라구요. 폐결핵에 걸리든지 그런 거나 마찬가지라구요. 폐결핵하고 나병의 균을 현미경으로 보면 구별이 안 돼요. 똑같아 보여요. 같은 패밀리의 균이죠. 사람들의 무지 때문에 나병 환자들이 차별을 받은 거예요.
그런 면에서 흥미가 있었어요. 그곳에서 붕대도 감아 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고 그런 일을 했어요.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내가 뭔가 남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가졌고, 누구나 그걸 필요로 하고 있다면 제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죠. 나는 나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이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아니까 그걸 하지, 진짜 위험하면 안 했을지도 모르죠. 사람들이 그 일을 기피하니까 나라도 했어야죠』
『나는 슈바이처를 꿈꾸지 않았다』
말을 잠시 중단한 상태에서 李사무총장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멋있잖아요. 남이 안 하고 기피하고 무서워하는 걸 하니까(웃음). 그 사람(나병 환자)들이 우러러본다구. 폼이 나잖아요(웃음)』
―혹시 슈바이처를 꿈꿨던 거는 아닙니까.
『노, 노, 노, 그렇지 않아요. 나는 나병으로 훌륭한 사람은 슈바이처보다도 하와이의 다미안 신부라고 생각해요. 그분은 나병을 치료하다가 나병에 걸려 죽었잖아요』
李鍾郁 사무총장의 부인은 레이코라는 일본인이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1979년에 결혼했다. 나자로 마을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두 사람은 만났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 충호(25)씨는 미국 코넬大에서 전기공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부인의 봉사하는 모습에 반하신 겁니까.
『아, 좋아 보였죠. 그 당시에는 나자로 마을 주변의 산 경치도 좋았고 모든 게 좋았어요. 그때 환자가 80명 정도가 있었는데 그 사람들도 좋았고 다 좋았어요』
―해외출장 다닐 때 부부동반으로 다니지 않습니까.
『와이프는 지금 건강 진단하러 일본에 가 있어요. 출장 다닐 때 부부가 같이 다니는 건 문제가 있어요. 첫째, 출장비를 누가 대요. 출장비는 나만 나오는데 와이프한테 체류비니, 숙박비니 이런 걸 쓰면 우리는 뭘 먹고 살아요(웃음)』
대한민국 사람일 수밖에 없는 李鍾郁 사무총장은 인터뷰를 끝내고 출장 중에 쌓인 빨랫감을 친척집에서 세탁해 주기로 했다면서 빨랫감을 챙기기 시작했다. 기자는 오랜만에 「뒷모습까지 당당한」 대한민국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에게는 자기 소유의 집이 全세계 어디에도 없다.●
입력 : 2006-05-23, 11:07 조회 : 318
출처 :
인터뷰/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李鍾郁
- 김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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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5-23, 17:21











